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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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추축국의 입장
4. 연합국과 대독 포위망, 그리고 소련
4.1. 각국의 사정
4.2. 계속된 오판과 국가간 연대의 부족
5. 결론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인한 독일 제국의 무기력한 붕괴와 대공황으로 인한 영국, 프랑스 등지의 불안,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에 대한 불안 등 명확하지 않고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세계 대공황에 따른 경제 위기로 부상한 파시즘과 이에 따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발,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보상심리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형태건 제1차 세계 대전의 수습과 전후 정리과정에서 현실과 미래를 예단하지 못한 이해당사자들의 인지부조화가 쌓이면서 터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으로 보는 학계의 의견이 주류로 올라섰다.


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려 경제가 파탄난 것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금은 크게 두 번의 대규모 삭감과 지급 중단 협약으로 사실상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다. 요약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이 전쟁 후에 몇 번씩 열린 전후처리 국제회의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빚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

미국: "그래? 그러면 깎아줘야지."

영국, 프랑스 등: "절대 불가.”

미국: "그럼 너네들이 알아서 받든가."

영국, 프랑스 등: "알았어. 어쩔 수 없지. 깎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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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러한 루트로 3~4회 반복해서 빚이 대규모로 삭감됐다는 얘기다. 사실상 배상금 지급 중단이 1932년 로잔 협약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급 지급 중단이 결정되기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금 지급은 1921년 최종 집계된 배상액의 8분의 1(1/8)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때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세계 2-3위의 강대국, 유럽의 최강국 중 하나로 우뚝 섰다. 1, 2위는 당연하게도 미국, 소련. 승전국이며 손에 꼽히는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제쳤을 정도. 2차대전 말미에 초토화된 본토와는 다르게 1차 대전 패전시는 본토의 피해가 거의 없던 수준이었고, 각종 인재들의 유출도 없었기에 기반도 탄탄한 상태였다. 그러니 원래 강대국인 독일이 부활하는건 시간 문제였으며 거기엔 승전국이면서 가장 자기들을 괴롭힌 니들이 프랑스 땅에 쳐들어갔잖아(...) 프랑스[1]를 증오하며 이를 악문 독일인들과 배후중상설 같은 음모론도 한 몫 했다.


3. 추축국의 입장[편집]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추축국들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정상적인 근대국가로선 생각하기 힘든 사유들이었다. 추축국들은 국가 체제와 집권 후 시행한 정책 자체의 문제로 인해 국가 전체의 역량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침략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는 이유 만으로 다짜고짜 주변국들을 공격적으로 흡수해갔다.[2]


3.1. 나치 독일[편집]


이탈리아 왕국과 일본 제국이 각자 시간을 보낼 동안 미국에서 도스 안(Dawes Plan)이 1924년에 통과되어 독일로 대량의 미국 차관이 들어오고, 그 후 약 5년간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지만.. 세계 경제가 망했어요.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란에 빠지고, 공산주의자가 득세하기 시작한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은 이 틈에 끼어들어 대체로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아 보수층에게 어필하며 세력을 모았다. 히틀러의 나치당의 득표율은 1930년 기준 18.3%였지만, 1932년에는 37.3%로 올라서 나치당이 230석을 얻어 국회 제 1당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보수의 거두 프란츠 폰 파펜이 쿠르트 폰 슐라이어를 견제하기 위해 파울 폰 힌덴부르크까지 설득하며 기어이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총리로 만들어줬다. 그렇게 나치당은 날개를 달았다.

이후 나치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대해 주변국은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프랑스 내각은 히틀러가 다음에 움직일때 그를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3월 17일에 영국 수상인 체임벌린은 만약 나치 독일이 작은 나라에 공격을 가한다면 영국은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하리라고 히틀러가 전쟁을 감수해야 한다는 요지의 공개선언을 했다.

마침내 1939년 9월 1일, 독일 크릭스마리네의 전함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의 11인치 함포가 불을 뿜으면서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고, 이에 폴란드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영국,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올랐다.


3.2. 이탈리아 왕국[편집]


그리고 이탈리아도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적국이며 동맹국 중 한 나라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에 맞설만한 해군력과 끈기로 나름대로 전과를 쌓았고, 오스트리아가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게 된 결정적 계기도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선전했다고 할 수 있으나 잦은 패배로 전과가 무시를 당했으니 이탈리아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3.3. 일본 제국[편집]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던 일본[3] 역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었던 것을 발판 삼아 더욱 제국주의에 박차를 가하고 식민지 확장을 위해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대공황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채 경제불황에 들어서게 되고, 전후 독일과 유사하게 강대국들의 보호주의 무역 때문에 수출이 막히고 더이상 파이를 키울 수 없게 되자 그것을 침략전쟁으로 대신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시도가 바로 2년 뒤에 벌어진 만주사변(1931).[4] 이후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침공 준비에 들어간다. 6년 후,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러시아나 견제해주길 바랐던 미국과 영국은 뜬금없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게 석유수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때 국제사회는 일본이 조선에 이어 중국까지 차지하려는 것이 곱게 보이진 않았기에 일본의 견제차원에서 전략물자 수출중단을 시행한것이다. 너희가 이래도 전쟁을 계속 할 수있을거 같냐는 외교적 압박이었다. 당시 일본의 석유수입은 80%가까이 미국에 의존하던 터라 당연하지만 석유가 없으면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일제는 미국의 말을 따라 중국에서 철수를 하고 석유를 다시 공급받느냐, 미국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을 지속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침략전쟁을 지속하려면 미국과 양립할 수 없기에 선제전략으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의 발단이 되고 만다.


4. 연합국과 대독 포위망, 그리고 소련[편집]



4.1. 각국의 사정[편집]


  • 영국&프랑스: 전쟁 일어나기 가장 싫어한 국가들 중 대표이자 본좌, 둘 다 자국에서 반전여론이 강했고 전쟁 일어나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에, 특히 프랑스는 참호전의 악몽에 독일의 바로 이웃나라였기에 더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했다. 대독 포위망도 프랑스가 먼저 제시했을 정도.
다만 그 전쟁을 피하자고 하는 정도가 너무 심해 문제가 너무 많았다. 첫째로 프랑스가 강하게 주장한 대독포위망은 프랑스가 공격받는 것을 전제로 했다. 즉 대독포위망 참여국이 독일의 뒤통수를 쳐주는 것만 생각했지 정작 프랑스 스스로가 다른 대독포위망 국가가 공격받을 때 지원 가 줄 생각은 없었다는 소리. 두 번째로 프랑스나 영국이나 너무 소극적이고 눈치를 보다가 시간만 날려먹었다. 이당시 독일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선 프랑스, 영국 양측의 협력과 독일을 향한 압박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이런 와중에 양국이 협력은커녕 서로간의 견제와 눈치싸움만 했다는 것. 이때문에 상술한 대독포위망 중 하나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뮌헨 협정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이후 전역이 점령당하는 것을 방관하고 말았다.[5] 이후 폴란드가 침략당할 때도 양면전선으로 폴란드 구원과 독일 약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상황인데 이를 방치했다. 물론 이땐 나름의 사정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약간의 지원조차 하지 않아 사실상 방관했고 결국 영국&프랑스가 자기들 나름 뭘 해보겠다고 한 것 전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은 사상누각 상태였으며 결국 개박살나고 독일의 저력을 키워주는 역효과만 만들었고 독일은 이를 통해 얻은 저력을 추진력 삼아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6]
결국 이렇게 자국의 피해를 받지 않게 하려는 뻘짓들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점령과 영국 본토 항공전 및 끊임없는 위협 등으로 되돌려받았다.

  • 폴란드: 이쪽도 독일과 전쟁 나기는 썩 좋아하지 않았던 나라. 그도 그럴 게 123년 동안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나라가 3분되어 찢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부활한 사례였기에 당연히 독일을 좋아할 턱이 없었다. 문제는 지배국 중 하나가 소련인 만큼 소련도 싫어했는데 소련이야 영국, 프랑스도 싫어했으니 이렇게만 보면 별 볼일 없는 문제(?) 였으나 문제는 독일과만 맞닿은 영프와 달리 폴란드는 나라 양쪽으로 그 혐오스런 족속들과 맞닿은 상태라는 것. 폴란드 침공 직전 소련은 영프와 협상에서 폴란드가 자국군의 진주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폴란드는 일단 소련군이 한번 들어면 소련이 줄창 영유권을 제기하는 동부 크레시(Kresy)에서 절대 제발로 떠나지 않고 점령군 행세를 할게 분명했으므로 제의를 뿌리쳤다.[7]
아이러니한 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약 1년 전에 프랑스의 제안으로 들어간 대독일 포위망 구성국 중 하나면서도 같은 구성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독일, 헝가리와 함께 분할했다는 것이다.

  • 벨기에: 역시 독일과의 전쟁은 꺼렸다. 하지만 라인란트 재무장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가 용인해버리자 프랑스를 불신하고 중립국으로 회귀, 그러다가 서서히 전운이 감돌자 다시 프랑스와 협력했지만 결국 프랑스와 사이좋게 점령당한다. 옆 나라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 체코슬로바키아: 분명 대독일 포위망 구성국이자 프랑스의 동맹국인데도 정작 영국과 프랑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더 큰 문제는 그 비극은 또 체코슬로바키아 탓이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민족자결주의 사이에서의 불합리의 결과물로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독일인의 땅은 모두 독일의 땅이어야 하지만 1차대전의 연합국은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부 지역은 떼어다가 새 독립국의 영토로 삼아줬는데 체코슬로바키아가 그 사례였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고생했다.[8]

  • 소련: 이 쪽도 이 당시 국외로 떨친 영향력에 비해선 대숙청으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아 당연히 독일과의 재전은 꺼렸다. 문제는 독일을 압박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폴란드 3국에 협력을 제안했으나 이 3국 모두 괜히 손잡았다가 오히려 독일이 터질 거라 겁먹는 바람에 소련의 제안을 무시해버렸고 결국 이들에게 무시당한 소련은 별 수 없이 자기가 견제하려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었으나 이 마저 겨울전쟁을 본 히틀러의 인식으로 호구 취급받으며 침략당했다.

4.2. 계속된 오판과 국가간 연대의 부족[편집]


  • 히틀러 집권 : 독일 폭주 시작. 히틀러가 호전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이미 집권 때부터 폴란드에서 감지했는지 폴란드는 프랑스에 같이 손 잡고 독일에게 예방전쟁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명분이 없고 프랑스도 전쟁하기 싫어서 반대, 그 결과 폴란드는 아예 독일이랑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 스트레사 체제 붕괴 : 이탈리아 이탈. 1935년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자 영프이 3개국이 공동대응체제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스트레사 체제였다. 즉 독일을 감시할 역할을 영프이 3국이 한 것인데 문제는 첫 단추부터가 잘못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몰라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사실 이것에 관심도 없었다. 본인 목적은 에티오피아랑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것에 관심도 없었다. 문제는 영국도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해놓고는 뒤에선 딴 짓을 벌였으니 독일과 함께 해군조약을 맺은 것이었다.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함에 따라 무제한으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기에 함대 역시도 다시 재건할 여건이 되었다. 그런데 영국은 스트레사 체제보다는 독일과 단독으로 해군조약을 맺어 독일 해군력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실수가 되었다. 영국은 영국과 독일의 해군비율을 100 : 35로 설정했지만 정작 독일은 35를 넘기는 커녕 20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영국은 독일의 해군 재건을 공식적으로 용인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웃나라 프랑스에게 불신감을 사게 되었다.

  • 라인란트 재무장 : 벨기에 이탈. 1936년 독일은 라인란트를 다시 재무장하려고 했고 라인란트에 온 독일군이 30만이나 된다는 오판을 내린 프랑스는[9] 대독 포위망을 구성한 국가와 연대해보려고 했지만 벨기에 하나 빼고는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심도 없었다. 더욱이 프랑스 자신도 단독으로 대응에 나서는 것에는 소극적이었고 도리어 영국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문제는 이미 1년전에 거하게 통수맞은 프랑스가 영국을 신뢰하기는 어려웠고 더욱이 영국은 육군이 약했다. 결국 백기는 프랑스가 들어버렸으며 프랑스가 백기를 들자 영국도 백기를 들어버렸는데 이는 벨기에에게 프랑스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어 대독 포위망에서 이탈해 중립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오스트리아 병합 : 오스트리아 이탈.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문제는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되지 않았고 어쨌든 오스트리아 자신이 원해서(?) 합병된 것이라 로카르노 조약 위반임에도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제로 국제연맹에서 이를 비판한 국가는 딱 하나 멕시코 뿐이었다. 그나마 이는 나은 사례

  • 뮌헨 협정 : 체코슬로바키아 이탈. 같은 해 독일은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노리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했는데 앞서 나온 사건들은 귀여울 정도로 추악한 사건이다. 대독 포위망을 구성했던 프랑스는 폴란드를 돕는다며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데 일조했고 폴란드는 한술 더 떠서 아예 독일에게 붙어 땅을 떼어먹은 데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더 뜯어먹었다. 영국도 프랑스와 별로 다를 바 없었고 국제연맹도 마찬가지, 비록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고는 하나 히틀러의 영토야욕이 확실해진 이상 이를 저지해야 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참호전의 악몽이 남아있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서로 눈치나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끔찍한 전쟁을 겪은 탓에 '에이, 어떤 멍청이그걸 다시 해?' 라고 상식적인 기대를 한 것도 이유긴 하지만 어쨌든 그 결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자국 의사는 단 한줄도 반영되지 못한 채 주변국에게 영토를 거하게 뜯겼고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한 히틀러는 체코를 보호령으로 삼고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결국 뮌헨 협정에 참여한 국가들 중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는 패자가 되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폴란드도 패자가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영국이나 프랑스나 전쟁을 두려워해서 독일이 뭔 짓을 해도 어쩌질 못했지만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기는 독일이 더했다. 분명 독일은 라인란트 재무장이나 오스트리아 합병 등을 했지만 그 때마다 반대한 것은 독일 군부였다. 그들은 지금 전쟁을 해서 영국과 프랑스를 이기리란 확신을 내릴 수 없어서였기 때문,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국력을 영국+프랑스를 넘는 수준으로 과대평가했고 군사력 역시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심지어 뮌헨 협정을 맺었을 때조차 그랬다.

  • 독소 불가침조약 : 소련 이탈. 1939년 독일과 소련 사이에 맺어진 불가침조약, 언뜻 보기엔 그냥 평범한 불가침조약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동유럽 분할을 합의한 조약이다. 사실 이전부터 소련은 독일을 경계했고 그 대책으로 영국, 프랑스, 폴란드에게 손을 내밀어 다 같이 독일을 압박하자는 구상을 했다. 문제는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소련과 사이가 나빴고 더욱이 이웃나라인지라 더 불안감이 심해 믿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도리어 소련이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독일과 소련이 손 잡는게 아닌가 우려하기까지 했을 정도, 스탈린이 그렇게 성의를 보였음에도 프랑스, 특히 영국의 반응은 스탈린을 만족시켜주지 못햇고 결국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 폴란드 대신 독일과 협상해서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이후 독일이 먼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해 양면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 동부전선이 형성되지 않게 했음을 생각해보면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 폴란드 침공 : 폴란드 이탈.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올린 일로 영국과 프랑스는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기...는 개뿔, 프랑스는 물론 영국까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아직도 전쟁이 싫어서 폴란드까지 공격당했는데도 가짜 전쟁을 그것도 폴란드가 공격당하고 점령당하고도 7개월이나 가짜 전쟁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는 전쟁 6주만에 패전하고 영국만 남는 초라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5. 결론[편집]


독일이 별 별 수를 다 쓰며 무대포로 나오는 동안 수없이 충분히 견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피해만 두려워하던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은 서로의 눈치만 보느라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심지어 폴란드와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까지 맺어버리며 더더욱 독일이 배째고 무대포로 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면도 분명히 있긴 했지만[10] 주권국을 주권국이 먹어치우는 것을 막아주기는 커녕 오히려 협조하고 서로간의 불신으로 인해 우려하던 사태를 낳고 오판으로 인해 공포가 부풀려져서 적극적인 대응은 한 번 해보지도 못했다. 엉뚱하게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 벌인 행적들은 전부 더 큰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11][12] 정말로 세계 외교사에서 가장 처참한 부분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그리고 이때 체코 등 연합국들에게 배신당한 국가들은 지금도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본인들마저 바닥까지 털려버린 열강들의 역사에 대해 꼴 좋다며 혀를 끌끌 차는 형국이다. 유럽권 국가에서는 일련의 과정을 일명 'Appeasement'[13]이라 부르며 히틀러에게 지속적으로 양보를 하여 세계 2차대전을 예방하지 못했던 이유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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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선이 프랑스 영토 내에서 형성되어 프랑스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봤고, 승전 후 대독 정책이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랑스는 영국, 미국과 달리 독일과 영토가 맞닿아있었기 때문에 알자스, 로렌 지방을 가져가는 등 독일에 가장 가혹했다.[2] 애초부터 근거도 없고 실현 가능성이 없던 이 침략 전쟁은 몇개월 안되자마자 단번에 실패해야 정상이었지만, 연합국의 나몰라라히틀러의 생각보다 더 무모한 계획 덕분에 6년이나 질질 끌 수 있었던 것이다.[3] 중국은 일부 근대화에 성공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근대적 제도 개혁에 인색한 부분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양무운동 참고.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서양식 제도권을 롤모델로 삼았고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서양문물에 경도된 인물들이 일본의 서양식 근대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4] 이때 일본의 침공야욕을 전세계에 알리러 이승만 박사가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연맹에 참가하여 라디오 연설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하지만 끝내 강대국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일본의 로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5] 단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이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대비를 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6] 정확히는 이로 인한 영향력강화 외에도, 백색 전쟁을 보고 소련을 만만하게 보게 된 것 등등 이후에 추가된 몇 요인도 합쳐지긴 했다.[7] 폴란드가 미쳤다고 이런 생각을 한게 아니다. 루마니아 왕국핀란드도 같은 요구를 받았는데 전자는 소련의 목표가 사실상 베사라비아의 점령에 있다고 보고, 후자는 아예 대놓고 영토 할양을 요구받자 거절했다. 세 나라의 공통점은 볼셰비키와 거나하게 싸운 적이 있다는 점.[8] 게다가 나치 독일이 패망해 물러가자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 또다시 시달림을 받았다.[9] 정작 독일에서는 군부가 "라인란트 재무장은 좋은데 우리 프랑스랑 맞짱 뜨면 100% 짐" 이라고 주장해서 히틀러와 군부 양측이 조율한 끝에 약간의 병력 보내서 깔짝거려 보고 아니면 프랑스에게 사과하기로 결정해서 재무장을 위해 보낸 군 병력은 22,000명, 지역 경찰까지 합쳐도 36,000명이었다. 또 그 중에 라인란트에 보낸건 3여명에 불과했다.[10] 프랑스는 1차 때 입은 피해가 너무 커 제대로 수복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영국은 섬나라라 직접적인 견제력이 약했으며 폴란드는 제대로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소련은 대숙청이란 스스로 벌인 병크가 계속 발목을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 일을 우려먹거나 서로 눈치만 보니 아무것도 못이룬게 당연한 것.[11] 만일 뮌헨 협정이 파탄난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그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그도 그럴게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대륙에서의 제대로 된 독일의 적국은 프랑스 밖에 없어서 프랑스에 올인을 할 수 있었다.[12] 당시 소련은 대숙청이란 역대급 병크를 저지르면서 체급만 컸을 뿐 총체적으론 독일하고 비슷했다. 그래서 독소전쟁 초기 그렇게 독일에게 갈려나간 것이다. 그래도 독소전쟁 중반부터 다시 체급에 맞는 국력을 되찾았다.[13] 한국어로 해석하면 유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