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군(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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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르덴 공세당시의 7군
3. 7군의 아르덴 공세
4. 아르덴 공세 당시 7군의 편제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아르덴 공세때 제5기갑군과 함께 벨기에 남부를 공세한 군이다.

당시 지휘관은 Erich Brandenberger(에리히 브란덴베어가)였다.

군의 구성은 1939년부터이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1941년의 동부전선에서 겪었다.[1]

  • 이 글에서는 아르덴 공세 당시의 제7군을 서술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2. 아르덴 공세당시의 7군[편집]


아르덴 공세를 준비하던 국방군의 어떤 부대라도 그렇듯이, 대부분의 부대들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크게 박살나 정원이 모자라거나 무기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공세를 준비하는 총통에겐 큰 문제였는데, 이에 따라 끌어모을 수 있는[2] 병력을 모두 끌어왔고, 이 덕분에 6기갑 군ㆍ5기갑 군ㆍ7군은 어느 정도 부대 정원을 채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대 정원을 채워도 정원 미달인 부대는 존재했고, 부대가 정원이어도 기계화 장비가 부족하다거나, 전투를 치를 정예 병력이 부족한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문제들은 제7군에서 특히 심각했다. 그 이유는 당시, 독일군이 기계화 장비가 부족했으므로 주공격을 담당할 5,6기갑 군에게 기계화 장비를 거의 다 몰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7군은 사실상 보병으로만 싸워야 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임무 중요도도 떨어졌다.[3]


3. 7군의 아르덴 공세[편집]


비록 보병이 주력이고 부대의 질도 떨어지지만, 7군은 12월 16일부터 19일까지 5기갑 군과 함께 아르덴 남부를 공세 했다.
그들은 초반 포격을 가한 뒤, 미 제8군단의 전선 곳곳을 비집어 들어가다가 미군의 일부 전초기지를 장악했는데 사실 대다수는 전초기지를 우회해버렸다. 그 덕분에 독일군은 저항 없이 우르 강을 건너 미군 109연대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했다.

12월 17일에 7군의 우익에 있던 5낙하산병 사단과 352국척사단이 우르 강 너머로 진군했으나 미군의 저항으로 진격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우르 강을 잇는 독일군의 가교가 완성되면서 군단 유일의 기갑부대인 11돌격포 여단과 차량들, 5낙하산병 사단 포병대가 이동해오면서 전력이 강화됐다.

이어 18일엔 352국척사단의 가교가 완성되면서 겐팅엔 부근으로 포병과 중화기가 우르 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결국 이곳을 방어하던 미군 제109연대는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7군 담당구역 남쪽의 276국척사단은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을 보병들이 건너서 적 기계화 보병대대의 후방에 침투했지만 적 장갑차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계속 276국척사단이 진격이 뎌뎌지자 대장인 브란덴베어가는 사단장을 해임시켰다.[4]
이후 276국척사단과 싸우던 미군A전투단은 18일 자정이 조금 지나서야 방어선을 돌파당해 각개 격파당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7군은 초반부터 우르 강 서쪽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피해도 막심했다.
다행히도 미군 상황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7군은 5기갑군과 함께 바스토뉴까지 진격했지만 여러 악천후로 인한 보급문제와 비효율적인 병력분배ㆍ부족한 항공전력, 무능한 지휘관 등의 내적인이유와 패튼이 이끄는 지원군의 도착이라는 외적인 이유로 북부의 6기갑군부터 남부의 5기갑군-7군이 붕괴돼 버려 아르덴 공세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불행 중 다행히도 7군은 포위되지 않은 채 벨기에 바깥, 서부독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종전인 1945년 5월 8일까지 전투를 이어가다가 항복했다.


4. 아르덴 공세 당시 7군의 편제[편집]


  • 제7군 - 에리히 브란덴베어가 기갑대장
  • 제85군단 - 바프티스트 크나이스 보병대장
  • 제5낙하산병사단 - 루트비히 하일만 소장
  • 제352국민척탄병사단 - 에리히 슈미트 대령
  • 제80군단 - 프란츠 바이아 보병대장
  • 제212국민척탄병사단 - 프란츠 센스푸스 중장
  • 제276국민척탄병사단 - 쿠어트 뫼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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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색작전ㆍ프랑스전역 등 주요한 초기 전쟁에참여했다가 동부전선에 파견되었다. 1944년 당시 서부전선에 파견된 것은서벌지전투이었는데 그 이유는 동부전선에서 사단이 대부분 박살나 휴식을 위해 동부전선에서 잔존한 일부 사단들을 끌어와 비전투부대로 있었기 때문이다.[2] 실제로 가용 가능한 모든 징집 대상자를 끌어모았다. 국민돌격대와 비슷한 수준의 어린 학생들과 나이 든 중년들, 심지어 공군 잉여 병사들도 끌어왔다.[3] 심지어는 미군 배치 상황도 몰랐다고 한다. 근데 실제 전투 경과를 보면 7군은 미군의 빈약한 곳을 파고드는데 성공한다.[4] 그러나 사실은 미군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교량 건설 작업이 지체돼서 늦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