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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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키푸르 전쟁
[1]מלחמת יום הכיפורים
[2]حرب العاشر من رمضان
Yom Kippur War
Война Судного дня


파일:27fa96e77fe6ba345bfd75c937813a88.jpg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바레브 선을 돌파하는 이집트군 기록화
기간
1973년 10월 6일 ~ 10월 25일
원인
이스라엘이 점령한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의 탈환 및 시리아가 점령한 뒤에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 고원갈릴리 호 전역의 탈취
장소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 지중해, 홍해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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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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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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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이집트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시리아

원정군 파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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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및 지지 의사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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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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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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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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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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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골다 메이어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모세 다얀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다비드 엘라자르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탈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슈무엘 고넨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츠하크 호피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베니 펠레드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하임 바르레브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알베르트 만들러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아리엘 샤론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베냐민 텔렘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안와르 사다트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하페즈 알 아사드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아흐마드 이스마일 알리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무스타파 틀라스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사드 엘 샤즐리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압델 가니 엘 가마시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알리 아슬란
병력



결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외교적 성공[3]
시리아의 패배
영향
대전차 미사일의 대두, 이집트의 친서방화, 수에즈 운하 재개통,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보이콧 이스라엘 시작
피해



1. 개요
2. 배경
2.1. 전간기 - 소모전
2.2. 대(大) 복수극의 시작
3. 전쟁 경과
3.1. 바르레브 선/골란 고원 돌파와 순항/탄도미사일 공습, 이스라엘의 위기
3.2. 메이어 내각의 대응
3.3. 미국과 소련의 대응: 핵무기 음모론
3.4. 이스라엘의 대역전극
4. 결과
4.1. 정전 직전의 미소 핵대치
5. 영향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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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비행 중인 이스라엘 공군의 F-4 전폭기. 저 멀리 바위의 돔이 보인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일[4]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또는 '10월 전쟁'이나 '라마단 전쟁'[5]이라고도 불린다.

전쟁 기간은 1973년 10월 6일 ~ 1973년 10월 25일.

2. 배경[편집]



2.1. 전간기 - 소모전[편집]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 반도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평화, 무인정, 무협상의 3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حرب الاستنزاف/מלחמת ההתשה)이라고 한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 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다.

2.2. 대(大) 복수극의 시작[편집]


1970년 9월 28일 가말 압델 나세르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 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괄 반환을 요구한 나세르와 달리 일단 폐쇄된 수에즈 운하부터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20마일(약 32km)만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으나 오랫동안 아랍 국가들의 뒤통수에 질릴 대로 질려 있던 이스라엘 측은 6마일 이상은 물러날 수 없다고 대응했다.[6]

이스라엘은 일단은 협상장에 나와서 조건을 조율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이스라엘과 협상장에서 얼굴을 맞댄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7] 사다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이집트가 낼름 20마일 철수만 먹고는 입 쓱 닦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어떠한 보장이 없는 한 한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사다트는 평화보다 전쟁을 통해 시나이 반도를 회복하고 무력을 보여주어 이스라엘의 완고한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빼앗긴 주변국과 공조를 강화한다. 하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요르단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PLO를 지원해 줬다가 오히려 검은 9월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집트에 미온적이었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움직임에 대해 극비리에 경고를 해주기까지 했다.[8] 결국 골란 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이를 갈던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또한 본인의 정치적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對이스라엘 적대 감정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다.

한편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진단한 결과 군대의 체질과 훈련 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개혁 및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첫 단추로 냉전 중이었던 시기였고 이스라엘의 뒤를 미국이 봐줬기에 자연스럽게 소련과 밀착하게 되었으며 이에 소련으로부터 군사 고문단을 초빙하고,[9] 이전의 전훈(戰勳)을 철저히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소련으로부터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그야말로 지난 전쟁에서 부족한 점을 보강하는 훈련과 함께 군 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수병/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던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10] 유능하고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와 부사관으로 선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집트군의 보안은 매우 혁신되어 이집트군이 전쟁 준비 대형으로 대열하고 있다는 정황정보는 있어도, 이집트 수뇌부 차원에서 전쟁을 결단했다는 정보는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전쟁 준비는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모사드에서 이를 보고하였기에 이스라엘 정부도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대비해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 6일 전쟁의 영웅이자 국방장관이던 모세 다얀 등 최고지도부는 이스라엘군 군사정보부(아만)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믿고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나중에 전쟁 초반 전사하게 되는 만들러 장군을 비롯한 일선의 이스라엘 장성들과 모사드 측은 이집트군이 치장물자를 불출하여 나눠주는 것까지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상부에 대응을 요청했지만, 이집트군이 충분한 장거리 전폭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만은 이를 부정했고 아만의 보고를 받아들인 상층부도 괜히 이집트를 도발하지 말라고 일선 장성들을 통제했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 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하는 기만 전술을 이용하였고,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 할 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골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만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기만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 협박을 날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쫄았던 이스라엘이었고 이에 동원령을 발동했으나 막상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지지율 확립을 위한 정치적 제스쳐로 오판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안와르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해대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된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 협박에도 어디서 허세야? 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이집트와 시리아 모두 공격 정보를 상당히 잘 은폐하였으며 소련 측에 곧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긴 했으나 정확한 정보 전달은 끝내 거부했다. 사다트는 구체적인 공격 계획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려주지 않았고 아사드는 조만간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골란 고원을 탈환하고 1967년 국경선을 회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인정했지만 역시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 외교부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이집트의 공격 계획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사다트와 아사드 모두 정보를 주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서 그 정보를 얻어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소련 측은 자신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아랍에서 공격에 나서려는 것에 매우 불쾌해했지만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놈들도 아니라는 이유로 제지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미국에 알려주지도 않았다. 전쟁 발발 직전까지 전 세계가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했기 때문에 소련 측은 자신들이 입수한 아랍의 공격계획이 잘못된 정보였을 가능성까지 의심하였다.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11]으로부터 당장 내일 이집트와의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12]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 제독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메이어는 이스라엘 방위군 총참모장 다비드 엘라자르가 제시한 선제공격안이 미국의 반발을 살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기각하였다.

심정적으로는 그 제안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1973년 10월 6일 긴급 회의에서 메이어의 발언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라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휴일 기간에 돌입하고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13]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동시다발적인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다. 이 외에 이라크,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리비아는 당시 최고 장교 중 한명인 칼리파 하프타르도 참전시켰다)도 지원군을 보냈다.


3. 전쟁 경과[편집]



3.1. 바르레브 선/골란 고원 돌파와 순항/탄도미사일 공습, 이스라엘의 위기[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1973_sinai_war_maps.jpg

1973년 10월 6일 ~ 10월 15일: 시나이 반도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많은 군인들이 휴가로 인한 인적공백과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인하여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나라가 망한거 아니냐'는 절망에 빠졌을 정도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진지로 구성된 바르레브 선(Bar-Lev Line)을 돌파하기 위한 바드르 작전(Operation Badr)을 개시했다. 먼저 사전에 8천명이 넘는 특수부대를 이스라엘군 경계가 느슨한 곳으로 도하시켜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격준비사격 뒤 도하를 개시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동독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돌파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르레브 선을 단 2시간만에 돌파해버렸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르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 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르레브 선의 약점[14]을 꿰뚫었고 사전에 미니어처와 같은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다.

바르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운하에 석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 도하를 저지하는 화공을 위해 수중에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간 상황이었다. 이집트군은 작전 개시 전날 밤에 잠수부들을 동원해 파이프라인을 미리 콘크리트로 막아버림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쌓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버렸다. 이 돌파 작전에서 이집트군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 외의 대성공에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반면 바레브 선을 방어하던 이스라엘군은 약 1,200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상천외한 전술은 전세계 육군 교범에 전장에서 발휘한 창의성의 대표적 사례로 실렸을 정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육군 상륙부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기갑사단 예하 기갑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對)전차 방어전을 구사한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대전차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15] 당연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이집트군은 이스라엘군의 전차부대를 박살냈고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에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부설해놓았던 군사철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이를 거의 철거해서 바르레브 선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는데, 감히 이집트군에게 긴급한 병력 보충이 필요할 정도의 피해를 입을리가 없다는 오만함에서 온 발상이었지만, 이 조치는 1973년의 재앙적인 첫 며칠 동안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육군에게 끔찍한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제4차 중동전쟁/at-3.jpg


파일:attachment/제4차 중동전쟁/sa-6.jpg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 대수의 10% 가까운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어주었던 우수한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하다. 열흘 내로 공군기가 전멸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소련제 신형 2K12 쿠프(나토코드 SA-6) 지대공미사일과 23mm 4연장 기관포를 탑재한 '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이다.[16]

또한, 이집트 공군은 개전 첫날 Tu-16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AS-5 순항미사일을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에 발사해 레이더 사이트를 파괴하는 등 성과가 있었으나,
이스라엘의 방공군과 공군은 호크 대공미사일 등으로 발사된 순항미사일 25발 중 20발을 요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추가로 이집트 전략로켓군은 9K52 루나 탄도미사일을 이스라엘 Tasa와 Bir Gifgafa에 있던 사령부와 전투비행단에 발사했다. 민간인 정착촌도 오발된 탄도미사일에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는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 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어떻게든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전차부대로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군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화력은 좋으나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적국인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AT-3 말륫카(나토 코드명 새거Sagger) 대전차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킨다.
  •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를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전차를 보호 및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다.
  •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파괴한다.
  •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폐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한다.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17]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5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 T-55, T-62 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 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 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18][19]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對)전차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 원래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善戰)을 펼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원래 소련식 군사 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본래 목표했던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한국 전쟁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 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 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 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20]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이었지 이스라엘의 멸망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다. 아사드의 계획 역시 골란 고원의 탈환과 1967년 국경선의 회복이었으며, 소련 측에 시리아군이 골란 고원을 점령하는 대로 즉시 유엔 안보리에 정전 결의안을 제출하여 이스라엘의 반격을 막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스라엘 내부로 깊숙히 진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이집트/시리아군의 역량이 동원을 마친 이스라엘군과 정면대결하여 승리할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정확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수적으로 극히 열세한 이스라엘 현역부대를 초전에 밀어붙여 실지를 회복하고, 그곳에서 방어전을 벌여 이스라엘군을 물리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시리아군의 계획은 어쨌든간에 이스라엘군에게 동원 및 재정비를 마칠 시간과 공간을 허용한다는 본질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 취약성은 욤 키푸르 전쟁의 결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 시간 만에 점령하고,[21]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數的) 우위로 돌파하며[22]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이다.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르단 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 지역을 넘어서 요르단 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측의 유인 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르단 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의 영토를 내주면서 시간을 벌 수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뻥 뚫려있는 시나이 반도와 달리, 요르단강과 갈릴리 호수에 의해 접근로가 제한되는 골란 고원의 경우 동원이 완료된다고 해도 브노트 야코브 다리나 아리크 다리 같은 주요 교량이 탈취당하면 반격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용 병력 대부분을 골란 고원에 쏟아붓는 도박을 시작했다. 핵심은 이스라엘 중부에서 막 이동을 개시한 무사 펠레드의 제146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이 갈릴리 호수 남쪽에서 발진해 시리아군의 공격축선 좌측방을 강타하기만 한다면 고원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번 것은 현역 부대들이었다. 전쟁 직전 시나이 반도에서 이동하여 골란 고원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군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아비그도르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시리아군이 1제대 보병사단은 물론 기갑사단과 공화국 수비대 전차여단까지 동원해 최후의 공세를 시작한 10월 9일 찾아왔다. 7기갑여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시리아군의 공격을 저지하려면 노출된 개활지를 통과해 야트막한 언덕의 사격대를 점령하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2개 중대 규모로 쪼그라든 여단의 전차들은 카할라니 중령의 전차가 앞장서는데도 뒤따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흘 동안의 밤낮 없는 격전에 지치고 수많은 전우들을 잃은 탓에 사기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29세의 나이로 여단 내에서 죽거나 다치지 않은 유일한 대대장이 된 중령은 부대가 무너지기 직전임을 직감하고 돌아와 "우리 바로 앞에서 진지를 오르는 시리아군의 용기를 봐라. 우리가 저들보다 약한가? 우리가 저들보다 겁쟁이인가? 앞으로 나아가 나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자. 전진!"이라고 독려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한데다가 탄약마저 거의 고갈된 7기갑여단의 마지막 한 줌 남은 전차병들은 겁쟁이라는 원초적인 단어에 반응했다. 그들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한 소대장이 조종수에게 "앞으로!"라고 외친 것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군 전차들이 카할라니와 대열을 맞춰 달려나갔다. 시리아군 전차부대가 사격대를 탈취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진지를 점령한 여단은 사투 끝에 적 전차 60~70대를 격파하면서 시리아군의 마지막 공세를 저지해냈다. 이날 전투가 끝나고 여단에 남은 가용 전차는 겨우 7대였다. 7기갑여단이 사수하던 부스테르 능선과 헤르모니트 능선 사이로 향하는 골짜기에는 시리아군 전차 수백 대가 격파된 채 버려져 있었다.[23] 후일 이곳에는 그 참혹한 광경에서 유래한 지명이 붙었다. 바로 "눈물의 계곡(הַבָּכָא עֵמֶק, Valley of Tears)"이다.

방어 책임 부대인 제188기갑여단이 사실상 전멸하면서 거대한 돌파구가 뚫려버린 골란 고원 남부에서도 자발적으로 달려온 비번 장병들과 동원예비군 전차들이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즈비카 그린골드 중위는 단 3대의 전차로 188여단에 달려와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차 세 대는 전부 격파됐으며, 188여단장, 부여단장, 작전과장이 모두 전사하여 지휘부마저 붕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중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갈아탄 전차 단 한 대로 탭라인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시리아군 전차 수십대와 밤새 야간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중위는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물론 골란 고원 내 이스라엘군 최대의 거점인 나파크 기지로 향하는 시리아군 1개 전차여단을 하룻밤 동안 막아내어 동원예비군의 반격에 발판을 마련했다. 전후 카할라니 중령과 즈비카 중위는 이스라엘군 최고 무공훈장인 용맹훈장을 받았다.

3.2. 메이어 내각의 대응[편집]


전쟁 시작 직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아랍군의 수준에 대해서 높이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이를 손쉽게 격퇴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모셰 다얀은 총동원령을 선포할 필요가 없고 부분동원령만 내리자고 주장했으나 총참모부에서 총동원령을 강력히 주장해서 긴급히 50만명의 예비군을 동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레브 선이 뚫리고 골란 고원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10월 7일 오후 2시 50분에 열린 각의에서 최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모셰 다얀의 보고는 이스라엘 정부를 공포에 빠지게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을 쟁취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절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부수상 이갈 알론 역시 아랍의 목표는 유대인의 멸망에 있다는 다얀의 분석에 동의하였다. 메이어가 덧붙였다.

이제 아랍인들이 멈출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피맛을 봤습니다. 1948년 이후 이것이 (우리의 생존을 건) 2차전입니다.


메이어는 자신이 선제공격을 지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엄청난 후회를 토로했다.

만약 하늘이 허락한다면, 우리가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이 뭐라고 하던 간에 무시하고 군대가 선제공격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시나이 반도에서의 엄청난 패배에 모셰 다얀은 만약 후퇴해서 합류할 수 없는 장병들이 있다면 이집트군에 항복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메이어에게 조건부 항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메이어의 비서는 그 순간 메이어의 얼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내각에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제대로 분석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한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 전쟁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24]

(...) 세계는 우리를 거의 도와주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혀 사랑받지 못합니다. 약한 유대인들은 더더욱 미움받습니다. 우리는 개밥으로 던져질 겁니다.


10월 8일에 시도된 이스라엘군 반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 되었고 인력과 장비 손실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사실 메이어 내각은 정말로 아랍군이 텔아비브까지 오는 상황을 상정하진 않았다. 이스라엘이 과거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점령 직전까지 갔음에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이스라엘을 정지시켰듯이, 미소 열강이 아랍을 정지시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메이어가 전쟁 초기에 완전한 멘붕에 빠졌고 자살하려 했다는 야사가 돌았지만, 이는 메이어의 가족들과 각료들의 증언에서 부정되며, 메이어는 매우 창백했고 떨리는 손으로 충격을 암시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전시 수상으로서의 침착함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시리아가 골란 고원을 점령하고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 동안을 점령한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굴욕적인 패배였다. 메이어 내각의 입장에서 어찌어찌 이스라엘 본토를 방어한다고 쳐도, 이제 이스라엘이 약한 국가라는 인상을 세계에 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하는 일이었다. 당장 더 이상 이스라엘이 불패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사방의 아랍국가들이 두들겨대기 시작할 것이고 뭣보다도 미국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지원할 필요성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중동에서 가장 강한 국가라는 인상을 어떻게든 중동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모셰 다얀은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종이 호랑이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쓸모없어진 이스라엘을 가차없이 버리고 아랍 국가들을 지원할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1967년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요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메이어 내각은 어떻게든 이 전쟁을 외교가 아니라 군사적인 승리로 종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메이어 내각은 매우 긴급하게 미국과 접촉하였다. 이스라엘 군부는 1주일 후면 무기가 바닥난다는 보고를 올린 상황이었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으로부터 긴급하게 무기를 받아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가뜩이나 리처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고 베트남 전쟁까지 치르던 도중이었고, 뭣보다도 이스라엘이 이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 요구에 대해서 전쟁을 틈타서 미국을 삥뜯으려는 개수작으로 보았다.[25] 10월 10일, 브레즈네프가 닉슨에게 연락해 미소가 공동으로 정전을 제의하자고 제안했고, 영국 역시 긴급한 정전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했다. 후일 이스라엘은 백기 항복을 해서라도 정전을 받아들이려 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졌지만, 이는 이스라엘에서 호전광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국제적으로 언플을 하는 블러핑일 뿐이었고, 오히려 골다 메이어는 아랍 국가들이 유엔 안보리의 긴급 정전 결의안을 묵살하자 기뻐했다.

3.3. 미국과 소련의 대응: 핵무기 음모론[편집]


초기 아랍의 공격 개시에 미국은 먼저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을 소환하여 소련이 아랍의 공격 계획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유감이라는 입장을 전달하는 동시에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정전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하자는 제안을 보냈다. 브레즈네프는 닉슨이 소련과 공동으로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몹시도 기뻐했으며 미국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섣부른 정전 결의안이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연대성을 배신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우려하였다. 특히 만약에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이 아랍편을 들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중국이 3세계 지도자로 군림하게 될 것인데, 이는 소련이 가장 바라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소련 공산당 국제부는 뉴욕의 소련 외교관들에게 어떠한 정전 결의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한편, 만약 시리아와 이집트의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 벌어질 시에는 이집트의 편을 들라고 훈령했다. 그리고 미국에는 자신들도 몰랐다고 둘러대는 한편, 소련 대사 비노그라도프를 파견하여 사다트에게 미국의 정전안에 대해서 설명하게 했다. 하지만 사다트는 이 제안에 대해서 상당히 짜증을 내면서 미국은 중동 위기의 원인은 오로지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스라엘과의 평화 교섭은 1967년 국경을 회복한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천명하였다. 사다트의 휴전협정 거부에 원래도 사다트를 친미주의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혐오했던 소련 외무장관 그로미코는 자기 코 앞조차 보지 못하는 근시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아랍 사이에 끼어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아사드를 시켜서 사다트를 설득하여 휴전협정에 동의하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10월 7일, 사다트는 자신이 전화를 통해 아사드를 설득했다고 통보함으로 소련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한편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아랍군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으나 아랍, 특히 이집트군의 대선전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 측에 매우 모호한 메시지만을 전달하면서 시간을 끌기로 하였고, 무조건 아랍 입장을 옹호하던 기존의 방침을 유지하여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아랍이 선빵을 때린 것을 알고 있던 지도부는 부드럽고 점잖은 어조로 성명을 발표할 것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소련 외교부는 정치적 합의의 부재로 군사적 충돌이 다시 발생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모호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스라엘의 합병정책을 비난하고 1967년 국경으로 복귀를 촉구했다. 한편 이집트군은 선전했으나 시리아가 박살이 나면서 10월 7일 심야, 아사드는 정전을 성사시켜달라고 소련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숫자의 병력을 가지고 선빵 때려놓고 지는게 말이 되냐고 당황했으며 시리아 주재 소련 무관들이 골란고원의 상황은 안정적이라고 보고하면서 소련 지도부는 더욱 당혹해했다. 이 때문에 지도부에 아첨하는 걸 좋아했던 무히트디노프(N. Mukhitdinov) 대사가 잔뜩 양념친 과장된 보고서를 올린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제기되었으나, 시리아에 주재하던 다른 소련 외교관 베냐민 포포프도 무히트디노프 대사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이에 그로미코는 비노그라도프 대사를 다시 보내 사다트를 설득하게 하였으나, 사다트는 아사드의 입장 변화에 놀라면서도 그건 시리아 사정이고 이집트는 계속 전투를 지속하겠다고 답변하여 소련을 실망시켰다. 이를 보고받은 브레즈네프, 그로미코, 안드로포프, 그레치코는 모두 사다트가 고집불통이라고 분노하였으며 브레즈네프는 사다트를 좀 교육시켜줘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10월 9일, 비노그라도프 대사는 사다트를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사다트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이라크군이 개입하고 이집트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추가적 공세를 하는대로 골란고원의 상황도 나아질 것이며, 약속한 무기 지원이나 빨리 보내라고 독촉했다. 사다트는 이집트에 배치된 소련 스커드 미사일의 독점적인 사용권을 자신에게 부여해달라는 요청까지 하였으나 비노그라도프 대사는 "대통령 동지, 왜 미사일 문제까지 담당하면서 사서 고생을 하려 하십니까? 이미 동지께서는 다른 문제들이 많지 않습니까?"라는 농담으로 즉답을 회피했으며 소련 지도부는 사다트의 요청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 묵살해버렸다.

10월 8일의 패배로 이스라엘의 무기 재고가 바닥나게 생겼음에도 미국은 계속해서 지원을 꺼렸다. 닉슨은 오로지 이스라엘 무기의 파괴된 수량만큼만 지원해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국방장관 슐레진저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무기를 아예 줄 수 없다고 하였다. 10월 9일, 메이어는 주미 대사 심하 디니츠(S. Dinitz)에게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49대의 전투기와 500대의 탱크를 잃었다며 이스라엘이 엄살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미국에 전달하게 하였다. 이후 독일 언론 슈테른지는 패닉에 빠진 메이어가 다얀의 요구에 따라 13개의 핵탄두 조립을 승인했고 네게브의 핵격납고에서 불출된 핵탄두들이 팬텀과 크피르 전투기에 탑재되었다고 주장했다.[26] 또한 아랍 언론들은 이스라엘이 제리코 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하였다고 추가로 주장했다. 문제는 크피르 전투기는 생산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제리코 미사일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을만큼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즉 증거도 없는 음모론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의 작가 세이모어 허쉬도 이스라엘이 핵포탄 발사를 준비하고 이걸 바탕으로 미국을 협박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그가 출처로 인용한 이스라엘 과학자들은 황당한 소리라고 허쉬의 주장을 부인했고, 따라서 허쉬의 음모론 역시 증거 없는 뇌피셜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우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메이어가 이를 고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공개된 이스라엘 각의 회의록에도 당연히 없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의 핵정책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지고 노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절대로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핵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합의하고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공멸을 모의한 소련과의 밀약 관련 공식 문서는 없으며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현재까지 기밀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상을 확인할 수 없다.[27] 또한, 위에서 설명이 되어 있듯이 미국과 소련의 상황 판단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28]

한편 엘라자르 장군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이집트군의 진격이 정지되자, 골다 메이어는 필사적으로 미국을 설득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미 시나이 반도에 주둔한 이스라엘 전차의 3분의 2가 상실된 상황이었고, 바레브 라인을 다시 점령하려면 막대한 양의 탄약과 중화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럽은 늘 관례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를 일제히 중지했고, 영국도 센추리온 탱크를 팔아달라는 이스라엘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했다. 이스라엘이 기댈 것은 미국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키신저도 이스라엘의 상황이 당초 예상보다 매우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니츠 대사로부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400대의 탱크를, 시리아에게 100대의 탱크를 잃었다는 정보를 전해받은 키신저는 당황하면서 대체 뭘 했길래 이집트에게 400대나 되는 탱크를 잃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20세기 현실주의의 끝판왕인 키신저답게, 그는 바로 이스라엘이 미국의 도움으로 이긴 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 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하고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다.[29] 그리고 아랍 국가들은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었다. 이 때문에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계속 미루었다. 골다 메이어 역시도 소화기, 탄약, 포탄 등의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없는 물자만을 요구하여 키신저를 기쁘게 했다. 특히 그러한 무기들은 이스라엘의 엘알 항공기편을 통해서 비밀리에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왜 엘알 항공편을 썼냐면은, 3차 중동전쟁 당시 석유의 무기화를 시도해 서방을 오일쇼크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아랍측의 보이콧 가능성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 주지 않았고[30],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정치국 회의가 소집, 국방장관 그레치코와 국방부 제1차관 겸 총참모장 쿨리코프가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의 작전상황에 대한 종합보고를 올렸다. 쿨리코프는 소련제 무기들이 아주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보고하였고, 특히 말륫카 대전차미사일의 성능을 칭찬했다. 코시긴 총리는 그렇다면 이제 탱크는 전장에서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2차 대전 중에 전차병으로 복무했던 쿨리코프는 이스라엘 전차들이 무력했던 것은 기계화보병의 협동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며 전차는 기계화보병과 협동하면 여전히 전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소련 군부는 아랍 병사들이 기존의 예측과는 다르게 매우 용맹하게 싸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랍 군 지휘부의 작전술적 능력은 졸렬하기 그지 없으며 특히 제공권 확보를 등한시하고 초반의 성공에 도취되어 공세를 중지한 것을 역겨울 정도의 실수라고 혹평했다. 보고를 듣던 소련 지도부는 왜 소련 군사 고문단이 이러한 실수를 교정해주지 않았냐고 반문했고 쿨리코프는 아랍인들은 전략가 행세를 하느라 소련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대답했다. 소련 군부의 이러한 냉혹한 평가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아랍 세력이 초반에 선전했으나 곧 이스라엘 쪽으로 전세가 기울어질 것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소련이 다마스쿠스가 이스라엘 공군에 공습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아랍에 무기를 공수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고, 브레즈네프는 전쟁 초반부터 소련의 국제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아랍에 무기를 공수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0월 8일과 10월 9일부터 소련의 무기 공수가 시작되어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를 경유하여 아랍 측에 무기를 전달했다. 거대한 안토노프 공수기들이 막대한 양의 무기를 적재하고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 나타나자 아랍 지도부는 감격해했다. 하지만 공수의 규모에 대해서는 소련 지도부 내에서도 입장이 갈렸는데 포드고르니는 소련 내부 상황을 신경쓰지 말고 아랍이 달라는대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드로포프와 군수공업 담당 서기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도 아랍에 대한 무기 공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코시긴 수상과 그로미코를 비롯한 나머지 간부들은 이미 아랍에게는 무기도 충분하고 군수공업력도 이스라엘을 상회하며 함부로 무기를 퍼줬다간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군부는 무기 공수 없이 아랍이 곧 수세에 몰릴 것을 예측했으나 동시에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소련제 무기들이 이스라엘에게 노획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10월 9일, CIA가 이스라엘이 이번엔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며 무기 부족이 심각하다는 분석을 올리면서 국무부의 심경도 복잡해졌다. 그리고 소련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무기를 공수하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이미 해상 공수는 시작된 상황이었다. 소련이 전쟁 확대를 원치 않기 때문에 아랍에 대한 추가적인 무기 지원을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키신저는 크게 당황했다. 그럼에도 키신저는 디니츠 대사에게 미국의 지원에 대한 매우 과장된 약속만을 하면서 그를 가지고 놀았고, 이를 알게 된 디니츠 대사가 항의하자 국방장관 슐레진저를 탓했다. 이를 보고받은 골다 메이어는 절규했다.

당신들은 베트남에 무려 50만명을 쏟아부었습니다. 우린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닉슨과 키신저를 설득하기 위해서 골다 메이어는 철저한 비밀 미국 방문을 타진하였다. 하지만 키신저는 디니츠 대사에게 골다 메이어가 미국에 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그녀의 방문을 일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무기, 탄약, 전자장비의 제공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정전령이 내려지기 전에 아랍을 최대한 신속하게 강타할 것을 주문했다. 김재명의 책 <오늘날의 분쟁>에서 메이어가 눈물을 흘리며 닉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실려서 많은 사람들을 낚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메이어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지 않았다. 김재명이 인용한 『Crisis』에서 키신저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심하 디니츠가 메이어 총리의 방문, 닉슨과 1시간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닉슨과 상의하지도 않고 단숨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긴박한 상황에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메이어 총리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이 새어나갈 경우 별 움직임 없이 보고만 있던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국들도 공세에 가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원 요청은 주로 디니츠 대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디니츠도 이와 같이 회고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다. 골란 고원에서 이미 박살난 아사드는 휴전 협정에 동의했지만 아직까지 우세국면이었던 사다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무엇보다도 휴전하는 사이 이스라엘군이 재정비를 할 게 분명하였다. 소련으로부터 아사드가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고 안심하고 있었던 키신저는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 물량 지원을 시작하였다. 소련이 이미 10월 10일부터 자국 선박과 수송기,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 현지에 파견된 기술진을 동원해 항공기와 전차, 미사일을 포함한 대규모 군수물자 지원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뒤늦은 조치였다.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지원 요청을 받은 뒤에도 약 사흘 동안 직접 개입을 피하고자 물자를 날라다줄 민간 항공편을 수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동 시장에서 입을 피해를 우려한 항공사들은 단 한 군데도 물자 수송에 참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10월 13일 닉슨이 공군 수송기를 동원하기로 결단하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핵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기에 일단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결정되자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1을 포함한 전차와 항공기가 포함된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 키신저는 마지막까지도 최소한의 지원만을 고려했으나, 닉슨은 어차피 조금 보내든 많이 보내든 받는 비난은 똑같으니 있는대로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공장에서 갓 나온 F-4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다.[31]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래스 작전Operation Nickel Grass)은 33일 동안 계속되었다. # 골다 메이어는 이 공수편을 '원시적 비행 괴물'들이라고 불렀으며 미국의 지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텔아비브 해안에는 수천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이 몰려들어 미국 군수지원의 도착을 환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당면한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니켈 그래스 작전이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군수물자가 공급되기 시작한 10월 14일 저녁 이전인 10일경부터 이미 골란고원 방면에서 이스라엘 지상군의 반격이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시나이 방면에서도 14일경 벌어진 대규모 전차전에서 이집트군의 최후 공세를 완전히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이스라엘 공군이 수행한 11,000회의 소티 가운데 전쟁 도중 미국에서 지원받은 항공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300소티에 지나지 않았다. 수송기가 실어나른 전차 역시 10여대에 불과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32]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33]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다. 무기를 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아랍군을 상대로 소련도 무기를 공수해주고 있었다.


3.4. 이스라엘의 대역전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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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 작전
제7기갑여단의 완강한 저항에 시리아군의 공세가 끝끝내 좌절되고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 북부사령부는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공세이전(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7기갑여단을 포함한 에이탄 사단이 북쪽에서, 라네르 사단이 나파크-쿠네이트라 선에서 굳건한 고수방어와 적극적인 역습으로 압박하는 동안 펠레드 사단이 갈릴리 호수 남쪽에서 돌진해 시리아군의 좌측방을 찢어발긴 것이다. 시리아군은 주공축선 측방을 방어하기 위해 AT-3 새거와 대전차포를 대량 보유한 2개 대대 규모의 보병을 배치해 놓았지만 대전차화기 매복이 의심되는 지형마다 포병 이동탄막사격을 쏟아부으면서 전진하는 이스라엘군의 대응전술에 순식간에 돌파당했다. 덫에 걸린 꼴이 되어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이전의 전투에서 잃은 전차를 합치면 시리아군의 전차 손실은 자그마치 1,000대에 가까웠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이 그동안 애를 먹은 것은 지대공 미사일이지 시리아 공군기 따위가 아니었다. 시리아 공군은 조종사 기량으로 따지면 미 공군보다도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스라엘 공군에 순식간에 격퇴당했다. 고작 하루만인 10월 11일,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 에이탄 사단과 라네르 사단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소련군까지 적으로 만들기 전에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다.[34]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35]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 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사우디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 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상황이었다. 이집트군 입장에선 선전하던 전쟁을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이미 시리아 방면을 정리한 이스라엘의 총 전력이 몰려올게 뻔하니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맞붙느라 피해를 입은 사이 피해를 입히자는 전략이 나올 수 밖에 없었기에 이집트군은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쳐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집트군은 시나이 반도의 핵심 교통 거점인 타사, 발루자, 미틀라 고개와 기디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10월 12일경부터 이미 이집트의 공세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고, 역시 제대로 준비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 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다. 10월 14일의 대규모 전차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전차 15~20대를 손실하는 동안 이집트군 전차 200~260대를 파괴하며 이집트 지상군의 공세 여력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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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15일 ~16일: 시나이 반도

결국 시나이 방면에서도 대역전을 향한 이스라엘군의 결정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 참모본부와 남부사령부는 14일 이후 이스라엘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는 이집트군 기갑부대가 크게 약화된 것을 이용해 운하를 건넌 뒤 수에즈 남단의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한다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작전명은 "용감한 사나이들(Operation Abirey-Lev)"로 정해졌다. 16일 새벽 아리엘 샤론 소장(나중에 총리가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 제143기갑사단이 이집트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스라엘군은 악명 높은 '중국 농장'[36] 전투(Battle of the Chinese Farm) 등 돌파구 확장 단계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어떻게든 이집트군을 밀어내고 운하 동안에 폭 5km짜리 회랑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유명한 샤론은 전차와 포병 지원도 없이 보트를 탄 보병만으로 도하를 실시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다음날 이스라엘 후속 부대가 샤론을 따라잡으면서 이집트는 반격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야음을 틈타 회랑 내의 사실상 유일한 가용 도로인 "아카비시(Akavish)로"를 따라 거의 무모하다시피한 부교 수송 작전을 성공시킨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수에즈 운하를 도하할 가교를 부설하였고, 이집트 포병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포격을 가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돌파구 남쪽 제3군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좌측방을 찌르기 위해 북상하던 이집트군 제25전차여단은 이스라엘군 제2제대 아브라함 아단 소장의 제162기갑사단이 벌인 사단급 매복공격에 걸려 완전히 분쇄됐다. 운하 서쪽의 이스라엘군 선견부대는 이집트군 후방을 마구 휘저으며 무방비상태의 SAM 포대를 닥치는대로 파괴하여 공군이 마음 놓고 교두보 일대에 근접항공지원을 퍼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안정적인 돌파구가 확보되자 아단 휘하의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기계화 보병들이 수에즈 운하 서안으로 돌입,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제3군 병력을 포위함으로써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집트군은 철수했다가는 이번 전쟁으로 얻은 모든 것을 잃을까봐 철수하지도 못했고, 철수하지 않았다간 이번 전쟁에 투입한 전병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포위되는 결말을 맞았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하여 이후 이집트의 전쟁 의지를 아예 소멸시켜버리고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의 후견국인 미국, 이집트/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대대적으로 개입했다. 미-소 양국은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 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미국을 무시하고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과 손을 잡는한이 있더라도 미국은 이집트 편에 서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에 가까운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7]

우리는 브레즈네프를 자기 친구들 앞에서 병신새끼처럼 보이게 하는 망신을 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소련과의 데탕트 말고도 후견국을 다시 미국으로 갈아치울 기미를 보이던 이집트의 체면도 중요했다. 기필코 이집트라는 중동 최고의 외교적 카드를 손에 넣고 싶었던 키신저는 여기서 반드시 사다트의 면목을 세워줘야만 했다. 디니츠 대사는 이집트가 정전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위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강변했고, 이집트가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던 것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3군을 구출하기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던데다 이스라엘이 3군을 작살내서 중동불패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 자체는 너무 명명백백해서 닉슨과 키신저 모두 이스라엘의 항변을 씹었다. 한편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던 사다트는 미국과의 수교까지 도모하는 조건으로 아예 미군이 이집트 편으로 개입해달라고까지 요청했으나 키신저는 사다트가 이스라엘만큼이나 황당하게 군다고 혀를 찼다.

어쨌거나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3군 섬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주저앉히면서 이스라엘이 하도 오랫동안 대화를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는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외교정책은 없어지고 국방정책만 남은 모양이라고 촌평했다. 동시에 소련 대사 블라디미르 비노그라도프는 사다트에게 당장 정전에 동의하라고 다그치는 브레즈네프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이집트 역시 통제하였다. 한편 시리아는 이라크를 끌어들여서 또 한번의 반격을 준비하려 했으나 소련은 아사드에게 헛짓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였고 이 때문에 아사드는 분노하면서도 반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 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3차 중동전쟁까지 연전연승한 이스라엘 육군 및 공군과 달리, 해군은 당시로선 신병기인 스틱스 대함미사일에 주력 구축함 에일라트를 잃는 굴욕을 당한 바 있어 아랍국을 얕잡아 보고 있던 타군과 달리 긴장도가 높았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했기에, 육공군과 다르게 전쟁 내내 승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4. 결과[편집]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육군 기갑부대와 공군의 항공 전력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탈 장군(이후의 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하다.)의 회고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 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 지원 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한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 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 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이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38]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된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 다얀 국방 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39]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얀과 메이어는 형편이 나았다. 아그라나트 보고서에서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그라나트 보고서가 이스라엘의 기습 허용에 가장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지목한 것은 이스라엘 군사정보국(아만)이었다. 아만 국장 엘리 제이라 장군은 파면됐고, 부국장 아리예 샬레브 장군도 보직해임 당했다. 제이라의 오판을 지지했던 아만 이집트과장 요나 반드만 중령 역시 정보 관련 업무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아만 쪽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모사드가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얘기를 해줬음에도 군사정보는 자신들의 전문분야라며 그럴리 없다고 무시한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고위 지휘관들도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 중장은 개전 직전 상황 판단과 전쟁 준비 실패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됐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상상도 못한 재난에 메이어와 다얀이 모두 흔들리던 순간에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국가지도부의 패닉을 막고 마침내 대역전을 이끌어낸 이 또한 그였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내각과 참모본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그라나트 보고서는 이 점을 참작해주지 않았다. 엘라자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군에서 떠났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군의 초기 공세에 대패한 남부사령관 슈무엘 고넨 소장은 아예 아그라나트 보고서에서 강제 예편 대상으로 이름이 올라 1974년 군복을 벗었다. 개전 초 반격 실패 이후 엘라자르가 직접 복귀시킨 전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 장군에게 사실상 남부사령관직을 넘겨준 상태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 고넨의 지휘는 군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고넨은 남은 평생을 국외의 오지를 떠돌며 보냈고(중앙아프리카에서 13년을 머물렀다. 이유는 거기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해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서 명예를 회복하려던 것) 조국은 가끔씩만 방문할 뿐이었다. 언젠가 "실종"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그는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아그나라트 위원회의 책임 추궁에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이전에 미사일 고속정으로 재미를 봤던 아랍 해군을 같은 수단으로 역관광시켜, 21세기 이후 조금씩 초계함을 도입하기 전까지 수상함은 죄다 소형 고속정으로만 꾸리게 됐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 전략은 다시 6일 전쟁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 공격하는 옵션을 대폭 수용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또한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 도입국 중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는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스라엘군은 놀라울 정도의 회복탄력성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길이 남을 역전승을 거두면서 어째서 스스로가 주변국 군대와 질적으로 격을 달리하는 정예인지를 다시금 증명했다. 이스라엘은 적시에 동원령을 발효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략적 기습을 허용한 것은 물론 물론 대전차미사일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기술적으로도 기습을 당했지만, 휘청이고 비틀대면서도 아랍연합군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예비군을 전장으로 투입하고 일개 전차장부터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등의 일선 지휘관들이 임무형 전술에서 강조하듯 스스로 전장 상황을 읽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개전 초 기습의 충격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점이 특히 빛났던 순간은 방어 책임을 맡은 현역 부대인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이 사실상 궤멸했음에도 분산, 고립됐거나 부대 집결을 기다릴 새도 없어 동원되자마자 달려온 개별 전차[40]와 소대, 중대가 자발적으로 끈질기게 싸운 끝에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군 최대 거점인 나파크 기지 코앞에서 시리아군의 공세를 저지해냈던 골란 고원 남부 전투에서였다.

이스라엘군의 엄청난 전술적 적응 속도를 잘 보여준 것은 대전차미사일과 RPG-7이 밀집된 보병 진지에 대한 대응이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끔찍한 피해를 유발했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전차의 정면돌격은 개전 수 일만에 포병의 이동탄막사격과 전차의 직사화력으로 엄호받는 보병의 근접전투로 대체되었다. 지대공 미사일 또한 적 후방으로 고속침투한 기계화부대가 SAM 포대를 지상에서 직접 타격하는 방식으로 무력화했다. 기존에 이스라엘군이 누리던 강점 역시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골란 고원 전선 반격과 시나이에서의 대규모 전차전에서 입증됐듯 이스라엘군 기갑부대는 기갑전에서는 주변국 전차부대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파괴적인 전투력을 발휘했고, 수에즈 운하 도하작전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성과 호기를 포착하면 즉시 이용하는 신속한 작전템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과시했다. 개전 초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던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났을 때 다마스쿠스카이로를 지상군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모르데카이 가지트 장군이 후일 회고했듯, 이스라엘군은 "2년이 아닌 2주일만에 진주만에서 회복했다." 이러한 군사적 탁월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억제력은 전쟁 이후에도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전후 어떤 목표를 추구할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6일 전쟁 당시의 전투만 벌어지면 달아나는 겁쟁이 아랍 군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랍연합군, 특히 이집트군은 여전히 서툰 면은 있어도 달려드는 전차 앞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 용기만큼은 존중받아 마땅한 전사들이었다. 그 결과 1973년의 노동당/조정당 정권 뿐만 아니라 1977년 총선으로 성립된 우파 리쿠드당메나헴 베긴 내각 역시 이집트와의 외교 협상을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게 다루었다. 메나헴 베긴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맡아 양국의 평화협정 체결과 국교 수립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 사실을 직접 체감한 모세 다얀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러한 당당함은 고압적 자세가 아니라 유연한 협상 태도로 나타났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처럼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 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안와르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화평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시켰던 것이다. 당장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서 승인한 "시나이 반도 반환 대 평화협정 및 외교적 승인, 시나이 반도 비무장 지대화 교환"과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실현된 "시나이 반도 반환 대 평화협정 및 외교적 승인, 국교 수립 교환"을 보면 대차대조표에서 시나이 반도 비무장지대화가 국교 수립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다만 키신저의 회고에 따르면 사다트는 전후에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개전 이전부터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물론 이제 명목상으로나마 그런 목표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이집트의 국익에 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은 내세울만한 군사적 성과를 통해 이집트 국민이 6일 전쟁의 대참패로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여론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과 수교를 수용할 수 있는 국내정치적 조건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관대한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키신저는 개전 초 외교전문에서 사다트의 이러한 속내를 읽어낸 뒤 찬탄을 담아 "나는 지금 우리가 일류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결국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와 미국의 보상 제안[41]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대신 이집트는 욤 키푸르 전쟁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것조차 거부하던 극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국교 및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적성국 대열에서 반영구적으로 이탈했다. 이스라엘이 건국 직후부터 오랜 세월 기다려온 외교적 돌파구였다.[42]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랍 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과는 평화도, 협상도, 승인도 없다"는 아랍 정상회의의 "3 No 원칙"을 깨뜨리고 이스라엘과 수교한 이집트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1979년 아랍연맹에서 퇴출당했으며, 카이로에 위치하던 아랍연맹 본부 역시 튀니스에 빼앗겼다. 아랍 세계의 리더를 자임하던 이집트로서는 커다란 외교적 타격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아랍 지도자가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를 방문한 역사적인 장면에서 "앞으로 전쟁은 없습니다"라고 연설한 사다트 본인도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30년간 권좌에 앉은 것은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에서는 몇몇 사소한 사건을 제외하면 평화가 깃들었다.

시리아하페즈 알아사드에게는 사다트 같은 풍부한 상상력과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없었다. 최상의 조건에서 시작한 전쟁마저 또 한 번의 참패로 끝났음에도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의 직접 대화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양국을 오가며 간접 협상을 해야했다. 자연히 협의의 범위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협상으로 도출된 정전 합의의 결과 이스라엘은 욤 키푸르 전쟁으로 점령한 시리아 영토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대신 시리아는 이스라엘 영내로의 게릴라 침투를 차단하기로 약속했다. 그나마도 문서화된 협정이 아니라 구두 약속이었다. 결국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의 수중에 남았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적성국에서 이탈한 이상 시리아 홀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승리할 가능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시리아는 불만 가득한 침묵 아래로 가라앉았다.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협상을 거쳐 영토를 되찾은 이집트도 전략적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43]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는 그 동안 한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기념한다.[44]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은 이집트의 국경일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월 6일(السادس من أكتوبر), 또는 라마단 10일(العاشر من رمضان)[45]이라는 지명이 이집트 곳곳에 존재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우선 시나이에 사는 베두인 유목민에게 자치권을 주면서 달래고 유전 탐사 등 시나이 반도 내 여러 지하자원 개발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여러 곳 건설하는 등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통치 자체는 꽤나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닥친 오일 쇼크로 인해 이스라엘 경제가 휘청하면서 안 그래도 군사비 확보를 위해 쩔쩔매는 이스라엘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스라엘 본토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개발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다. 또 시나이 개발을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한데 당시 1980년 당시 이집트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하여 이스라엘은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 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 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다.[46][47]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육공군과 달리 처참히 패배한 이집트 해군은, 이후 미사일 고속정 만능론을 폐기하고 중무장한 대형 프리깃상륙함 등을 대거 들여와 이스라엘 해군을 포함한 중동, 아프리카 국가의 모든 해군을 압도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었다. 현재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대수상전은 사실상 수상함이 아닌 잠수함과 특수부대, 공군의 공대함 병기가 상대하는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4.1. 정전 직전의 미소 핵대치[편집]



[다큐] 되살아나는 악몽 - 1973년 알려지지 않은 핵전쟁 위기 (2019)[48]


개전 초기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 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가능한 스커드 미사일 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키신저,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뻔 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이다.

위 다큐멘터리의 내용대로 24일 밤-25일 새벽 사이 브레즈네프의 일방적 파병 위협, 백악관의 데프콘 3 발령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서 주요 증거로 제시한 소련의 핵물질 운반 관련 보고는 26일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에 데프콘 3 발령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소련이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소련 해군지중해상 핵물질 운반은 빈번히 있었으며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2. 소련이 아예 실전 사용을 작정하고 핵무기를 옮겼다면, 미국이 시퍼렇게 눈 뜨고 감시중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시키지 않고 비밀리에 항공수송했을 것이다.
3. 핵무기에 극도로 민감한 소련이 공산권도 최우방도 아니며, 심지어 전쟁 중인 제3국에 핵무기를 넘겨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나마 비슷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핵무기의 통제권은 철저히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49]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 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50]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5. 영향[편집]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에 협력적인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 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51] 이때의 오일 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 1970년대 중후반에 두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으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 부대가 대전차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개전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이다.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이집트의 외교정책도 크게 변화한다. 아랍민족주의와 아랍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이스라엘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친소적 노선을 채택한 나세르와 달리 사다트는 4차 중동전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소련을 내치고 미국을 외교적 파트너로 선택한 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및 수교를 추진하여 성사시켰으며, 후임 정권인 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다.[52]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오일 머니 덕에 서방 최첨단 무기를 사들여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 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 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어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됨에도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 메이커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핵카드를 꺼내들자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 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53]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으며 실제로 네타냐후 총리의 오판으로 발발한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에서 조 바이든이 무력개입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군사적 지원을 전부 끊겠다는 협박 한마디에 바로 그만뒀다.


6. 기타[편집]


  • 당시 23살이었던 건축학도 아모스 기타이는 헬리콥터 구조대로 참전했다가 전장을 8mm 카메라에 담았던 것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으며, 훗날 '키푸르'라는 제4차 중동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 골란 고원 전선의 붕괴를 막은 이스라엘군 제77전차대대장 아비그도르 카할라니의 수기 《골란 고원의 영웅들》은 현대 전차전의 실상을 잘 기록한 수작으로 꼽힌다.

  • 톰 클랜시의 소설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는 시리아군의 초기 공세에 밀린 이스라엘군이 조립한 핵탄두가 행정 착오로 CAS 임무에 나가는 A-4 공격기에 장착됐다가[54] 해당 항공기가 격추된 후 20년 만에 테러리스트들이 이 핵탄두를 찾아내어 벌이는 핵 테러가 묘사된다. 같은 제목의 영화판 또한 내용이 비슷하지만 영화를 제작할 당시 9.11 테러의 영향 때문에 이 테러 주체가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에서 네오나치주의자로 변경되었다.


  • 2021년에는 HBO에서 골란 고원 전투를 다룬 ‘눈물의 계곡’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 한편 자동차 업계, 특히 미제 자동차들이 이때 큰 타격을 입었다. 배기가스 규제 때문에 차량의 출력이 강제로 떨어진 데다 기름값 폭등으로 V8 엔진이 장착되는 중형차 이상급 미제 차량[55]들은 판매량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다가 곧 이어진 2차 오일 쇼크가 이들을 완전히 조져버렸고 결국 저가 브랜드에서 고가 브랜드까지 플랫폼 하나 돌려가며 디자인만 바꿔서 쓰는 뱃지 엔지니어링이나 하는 차로 전락해 버렸다. 밀려들어오는 일제와 독일제 차량들은 덤.

  • 북한은 이 전쟁 때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집트, 시리아 등에 군사적 지원을 하여서 이집트, 시리아와 군사적 우호 증진을 맺게 되었으나 이스라엘과는 영원한 적대지간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북한과 이스라엘은 수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이스라엘의 적대관계인 팔레스타인과 국교를 수립하였고 팔레스타인의 UN 정회원 가입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하며 이스라엘, 미국 등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스라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아서 모사드 요원들 역시 북한을 주적국들과 같은 급으로 경계하며, 실제로 대북한 첩보 성과도 어느 정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과정에서 대북 첩보에 가장 열을 올리는 곳인 대한민국과 협력하여 첩보 성과를 공유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1988년부터 91년까지 만화왕국에 연재되던 "첩보원 보바"같은 작품에서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이 괜히 등장하는 게 아니다.(작품 주인공부터가 모사드 요원으로 착각당하는 데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박정희 정권은 석유 수급 문제로 인해 철저히 친아랍으로 외교노선을 전환하여 불법적 점령을 유지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문제라면서 즉시 가자 지구, 웨스트뱅크, 골란 고원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골자의 이집트 지지선언을 했다. 이에 대해서 사다트 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모두 대단한 만족을 표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2차 오일쇼크 당시 최규하를 특사로 파견한 한국 측에 편의를 제공했고, 한국의 비동맹기구 가입도 지지해주었다. 이집트 역시 한국에 수교 의사까지 표명하는 등 한국에 호의적인 입장이 되었으나 이집트 측의 수교 대가 요구가 너무 커서 한국이 거절하였다. 반면 이스라엘과는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1978년 이스라엘은 유지비 부담을 구실로 서울에 설치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을 철수시키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이 한국 외교업무를 맡게 했다. 이후 80년대부터 다시 관계가 호전되면서, 1992년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시 서울에 세워졌다.

  • 연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4차 중동전이 끝난 3년 뒤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랍 적국들의 반발로 인해 AFC에서 쫒겨나다시피 했다. 이후 OFC 등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UEFA에 정착.

  • 이 전쟁에 사용된 M48 패튼M60 전차(마가크)들은 포탑 구동에 사용된 유압 시스템의 인화성이 높았던데다, 준비탄 적재소가 좌측 유압장치에 있기에 피격당하면 그대로 유폭이 되어버려 해당 문제로 전차병 손실률이 너무나도 높아서 시체 운반기라 불렸다. 너무나도 빠르게 산화되는 나머지 주변 전차에 탑승하고 있는 병사들은 헤드셋에서 전우가 불타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일 때문에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사기가 급감하기도, 반면 센츄리온 전차(Sho't)는 M48과 M60보다도 구식이지만 한방 얻어 맞는다고 해도 쉽게 차량이 불타오르거나 하지는 않았고 어떤 차량은 하루에 전차장이 다섯번이나 바뀌면서까지 분전하며 겨우겨우 시리아군을 이겨냈다고 한다. 마가크들의 이 문제점들은 전후 유압을 인화성이 낮은 물질로 교환하고 블레이저 ERA를 장착하며 해결된다.

  • 대전차미사일의 중요도가 부각되면서 전차 무용론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과거에는 전차가 보병에 취약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보병 역시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멀리서 쏜 뒤 알아서 유도가 되는 대전차미사일은 대전차 보병의 생존율을 크게 높였다. 보병과 합동으로 작전을 진행했다면 피해가 이렇게까지 크지는 않았겠으나 인구 부족으로 보병을 최소화하고 기갑 단독 행동이 많았던 이스라엘군에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러한 전훈을 바탕으로 각국은 포탑 및 차체 주요 부위에 복합장갑을 적용한 3세대 전차를 개발하였다.

  • 당시 이집트군 소속으로 소량의 구식 T-34가 보병지원을 목적으로 투입되었으며, 이를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 SU-100 또한 시리아군 소속으로 T-55와 혼성편제되어 골란고원에 투입된 전력이 있다.

  • 이 전쟁 당시 아랍 연합군의 전차들이 탄피를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일정히 배출하자, 이스라엘군에서 "아랍이 진짜 달라지기는 달라져서 탄약수들도 훈련을 열심히 했나보다"며 감탄을 연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차가 이집트군에 새롭게 배치된 T-62였고, 탄피가 빠른 속도로 일정히 배출된 것도 전차에 장착된 자동탄피배출장치 때문이라는 사실에 2중으로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 이스라엘군 입장이서는 당연히 적 전차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 자동탄피배출장치 때문이 아니라 탄약수의 기량이 향상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56]

  • 10월 14일, 그 형편없던 이집트 공군이 만수라 공군기지 인근 공역에서 MiG-21로 이스라엘과의 대규모 공중전에서 총 17대의 전투기를 격추하고 불과 6대를 손실하는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다. 이때 이집트 공군의 지휘관이 호스니 무바라크였으며, 이 승리는 그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는 지금도 이 날을 '공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 공교롭게도 몇십년 후인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4차 중동 전쟁 때처럼 안식일로 인해 장병 다수가 휴가를 나가는 등의 병력 공백 때문에 하마스의 초기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실책을 또다시 반복했다. 개전일도 4차 중동 전쟁의 개전일인 10월 6일보다 단 하루 늦은 10월 7일. 또 이스라엘 군 수뇌부도 과거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전쟁 직전에 상황을 오판한 것처럼, 전쟁이 시작된 남부의 경계를 소홀히 하고[57] 이스라엘의 알박기가 진행 중이던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다 그대로 털리는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그나마 이스라엘에게 다행인 점은 이후의 전황 흐름까지 욤 키푸르 전쟁과 비슷하게 흘러가 전쟁 초기에 빼앗긴 영토를 빠른 시간 안에 탈환했다는 사실 정도.

  • 이 전쟁에 대한 국문도서로는 김희상 저 '중동전쟁' 임채상 역 아비르고드 카할라니 저 '골란고원의 영웅들' 과 '전사의 길' 사이먼 던스턴 저 박근형 역 '욤 키푸르 1,2' 그리고 2022년에 출간된 아브라함 라비노비치 저 이승훈 역 '욤 키푸르 전쟁' 등이 있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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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그대로 "욤 키푸르 전쟁".[2] "10월 라마단 전쟁".[3] 이집트는 전쟁 목표였던 시나이 반도를 전후 협상(1979년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통해 1982년까지 회복,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반환을 대가로 이집트와 국교를 수립하여 적성국 대열에서 반영구적으로 이탈시키는 데 성공[4] 유대교의 설날이라 할 수 있는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와 함께 일명 High Holidays라 불리는 유대교 달력의 주요 절기의 하나이며, 일년 중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날이기도 하다.[5] 전쟁이 일어난 시점이 라마단 도중이었기 때문이다.[6] 이 문제에 있어선 모셰 다얀이 가장 유화적이라서 18마일을 철수하자고 제안했으나 메이어 내각은 나라를 망치는 요구라고 발칵 뒤집혔다.[7] 중동전쟁에 대해 배경지식이 없다면 협상 좀 하는 게 뭐가 그리 문제인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는 평화도, 협상도, 승인도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8] 6일 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레비 에슈콜 총리는 후세인 국왕에게 안전보장을 제안했지만 후세인은 텔 아비브가 이미 이집트 공군의 공격으로 불바다가 됐다는 나세르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서 참전했다가 다른 아랍 국가들처럼 크게 패하고 웨스트 뱅크를 상실하였다.[9] 소련이 이스라엘을 몰아내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빡친 사다트는 개전 직전 소련 고문과 기술자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렸지만, 개전 이후에도 소련제 무기가 이집트에 계속 지원되는 등 소련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일정 부분 유지된다. 사실 소련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자극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10] 단순히 사병들을 막 부려먹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해지면 다루기 어렵다면서 교범 교육을 중지시키고 인간 이하의 뭔가로 보며 학대하고 부려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구 일본군의 영향을 받았던 쌍팔년도 한국군처럼 소련군의 영향이라도 받았던 모양. 이런 생각이 장교들의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었으니 이집트군의 전투력이 개판인 것도 당연했다.[11] 1944~2007. 이집트의 전 대통령 나세르의 사위이며 사다트 대통령의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전쟁 이후 스파이 행각이 드러났으나 처분은 해외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정작 본인은 런던에서 살면서 조국에 가고 싶어했으나 2007년 역사학자들과의 인터뷰를 코앞에 두고 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시신이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12]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마르완에 대해 사다트의 기만 전술과 연계하여 이스라엘에 양치기 소년식 작전을 시도한 공작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이스라엘(특히 모사드)에서는 최고의 모사드 정보원이었다며 서로 자기네 요원이었다고 싸우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지고 유족들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꼭 좋아한 것도 아니라고. 나세르가 죽고 찬밥이 되어버린 터에 배신한 것 뿐이라는 말도 많다. 하지만 나세르 사망 이후 찬밥이란 주장은 철저한 거짓으로, 사다트는 집권 과정에서 나세르의 구 측근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정보 책임자로 마르완을 기용하였다.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모사드는 그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였는데 나세르 이후 찬밥이 됐다는 주장은 마르완을 실드치기 위한 사실관계 왜곡에 해당한다. 뭣보다도 마르완은 나세르가 죽기도 전인 1970년에 이미 모사드에 자기 발로 찾아가서 첩자가 된 상황이었다. 아슈라프 마르완의 이중첩자 여부 논란에 대해서는 2019년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앤젤의 추락'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앤젤은 당시 모사드에서 붙여준 마르완의 암호명이다.[13]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거국적 공휴일이며, 이 기간에는 그 어떤 노동 행위도 허용되지 않고 금식과 종교적 행사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유태인 출신 스포츠 선수들이 욤 키푸르를 이유로 경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을 정도. 카할리니 중령의 회고록을 보면, 욤 키푸르 당일 개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부대로 차를 몰고 가는데 길가의 소년들이 욤 키푸르에 뭐하는 짓이냐며 욕을 하고 돌멩이를 던지려 했다고 할 정도. 이때 이집트군은 인구가 적어 전시 동원 체제에 의존해야 하는 이스라엘군의 약점을 역이용, 개전 이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기갑훈련을 벌였다. 그 결과 이집트군의 침공에 대비해 산업체의 청년들을 징집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경제는 그야말로 마비될 지경이었고, 결국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본격적 침공 시 전시 동원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이스라엘군이 피로에 지쳐 방심하고 있을 때 이집트군이 본격적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 추가적으로 결국 예비군은 골다 메이어에 의해 12만명이 소집되기로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당연히 욤 키푸르 행사와 잦은 이집트의 양치기식 속임수(농락)에 의해 또 소집되어봤자 허탕이겠지라는 예비군들의 생각을 반영해 겨우겨우 장성들이 요구하는 예비군 소집 6만명에서 12만명으로 늘린 것이다.[14] 바르레브 라인 사진을 본다면 45도 가량의 경사면을 지닌 높은 벽이기에 병사들이 올라가기 힘들고 차량 기동도 힘들다. 또 이런 모래벽은 총알을 쏘면 그냥 박히거나 포탄이 날아와도 모래 때문에 불발, 터지더라도 유의미한 피해를 못 끼친다. 대신 모래는 물에 젖으면 딱딱한 강도가 부드러워지고 계속 물을 투입해 안쪽부터 무너뜨려 주면 부셔지기에 충분하다.[15] 1세대 대전차미사일의 운용상 한계점 때문에 보조로 RPG-7도 준비하였다.[16] 이때 치명적인 약점으로 이스라엘 공군의 A-4 스카이호크는 RWR이 없었으며, F-4 팬텀 II의 RWR은 신규 장비인 SA-6 지대공 미사일 레이더 주파수가 등록되지 않아 울리지 않았다.[17] 말륫카같은 1세대 대전차 유도탄들은 이전부터 꽤 보편화된 무기체계였지만, 평원에서의 대규모 대전차전을 실제로 겪어보는 것은 사실상 여기가 처음이었다. 대전차포의 쇠퇴 이후 한동안은 장거리에서 전차를 격파하기 힘들었다는걸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방심이 제대로 찔린 결과물.[18] 당시 이집트군은 그야말로 맹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의 피해가 더 컸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의 M48 전차들은 유압식 회전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사일이나 RPG를 맞으면 그대로 불이 붙어 내부가 화염지옥이 되어버렸다! 피해도 피해지만 무전을 통해 불타 죽어가는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심리적 타격도 컸다. 그 후 메르카바 전차 회전부에 여러 가닥의 추 달린 사슬을 달아 놨다.[19] 이전까지 아랍군은 장전법을 몰라서 한 발 쏘고 전차에서 도망가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훈련이 부족했다.[20] 당시 이집트 수뇌부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21]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이 이런 작전을 벌일 수 있을 거라 예상치 못하다가 과감한 헬리본 작전에 제대로 허를 찔렸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을 얕본 나머지 헤르몬 산 관측소에 전투병력으로 고작 1개 분대만을 배치해두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통신감청부대를 비롯한 비전투인력이었다. 결국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11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22] 이때 시리아군 전차병들은 동료 전차들이 격파되면 그대로 후퇴하거나 심지어 장비를 유기하고 도망치던 지난 전쟁과는 달리 정신 무장도 탄탄하게 되어서 난전에도 굳건히 진격해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은 다른 사람도 아닌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전사할 정도의 피해를 입고 사실상 전멸했다.[23] 시리아군의 골란고원 북부 제1제대를 맡은 제7보병사단장도 이곳에서 사망했다. 다만 전사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는 설이 나뉜다.[24] 메이어가 정확히 무슨 의미로 이런 발언을 한 것인지는 약간 불분명한데, 1967년 국경선을 의미한다는 분석도 있고, 그녀가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시절 겪은 포그롬을 의미한다는 말도 있다.[25] 개전 당일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수뇌부는 길어야 96시간 이내로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26] 후일 미국 작가 톰 클랜시는 이때 이스라엘 핵탄두가 실제로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탑재되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여 공포의 총합이라는 소설을 썼다.[27] 링크의 Document 21B 참조. '키신저는 이 문제 (이스라엘의 핵탄두 조립)에 대해 기록상 발언한 적이 없으며, 이스라엘의 핵무기 사용 징조에 대한 미국 측 문서가 기밀해제된 바 없다.' (Kissinger has never gone on record on this issue and no U.S. documentation on the U.S. Israeli nuclear posture during the war has been declassified.))[28] 국내에선 해당 음모론이 웹툰 스틸레인에서 써먹은 덕분에 꽤 알려졌지만 애초에 스틸레인은 각잡고 들어가면 국제정치, 북한정치 모두 고려안한 황당한 내용 투성이고 그 안에서조차도 그럴듯한 썰 정도로만 다뤘다.[29] 각종 무기와 전차, 전투기를 이스라엘에 퍼줘서 이기게 만들고 패배한 아랍국가들한테 "우리가 중재해줄게~" 이러면 어느 아랍국가가 미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는가(...)[30] 석유 기업들은 군산복합체 음모론의 레퍼토리와는 정반대로 전쟁이 터지자마자 닉슨에게 달려가 빨리 정전을 성사시켜달라고 로비했다.[31] 이 지원 작전은 희대의 똥꼬쇼였는데, A-4 스카이호크 자체가 상당히 체격이 작아서, 항속거리가 엄청나게 짧았다. 중간중간 공중에서 연료를 보급하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 당시 미군의 현용 공중급유기의 항속거리가 공중급유기치고는 너무나도 짧았다. 거기다가 포르투갈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자국 내 비행장에 대한 미군기 착륙을 금지해버렸다. 그래서 미군이 고안해낸 방법이 가관인데, 항공모함 3척을 지브롤터부터 크레타 섬까지 일렬로 배치, A-4의 중간기착지가 되어서 거기서 보급을 받고 이스라엘로 향하는 것이었다.[32] 이스라엘 측은 아랍측이 전쟁발발 전까지 온갖 협박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선제공격을 옹호하려 들지만, 국제법상 외교적 모욕이나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개전의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33] 원래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시나이 사막이 가로막는 이집트 방면을 제외하고는 작전 종심이 좁은 편인데다가, 적대적인 국가들로 3면이 포위되어 있고, 현대전에서는 동원령이 먼저 발령되는 쪽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당한 1차 중동전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기본전략은 선제공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먼저 분쇄한다는 것이었다.[34]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영내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흑인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게 되는데 이들은 모로코군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경우 아랍 전체 및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 소련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러나게 된다.[35] 이라크군은 격전 지역에서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첨병조차 배치하지 않아서, 이스라엘군은 소수의 특수병력을 헬리본으로 투입하여 이동하는 적 기갑장비의 첨단과 최후미를 공격해 격파하여 이동을 막은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한 공군의 A-4를 불러 폭격으로 전멸시켰다. 그런데 이게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똑같은 작전에 이라크군이 당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36] 6일 전쟁 이전까지 이집트의 농업시험장이 있던 곳인데 농업시험장을 점령한 이스라엘군이 농업시험장 내 기계설비에 적힌 한자를 보고 군사지도에 '중국 농장'이라고 표기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됐다. 사실 그 설비들은 일본제였다는게 함정이지만.[37] 이스라엘은 이 시점에서 미국의 제지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4차 중동전에서 그야말로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손실을 입은 이스라엘군은 미국의 대규모 지원 없이는 결코 단시일 내 군사력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박살난 군사력을 빠르게 회복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일례로 욤 키푸르 전쟁에서 자그마치 1,000여대의 전차를 잃은 시리아군은 곧 소련으로부터 800대의 전차를 새로 받아 손실분을 거의 메꿨다.[38] 특히 기갑 병과의 피해가 극심했다. 2,800명의 전사자 중 1,500명이 전차 승무원이었다. 때문에 전후 이스라엘에는 기갑 병과 복무를 기피하는 현상마저 발생했다.[39] 다얀 입장에선 좀 억울한 것이, 이스라엘 군부 안에서 이집트의 침공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우려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다얀이었다. 이스라엘 군사정보부 AMAN은 시나이 반도 방어 책임자 만들러 장군의 보고를 비롯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 마르완을 통해 입수한 이집트 작계에서 이집트군이 충분한 장거리 전폭기 없이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집트군이 치장 물자를 꺼내서 배급하는 상황에도 오로지 훈련일 뿐이라고 철저히 무시했다. 정작 이 때 이집트군은 장거리 전폭기에 의한 공세적 제공작전을 포기하고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항공거부로 이스라엘 공군에 대응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다얀은 이집트의 동태에 우려를 표하며 수에즈 운하 동안에서 철수한다는 가장 전향적인 타협안까지 제시하던 인물이었고 전쟁 직전에도 유럽 순방 중이던 골다 메이어의 긴급 귀국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보부의 판단을 수용하고 말았으며, 정작 전쟁 발발 직후 20만명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5만명의 부분적 동원만으로 사태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는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말았다.[40]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탭라인 도로를 따라 단 한 대의 전차로 시리아군 전차 수십 대에 맞서 밤새 야간전을 벌이면서 시리아군의 전진을 막아낸 즈비카 그린골드 중위다. 전후 이 공적으로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인 용맹훈장을 받았다. 용맹훈장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즈비카 중위와 77전차대대의 카할라니 중령을 포함해 겨우 8명에게만 수여됐을 정도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훈장이다.[41] 이 패키지에는 세계 최초의 F-15 해외 판매 허가가 포함돼 있었다.[42] 이스라엘이 다음 돌파구를 암만에서 얻기까지, 즉 요르단과 수교할 때까지는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요르단 왕실과 사이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이집트라는 선례가 존재하는데도 그랬다. 아랍 국가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일인지와 사다트가 얼마나 커다란 위험을 무릅썼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43]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 이었다곤 하지만, 이집트의 목표 자체가 시나이반도 영토 탈환이었지 골란고원은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다.[44] 원래 이집트군의 전략 목표는 시나이 반도의 회복이었기에 장기적으로 목표를 달성한 것은 맞다. 하지만 욤 키푸르 전쟁 종전 이후 수 년간의 평화협상 끝에 그간 아랍 국가들이 똘똘 뭉쳐 외교적 협상조차 일체 거부하던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반환받은 것이라 전쟁 자체의 승리라기에는 무리가 있다.[45] 1973년 10월 6일이 이슬람력으로 1393년 라마단 10일이다.[46]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시나이 반도로 이주하는걸 꺼렸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 주요 무역항으로 육성할 신도시인 야미트(ימית)를 건설했는데 당국이 상주 인구를 20만 명까지 잡고 야심차게 계획을 세운 것과 달리 철수 직전까지 이주해 온 이스라엘인은 3천명도 채 안 됐다. 사막이 99%인 시나이 반도에서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훨씬 나은 지역인데도 결과가 이랬다.[47] 미국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건국과 유지에 큰 지분이 없다. 이스라엘 건국에 가장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 사람들은 동유럽 유대인들과 미즈라힘,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고, 북미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은 (건국 시점에서) 만 명은 고사하고 5천명도 안된다.[48]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제목에서 말하는 핵전쟁 위기는 제4차 중동전쟁이다.[49] Kumaraswamy, Revisiting the Yom Kippur War[50] 당연히 데프콘 상향 결정을 내릴 당시의 키신저는 소련이 진짜 개입할지는 알 수 없었다.[51] 오일 쇼크는 단순히 경제를 뒤흔든 수준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계속되던 고도성장기 시절인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박살내고, 복지국가 정책이 쇠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52] 소련제 무기 일색이었던 이집트군도 미국과의 수교 정상화 이후 F-4 팬텀 IIF-16 전투기에 M1A1 전차들을 들여오는 등 미국제 무기들을 대폭 들여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계심은 여전해 미국에 대한 로비를 통해 이집트에 대한 AIM-120 판매를 제한하도록 해 F-16이라는 우수한 전투기임에도 AIM-7을 운용하고 있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집트는 프랑스 라팔 전투기의 MICA, 그리고 러시아 MiG-29R-77을 통해 제대로 된 능동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을 갖추게 되었을 정도다. 이집트군 M1A1 사양도 열화우라늄 복합장갑 삭제 등 여러가지 부분이 다운그레이드된 수출형이며, 당연히 F-35와 같은 스텔스 전투기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의 로비 외에도 이집트의 독재 정치로 인한 미국 의회 차원의 인권제재에 러시아제 무기들도 운용하고 있다는 특성상 선뜻 미국이 자국의 첨단 무기를 팔기 어려운 점이란 것도 한 몫한다.[53] 트럼프 정권이 다른 때 같으면 그야말로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에 날벼락이 떨어질 만한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인접국가이자 군사적으로 대등한 이집트와 사우디와는 나름대로 관계를 개선했고 레바논이나 시리아는 군사력이 약하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협박을 하고 이스라엘도 지지 않고 이란을 자극하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정면 대결을 막고 있다. 그러니 미국과 이스라엘이 다른 중동 국가들의 속을 긁어 놓을 만한 일을 벌여도 사우디와 이집트만 반발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석유를 뽑아내어서 중동 산유국의 눈치를 덜 보게 된 이유도 있다.[54] 소설판에선 전황이 너무 불리하자 총리의 명령으로 핵폭탄을 전투기에 장착시키고 조종사와 작전 실무진이 그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골란 고원 방어에 성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핵공격 명령도 취소되나 하필 기지에 불시착하던 F-4 전투기의 폭발사고로 핵공격 임무를 맡은 조종사와 정비반 일행이 휩쓸려버리고 일반 폭격 임무를 맡은 신참 조종사가 핵폭탄이 탑재된 전투기에 탑승하게 되는데 출격과 사고 수습에 정신없는 나머지 아무도 핵폭탄의 탑재 여부를 안 가르쳐줬고 조종사는 조종사대로 별 특징 없는 탑재물이 보조 연료탱크인 줄 알고 빨리 출격해야 하니까 그냥 달고 나갔다가 격추당하고 핵폭탄을 분실하게 된다. 나중에서야 이스라엘 지휘부에서 핵폭탄 잃어버린 걸 알고 난리쳤지만 찾지 못했고. 영화판에선 그냥 핵공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투하하기 전에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된 걸로 간단히 묘사한다.[55] 말이 중형차지 지금 출시되는 제네시스 EQ900, 벤츠 S클래스만 한 차들이다. 물론 당대 미국차 특성상 캐딜락이나 링컨을 제외한 차량들은 덩치 큰 쏘나타 수준의 대중차여서 앞의 사례와 달리 고급차들은 아니다.[56] 사실 T-62는 자동탄피배출기능이 작동되면 포구가 하늘 쪽을 가리키도록 포신이 위로 올라가는데, 조준경이 포신에 고정되어 있어서 포신이 위로 올라가면서 덩달아 조준점 역시 위로 올라가 다음 포격을 위한 목표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다.[57] 공교롭게도 이 때는 4차 중동 전쟁 때의 적국인 이집트가 하마스의 침공 징후를 먼저 알아채 이스라엘에 경고했으나, 욤 키푸르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대책 없이 묵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