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국회의원 선거/정당별 결과/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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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KST 2016년 4월 13일 6시 ~ 1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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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서울특별시
1.2. 경기도, 인천광역시
1.3. 충청권
1.4. 영남권
1.5. 호남권
1.6. 강원도
1.7. 제주특별자치도
2. 결과
2.1. 지도부의 궤멸
2.2. 종합 요약
3. 패배 이유
4. 상세
4.1. 힘없이 쓰러진 대권 잠룡(潛龍)들
4.2. 계파 싸움의 결과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60413232529_852147_600_400.jpg
새누리당의 멘붕을 한눈에 잘 보여주는 사진.
참담한 결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상황실을 떠난 탓에, 상황판에 붙으라는 당선 스티커는 단 하나도 안 붙고 사람 그림자들만 가득하다.
알다시피 정당은 입법과 정책을 논의하고, 국회가 가진 권한으로 국민의 자유, 행복, 인권을 도모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앞날, 정책, 현실에 대한 시민 및 유권자와의 논의도 모두 사라졌고 '친박', '진박', '비박', '멀박', '탈박', '반박'처럼 볼썽사나운 대통령바라기 팬클럽으로 전락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소속인 아무개 후보는 아예 박근혜 대통령과 악수한 사진이 플래카드로 걸려나올 정도여서 지나가는 국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박에 대한 충성' 여부로 공천권이 구사되고 그대로 선거 당선까지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던 막연한 생각은 14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져버렸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박근혜 사당화 논란이 갈수록 악화되고 친박계가 대통령의 수족처럼 바뀌어서 이재오, 유승민을 찍어내는 등 그야말로 정부가 실책을 해도 막을 길이 사라졌다. 게다가 헬조선이란 단어가 국민들 사이에 유행할 정도로 경기침체와 국정화교과서 논란, 신공안정국을 비롯한 여러 비판이 나오는 와중에 저랬다는 것이 끝내 선거에서 제대로 박살나는 원인이 되었다.

초기, 공천 후보 선정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은 몇몇 정치적 삽질이 있더라도 당시 야권의 분열과 영남을 기반으로 한 든든한 보수정당 고정 지지층이 합해져 그래도 최소 과반수에 근접하는 의석은 따논 당상이라고 많이들 예상했었다. 심지어 과장된 예측이라는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개헌선인 200석까지 예상하는 설레발이 나오던 순간도 있었다.

파일:20대총선예측.jpg
[1][2][3]
실제 이 예측이 새누리당만의 설레발이었던 것도 아니고 과반 이상 혹은 과반에 가까운 의석 수를 차지하리란 예측은 당시 다수의 언론이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위의 경향신문 투표 참여 독려 기사와 같이 새누리당이 135석 확보에 그쳐 여소야대 정국만 만들어져도 새누리당참패라고 전망할 정도였다. 선거 전날까지만 해도 야권 분열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기에 새누리당이 의석수 1위를 뺏기는 문자 그대로의 패배를 할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 135석은 출구조사에서 발표한 새누리당의 최대 의석수였고, 실제로는 이 출구조사 기반 예측 범위 내에서도 새누리당은 최소 의석수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공천 후보 선정 진행 도중 새누리당의 '친박', '비박'의 전략공천 후보 선정에서 각 진영의 진흙탕 싸움으로 번져 나가며 당 분열이 심화되고 가열되면서 이에 질린 국민들의 표심이 한순간에 뒤집어졌다.[4]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거 운동 중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노원병 이준석 후보 선거 유세 때 참가하여 '안철수 씨에게 투표하세요.' 라고 말 실수도 했다.# 물론 선거 판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선거 이후 반새누리 성향 네티즌들에 의해 이 발언이 재주목받았다.

사실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징조는 보였다. 여론조사상 여전히 새누리당이 앞서고는 있었지만 추세가 집권여당에 영 좋지 않은 흐름으로 이어졌던 것. 우선 정권심판론이 정권안정론보다 높았고, 무당층이 범야로 몰리며 안그래도 떨어지는 추세던 새누리당과의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4월 1주에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새누리당 지지율이 2.7% 떨어졌는데, 수도권과 영남에서 크게 떨어진 결과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새누리당은 4월 6일부터 김무성 대표가 전국을 돌며 공천파동에 대한 사죄를 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너무 늦었다. 선거까지 1주일 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고, 막판 역전을 하기에는 진박과 공천 파동이 너무 마이너스라 결국 새누리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5][6]


1.1. 서울특별시[편집]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특별시종로구오세훈, 서대문구 을정두언, 은평구 을이재오[7]를 비롯한 수도권의 거물급 인사들이 죄다 낙선했다. 그 동안 여당이 의석을 차지했었던 강남구 을, 양천구 갑, 강동구 갑에서도 모두 패배했다. 물론 강남구 을은 선거구 변경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대치동이 제외되면서 야권에게 희망이 생겼고, 결국 그 희망이 이뤄졌다.[8]

양천구 갑28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28년이 실감이 안 간다면 7번의 국회가 바뀔 동안, 대통령이 5번 바뀔 동안[9] 새누리당만 연속으로 줄창 나왔던 지역이다. 즉, 어떤 의미로는 강남구 을 지역구보다도 오랫동안 콘크리트였던 곳인었다는 이야기인데, 뺏겼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있었던 원희룡이 사고를 점점 많이 터트리면서 반감이 심했던 게 주 원인으로 꼽힌다.[10] 거기다가 이 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나온 이기재원희룡의 보좌관이기도 했으니 원희룡의 의정에 대한 심판을 이번에 받은 셈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로는 사실 양천구 갑 문서를 들어가 봐도 알 수 있다시피 몇 가지가 더 있기도 했지만...

강동구 갑은 16대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이부영이 당선된 후로[11] 지역구 관내의 보수 기독교세와 명일동, 상일동 일대의 부유층 등 덕분에 보수정당이 계속 의석을 차지했으나, 해당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12]

그리고 송파구 또한 전통의 여당 강세 지역이었으나, 송파구 갑을 제외하고 모두 빼앗겼다.[13] 그나마도 송파구 갑은 출구조사 당시 더민주 박성수 후보가 앞서간 것으로 나왔다. 실제로 송파구 갑도 국민의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출구조사처럼 그대로 패배할 수도 있었다.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오세훈더불어민주당정세균 후보[14]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은평구 을 이재오마포구 갑안대희 또한 광탈을 당했다. 또한 17대 국회를 시발점으로 19대 국회까지 3연속으로 서대문구 을 선거구를 지킨 정두언 역시 김영호에게 압살 당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체적으로 지역 관리를 잘 해온 의원들[15]과 어느 정도 어부지리[16]를 제외하고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특히 '강남특별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전통적으로 새누리당의 지지층이었던 강남권 지역에서 무려 3석이나 내준 것은 치명타. 그 세 곳은 강남구 을, 송파구 을, 송파구 병[17].

용산구 역시 그 동안은 새누리 강세 지역구였으나, 현역 의원인 진영컷오프되어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되어 16년만에 민주당에 용산도 내주게 되었다.[18][19]


1.2. 경기도, 인천광역시[편집]


경기도는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지역도 있거니와, 경기도 지역은 전통적인 보수정당 강세 지역이었다. 1990년대 이후 신도시 개발 붐이 이뤄지면서 민주당계 지지도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당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대선과 2014년 지선의 승리자가 누구였는지만 봐도 판세 자체는 보수정당에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간신히 51:49 싸움을 하던 상황에서 민주당이 둘로 분열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누리당의 압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서울 못지않은 새누리당의 완패였다. 수도권에서 보수정당 강세였던 도시지역이 상당수 쓸려나갔고, 2기 신도시가 들어서는 외곽 지역의 선거구에서도 거의 대부분 완패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 강세 도시지역을 예로 들자면 경기도강남이라고 불렸던 성남시 분당구 갑과 을 지역구, 그리고 수원시 팔달구(수원시 병)가 있겠다. 이 세 곳에서 모두 더불어민주당에게 빼앗겼는데, 분당의 경우 강남과 민심이 비슷한 곳으로 민주당의 난공불락 지역으로 여겨져왔기에 충격이 컸다.

또한 수원 팔달구(병)까지 아예 빼앗기면서 수원시는 5개 선거구에서 전패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사실 수원시가 염태영 시장이 당선되는 등 야권 성향으로 바뀌긴 했어도, 수원 병 만큼은 예외였다. 남경필 현 경기도지사가 선친 대부터 일궈왔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였고, 전 경기도지사였던 손학규 조차 여기서 졌기 때문에 강남보다 어려웠던 곳인데 거기서마저 더불어민주당에게 당하고 만 것.

이유는 간단하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소속의 수원 병 김용남 의원이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던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을 향해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는 막말을 한게 컸다.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은수미를 끌어 내리는데는 성공했으나 자신 역시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후보에게 의원 자리를 뺏겼다.[20]

경기 외곽 지역 선거구라 하면 용인시, 남양주, 화성, 파주, 양주, 광주, 김포 등을 말하는데, 서울과 직접 맞닿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통근권에는 들어갈 만큼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들이다. 그리고 최근에 2 및 대단위 택지지구가 들어서 난개발이 심한 곳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며, 그런 이유로 동·읍·면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보수정당 강세지역이었던 곳으로 강남 이상의 텃밭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들 지역에 걸린 총 17개의 선거구에서 고작 5석을 얻는 데 그치는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이중 가장 개발이 많이 된 용인시에서는 처인구수지구 일대에서 수성을 했지만 기흥구 일대의 두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패배해 2:2로 동률을 이뤘다. 결과적으론 무승부였지만 농어촌 지역인 처인구(갑)와 강남/분당 민심과 비슷한 수지구(병)에서 새누리당이 10% 이내의 적은 격차로 쉽지 않게 이겼던 반면에, 기흥의 두 선거구(을,정)에선 더불어민주당이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올리며 15% 이상의 매우 큰 격차로 따돌리며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쓴 패배였다고 볼 수 있다.

화성에서는 동탄, 병점, 봉담을 낀 을/병 선거구에서 20% 이상의 격차로 대패했다. 오로지 농어촌 지역을 낀 갑 선거구에서만 서청원이 가볍게 당선되었을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문제로 시끄러워 전승을 예상했던 남양주에서도 3석 중 1석만 겨우 가져가는 패배를 당했다. 남양주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기존 의원들의 각종 불법 행위와 자격 미달로 공천 탈락하여 신인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던 지역구였기에, 새누리당이 큰 격차로 세 곳을 모두 가져갈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막상 선거에선 세 지역 모두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금만 더 민심이 쏠렸으면 남양주에서도 전패라는 결과를 얻을 뻔한 것이다.

기존 한나라/새누리 계열의 막강한 우세지역이었던 파주, 양주, 광주에서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파주의 경우 운정신도시 입주, LCD 공장 노동자(월롱면)와 문산 공업단지 개발로 인한 민심 변화/보수계의 표 분산/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탈이 겹치면서 두 선거구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새누리당 사무총장 출신인 황진하가 농어촌 지역인 을 선거구에 출마했음에도 패배하여 사상 처음으로 이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박정)가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양주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 1:1로 붙은 끝에 고작 39%의 득표율을 얻으며 무려 21% 차이로 낙선하여 수도권 최고 격차로 대패하는 굴욕을 맛봤고, 인구 증가로 인해 두 개로 갈라진 광주 선거구에서도 1:1 구도에서 대략 45:55 격차로 크게 지는 결과를 맞았다. 김포시에서는 갑 선거구에서 김두관 후보에게 새누리당 후보가 큰 격차로 패했고, 농어촌 지역이 많은 을 지역구에서도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한강신도시 유권자 표심에 힘입어 겨우 5% 차이의 당선되었을 뿐이다.

이밖에 고양시, 부천시, 광명시, 군포시, 구리시, 의왕시, 오산시 등등 도시 지역에서도 전패한 곳이 꽤나 많았다. 고양 갑 지역은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번갈아 당선되었으나 이번에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게 압도적인 격차로 패하고, 다른 지역은 더불어민주당에게 패했다.

경기도에서는 이른바 외곽 군지역 등 전통적 강세지역과 일부 야권분열로 인해 운으로 얻어진 지역을 제외하고 죄다 의석을 잃으면서 19:41이라는 역대급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구도는 17대 총선 탄핵역풍 때의 패배와 거의 맞먹는 구도다.그 때는 14:35였다.

그러나 경기도에서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야권 분열로 인한 수혜를 맛본 지역구가 몇몇 있어 그나마 대패 분위기 속에 어느 정도 숨통을 트이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안산시 단원구의 두 선거구가 있었는데, 여기는 세월호 참사의 대표적인 피해 지역이고 이 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아 민심이 매우 싸늘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 공천 파동으로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로 새누리당이 두 석을 싹쓸이하게 되었다[21]. 또한 안양 동안 을, 평택 을, 남양주 병, 성남 중원, 시흥 갑, 용인 갑(처인), 용인 병(수지), 의정부 을, 김포 을 지역구 등등 야권 분열이 아니었으면 거의 100% 졌을 법한 결과였지만 어쨌든 근소한 격차로 신승한 지역구가 상당수 나오면서 민심이 많이 죽었지만 3강 구도에서는 여전히 1위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저력이 남아있다는 것이 결과로 보여졌다.

인천광역시에서도 오랜 텃밭인 연수구 갑, 서구 을을 내주었다. 연수구 갑을 뺏긴 이유는 아무래도 연수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던 황우여의 수많은 논란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 그나마 부평 갑에서 야권 분열로 인해 100표 이하의 최소 격차로 어부지리로 당선된 지역구도 있었고 새누리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 둘을 포함하면 6:7로 그나마 균형을 맞춘 편에 속한다.


1.3. 충청권[편집]


강세 지역[22]이던 충청남도에서도 반전이 일어났다. 천안시에서는 6년만[23]에 의석은 다시 확보했으나, 젊은 층이 많은 천안시 을을 모두 내주고[24] 아산시 을당진시, 논산시·계룡시·금산군에서도 모두 박빙의 승부를 펼쳤지만, 끝끝내 패했다. 특히 7선에 도전하여 국회의장직까지 도전하려 했던 이인제도 정치 신인이자 안희정의 최측근이었던 김종민에 무릎을 꿇는 굴욕을 제대로 봤다. 충청북도에서도 정우택 의원이 간신히 4선에 성공한 청주시 상당구를 제외하고 청주시 나머지 지역구들인 서원구, 흥덕구, 청원구 지역들에서는 모조리 패했다.

이 외에 충청권의 나머지 두 지자체들인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에서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대전광역시의 경우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를 기준으로 보면 겉보기에는 3:4의 비율을 이루면서 더불어민주당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듯 보였으나, 자당 소속으로 당선된 3명 모두 50% 미만으로 당선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야권 분열로 인한 수혜를 본 경우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었다. 비례대표 선거의 경우엔 야권이 분열된 상황임에도 유성구[25]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1위를 내주기도 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친야 무소속 후보인 이해찬[26]에게 자당 후보가 7% 차이로 패배했다. 모든 지역에서 50% 이상을 득표하고 조치원읍에서도 야권 분열 덕분에 1위를 하는데 성공했으나 (관피아 문제 등을 계기로 반 새누리당 성향을 많이 지니게 된)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 지역에서 이해찬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이 원인이었다.


1.4. 영남권[편집]


부산광역시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출신인 조경태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넘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낙동강 벨트사하구 갑, 북구·강서구 갑은 물론 중심부인 부산진구 갑, 남구 을, 연제구[27]까지 죄다 털렸다. 더구나 경상남도에서도 양산시 을, 김해시 갑/, 창원시 성산구 등 4석이나 뺏겼고, 울산광역시에서도 공장들이 밀집한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출신인 무소속 후보인 김종훈, 윤중오에게 2군데나 내줬다. 정의당 노회찬 후보에게 창원시 성산구 지역을 뺏겨버린 건 .[28] 거제시양산시 갑, 창원시 마산회원구, 창원시 의창구 같은 곳들이 그나마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기는 했어도 그리 큰 표차가 나지 않았다. 울산도 남구 갑남구 을이 모두 새누리당 후보들이 당선되기는 하였지만, 그조차도 매우 어렵게 당선. 울산광역시에서 당선된 새누리당의 후보 세 명 중에서 과반인 득표율을 보인 당선자는 아예 없다. 반면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세 명의 의원 중 두 의원은 50% 이상의 득표율을 차지했다.

새누리당의 전통적 텃밭 대구광역시에서도 새누리 전략 공천으로 수성구 갑에 출마한 김문수 후보가 더불어민주당김부겸 후보에게 압살당하면서 의석을 내줬다.[29] 여기에 더해서 북구 을에서는 새누리당 양명모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홍의락에게 패배했다. 이로써 새누리당은 자기들의 텃밭이라 자부하던 "그 대구"에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의석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가져가는 대참사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나마 텃밭인 경상북도는 모두 싹쓸이했다.


1.5. 호남권[편집]


그나마 위안을 삼을 만한 점은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이정현 후보가 지역구 재선에 성공하고[30][31] 전라북도 전주시 을에서 전북 최초로 새누리당 소속의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이다.[32]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이들의 당선 역시 새누리당의 영향력은 없었고, 오로지 후보 본인의 노력만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봐도 무방하다.[33] 정운천과 이정현은 애초부터 출신부터 호남 출신[34]에 낙선이 뻔하다는 지적에도 꾸준히 지역구 기반을 다져가며 계속 밑바닥 정치를 해온 사람들이다. 특히 이들 조차도 선거 기간에는 소속당 보다는 후보 본인에게만 집중하도록 하는 선거전략을 짰을 정도로 호남 지역에서의 반 새누리당 정서는 여전했다.[35] 그나마도 호남 내에서는 광주에서 먼 지역이라 당선이 가능했다.[36]


1.6. 강원도[편집]


강원도에서는 강원도 타 도시에 비해서 인구가 많고 타 지역 출신도 많아 지역색이 옅은 춘천시원주시에서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춘천과 원주 갑은 이겼지만 원주 갑은 134표 차로 정말 간신히 이겼고 춘천 역시 개표 후반부까지 접전이 이어졌다. 원주 을에서는 끝까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 패배. 다른 지역에서도 당선되기는 했지만 의외로 야당 후보들에게 고전하는 모습이 많이 비춰졌다.

사실 도지사를 제외하면,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당연히 여당 강세지역일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강원도. 예전에 일부 지역구들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 후보들[37]에게 패하면서 내준 적은 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새누리당 텃밭이기도 했다.


1.7. 제주특별자치도[편집]


탄핵 역풍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제주 4.3 사건 공식 사과로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당계 정당(열린우리당)이 도내 국회의원 의석 3곳을 독차지한 이후에 계속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을 독점하던 제주도에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인해 제20대 총선에서 최소 1자리 정도가 보수정당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 그런 예상은 빗나갔다. 소위 제주판 3김 이라는 도내 민주당계 토호 정치인으로 도민들 사이에서 평이 좋지 않던 김우남의 지역구였던 제주시 을 선거구에서 출마한 새누리당 부상일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내 경선에서 김우남에게 승리해 출마한 오영훈 후보에게 3%p 차이로 석패하였다.[38] 나머지 두 선거구(제주시 갑, 서귀포)에서 출마한 새누리당 후보들은 모두 7%p 이상의 상당한 득표율 차이를 내면서 참패했다. 민주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도내 토호 정치인에 대한 피로감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발심[39]이 도민들 사이에서 더 컸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40]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박근혜 정부와 당 내부의 실정으로 인해) 줘도 못 받아먹은 것이다.


2. 결과[편집]


그 결과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에게 원내 제1당 자리를 빼앗겼고,[41] 여당 성향의 무소속을 다 입당시켜도 과반 확보는커녕 역으로 야당의 개헌선을 간신히 막은 120석을 겨우 넘긴 보수 정당 역사상 최악의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에 새누리당 안형환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패배를 선언했다. #

또한 원내 제1당 자리를 지키지 못함에 따라 국회의장 선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현행 국회의장은 원내 제1당의 최다선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 후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선출되는데, 2016년 4월 기준으로 원내 제1당은 더불어민주당이고, 친여 무소속을 다시 복당시켜 원내 제1당 자리를 되찾는다 하더라도 새누리당이 과반을 넘지 못함에 따라 범야권에서 표결 과정에서 제동을 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야당들과 국회의장 선출에 대해 일종의 거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국회 주요 상임위 자리를 요구하거나, 국회 부의장 선출과정에서의 지지를 대가로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국민의당의 첫 캐스팅 보트 역할의 행보가 주목된다. # 일단, 제1당이나 심지어 과반수를 차지하는 등의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사실상 차기 국회의장일 것이 확정되었었던 당사자 서청원 의원이 '어차피 야당에서 국회의장 자리를 안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새누리도 거의 포기한 분위기이며, 국민의 당의 박지원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여당에게 국회의장 자리를 줄 수도 있다'면서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을 내걸어서 국회의장은 야당에서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알력이 생기다 정세균 의원이 의장이 되는 실제 상황이 발생했다.[42]

이번 결과가 새누리당에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면 20대 총선의 새누리당 의석수는 역사상 보수 정당(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계열)이 가장 적은 의석수를 차지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직후 벌어진 총선에서의 여당 결과와 비슷한 수준이다. 심지어 탄핵 때는 투표율이 60%를 찍었지만 이번에는 58%에 불과하다. 서울 기준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이 얻은 의석 수는 16석이었다. 이번에는 서울 의석 수는 늘어났건만 획득한 의석수는 오히려, 12석으로 줄어버렸고, 새누리당 전통의 텃밭인 강남 3구의 8개 의석 중 강남 을, 송파 을, 송파 병 3개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에게 털리고 말았다. 그리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이 약진하였지만, 겨우 4석[43]밖에 못 건졌던 부울경에서만 이의 2배인 8석을 빼앗기고, TK에서도 2석을 빼앗겼고 강남지역에서도 5석을 빼앗겼다. 즉 전체를 보자면 탄핵 직후 새누리당 의석 수는 121석인데, 20대 총선 새누리당 의석은 122석이고 친새누리 성향 무소속 의원들을 죄다 복당시켜도 129석이다. 게다가 당시 총선에서는 탄핵 역풍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것이었고,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대 총선은 야권 분열의 호재 속에서도 참패한 것이다. 여러가지로 분석해보면 사실상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역사상 최악의 총선 참패다.[44][45]

그리고 만약 이 총선에서 새누리가 과반을 차지했었더라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드러났더라도 이 정도로 커지기는 어려웠을 것이기에 5년간의 새누리당, 더 나아가 9년 간의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이 막을 내리는 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2.1. 지도부의 궤멸[편집]


당 지도부 및 대선 주자급 유력 인사들도 모두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대선이 2년도 안 남은 시점인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의석수의 패배보다 더 뼈아플 수도 있다. 안철수, 손학규, 김두관 등이 줄줄이 갈려나간 2014년 7.30 재보선새정치민주연합과는 비교조차 안 될 엄청난 상황이다.[46]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아홉인데, 여기에는 당 대표도 포함한다.(애초에 공식 명칭이 당 대표'최고위원') 전당대회로 선출되는 선출직이 다섯(김무성,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당 대표가 지명하는 지명직이 둘(이정현, 안대희), 당에 몸담는 의원들이 결정하는 당연직 2명(원내대표 원유철, 정책위의장 김정훈)이다. 기타 대권주자 및 전직 장관 등 유력 정치인 몇 명을 추가했다. 낙선자는 취소선, 낙선은 피했으나 정치 인생에 큰 타격을 받은 경우는 ☆표시.

심지어 이때 살아남은 의원들은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김태호, 홍성•예산에서 생환한 홍문표를 제외하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 혹은 불출마한다(...).

  • 당 대표최고위원 김무성 (부산 중 & 영도)☆ : 당 대표이자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으나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비오 후보에게 40% 득표를 허용하며 부진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 대권 주자로서 타격이 크다. 물론 선거 결과와 관계 없이 총선이 끝나면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상태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선 출마를 위한 것이었고 총선 참패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총선 참패 때문에 더 주목받게 됐다.[47] 그래도 밑에 나열된 사람들보다는 사정이 낫다. 그나마 본인이라도 당선된 게 천만다행이다. 만일 본인마저 낙선을 했으면, 이 날로 정치판에서 쫓겨날 뻔했다. 이후 21대에는 불출마.

  • 당 최고위원 서청원 (경기 화성 갑)☆ : 통산 8선이며 화성에서는 재선이다. 개표 초반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살짝 밀리는 것으로 나오자 말을 잇지 못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개표 초반의 일이었고 이후 약 20% 차로 넉넉하게 이기긴 했지만, 문제는 서청원이 친박좌장이자 원로로서 이번 공천갈등이나 선거 책임에서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이다. 21대에는 우리공화당 비례 2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 당 최고위원 이인제 (충남 논산 & 계룡 & 금산) : 더불어민주당의 김종민 후보와 4년 만의 리턴 매치에서 패배했다. 게다가 해당 선거구에서는 예전부터 이인제를 가장 많이 찍어줬고, 이인제의 고향이 논산인 것도 있지만, 김종민 또한 논산 출신이었다. 현재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으면서,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무슨 선대위 공동위원장이냐며 원유철 급으로 욕을 먹고 있다. 이후 21대에는 컷오프되었다.

  • 당 최고위원, 원내부대표 김을동 (서울 송파 병) :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을 총동원하여 선거운동을 하였으나 소위 말하는 강남 벨트의 붕괴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후보에게 패배. 하필 '송파'에서 떨어진지라, 그 타격은 더 크다. 다만 송파구 병 지역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고는 줄곧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이다. 21대에는 불출마.

  • 당 최고위원 김태호☆ : 경남 김해 을 지역구이지만 불출마를 선언해서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김경수 후보에게 야권 최다 득표율 승리를 안겨주면서 낙선이 두려워 불출마한 게 맞다는 비야냥만 듣게 되었다. 출마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 때문에 당내 입지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은 셈이다. 21대에는 고향인 산청·함양·거창·합천에 무소속 출마해 당선되었다.

  • 당 최고위원, 전 대법관 안대희 (서울 마포 갑) : 마포가 험지냐는 논란 속에 차출되었으나 마포가 험지라는 것을 입증해버리며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후보에 광탈 당했다. 전략 공천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21대에는 불출마.

  • 당 최고위원 이정현 (전남 순천) : 새누리당 지도부 중 가장 상처가 적고 오히려 미래 가능성도 밝은 사람. 물론 친박계이기 때문에 공천 문제에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으나, 그 책임을 호남 지역구 재선 성공이라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업적을 세움으로서 상당 부분 상쇄하게 되었다. # 이정현의 입지와 위상이 매우 올라간 상황인데, 여기서 변수는 당선 이후 새누리당에 관한 인터뷰로 친박 이정현 “유승민, 사람으로 안 봐…김무성은 감이 안 된다”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사 내용에 의하면 유승민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치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진실과 충성이라고 하며, 배신의 정치를 하는 부류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표현한 점 때문이다. 다른 인터뷰 기사에서는 이정현 "유승민 복당해야"…다른 친박은 '글쎄' 라고 했지만 2015년 국회법 파동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대치한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를 이정현 최고위원이 맹비난했던 기사가 있다. 이 때문에 친박에서 유일하게 위상이 오른 이정현과 무소속으로 당 복귀를 시도하는 유승민의 충돌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 친박과 비박의 갈등 국면, 그리고 이정현이 획득한 승리의 가치가 강화되냐 빛바래냐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 조짐이 벌써 드러난 것인지 하태경, 이정현에 "진박 시리즈 2탄으로 보여질까 두렵다" 라는 기사가 나왔다. 21대에는 뜬금없이 영등포 을에 출마해 표 분산을 시키고 산화했다.[48]

  • 당 사무총장 황진하 (경기 파주 을) : 파주에서 3선을 했다. 거기다가 휴전선 접경으로서 여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그 파주[49]에서, 친여 무소속 류화선 후보의 표 잠식이 있긴 했지만 더불어민주당 박정 후보에게 7%차로 패배했다. 파주 3선 의원이 사무총장이 된 이후에 나선 선거에서 귀신 같이 낙선을 해버린 셈. 이로써,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공식을 또 한 번 입증했다.[50] 21대에는 불출마.

  • 당 제1사무부총장 홍문표 (충남 홍성 & 예산) : 지역구의 보수적 성향이 강한 덕분[51]에 무난하게 당선되어 지도부 괴멸 속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가 되었다. 21대에도 같은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 .당 제2사무부총장 박종희 (경기 수원 갑) : 더불어민주당 이찬열 후보에 약 10%차로 참패했다. 이로써, 수원 지역에서 새누리당은 전패. 게다가 수원 갑에 셀프 공천을 해서 부정적 나비효과(더불어민주당의 수원 싹쓸이)를 야기했다는 비판이 있다. 21대에는 고향인 포천•가평에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나 컷오프되었다.

  • 당 최고위원, 원내대표 원유철☆ (경기 평택 갑) : 본인은 여유롭게 당선되었으나, 새누리당 내에서는 최경환과 함께 패배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다.[52] 본인도 이를 의식한 듯 몸을 낮췄으나, 다른 최고위원들이 다 낙선하거나 패배 책임으로 사퇴하는 바람에 약 2달 임기의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총선 참패의 원흉 주제[53]에 무슨 비대위원장이냐는 당내의 반발에 밀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으로 역할을 축소하면서 맡지 않았고 정진석 당선인이 20대 국회 1기 원내대표에 선출된 뒤 그 직을 넘겨주고 만다. 21대에는 불출마.

  • 당 최고위원, 정책위의장 김정훈 (부산 남 갑) : 당선이 되긴 되었지만 부산에 몰아친 야풍에 같이 휩쓸려 나갈 뻔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정환 후보와의 표 격차는 2,500여 표로 약 4% 차이 신승. 같은 지역의 을 선거구에서는 실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21대에는 불출마.


2.2. 종합 요약[편집]


이번 선거에서 지도부 중 그나마 멀쩡했던 사람은 이정현, 홍문표, 김정훈 정도다. 김무성, 서청원, 원유철, 최경환은 지역구의 보수적 색채와 이름값 덕에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번 총선 때문에 낙선자들 못지 않게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뭐 낙선자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오세훈, 김문수는 아예 정치인으로서는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이외에도 총선 당시 새누리당내에서 이슈메이커가 되었던 인물들 중에서는, 원내부대표 조원진[54], 공천위원장 이한구[55], 그리고, 총선 직전에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한 윤상현[56]이나 안상수[57] 등이 새누리당 안팎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채널A의 보도


3. 패배 이유[편집]


새누리당의 패배 이유는 계속된 박근혜 정부무능과 독선적 행보, 지겨운 진박 vs 비박 싸움과 공천 파동. 그리고 무대책 특권층 편들기에 지칠대로 지친 기존의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거나 국민의당 등 다른 당으로 이탈했다고 보는 게 주류. 새누리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50대 이상 인구에서 앞선 총선의 투표율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당장 시간별 투표율만 봐도 노년층이 많이 투표하는 오전 시간 투표율이 줄어든 반면, 젊은 층이 많이 투표하는 오후의 투표율이 늘었다. 또한, 기존과는 달리 새누리당 - 더불어민주당 사이에 중도 세력인 국민의당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게다가 20, 30대 청년들의 표심도 얻지 못했는데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에서의 여러 논란들, 메르스 대유행 대처 실패, 유승민의 원내대표 축출 과정과 총선에서의 공천 배제, 노동개혁,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위안부 졸속 협상 등 소통없는 정책 추진, 언론통제#대한민국, 전월세 대란, 2014년 말 담배값, 소주값 인상, 방산비리생계형 비리 등 허술한 안보 의식, 국방비 인상 소홀, 대북 정책 실패, 박근혜 대통령 중국 전승절 참석 논란 등 친중 정책과 소원해진 한미관계, 정부와 새누리당이 제시한 청년실업ㆍ일자리 창출 등 각종 청년대책 정책들의 실패, 정부와 새누리당의 청년세대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20, 30대의 표심도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으로 돌아서게 되었다.#1#2

그리고 선거 내내 야당심판론과 일하는 국회를 주장했고 북풍까지 썼지만 야당심판은커녕 오히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만 심판당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 본질적 원인들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친박계인 서청원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를 당대표로 밀고자하는 움직임을 보였었다. 거기다 친박계 인사들은 비교적 당선되기 쉬운 곳에 배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험지나 수도권에 배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의 본질이었던 친박계는 전혀 세가 줄어들지 않았었다.

정권의 무능함, 공천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파갈등과 당의 오만함이 부른 참패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차후 당과 대통령 차원에서 어떠한 대처를 하느냐가 차기 대선까지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에게 의석수를 역전당한 참패에다 새누리당의 고위직 의원들이 사퇴, 대대적 물갈이가 예상되었고 결국 선거 다음날인 2016년 4월 14일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의원이 20대 총선 대패로 인한 당대표직을 사임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 다만, 국회의원직 사임은 아니므로 계속해서 당내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김무성 당 대표 사임을 시작으로 김태호 의원 또한 현 당직내에서 사임을 표하였다. 대대적인 새누리당 지도부의 책임론 강화와 사임요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고 당선된 무소속 국회의원들의 행보가 주목되는데 새누리당이 그나마 남은 기호 1번[58] 원내 제1당이라는 지위라도 지키려면 이들의 합류가 절실하다. 인천의 안상수 의원이 새누리당에 복당 신청을 했으며, 비상대책위원장을 일단 맡게 될 원유철 원내대표는 모든 무소속 당선인의 복당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친박계가 선거 전에 탈당한 후보에 대해 복당을 절대로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졌던 것에서 정반대로 변한 것이어서 반새누리 진영에서는 "전혀 일관성이 없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공천에 불복해 탈당한 무소속 후보들 중 대다수가 복당을 전제로 출마한 만큼 이들이 복귀할 가능성은 높으나 유승민과 같은 소위 '진박'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들이 복당하는 순간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하는 친박계의 복당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 어찌 될 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여당과 가까운 무소속 당선자 중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를 이긴 사람이 많다. 보수층도 새누리와 척을 졌다는 얘기며, 저들이 새누리로 복귀해서 뒤늦게 원내 제1당이 되더라도, 민심은 총선에서 새누리를 이미 버린지 오래되었다는 소리다. 물론 원내 제1당이라는 위치가 무척 중요하지만, 이런 식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면, 돌아선 민심에 아예 쐐기를 박는 꼴이라서, 무소속 당선자가 새누리로 복귀하는 길이 꽤 어렵다. 결국 20대 국회 원 구성 이전에 복당 조치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 20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복당을 신청한 사람을 모조리 받아들였다. 그것도 김희옥 비대위원장이 내린 결정이다. 이것에 친박계가 반발하면서 새누리당판 시빌 워의 서막을 알렸다.


4. 상세[편집]



4.1. 힘없이 쓰러진 대권 잠룡(潛龍)들[편집]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19대 대선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 출마한 여권의 대권 잠룡들이 엄청 피를 봤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김무성 대표는 부산 영도에서 이겼지만, 상대였던 김비오 후보도 40% 가량의 지지를 받았다. 한때 본인의 지역구였던 부산 남구 을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뽑혔다. 부산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다섯이나 당선되어서 더욱 휘청거렸다. 이제는 선거에서 새누리가 참패해서, 대선후보로 나서려던 본인에게도 문제가 일어났다.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후 재기를 노리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김무성 대표의 대안으로서 거론되던 유력 대선주자였지만, 서울 종로에서 정세균 후보에게 참패했다. 이는 과거의 실책인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시장직을 일방적으로 던진 것에 대한 분노가 아직도 시민들 마음 속에 있음을 잘 보여준 결과이다. 실제로 본인도 낙선된 뒤에 시민들이 자신이 시장직을 중도에 사퇴한 것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던 것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언급했다. 거기다가 노원구 지원 유세까지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오세훈은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지, 노원구로 출마한 게 아니다. 본인이 저지른 실책이 2016년 4월에 그대로 되돌아왔다. 결국 선거 이후에 홍준표 의원과도 절연당해서,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다시 당선되기까지 정치적인 침체기를 더 겪어야 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대구에서 김부겸 후보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하면서 역으로 김부겸을 야권 대선주자로서 부각시켜주고 본인은 몰락하였다.[59] 무소속으로 출마한 유승민 후보는 당선 후 복당을 통해 새누리당의 대권주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지만, 무소속 연대를 이루어 본인이 지원한 다른 후보가 모두 패하면서 세는 약한 상황이다.


4.2. 계파 싸움의 결과[편집]


대다수에서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리더십이 이번에는 통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평하였다. 지난 2015년 재보선 때까지만 했어도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김무성호의 새누리당도 순탄하게 달려가게 되어서 2016년 총선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그러나 선거 전 공천에서부터 칼자루를 쥔 친박 이한구 위원장과 김무성으로 대표되는 비박간의 새누리당 당내 갈등, 박근혜 대통령과 김 대표의 소원해진 관계로 인한 (김무성계를 제외한) 비박들의 숙청에 가까운 컷오프와 탈당, 심지어 진박 윤상현 의원의 "김무성 XXX 죽여버려" 녹취록 공개 등 친박과 비박의 이전투구가 전국에 생중계되고 이로 인해 발생한 옥새의 난과 무소속 출마자 존영 반납문제 등 기본적으로 새누리당의 친박연대화에 이은 공천 및 선거 잡음 등 여러가지 홍역이 주 지지층인 50~60대의 심기를 건드려 새누리당과 김 대표에게 참패를 안겨주었던 것이 아니냐는 평도 있었다. 당의 입장에서는 서로간의 이익을 차지할 문제라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그저 지저분한 이전투구에 불과하며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제를 신경써야하는데도 이를 외면하였다고 하여서 국민들이 새누리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김 대표의 옥새의 난 이후 일부 극우 보수층들 일부도 새누리당에 등을 돌린 것도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에는 이들 새누리당 이탈표를 가져갈 국민의당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게 이전과 달라 진짜로 이탈표때문에 선거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텃밭인 대구 지역에서의 공천 또한 마찬가지다. 중진의원에 해당 지역 출신이라지만 이미 수도권 규제 완화 등과 같은 행보로 지역민심과 등을 돌려버린 후보를 내려보냈다는 것은 선거에서 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상대가 해당 선거구 내에서는 수년간 각고의 노력끝에 "저렇게 열심인데 한번 시켜줘야지"라는 여론이 조성된 후보였으니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북구 을 또한 마찬가지로 3선 의원에 지역기반이 탄탄한 서상기를 내치고 낙하산 공천(양명모)을 했으니 과연 누가 좋아할까? 결과는 몇 년동안 주말 소모임, 현안논의회 등을 열면서 지역기반을 다져나간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그것도 압도적(김부겸 62%, 홍의락 52%)으로.

결과적으로 이번 공천을 주도했던 친박계는 7선 도전이인제 등 친박이거나 진박임을 표방한 현직 의원의 절반이 나가떨어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나마 친박계에서 위안삼을 수 있는 건 친박 성향의 초선 의원이 다수 들어왔다는 점. 그러나 대권주자가 다수 있는 비박계 또한 웃을 수 없는 것이, 김무성계는 상당수 살아남았으나, 정작 자신했던 부산 지역구는 새누리 전승은커녕 부산에서 더불어민주당에 5석이나 내주고, 탈당한 유승민계 의원은 유승민 본인만 살아남았기 때문. 친이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6선 도전의 이재오와 4선 도전의 정두언 또한 장렬하게 침몰했다. 최고위원회 구성위원 9명 중 5명이 낙선(이인제, 김을동, 안대희)하거나 최고위원직을 사퇴(김무성, 김태호)하면서 당 자체로도 상당한 진통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회의장 업무 사정으로 탈당하여 무소속 활동중인 친이정의화 의원은 아예 사화에 빗대어 친박계가 주도한 이번 새누리당 공천 과정부터 강력히 비판하며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번 총선에선 불출마했었지만[60], 정계 은퇴는 아니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규합해 독자 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새누리당과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4.3. 박근혜 정부 레임덕의 시작[편집]


박근혜 정권이 심판당했다.

- 총선 다음 날 경향신문 1면 헤드라인[61]


참패하고도.. '겸허한 한마디' 없는 청와대

- 조선일보


국회 심판론을 운운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정작 총선에서 국민들이 심판한 것은 박근혜 정부였다. 결국 이번 총선으로 박근혜 정부는 예상하였던 과반을 차지한 새누리당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남은 1년 10개월의 임기[62]를 무난하게 마무리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박근혜 정부로서도 이 총선은 청천벽력이었다.일단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욕을 먹어가며 친박계의 대표주자였던 최경환 등 친박계 후보들을 영남권의 텃밭에 공천했지만 친박계의원 상당수가 낙선해버린 상황이다.결국 근본적으로 국회에서 자기를 지지해줄 국회의원이 부족한 상황에 거기에 새누리당의 이번 선거의 패전의 근본원인이 친박과 비박간의 계파싸움이라는 것이 당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인정하는 상황인데 이유야 어찌됐든 친박 비박의 근본 원인인 박근혜에게 책임론이 돌아가는 건 불가피하다.[63] 거기에 유승민 같은 비박계 무소속 국회의원들도 생각해보면 여당인 새누리당의 대혼란은 불가피하고 까닥 잘못하면 여당마저도 박근혜를 버리는 모양새가 나올수도 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싸움이 잘 풀려도, 일단 국회가 여소야대다. 국회가 행정부를 통제하는데 거기서 박근혜를 두둔할 세력은 새누리뿐이다. 야당들도 당장 이번 선거에서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박근혜를 비판한 세력이다.

캐스팅보트가 된 국민의당은 그나마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지만 안철수 본인부터가 새누리당이라는 소리를 욕으로 받아들이며,[64] 천정배, 박지원, 정동영을 비롯한 주요 인사는 평생을 새누리당과 맞선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에게 가장 적대적인 호남이 지지기반이라서,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완벽한 적군이다.[65][66] 그리고 정의당은 의석을 얻은 정당 중 가장 좌측 스탠스로, 박근혜 대통령과는 상극이다. 국회의원 의석수만 따지면 레임덕 때문에 물태우라 불리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와 맞먹는데 그나마 물태우 때는 가끔씩 지원해줄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그나마 지지층이 겹치는 기독자유당이 현역 의원을 영입하며 힘이 될 수도 있었으나, 선거에서 3% 미만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비례대표 의석을 얻는 데 실패, 당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졌다. 거기에 원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레임덕이 일어나는데 이런 상황과 겹치면 정말 역대급 레임덕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당장 세부 정책을 살펴보면 박근혜 정부가 어렵게 통과시킨 테러방지법과 국정교과서는 대수술을 거칠 확률이 높다.[67] 게다가 더불어민주당은 경제심판론을 걸고 선거판에 뛰어들어서 승리를 쟁취했다. 이번에 새누리당이 완패한 까닭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실제로 대통령이 내세울 경제정책도, 줄줄이 발목을 잡힐 처지다. 이미 시민들은 여당이 내세우는 경제 정책을 더는 안 믿는다고 선언했다. 국회의석을 151석도 차지하지 못한 여당이 억지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그렇게 나올 명분도 사라졌기 때문에, 함부로 밀어붙였다가는 극단적으로는 탄핵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정리하자면 옛날처럼 굳센 지원은 사라졌다.더 나아가서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새누리당에게마저 버림받는 최악의 행정부가 된 것이다. 정권 초기부터 시달린 논란이 이번에 절정을 찍었다. 다시 말하지만 총선 이후 친박계 간판급 일부가 나가 떨어졌고 비박계가 당권을 잡을 경우 청와대와 각을 세울 가능성도 있다. 참여정부의 사례를 들면 대선이 1년 반 정도 남은 2006년 지방선거 대참패와 재보선 연패로 당내에서 비노계열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결과적으로 당이 분열되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탈당했다. 이것은 대통령과 당 간의 대립이 가장 심각했던 때의 이야기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현 대통령이 어리버리하면,(심지어 그렇지 않더라도) 집권당이 정권을 다시 잡으려고 현 대통령을 버리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68] 당장 박 대통령이 누구와 척을 져서 이득을 봤는지부터 생각해보면, 이런 최악도 일어날 확률이 꼭 있다.

박 대통령은 완전 멘붕상태인 모양이었는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서 "민생 챙기는 국회가 되길 바란다" 라는 매우 짧은 입장표명만 내놓았다. 하다못해 '투표로 증명해준 정부에 대한 민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라는 식의 형식적인 반성조차 없었다. 지나친 친박/비박타령, 현 행정부에게 반기를 든 민심처럼, 중차대한 패배 원인을 대통령과 청와대가 책임질 일인데도 저 모양이다. 이것은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2016년 4월 15일 노르웨이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노동개혁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 하에 이를 적극 추진해 나갈 것." 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이전과 동일한 행보를 이어나갈 것이란 뉘앙스의 메시지를 투척했다. 당연히 반응은 부정적.이를 두고 노회찬 의원은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건 박근혜 대통령의 셀프 레임덕이다" 라고 언급을 했다. 또한, 윗동네 역시 조선중앙통신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앞으로 새누리당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식의 조롱과 함께, '민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대북 적대시 정책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더더욱 거세게 넣기도 했다.

선거 후 닷 새 만인 4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관해 첫 공식 반응을 보였다.

"이번 선거 결과는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사명감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도록 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라고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발언했다.

4월 26일 주요 언론사의 편집 및 보도 국장단과의 오찬 간담회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간담회 내용 전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4월 26일이나 4월 13일 전이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후에도 총선 참패에 대한 반성은 하나도 없었고, 친박과 비박의 계파갈등은 총선 참패 후에도 더 심해졌고, 김재수 장관 해임안 거부권 행사 등 새누리당이나 정부나 총선 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2016년 가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추문이 터지면서, 박근혜 정부공중분해 되었고 새누리당마저 둘로 쪼개버리게 한 뒤 정권마저 상대 진영에 넘겨주었다.


5. 관련 문서[편집]



[1] 실제 상황은 우측 2개 기반에 좌측 하단 1개를 적당히 섞은 결과가 되었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과반 실패를 넘은 대참패를 당했고, 더불어민주당은 1당이 되긴 했지만 호남에서 국민의당에 의석을 많이 빼앗긴 절반의 승리, 국민의당은 호남 싹쓸이를 하며 3당 체제를 구축했지만 수도권에선 고작 2석을 가져갔기에 역시 절반의 승리였다.[2] 여담으로 상단 두 사진은 각각 대구광역시의 새누리당 후보들과 경기도 수원시의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었는데, 좌상단에서 김문수(수성구 갑)는 낙선했지만, 우상단 후보들은 김영진(수원시 병)을 포함한 모든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그것도 수성 갑과 수원 병은 모두 새누리당의 텃밭이었다![3] 우측 하단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문재인의 대선 후보 예측과 안철수VS호남 등을 예측했다.[4] 애초 새누리당의 텃밭인 경상도 지역과 부산, 대구 지역 등에서 압승이 예상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친박의 이기적 행보와 비박계 공천 학살 및 이에 반발한 옥쇄런 등의 내분으로 인해 보기 좋게 무너지고, 텃밭이던 TK가 이런 새누리당의 행보에 분노한 민심을 보여주는 듯 전국구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해버렸다. 그나마도 민주당 김부겸으로 확실하게 갈아엎겠다고 유권자들이 몰려든 수성구 갑에서 전국 평균을 훌쩍 뛰어넘은 68.6%의 투표율을 보여서 투표율이 좀 더 나온 거였다. 참고로 수성 갑은 전국 지역구 중 2위의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1위는 전남 순천이었다.(68.8%) 새누리당 이정현이 재선에 성공한 그 곳 맞다.[5] 이미 선거 1주일 전에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에서 125석 전후가 될거 같다는 보고서가 당 윗선으로 올라갔지만 다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오세훈인데 언론에 공표된 여론조사만 믿으면서 자신이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다른 지역구에 응원 유세를 다녔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오세훈 하향세-정세균 상승세였고 결국 13% 차이로 정세균에게 대패했다.[6] 여의도연구원의 선거 예측은 2010년대까지만 해도 꽤 정평이 나있었는데, 2010년 지방선거때도 모든 언론사들의 공식 여론조사에선 한나라당 후보들이 여유롭게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여의도연구원은 바닥 민심이 매우 차가우며 현재의 지지율은 조사방법에 의한 오차일 수 있다는 보고서를 지도부에 제출했으나 무시당한 전례가 있었다. 4년 뒤인 2020년 총선에서도 미래통합당이 지역구에서 80석 안팎으로 총 100석 달성도 위험하다는 여의도연구원의 보고를 받고 당에 비상이 걸렸는데 실제 결과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다만 2018년 지방선거 때는 당시 여의도연구원장이 광역자치단체장 최소 5곳 확보 같은 뻥카를 치다 대패를 당하며 여의도연구원도 한물 갔다는 식의 조롱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게 언플용 뻥카였는지 진짜 그렇게 믿은건지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7] 공천 배제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이 진통 끝에 은평구 을에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범 보수 세력, 당시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인 새누리당의 후보로 봐야 한다.[8] 그런데 사실 저 지역들 포함해도 더불어민주당전현희 후보가 신승하는 결과긴 했다. 그만큼 이 선거에서 강남의 반보수 정서가 강했던 것.[9]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10] 이렇게 지역구를 뺏겨놓고 정작 본인은 2014년2018년 지선에서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연속으로 당선되어 재선을 맞이해 사실상 범보수 잠룡 후보 중 몇 안 되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11] 다만 이부영은 16대 국회의원 말기인 2003년에 한나라당을 탈당해 김부겸 등과 함께 민주당계 정당인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17대 총선에서 대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그를 꺾은 인물은 이부영의 측근이었던 김충환이었다.[12] 이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자 총선 당시 이 지역구의 새누리당 후보였던 신동우테러방지법 발의 의원들 중 한 명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온 진선미해당 법안에 반대하는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 중 하나였던 점이 영향이 컸다. 그 외에도 신 후보가 구청장, 지역구 국회의원 시절에 주민들의 의사와 그다지 맞지 않는 행동을 종종 한 것, 강일동이나 고덕동 등지의 택지지구에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1970~80년대생 부부들이 많이 입주한 것도 그의 패배에 영향을 끼쳤다.[13] 송파구 갑에서 재선에 성공한 새누리 소속 당선자 박인숙은 지역구 내에 있는 서울아산병원의사 출신으로, 소아심장질환 부문에서 국내 본좌급 권위자이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직후만 해도 모 보건의료 팟캐스트에서 "박근혜의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는 모습에 매료돼 새누리당을 선택했다."는 발언을 하던 그녀는 최순실 게이트 당시 탄핵 찬성 입장을 스스로 밝혔고, 바른정당에 몸담았다가 다시 2018년에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의정 활동을 하던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사람이 이렇게 됐을지에 대한 판단은 알아서(...)...[14] 이후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맡는다.[15] 강서구 을, 양천구 을, 동작구 을, 관악구 을 정도. 근데 특이하게 죄다 을 지역구들이다.[16] 대표적으로 중구·성동구 을. 여기는 전체적으로 대략 야권(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6:새누리당 4였지만, 야권(더불어민주당 이지수 후보, 국민의당 정호준 후보)이 단일화에 실패해 근소한 차이로 새누리당 후보 지상욱이 당선되었다. 참고로, 서울특별시 중구는 19대까지는 단일 선거구였으나, 인구수 문제로 이번 선거부터 성동구 일부 지역을 합쳐서 중구·성동구 갑이 되었는데, 중구 19대 현역 의원은 정호준.[17] 다만, 셋 중에 송파구 병 지역구는 지역 특성상 다른 강남3구 지역구들과는 달리 야당 성향이 두드러지기 쉽기는 했다.[18] 재미있게도 16대 총선 당시 용산 후보로 민주당에는 설민석 강사의 아버지인 설송웅, 한나라당에는 진영이 공천되어 접전 끝에 설송웅이 당선되었다. 이후 2012년 설송웅은 새누리당으로, 진영은 더민주로 옮겨가면서 묘한 크로스가 되었다. 다만, 설송웅은 이듬해인 2017년에 국민의당으로 다시 당적을 옮겼다.[19] 다만, 진영 의원이 4선을 하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행정안전부장관을 하게 됨에 따라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나마 다시 용산을 탈환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초박빙정확히는 더불어민주당정의당의 분열.으로 겨우 이긴 것이다.[20] 이 필리버스터 말고도 보좌진들한테 일 못하면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의 갑질까지 했다는 게 알려진 것 때문에 본인의 낙선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7월 재보선 당선 이후 남경필과의 갈등도 낙선의 또 다른 패인이었다.[21] 이 결과를 보고 단원구민 다수는 물론 타지역 주민들조차도 굉장한 실망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지역구에서 당선된 두 의원의 이후 행보를 보면...[22] 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천안시 서북구, 아산시 등은 제외.[23] 정식 총선에서는 무려 24년만이었다.[24] 그나마 간신히 얻은 천안시 갑 선거구박찬우 의원의 당선무효로 인해 이후에 치러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빼앗기고 만다.[25] 이 지역에는 대덕연구단지에서 근무하는 30~40대 연구원들이 많이 거주하며, 카이스트, 충남대학교의 영향으로 외지 출신 청년층도 많은 편이다.[26] 이후 동해 9월에 원 소속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한다.[27] 사실상 부산에서의 새누리당의 몰락을 나타낸 증표가 되었다. 나머지 지역구들이야 19대 총선 때 몇% 차이로 결정났던 지역구들이였기에, 새누리당이 실책을 한 이상 민주당 쪽에 넘어갈 거란 예상도 있었지만, 연제구는 김희정 의원이 재선을 했고, 이전까지 민주당 의원의 최고 득표율이 37.53%(그 수영구보다도 낮았다.)일 정도로 보수세가 탄탄했기 때문이다.[28] 단, 창원시 성산구 일대는 각종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라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성향 때문에 진보 진영에게 꽤 유리한 지역이라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노회찬 이전에 진보 진영 간판 인사였던 권영길의 지역구가 바로 지금의 창원시 성산구였다.[29] 사실 김부겸은 대구 출신이 아니라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북도 상주시 출신이나, 학교를 초중고 모두 대구에서 나왔다. 출신 고등학교도 대구에 있는 경북고등학교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나왔을 땐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민주당계 후보로 40%라는 어마어마한 지지율까지 얻은 상태. 심지어 시장 출마 당시 수성구 갑 지역에서는 상대였던 권영진 현 대구시장보다 득표율이 높았었다.[30] 비례대표 경력까지 포함하면 총 3선이다.[31] 여긴 호남인데도 민주당계 정당이 생각보다 열세를 보였던 지역인데, 민주당 계열 국회의원을 지냈던 서갑원이 그야말로 깽판을 쳐놔서 민심이 아예 돌아서 버렸다. 거기다가 이번에 나섰던 노관규 후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평가다. 자세한 것은 순천시/정치 문서 참조.[32] 15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전신 계열이었던 신한국당 강현욱 후보가 전북 군산에서 당선된 이후로는 처음이다.[33] 심지어 정운천은 책자형 선거공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다.[34] 정운천은 전북 고창군, 이정현은 전남 곡성군 출신이다.[35] 선거운동 하면서 빨간 조끼만 입고 새누리당의 이름은 최대한 가리고 친박(이정현)과 친이-비박색(정운천) 또한 지워서 지역일꾼인 점을 강조했다. 예산폭탄이라는 여당의 필살기 또한 둘다 시전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앙당과 김무성 대표의 지원 또한 거듭 거절하였다.[36] 전북권은 범 전남권(광주전남)과 정치적 정서가 다르고, 또한 범 전남권도 (DJ와 동교동계의 영향으로) 정치 영역에서는 목포와 그 주변의 소위 서부전남이 인구수나 경제력 대비 동부전남에 비해서 과다대표되어 있다. 즉 정치적인 의미에서 일반적인 '광주전남'의 이미지는 실제로는 서부전남의 그것에 매우 가깝다. 광주도 전남권 내의 지리적 위치가 정중앙에서 보다 북서쪽에 가까운 것도 작용한다. 한편 광주와 가까울수록(전북 남부 지역이나 광주시 주변의 시군들 - 나주, 화순, 담양, 장성 등) 5.18의 상처가 크게 작용해서 보수정당에 대한 반감 또한 거세진다.[37] 예를 들자면 태백-영월-평창-정선의 이광재 후보나 최종원 후보, 원주시의 이창복 후보, 철원-화천-양구-인제의 이용삼 후보, 고성-속초-양양-인제의 송훈석 후보. (다만 뒤의 두명은 초선 때에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당적으로 정식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이후에 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옮긴 경우이다.)[38] 출구조사에서는 부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 뒤집혔다.[39] 총선 1년 전의 메르스 사태로 인해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크게 줄어들어 지역 경제가 타격을 받기도 했다.[40] 그로부터 2년 전에 치러진 6회 지방선거에서는 자당 소속의 원희룡이 당선된 바가 있으나 이는 원희룡 개인의 이미지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그 제주 3김 중 하나였던 신구범이었기 때문에 당선된 것이며 새누리당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었다.[41] 게다가 너무나도 아깝게 패배했다. 새누리당은 122석, 더불어민주당은 123석으로 1석만 더 차지했더라면 새누리당이 이겼을 것이다.[42] 물론, 국민의당이나 민주당쪽에서 이것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대체로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절대 수용하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내놓은 제안이며 민주당을 대상으로 차후 국회상임위나 국회부의장 자리를 가지고 협상을 유리하게 끌기위한 일종의 전술이라고 보고 있다.[43] 경남 김해시 갑(김맹곤), 김해시 을(최철국), 부산 사하 을(조경태), 울산 울주(강길부).[44] 더구나 17대 총선은 그나마 TK권, 서울 내 부촌들(강남3구, 용산, 목동 등), 성남 분당권을 지켰기라도 했지, 20대 총선에서는 해당 지역들까지 상당 부분을 빼앗기면서 17대 총선보다도 더욱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45] 하지만 4년 뒤, 이 결과가 애교로 보일 정도의 충격적인 대패를 겪게 된다. 심지어 이때는 민주당이 여당인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에 여러 악재가 있던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인데다 안철수를 위시한 제3당 변수도 없는 1대1 구도의 선거였는데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당했다.[46] 정작 그때 날아간 줄 알았던 김두관은 김포시 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 손학규의 측근들은 대거 원내에 입성했다. 안철수도 본인은 당선되었고, 그가 창설한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엄청나게 선전했다.[47] 다만 김무성은 친박계 쪽에서 해먹은 게 넘사벽으로 많아서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견해가 중론이지만, 한 쪽에게 책임을 물리기에는 너무 심하게 졌다. 그에게도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선거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권 후보 지지율이 그야말로 급전 직하했다.[48] 몰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과반 득표율을 차지했기 때문에 표 분산이 없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49] 20대 총선 시점에는 신규 아파트단지가 많은 탓에 전과 다르다는 분석도 있다. 수도권 아파트 입주자가 대부분 야권지지세가 강한 젊은 계층인데다, 아파트라는 특성상 인구도 많다[50]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방호(경남 사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권영세(서울 영등포 을) 당시 사무총장이 연이어 낙선했다.[51] 그마저도 내포신도시 개발이나 홍동 지역의 귀농 인구 등으로 인해 보수 성향이 예전 만큼 강하지는 않은 곳으로 변하고 있다.[52] 출구 조사 발표 직후, 원유철의 표정은 전설로 남아 있다. # [53] 특히 수도권 선거를 책임져야 하는데 겨우 37석(자당 성향 무소속 2석 포함)만 얻는 대참패를 당했다.[54] 본인은 당선되었으나, 새누리당 내에서는 최경환과 함께 진박 감별사로 적극 활동하면서 공천과정에 잡음을 계속 불러일으킨 당사자로 꼽히고 있다.[55] 총선 직후 계파 편향, 독단적, 독선적인 태도로 공천을 처리한 것 때문에 대사를 그르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56] 당 대표를 대놓고 디스한 것이 들통나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하며 무소속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7] 인천광역시를 빚더미에 올려 놓은 원흉으로 지목되어, 지금도 까이는 그 분 맞다.[58] 선거 때는 국회의 의석 순으로 번호가 결정된다.[59] 선거 후 김부겸 본인은 대선에 나가지 않고 지역구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야당 대선 후보로서의 입지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60] 국회의장을 역임한 의원은 다음 총선에선 출마하지 않는게 관례로 자리잡았지만, 이것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61] 경향신문은 총선 당일 아침에 발행된 신문 1면 헤드라인을 다음 날 예상 1면 네 가지로 실었다. 각각 여당 압승, 야권 압승, 여당 턱걸이 승리, 여당 턱걸이 패배였는데, 결과는 야권 압승 예상 기사에 가까웠다. 참고로 해당 예상 기사의 야권 압승편조차도 새누리당135석으로 참패...라는 내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62] 총선 당시에는 그럴 예정이었다. 이마저도 결국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11개월이 되어버렸고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기간은 그중 8개월 정도였다.[63] 게다가 박근혜는 2016년 4월 13일에 붉은 옷을 입고 왔다. 문제는 새누리당을 상징하는 색상이 빨강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때부터 탄핵 사유였다 카드라[64] 새정연 탈당 직전 '어떻게 새누리당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65] 만약 안철수가 더민주와 새누리당 사이로 줄타기를 해도, 호남이 새누리라면 질색을 하기 때문에, 대개는 더민주당 쪽으로 기울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득표율이 이정현, 정운천의 지역구를 빼면 전부 20%를 넘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66] 원래 호남에서 민정당 - 민자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진영 정당은 표를 절대 줘서는 안되는 당으로 인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부의 영남 집중개발에다, 결정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67] 일단 이론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새누리당이 1/3은 차지해서, 겨우 막을 수는 있다. 다만 그랬다간 총선에서 새누리당에게 등 돌렸음이 확실시된 중도층이 곧 있을 대선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안 봐도 뻔하기에 새누리당 측에서도 쉽사리 밀어주기가 어렵다.[68] 정치9단이자 당 장악력이 엄청났던 양김마저 말년에는 탈당해버린 게 정치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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