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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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왕복선 파일럿

Joseph Henry "Joe" Engle. 1932년 8월 26일 미국 캔자스주 채프먼 출생.

1. 개요
2. NASA 이전
2.1. X-15 테스트 파일럿
3. NASA
4. 은퇴
5. 평가
6.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우주비행사.

2. NASA 이전[편집]



2.1. X-15 테스트 파일럿[편집]


캔자스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캔자스 대학교를 나온 캔자스 토박이이다.[1] 캔자스 대학교 시절 항공공학을 전공하고 주말에 세스나를 자주 조종하며 항덕후가 되었다. 항덕질을 위해 테스트 파일럿이라는 목표를 갖고 미합중국 공군 ROTC를 지원하여 장교가 된 엥글은 조종사 훈련을 가뿐히 수료하고 센츄리 시리즈의 필두였던 F-100을 조종했다. 이후 공군의 테스트 파일럿이 된 그는 해당 시대 파일럿들 사이에서 핫이슈였던 NASA머큐리 계획제미니 계획을 두고 캡슐에 짐짝처럼 실려서 살짝 올라갔다 오는 것은 시시하다며[2] 공군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잔류하여[3] X-15는 B-52에서 유인 로켓처럼 투하되어 발진하는 기체였는데, 당시 우주 나간다고 하면 파일럿들 사이에서는 머큐리 계획 같은 것은 쳐주지 않고 이렇게 로켓으로 발사되는 정도는 되어야 훗, 이래야 파일럿답지! 하는 부심 비슷한게 있었다고. 이렇게 X-15의 파일럿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당대 미국에서 군/민간을 막론하고 최고로 손꼽히는 테스트 파일럿들이었는데, 이들 중에 함께 활동한 이들로는 닐 암스트롱도 있었고, 훗날 고위 장성까지 오르는 인물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들도 미 공군의 기준에서 우주라고 여겨지는 해발 고도 50마일(80km)[4] 이상을 돌파하기는 헉헉대는게 현실이었는데, 1962년 7월 17일 로버트 화이트가 X-15를 조종하여 해발고도 80km를 돌파했고[5], 로버트 러시워스, 조셉 워커[6]가 차례로 우주에 도달하고 온 뒤, 조 엥글 역시 X-15를 조종하여 '우주'를 갔다오게 된다. 1965년 6월, 8월, 10월에 X-15의 138, 143, 153번째 비행에서 각각 80km 고도를 넘긴 것. 이 시절 엥글은 날아다니는 직업 중 이게 최고라고 감탄하며 매우 즐거워했다.


3. NASA[편집]



3.1. 아폴로 계획[편집]


하지만 우주에 대한 목표를 달성한 뒤 새로운 목표를 찾던, 그리고 지원서가 철회되긴 했지만 여전히 1960년대의 핫이슈였던 문 레이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엥글은 1966년 NASA 5기에 지원하여 합격[7]했고, 아폴로 14호의 백업 달 착륙선 파일럿으로 배정되어 정말로 달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보통 N회의 백업은 N+3회의 정규팀으로 배정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폴로 15호의 발사를 앞두고 의회에서 아폴로 17호 이후의 미션들을 취소한다고 결정하자 그의 운명이 좀 꼬이기 시작한다. 사실 아폴로 17호에 배정되었기에 자기는 달에 갈 수 있을거라 여겼지만, 15호의 백업이자 18호의 정규 달 착륙선 파일럿이었던 해리슨 슈미트가 전문 파일럿이 아니라 지질학자였기 때문에 민간 과학계에서 '전문 과학자 한 명 쯤은 달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질학자였던 슈미트는 당연히 달에서 활동해야 했고, 미션 사령관인 유진 서넌을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령선 조종사 자리도 맘대로 바꿀 수가 없는 자리였기에 결국 만만한 엥글이 달에 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빼앗겼다. 같이 테스트 파일럿 훈련 받은 마이클 콜린스는 NASA에 일찍 들어온 덕에 아폴로 11호로 달에 갔다 왔다.

디크 슬레이튼도 이에 대해서는 많이 미안했던지 엥글에게는 이후 진행될 스카이랩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중 어느 곳에 갈지 말만 하라고 선택을 보장해줬고, 달을 가지는 못했지만 천성이 파일럿이었던 엥글은 과학 실험을 하는 것보다는 비행기를 조종할 기회가 많은 우주왕복선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3.2. 우주왕복선 프로그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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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풀러튼, 헤이즈, 엥글, 트룰리.

엥글은 이후 엔터프라이즈 활강 시험기의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다. 1조에서는 아폴로 13호의 멤버였던 프레드 헤이즈와 공군 MOL에서 편입된 C. 고든 풀러튼이 활동했고, 2조에서는 엥글과 공군 MOL 출신의 리처드 트룰리가 활동했다. 1977년 6월부터 10월까지 세 차례의 테스트를 수행하여 우주왕복선의 안정성을 검증했고, 이후 우주왕복선의 두번째 테스트 미션인 STS-2 미션의 사령관으로서 트룰리와 함께 비행에 나서게 된다. 이 당시 갖고 간 연료전지가 이상을 일으키며 미션 기간이 125시간에서 54시간으로 많이 짧아졌는데 중계위성도 없는 시절에 지상 관제소와 잠깐 연락 끊길 때 잔다고 뻥치고는[8] 근성으로 로봇 팔 테스트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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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 제임스 밴 홉튼(James D. A. van Hoften), 마이크 런지(John Michael "Mike" Lounge), 윌리엄 프레더릭 피셔(William Frederick Fischer, 이상 미션 스페셜리스트)
앞줄 : 엥글, 리처드 오스왈트 코비(Richard Oswalt Covey, 조종사)[9]

이후 1985년 통신 위성 3개를 궤도에 전개하는 미션인 STS-51-I(디스커버리) 미션에서 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계속해서 우주왕복선을 조종할 예정이었지만, 1986년 1월의 STS-51-L 챌린저 폭발참사로 NASA의 모든 프로그램이 취소되며 사고 방지 연구에 전념했다.

4. 은퇴[편집]


이후 1986년 11월을 끝으로 NASA에서 나왔다. 미 공군[10]에서도 잉글의 전역식날 소장 계급을 달아주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커리어에서 조종해본 기종만 180여개가 넘고, 통산 15,400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을 기록했다. 또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고정익 항공기를 타고 우주에 올라갔다 내려온 유일무이한 인물. 2001년에는 오하이오주의 항공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1] 또한 케네디 우주센터의 우주비행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나이 먹고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자주 곡예비행도 하며 정력적으로 사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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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척 예거와 함께 이런저런 기념비행에 참여하고 있다. 푸근한 할아버지가 된 예거와 달리 학구적인 외모가 되었다.

5. 평가[편집]


테스트 파일럿의 입지적 인물이자, NASA 역사상 우주를 경험한 뒤 NASA 우주인단에 들어온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현재 생존한 유일한 X-15 파일럿. 하지만 미국의 여러 우주 비행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지도가 너무도 낮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NASA에서 근무하면서 한번 엄청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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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캔자스 출신 역대 우주 비행사는 파일럿인 엥글과 로널드 에반스(아폴로 17호 사령선 조종사이자 엥글의 1년 후배), 그리고 천문학자인 미션 스페셜리스트 스티브 홀리까지 세 명이 있는데 모두 캔자스 대학교 출신이다.[2] 사실 이런 시각이 우주개발 초창기에는 꽤 강했다. 척 예거 역시 그렇게 우주선에서 조종하는 것도 없이 그냥 실려갔다 떨어지는 것은 원숭이가 실려서 올라가는 것과 다를게 없다고 여겼다.[3] 정확히는, 원래 테스트 파일럿 학교 동기인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NASA에 지원했다가 공군 측에서 엥글의 NASA 지원을 억지로 취소시키고 X-15의 파일럿으로 편입시켰다.[4] 대략 성층권열권 사이의 중간권 정도에 해당한다.[5] 여기서 나온 칭호가 이른바 Winged Astronaut. 소련도 아직 못했던 이 기록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게다가 최초로 마하 4, 5, 6까지 돌파했던 인물인 터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트로피를 선사하고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도 공군 우주비행사 배지를 줬다. 물론 우주에 갔다온 뒤로는 목숨이 중하다며 높으신 분들에 의해 X-15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어 일반 전투비행단이나 군수사령부 쪽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해야 했는데, 이런 로버트 화이트의 대체자로 들어온 것이 엥글이다.[6] 이 쪽은 미국 최초의 민간인 우주비행사이기도 하며, 90, 91번째 비행에서는 100km 고도(이를 흔히 Kármán line이라고 하며 국제적으로는 이 정도는 넘겨줘야 우주라고 쳐준다)마저 넘겨버렸다. 하지만 XB-70 항목에 언급된 그 사진을 찍은 뒤 자신이 조종하던 F-104와 XB-70의 충돌사고로 순직했다.[7] 켄 매팅리, 찰스 듀크, 프레드 헤이즈, 잭 스와이거트, 스튜어트 루사 등 아폴로 후기 미션의 승무원들이 대부분 5기 출신이다.[8] 사실 관제팀에서도 잔다는 놈들이 전력을 겁나 많이 쳐먹고 있길래 얘네들이 일하고 있구나 알았다.[9] STS-51-L 당시 지상 캡콤이었다. 챌린저호 폭발 직전에 "Challenger, Go at throttle up."(챌린저, 출력 최대로.) 명령을 내린 바로 그 인물. 챌린저 참사를 다룬 수많은 영상에서 리처드 코비가 위의 명령을 내린 직후 챌린저가 화염에 휩싸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코비의 모습이 반드시 나온다. 챌린저 바로 다음의 비행 재개 미션인 STS-26에서 활동했고, 은퇴한 뒤에는 토머스 스태퍼드와 함께 STS-107 사후대책 연구위원회를 꾸려 활동했다.[10] 정확히는 연방군은 아니고 고향인 캔자스 주방위 공군에 군적을 두고 있었다.[11] 함께 헌액된 인물들도 쟁쟁하다.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기 미 공군의 트리플 에이스 로빈 올즈(Robin Olds)와 2차대전기 미 해병대 최초의 에이스 마리언 칼(Marion Carl), 현대 비행훈련 산업의 아버지 알버트 리 울치(Albert Ueltschi)가 잉글과 함께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