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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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로이센의 강탈 여부
2.1. 관련 자료와 지도
2.1.1. 독일의 자료
2.1.2. 폴란드의 자료
2.2. 독일 측의 주장
2.3. 폴란드 측의 주장
2.4. 역사적 영토 개념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관점
3. 소련의 폴란드 영토 강탈 여부
3.1. 폴란드 측의 주장
3.2. 소련 측의 주장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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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냉전 시절 서독폴란드 인민 공화국, 소련 사이에 있었던 영토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토 처리 과정에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구 프로이센 지역이 과연 역사적으로 독일폴란드 중 어느 나라의 정당한 영토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 또 스탈린이 폴란드의 영토를 집어삼키고 보상격으로 독일 영토인 프로이센 지역을 내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현 국경인 오데르-나이세 선과 전후 폴란드와 러시아에 병합된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힌터 포메른을 폴란드,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하겠다고 천명하면서 현재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분쟁이다.


2. 프로이센의 강탈 여부[편집]


본래 프로이센 지역(구 동프로이센서프로이센의 비스와 강 이동 지역)에는 발트계 민족인 고(古)프로이센족이 살았다. 11세기경 폴란드 왕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폴란드인 자체의 대거 이주는 없었다. 이후 폴란드 일부 영주의 요청을 이유로 튜튼 기사단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이 지역에 대한 포교 목적으로 점령하여 뿌리박았다.


2.1. 관련 자료와 지도[편집]



2.1.1. 독일의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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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 튜튼 기사단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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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년, 튜튼 기사단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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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 튜튼 기사단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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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 1795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


1807년 ~ 1871년, 프로이센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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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 1918년, 독일 제국 속의 프로이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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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시점 유럽 내 독일어 사용자의 분포도


2.1.2. 폴란드의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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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 1025년, 폴란드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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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1920년, 인구 50% 이상 폴란드인 거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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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폴란드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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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폴란드 영토


2.2. 독일 측의 주장[편집]


프로이센의 전신이었던 튜튼 기사단의 영역이 어디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동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의 중심지였으며, 튜튼 기사단의 후기 수도 역시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자연히 이 일대는 13세기부터 독일 문화권이었지 폴란드 문화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튜튼 기사단은 단순히 독일 민족의 한 분파 정도가 아니라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독일사 흐름의 중심에 있다.[1] 아무리 튜튼 기사단이 초기에 정벌군의 성격을 띄었다 하더라도 동프로이센 지역은 약 800년 전인 13세기 경에 독일 민족의 품에 들어왔으니 이 정도면 역사적으로는 독일 고유의 영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2]

그리고 문제가 되는 동프로이센의 폴란드 영주권도 폴란드의 대홍수 때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1657년 폴란드가 동프로이센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독자적 영역으로 인정했다. 즉,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가 우월한 위치로 영유권을 누린 시기는 1525년부터 1657년까지인데 132년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시간이다.

서프로이센 역시 애초에 폴란드인보다 독일인이 더 많은 독일 문화권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가 독일을 최대한 처벌하고 신생 폴란드에 연안 접근권을 주기 위해 뜯어간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을 물리친 후 끝까지 폴란드에 맞서 주권을 지킨 곳이 동프로이센이고 폴란드에 굴복해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 곳이 서프로이센이다.[3] 스페인의 지배에 대처한 네덜란드벨기에의 관계와도 비슷한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벨기에를 스페인 문화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4]

한편 포메른의 경우에는 한때 피아스트 왕조의 영향권이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이었던 슬라브계의 벤트인들의 거주한 지역이다. 그들은 1147년 시작된 벤트 십자군으로 덴마크와 작센인들에게 정복당했고,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령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폴란드의 주권은 20세기 중반까지 800년 가까이 일부 국경도시를 제외하고는 미친 적도 없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비스와 강 서안의 현재 폴란드 영토인 슈체친(독일명 슈테틴) 일대의 포메른 지역의 경우, 폴란드가 한때 전체를 점령하긴 했으나 기간이 그다지 길지 못했고 이후 복잡하게 소유권이 오갔으나 대체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이었다. 애초에 당시 유럽에서 개종을 목표로 공공연히 공격할수 있는 이교도도 아니고 잘 기독교로 개종하고 살아오던 포메른 공작령을 단지 해안출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점령해서 전체를 병합한게 폴란드의 포메른 점유의 시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 왕국의 분열으로 불과 20년만에 금방 영향력을 잃었고 포메른 동부 정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복속했다가 덴마크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다시 오가는 등 소유권이 끊임없이 오가던 지역으로 원래 폴란드 영토라기에는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5]

슐레지엔 역시 중세까지는 폴란드의 영토였으나 1335년 이후 600년 넘게 폴란드 역사에서 이탈한 지역이다. 그리고 짧은 보헤미아의 지배를 거쳐 16세기 초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아 수백년간 독일계 국가의 영토로 남았다. 인구 구성 역시 13세 이후 동방식민운동의 영향으로 독일계가 절대다수였다. 그나마 법적으로 독일계가 지배한 역사는 400여 년으로 비교적 짧지만 민족적으로는 700년 가량 독일계의 영역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동부(노이마르크)는 잠깐 폴란드계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1252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피아스트 왕조로부터 이 땅을 구매한 이후 독일계의 영역이었으며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 왕국 핵심부의 일부였다. 당연히 폴란드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동방식민운동 이전 슬라브계의 영역을 근거로 이 지역이 폴란드 역사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분명 폴란드 왕국이 11세기 경에는 프로이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이전 고대까지 기원을 따지면 동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의 구 동방 영토는 거의 모두 게르만계 민족의 영역이었고 슬라브인들이 엘베 강 이동에 자리잡은 시점은 게르만족이 훈족에 밀려난 이후였다. 즉, 동방 영토에 대한 전반적인 점유 양상을 보자면 로마 시대까지 게르만의 영역이었으며 로마 후기부터 12~13세기까지 슬라브의 영역이었다가 동방식민운동 이후 1945년까지 다시 700~800년간 게르만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독일계의 역사적 클레임이 더 강하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에 정착한 계기가 마조비아 공작이 영토를 대가로 고 프로이센인 토벌을 요청했기 때문이다.[6] 즉, 비스와 강 동안 프로이센에 관해서 원래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증거이고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분열기를 틈타 정착한 침략자가 아니라는 근거이다.

튜튼 기사단의 존재가 프로이센을 독일 영토로 규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면, 11세기의 폴란드 왕국 역시 프로이센 땅을 폴란드 영토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게르만계 민족이 살았다고 해서 독일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기원 자체가 다른 슬라브계 폴란드 영토로는 더더욱 주장할 수 없다. 즉, 독일 영토로서의 근거도 아니지만 폴란드 영토로서의 근거라고는 더더욱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구 독일령 중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점유했던 것과 같은 성격의 독일 점유 폴란드 영토는 1차 대전 이후 정산이 끝난 포젠 뿐이다. 구 독일 제국에서 폴란드가 역사 문화적인 배경으로 영토를 뜯어가더라도 폴란드인이 독일인보다 더 많았던 포젠 정도나 명분이 있지 서프로이센까지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내건 폴란드의 해안 접근권 보장 때문이다. 특히 서프로이센의 주도 단치히는 실질적으로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지만, 표면적으로는 폴란드의 영토로 편입되는 대신 역시 단치히 자유시라는 독일도 폴란드도 아닌 제3의 영토 형태로 뜯겨나갔는데, 이는 독일인 인구가 많아야 절반 정도에 불과한 서프로이센에 비해 단치히 지역은 독일인 인구가 95%에 육박하는,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독일 문화권으로, 폴란드의 영토로 편입할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을 석권할 당시에도 정작 독일 본토로 규정한 지역은 구 독일 제국 국경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크라쿠프바르샤바 등 원 폴란드 지역은 정부 직할령으로 구성하고 따로 총독을 세웠지 일반적인 독일 영토로 분류하지 않았다. 소련 방면으로도 메멜 이상 독일 본토 경계선을 끌어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방면으로도 알자스-로트링겐(알자스-로렌) 이상 본토 경계선을 확장하지 않았다.

특히 동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1차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인들의 주민 투표에 의해 자발적으로 남은 지역이다. 마찬가지로 주민투표에 의해 프랑스에 속하기로 결정한 알자스-로렌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에 추가로 뜯겨나간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인이 절대 다수였고 거주민 스스로도 독일에 남아있길 원했던 독일 영토였다. 이미 현 독일 정부가 고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이 지역 내 민족 구성이 전후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땅을 전부 독일로 반환하는 것도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불가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개시한 패전국에 대한 징벌 및 동유럽 내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스탈린의 야심 때문이지 이 영토에 대한 폴란드의 역사적 클레임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2차 대전 당시만 해도 폴란드인들조차 이러한 논의를 진지하게 하진 않았다. 2차 대전 이전에 폴란드에서 오데르 강이나, 더 나아가 엘베 강까지 슬라브의 고토로서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도 소수 있었지만 주류 의견에 오르지 못했으며, 2차 대전으로 망명 정부를 만들면서까지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 임시정부의 영토 요구도 오데르-나이세 선과 한참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략적인 문제로 동프로이센을 요구했고, 서부 국경은 고지 슐레지엔의 일부, 포메른의 국경도시 일부를 원했을 뿐이다. 즉, 그들이 아무리 나치에 점령당했다고 할지라도 오데르-나이세 선은 상식 밖의 주장이라 그들이 먼저 나서서 할 정도가 아니었다.[7]

물론 이후 영국과 소련의 협조로 오데르 강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폴란드가 환영한 것은 당연했다. 영토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며 또한 소련에 동부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독일령에서 크게 보상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폴란드가 요구한 국경선이 오데르-나이세 선이 아니었고, 그나마도 논의 중이었던 오데르 선이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바뀐 것도 스탈린 때문이었는데 이는 커즌 선 이동의 영토를 상실할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 스탈린이 그은 인위적인 국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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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프로이센 지역을 모두 가지고 있는 독일 제국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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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분할 이전의 폴란드 및 주변국 영토 구분. 노란색이 폴란드의 영토고 붉은색이 리투아니아의 영토. 이 시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상태로 지금까지 거론된 폴란드 왕국은 사실상 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동프로이센은 자치를 유지했고 포메른은 브란덴부르크의 영토였으며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포젠과 서프로이센 이상 폴란드가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땅은 이 시기에도 이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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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후의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독일 영토. 그나마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 서부국경선과 비슷하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국경선이 된 오데르-나이세 선은 소련과 독일이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이 먹는 대신 보상 차원으로 독일 동부지역을 넘기기 위해 그었다. 그나마 오데르-나이세 선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포메른의 주도였던 슈테틴 도심은 독일에 잔류해야 했으나, 소련은 그조차도 어거지로 폴란드에 넘겼다. 슈테틴은 철의 장막 연설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하고 유서깊은 도시인데 12세기 신성 로마 제국 동진 이후 800년 가까이 독일계가 지배한 지역이며 폴란드의 역사적 연고권은 장장 800년을 거슬러 가야 한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수도 베를린의 외항이었기 때문에 독일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영토였다.[8]

영·미가 제안한 독일 동부 국경은 소련보다 온건했는데 미국의 모겐소 안건(Morgenthau Plan)에서 하노버, 헤센 등의 라인란트는 국제공동관리로 귀속되며, 독일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자르가 프랑스에 할양된다. 그리고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동남부는 폴란드에 넘어가도 포메른과 슐레지엔 서북부,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동부는 독일에 귀속될 예정이었다. #

파일:M644.jpg
이것은 미국의 다른 국경선 제안을 그린 지도이다.
선의 색깔
시나리오별 독일의 면적
독일에 잔류하는 주요 동부 도시
미국의 제안
405,141㎢[9]
브레슬라우, 리그니츠, 슈테틴
제1대안
399,306㎢
제2대안
378,016㎢[10]
브레슬라우, 리그니츠
(독일의 현 국경)
357,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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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폴란드 측의 주장[편집]


동프로이센과 관련하여 독일 측의 주장은 튜튼 기사단의 활동 영역을 근거로 하지만, 튜튼 기사단은 독일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집단이 아니라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 아래 슬라브와 발트인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벌인 집단이다. 이들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의 지배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11][12] 폴란드와 발트인들의 영역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하여 세력을 회복한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을 격파함으로써 이들이 폴란드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프리드리히 1세가 왕국 승격을 허가받았을 때 프로이센을 왕국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왕국에 속했다는 이유로 칭왕을 할 수 없기에 독일 왕국 바깥에 있던 프로이센 영지를 왕국 이름으로 사용한 사례로서 오히려 프로이센이 독일 바깥의 영지라는 당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실제로 동프로이센 지역이 국제법적으로 독일의 영토가 된 것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공국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라는 동군연합으로 발전한 1618년이었고 그마저도 폴란드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시점은 종주 관계를 청산한 1657년이었다.[13] 게다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동프로이센 지역은 여전히 독일의 본토 취급을 받지 못했는데 일례로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임에도 독일 연방(1815~1866) 외부에 위치해 있었다. 즉, 공식적으로 동프로이센 일대가 진정 독일령이 된 시점은 느슨하게 잡으면 17세기,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으면 19세기이다.

게다가 동프로이센 지역 중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핵심부는 소련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폴란드에 귀속된 동프로이센은 중남부 2/3인데 이 지역의 절반에 해당하는 바르미아는 1772년까지 폴란드의 직할령이었고 바르미아가 법적으로 프로이센령이었던 기간은 170여 년에 불과하다. 즉, 폴란드가 점유하는 동프로이센 중남부에 대해서는 폴란드도 확실한 귀속 근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서프로이센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훨씬 오랫동안 폴란드의 영토였으며, 남의 땅을 보상격으로 넘겨주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실제로 튜튼 기사단이 서프로이센을 상실한 과정도 단순히 폴란드가 전투에서 이긴 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폴란드 왕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14] 게다가 프로이센 왕국은 서프로이센 지역을 병합하기 위해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따라서 폴란드의 주권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서프로이센이 폴란드에 합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폴란드의 지배 하에서도 프로이센/프러시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으니 독일 영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주장은 논쟁의 가치도 없다.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고프로이센어 이름인 Prūsa에서 나온 것이지 독일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현재의 독일식 이름인 Preußen보다 폴란드식 이름인 Prusy나 영어식 이름인 Prussia 쪽이 오히려 원래의 이름에 가깝다.

포메른 지역 또한 브란덴부르크의 고유 영토와는 거리가 멀다. 신성 로마 제국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포메른 공작 등을 겸한 시기가 있었을 뿐이며,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포메른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토가 된 것은 30년 전쟁 이후이며, 이 때도 포메른 남부만을 차지했을 뿐 북부는 스웨덴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스웨덴령 포메른은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유지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포메른 전체를 지배하게 된 시점은 상당히 근래인 1815년 이후였다.

한편 슐레지엔의 경우 본래 피아스트 시절 폴란드의 핵심 영토였던 것을 보헤미아 왕국이 차지했고 이후 보헤미아의 왕위가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넘어가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손아귀에 들어간 케이스인데 슐레지엔의 소유주가 보헤미아 왕국에서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바뀐 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편입한 시점은 상당히 근래인 1740년이었다. 따라서 체코의 역사적 클레임이 차라리 강하면 강했지 독일의 역사성이 아주 강하다고 보기는 힘든 지역이다.

브란덴부르크 동부, 즉 노이마르크 지방의 경우 그나마 독일의 역사성이 확실히 강한 지역인데 이 지역은 1252년 폴란드가 브란덴부르크에 판매한 이후 700년 가까이 신성로마제국의 본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 역시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를 받았기에 폴란드의 역사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프로이센 지역에서 쫓겨난 실향민 문제는 영토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현 폴란드령에서 수십년간 살다가 쫓겨난 독일인들도 따지고 보면 역사의 피해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는 폴란드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과 관계없는 문제이다. 폴란드에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있었다고 해서 그 지역이 폴란드에서 독립해서 독일의 영토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없다.

게다가 구 동부 영토 내 1945년 시점의 인구 구성이 동방식민운동 이래 700년간 줄곧 이어진 현상도 아니었다. 12~13세기 당시 독일인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토착 슬라브 계통이 일순간에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오랜 기간에 걸쳐 다수가 독일화되었지만 여전히 독일화되지 않는 폴란드계, 체코계, 발트계 등도 구 동부 영토 내에 상당수 존재했다. 상단의 자료로 제시된 1945년 이전의 독일계 분포 지도는 극히 최근인 20세기 전반의 인구 분포에 불과하며 18~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독일계가 이들 지역에서 다수를 점할지언정 절대다수에 이르지는 못했다. 따라서 구 동부 영토가 700~800년 동안 독일계의 배타적인 영역이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주민 숫자만으로 영토를 나눈다면, 지금은 독일인들을 모두 쫓아냈으니 '정당한' 영토라는 논리도 성립한다.[15]

더군다나 상단의 나치당 지역별 득표율 자료에서 볼 수 있듯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방은 나치당의 표밭이었다.[16] 이 지방들은 특히 극우색이 강해서 유대인, 폴란드인에 대해 혐오감이 매우 깊던 지역이었고 나치당의 대외 침략 정책, 군국주의, 인종주의에 깊게 동감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히틀러에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략적 외교 정책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독일 내에서도 이들 지역 출신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폴란드, 소련 내의 레벤스라움 정책에 참여해서 점령지의 인종학살, 재산몰수, 폭행, 고문 등 나치가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에 깊숙히 부역하며 나치의 전위대 역할을 했다. 물론 나치의 전쟁범죄, 인종학살 등의 반인륜적 범죄를 이 지방 출신들만 저지른 것은 아니고 또한 1933년 나치당 집권 당시 이들이 2차 대전을 예견한 것도 아니지만 개인이 아닌 지역 단위로 보면 '피해자'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오데르-나이세 선 동부 지방의 실향민들은 단순히 무고한 피해자라고 부르기도 힘들다.[17] 물론 이러한 사실이 폴란드의 역사적 클레임을 증명하진 않지만 적어도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성이 혼재된 이 지역에서 독일이 도덕적 명분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간기의 폴란드는 영국의 런던으로 중앙정부를 이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참전했다.[18]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나치에 저항한 나라이며 실제 유럽 전선 연합군 중 폴란드는 자유 폴란드와 공산 폴란드를 합치면 소련, 미국, 영국 다음으로 규모가 거대했는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모두 합쳐 60만 정규군에 이르렀다. 또한 국내에서는 100만여 명이 저항군에 참여했다. 막판에 연합국이라고 줄서기한 국가와는 달리 수십만이 타국까지 가서 해당 국가의 군대로 당당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 대전에 참여했으며, 그 형태도 격전의 연속이었다. 또한 전쟁 도중 유대계 폴란드인을 포함하여 전체 인구의 1/6인 약 60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사망했는데 이는 2차 대전 참전국 가운데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수치이며 인구 비율로 놓고 보면 당대 국가들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국가였다.[19] 따라서 인류사에서 국경이 전쟁의 결과물로 자주 이동했음을 감안하면 승전국이자 피해국인 폴란드가 패전국이자 가해국인 독일로부터 역사적 클레임이 혼재된 지역을 병합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현 독일-폴란드 국경은 폴란드가 아닌 소련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후술하는 내용이지만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병합한 건에 대한 언급도 없이 오데르-나이세 선의 부당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독일의 영토 상실은 폴란드가 아닌 소련이 주도한 것이며 스탈린은 독일의 동부 국경을 최대한 서쪽으로 밀어내고자 하였다. 스탈린은 전후 독일 뿐 아니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핀란드, 일본 등에서 영토를 빼앗았으며 이는 스탈린 개인의 욕심에서 기인한 결과였다. 그리고 독일이 폴란드에 많은 영토를 할양한 것 역시 마찬가지로 폴란드가 소련에 많은 영토를 할양한 것과 전혀 별개의 사안이 아니며 오히려 폴란드가 상실한 영토에 대한 벌충 성격이 더욱 강했다. 따라서 현 독폴 국경선을 결정한 소련을 무시한 채 독일의 영토 상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


2.4. 역사적 영토 개념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관점[편집]


프로이센 지역이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단, 고정적인 국경선과 배타적인 영토라는 개념 자체가 길게 잡아도 근대, 짧게 잡으면 현대 이후에나 성립했다. 행정력이 부족했던 근대 이전의 국경은 양국의 영향력이 대항하며 일진일퇴하거나,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거나, 양국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지역은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유럽 가톨릭 문화권의 경우 고정적인 국경과 배타적인 영토 개념을 따지는 것이 더욱 무의미해진다. 이 문화권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의 영향력과 로마 제국의 역사적 유산에 의한 높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졌고, 왕권보다 영주권이 우선시되는 봉건제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영토 개념보다 지역 개념이 사람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 지역의 영주가 봉신 계약의 대상을 바꾸면 하루아침에 그 지역의 주권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20]

언어나 민족 구성원을 바탕으로 근대 이전 유럽의 영토 개념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며 그나마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민족주의의 원형이 태동한 프랑스조차 19~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전 국민에 대해 표준 프랑스어를 교육하고 강제할 수 있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왕이 죽으면 혈통 따져보다가 그냥 이웃 나라 왕을 데려다가 왕으로 앉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조약이나 협상 등으로 이 나라 영토를 저 나라에 떼어다 붙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 이전의 유럽에는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국가라는 건 없었다. 현재 국제정치학이나 국제법 등에서 다루는 소위 '주권 국가'란 1648년 베스트팔렌(웨스트팔리아) 조약을 계기로 태어나 나폴레옹 시대 등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완성된 산물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2차 대전 이전의 영토 개념을 따져서 어느 땅이 어느 나라 영토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천년 전이 되어가는 11세기~13세기의 영토 개념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결혼 하나에 영토와 왕위가 오가던 곳이 유럽이다. 당장 폴란드만 하더라도 국왕을 선거로 뽑았고, 이들 국왕은 주로 외국 출신이 많았다. 폴란드만 예외가 아니라, 에스파냐의 경우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의 발발 이유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 후계자를 놓고 프랑스와 다른 나라들이 심하게 싸웠다.

이 논의의 중심인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에 좀 더 집중해 보면,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문제가 많다. 구 프로이센 영토가 폴란드의 정당한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지는 피아스트 왕조 시절의 국경에 기인하는데 애초에 폴란드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중세 중기인 9~10세기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포메라니아, 실레시아, 프로이센 일대에는 독자적 계통의 민족들이 거주했다. 포메라니아, 실레시아, 구 동독 지역의 슬라브인들은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으며 피아스트 왕조 또한 이들 지역을 간접지배하는데 머물렀지 적극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에게 폴란드 정체성을 심는데 실패했다.

프로이센이 정당한 독일 영토라는 주장 역시 문제의 소지가 많다. 19세기 이전에는 독일이라는 느슨한 관념만 있을 뿐 주권을 실행하는 실체적인 나라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실존하지 않던 국가의 정당한 영토를 따질 수도 없다. 보통 이런 주장은 독일 국가의 성립에 있어 중심 역할을 했던 프로이센의 영토 개념을 기반으로 이뤄지지만, 현대 독일이 프로이센의 후계국가라고 한다면, 독일 국가에 합류한 다른 독일계 연방국가들의 주권과 영토권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도 애매한 문제가 된다. 현대 독일이 프로이센의 후계국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구 동부 영토 회복의 당위성이 사라지고, 반대로 현대 독일이 곧 프로이센의 후계 국가라고 한다면, 반대로 현대 독일 국가에 합류한 프로이센 이외 국가들의 영토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과 그 전신인 튜튼 기사단) 자체가 일개 무장집단으로 시작해서 정복을 통해 성장한 국가이다. 튜튼 기사단은 영토가 없었고, 프로이센 역시 정복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한 국가였다. 이에 대하여 튜튼 기사단과 프로이센이 차지한 영토는 정당한 영토지만, 다른 나라가 이 영토를 차지하면 그것은 부당한 점거라는 극단적인 편향을 범하지 않는 한 구 동부 영토에 대한 독일의 배타적인 귀속성을 주장하긴 더욱 어렵다.

게다가 동프로이센 일대로 한정하면 원래 프로이센의 주민은 고(古)프로이센인으로, 이들은 폴란드인도 독일인도 아니었다. 고프로이센인들은 폴란드어나 독일어와는 다른 고프로이센어를 사용했는데, 이 언어는 발트어족에 속하며 18세기 무렵 독일어에 밀려 사라졌다. 발트어족에 속하는 고프로이센인들을 폴란드나 독일과 연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현존하는 유럽 민족들 중에서 고르자면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 더 가까운 민족이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국경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던 조건들을 가지고 국경선을 어떻게 그어야 할지 판단하자고 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3. 소련의 폴란드 영토 강탈 여부[편집]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논란도 문제이지만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 논란 역시 다룰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폴란드 왕국 시절에도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며, 폴란드와 러시아 모두 여러 작은 왕국들을 합병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다. 2차 대전 이후 확정된 국경선으로 놓고 보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이 두 나라를 구성하는 주요 민족인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오랫동안 민족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모두 키예프 공국의 후계국이지만 갈라진 지 수백 년이 넘어서 상당한 이질화를 겪었다. 특히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왕국 시절에는 폴란드와 연합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의 영토였다는 점 때문에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3.1. 폴란드 측의 주장[편집]


폴란드 왕국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폴란드가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땅을 조금이라도 수복했는데, 그나마도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도로 빼앗겼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는 강제로 소련에 병합된 곳이다. 강제 병합은 해당 국가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점령한 국가의 옛 영토까지 노리는 국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치 독일이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상황을 보더라도 폴란드가 소련 땅을 점유했다고 하지만, 분쟁 이후 양국 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선이 2차 대전 발발 전의 폴란드-소련 국경이었다. 게다가 독일-폴란드 간 분쟁처럼 폴란드의 원 점유영역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1차 대전 이후 폴란드 공화국보단 폴란드 왕국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삼아야 형평성이 맞는 법이다. 독일과 폴란드의 프로이센 논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또한 폴란드가 자기주권 주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준을 1차 대전 이후보단 폴란드 왕국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파일:커즌 라인(폴란드어).svg
또한 스탈린은 일찍이 정해진 커즌 선 국경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 우크라이나의 르비우가 대표적.


3.2. 소련 측의 주장[편집]


스탈린이 폴란드의 영토를 집어삼켰다고 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점이, 스탈린이 집어삼켰다는 폴란드 영토는 1차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할 때는 러시아의 영토였으나 이후 폴란드가 전쟁에서 소련군을 격파하고 점령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겨울전쟁과는 달리 소련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 아니라, 엄연히 폴란드가 내전 중의 러시아를 상대로 시작한 전쟁이었다.[21] 또한 2차 대전 후의 국경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전의 국경이었던 커즌 선을 회복한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소련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립 당시에 미처 회복하지 못한 영토를 전쟁을 통해서 정당하게 수복했던 것뿐이었는데 2차 대전 이후 스탈린에게 다시 빼앗겼다고 할 수 있지만, 소련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었던 리투아니아1940년부터 소련의 일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폴란드가 소련과의 경계를 정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전체 영토를 주장할 근거가 없어졌다. 물론 코사크 대반란으로 상실한 우크라이나는 원래부터 예외이다. 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소련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해서 이의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폴란드 측에서 영토를 요구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폴란드가 차지했던 영토의 주민은 리투아니아 지방에 살던 폴란드인을 제외하면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인으로서 폴란드계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내세운 명분은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폴란드 지역의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리 독일 측과 짜고 계획한 것이지만 말이다.

즉, 이런 영토 분쟁이 언제나 그렇듯이 폴란드 입장에서는 역사적 영토를 빼앗긴 것이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수복한 것이다. 어쨌든 현재는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폴란드 정부도 영토 수복을 포기한 상태이고, 현재 이 영토는 폴란드도 러시아도 아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땅으로 남아있다.


4. 결론[편집]


유럽의 상황이 제3차 세계 대전 등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독일이 이 지역들을 수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독일은 이미 1990년 재통일의 조건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였고, 반대로 폴란드와 러시아가 슐레지엔, 포메른, 동프로이센 등 옛 독일령이던 프로이센 지역을 독일에 넘겨줄 가능성도 없다.

러시아에 있어 칼리닌그라드는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이며,[22] 폴란드도 이제 와서 현 영토의 약 1/3에 달하는 구 프로이센 지역을 돌려준다는 것은 스스로 국력과 인구 절반을 날려버리는 일이기에 이 일대의 영유권을 다시 독일에게 돌려줄리 만무하다. 즉, 해당 지역을 독일이 이제서야 영토를 돌려받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독일도 당장 구 동독 지역을 서독만큼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 구 동부 영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 국토 유지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미 폴란드가 EU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솅겐조약에도 가입한 상태라 독일인들은 예전에 자국령이었다가 지금은 현 폴란드 영토인 서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포젠 등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별도 비자나 폴란드 시민권의 취득 없이도 이들 지역에서 영구히 눌러앉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굳이 외교적으로 무리수를 두면서 수복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완전한 유럽 통합으로 국경선이 없어지는게 더 쉽고 현실성이 그나마 있다.

마찬가지로 폴란드가 구 소련권 국가들에 귀속된 동부 영토를 수복할 가능성도 전혀 없다. 게다가 폴란드가 구 독일령을 귀속한 것도 커즌 선 이동 영토 상실에 대한 대가성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국경을 주장할 명분도 없다. 그나마 폴란드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지역은 르비우(폴란드명 르부프), 빌뉴스(폴란드명 빌노) 정도인데 이 도시들은 각각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에도 못지 않게 중요한 고도들이다. 애초에 폴란드가 상실한 구 영토에 비해 새로 획득한 신 영토가 면적은 살짝 작으나 경제로 보나 인프라로 보나 폴란드 입장에서도 훨씬 중요하다. 또한 구 동부 지역의 핵심 도시인 르비우가 칼리닌그라드나 브레스트, 코브린, 카메네츠, 흐로드나 등과 달리 폴란드와 서방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반러시아, 반벨라루스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는 점도 폴란드의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이다.

단, 폴란드 정치권과 달리 민간에서는 해당 영토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해당 영토의 수복을 주장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역사적 영유권이 폴란드에 있다는 의견은 제법 많다.[23] 어쨌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에는 폴란드가 지배했던 데다 폴란드의 역사와 매우 깊이 연관된 영토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탈린은 1952년 미영불 3개국 정부에 여러차례 서한을 보내 독일의 중립화 재통일안을 제안했으나 여기에는 오데르-나이세 선 승인이 조건으로 있었고 미영불 3개국과 당시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를 거절했다. 아데나워는 죽을 때까지 공식적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구 프로이센 지역에서 추방된 실향민들이 아데나워와 기민련의 주요 지지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데나워 개인은 본래 프로이센에 대한 반감이 있는 인물이었고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에서 이미 독일인들에 대한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적으로는 구 동부 영토의 상실을 인정했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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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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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동프로이센 지역이 독일의 뿌리라는 주장은 과장이다. 우선 가장 오랫동안 독일사에 잔류한 지역은 동방식민운동 이전부터 독일계의 영역이었던 엘베 강 서부이며 또한 현 통일 독일의 기틀을 마련한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의 근거지인 브란덴부르크였다. 동프로이센은 긴 역사 속에서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단 700년간 독일계의 영역이었고 또한 프로이센이라는 국명 역시 신성로마제국 바깥의 외지라는 특수성 덕에 채택된 것일 뿐이다.[2] 고구려, 발해 멸망 이후 한국사에서 이탈한 함경도를 고려, 조선 왕조가 재수복한 14~15세기보다 앞서며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이 독일 민족의 품에 들어온 12세기와도 시차가 크지 않다.[3] 일례로 튜튼 기사단의 전기 수도는 마리엔부르크인데, 이 도시도 서프로이센에 위치한다. 이 서프로이센의 명칭 역시 왕국령 프로이센(Royal Prussia/Preußen Königlichen Anteils/Prusy Królewskie)으로, 꽤 오랫동안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지만 프로이센이라는 지명을 고수하며 독일계의 정체성을 지켰다. 참고로 동프로이센은 Duchy of Prussia/Herzogtum Preußen, 즉 프로이센 공국이었다.[4] 단, 벨기에와 서프로이센의 차이점은 벨기에는 프랑스계인 왈롱계와 네덜란드계인 플랑드르인들이 주민으로 애초부터 이베리아인들과는 상관이 없지만 서프로이센은 독일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단치히를 제외하면 폴란드인 그리고 같은 슬라브계인 카슈브인이 다수였다.[5] 포메른 동부 지역은 1210년에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211년에 다시 폴란드의 영지가 되고, 1308년에야 튜튼 기사단에게 점령된다.[6] 자세히는 당시 마조비아 공작이던 콘라트 1세가 이교도인 프루스인들의 영토를 십자군 명목으로 점령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패퇴하고 역으로 마조비아가 위험해지자. 튜튼 기사단을 불러서 프루스인 방어의뢰를 하고 거점으로 아직 통제하에 있는 프루스인의 영토인 쿨름 주변 지방(Kulmerland)를 양도한게 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정착의 시초이다.[7] 다만 당시 폴란드인들은 종전 이후 소련이 차지한 구 폴란드령도 폴란드에 도로 돌려줄 것이라고 여겼다.[8] 한중일에 비유하면 각각 인천, 톈진, 요코하마의 위상에 가깝다.[9] 이렇게 되면 동독의 면적이 156,462㎢로, 서독(248,577㎢) 면적의 63%가 된다. 실제 역사에서 동독 면적은 108,333㎢로 서독의 44%도 안 됐다. 인구 대비로는 여전히 밀리겠지만(전쟁 전 동프로이센과 포메른 동부는 독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었다)[10] 이 정도만 돼도 일본(377,975㎢)보다 넓어진다.[11] 튜튼 기사단이 진출한 당시 폴란드는 분열 공국 시기로, 신성 로마 제국 마냥 여러 개의 공국으로 쪼개져서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다. 후계자 문제로 나라가 크고작은 공국으로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독일 기사단을 막을 힘은 없었다. 여기에 몽골의 대규모 침공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 그리고 폴란드 지도자 암살까지 겹치면서 폴란드는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가 폴란드를 통일하고 1331년 프워브체(Płowce)에서 독일 기사단을 격파할 때까지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당시 헝가리에서 쫒겨나고 망해가는 성지에 눌러붙을 수도 없는 튜튼 기사단은 옳거니 하고 정착해서 십자군으로 프루시 부족 영토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들 세력이 나중에 독일에 붙고는 '이곳은 튜튼 기사단의 영토이므로' 정당한 독일의 영역이라는 주장을 펼치니 설득력이 떨어진다.[12] 다만 역사적으로 폴란드령이었고 슬라브계 포메른인들이 살았던 서안과 달리 동안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동일 계열인 발트계 제부족들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거주했다.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은 비스와 강 이서 지역 한정이다. 비스와 강 이동은 프루스 이교도의 영토는 기독교도인 폴란드인들의 것이라는 명목상의 지배권만을 주장했지, 토룬-헤움노 사이의 쿨메를란트(Kulmerland)라는 아주 작은 땅을 제외하고는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토룬-헤움노 지방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1세가 능력도 안 되면서 프로이센 정복하겠다고 전 프로이센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가 역관광당하고 자기 영지인 마조비아마저 위험해지자 튜튼 기사단을 불러서 토룬-헤움노 지방을 의뢰금으로 양도하고 영지 방어를 의뢰했던 것이다.[13] 중세에는 도시나 영주가 독립적인 권한을 누린 지역은 얼마든지 있었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도 어디까지나 폴란드 왕의 신하로서 자치를 누린 것이지, 독립국의 위치가 아니었다.[14] 위에 주석에도 나왔듯이 당시엔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이 없었고 서프로이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스와 강 이서지방은 폴란드 땅이였던 포메른이고 비스와 강 이동지방은 프러시아인의 땅으로 그냥 프로이센이라고 불렸다. 당시엔 완전히 역사적, 민족적 배경이 완전히 별개인 땅이다. 포메른인이 폴란드에 귀속 요청을 했다고 프로이센인들이 폴란드인으로 정체성을 가진게 아니다.[15] 당장 나치 독일의 경우에도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갈라먹은 뒤 폴란드 서부 지역을 독일 본토에 병합하고, 나머지 폴란드 중부 지역에 총독부(Generalgouvernment)를 두어 따로 통치하였다. 독일에 병합된 서부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학살당하거나 폴란드 중부 지역으로 강제이주되었으며, 그 자리는 독일인들이 차지했다.(Wysiedlenia Polaków podczas II wojny światowej dokonane przez Niemców) 예를 들어 폴란드의 맨체스터라 불릴 정도로 섬유 공업이 번성했던 우치(Łódź) 시의 경우, 전쟁 전에는 독일인이 전체 시민의 9%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 25만여 명과 폴란드인 15만여 명이 추방되어 대부분이 학살되었고, 그 자리를 15만여 명의 독일인이 차지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우치(Łódź) 항목) 독일 내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폴란드 침공 직전에 이미 독일 내에 살고 있던 2천여 명의 폴란드계 독일인 시민들이 탄넨베르크 작전으로 인해 학살되었다.(독일어 위키백과 참조.) 폴란드 서부 지역뿐만 아니라 폴란드 전역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졌으며, 독일의 이런 식민행위로부터 폴란드 시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폴란드인들의 무장저항운동도 벌어졌다.[16] 최대한 핑계거리를 찾자면 산업화 인구밀집 도시화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나치당 지지률이 낮고 사민당, 공산당 지지자들이 많지만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화, 산업화률이 낮은 농촌지방은 나치당의 지지자들이 많았기에 슐레지엔을 제외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황이 비슷한 다른 농촌 지방들과 비교했을 때 유달리 나치당 지지율이 높았고 특히 라인 강 루르 공업지대에 이어서 독일 제2의 공업지대로서 산업화, 도시화율이 매우 높던 슐레지엔은 오데르 강-나이세 강 이서의 농촌 지방마저 능가할만큼 나치에 열광했다. 그나마 동쪽 끝 색깔이 다른 오버슐레지엔의 경우는 과반에 근접하게 폴란드인들이 집중 거주해서 나치당 지지율이 낮았다.[17] 굳이 독일 내에서 피해 지역을 찾자면 차라리 나치당 지지율이 가장 낮았고 오랫동안 영미 공군의 전략 폭격에 노출된 구 서독 지역이 피해자에 더 가까웠다. 특히 노동자들이 밀집된 루르 지역은 적군 봉기가 일어났을 정도로 좌파적인 지역이었고, 지금도 사민당 지지율이 압도적이다.[18] 결국 이들은 공산국가가 성립된 후 레흐 바웬사 정부가 유지될 때까지 런던에서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동구권 붕괴 이후에야 다시 돌려주었다.[19] 현존 국가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는 벨라루스인데 무려 전 인구의 1/4이 나치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학살당했다. 그러나 당시 벨라루스는 소련 연방의 구성국일 뿐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국 기준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국가는 폴란드이다.[20] 동군연합과 같이 결혼, 상속 등의 이유로 금세 나라가 합쳐지기도 했다.[21] 다만 폴란드가 수복한 동부 영토는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고 러시아는 폴란드 3국 분할의 가해국이었던 만큼 단순히 폴란드의 영토 확장 욕구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해당 항목 참고.[22]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EU와 나토 주도의 제재가 더욱 강화되고, 2023년에는 발트해와 핀란드만에 위치한 러시아의 이웃국가이던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이 일대가 나토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편입되자 지리학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해있다.[23] 폴란드가 대신 얻은 영토인 독일 제국 동부령은 산업 기반이 튼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폴란드가 원했던 영토가 아니다. 폴란드는 마지막까지도 동프로이센의 해체와 포메른과 슐레지엔의 일부 국경 지역 확보를 제외하면 폴란드 제2공화국 국경선으로의 복귀와 원 국경의 회복을 원했다. 물론 산업 기반이 발달하고 긴 해안선을 보장하는 구 독일령의 확보가 국익 차원에서 나쁘진 않았지만 폴란드가 상실한 영토는 새로 얻은 영토의 2배에 육박하며 무엇보다 경제 논리로만 따질 수 없는 역사성, 문화성이 깃든 지역이었다. 특히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르비우)의 경우 바르샤바, 크라쿠프와 나란한 대도시이자 고도였고, 폴란드인이 과반수였기 때문에 폴란드도 피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