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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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피해자와 피의자
3. 사건 개요
3.1. 사건의 뒷면
4. 사건의 결과
5. 뒷이야기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59년 2월 18일 수요일 대한민국 육군 제28보병사단 제81보병연대 1대대에서 대대장사단장M1911 권총으로 살해한 당시 창군 이래 최악의 사건으로 1959년 한국 10대 뉴스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세간을 크게 뒤흔들었다. 대한민국 국군 내 프래깅, 상관 살해의 대표적 사례이자 별들의 무덤으로 유명한 제28보병사단이 군대 내 사고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사건.


2. 피해자와 피의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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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5.13~1959.2.18) 육군 준장은 1921년 5월 13일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아버지 서병두(徐炳斗, 1899~1961)[1]와 어머니 밀양 박씨(1901~1929) 박태길(朴泰吉)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을 지낸 서상환[2]이 그의 종조부이며 아버지 서병두는 용남공립보통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통영읍회 의원, 경찰서 고문 등을 역임했다. 서정화내무부장관은 그의 둘째 남동생이다.

서정철은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징병된 적이 있으며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했고 육군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한 뒤 제3보병사단 부사단장, 육군기갑학교 교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과장 등을 거쳐 미 육군 참모대학 유학 후 1956년 제28보병사단장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성격이 매우 급하고 거칠어서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부하들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찬다든가 철모 쓴 머리를 지휘봉으로 내려칠 만큼 과격한 부분도 많기는 했지만 부하를 마구잡이로 학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머리가 좋고 영어에 능한 군인이었다. 평소 부하들에게 "현대 장교들은 운전, 영어, 타자에 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장교들을 시험할 정도로 그 시대 군인 중에서는 지식을 강조했다.

장군이 된 이등병으로 유명한 최갑석 장군(현지임관, 1983년 소장 전역)이 (구)제6군단 포병 대대장(소령) 시절 제28보병사단에 배속된 일이 있는데 사단장 서 장군이 대대를 방문해서 최갑석 소령에게 운전할 줄 아느냐고 묻자 최 소령은 관측장교(소위) 시절부터 운전을 해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서 장군은 최 소령이 운전하는 지프에 타고 포병 훈련장을 돌게 했는데 운행 내내 서 장군은 보조석에서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잤다고 한다. 나중에 사단 참모회의 때 서 장군은 "최갑석 대대장은 운전을 잘 한다. 타고 가는 내내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였다."고 최 소령을 대놓고 칭찬하기도 했다. 즉, 까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성에 차기만 하면 그만큼 보상을 하는 일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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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인 서정철 장군을 살해한 6297부대 1대대 대대장 정구헌(鄭究憲) 중령은 1925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육사 8기생으로 군문에 들어선 뒤 미 육군보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장래가 유망한 장교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사생활이 깨끗하고 정의감 넘치는 수재였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자신의 생각과 대치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의견을 깔아뭉개거나 상대방을 얕보는 일이 잦아서 교우관계가 그리 원만치 않았다. 이 사건도 어찌보면 정 중령의 지나치게 높은 자부심이 빚어낸 참사였다고 볼 수 있다.


3. 사건 개요[편집]


당시 미 육군 제1군단(군단장 투르도 미 육군 중장)에 작전 배속된 28사단에 전투정찰대 운영 시범훈련을 실시하라는 명령이 제6군단(군단장 백인엽[3] 육군 중장)으로부터 내려왔고 백 군단장에게 지시를 받은 서정철 장군은 시범훈련 부대로 6297부대 1대대를 지정하여 1959년 2월 19일부터 대대수색 정찰 시범을 실시하기로 하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 장군은 시범 전날인 18일 훈련 준비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당일 오후 2시경 1대대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1대대는 주둔지 뒷산에서 분대 단위로 시범훈련 중이었다.

이를 본 서 장군은 대대장 정구헌 중령에게 화력증강 차원에서 소대 단위로 훈련 형태를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정 중령은 아래의 이유를 들면서 사단장의 지시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문제는 아래 이유를 들 때 정 중령은 서 장군에게 "사단장 각하[4]께서 뭘 모르시고 말씀을 하신다."면서 사단장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하였다. 이것이 서 장군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지형정찰을 새로 해야 한다.
  • 날도 어두워지는데 내일까지 바꿔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 화력증강은 위력정찰이지 수색정찰이 아니다.

서 장군은 발끈하여 "내가 네놈한테 정찰훈련 교육 받으러 온 줄 아느냐?"면서 지휘봉으로 정 중령의 복부를 서너 번 쿡쿡 찔렀다. 정 중령은 평소 사단장의 엄격한 태도에 불만이 있었던 데다 사단장이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고 해대는 닦달에 며칠째 밤낮 없는 훈련에 지칠 대로 지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차에 참지 못하고 사단장 앞에서 허리에 양손을 올리는 불손한 자세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대놓고 항의하였다. 서 장군은 대대장이 말대꾸에 격분하여 장갑 낀 손으로 정 중령의 얼굴을 가격하는 바람에 안경이 깨졌다. 정 중령은 "각하, 고정하십시오."라면서 서 장군을 만류하려 했다.

서 장군은 뚜껑이 열려서 "너 이 자식, 잔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려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연대장 송광보 대령이 서 장군을 말리며 대대장실로 데리고 내려왔는데 이때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내려오던 도중 정 중령은 사단장이 권총을 장전하는 듯한 소리를 듣고는 '혹시 사단장이 나를 쏴버리려는 건 아닌가?' 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서 장군은 대대장실로 들어가고도 노치를 풀지 못하고 뒤따라 들어온 정 중령을 향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뒷문으로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뒷걸음질로 대대장실 뒷문으로 나온 뒤 정 중령은 자신의 45구경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서 장군이 권총 장전소리를 듣지 못한 채 뒷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자 정 중령은 '드디어 나를 쏘려는구나.'라고 오인하여 3m 앞에 있던 서 장군을 향해 3발을 발사하였다. 총탄에 맞고 쓰러진 서 장군에게 정 중령은 나머지 4발을 모두 명중시켰고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사망하였다. 이때 서 장군의 나이는 3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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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상황도

3.1. 사건의 뒷면[편집]


사실 이전부터 정구헌 대대장은 하사관 지원율 저조로 인해 사단장에게 꾸준히 갈궈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만성적인 하사관 부족 현상에 시달렸는데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6.25 전쟁 직후의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군대였던 탓에 하사관에 대한 처우는 지극히 불량했던 데다 조직 내의 위치도 위로는 장교에게 밟히고 아래로는 병(兵)들에게 받히는 신세였다. 특히 병(兵)생활을 안 해 보고 바로 임관한 민간 하사관후보생 출신 초임 하사들은 자신보다 한참 오래 복무한 내무반 실세 상등병~병장들에게는 그냥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당시에는 병들이 하사관을 "밖에서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군대 말뚝이나 박냐?"고 무시할 정도였다. 이처럼 이미지도 처우도 나쁘니 하사관으로 임관하는 자들의 질은 자연히 저하되고 이로 인해 병 및 민간인 사이에서 하사관의 이미지는 재차 저하되고 악순환이 생겼다.[5] 그래서 민간 하사관 확보가 어려우니 현역 병을 하사관으로 임관시키는 비율이 인력 확보의 중요 수단이 되었고 이게 지휘관의 인사평가에도 들어갔는데 당시는 군 문화가 거칠던 시대였던 만큼 성과 확보를 위해 병을 반강제로 하사관으로 지원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강제로 하사관에 지원하게 된 병사가 총기를 들고 중대장실이나 대대장실에 난입해 "하사관 지망을 취소하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뒤집어 엎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아무튼 이처럼 부대 지휘관은 물론 휘하 장교들도 어떻게든 하사관 자원을 확보하려는 데 안간힘을 썼다.

이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회유와 협박은 물론 가정방문(...)까지 서슴지 않으며 하사관 지원율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특히 집안이 매우 가난해 급전이 필요하거나 부대 내에서 무마 가능한 수준의 잘못을 저질러 약점이 잡힌 병들이 주된 표적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인력 확보는 당연히 질이 나쁜 건 물론 의지도 없는 하사관을 대거 양성했다. 당시 (구)제6군단 산하의 제28보병사단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대대장 정구헌 중령은 "내가 옷을 벗고 말지,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사관을 시켜?" 라며 상부의 하사관 강제확보 명령을 거부하였고 당연히 정 중령의 1대대의 하사관 지원율은 사단 내에서 최하위였다. 그로 인해 사단장 서정철 장군이 6군단장에게 적지 않게 힐난당했고 모든 면에서 1등을 달리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던 엘리트 서 장군으로선 정 중령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었다. 이런 이면의 갈등도 사건 발생에 기여했다 볼 수 있다. 사실 이날 정찰훈련 건으로 서로 다투고 대대장실로 내려가던 도중 서정철 장군은 정구헌 중령에게 "정찰훈련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자네 부대는 왜 그렇게 하사관 지원이 부실한가?"라며 기어이 한 소리를 했다고 한다. 거기에 당시의 (구)제6군단장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손꼽히는 가혹한 장군인 백인엽이었기에 사단장의 입장에서도 곤란했을 터이다.

이런 일로 싸우게 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당시 시대 상황에 영합한 비리를 용납하지 않던 정직하고 훌륭한 군인이었다. 정 중령은 하사관 차출 거부 외에 부사단장의 쌀 상납 요구를 거절한 바 있을 정도로 꼿꼿한 장교였고 서 장군도 사단장 재직 당시 사병들에게 정량급식을 이행하지 않은 장교들을 엄벌에 처한 당대 보기 드문 강직한 장군이었다.

4. 사건의 결과[편집]


정 중령은 범행 직후 곧바로 특무대에 자수하여 검거되었고 사건 현장에 있던 연대장 송광보 대령도 살인방조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와 동시에 정 중령과 송 대령은 각각 대대장, 연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군사법정에 회부된 정 중령은 "서 장군이 나를 쏘려고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애당초 서 장군의 총에는 실탄이 없었음이 밝혀졌기에 결국 정 중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같이 구속된 송광보 대령은 징역 4개월에 급료 전액몰수를 선고받고 파면당했다.

정구헌 중령은 1959년 5월 20일 오후 2시 대구광역시 육군정보학교 야외 교정의 산골짜기에서 총살형에 처해지면서 향년 34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 중령은 이날 사형수라고 하기엔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형 집행을 받아들였고 집행 직전 만난 이전 부대 상관인 2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법무부장 최문기(崔文基) 대령에게는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또 입회차 형장에 몰려든 신문기자들에게도 "다들 고생이 많다."고 담담하게 손을 흔들었다. 육군 군종 목사 양석봉 중령의 기도와 설교를 들은 후 아래와 같이 유언을 남기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 일흔 살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는 것이 미안할 뿐이다.
  • 앞으로 자신의 개인 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구타하거나 혹사시키는 병영 내의 악습이 없어지길 빈다.[6]
  • 나는 지금까지 양심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깨끗이 죽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1959년 2월 18일 변을 당한 서정철 준장의 유해는 2월 23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5. 뒷이야기[편집]


이 사건으로 준장 계급이던 사단장이 소장으로 격상되었다.[7] 그러나 제28보병사단의 분위기는 바닥까지 떨어지며 흉흉해졌고 이를 우려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백선엽 대장제33보병사단장으로 재임 중이던 이세호[8] 준장을 불러 "내 전용 헬리콥터를 줄 테니 지금 28사단으로 가서 사단장으로 부임하시오."라며 다짜고짜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잘 모르던 이 장군은 "사단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백 장군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 당장 28사단으로 가시오! 뒷일은 내가 수습할 테니까."라고 재차 명령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 장군은 백 장군의 전용 헬기로 경기도 연천군 전곡의 비행장에 내려 바로 부대로 가는 대신 근처 여관에 짐을 풀고 하룻밤 동안 마음을 가다듬으며 싸늘해진 제28보병사단의 분위기를 어찌 수습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 장군은 예하부대에 "3일의 여유를 줄 테니 각 부대별로 열병 및 분열식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평소 호랑이 장군으로 소문난 이 장군이 부대를 시찰한다는 소식에 얼어 있던 장교와 사병들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모든 부대가 3일 밤낮으로 열병, 분열훈련을 하는 동안 각 부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 장군이 보급품 절약 운동, 장비 애호운동 등 부대 내 캠페인을 계속 벌인 덕에 제28보병사단은 다시 안정과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물론 상급부대 지휘관인 백인엽 (구)제6군단장은 이 사건으로 대장 진급이 날아갔다. 사실 백인엽 자신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예하 사단장들에게 계속 독촉하고 서정철을 포함한 예하 사단장 및 참모들에게도 굉장히 가혹하게 대했다. 오죽했으면 (구)제6군단 부군단장이자 피살된 서정철의 육사동기인 박정희(!) 준장이 백인엽의 멱살을 잡고 싸움박질을 하는 바람에 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은 자기 동생과 박정희를 분리시키고자 박정희를 제7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보직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28보병사단은 1985년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과 2005년 530GP 사건, 그리고 2014년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휴가병 동반 자살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여럿 터지며 더욱 악명이 높아졌다.

당시 육군 소장인 안춘생이 해당 사건의 재판관, 김익렬이 심판관, 안춘생과 광복군 활동을 했던 육군 준장 유해준이 법무사를 맡았고 정구헌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당시 군사재판은 현역 군인들이 판사를 맡았는데 안춘생, 김익렬 등이 피해자인 서정철 준장의 선임자이고 안춘생은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심판관을 맡은 바 있어서 재판관으로 해당 사건을 맡았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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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명은 오오야마 헤이토(大山炳斗), 족보명은 서병두(徐丙斗).[2] 조부 서상관(徐相灌, 1874~1923)의 첫째 남동생이다.[3] 백선엽 대장의 동생이다.[4] 당시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장군들도 각하라고 불렸다. 제독은 각하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손원일 제독이 창군 초부터 "각하라는 호칭은 대통령께만 쓰는 것"이라며 해군 내에서 제독들을 부를 때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습은 일본 제국의 문관과 무관의 계급과 호칭에서 유래했는데, 민정관청의 고위급 문관(친임관 및 칙임관) 및 일본 육군일본 해군의 장성급 장교에겐 각하라는 표현을 썼다. 손원일 제독은 일본군 복무 경력이 없기에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5] 이런 병의 초임 간부에 대한 부조리가 35년 동안 쌓이고 쌓이다 펑 터진 것이 1994년의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이었고 이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하사관에 대한 처우가 표면적으로는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열악한건 현재진행형이다.[6] 하지만 정 중령의 바램과는 달리 21세기에도 병영부조리가 군 내부의 심각한 문제점인 현실이 씁쓸한 현실이다.[7] 후에 신설된 동원사단은 여단과 동급이라 준장 그대로 유지했다.[8] 후일 2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초대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피살된 서정철하고는 육군사관학교 동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