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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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_zela.jpg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3.2. 폰토스 왕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인 기원전 47년 5월 21일 소아시아의 젤라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파르나케스 2세폰토스 왕국군이 격돌한 전투.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난 이 전투는 폰토스 왕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2. 배경[편집]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다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전달받으면서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이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지지자들과 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파라오로 옹립한 뒤 몇 달 동안 푹 쉬었다. 그러는 사이, 폰토스 왕국의 국왕 파르나케스 2세는 로마인들이 내전으로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소아시아 정복 전쟁을 단행했다. 기원전 48년 12월, 파르나케스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소아시아의 절반을 확보한 뒤 나머지 소아시아 영역마저 정복하려 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파르나케스 2세를 무찌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규합해 유대 지방을 거쳐 시리아로 행진하면서 내전 동안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외국 왕과 로마 총독들을 사면하고 그들로부터 많은 공물과 군사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에서 행진을 멈춘 뒤, 카이사르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소아시아 일대의 로마군을 규합했다. 또한 타르수스에서 킬리키아 지역 지도자들을 불러모은 뒤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갈라티아 등을 거쳐 폰토스로 북상하는 군사 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계획에 따라 북상하면서 일부 갈라티아 부족민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카이사르는 5월 20일 폰토스 왕국군에게 심하게 파괴된 젤라 마을 근처에 도착한 뒤 부하들에게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폰토스군은 젤라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9km 쯤 떨어진 높은 언덕에 진영을 갖췄다. 이 사실을 정찰병으로부터 보고받은 카이사르는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적 야영지 근처로 진격해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적의 이같은 움직임을 목격한 파르나케스 2세는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폰토스 왕국군과 카이사르의 로마군간의 전투가 개막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카이사르군[편집]


  • 보병 12개 군단
  • 니코폴리스에서 파르나케스 2세에게 패배한 6개 군단 잔여 병력
  • 갈라티아 부족 연합군
  • 사르마티아인 경기병대, 아르메니아인 중기병대, 갈리아 기병대를 포함한 소규모 기병대
  • 총병력: 10,000명 ~ 11,000명

3.2. 폰토스 왕국군[편집]


당대 기록에 따르면, 파르나케스 2세는 카이사르의 군대의 2배가 넘는 약 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들 중 다수는 부족민과 농민 보병대였지만, 일부는 로마군에 대항하기 위해 중무장한 보병대였고 중장기병과 경기병도 섞여 있었다. 특히 폰토스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맞서 싸운 페르시아군의 주력 병기였던 전차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4. 전투 경과[편집]


5월 21일 아침, 파르나케스 2세는 군대를 진영 밖으로 진군해 대열을 정비했다. 카이사르는 적의 이같은 행동을 보고 소수의 부하들에게 진영 밖으로 나와서 대열을 서게 하면서도 나머지 부하들은 주둔지 공사를 지속하게 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는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적군이 로마군과 자신들의 주둔지 사이에 있는 험한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군의 주둔지를 향해 쳐들어온 것이다. 갑작스런 적의 맹공에 로마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던 그들은 곧 카이사르의 소집 명령에 따라 진영을 갖추고 적과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췄다.

파르나케스 2세는 아마도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적이 주둔지를 건설하던 중에 공격하는 것이니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폰토스 왕국군의 주력인 팔랑크스 보병대는 평지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구릉 지대에서는 대열이 흐트러져서 틈새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폰토스 왕국군의 또다른 주력 병기인 전차는 언덕을 올라갈 때는 별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파르나케스 2세는 상황이 유리하다고 여기고 무리한 공세를 감행했으나, 불행히도 그가 상대한 로마군은 7년간의 갈리아 전쟁과 로마 내전을 치르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카이사르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언덕 위에서 주둔한 채 언덕 위로 올라오는 적을 상대한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 약 2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 끝에, 제6군단을 비롯한 로마군 우익은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폰토스 부대를 격파하고 뒤이어 적 중앙의 측면을 강타했다. 그러자 폰토스 왕국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진지로 도주했다. 이에 로마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한 시간 동안 접전을 벌인 끝에 적의 진영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고, 폰토스군은 궤멸되었으며 파르나케스 2세는 몇몇 호위병과 함께 가까스로 전장에서 벗어났다.

5. 결과[편집]


젤라 전투는 폰토스 왕국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참패였다. 파르나케스 2세는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도망쳐서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의 소규모 병력을 집결시킨 뒤 몇 개의 도시들을 탈환했다. 그러나 아산드로스가 사병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해 죽여버렸고, 결국 폰토스 왕국은 로마에게 완전히 정복되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원로원에게 젤라 전투와 관련된 보고서를 썼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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