제2차 상하이 사변 (r20210301판)

 


제2차 상하이 사변
중일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kjclub.com/200908230302.jpg
상하이 전투 전황도
날짜
1937년 8월 13일 ~ 1937년 11월 12일
장소
중화민국 상하이시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육군기.png 류샹
파일:대만 육군기.png 장즈중
파일:대만 육군기.png 장파쿠이
파일:대만 육군기.png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파일:대만 육군기.png 천청
파일:대만 육군기.png 슝스후이
파일:대만 육군기.png 쉐웨
파일:중화민국 해군기.png 천샤오콴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하세가와 키요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마쓰이 이와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야나가와 헤이스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후지타 스스무
결과
일본군의 승리
영향
상하이 함락, 중화민국 중앙군의 붕괴.
병력
7개 집단군, 85개 사단 70~80만
9개 사단 30만
피해규모
최대 25만명 전사, 부상
4만명 전사, 부상

1. 소개
2. 배경
2.1. 중국 측의 전략적 의도
2.1.1. 중화민국의 전쟁계획
2.1.2. 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의 의도
2.2. 일본 측의 전략적 의도
2.2.1. 해군의 폭주
2.2.2. 육군의 폭주
3. 전개
3.1. 전투의 시작
3.2. 장제스의 증파 결정
3.4. 일본군의 2차 증파와 다창전 전투
3.5. 일본군의 3차 증파와 중국의 총력전
3.7. 항저우 만 상륙작전
4. 결과
5. 참고문헌
6. 매체에서
7. 관련문서


1. 소개


1937년 8월 13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총 3개월에 걸쳐 진행된 중일 양국의 전투. 쌍방 합쳐 백만명 가량의 대병력이 투입된 전투이며 만주사변 정도의 국지전으로 여겨졌던 중일전쟁이 양국의 운명을 건 대전쟁으로 확대된 계기이다. 물론 상하이를 일본군이 침공하지 않았어도 중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기에 만주사변이나 열하사변처럼 지리멸렬하게 끝나진 않았겠지만.


2. 배경


1937년 7월까지만 해도 교전이 벌어진 곳은 베이핑과 톈진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 지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도발을 감행했던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일본이 같은 판단을 하지 않을까 우려, 노구교 사건 발생 직후인 7월 13일 상하이 시장 대리 위훙쥔과 경호사령 양호에게 상하이 중심의 방어진지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보고하도록 했다. 상하이 시장 위훙쥔은 주력부대 주둔 지역과 상하이 중심지의 제1기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렇듯 본격적으로 전선이 확대되기 전부터 상하이의 긴장도는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는 상하이가 국민정부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이며 국민정부 항전역량의 핵심적인 원동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2.1. 중국 측의 전략적 의도



2.1.1. 중화민국의 전쟁계획


1935년 3월 중국에 부임했던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그해 8월 20일 장제스에게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이란 것을 제출하였다. 팔켄하우젠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의 전략적 상황은 일단 군사상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면 화북은 즉각적인 위험에 처한다. 만약 싸우지 않고 화북을 포기한다면, 적은 장강 북안까지 신속히 횡단하게 되어 중요한 농해 철도 및 주요 도시 등을 시작으로 곧바로 최전방의 전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황하 방면의 방어선에 대해서는 적이 산동 방면으로 도하하여 공격 기세를 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 해상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는 곳은 장강이다. 적이 만약 중국의 제일 중요한 중심점을 제압하고 곧바로 우한 일대에 이르게 된다면, 중국 국방력은 이미 제일 중요한 근거지를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군은) 곧바로 내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중국은 양분될 것이다.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

팔켄하우젠은 시국에 대해 냉정히 분석하여 일본과 직접 현대전을 벌여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외국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도 어려우며 외국의 원조는 중국이 전 역량을 다해 전면적인 저항을 하여 국토를 보존한 상태에서나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국토 보존을 위한 전면저항을 위해서는 내륙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내선전략을 통해 지구전, 지연전을 펼쳐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팔켄하우젠의 조언을 바탕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1936년 민국 25년도 국방계획 초안을 작성, 다음해인 1937년 1월에는 더욱 자세한 민국 26년도 작전계획을 작성했다. 중국군 참모본부는 일본의 작전 의도를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일본군은 베이핑-톈진을 점령한 이후, 평한-진포 두 철도를 따라 정저우-지난-쉬저우로 진출하여 중국군의 주력을 격멸하려 하거나, 서북방향으로 중국군을 압박하여 봉쇄하려 할 것이다. 조공작전으로는 장가구-쑤이위안-하투-대동 및 베이핑을 경유, 바오딩, 스좌장을 지나 타이위안으로 진격하여 산서를 포위할 것이다. 또한 일본군은 절대적 해상권을 이용하여 교주만-해주 등에 상륙하여 황하 북안에 작전 중인 중국군을 측면에서 위협할 것이다.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중국에서 17개 상비사단과 17개 예비사단을 포함, 총 34개 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할 것이며, 병력은 대략 60만 명을 사용할 것이다. 일본은 해상통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중국 연안에 배치된 제3함대를 제외하고는 본토의 주력함대를 즉각 중국전장으로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군은 약 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에서 소련, 미국, 영국 등 서구세력의 공군력 때문에 중국전장에 투입하지 못하고 자위를 위해 예비대로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주력 폭격기들은 중국의 중요도시와 중국 공군기지 및 주요 교통선과 철도를 폭격하여 육군 작전과 협조할 것이다.
민국 26년 작전계획

중일전쟁의 초기전개는 중화민국 참모본부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중화민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일본이 중국만을 침략한 갑안과 일본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을안을 입안했는데 갑안에서 중국군의 단계적인 퇴각을, 을안은 일본군 저지 이후의 만주 진공을 상정한 것이었다. 이 계획을 통해 중국은 일본이 침략할 경우 즉각 상하이의 일본군 주둔군을 섬멸하기로 계획한 바가 있었다.


2.1.2. 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의 의도


한편 상하이로의 전장 확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성상, 장웨이궈 등 대만의 연구자들은 상하이 전장의 확대는 중국의 의도된 전략으로 일본군에게 유리한 북남 작전방향을 일본군에게 불리한 동서 작전방향으로 돌려놓아 공간으로 시간을 벌려한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여자도, 장헌문 등 중국 연구자들은 화북에 투입하기로 한 부대들이 상하이에 투입됨으로 화북 전선이 약해졌고 산서 전선의 붕괴 등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상하이 전투의 중화민국 전략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중국 측 연구자들의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 화북으로 가야 할 지원이 줄어들면서 화북 전선이 실제로 붕괴했고 일부 평가에서는 장제스가 상하이에 집중함으로 화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시인했다거나, 장제스가 화북을 포기했다는 식의 극단적인 평가도 하고 있다. 기세찬 교수는 대만 연구를 비판하면서 장제스의 의도는 중화민국이 어차피 상하이에서의 전투를 피할 수 없으니 상하이 전투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화북에서의 압력을 줄여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의 경우, 장제스가 상하이 전선에 집중한 이유를 국제적인 이목이 집중되는 대도시에서 저항함으로 민족적 희망에 부응하고 국민들에게 심리적 보상을 주며 국제적 지원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자신들의 화력을 잘 활용할 수 없는 시가전을 강요함으로 일본군의 피해를 이끌어내 일본군의 전투 의지를 꺾고 승산을 올려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너선 펜비는 언론인이지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며 군사적인 분석이나 일본측 전략의도는 살펴보지 못했다는 비판[1]을 피할 수는 없으므로 한가지 참고사항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지은 장융과 존 핼리데이의 경우, 상하이의 사령관 장즈중이 사실 공산당 비밀공작원이라서 중화민국의 심장부인 난징-상하이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유도하여 중화민국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장즈중이 장제스에게 줄곧 상하이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종용했으며 훙챠오 공항 사건을 과장, 조작하여 전면전으로 이끌어나갔다는 것이다. 장융의 저서가 학술적으로 큰 비판을 면치 못했다는 것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라 하겠다.[2]


2.2. 일본 측의 전략적 의도



2.2.1. 해군의 폭주


"호전적으로 흥분한 해군중앙의 움직임에 직면하여 해군도 점점 포악해져간다."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이타로, 이시이 이타로 일기 8월 13일자.


한편 중화민국의 논의와는 별개로 일본에선 중화민국을 남북으로 협공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난징-상하이 공격 계획이 논의되고 있었다. 원래 육군과 중앙정부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적 해결을 원했으나 해군은 군령부에서 책정한 '대지나작전 계획내안'에 의거하여 전면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7월 16일 일본 제3함대 사령관 하세가와 기요시가 '대지나작전 용병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무력을 사용한 일지관계[3]의 현상 타개 대책은 지나 응징. 즉 현 지나 중앙세력의 굴복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 전역국한 작전은 적의 병력 집중을 도와, 작전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다. (...) 적의 급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상하이와 난징을 제압하는 것이 급선무다.
대지나작전 용병에 관한 의견

이를 위해 하세가와 사령관은 육군 5개 사단을 상하이에 상륙시켜 점령, 이후 난징까지 진격하자는 입장이었고 참모본부는 7월 29일, 이러한 해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하이-칭다오를 다음 공략 목표로 삼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여기서 얘기를 더 거슬러올라가면, 당시 일본군 내부에는 소련을 주적국으로 삼자는 육군의 북진론과 영미를 가상적국으로 삼자는 해군의 남진론이 대치하고 있었다. 결국 둘 다 적으로 돌렸다 제국 국방방침에는 육군의 전략이 채택되어 소련을 주적국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나 하세가와 기요시를 비롯한 해군의 강경파들은 제국 국방방침 개정을 외치고 있었다. 해군은 1936년 중일 전면 전쟁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이미 대중 임전태세를 다지고 있었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과 중국 연안 봉쇄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중국 해군기지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적극적 전면작전을 실시, 해군의 실적을 일본국민들에게 과시하여 해군 예산을 늘려 군비를 확장하여 미해군에 대항할 수 있는 군세를 갖추려 했다.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은 항공모함의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던 항공전력을 독립시키고 항공군비 확충, 전력 개발 등을 꾀하며 항공주병론을 제기, 전함주병,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파와 대치하였는데 중일전쟁은 항공주병론자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중요한 실험장이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1932년 제1항공전대사령관 시절부터 "융통성없는 철포옥[4]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항공이 실적을 보여주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해왔는데 그가 해군 차관이 된 상황에서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해군은 당장 중국에 대한 대규모 항공 작전에 돌입하여 상하이, 난징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었다.


2.2.2. 육군의 폭주


물론 육군도 얌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노구교 사건 발생 직후 무토 아키라를 비롯한 확대파들은 "유쾌한 일이 일어났다"고 외치면서 즉각 확전을 기도했다. 이시와라 간지 등은 대소련 군비를 완성해 국방을 다질 때이며 국민정부는 이미 과거의 오합지졸 중국이 아니라고 확전에 반대했으나 무토 등은 상관인 이시와라의 판단에 정면으로 저항,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나는 통일 불가능한 분열적 약국으로 일본이 강경한 태도를 내보이면 즉시 굴종한다. 이때 지나를 굴복시켜 대체로 북지나 5성을 일본의 세력 하에 넣어 만주와 더불어 대 소련 전략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구교 사건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 바랄 나위 없는 좋은 기회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건은 낙관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거기에는 북지나에 병력을 증파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잃지 않고 일격을 더한다. 이것에 의해서만이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 회상록

결국 이시와라는 확대파들의 하극상 끝에 쫓겨났는데 과거 이시와라 간지가 만주사변이라는 초대형 하극상으로 영전했던 걸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었다. 결국 육군의 중견층은 무토 아키라의 확대론을 내세우며 역시 폭주하게 된다.


3. 전개




상하이에서의 중국과 일본의 충돌 소식을 전하는 Brtish Pathé. 공동조계의 방비를 강화하는 열강들의 방위대 및 전투 지역의 폐허들, 탈출하는 처참한 모습의 중국인 피난민들 및 상하이로 증원되는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전투를 벌이는 모습, 우쑹 요새를 포격하는 일본 해군, 사열을 받는 장제스 총통, 일치단결하여 병력을 집결하는 국민혁명군, 사열을 받는 히로히토 천황의 모습, 만주로 집결하는 일본군의 모습 등이 담겼다.


3.1. 전투의 시작


8월 9일, 일본 해군특별육전대 소속 오오야마 이사오 중위가 훙차오 공항에 난입하려다가 사살되는 훙차오 공항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측은 이를 트집잡아 중국군 보안대 철수와 공동조사를 요구했지만 중국측은 묵살하고 오히려 상하이 방어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상하이를 공격하기로 결정, 8월 13일 오전 9시 15분, 일본 해군 육전대 1개 분대가 횡병로, 보흥로의 중국군 기지에 도발을 감행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20분 만에 끝났으나 같은날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은 팔자교, 천통암, 보흥로, 보산로 등에서 일제히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하여 자베이를 비롯한 상하이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또한 황포강의 일본 군함도 포격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부터를 상하이 전투의 시작으로 본다. 일본군은 5천명이고 중국군은 5만명으로 수적으로 중국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선공하였음에도 중국군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는데다가 무장상태도 좋아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장제스는 이런 수적 우세와 전 군사고문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건설한 젝트 라인을 믿고 일본 증원군이 상하이에 도착하기까지의 10일 간의 여유를 활용, 이 안에 상하이의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고문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젝트 라인이 너무 구식인데다가 미완성이라 일본군에게 역포위당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상하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반격하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장제스는 오후 2시, 상하이 주둔군을 9집단군으로 개편하고 상하이와 항저우의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지시하였으며 8월 13일 밤 장즈중을 제9집단군 사령관으로 장파쿠이를 제8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기갑부대, 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어선과 상선을 자침시켜 양쯔강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 해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8월 14일 87사단이 일본인 구락부와 일본해군 연병장을 공격했으며 88사단이 팔자교에서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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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14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mbing_outside_the_Palace_Hotel.jpg
1937년 8월 14일자 중국 상하이 시가지

8월 14일 오전 7시, 미국인 고문 클레어 셰놀트의 지휘를 받는 중국 공군이 일본 해군 육상 기지와 물자 직접장, 일본군 3함대 함선들을 폭격했지만 악천후와 기술 미숙으로 큰 효과는 보지 못했고 중국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다. 해안가의 포대와 중국 해군 군함들도 포격을 가했지만 성과는 신통찮았다. 같은날[5] 오후 5시, 하남성 주가구에서 항저우로 비행하던 가오즈항 대대장 휘하 제4대대 17중대 소속 27대의 P-26 전투기가 일본 해군 96식 육상공격기 16대[6]와 조우, 한대의 피해도 없이 6대를 격추시켰다.[7]

일본측 역시 반격에 나서 타이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출격하여 난징, 항저우, 광더, 난창, 우한을 폭격했다. 이 폭격은 해군의 실적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 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원래 목표는 나가사키의 기사라즈 항공대에 의한 난징에 대한 집중 공격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인하여 타이완 항공기들이 출격한 것이다. 다음날부턴 난징 도양폭격이 개시되어 난징이 집중타격당했다. 거기에 일본 해군 항공모함 가가, 류조, 호쇼 등이 도착하여 함재기들이 가세함으로 많은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공군도 반격하여 8월 21일 96식 육상항공기 4기를 격추시키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타이완까지 날아가 일본군 비행장 등에 폭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폭격기의 호위를 등한시하는 전술을 고집했기 때문에 중국 공군의 반격에 상당히 큰 피해를 입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습이 매우 심하여 공황에 빠진 상하이 시민들이 외국인 조계지로 몰려들었고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피해가 속출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자 로즈 파머는 다음과 같이 상하이를 묘사했다.

고성능 폭약의 황색 연기가 지나간 후 난징 로는 공포의 현장을 드러냈다. 불타는 차량에서 치솟는 화염이 차 안에 가득 찬 탑승자들의 시체를 재로 만들고 있었다. 후이중 호텔과 팰리스 호텔의 현관 및 부속 건물에는 괴상망측한 인파가 몰렸다. 몸을 오므린 채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파란색 작업복은 빨갛게 변한 채였다. 머리, 팔, 다리가 갈기갈기 찢겨 엉망진창으로 멀리 흩어져 있었고 (...) 시가 전차 맞은 편에는 키가 큰 유럽인이 있었는데, 하얀 플란넬 양복은 물든 곳 없이 깨끗했지만 그의 두개골은 빠개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728명이 죽었다고 공포했고 일본군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8월 15일 일본 정부는 "지나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또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이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8월 15일 여명, 중국군은 독일식 87, 88사단을 중심으로 반격에 돌입했다. 거기에 15사단, 36사단, 115사단 등 3개 사단이 증원되어 7만명의 중국군은 바쯔차오를 점령한 일본군을 축출하고 거세게 밀어붙여 일본 해군 훈련장을 비롯한 일본군의 주요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8월 17일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다로가 육전대가 며칠도 더 버티지 못할 것이라 우려를 표명했고 8월 1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단이 격화되는 전투 양상을 우려하여 전투 중지를 요청했지만 중일 양국이 거부했다. 중국은 만약 조계지에 일본군 고사포가 설치되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대표단에게 경고했다.

같은 날 장즈중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 전투를 독려했고 87사단은 양수포의 공장 지대의 일본군 방어선을 분쇄하였으며 36사단도 황푸 강 기슭에서 부두로 일본군을 밀어냈다. 이때 섣부르게 전진하던 중국군 경전차대가 일본군의 대전차포 사격에 격파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좁은 구역에 몰아넣었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중화기 결핍으로 인한 화력 부족으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방어진지를 잘 갖추어놓은 상태였으며 육전재 자체에는 중화기가 빈약했으나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으로 화력면에서 매우 우세했다. 19일에 중국군은 훙커우-양수포 선까지 진격했으나 앞서 언급한 화력의 부족과 강력한 일본 해군의 엄호로 인해 21일의 총공세가 실패한 이후로 중국군의 진격은 끝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상당한 선전에 장제스 역시 크게 고무되어 "상하이 전투는 매우 순조롭다. (...) 영국의 제안이 실현되는 것을 계기로 일본을 상하이에서 철퇴시키고, 우리 경제의 지반을 회복하는 것도 오늘의 전황으로 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라고 일기에 썼다.


3.2. 장제스의 증파 결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hai1937KMT_machine_gun_nest.jpg
상하이의 국민혁명군의 기관총 진지

한편 장제스는 8월 16일 장시성 주석 슝스후이와 신임 군정부장 천청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정확한 전황을 알아올 것을 지시했다. 천청과 슝스후이는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기는 했으나 중국군의 병력이 이들을 섬멸하기는 충분치 않으며 예비대와 화력의 부족으로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20일에 난징에 돌아온 두 사람의 결론은 달랐다. 슝스후이는 열세로 인하여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다고 했으나 천청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공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를 올렸다.

"공격할 수 있느냐 공격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격이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의 문제다. 적이 남구를 공격하려 하고 동시에 우리 또한 반드시 방어하고자 하니 화북에서 전투는 확대되어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적이 화북에서 우세해진다면 반드시 그 기동부대를 이용, 평한성을 따라 남하하여 곧바로 우한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우한을 방어하지 못한다면 중국전장은 종심이 2개로 끊어져 우리가 불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송호전장을 확대하여 적을 송호전장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민국 25년의 예정된 전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장제스는 흥분하여 "공격! 공격! 반드시 공격해야지!"라고 외쳤고 천청은 "만약 공격해야 한다면 상하이로 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건의했다. 장제스는 이를 수락, 화북으로 가야 할 주력부대들을 포함한 중앙군을 상하이로 급파했다.[8] 8월 20일 강소성 남부에서 절강성을 포함하는 제3전구가 수립되어 장제스가 직접 전구 사령장관에 앉았고 전쟁 계획이 수립되었다. 한편 8월 21일 중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3백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아들였다. 또한 1억 달러의 차관과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들도 지원받았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하였다.

8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중일 양국에 공식성명을 통해 정전을 호소했지만 중국에 대한 도의적 지지 이상은 표명하지 않았다.


3.3. 우쑹 전투


"중국인들은 펜으로 쓸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찬미를 바쳐야 하는 용기로, 믿을 수 없는 고초에 맞서고 있다."

종군기자 헤셀 틸트먼


8월 23일 우쑹 해안가에 일본군 증원군 2개 사단을 태운 일본군 함대가 나타났다. 일본군 3사단은 우쑹만의 오송잔교에, 11사단은 우쑹 서북 15킬로미터 지점의 촨사전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했다. 상하이 이북을 포위 점령하는 것이 일본군 중앙통수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쑹 지역은 장제스가 1935년부터 군사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콘크리트 벙커와 기관총 진지로 이루어진 매우 촘촘한 방어선을 꾸려놓은 곳이었다. 거기에 지뢰밭, 철조망까지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변에 내린 일본군 3사단 병사들은 중국군의 집중 사격에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일본군은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격퇴당했다. 3주가 지난 후 우쑹 해안가에 제일 먼저 상륙한 3사단은 96%가 전투불능에 빠지는 등 지리멸렬했고 경악한 3사단장 후지타 스스무 중장이 후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후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일본군 특성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중국군의 저항이 격렬했던 셈이다. 8월 31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겨우 우쑹 포대를 점령했지만 불과 3킬로미터 전진했다.

11사단 역시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6일 동안 겨우 5킬로 전진한 그들은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절망적인 자살 돌격이 이어져 한달 만에야 겨우 상하이 남쪽의 뤄뎬전까지 전진했지만 거기에도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9월 28일이 되어서야 뤄뎬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의 피해도 50%에 달했지만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상하이로 퇴각하는 규율을 보여주었다. 3사단과 11사단은 1주일만에 도합 4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 1만명을 잃으면서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이런 분전을 참관한 팔켄하우젠은 8월 29일 "비록 완전히 적을 축출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곳곳에서 수비를 한다면 적이 저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평가를 내놓았다.[9]

9월 6일 중국군은 총공격을 정지하고 지구항전 태세로 전환, 상하이 시가지와 난징 사수를 목표로 제2기 작전에 돌입했다. 9월 17일 나점-강만-묘행진 선으로 후퇴한 중국군은 21일에 3작전군으로 재편성, 우익 작전군 사령관에 장파쿠이, 중앙 작전군 사령관에 주사오량, 좌익 작전군 사령관에 천청을 임명하고 저항선을 새로 구축했다.


3.4. 일본군의 2차 증파와 다창전 전투


일본군은 상하이의 중국군이 지금껏 만주, 화북, 산동 등지에서 상대했던 허약한 중국군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전투력에 놀란 마쓰이 이와네 장군은 본국에 증원요청을 보냈다. 일본군 중앙통수부는 2차 증파를 결정, 1937년 9월 7일 타이완에 주둔한 시게후지 지대를, 9월 10일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제5여단을 본토에서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군들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경험이 부족했고 무기도 빈약했으며 군기 이완이 심각했다. 이들이 9월 18일 도착하자 마쓰이 사령관은 중국군 방어의 중핵인 다창전 부근을 목표로, 우측에서 9사단, 3사단, 101사단을 배치하고 13사단을 예비대로 두어 10월 8일부터 쑤저우 강를 향한 총공격을 지시했다. 다창전만 점령하면 상하이에서 포위된 해군 육전대를 구출할 수 있음은 물론 쑤저우강까지 남하해 중국군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뤄뎬전에서 다창전 사이에도 역시나 매우 견고한 중국군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우쑹과 뤄뎬전을 점령하면서 치러야 했던 혈투를 또 치러야 했다. 중국군은 기관총과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운용하면서 일본군에 출혈을 강요했고 잘 짜여진 방어선을 통해 일본군에게 일부 구간을 뺏겨도 순식간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방어선이 뚫려도 중국군은 신속한 후퇴를 통한 전선의 재정비가 가능했기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일에는 21집단군이 투입되어 총반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군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밀집된 진형을 취해 일본군의 집중 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진 일본군이 화력면에서 우세하여 일본군은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전세가 교착에 빠지자 일본군은 중포 120문을 집결해 엄청난 포화를 끼얹었고 다시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했다. 그래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그동안 재미를 많이 본 무기인 독가스를 뿌렸다. 결국 중국군은 공세는 무리라는 것을 인정, 23일 공격부대를 철수시켰고 25일에는 다창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은 이로써 쑤저우 강 남안으로 철수했다. 이 와중인 10월 22일 영국대사 휴게센과 함께 차를 타고 상하이를 위문방문했던 쑹메이링이 일본군 항공기들의 집중공격으로 차가 전복되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10]


3.5. 일본군의 3차 증파와 중국의 총력전


10월 20일 일본군 중앙통수부는 교착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18사단과 24사단의 증파를 결정했으며 화북에서 6사단을 호출하여 이들 3개 사단을 묶어 새로 10군을 편성, 야나가와 헤이스케를 사령관으로 삼아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하게 하고 16사단을 백묘강으로 상륙시켜 중국군을 3방향에서 포위 섬멸하려고 했다.

한편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이 10만명으로 늘자 장제스 역시 증원을 결정, 8,9,10,15,19,21 6개 집단군 소속 50여개 사단을 상하이로 증파했다. 화중, 화남의 모든 군대들이 상하이로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 10월 말에 7개 집단군 85개 사단, 70~80만 대군이 집결했다. 장제스가 정성껏 가꾸어 온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군 전체의 4할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엄청난 부대들을 무계획적으로 상하이에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병사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 몰려서 연락, 보급, 지휘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전투 효율이 떨어졌다. 일본군 전함의 함포 사격 한방에 일개 대대가 전멸하는 일도 발생했다. 10월 20일까지 중국군은 13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공군도 일본군의 항공모함 카가가 도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보잘것없었던 해군은 양쯔강 하류에 일본 해군이 진입하는 것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9월 20일 양쯔강 입구의 장인에서 중국 해군은 일본 항공대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멸했고 극소수의 함선만이 살아 난징과 우한으로 퇴각했다. 자세한 것은 밑의 장인 전투 문단 참조.

10월 25일 다창전이 함락되었단 소식에 상하이의 육전대도 반격에 나섰다. 결국 장제스는 주력 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10월 26일 전병력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10월 26일 심야, 88사단장 손원량은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사진원에게 사행창고를 수비하여 일본군을 유인시켜 공격 속도를 둔화할 것을 명령했다. 27일 오전 11시 사진원은 양서부 휘하의 제1대대 800명을 창고에 집결시켜 방비를 강화했다. 오후 2시에 사행창고의 결사대는 일본군을 유인하여 80명의 피해를 주었다. 이에 분노한 일본군은 사흘 밤낮동안 야포, 전차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가했으나 중국군은 콘크리트 벽들이 무너져내리는 맹렬한 공격에도 밀가루와 콩을 담은 자루를 쌓아올리며 저항했다. 또한 옥상에서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일일이 손으로 던지며 저항한 결과 일본군 200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전차 3대를 파괴하고 4대를 전복시켰다. 10월 28일 새벽에는 걸스카우트 단원인 18세의 양혜민이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 안으로 난입, 사행창고 옥상에 4미터 짜리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였다. 이 청천백일기는 28일 시점에서 상하이에 게양된 유일한 청천백일기였다.[11]

10월 30일, 일본군의 포화가 조계지로 퍼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군이 중재에 나서 사진원 부대에게 공동조계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0월 31일에서 1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사진원 부대는 오송강을 건너 공동조계로 철수했는데 이때까지 중국군 전사자는 고작 37명이었고 부상자까지 합쳐도 50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원래 사진원 부대는 내륙의 중화민국 지배지로 철수하도록 약조가 되어 있었으나 일본군의 방해 공작으로 조계측이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사진원 부대는 조계지에 억류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조계지를 점령하였고 이들은 조계지의 중재를 받아 일본군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강제노역을 부여하여 혹독하게 보복했고 1~200명 정도만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사령관 사진원은 1942년 4월 24일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사람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영웅적인 분투는 중국인들의 사기를 고취하였으며 이들의 일화는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훗날 1976년에는 이 사행창고 전투를 배경으로 한 '팔백장사'라는 영화가 대만에서 개봉되었고[12] 44년 뒤 2020년에 중국에서도 '800' 이라는 이름으로 사행창고 전투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었다.[13]

어쨌거나 상하이 북정거장과 자베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6일 바쯔차오를 점령함으로 상하이를 거의 손에 넣었고 전 중국군은 상하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10월 31일 일본군은 쑤저우 강을 도하해 중국군을 쳤지만 수십만의 중국군을 쉽게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중국군 역시 예의 지나친 밀집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3.6. 장인 전투


양쯔강 하류 장인에서는 일본 해군의 병력이 양쯔강을 통해 난징으로 가는 것을 막기위한 중화민국 해군의 양쯔강 봉쇄와 공방전이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장인 전투 문서 참조.


3.7. 항저우 만 상륙작전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 예하 6사단과 18사단이 공중 엄호를 받으며 진산웨이(금산위)에 상륙했다. 중국군이 이들의 상륙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매우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10군은 일본군 백만 항저우 만 상륙이란 애드벌룬까지 크게 띄우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했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일찍이 바이충시가 상하이를 포기하고 젝트 라인으로 철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바가 있으나 장제스는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중국군은 항저우만의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급파했으나 11월 8일 67군의 군장 우커런 중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렸다. 장제스와 중국군 3전구 지휘부는 11월 8일 야간에 상하이 방어군에게 방어선을 쑤저우-복산 라인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사실상 전국 퇴각 명령이었으나 이미 지치고 소모된 중국군은 너무 밀집된 상황이라 제대로 된 철수 계획도 없이 사실상 걸어 탈출해야 했기 때문에 큰 난관에 부닥쳤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일본군의 맹공에 중국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특히 항공 폭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9집단군과 19집단군의 피해가 컸다. 거기에 일본군이 몰려온단 소식에 동요한 중국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다.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백묘구)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했다.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4. 결과



상하이 전투 막바지의 모습.

군벌군 위주였던 화북 전선과 다르게 그동안 장제스가 애지중지 하며 육성한 독일식 훈련을 받은 중앙군의 진가가 발휘되던 전투였다,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경기관총들이 '뚜따따따' 하고 타자기 소리를 냈다면 중국군 경기관총들은 '펑펑펑펑' 하는 크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독일의 방공주의 정책으로 군사 고문단과 무장을 받아 이를 위주로 무장한 독일식 사단인 87, 88사단은 훈련도와 개인 무장으로 따지면 일본군보다 나았다. 하지만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 있던 분열과 북벌전쟁을 치루며 군벌들과 싸우고 그 후에 반장전쟁과 공산당 탄압, 시안 사건을 거치며 장제스는 누구도 믿지않고 자신 스스로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로 인해서 장제스의 폭주에 가까운 지휘와 무능했던 국민당군 장교들의 뻘짓으로 그 엘리트 사단이 3개월 만에 상하이에서 반 정도가 날아가버린다. 젝트라인이 있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 할 줄을 몰라 수도 난징이 상하이 함락 이후 짧은 시간 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된다. 상하이-난징은 평야지대고 또 양쯔강 바로 옆에 있어 난징은 군사적으로 몹시 취약했다. 중국군의 피해는 전사자만 25만에 달했으며 부상자를 합치면 40만명을 잃었다. 무러 73개 사단이 무력화되었고 이로 인해 난징을 사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난징은 상하이 함락 불과 한달 후인 12월 13일 함락되고 난징에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도 녹록치 않은 전투였다. 최소한 911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를 합쳐 4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는데 빠르게는 2주, 길어야 5개월이면 중국의 항복을 받아낸다고 자랑하던 일본군은 3개월 만에야 겨우 상하이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파견된 일본군의 절반 이상이 질병과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지칠대로 지친 일본군의 군기이완은 심각해진 수준이었으며 장교진의 부재 등 갑작스럽게 폭증한 일본군의 운용 측면에서도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마오쩌둥이나 중화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연구들도 이 시기의 국민당군의 분투만은 부정을 못한다. 전차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의 전투력도 예상 이상으로 강했고 젝트라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서 한 요새 뚫을 때 마다 적의 전력은 비교적 쉽게 퇴각해서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또 전투는 이겨도 패한 국민당군이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쳐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이에 도쿄의 대본영은 "이쯤에서 적당히 끝내라"라 지시했지만(이게 웃긴게 일본 육군 사령부 에선 피해가 예상 밖으로 심각하니 확전을 자제하려 했지만 전선의 분위기는 다 죽여 없애자 였고 그러다 보니 급히 진격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정계에서 볼 땐 일본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 공격적으로 지시했다. 오죽하면 정계와 군부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란 얘기가 나왔을 정도이다.) 피해도 크고 계속해서 중국군이 괴롭혀 당시 중지나 방면군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증오가 어마어마 하게 컸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더욱 커졌고 이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학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한편 일본군은 상하이에 한간들을 조직하여 상하이 시 다다오 정부를 수립한다.


5. 참고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부군사연구소.
  •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난징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마오 (상), 장융, 존 핼리데이, 까치.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6. 매체에서


  • 임청하의 초기작인 팔백장사가 사행창고 전투를 다루고 있다.
  •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7년작 태양의 제국이 바로 2차 상하이 사변 중 부모와 헤어져 미아가 된 영국인 소년의 이야기이다.
  • 2018년작 중국영화 800(영화)은 사행창고 전투를 다룬 영화이다. 그런데 중국군 장병들과 시민들이 청천백일기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이 중국 정부의 눈에 거슬려서 개봉이 두번 연기되었다 2020년에 개봉했다.[14]


7. 관련문서



[1] 조너선 펜비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 방면의 확장 의도에 대해서 과소평가하여 일본측의 상하이 공격을 장제스의 저항에 대한 반작용 정도로만 보았다.[2] 앤터니 비버 역시 장융의 주장을 수용하였는데 앤터니 비버 역시 훈련받은 역사학자는 아니라서 이런저런 오류가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3] 일본-지나 관계, 즉 중일관계.[4] 일본 제국 해군 속어로 포술 관계자를 말한다.[5] 혹은 8월 15일.[6] 장개석비록의 수치이며, 권성욱의 중일전쟁에서는 8대라고 쓰고 있다.[7] 이중에서 9대의 전투기를 인솔했던 모영초는 훗날 타이완 교통부 민영항공 국장을 지냈으며 대만과 일본이 단교하자 일본항공 타이베이 지점장에게 항공로 단절 통고서를 제출하였다.[8] 그 이전까지 중화민국 정부는 항일 총력전을 위해 소집한 100만 대군 중에 75만 명을 화북 전선에 할당하는 등 화북을 주전선으로 삼고 있었다.[9] 이렇게 성공적인 방어전을 기획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최고무공훈장인 푸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은 인물로, 이후 1927년까지 드레스덴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즉 이론가임과 동시에 경험이 부족한 군대를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군대로 바꿔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공적 덕분에 장제스는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세 생일에 친전을 보내 팔켄하우젠을 중국의 친구라고 일컬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짜 제대로 된 고문관이었던 셈이다.[10] 당시 쑹메이링과 동행했던 장제스의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는 쑹메이링이 죽은 줄 알았으나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는 걸 알고 직접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이때 쑹메이링이 입은 부상이 커서 쑹메이링은 몇년간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1943년 카이로 회담 때나 방미 시에 외국 의료진의 치료를 받기도 했다.[11] 양혜민은 훗날 타이완으로 이주했고 그녀의 일화는 중화민국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12] 이 영화에 나온 것이 바로 데뷔 초의 임청하.[13] 여담으로 이미 촬영은 2018년 쯤에 완료했지만 개봉에 상당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유는 국민당군이 주축이 된 전투여서 현 인민해방군의 모티브가 되는 홍군의 모습은 아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밌는건 시진핑 이전 후진타오 시기엔 국민당군이 주로 싸운걸 그린 난징 난징, 첩혈고성, 진링의 13소녀 등 영화들이 대놓고 나왔지만 시진핑 집권 후 미중무역전쟁코로나19중화인민공화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사건들과 홍콩, 대만 관련 독립문제가 붉어지니 중화인민공화국 이외의 중국 의 헌신적이고 애국적인 모습을 그린 미디어매체는 된서리를 맞을 수 밖에 없다.[14] 악명높은광전총국에서 딴지를 걸어 돈 꽤나 쓴 영화가 개봉하지 못하자 영화 내 13분 정도를 삭제하고 배급사 내에 공산당 기구를 만든 다음에서야 개봉허가가 났다 한다. . 졸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