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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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소카 대왕과 불교



1. 개요[편집]


제1차 결집제2차 결집에 이어 이루어진 세 번째 불경 결집.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군주로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 대왕의 주도로 마우리아의 수도 화씨성에서 당시의 고승인 목갈리풋타 팃사의 주도로 1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서 9개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두 번의 결집 때와 달리 구전으로 전해오던 불경이 최초로 문자로 기록되었으며[1] 경장과 율장뿐 아니라 논장 즉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후대 고승들의 주석까지 결집에 포함되어 삼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2] 결집이 이루어진 장소의 이름을 따서 화씨성 결집, 또는 천인 결집(집법)이라고도 부른다.[3]


2. 아소카 대왕과 불교[편집]


석가모니 붓다 당시 그를 후원해서 불교 교단(상가)의 성립과 안정을 도왔던 최초의 군주는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과 그 아들 아사세사트루 왕이었고, 인도 통일의 기운은 부자가 대를 이어 다스린 마가다 왕국이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 자리하던 시기부터 움트고 있었다. 부를 축적하고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넓혀가던 마가다 왕국의 기운은 마가다계의 난다 왕조로 계승되었고, 동방 원정에 나섰던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북 인도를 점령한 것도 인도 통일이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서북 인도는 혼란에 빠졌는데, 이곳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으로 시리아의 왕이었던 셀레우코스의 인도 침략을 막아낸 인물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로,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4]를 수립한 인물이자 아소카 대왕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인더스 강 유역에 남아 있던 헬레니즘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북인도를 최초로 통일했고, 그의 기반을 다시 아들 빈두사라가 이어받았다. 빈두사라는 그 유명한 아소카 대왕의 아버지이다.

처음 아쇼카 왕이 즉위한 후 행동이 대단히 난폭하여 지옥(뇌옥)을 만들고서 사람들을 살해했다. 둘레의 담장은 높이 솟아 있고 귀퉁이의 망루는 특히 더 높게 했다. 맹렬한 불꽃과 홍로(큰 화로), 날카로운 창과 예리한 칼 등 갖가지 고문 도구를 갖추고 그 모습을 지옥과 같이 차려놓고 흉포한 자들을 모아 옥주(전옥)를 맡겼다. 처음에는 나라 안의 법을 어긴 죄인을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도탄의 고통 속에 처넣었는데, 중반에는 감옥 앞을 지나가는 자들, 그 다음에는 아무나 잡아다 살륙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자는 모두 죽게 되므로 그대로 입을 봉하여 밖으로 새어나가는 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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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대당서역기>권8 ‘파탈리푸트라 성’[5]


불경 잡아함경의 권23은 아육왕경 즉 아소카 대왕이 주인공으로, 아소카 대왕이 펼친 철권통치와 그가 불교로 귀의하기까지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인도 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지배했던 아소카 대왕의 이름은 ‘슬픔을 모르는 자’[6]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아소카 왕의 전반생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왕이 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알린 첫 순간은 아소카 자신의 이복 형이자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수시마에 대한 무력 진압과 그의 죽음이 함께 했다. 이후 99명에 달하는 이복 형제를 숙청하고 장장 10여 년에 이르는 통일전쟁을 벌이는 동안 인도 전역은 피로 물들었다. 칼링카 전투에서는 10만 명의 사망자와 15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강에는 물이 아닌 피가 흘렀다고 전한다.[7] 불교에서 최고의 군주로 꼽는 아소카 왕에 대한 기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아소카가 실제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잘 나타내준다[8]

그러나 통일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 아쇼카 대왕은 기원전 260년경에 불교로 전향한다.[9] 이후 아소카는 오랫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것을 후회하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며 최고의 복지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불교의 불살생 원리를 몸소 실천하고 공평한 정책을 펼쳐 인심을 얻은 그는 수많은 불교 승원과 기념탑을 세우고 불자들을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고, 몸소 석가모니 부처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고[10]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 각지로 전법사[11]로 파견한다.[12]

아소카 왕이 포교단을 보낸 아홉 개 지역 가운데. 특기할만 것으로는 (팔리어 경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오늘날의. 변경과 미얀마 하 지역에 해당하는 수반나부미, 오늘날의 리랑카에 해당하는 탐바판니, 나중에 정복되어 헬레니즘 왕국이 되는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지역인 요나카랏타, 그리고 히말라야 지역 등이다. 수반나부미 지역에 대한 포교 행위는 시기상조였는지 몰라도 마힌다[13]가 이끈 스리랑카 포교단은 그 후 불경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14]

아소카 대왕은 붓다 입멸 뒤에 분배받은 사리를 봉안해 지었던 ‘근본 8탑’ 가운데 일곱 개를 열어서 그 안에 봉안했던 사리를 나누어 전국 각지에 8만 4천 탑을 짓게 한다.[15] 아소카 왕의 8만 4천 탑 건립도 인도 전역에 불교를 유포한다는 점과, 동쪽 교단에서만 존재하던 불탑이 전 인도로 확대되었음을, 아울러 동쪽 교단의 권위 축소를 의미하는데, 세 번째의 경우는 2차 결집을 통해 확인되는 서쪽 교단의 약진과 상호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붓다 입멸 뒤에 성립되었던 서쪽 교단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사리’라는 붓다의 성물이 이제는 서쪽 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서쪽 교단이 더욱 강력하게 약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아소카 왕의 자녀로서 출가해 스리랑카 불교의 시원을 이루게 되는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모두 서쪽 교단의 인물이었다.[16] 이러한 아쇼카 대왕의 재위 17년 되던 해에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화씨성)에서 마우드갈리푸트라 티쉬야이름 더럽게 기네의 주도로 1천 명의 비구가 소집되어 결집을 행했다. 이것이 3차 결집(화씨성 결집)이다.[17]

또한 아쇼카 왕 때는 불교 교단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교단이 확장됨에 따라 소위 '외도'라 불리는 이들이 교단에 들어와 교단의 화합을 깨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에 아쇼카 대왕이 불교 교설의 정비와 승가의 화합을 유도하려 한 것도 3차 결집의 동인이었다. 파탈리푸트라에서 이루어진 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까지 정통 불교 교의를 전할 수 있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삼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삼장을 편찬하는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하며, 특히 목갈리풋타팃사가 별도로 논사(카샤밧투)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들을 논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 율장이나 ‘디파밤사’, ‘마하밤사’ 등 스리랑카 역사서에 실려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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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로 '나뭇잎'에 기록했다 해서 이를 패엽경이라고 부른다.[2] 소운 <하룻밤에 읽는 불교> 35~36쪽[3]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 및 곽철환, ‘초기불교와 그 자료’ 7~8쪽[4] 마우리아는 ‘공작새’라는 뜻이다.[5] 현장에 따르면 파탈리푸트라의 옛 왕궁 북쪽에 높이 수십 척 되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이곳이 아쇼카 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6] 정복 전쟁 시절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그의 성품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7]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6~107쪽[8] 놀랍게도 그리스도교에서 대제로 추앙하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군주라는 이면에 의외의 잔인함과 포악함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아소카 대왕과 닮아 있다.[9] 그 전에는 아버지 빈두사라왕처럼 아지비카교도였다. 아지비카교도는 석가모니와 동대의 인도의 여러 사문 중 하나인 마칼리 고살라가 창시한 종교로, 자이나교에 흡수되어 소멸했다.[10] 이는 당대의 고승 우바굽다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때 아쇼카 대왕은 방문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기념 석주를 세워서 석가모니 부처의 성소를 기렸다. 이때 세워진 석주들을 ‘아소카 석주’라고 부르며, 훗날 현장이 인도를 찾았을 때 대당서역기와 함께 붓다의 유적지를 찾고 확정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11] 자현은 ‘법대관’으로 지칭해 불렀다.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당시 인도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모든 국가에 파견되었고, 그 중에는 그리스와 로마도 있었다.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12]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13] 아소카의 아들 혹은 친척[14]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서 기록되었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21쪽[15] ‘8만 4천’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8만 4천 탑을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많다’ ‘완전하다’라는 의미로 인도 및 불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숫자로, 그리스도교에서 ‘7’을 완전한 숫자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16]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17]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18]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