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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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각종 원인들
2.1. 궁극적 원인
2.1.2. 팽창주의적 민족주의
2.1.3. 국제연맹의 실패
2.1.4. 선진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의 충돌
2.1.4.1. 유럽의 경우
2.1.4.2. 일본의 경우
2.1.5.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의 가혹함과 모순
2.1.5.1. 반박
2.2. 직접적 원인
3. 결론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서술하는 문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로는 정말 수많은 견해가 있으며 학자, 사상,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그 해석이 전부 다르다. 존 키건의 경우 이런 대규모의 전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보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또한 이 전쟁을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보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는 영어 위키백과관련 문서를 참조하여 2차대전의 원인을 직접적 원인(Proximate causes)과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s)으로 분류한다. 직접적 원인이란, 관찰된 결과와 가장 가깝거나 또는 그 결과를 직접(immediately) 촉발했다고 여겨지는 원인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배가 침몰한 직접적 원인을 든다면, 그것은 "흘수선(吃水線) 밑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물이 침투하여 배의 밀도가 물보다 낮아져 물에 더 이상 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가 될 것이다. 반면에 궁극적 원인이란, 일반적으로 "진정한(real)" 원인으로 여겨지는 사건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랜 기간 동안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도록 작용해온 원인을 가리킨다. 배가 침몰한 궁극적 원인을 든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배가 암초에 부딪혀 구멍이 났다"거나, 혹은 "관리 부실로 배가 약해졌다" 등이 있을 것이다.

2. 각종 원인들[편집]



2.1. 궁극적 원인[편집]



2.1.1. 파시즘[편집]



2.1.2. 팽창주의적 민족주의[편집]


당시 유럽의 팽창정책을 지원하던 이념으로 민족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일제 강점시절의 독립운동과 통일 문제 등으로 인해 굉장히 일반적인 이념이지만, 이 이념 자체는 현대에 와서는 배격되는 분위기가 강한데, 그 이유가 민족주의가 가진 배타성과 공격성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유럽 내에서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군국주의, 사회진화론 등 사회 조류와 결합되어 하나의 강력한 사상 체계로서 역할했다. 민족주의에 따르면 개인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사회진화론이 제시한 약육강식의 세계 체제에 의해 민족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강해져야 했다. 이렇게 민족의 생존과 부흥이 지상과제로 떠올랐으며 이를 위한 수단은 군사력과 영토였다. 광대한 식민지와 거대한 군대는 단순히 한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유럽인들에게 식민지 경쟁은 알짜배기 땅 경쟁이 아니라 각국의 생존을 건 투쟁으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국민 개병은 병영문화를 전체 사회에 확산시킴으로서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원래부터 귀족 문화였던 병역의 지위는 어느정도 유지되어 병역을 수행하는 것은 명예로운 행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렇게 확산된 병영 문화가 팽창적 민족주의를 더욱 자극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당시 독일도 이런 문화에서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독일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이어진 군대에 대한 숭상, 귀족들의 적극적 군복무, 프리드리히 대제 등 여러 군사영웅 등 군사적 사상이 사회문화적 주축이었다. 비스마르크 총리가 이뤄낸 독일 제국은 군사적 승리 위에서 세워졌고, 비스마르크 본인이 어떤 성향이었던 간에 독일 국민들에게 자국 산업과 군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들었다. 외교적 문제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파시즘과 얽히면서 귀족 문화는 배격하고자 했지만 병영 사회만큼은 굳건했다. 참전 군인들의 경험도 이런 문화를 견고하게 했다.


2.1.3. 국제연맹의 실패[편집]



2.1.4. 선진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의 충돌[편집]


영국, 프랑스를 위시한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위시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간의 충돌이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지구상에 있는 땅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이미 식민지들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이 깃발을 다 꼽아놓은지 오래였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으려면 이 식민지들을 뺏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2.1.4.1. 유럽의 경우[편집]

이 주장은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2차 대전의 원인으로 여기는 것은 비약이다.[1]

이 구도는 세계 정세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2차 세계 대전을 1차 세계 대전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는 많았지만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특히 프랑스는 1차 대전 후에 사회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였고 참호전에서 상당한 인적 자원을 소비했다. 더불어 전쟁채권에 의존한 전쟁 수행은 프랑스 정부를 빚더미에 앉게 했으며 재정적 수단을 이용한 경제 운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장기간의 경제침체로 이어졌으며 이는 당시 프랑스 행정부의 무능과 겹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영국도 많은 인력자원을 소모해야 했으며, 이는 해외식민지에 대한 통제약화를 불러온다. 또한 시급한 본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해외식민지는 뒷전으로 물러났고, 대공황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 벌인 일련의 정책들은 식민지 내부의 격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적 역량도 소모되고 있었다. 산업 국가로서의 영국의 기술역량은 이미 독일과 미국에 추월당한지 오래였다. 이런 독일의 산업화와 군비 증강이 1900년대 유럽 국가들의 군비 경쟁의 원인이며, 이것이 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식민지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이며 1차 세계 대전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이 국제 정치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19세기 제국주의 국제 정세는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주장은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일 수는 있어도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라 보기는 힘들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며, 전쟁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도 매우 다른 형태를 띈다.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이 결국 백인우월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게르만 민족주의와 결합된 제국주의가 아닌가 싶지만, 그 둘은 유사하기는 해도 많이 다르다. 19세기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백인 우월주의가 계몽 정신에 입각하여, 무지몽매한 야만인을 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치 독일의 파시즘은 1등 민족과 열등 민족을 분리하고 1등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열등 민족을 말살,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제국주의 정책들을 정당화시키는 기제 중 가장 중요한 기제는 선교였고,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과거 중세부터 이어져 온 성전이며, 구원행위이니 말이다. 물론 실제 운영에서 19세기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다분히 파시즘적이었다. 실제로 야만인의 계도라는게 그들의 언어와 전통을 말살하여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도입하는 것이 본 목적이었고,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행정이 일상적이었다.


2.1.4.2. 일본의 경우[편집]

이 주장은 당대 일본의 상황에 적합한 주장이다. 일본은 만성적인 천연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확장에 나서려고 해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은 이미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땅따먹기를 다 진행한 후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일본에 폐쇄되어 있었으며 유럽의 본국에만 열려 있었다. 완제품은 동남아시아 지역이 아닌 일본에서만 소비되었다. 한국에 대한 강제점령으로 시장을 마련했지만, 이는 일본의 확장을 위해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에서의 시장 확대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는 21개조 요구와 산둥 점령같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침략 정책으로 이어졌다. 또한 만주 등지로 확장에 나서며 이것이 성공기로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1년부터 1922년까지의 워싱턴 회의는 일본이 가진 각종 독점적 이권을 무효로 하였다. 이는 중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일본은 1907년 만주협상 이후로 협력 관계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1917년의 공산혁명으로 상실하였고, 일본의 석유 공급량 80%를 차지하던 미국에 고분고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의 공업은 침체기에 빠졌고, 미국에 의한 일본의 입지 축소와 맞물려 일본 내의 군부 세력의 득세로 이어졌다. 일본 군부는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은 군부의 독단적 행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군부는 내각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는 5.15 사건을 통해 가속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군부의 독주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해 미국이 일본에 제동을 걸기 위해 부과한 금수조치에 대한 반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의 자원수급과 확장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대부분 차단당했고, 이로 인한 악영향과 불만이 쌓이면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의 주요 침공 루트는 동남아시아의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였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2.1.5.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의 가혹함과 모순[편집]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프랑스벨기에에 대한 전쟁 보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라는 거금을 배상금으로 강요하였다. 그것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날 기준으로. 당시 독일이 지불할 수 있는 배상금이 최대 100억 마르크였고,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산업시설 가동이 정지되어서 화폐가치가 70%까지 폭락해 배상금 지불은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얼가리짬뽕된 바이마르 공화국 대신 나타난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는게 이 주장의 근거.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든 건 프랑스였다. 헝가리 왕국트리아농 조약 때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추축국에 가담하였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단순히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적용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을 강요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인데 정작 미국과 영국은 골치아픈 유럽대륙 문제에 개입을 삼가고 싶어했다. 결국 남은 건 프랑스인데 문제는 1차대전으로 국력이 고갈되어 혼자서는 독일을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처음에는 루르 점령이라는 초강수를 두고 독일 배후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원조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다가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해 국제 공조를 구상하는 등 다시 유화적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고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연이어 병합하자 다시 강경하게 돌아섰다. 그러나 전술했듯 독일은 프랑스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대였고 결국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즉 협상국은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조약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그걸 실현할 힘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독일이 팽창주의적으로 나설때는 강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화적으로 타협하려다가 쫑난 것이다.


2.1.5.1. 반박[편집]

독일에게 동정적이거나 동조하는 입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모순됨"을 주장하고 그것이 2차대전의 원인이라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2] 이 '가혹함'이라는 표현은 모호하고 주관적이기도 하거니와, 베르사유 조약 이전 독일이 다른 국가들에게 강요한 강화조약과 비교하면 딱히 더 가혹하다고 볼 것도 없다.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강요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루마니아 왕국에게 강요한 부쿠레슈티 조약베르사유 조약과 비슷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가혹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업지대의 절반과 인구의 1/3이 몰린 220만㎢의 영토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60억 금마르크의 배상금 지불 및 군대 해체를 강요당했다. 역사가 스펜서 터커(Spencer Tucker)에 따르면 독일 총참모부가 내건 조건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해서(extraordinarily harsh) 독일측 협상단마저 경악할 정도였고#, 훗날 협상국도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불만을 품자 러시아에 강요된 조건에 비하면 자기들이 내건 조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비아냥댈 지경이었다. 실제로 볼셰비키가 독일측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인 것이 러시아 내전을 장기화한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루마니아는 배상금 지불을 강요당하진 않았지만, 군비제한을 당하고 국경지대의 요충지와 흑해로 통하는 유일한 해상통로를 상실했다. 게다가 독일의 내정간섭을 받고 기한없는 점령군 주둔을 강요당해 사실상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베르사유 조약을 비롯한 다른 강화조약도 군비제한을 제외한 내정간섭을 포함하진 않았다.

심지어 독일은 다른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보다도 유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오스만 제국은 각각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여 제국 자체가 공중분해되고 본토도 대부분 상실했다.[3] 애초에 가진 게 없는 불가리아 왕국만이 독일보다 더 관대한 뇌이 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이때 강화조약은 다 그나물에 그밥인데 어느 한 쪽만 가혹하다고 볼 것도 없다.

협상국이 민족자결주의를 강요하여 정작 독일계가 상당수 거주하는 지역을 포기하게 한 것이 모순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독일 제국이야말로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유럽부 영토를 대거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협상국은 현지 민족의 독립국 건설을 지원하기라도 했지[4], 독일은 독립국 건설은 고사하고 단기적으로는 괴뢰국 수립에 진력하고, 장기적으로는 아예 현지 슬라브인을 추방하고 말살하여 독일계로 동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5] 협상국이든 독일이든 상대방을 난자하려고 민족자결주의 명분을 내세운 것은 똑같은데 독일은 전적으로 민족자결주의의 희생양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 없는 주장이며, 냉정히 말해 독일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루마니아에게 저지른 깡패짓을 그대로 되돌려받은 것에 불과하다.

2.1.6. 대공황[편집]


전세계의 경제를 나락으로 빠트린 대공황이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대공황으로 인해 불안하게나마 유지되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고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이 성립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대공황은 일본의 경제위기 및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다른 여러가지 사건과 배경에 맞물린 결과 세계 대전에 영향을 준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이 세계 대공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따라서 베르사유 조약의 막대한 배상금과 프랑스의 경제 위기 등이 짬뽕되며 독일의 석탄 산지인 루르에 대한 프랑스의 점령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경제 대공황 자체가 원인이라는 것은 단순화한 견해도 아니고 충분히 의미있는 주장이지만, "막대한 배상금에 경제 대공황이 겹치면서 피폐해진 독일은 나치 정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는 것은 조금은 설명이 부족하다. 주변국들, 특히 프랑스의 경제 위기와 연결시켰을 때 비로소 의미있다. 단순한 경제적 위기로는 왜 독일에서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나치가 득세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경제적 위기가 어떻게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그것이 어떻게 파시즘으로 이어졌는지까지 설명해야 비로소 의미있는 설명이된다.

다시 말해 세계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주변국과 독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주목해야지, 단순히 대공황이 일으킨 경기침체같은 수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프랑스의 경제위기는 1차 세계 대전의 소모로 인한 것이며 세계 대공황 자체는 2차세계 대전의 의미 있는 사건들과 상당수의 연결점을 갖지만, 이것들은 이전의 배경들과 더욱 강한 관계를 지니는 측면이 있다. 기존의 문제들은 이미 내재해 있었고, 점점 곪아가고 있었는데 대공황이 휘발유를 드럼통째로 던진 격이다.


2.2. 직접적 원인[편집]



2.2.1. 히틀러의 집권[편집]



2.2.2. 라인란트 재무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라인란트 재무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6년 3월 독일은 라인란트로 군대를 진주하여 베르사유 조약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의 움직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묵인했다. 벨기에는 프랑스조차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결국 중립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서방이 독일의 행위를 묵인하고 국제 공조체제가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라인란트 재무장은 유럽의 파워 밸런스를 독일 쪽으로 기울였다는 평을 받는다.

2.2.3.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드와 전투의 치욕적인 패배를 간직하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다시 한번 에티오피아의 점령을 획책했다. 1936년 5월, 1년 4개월간의 전쟁 끝에 에티오피아는 무너졌고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국제연맹경제제재를 부과했으나 주요 경제대국의 무관심과 불참으로 무소용이었고 얼마 안가 슬그머니 취소했다. 일본 제국의 만주 침공 때처럼 이 전쟁으로 국제연맹은 무능을 다시 인증하였다.

2.2.4. 스페인 내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스페인 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도하는 스페인의 국민군 세력이 스페인 제2공화국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군 세력에게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여 그들의 승리에 일조했고, 반면에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기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은 없었다.[6] 스페인 공화국은 1939년 내전에서 패배해 멸망한다. 스페인 자체는 2차대전 내내 피해복구에 여념이 없어 독일과 이탈리아에 별다른 보은을 하지 못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스페인 내전 내내 보여준 무기력하고 무신경한 모습은 히틀러가 더욱 대담한 대외정책을 펼칠 자신감을 얻게 해 주었다.[7]

2.2.5. 중일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6. 폴란드 침공[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 침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한 달 동안 폴란드나치 독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영국프랑스가 독일에게 선전포고하여 사라예보 사건 이유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되는 것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2.2.7. 안슐루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슐루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8. 뮌헨 협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뮌헨 협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은 칼끝을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돌렸다. 독일은 독일계가 집중 거주하는 주데텐란트의 민족분포를 이유로 이 지역에 영유권을 제기했다. 염전 분위기가 아직 강한데다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을 용인하게 된다. 이것이 1938년 9월 30일 체결된 뮌헨 협정이다. 그 결과 주데텐란트는 독일에게, 자올지에(Zaolzie)는 폴란드에게, 슬로바키아 남부는 헝가리에게 병합되고, 체코슬로바키아 자체도 단일국가에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연방국가로 재편된다. 또한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거대한 공업지대를 손에 넣어 2차대전을 일으키고 군사력을 유지할 산업 역량을 확충하였다. 극도로 약해진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이듬해 3월 독일에 병합된다.

2.2.9. 단치히 자유시폴란드 회랑 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단치히 자유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 회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차 대전 후 독일 제국의 단치히는 독일과 폴란드 어느 한 쪽의 영토도 아닌 국제연맹 치하 도시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단치히 인구의 95%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단치히가 독일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폴란드는 현상유지를 주장했다.

폴란드 회랑도 독일의 영유권 주장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왕령 프로이센(Prusy Królewskie)의 일부였으나 폴란드 분할프로이센 왕국이 획득했었다. 이 지역은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불가능할 정도로 뒤섞여 살고 있어 민족분포가 극히 복잡했다.[8] 1차대전 후 구 왕령 프로이센은 에름란트, 포메른 일대를 독일이 가져가고 단치히는 도시국가가 되며 나머지는 폴란드가 획득하는 식으로 분할되었다. 폴란드가 획득한 지역을 이른바 폴란드 회랑이라고 한다.

독일은 폴란드 회랑으로 동프로이센이 자국과 분리된 것과 적잖은 독일인이 다른 국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독일은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이 고속도로에 치외법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 입장에서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 분할 전에는 자국령인데다 과반이 폴란드인인 지역이므로 독일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여겼다. 또한 유일한 해상출구로서 무역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등 사활이 걸린 지역이었고, 그러므로 사실상 바다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불가능했다.[9]

"Last year the German government put forward the demand for the Sudetenland on purely racial grounds; but subsequent events proved that this demand was only put forward as a cover for the annihilation of Czechoslovakia. In view of this experience…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Poles and we ourselves are afraid that the demand for Danzig is only a first move towards the destruction of Poland’s independence."

"작년[10]

독일 정부는 순전히 인종 분포를 이유로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사건을 통해 그 요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감추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단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폴란드우리 쪽에서 단치히에 대한 요구가 폴란드의 독립을 파괴하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핼리팩스 경, 1939년 7월 20일 주영 독일대사 디르크젠(Herbert von Dirksen)에게. 역사가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저서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1994)"에 인용된 말이다. 즉 늦어도 1939년 7월 영국은 독일의 폴란드 회랑 영유권 제기 목적이 단순히 영토할양이 아니라 폴란드의 종속화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회랑의 영토분쟁에 개입하게 된다. 당초 영국과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에게 동부 국경(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맞닿은)을 변경할 권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했지만, 1938년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병합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듬해 3월 명백히 비독일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마저 점령하자 독일의 목적이 독일계의 민족자결주의 따위가 아니라 유럽의 패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야 말할것도 없었고, 유럽에서 패권국(ex. 나폴레옹프랑스 제1제국)이 출현하는 꼴은 못 보는 영국도 독일의 행보에 경기를 일으켰다. 따라서 1939년 초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접수하자 그해 3월 영국은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하고 8월 25일에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2.2.10. 독소불가침조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소불가침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일은 폴란드를 자신의 적수가 된다고 보지 않았다. 독일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폴란드 침공시 소련과 영국, 프랑스의 개입이었다. 이 경우 독일은 1차대전 당시 양면전선을 재현하게 되기 때문에, 독일은 적어도 소련만큼은 적대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찬가지로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의 팽창주의에 맞설 생각으로 소련과 협상했다. 이전부터 소련은 서방과 독일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자국에 이익이 될지 열심히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소련은 두 세력을 모두 불신하고 오히려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나치즘과 반소적 태도 때문에 적대세력으로 인식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소련을 싸움붙여 두 나라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1939년 8월까지 서방과 독일은 각자 소련을 상대로 지리한 협상전을 이어갔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보다 독일이 내건 조건이 훨씬 매력적이었으므로,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독일과 전격적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양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도 불린다). 이제 거칠 것 없어진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한다. 2차대전이 개전한 것이다.

3. 결론[편집]


어느 한 가지 해석으로 온전히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 문서에 기술된 내용을 전부 엮는다고 하더라도 힘들다. 이 문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전간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1차 세계 대전과의 강한 연관성을 의식한다면, 최소한 19세기 중엽까지는 가야한다. 중요한 이념적 원인인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의 탄생 등등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동유럽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설명해도 독소전쟁은 파악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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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나치 독일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식민지보다는 레벤스라움을 대변되는 본토의 확장을 더욱 중시했다.[2] 예를 들어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이 이런 논조를 유지한다.[3] 오스만 제국의 후신 터키는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체결할 때도 이스탄불 영유를 댓가로 에게 해의 모든 섬들을 그리스령으로 인정했다.[4] 이 도움으로 발트 3국폴란드가 독립했다.[5] 예를 들어 폴란드 섭정왕국을 수립한 이유는 폴란드인의 독립국가 수립이 아니라 현지 폴란드인 추방 및 독일인 이주를 통한 독일인 거주지 확대 및 제국의 농업 배후지 확장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의 목적에 기겁하고 폴란드인은 놔두자고 제안했으나 어차피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실상 독일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므로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6] 국제여단의 지원이 있긴 했지만 국민군 세력이 받은 지원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7] 그래서인지 몰라도 폴란드를 침공 후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 선전포고를 했단 소식에 히틀러는 충격과 공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독일과 멀리 떨어지고 프랑스와 접경한 스페인에도 개입하지 않은 나라들이, 독일과 접경하고 영프와는 멀리 떨어진 폴란드에 개입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때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대외적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보다도 오히려 좋은 환경에 놓였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영프가 수용할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버린 자기 탓이니 영프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8] 대체로 도시는 독일인이, 농촌은 폴란드인이 우세했다.[9] 게다가 독일은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만 요구한게 아니라 유대인 추방과 소련을 적대하는 방공 협정 가입까지 패키지로 강요했다. 때문에 폴란드는 독일의 의도가 단순히 영토병합이 아니라 뮌헨 협정 후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자기를 종속국으로 만드는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10] 여기서는 193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