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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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주요 연설문
3. 기타 어록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다양한 인물들이 남긴 명언이나 연설문 등을 정리한 문서다.


2. 주요 연설문[편집]


참전국의 최고 지도자 내지는 한 전역의 총사령관이 선전포고·승전·패전을 기념하여 했던 유명 연설문들. 가능하면 시간 순서대로 나열.

中國正在外求和平,內求統一的時候,突然發生了盧溝橋事變,不但我舉國民眾悲憤不置,世界輿論也都異常震驚。此事發展結果,不僅是中國存亡的問題,而將是世界人類禍福之所繫。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대내적으로는 통일을 추구해 왔음에도, 노구교 사건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비통함과 분노를 금치 못할 뿐 아니라 세계 여론도 극도로 충격에 빠졌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는 중국의 생존문제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불행과 행복이 달린 문제가 될 것이다.

萬一真到了無可避免的最後關頭,我們當然只有犧牲,只有抗戰!(...) 我們固然是一個弱國,但不能不保持我們民族的生命,不能不負起祖宗先民所遺留給我們歷史上的責任,所以到了必不得已時,我們不能不應戰。至於戰爭既開之後,則因為我們是弱國,再沒有妥協的機會,如果放棄尺寸土地與主權,便是中華民族的千古罪人!那時便祗有拼民族的生命,求我們最後的勝利。

만일 정말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 우리는 약소국이고, 평화를 국시로 삼기 때문에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역사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고, 필요하다면 투쟁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약소국인 만큼 더는 물러설 곳이 없으며, 우리가 토지와 주권을 포기한다면 영원히 중화민족의 죄인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는 오로지 우리 민족의 생명을 위해 싸워 최후의 승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 장제스, 1937년 7월 17일, 루산성명에서의 항일 독려 연설.[1]

연설 전문(중국어 번체)


Abgeordnete! Männer des deutschen Reichstages!

독일 제국의사당의 대표자 여러분!

Seit Monaten leiden wir alle unter der Qual eines Problems, das uns auch der Versailler Vertrag, d.h. das Versailler Diktat, einst beschert hat, eines Problems, das in seiner Ausartung und Entartung für uns unerträglich geworden war. Danzig war und ist eine deutsche Stadt. Der Korridor war und ist deutsch. Alle diese Gebiete verdanken ihre kulturelle Erschließung ausschließlich dem deutschen Volke. Ohne das deutsche Volk würde in all diesen östlichen Gebieten tiefste Barbarei herrschen.

최근 수 개월 동안, 우리 모두는 베르사유 조약 내지는 베르사유의 늑약에서 출발해서 날이 갈수록 점점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해 오던 한 가지 문제를 겪었습니다. 단치히독일의 영토였으며, 독일의 영토입니다. 그 회랑은 독일의 것이었고, 독일의 것입니다. 이들 지역에서의 모든 문화적인 발전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인이 없었다면 동방의 이 모든 지역에는 엄청난 야만성만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Als Nationalsozialist und als deutscher Soldat gehe ich in diesen Kampf mit einem starken Herzen hinein. Mein ganzes Leben war nichts anderes als ein einziger Kampf für mein Volk, für seine Wiederauferstehung, für Deutschland. Über diesen Kampf stand immer nur ein Bekenntnis des Glaubens an dieses Volk. Ein Wort habe ich nie kennen gelernt, es heißt: Kapitulation.

나는 국가사회주의자이자 독일 군인으로서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이 전쟁에 뛰어듭니다. 일생 동안 나는 오직 나의 민족들과 그들의 부활, 그리고 독일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 투쟁에서 나는 언제나 오직 우리 민족을 위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텨 왔음을 진실되게 고백합니다.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항복'[2]

입니다.

So wie ich selber bereit bin, jederzeit mein Leben einzusetzen - jeder kann es mir nehmen - für mein Volk und für Deutschland, so verlange ich dasselbe auch von jedem anderen. Wer aber glaubt, sich diesem nationalen Gebot, sei es direkt oder indirekt, widersetzen zu können, der fällt! Verräter haben nichts zu erwarten als den Tod! Wir alle bekennen uns damit nur zu unserem alten Grundsatz: Es ist gänzlich unwichtig, ob wir leben, aber notwendig ist es, dass unser Volk lebt, dass Deutschland lebt. Ich erwarte von Ihnen als den Sendboten des Reiches, dass Sie nunmehr auf all den Plätzen, auf die Sie gestellt sind, Ihre Pflicht erfüllen.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1918년 11월[3]

은 독일 역사에서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임을 전 세계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가 나의 생명을 언제라도 민족과 독일을 위해 바칠[4]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와 같은 각오를 다지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이 국가적인 사명[5]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거부하려 드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입니다.[6] 반역자들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개개인의 삶은 전혀 중요치 않으며, 단지 우리 민족이 맥동하고, 독일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독일의 옛 원칙[7]들을 신봉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제3제국의 메신저로서 여러분이 위치한 모든 장소에서 여러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합니다.

Und ich möchte schließen mit dem Bekenntnis, das ich einst aussprach, als ich den Kampf um die Macht im Reich begann. Damals sagte ich: Wenn unser Wille so stark ist, dass keine Not ihn mehr zu zwingen vermag, dann wird unser Wille und unser deutscher Stahl auch die Not meistern!

이제 나는 제국의 권력을 향해 투쟁하던 시절의 고백과 함께 끝맺음하려 합니다. 그 때 나는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우리의 의지와 독일 철강이 그 곤경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8]

[9]

독일이여, 승리하라(Deutschland, Sieg Heil)!

- 아돌프 히틀러, 1939년 9월 1일 오전 10시, 라이히스탁에서의 개전 연설.[10]

연설 전문(독일어)


오늘 아침 베를린영국 대사는 "독일이 오전 열한 시 정각까지 폴란드 침공 태세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대영제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독일 정부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최후통첩과 관련하여 어떠한 답신도 받지 못하였으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였음을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제 오랜 노력이 실패한 것이 제게 얼마나 쓰디쓴 충격이었을지를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어떤 추가적인 노력이나 다른 접근도 제가 과거에 했던 일보다 더 나은 결과를 도출했으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11]

최후의 순간까지도 독일폴란드 사이에 평화적이고 명예로운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이 꽤나 가능해 보였지만, 히틀러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 행적으로부터, 이 남자가 무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의지를 쟁취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음이 명확해졌습니다. 오직 무력으로만 그를 멈춰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신께서 정의를 수호하기를. 우리가 맞서 싸울 은 곧 폭력이자, 불신이자, 불의이자, 억압이자, 박해이며, 이에 맞서 저는 정의가 승리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 네빌 체임벌린, 1939년 9월 3일 오전 11시 15분, 대(對)독일 선전포고 연설. 연설 전문(영어 원본), 한국어 번역본


이 어려운 시기에, 어쩌면 우리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시기에 저는 국내외를 망라한 우리 국민들의 모든 가정에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치 제가 여러분의 집 안으로 들어가 여려분께 직접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여러분 하나하나를 향해 충심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 평생 두 번째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이제는 우리 적이 된 상대방과의 견해 차이 속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전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연합국들과 함께 어떤 주의의 도전에 대응하도록 요청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주의가 승리한다면 문명화된 세계 질서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은 한 나라에게, 이기적인 힘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이 맺은 조약과 신성한 약속을 무시하는 것을 혀용하지 않는 주의입니다. 다른 나라의 주권이나 독립에 맞서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을 승인하는 주의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는 모든 위장을 벗겨 버리고 나면 결국 완력이 정당하다는 원시적 신조에 불과합니다.[12]

그리고 만약 이 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용납된다면 우리나라와 전 영연방 제국의 자유가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전 영속적 평화와 정의의 보장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궁극적 문제입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모든 것과 세계 질서와 평화를 위하여 이와 같은 도전에 대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 우리 전체의 목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국내외에 계실 우리 국민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고귀한 목표를 향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시련의 시기에 침착하고 확고한 태도로 일치단결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 일은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두운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이제 전쟁은 더 이상 전쟁터에 국한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으며, 경건하게 우리의 목표를 하느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단호하게 그것을 믿는다면, 또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떤 현신과 희생도 다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느님의 가호 아래 우리는 승리할 것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조지 6세, 1939년 9월 3일, 오후 6시, 대국민 라디오 방송. 한국어 자막본[13]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 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떠한 공포가 닥쳐 와도,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 윈스턴 처칠, 1940년 5월 13일, 전시 수상 취임 연설.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Blood, toil, tears, and sweat) 연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14]

한국어 번역본


Even though large tracts of Europe and many old and famous States have fallen or may fall into the grip of the Gestapo and all the odious apparatus of Nazi rule,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비록 유럽의 광대한 지역과 유서 깊은 나라들이 가증스러운 나치와 게슈타포의 손아귀에 이미 떨어졌거나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더라도, 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고, 우리의 바다와 해양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우고,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1940년 6월 4일, 됭케르크 철수작전 성공 직후, 영국 하원 연설. 한국어 번역본


"병사들이여, 수병들이여, 조종사들이여! 혁명의 검은 셔츠단원들과 파시스트 군단병들이여!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제국의, 알바니아 왕국의 남녀들이여! 주목하라!

운명의 시간이 우리 조국의 하늘을 때렸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때가 왔다. 선전포고문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 대사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고 걸핏하면 우리 이탈리아 국민들의 존재를 약화시켜 왔던 서구의 금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 맞서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최근 수십 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구절, 약속, 위협, 갈취,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연맹의 52개국에 의한 비열한 포위 공격이다. 오늘 우리가 전쟁의 위험과 희생에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그 이유는 명예와 이익, 미래를 위해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의무를 신성하게 여기고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가장 높은 시험을 피하지 않는 위대한 국민이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럽 대륙과 해양에서의 우리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다. 우리를 우리의 바다에 가두어 둔 영토와 군사적 사슬을 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4500만명의 영혼을 가진 나라가 대양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한다면 진정한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와 파시스트의 이탈리아는 세 번째로 발돋움할 때이다. 강하고 자랑스러우며, 결코 예전처럼 작지 않다. 구두 명령은 오직 하나의 단어 뿐이다. 모두에게 절대적이고 의무적이다. 그것은 이미 알프스에서 인도양까지 퍼져나가고 심장에 불을 붙일 것이다. 승리!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와 유럽, 전 세계를 위해서 항구적인 평화와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이탈리아 시민들이여! 무기와 함께 달려가서 끈기와 용기, 용맹함을 보여라!"

- 베니토 무솔리니,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왕국의 연합국 선전포고 후 연설.#


Deutsches Volk! Nationalsozialisten! Von schweren Sorgen bedrückt, zu monatelangem Schweigen verurteilt, ist nun die Stunde gekommen, in der ich endlich offen sprechen kann.

독일인 여러분! 국가사회주의자 여러분!

무거운 걱정에 짓눌려 몇 달 동안 침묵을 지켰던 제가 마침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Nur durch seine innere Uneinigkeit ist Deutschland im Jahre 1918 unterlegen. Diese neue Erhebung unseres Volkes aus Not, Elend und schmählicher Mißachtung stand im Zeichen einer rein inneren Wiedergeburt. Besonders England wurde dadurch nicht berührt oder gar bedroht. Trotzdem setzte die neue haßerfüllte Einkreisungspolitik gegen Deutschland augenblicklich wieder ein. Innen und außen kam es zu jenem uns bekannten Komplott zwischen Juden und Demokraten, Bolschewisten und Reaktionären mit den einzigen Zielen, die Errichtung des neuen Volksstaates zu verhindern, das Reich erneut in Ohnmacht und Elend zu stürzen.

1918년 독일은 내부 분열 때문에 패배했습니다. 그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궁핍과 비참함, 수치와 무시를 극복하고 다시금 봉기하여 스스로 국가를 재건했습니다. 특히 영국은 이로 인해 영향을 받거나 위협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새로운 포위 정책이 즉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내외에는 새로운 인민국가의 수립을 막고 독일을 다시 한번 무력하고 비참하게 만들고자 하는 유대인과 민주주의자, 볼셰비키와 반동파들의 익숙한 음모가 있습니다.

Weit mehr als eine halbe Million deutscher Volksgenossen - alles Kleinbauern, Handwerker und Arbeiter - wurden fast über Nacht gezwungen, ihre frühere Heimat zu verlassen, um einem neuen Regime zu entgehen, das ihnen zunächst mit grenzenlosem Elend, früher oder später aber mit der völligen Ausrottung drohte. Trotzdem sind Tausende Deutsche verschwunden! Es war unmöglich, jemals ihr Schicksal oder gar ihren Aufenthalt zu Unter ihnen befinden sich allein über 160 Männer deutscher Reichsangehörigkeit. Ich habe zu dem allem geschwiegen; weil ich schweigen mußte! Denn es war ja mein Wunsch, eine endgültige Entspannung und wenn möglich einen dauernden Ausgleich mit diesem Staate herbeizuführen.

50만 명이 넘는 독일인 동지들, 농부, 수공업자, 노동자들은, 끝없는 비참함을 강제한 끝에 그들을 절멸시키려는 새로운 정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룻밤 사이에 옛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독일인이 사라졌습니다. 이들의 운명은 물론 행방조차 알 수 없었고, 이들 중 독일제국 시민권자는 160명이 넘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래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과의 긴장 완화와, 가능하다면 최종적이고 지속적인 타협을 이루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Schon während unseres Vormarsches in Polen aber beanspruchten die sowjetischen Machthaber plötzlich entgegen dem Vertrag auch Litauen. Trotzdem fügte ich mich auch in diese neue russische Forderung. (...) Der Sieg in Polen, der ausschließlich von deutschen Truppen erfochten worden war, veranlaßte mich, erneut ein Friedensangehot an die Westmächte zu richten. Es verfiel durch die internationalen und jüdischen Kriegshetzer der Ablehnung.

우리가 폴란드로 진출하는 동안 소련 지도부는 조약에 반하여 갑자기 리투아니아를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러시아의 새로운 요구에도 응했습니다. (...) 나는 폴란드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서방세계에 평화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제사회의 유대 전쟁광들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

Gerade das Deutsche Reich aber hat sich seit dem Jahre 1933 mit unendlicher Geduld bemüht, die südosteuropäischen Staaten als Handelspartner zu gewinnen. (...) Entgegen unseren Grundsätzen und Gebräuchen habe ich auf eine dringende Bitte der damaligen an dieser Entwicklung selbst schuldigen rumänischen Regierung den Rat gegeben, um des Friedens wegen der sowjetrussischen Erpressung nachzugeben und Bessarabien abzutreten.

독일은 1933년 이래로 유럽 남동부 국가들을 무역 파트너로 확보하기 위해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해 왔습니다. (...) 나는 이 사태[15]

당시 루마니아 정부의 긴급 요청에, 우리는 원칙과 관례를 깨고 평화를 위해 베사라비아를 소련에 양보하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소련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은 이미 합의를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Wenn es aber eines letzten Beweises für die trotz aller Ablenkung und Tarnung inzwischen eingetretene Koalition zwischen England und Sowjetrußland bedurft hätte, darin hat sie der jugoslawische Konflikt erbracht. Während ich mich bemühte, einen letzten Versuch zur Befriedung des Balkans zu unternehmen und in verständnisvoller Zusammenarbeit mit dem Duce Jugoslawien einlud, dem Dreierpakt beizutreten, organisierten in gemeinsamer Arbeit England und Sowjetrußland jenen Handstreich, der die damalige verständigungsbereite Regierung in einer Nacht beseitigte. (...) Der serbische Staatsstreich gegen Deutschland fand nicht etwa nur unter englischen, sondern im wesentlichen unter sowjetrussischen Fahnen statt.

모든 혼란과 위장에도 불구하고 이제 등장한 영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간 연합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면, 유고슬라비아 분쟁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나는 발칸 반도에 안정을 가져오고자 두체와 협력해 유고슬라비아를 삼국 조약에 초대했지만, 영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하룻밤 새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겨냥한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 독일에 맞선 세르비아에서의 쿠데타는 영국 국기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기 아래에서 일어났습니다.

Damit hat Moskau die Abmachungen unseres Freundschaftspaktes nicht nur gebrochen, sondern in erbärmlicher Weise verraten! Wenn ich aber bisher durch die Umstände gezwungen war, immer wieder zu schweigen, so ist doch jetzt der Augenblick gekommen, wo ein weiteres Zusehen nicht nur eine Unterlassungssünde, sondern ein Verbrechen am deutschen Volk, ja, an ganz Europa wäre. Damit aber ist nunmehr die Stunde gekommen, in der es notwendig wird, diesem Komplott der jüdisch-angelsächsischen Kriegsanstifter und der ebenso jüdischen Machthaber der bolschewistischen Moskauer Zentrale entgegenzutreten.

그리하여 모스크바는 우리와의 우호 협정을 파기했을 뿐 아니라 비열하게 배신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정세를 고려하여 침묵을 지켰지만, (이러한 소련의 태도를) 계속해서 묵인하는 것은 부작위의 죄일 뿐만 아니라 독일 국민, 나아가 유럽 전체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제 유대-앵글로색슨 전쟁 선동자들과 볼셰비키 모스크바 본부의 유대인 통치자들의 이 음모에 맞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In diesem Augenblick vollzieht sich ein Aufmarsch, der in Ausdehnung und Umfang der größte ist, den die Welt bisher gesehen hat. Im Verein mit finnischen Kameraden stehen die Kämpfer des Siegers von Narvik am Nördlichen Eismeer. Deutsche Divisionen unter dem Befehl des Eroberers von Norwegen schützen gemeinsam mit den finnischen Freiheitshelden unter ihrem Marschall den finnischen Boden. Von Ostpreußen bis zu den Karpaten reichen die Formationen der deutschen Ostfront. An den Ufern des Pruth, am Unterlauf der Donau bis zu den Gestaden des Schwarzen Meeres vereinen sich unter dem Staatschef Antonescu deutsche und rumänische Soldaten. Die Aufgabe dieser Front ist daher nicht mehr der Schutz einzelner Länder, sondern die Sicherung Europas und damit die Rettung aller.

지금 이 순간,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최대 범위의 행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극해 나르비크에서의 승리를 가져온 전투기는 핀란드 동지들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복자의 지휘를 받는 독일 사단은 만네르하임 원수 휘하 핀란드의 자유 영웅들과 함께 핀란드 땅을 보호합니다. 독일 동부 전선의 대형은 동프로이센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뻗어 있습니다. 프루트 강둑, 다뉴브 강 하류에서 흑해 연안까지 독일군루마니아군이 안토네스쿠 아래 연합합니다. 따라서 이 전선의 임무는 더 이상 개별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을 보호하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Deutsche Soldaten! Damit tretet ihr in einen harten und verantwortungsschweren Kampf ein. Denn: Das Schicksal Europas, die Zukunft des Deutschen Reiches, das Dasein unseres Volkes liegen nunmehr allein in eurer Hand.

Möge uns allen in diesem Kampf der Herrgott helfen!

독일 군인 여러분! 이제부터 제군들은 책임감을 갖고 힘든 전투에 돌입할 것입니다. 유럽의 운명, 독일 제국의 미래, 그리고 우리 국민의 생존이 이제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아돌프 히틀러, 1941년 6월 22일 오전 10시, 라이히스탁에서의 독소전쟁 개전 연설.[16]

연설 전문(독일어)


주목, 주목.

모스크바에서 알립니다.

정부의 중대 발표가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이여! 오늘 새벽 네 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어떠한 요구나 선전포고 없이, 독일의 군대가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들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의롭고, 적은 패배할 것이며,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 유리 레비탄, 1941년 6월 22일 오전 12시 15분, 대조국전쟁 안내 방송 전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연설을 기반으로.[17]

몰로토프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지난 6월 22일 시작된 히틀러의 독일의 우리 모국에 대한 기만적인 군사 공격이 지속되고 있다. 붉은 군대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적의 공군 부대와 분대들을 파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새로운 군대를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미 히틀러의 군대는 리투아니아를 정복하였고, 라트비아의 상당한 부분과 벨라루스의 서부, 우크라이나의 서부를 점령하였다. 파시스트 공군은 폭격기로 무르만스크,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키예프, 오데사, 세바스토폴을 폭격하고 있다. 우리 조국에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우리의 빛나는 붉은 군대가 파시스트들에게 몇몇 도시와 지역을 내줄 수 있었는가?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그들의 선전 방송에서 가차없이 방송하는 것만큼 정말 무적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무적이라 여겨졌지만 러시아, 영국, 독일군에게 패배하였다. 빌헬름 황제독일군제1차 세계 대전 때 무적으로 여겨졌지만 러시아군, 영국군, 프랑스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결국 그들에 의해 멸망하였다.[18]

현재의 파시스트 독일군과 히틀러도 마찬가지이다. 이 군대는 아직 어떠한 의미 있는 저항에도 직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우리 영토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반격에 부딪히고 있다. 히틀러의 파시스트 군대도 나폴레옹과 빌헬름의 군대가 패배한 것처럼 똑같이 패배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저항의 결과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11월 7일, 대조국전쟁 대독 항전 촉구 연설.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영상(영어 자막)


부통령, 의장, 상원과 하원의 의원 여러분,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날 하루 동안, 아메리카 합중국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기습적이고 고의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미합중국은 그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청원에 따라 태평양에서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그들의 정부와 천황을 상대로 대화를 지속하던 중이었습니다. 확실히,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대사 일행은 미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우리 국무장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답변서에는 현재의 외교적인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고 적시하고는 있었지만, 전쟁 혹은 무력을 동반한 공격에 관한 어떠한 위협이나 암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19]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로 미루어 보아 이번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지속적인 평화를 희망한다는 거짓된 진술과 표현을 통해 미합중국을 기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여러분들께 수많은 미국민의 인명이 희생당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에서는 미국 함선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또한, 어제 일본 정부말라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지난 밤 일본군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지난 밤 일본군은 을 공격하였습니다. 지난 밤 일본군은 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지난 밤 일본군은 웨이크섬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인들은 미드웨이 제도를 공격하였습니다.[20]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곧 그러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합중국 국민들은 이미 여론을 형성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저는 우리의 방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이행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우리 국가 전체가 우리를 겨냥한 맹습의 성격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획적인 침략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의기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형태의 배신이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고 단언하며, 이것이 곧 의회와 국민의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적의(敵意)는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그리고 우리 이익이 중대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본인은 의회에 일본의 부당하고 악랄한 공격이 개시된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후로 미합중국일본 제국이 전시 상태에 돌입하였다고 선포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21]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직후의 의회 연설. #


방금 전, 전쟁을 알리는 폐하의 조칙이 발표되었습니다.

정예 제국 육해군은 지금 필사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동아전국의 평화는

이것을 간절히 바라는 제국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렬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지난번부터, 정부는 여러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대미국교 정상화의 성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그들은 지금까지의 주장을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국,네덜란드,중국과 연합하여

중국에서 우리의 육해군을 무조건적으로 전면 철수시킬 것,

남경 정부의 국제적인 승인을 거부,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며

제국의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해왔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제국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타협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만,

미국은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국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한다면,

제국의 권위가 실추되고 중일전쟁의 완수를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결국에는 제국의 존립마저 위험에 빠져버리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일이 여기까지에 이르러서는 제국은 현재의 시국을 타개하고

자존자위를 위해 단호하게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굳게 견지하는 것입니다.

건국 2600년,

우리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이 역사를 되돌아 보는 것이야말로,

그 어떠한 강적도 처부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찬란한 조국의 역사를 결코 더럽히지 않을 것과 함께

더욱 번영하는 제국의 앞날을 건설할 것을 굳건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꾹 참고 견디어 최대한으로 자중해 왔습니다만

결코 편안함만을 찾아 적을 피해왔었던 것이 아니며, 또한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세계평화의 유지와 인류의 참화를 막는 것을 간절히 바래왔던 것 뿐입니다.

게다가 적의 도전을 받아 조국의 생존과 권위가 위험에 이르렀기에

결연하게 박차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면한 적은 물자가 풍부한 것을 자랑하며

이것을 이용해 세계제패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 적을 쳐부수고

동아지역에 부동의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절대적이고 건설적인 노력이 필요로 함은 여러번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승리가 조국 대일본제국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어떠한 곤경과 방해도 극복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폐하의 신민들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시련이며

이 시련을 돌파한 후에야말로

'대동아의 건설자' 로서의 영예를 후세에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이르러 만주국 및 중화민국과의 긴밀한 관계가 활발해져 가고 있으며

독일, 이탈리아 두 나라와의 맹약이 점점 더 견고햐자려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국의 흥망과 대동아의 운명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으니

1억의 국민들이 온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팔굉을 하나로 하여 천황 폐하의 발밑으로

충성을 다해 조국에 보답하려는 일본의 애국 정신이 있는 한

영국미국이라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폐하가 계신 곳에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저는 삼가며 하찮고 작은 뜻을 피력하고,

국민들과 함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충성을 굳게 맹세하는 바입니다.

-도조 히데키, 1941년 12월 8일, 대미 개전 연설.#


영국은 독일 국민들이 정부의 총력전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독일은 총력전이 아닌 항복을 원한다고 합니다!

(청중: 아니다!)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청중: 예!)

영국인들은 독일 국민이 총통에 대한 충성심을 잃었다고...

(청중: 아니다!)

여려분은 전투 중인 군대의 뒤에서 조국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총통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청중: 예!)

불굴의 투지로 전쟁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청중: 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승리를 위하여 총통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청중: 예!)

여러분은 우리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착각이나 헛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아군인 국민 여려분이 우리 뒤에 서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총통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은 승리를 얻기 위해 가장 무거운 부담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국가의 생사를 걸친 중대한 위기에서만 남자와 여자는 참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있어서, 여자는 약한 성이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지금의 남자나 여자 모두 투쟁의 결의와 힘을 발휘할 때입니다.

국민의 준비는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총통각하에게 따르도록 명령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충실히 동포 사랑을 통해 승리를 확신하고 있으며, 국민 각성과 정신적 재기의 상황을 맞이한 지금, 이제 눈앞에 승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전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결의를 지금이야말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우리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Nun, Volk, steh auf und Sturm brich los!"

"국민들이여, 감연히 일어서서, 폭풍을 일으키라!"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스포츠궁에서 한 총력전 연설. 한국어 자막본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이 미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이제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동부전선에서도 승리를 거둘 차례입니다.

- 해리 S. 트루먼,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 항복 직후의 라디오 연설. #


동지들이여! 남녀 동포들이여!

독일을 이긴 위대한 날이 왔다. 붉은 군대와 우리 연합군의 부대들에 무릎을 꿇은 파시스트 독일은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5월 7일 랭스(Rheims) 시에서 항복에 관한 예비 의정서가 서명되었다. 5월 8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소련군 최고사령부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군 사령부 대표들이 베를린에서 마지막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5월 8일 24시에 효력이 발휘되었다.

(중략)

동지들! 대조국 전쟁은 우리의 완승으로 끝났고, 유럽의 전쟁 시기는 끝났으며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남녀 동포들에게 우리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바이다!

우리 모국의 독립을 받추어 주고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우리의 영웅적인 붉은 군대에게 영광을!

위대한 인민에게, 승리한 인민에게 영광을!

적과의 싸움에서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 연설. 연설문 전문(영어 번역본), 영상(영어 자막)


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22]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23]

,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24]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25]

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달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 히로히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 무조건 항복 선언. 연설 동영상(일본어)[26]


"전국 군민 동포 여러분,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인사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정의는 필연적으로 강권에 승리한다는 진리는 마침내 최후의 증명을 얻어냈습니다."

- 장제스, 1945년 8월 15일, 중일전쟁 승전 기념 연설.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평화의 회복을 위한 중대한 협정을.

오늘은 적대적인 양대 세력의 대표로 마무리 짓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엄숙한 자리에서 피로 물든 과거와 대량 학살을 딛고 더 나은 세계로 탈바꿈하기를 바라는 것은.

저뿐만이 아닌 전 인류의 바람일 것입니다.[27]

- 더글러스 맥아더,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 함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 연설. 연설 전문(영어)



3. 기타 어록[편집]


역사상 이번 전쟁처럼 독재와 억압을 일삼는 세력과 자유, 인권의 편에 선 세력이 정면으로 대결했던 사례는 없었다. #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43년 4월 아들 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28]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내일 당신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식민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독점하는 국제 동맹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비좁은, 그래서 생활의 필수적 자원들조차 너무 부족한 우리의 제국,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개간되고 관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획 없이 이것을 해낼 수 없습니다. 도이칠란트, 지크 하일!

- 아돌프 히틀러


수적으로 우세한 대부대를 강인한 의지로 이기는 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은 아닐 걸세. 자네 병사들에 대해 말하자면, 자네는 그들에게 승리 아니면 죽음으로 가는 길밖에 보여 줄 수 없네.

- 아돌프 히틀러, 1941년 11월 4일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에르빈 롬멜의 후퇴 요청에.


그 운명적인 아침 열한 시에 나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폴란드 문제를 놓고 독일과 집중적인 협상을 벌였던, 불안했던 열흘이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였다. 무솔리니도 평화를 위해 애쓴 까닭에 간혹 일이 잘 풀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건만...

- 조지 6세, 1939년 9월 1일.


오늘 우리는 위대한 해방에 대해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대영제국의 가장 오래된 도시. 무자비한 전쟁의 손톱에 할퀴면서도 단 한 순간도 굴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던 우리의 수도 런던에서 저는 여러분께 하느님께 대한 감사에 다 같이 동참하자고 당부드립니다. 온 유럽을 전쟁 속으로 몰고 갔던 적, 독일이 마침내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극동에서는 아직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잔혹한 적, 일본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단단한 각오로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서운 전쟁의 그림자가 우리 국민들의 단란한 가정으로부터 물러난 이 시간. 우리는 마침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느님께 감사를 올려도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관심을 유럽의 평화와 함께 온 전 세계적인 임무로 돌려야 합니다.

- 조지 6세, 1945년 5월 8일 오후 8시 35분.


4년 전 우리 국민과 대영제국은 압도적인 적을 맞이하며 벽 앞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전례없는 시험이였지만 우리는 그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결연하고 헌신적인 우리 국민들의 정신이 환한 불꽃처럼 타 올랐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꺼트릴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불에서 피어오른 불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시 최대의 시험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도전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최종적인 승리를 얻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용기 이상의 것이요, 인내 이상의 것입니다.

- 조지 6세, 1944년 6월 6일.


작년 대영제국 국경일에는 제가 캐나다의 심장부인 위니펙에서 대영제국 국민 여려분께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평화로웠습니다. 그 국경일에 저는 여려분께 우리 영연방 제국 수립의 기반이 되는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의 이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저는 그 이상이 끔찍한 전쟁의 고통 없이도 좀 더 풍성하고 충만한 발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성실히게, 그토록 끊임없이 막아 보려고 애를 썼던 악이 우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 조지 6세, 1940년 5월 21일.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간혹 가족도 잃어버린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 조지 6세, 런던 대공습 직후.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29]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의 일기장에서.


그 모든 긴장감 뒤에 온 불가사의한 안도감이며. 전 세계가 바라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칠장이를 죽이는 것이다.

- 라이오넬 로그, 그의 일기장에서.


해리 트루먼: 스탈린, 산전수전 다 겪고 여기 베를린에 오니 꽤나 신바람이 나겠군요.

이오시프 스탈린: 차르 알렉산드르 1세파리까지 진군했소.

- 포츠담 회담 당시 해리 트루먼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화.


세계의 역사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께서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아리아인이라 기록되신다면 그의 선택된, 충성스러운 기사단인 우리들은 영웅의 신화가 될 것이다.

- 하인리히 힘러, 1943년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친위대 대원들에게 한 연설.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 카를 되니츠


폭격기는 한 대도 루르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한 대라도 도달한다면 난 괴링이 아니다. '마이어'라고 불러라.

- 헤르만 괴링,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이후 베를린이 폭격을 맞자 독일인들은 '헤르만 마이어 씨...' 하면서 놀렸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 개전 이후 소련군 통신문. 참고로 암호문이 아닌 평문으로 전달되었다.[30]


중화 민족뿐만이 아닌 인류의 번영을 위해, 설령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우리는 소중한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때에 왔습니다.

- 쑹메이링, 1943년 미 의회에서. 출처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을 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이 하고 떨쳐 일어나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덴노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하며.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대일 선전포고 서문.


독일이 이긴다고 하는데 최후까지 보시오. 최후의 승리는 소련에 있소. 일본이 삼국동맹에 따라 독일에 붙었으니 곧 조선인들 또한 징병되어 전선에 끌려갈 것이오. 그러나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게 되면 태평양 방면은 손이 딸리게 되고 또한 미국은 군수공업이 발달하여 매월 수천 대의 비행기를 제작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일본이 철벽같은 방어를 펴도 수만 대의 적 비행기일거에 내습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소. 소련과 일본간의 전쟁도 머지않았소. 일본 제국이 뭐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일본 제국이 약해지는 그때야말로 우리 조선 동포가 봉기해야 할 호기요.

- 태평양 전쟁 당시 신원 미상의 조선 농부.[31]

[32]


불쌍한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신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탈린을 잘못 알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윈스턴 처칠, 얄타 회담 후.


우리가 잠시 동안 기쁨의 순간을 누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아직 일본의 배반과 탐욕이 진압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일본 앞에 흘린 땀과 노력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 윈스턴 처칠, 1945년 5월 8일 오후 3시.


우리가 실패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소수의 국민들조차 그것을 끝낼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후대의 역사가 독일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헤닝 폰 트레슈코프


히틀러는 가고, 독일과 독일 국민들만이 남았다.

- 이오시프 스탈린, 독일 항복 직후.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여. 나는 미국을 공정하게 평한다. 5만명의 병사들이 전쟁터로 향한다. 미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위대함을 위해서 말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유럽으로 파견되는 미군 수송선에서 쓴 편지에서.[33]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 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커티스 르메이, 일본 본토 공습을 기획하면서.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일본의 도시란 이런 모양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 65호나 63호 너트나 다른 잡동사니를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키타가와 씨가 그걸 정리해다가 공장으로 가져가는 거다.

- 커티스 르메이, 도쿄 대공습 직전 도쿄 상공에서 민간인에 대한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던 부하들을 향해서.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로루시,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 온 전장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지들, 우리가 해냈소!

- 소련 종군 기자 바실리 그로스만


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

-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들이 사형되기 전 한 말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카미카제에 징집당하자.


나는 이 전쟁이 전 세계의 인류와 전 중국의 동포, 그리고 세계 문명 국가가 참가한 최후의 전쟁이 되기를 믿는 바입니다.

- 장제스, 1945년 8월 15일 중일전쟁 승전기념 연설.


파리는 상처입었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 샤를 드 골,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연설.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

- 베니토 무솔리니, 1936년.


폐하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천황도 모르는 사이에 또 천황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지 않으면 진정한 우스타샤가 아니다.

- 안테 파벨리치


9월 초하루 히틀러의 명령 한마디에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고 뒤이어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폐제(廢帝) 카이저는 히틀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충고를 하였다.

6천만 명의 독일 국민을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패전의 책임을 진 채 20년을 해와 달을 벗 삼아 지내는 동안 그는 회오(悔悟)의 한숨이 안 나오는 때가 없었다. 지구에 불을 질렀던 잘못을 그는 해와 달의 말없는 얼굴에서 깨달았다. 그리하여 히틀러에게 '그대는 제2의 카이저가 되지 말라. 나의 오늘의 생활을 그대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노파심이라면 노파심일 따름이겠으나 대전의 불속에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선배로서 보내는 교훈이라면 후배인 히틀러로서는 응당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나 그는 들은 대꾸도 안 했던 것이다. 다만 카이저에 보내는 대답 대신으로 '진군이다'라는 것을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히틀러는 왜 지구에 불을 질렀는가, 위대한 방화자 히틀러는 무슨 야심으로 방화를 했는가.

- 1939년 9월 23일 동아일보 5면, 구주전란(歐州戰亂)의 이모저모(一): 대전(大戰)의 방화자는 독일, 히틀러는 제2의 카이저가 될 것인가#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웠노라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 이것이 추억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전쟁 중엔 이랬지. 그때가 좋았는데' 하던 것이 '훌륭한 전쟁이었어. 누가 뭐래도 위대한 시대였다고'와 같은 위험한 발언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전쟁 중 '덴노 헤이카 반자이', '대일본 제국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전우는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 오카상을 외치더군요.

- 제로센 조종사 하라다 가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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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설 전문은 중화민국이 평화공존을 추구함을 강조하고 일본 제국의 이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는 한편, 중화민국이 비록 약소국이지만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으며 그 선을 넘으면 항전하겠다는 결의, 그리고 이를 위한 국민적인 단결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 die Kapitulation. 결국 히틀러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저 세상으로 도피해 버렸던 관계로, 죽을 때까지 저 단어를 알지 못했던 건 맞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 군인으로 항복을 이미 경험했지만.[3] 킬 군항의 반란이 11월 3일에 일어났고, 그로부터 8일 뒤 독일 제국이 항복한다.[4] 원문은 einzusetzen인데, 이 단어의 뉘앙스는 '바치다'나 '희생하다'보다는 '투입하다', '사용하다'에 가깝다. 인명을 도구로 인식하는 파시즘 이데올로기가 느껴지는 부분.[5] 여기서도 'Gebot'를 사용했는데, 이는 종교의 계율이나 기본적인 인간의 도덕률처럼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명령"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Das war ein Befehl!"에서처럼 일반적으로 군 지휘를 명령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다.[6] 좀 더 직설적으로는 '뒤져라!' 정도 되는 느낌. 번역문에서는 중2병 같은 뉘앙스로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이건 공식 연설문이다. 물론 사실상의 선전포고 상황이니까 외국을 비난하고 자국민의 단결을 촉구하고자 강한 단어를 쓸 수는 있지만, 기껏해야 '악랄한 놈들을 물리치자' 정도지 어지간하면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심지어 자국민을 상대로는 더더욱. 바로 앞의 '명령'에 대한 뉘앙스나 바로 뒷 문장과 더불어서, 정권의 의도에 조금이라도 반하면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겠다는 나치 정권의 광기가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7] 프로이센 시절로부터 이어져오는 군국주의 기풍.[8] 그러니까 독일인들이 얌전히 국가가 시키는 대로 전쟁을 잘 수행하면,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독일인의 의지와 (철강으로 상징되는) 독일의 기술력으로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 물론 현실에서는 독일인의 의지만큼이나 독일의 침략을 받는 국가의 국민들도 강한 의지를 갖고 저항했고, 독일의 기술력은 바로 그 독일이 내쫓은 고급 인재들을 받아들인 미국에 의해 압도당했다.[9] 독일 철강은 루르 점령 사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유럽의 최대 철강 생산지 중 하나이기도 했던 독일 루르 지역은 약 10년 전에 프랑스에 의해 루르 점령 사태를 겪었고 독일인은 이에 큰 반감을 가졌다. '점령 당했던 치욕의 복수'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한층 선동할 수 있는 것.[10]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이 연설문에서, 히틀러는 단치히가 역사적으로 독일의 영토였으며 독일이 평화적으로 영토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강변하며, 이로부터 전쟁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한편 독일의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적 기풍을 자극하여 국민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11] 체임벌린의 실책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쟁을 겪은 적 있었고, 영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기에 체임벌린 입장에서는 딜레마 속에서 나름대로 내린 결정에 가까웠다. 물론 히틀러의 야욕은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지만.[12] 실제로 조지 6세의 말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추축국은 물론이고, 연합국도 제국주의를 포기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피지배국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쥐어 주는 등 인권 의식이 전쟁 전에 비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13] 영화라 약간 수정이 가해졌으나 얼추 비슷하다.[14]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역설사의 게임 Hearts of Iron IV 티져 영상에서 해당 연설을 읆는 윈스턴 처칠의 육성이 나온다.[15] 소련베사라비아·부코비나 영유권 주장[16]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독소전쟁의 개막을 알린 연설로, 히틀러는 이 연설에서 소련독소불가침조약 위반 사례들을 나열하는 한편 독일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강변하면서 소련 침공을 정당화했다. 물론 히틀러가 언급한 소련의 조약 위반 사례들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만으로 조약 파기는 몰라도 선전포고의 명분이 되기는 사실 부족하다. 일부 사안은 소련과의 연관성이나 의도가 확증되지 않았으며 나치 독일에 유리한 입장으로 짜맞춘 것도 있고. 유대볼셰비즘 운운하는 음모론 역시 언급할 가치도 없이 거짓.[17] 독소전쟁 개전 직후 스탈린이 11일간 잠수(...)를 타면서, 개전 직후 급박한 사태를 알리는 연설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대신하였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난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과 함께 공무로 다시 복귀한다.[18]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중간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대독일 전선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 참석하지 못했다.[19] 일명 Fourteen Part Message라 불리는 일본의 선전포고문에는 전쟁을 선포한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표현(Declare, War against, State of War 등)이 하나도 없었다.[20] 실제로 이 공격들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영상에서는 루스벨트는 미국 전함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문장 뒤 모든 문구를 생략하고 바로 본인이 통수권자로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영상에서는 저 부분을 낭독한다. 영상 참고. 3분 25초부터 4분 43초까지.[21] 미국의 헌법상 전쟁 개시 권한은 의회에 있으므로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 개시를 요청하는 절차를 거친다.[22] 원문은 米英支蘇, 중국지나(支那)로 썼다. 지나는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이지만 현재는 멸칭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8월 10일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통보하는 전문 원문에는 미·영·화(華)·소라고 표기하는 태세전환을 하였다. 화(華)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약칭.[23] "대체로 보아서"라는 의미이다.[24] 하지만 이 단락은 많은 일본 제국주의 추종자들과 일본 넷 우익들이 "우리의 전쟁은 대동아를 위한 결단이었다."라고 착각하며 과거의 일본을 일방적 피해자로 생각하게 하는 치명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여러모로 동아시아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원흉의 표현 중 하나이다.[25] 원문에 나온 赤子는 갓난 아기란 뜻으로 군주가 자기 백성을 어린 아기에 비유한 단어다. 국어 사전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국어에서 적자라는 음은 대개 嫡子를 말하기 때문에 어린 백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26] 막상 이게 송출됐을 때 조선에선 사람들이 그냥 여느 날들처럼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흔히 알려진 8.15 광복의 모습은 다음 날 재방송이 나온 후의 얘기다.[27] 이로부터 1년 후국공내전그리스 내전이 일어났고, 5년 후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경제, 문화적으로는 세계적인 대호황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28] 전쟁의 양상이 명백하게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나뉘었던 2차대전의 특수성을 요약한 말이다. 해당 어록은 뉴올리언스의 국립 2차대전 박물관에도 새겨져 있다.[29]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30] '왜 얼 타는 거야. 고문관인가?' 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대숙청으로 살아남은 장교들이 몸을 사렸던 탓에 굉장히 수동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31] 변은진. (2011). 유언비어를 통해 본 일제말 조선민중의 위기담론. 아시아문화연구, 22, 53-79[32] 실제로 농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 국가의 위치와 당시 일어나던 전쟁과 국제정치 상황, 미국의 잠재력은 물론이요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정확히 맞춘 것을 보아 상당히 견문을 넓힌 인물로 보인다.[33] 그는 자유 프랑스군 소속 정찰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실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