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덤프버전 :



파일:라바룸.svg 동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 펼치기 · 접기 ]
전쟁·전투
교전국
다라 전투
,530,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조 페르시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535 ~ 554,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Ostrogoths_flag.png 동고트 왕국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 왕국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조 페르시아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Burgundians_flag.png 부르군트
동로마-아바르 전쟁
,568 ~ 626,
아바르 칸국
동로마-페르시아 전쟁
,603 ~ 628,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조 페르시아
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전쟁
,629 ~ 64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이슬람 제국
야르무크 전투
,63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이슬람 제국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
,639 ~ 64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이슬람 제국
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
,647 ~ 70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이슬람 제국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마스트 해전
,65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이슬람 제국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74 ~ 678,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 ~ 718,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아크로이논 전투
,740,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
,756 ~ 775,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크룸 전쟁
,807 ~ 816,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827 ~ 902,
아글라브 왕조
테오필로스의 아바스 전쟁
,830 ~ 84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아바스 왕조
시메온 전쟁
,894 ~ 896
913 ~ 927
,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쿠르쿠아스의 아랍 원정
,926 ~ 9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아바스 왕조
함단 전쟁
,945 ~ 967,
함단 왕조
한닥스 공방전
,960 ~ 961,
크레타 토후국
스뱌토슬라프 전쟁
,968 ~ 971,
파일:키예프 루스 국장.svg 키예프 루스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
,976 ~ 1018,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86,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클레이디온 전투
,1014,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칸나이 전투
,1018,
랑고바르드족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1038 ~ 1042,
시칠리아 토후국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1057 ~ 1085,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노르만족
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
,1071,
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레부니온 전투
,1091,
페체네그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 ~ 1099,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필로밀리온 전투
,1116,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베로이아 전투
,1122,
페체네그
하람 전투
,1128,
파일:Flag_of_Hungary_(13th_century).svg.png 헝가리 왕국
샤이자르 공방전
,113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Afghanistan_%281880%E2%80%931901%29.svg.png 장기 왕조
마누일 1세의 남이탈리아 원정
,1155 ~ 1158,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시칠리아 왕국
시르미온 전투
,1167,
파일:Flag_of_Hungary_(13th_century).svg.png 헝가리 왕국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1171,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기.svg 베네치아 공화국
미리오케팔론 전투
,1176,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
,1177,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1185,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시칠리아 왕국
아센과 페터르의 난
,1185 ~ 1201,
파일:불가리아 제2제국 국기.svg 불가리아 제2제국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 ~ 1204,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기.svg 베네치아 공화국 파일:1200px-Argent_a_chief_gules.svg.png 몬페라토 변경백국 파일:800px-Arms_of_Flanders.svg.png 플란데런 백국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
,1211,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클로코트니차 전투
,1230,
파일:불가리아 제2제국 국기.svg 불가리아 제2제국
펠라고니아 전투
,1259,
파일:640px-Flag_of_the_Despotate_of_Epirusunder_the_House_of_Komnenos_Doukas.png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파일:931px-Armoiries_Achaïe.svg.png 아카이아 공국 파일:Arms_of_the_House_of_de_la_Roche.svg.png 아테네 공국 파일:800px-Flag_of_the_Kingdom_of_Sicily_(Hohenstaufen).svg.png 시칠리아 왕국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60~1261,
파일:Latin Empire 1280.png 라틴 제국
바페오스 전투
,1302,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부르사 공방전
,1317~1326,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펠레카논 전투
,1329,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376,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17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390 ~ 1402,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18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11,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53,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파일:external/imgix.scout.com/1456170.jpg
시기
서기 717년 7/8 15일 ~ 718년 8월 15일
장소
콘스탄티노폴리스, 비티니아, 마르마라 해, 아나톨리아
원인
우마이야 왕조동로마 제국 정복 야욕
교전국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동로마 제국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르 칸국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지휘관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레온 3세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아르타바스도스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테르벨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마슬라마 이븐 알 말리크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르 이븐 후바이라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술레이만 이븐 무아드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박타리 이븐 알 하산
병력
15,000명
120,000명
함선 2,560척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사상자 다수
함대 전멸
결과
동로마 제국불가르 칸국의 승리.
영향
이슬람의 동유럽 진출 좌절
20년간의 혼란 종식
성상파괴운동의 시작.

1. 개요
2. 배경
3. 동로마 제국의 혼란
4. 전개
4.1. 동로마 제국의 내분
4.2. 레온 3세의 즉위
4.4. 본격적인 포위
4.5. 우마이야군의 퇴각, 동로마 제국군의 대승리
5. 결과



1. 개요[편집]


서기 717년부터 718년까지 우마이야 왕조동로마 제국간에 일어난 세계사적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우마이야 왕조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로 퇴각했다.

2. 배경[편집]


우마이야 왕조는 초창기 무아위야 1세 시기에 이미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포위전이 대실패한 이후 30년의 강화조약을 체결한 무아위야 1세는 화병에 걸려 죽었고, 680년 이후 우마이야 제국이 제2차 피트나를 겪으면서 동로마 제국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장기간의 대내전은 명군 아브드 알 말리크의 치세인 692년에야 진정되었고, 우마이야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여 내전기에 상실했던 아르메니아를 회복했고, 698년에 북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카르타고를 함락하여 마그레브를 평정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의 뒤를 이은 왈리드 1세 시기에는 이베리아 반도[1]중앙아시아 및 인도의 신드 지방이 정복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상승세를 경계하던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715년 2월, 왈리드 1세가 사망하고 술라이만이 뒤를 잇자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정권 교체기를 노려 시리아를 공격하려 했는데, 출정 명령을 받은 옵시키온 테마군이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고, 6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폐위시킨 후, 옵시키온 테마의 세금 징수원을 '테오도시오스 3세'로 즉위시켰다(715년 11월). 한편,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지켜보던 우마이야 왕조의 신임 칼리파 술라이만은 시조 무아위야 1세 때에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이슬람은 서쪽의 스페인에서부터 동쪽의 트란스옥시아나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핵심부인 시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필연적인 순서였다.

3. 동로마 제국의 혼란[편집]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후 제2차 피트나를 겪으며 우마이야 왕조는 십수년간 대혼란을 겪었다. 686년부터는 우마이야 제국이 동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까지 했다.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와 왈리드 1세의 치세를 겪으며 우마이야 왕조는 국력을 회복했다. 692년의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이 슬라브인들을 매수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한 것으로 평화는 끝났다. 그리고 695년에 세바스토폴리스의 패장인 레온티오스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유배시키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를 틈타 아브드 알 말리크는 698년에 카르타고를 공격했는데 레온티오스가 파견한 동로마 함대를 격퇴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때 처벌을 두려워한 패잔병들이 게르만계 장수인 아프시마르를 옹립하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티베리오스 3세'로 즉위시켰다.

티베리오스 3세는 동생인 이라클리오스를 아나톨리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모두 격퇴하고 703년부터는 오히려 마슬라마의 관할인 시리아 북부와 아르메니아를 약탈했다. 이에 아브드 알 말리크가 킬리키아를 공격했지만 그 역시 격퇴되었고, 티베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 섬에 동로마 군대를 주둔시켜 시리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704년에 유배지를 탈출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불가르 칸국의 군대를 빌려 705년 초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고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처형시켰다. 그해 10월, 시리아에선 아브드 알 말리크가 죽고, 왈리드 1세가 칼리파로 즉위했다.

복위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막 즉위한 왈리드 1세는 처음엔 우호 관계를 맺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무슬림 포로 6,000명과 건축가들을 보내주자 왈리드 1세는 후추와 보물로 보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707년부터 왈리드 1세는 이복동생인 마슬라마를 앞세워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마슬라마는 708년에 티아나, 709년에 아모리움과 이사우리아 일대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 중서부까지 진출했다. 그 공으로 마슬라마는 킨나스린(시리아 북부) 총독에서 아르메니아 총독을 겸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르 칸국을 배신했다가 그들에게 대패했고, 로마 교황을 강제로 폐위시키면서 인망을 잃었다.

711년, 크림 반도의 케르손에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기존에 반란을 일으켜 그곳에 유배되어 있었던 바르다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필리피코스'로 개명한 바르다네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그 일가를 학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복위를 도왔던 불가르 칸국이 그의 복수를 꾀한다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는데, 이에 필리피코스는 옵시키온 테마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필리피코스를 장님으로 만들고 폐위시켰다. 713년 6월, 옵시키온 테마는 시민의 의견대로 관료이던 아르테미우스를 '아나스타시오스 2세'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이 3년간 2번의 쿠데타를 겪자 마슬라마는 712년에 아마시아를 약탈했고, 714년에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동로마 제국의 거점이던 말라티야를 함락했다. 칼리파 왈리드 1세의 아들 아바스가 712년에 세바스티아폴리스, 713년에 피시디아 등 아나톨리아 남부를 지속적으로 약탈했다. 714년 경에 타우루스 산맥 방어선은 이미 붕괴되었고, 앙카라 일대가 실질적인 국경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영토를 모두 잃을 위기에 처했다. 다만 이때부터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이 우마이야 제국 지배하의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2년간 마슬라마를 붙잡아 두면서 이슬람의 공세는 잠시나마 둔화되었다.

한편 옹립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유능한 황제였다. 그는 자신을 즉위시킨 옵시키온 테마군의 장교들을 숙청했고, 단의론을 철폐하며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왈리드 1세의 치세에 우마이야 군대는 마그레브를 평정했고 이베리아 반도와 북서 인도, 트란스옥시아나 등지를 정복했다. 이에 이슬람의 다음 목표가 동로마 제국이 될 것을 예상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선대 티베리오스 3세에 이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보수했고, 3년치 식량을 비축해두었다. 한편, 동쪽에서 페르가나 정복이 끝나가던 715년 2월에 우미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칼리파 왈리드 1세가 죽고, 동생 술라이만이 뒤를 이었다.

4. 전개[편집]



4.1. 동로마 제국의 내분[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요새화해놓은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술라이만이 신임 칼리파로 즉위하자 이를 기회라 여기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 레온에게 시리아를, 해군에게 로도스 섬을 공격하게 한 후 옵시키온 테마와 합류하여 시리아 공격에 동참하게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에게 숙청된 경험이 있었던 옵시키온 테마는 로도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세금 징수원 출신 테오도시오스 3세를 옹립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보강한 성벽을 같은 동로마 군대가 공격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공격하기 이전부터 옵시키온 테마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이 한창이던 715년 9월, 이븐 무아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가 아나톨리아를 습격했다. 2개월 후에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테살로니카의 수도원으로 피신하면서 테오도시오스 3세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콘 테마의 레온과 아르메니콘 테마의 아르타바스도스는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며, 이에 칼리파 술라이만은 동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결심했다.

4.2. 레온 3세의 즉위[편집]


제1차 공격 이후 킬리키아에서 월동을 한 무아드의 우마이야 육군은 716년 봄에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아나톨리콘 테마의 주도인 아모리움을 공격했다. 동시에 우마르 이븐 후바이라의 우마이야 해군은 킬리키아 해안을 따라 북상했으며 총사령관인 마슬라마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의 주력 군대는 시리아에 집결하고 있었다. 한편, 이때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 레온과 마슬라마 사이에 계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온은 아모리움에 소수의 지원군만을 보냈고, 보급품이 떨어진 이븐 무아드가 철수했음에도 그를 추격하지 않았다.

716년 여름, 레온은 아르타바스도스의 추대로 황제를 칭했고, 옵시키온 테마로 진격하여 니코메디아를 함락시킨 후,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을 생포했다. 동시에 마슬라마는 이븐 무아드와 합류하여 페르가몬사르디스를 약탈하고, 에게 해 연안에서 월동했다. 해가 바뀐 717년 3월 말, 레온의 군대는 별 저항없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고, 수도원으로 은퇴한 테오도시오스 3세의 양위를 받아 레온 3세로 즉위했다. 이때 테오도시오스 3세는 그의 치세에서 추후 제국을 구원하게 될 일을 하나 하는데, 바로 불가르 칸국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이었다.(716년)


4.3. 그리스의 불[편집]


황제로 즉위한 레온 3세는 마슬라마와의 밀약을 지키지 않았다. 717년 6월, 마슬라마는 수만명의 병사들을 태운 전함과 함께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8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상륙했다. 그들은 성을 쌓아 장기 주둔을 준비했고 주변의 트라키아 지역을 약탈했다. 9월 초에 보스포러스 해협에 상륙한 이븐 무아드의 우마이야 군대가 마슬라마와 합류했다.

하지만 우마이야 해군은 40년 전의 포위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불에 막혀 패퇴했다. 따라서 동로마 해군은 여전히 흑해의 곡창 지대[2]로부터 밀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한편, 717년 10월에 술라이만이 죽고, 그의 사촌인 우마르 2세가 칼리파로 즉위했다.

4.4. 본격적인 포위[편집]


718년 봄, 우마이야 왕조의 증원 함대가 마르마라 해에 진입하며 본격적인 포위가 시작되었다. 8세기의 아랍 연대기는 무슬림 전사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고 기록했고 10세기의 연대기는 그 숫자가 120,000 ~ 200,000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이슬람 함대가 1,800여 척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그 해 6월 경, 마슬라마의 군대도 프리기아를 점령한 후 헬레스폰트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고 (워낙 대군이었기에) 7~8월의 두 달에 걸쳐서야 1년 전에 와있었던 선발대와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에 포위망을 구축한 우마이야군은 앞뒤로 성벽을 쌓아 동로마군의 후방 습격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여담으로 이는 갈리아 전쟁 시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보여주었던 2중 포위망과 유사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레온 3세는 마슬라마에게 수도의 시민 전체 몫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시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몸값 흥정 하지만 마슬라마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우마이야 수비대를 조직하는 등 승리를 확신한 상태라 패자와의 평화는 없다며 콧방귀를 꼈다.

9월 3일에는 헵도몬에 정박 중이던 술라이만 이븐 마우드의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나타나는 등 동로마 측에는 더욱 악재가 쌓여갔다. 술라이만의 함대는 갈라타와 칼케돈 인근에 정박했고,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흑해와의 항로도 이용하기 힘들어졌다.

4.5. 우마이야군의 퇴각, 동로마 제국군의 대승리[편집]


처음에는 우세를 점한 우마이야군이었지만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지 못한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투는 지구전 양상으로 흘러갔는데 마침 717년에서 71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혹독했고, 보다 더운 지역 출신이라 우마이야군은 월동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동상, 기아, 전염병이 겹쳐지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공성용 동물들도 그 사이에 많이 죽어서 공성에 차질이 생겼다고도 한다.[3] 파울로스 디아코누스는 기아와 질병으로 무려 300,000명이나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새로 칼리파가 된 우마르 2세는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에서 새로 편성한 병력을 2개 함개로 나누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 지원군은 그리스의 불을 피해 니코메디아와 칼케돈에 각각 상륙했지만 많은 수가 이집트 출신 기독교인이었던 이 병력에서 상당수의 탈영병이 속출했고, 그에 힘입은 레온 3세는 다시금 해전에서 승리하여 우마이야군의 보급품을 빼앗았다.

여기에 테르벨이 이끄는 불가르 칸국의 기습까지 당하자 칼리파 우마르 2세는 더 이상 공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후, 포위 13개월 째에 철수를 개시했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하필 우마이야군이 철수하는 도중에 산토리니 분화가 겹쳐 오직 5척의 배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슬람측 기록으로만 150,000명의 무슬림이 사망했다고 기록할 정도의 대참패였다.

여담으로 719년, 폐위되었던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불가르 칸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이후 처형되었다.

5. 결과[편집]


우마이야 제국의 함대와 병력 피해는 심각했다. 이 실패로 이슬람의 진출은 저지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시칠리아를 회복하는 등 위태롭던 상황을 극복하고 역으로 공세에 나섰지만 그때까지의 열세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2년 뒤 재차 동로마 제국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는 20년 뒤에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이 승리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크게 패배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슬람의 유럽 대륙 진출이 사실상 좌절되었다. 이후 732년에 프랑크에서 일어난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도 대패한 우마이야 왕조는 호라산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서쪽의 알 안달루스로 몽진하게 되었고, 아바스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전투에서의 대승리로 성상 파괴주의자인 레온 3세의 입지가 공고해지면서 성상파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14:26:43에 나무위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작 왈리드 1세는 이베리아 정복에 회의적이었다고.[2] 이집트를 상실한 이후로는 시칠리아와 우크라이나쪽이 곡창지대 역할을 수행했는데 시칠리아의 밀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소비되었으므로, 콘스탄티노플의 밀은 상당량이 흑해 항로로 운송되었다.[3]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