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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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술지게미

어조사
아내
1. 개요
2. 유래
3. 해석 및 역사 속 사례
4. 기타



1. 개요[편집]


보통 본처를 말하는데, '일부다처제하에서의 첫 번째 아내'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단어 자체는 '(먹을 것이 없어서) 술지게미쌀겨를 먹으며 고생을 함께 한 아내' 라는 뜻으로 후한 광무제 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2. 유래[편집]


광무제의 누나 호양공주는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광무제는 새 남편을 들여줄 생각으로 "맘에 드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호양공주는 광무제의 신하였던 송홍(宋弘)[1]

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송홍은 이미 유부남이었으므로 문제가 생겼다. 황족을 감히 첩으로 들일 수는 없으니 반드시 본처로 삼아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본래의 처가 쫓겨나거나 첩으로 강등되어야 했으므로, 호양공주 쪽에서 송홍이 마음에 든다고 무작정 혼담을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2]

그래서 광무제는 적당히 핑계를 대서 송홍을 부른 다음, 병풍 뒤에 호양공주를 숨겨두고 송홍과 술을 나누다 넌지시 한 번 마음을 떠보았다. "사람이 출세하면 친구를 바꾸고 부유하게 되면 아내를 바꾼다는데 자네는 어떠한가?" 이 말에 송홍은 "신은 가난할 때 친했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臣聞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라고 대답했다.

이에 송홍의 뜻을 눈치 챈 광무제는 슬쩍 누나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안 되겠습니다. 누님."이라고 허탈하게 소근거렸다고 한다.



3. 해석 및 역사 속 사례[편집]


전근대 시대에는 여자의 이혼이나 재가를 대단한 불명예로 여겼고, 설령 불명예는 참을 수 있다 쳐도 여성은 사회진출을 못했으니 독자적으로 돈을 벌 수도 없었으며 재산권이 보장되지도 않으니 재산을 축적할 수도 없어서 이혼을 당한 여자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3] 이런 실정에서 여성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신뢰로서 '조강지처를 버려선 안 된다'는 개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면 조강지처에는 '힘들때 같이 고생한 아내도 배신하는 인간을 믿고 가까이 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도 있다. 사실 위의 해석은 조금 더 포괄적인 해석이고 어원이 된 상황 자체를 봐도 아내를 배신할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난할 때 함께 했던 연인이나 배우자를 성공한 뒤엔 내치는 사람들이 허다했으며 이는 조강지처의 이야기가 미담으로 남았던 것이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 연인이나 배우자를 버리는 이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4] 실제로 조강지처뿐만 아니라 조강지처가 낳은 자신의 자녀도 폐적하거나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한 포증의 일화에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조강지처와 자녀들을 버린 부마를 인륜을 버린 죄로 황제와 황후의 만류에도 처형시켰다.

현대에도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 것이 고시 등을 치는 사람이 고시 생활할 때 여러모로 챙겨줬던 연인을 고시 합격한 후 버리고 돈 많고 외모 좋고 스펙 좋고 집안 빵빵한 사람을 새 연인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 잘 사귀고 있으면서도 "아 시험만 합격하면 이런 인간 말고 시험에 붙은 나와 어울릴 짝을 만나야지" 하고 생각하는 말종도 왕왕 있다. 물론 버림받은 쪽이 이를 주변에 알려서 인과응보로 개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또한 이렇게 버림받았을 경우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위자료 청구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양가 부모와 인사를 나누었다던가, 사실혼 관계 수준으로 함께 살림을 지냈다던가, 약혼을 했다던가[5] 등등 일반적인 연인 관계가 아닌 결혼을 전제로 한 깊은 관계라는 게 증명될 수 있다면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다.(물론 사회적 통념상 깊지 않은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서의 일방적인 부당파기는 당연히 위자료 소송 대상이 아니다. 그건 그냥 차인 것에서 끝이다.) 여자친구가 행정고시 수험시절 월세, 학원비, 생활비까지 지원해주고 합격하자 선물로 명품 시계까지 선물해줬는데 정작 남자는 바로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이별을 통보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따져볼 것도 없이 인정된다.

1970년대에는 조강지처를 버린 검사가 있었는데, 버림받은 조강지처가 대통령 내외, 즉 박정희육영수[6][7]에게 편지로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는 바람에 그 검사는 검사복을 벗어야 했다.

비교적 최근에도 Y대 CC 출신 부부 중 아내는 붙지 못하고 남편만 사법시험을 붙어서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자 아내는 그만 자살해버리고 분노한 처가 쪽에서 1인 시위를 해 이 사실이 알려지자 파면당해서 법조계 커리어가 시작도 못 하고 끝나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불륜을 저지른 상간녀는 파면당하진 않았으나 변호사 신청을 거부당했다.

나폴레옹도 정치적 이유로 첫 번째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는 바람에 욕을 엄청 먹었다.[8][9]

그외에도 아저씨들이 술에 취하면 "우리 마누라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하네···" 하며 한탄할 때도 자주 쓴다.

요즘은 "조강지처가 좋더라 썬연료가 좋더라" 광고로도 알려져 있다. 두산 베어스김동주를 비판하기 위해 쓰였다. 더불어 물 건너 이 선수에게도 쓰였다. 구단으로 확대하면 여기도 있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남자들은 조강지처가 아니면 믿음이 덜 간다. 재취로 들어온 여자에게는 큰 돈을 선뜻 맡기기 꺼림칙하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하는 등, 유교 문화권에서 조강지처는 특히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10] 할리우드 영화 <웨딩 싱어>에는 여친이 있음에도 온갖 스트립 바와 유흥주점을 드나들면서, 결혼만은 그 여자친구와 하려는 성공한 사업가가 등장한다. 지인이 그 사실을 알고 이유를 묻자 심드렁하게 "오랫동안 절 기다려줬는데 이제 와서 버리기는 좀 그렇죠. 게다가 제가 돈 벌기 전부터도 꾸준히 저랑 사귀어줬으니까 아무래도 믿음이 더 가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세계적으로도 성공 후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재혼, 그것도 젊고 예쁜 여자와 재혼하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좋은 시선을 받기는 힘들다.[11] 힘들 때를 같이 한 조강지처를 배신한 놈을 어찌 믿냐는 것. 거기에 더해 색욕에 미친 쓰레기라는 평도 덤으로 따라붙는다. 젊은 시절 같이 고생한 조강지처를 쫓아내는 것에는 여성보다 같은 남성들의 거부감이 더 크다고 한다. 특히 중년 이상 남성들은 유교적 가치관과 이혼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조강지처에 대한 의리를 매우 중요시한다. 실제로 조강지처를 버렸다가 죽마고우들에게까지도 절교당한 사람들이 많다. 상식적으로도 자신의 아내라는, 같은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배신해서 내버리는 인간인데 친구라고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색욕 때문에 아내를 버릴 정도로 밝히는 사람이면 친구의 배우자와도 바람이 나는 등 여자 문제로 더럽게 꼬일 가능성도 있다. 도의를 떠나 합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인 셈이다.

대신 불륜이나 업소를 찾는 등의 행동은 '남자가 한 번쯤 그럴 수도 있지~'식으로 관대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이혼만 안 하면 불륜도 성매매도 괜찮다는 건가?"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는데, 아무래도 구세대적인 남성들은 성관계와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며 성관계 문제 정도로 깨질 정도로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특히 성적인 문제를 드러내놓고 화제로 삼는 것은 금기시하면서도 남성의 성적 자유에는 관대한, 이중적인 성적 관념 때문에 관계가 불만스럽다고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색욕에 눈먼 놈으로 생각하면서 남성의 불륜은 '남자가 지겨우면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각보다 널리 퍼진 사고방식이다. 과거의 결혼은 본인의 의사보다는 집안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합, 다시 말해 비즈니스에 가까웠으니 자연히 결혼으로 충족되지 않는 감정적인 욕구를 혼외관계에서 채우려 들었기 때문이다.[12]

무엇보다 조강지처를 버린다는건 세계 대부분 문화권에서 거의 보편적인 남성간에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는 신의를 저버리는 막돼먹은 행위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대상은 남자가 아닌 부인이라 할지라도 오랜 세월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사람을 버린다는건 전통적인 가부장적 명예 관념에서 보면 같은 참호에서 싸운 전우를 통수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가부장적 남성사회의 명예, 도덕관념에서 비춰볼 때 일시적인 욕구와 직결되는 볼륜에는 관대하지만, 장기적인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인 조강지처를 내버리는 게 더 죄악시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풀어 말하자면 실질적인 혼외정사, 불륜은 '사소한 일탈'이라 넘어가도 조강지처를 버리는건 매국노나 배신자로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만화가 박광수도 젊은 새 아내와 재혼하겠다고 전 아내와 이혼했을 때 오랫동안 절친하게 지내왔던 친구들이 '네가 그런 놈인 줄은 몰랐다'며 거의 다 줄줄이 떠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만화가로서의 평판도 바닥에 떨어져 몰락했다. 다른 예로, 젊고 예쁜 내연녀랑 결혼하려고 조강지처를 버린 사업가가 친구들로부터 "조강지처 버리는 놈들치고 잘 되는 놈은 본 적이 없어!"라는 질타와 함께 절교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재혼한 그 내연녀에게는 또 다른 내연남이 있었다. 이에 이 사업가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만 그 내연남을 살해하고 결국 재산도 다 내연녀에게 빼앗기고 감옥에 가버리는 신세로 전락하며 인생을 망친 사건이 있었다.

사실 실리적인 차원에서 조강지처를 버리는 행위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내연에 내연이 꼬리를 무는 통수, 즉 신의의 파괴에 있으며 이는 조강지처 문제가 여성만이 아닌 남성의 안위에도 직결됨을 보여준다. 애초에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를 무시하고 이를 해체하려 드는 정신머리를 가진 내연녀가 정작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이 결혼관계만은 제대로 지키려 들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설령 후처 본인은 결혼생활에 충실하고 싶어도 이미 해당 남성부터가 이미 결혼생활에 충실할 성격이 아님을 모를 리가 없으니 자기 살 길을 미리 뚫어놓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이런 사례가 종종 벌어져 인구에 회자되기도 한다. 때문에 조강지처들이 내연녀에게 대놓고 "그 인간이 나 버리고 너한테는 퍽이나 지고지순할 것 같냐?"는 식으로 기를 확 죽여버리기도 한다.

유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사상은 아니다. 가령 중세 몽골 사람이었던 칭기즈 칸은 수십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첫 번째 아내이자 소꿉친구[13]이자 조강지처인 보르테와 다른 첩들간에 선을 확실히 그었고, 보르테가 원수인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어 몇 달간 능욕당했음에도[14] 그녀를 다시 구출해내고 내치지 않았다.[15] 후계자도 보르테의 소생 외에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고 한다.[16] 다만 정작 부친인 예수게이는 본처를 사실상 갈아치웠다.[17]

자유로운 이혼을 존중한다는 외국에서도 이런 사례들에 대해 마냥 좋게만 보지는 않는다. 단지 결혼은 개인 문제이며 남이 개인 문제에 뭐라할 이유는 없기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남들이 터치를 안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잘나가는 배우자가 어려울 때 부터 함께해온 조강지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새롭게 재혼하려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다. 위자료를 두둑히 내야하기 때문. 원래 금수저였거나 잘나가는 사람이라면 초혼일 때도 미리 결혼전 계약서를 작성해 이혼할 경우 위자료와 매달 얼마씩 생활비를 주는 것을 산정할 수 있겠지만, 쥐뿔도 없을 때 결혼했으면 나중에 자신이 얼마나 성공하고 어느 정도로 재산이 불어날지 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고 혼전 계약서로 재산 분배를 약속할 수 있었을까? 때문에 나이 들어 성공한 이후 조강지처랑 틀어져서 이혼하게 되면 재산분할에서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조강지처를 버리든 말든 터치는 안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톡톡히 져야 한다는 거. 대표적인 예로 아마존닷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가 있다. 이혼 합의금으로 지불한 돈이 350억 달러라고... 다른 면에선 여러모로 초당파적인 존경을 누렸던 미국 정치인 존 매케인 또한 (이혼당한 전처가 좋게 넘어갔고, 반대편인 민주당의 기본 스탠스가 성적, 사회적 자유주의니 집중적으로 추궁하기도 뭣해서 치명적인 약점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베트남전 포로시절 뒷바라지해주던 조강지처를 버리고 재혼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좀 구설수에 시달려야했다.


4. 기타[편집]


현대중국어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성어이다. 조강처(糟糠妻)라고도 한다.

[1] 자(字)는 중자(仲子). 훗날 태위가 되는 송유의 숙부.[2] 물론 황제가 강요하면 신하가 거절할 수는 없으니, 좀 폭군 끼가 있는 황제라면 그냥 강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광무제는 중국사에서 성군으로 꼽히는 황제인 만큼 무턱대고 강요해서 신하와의 사이를 사서 벌리는 짓을 안 할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3] 차라리 평민이나 천민 등 하류 계층에서는 '뭐라도 안 하면 당장 굶어죽을 판인데 여자가 어쩌니 저쩌니가 뭐가 중요하냐'면서 품팔이나 삯바느질, 노점상 같은 일을 하기도 했고 수완이 좋으면 먹고살 만큼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귀족이나 양반 같은 상류 계층은 체면이란 것이 엄청 중요하다 보니 오히려 애로사항이 많았다.[4] 야사집을 보면 출세를 포기하고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는 선비를 칭찬하는 내용이 있다.[5] 현재 대한민국 법원은 신혼집을 서로 알아보고 있었다거나, 서로 호칭을 여보, 남편, 내 마누라 등과 같이 했다거나, 피임 없는 성관계를 한 경우 등, 꼭 약혼이라는 구두 약속을 하거나 상견례를 하지 않았더라도 사회통념상 일반적이지 않고 깊은 연인 관계로 보인다면 약혼의 성립으로 인정하고 있다.[6] 군사독재 시절이라 대통령의 권력이 어마어마할 때였다.[7] 박정희 쪽은 그나마 남녀간 치정문제에는 관대했지만 육영수는 정인숙 사건 당시 박정희에게 재떨이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민감했다.[8] 그래도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한 후에도 의붓자식들(조제핀과 그녀의 전남편 소생의 자식)인 외젠오르탕스를 집안 차원에서 챙겨줬다. 물론, 황제로서 체면을 살리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외젠은 의붓아버지의 러시아 원정에도 참전했으며,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어머니다.[9] 헌데 또 나중에는 마리 루이즈를 버리고 조제핀을 찾아서,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에도 그를 따라가려고 할만큼 애정이 있었던 마리 루이즈도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백일천하 시기 때 나폴레옹이 아들 나폴레옹 2세와 함께 돌아와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무시했다.[10] 간첩임이 들통났던 정수일 교수도 "당신이 간첩인 걸 아내도 아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에 있는 조강지처를 먼저 언급했다.[11] 조강지처가 먼저 사고를 쳐서 명분을 줬더라도 어지간히 대형사고가 아닌 이상 남편이 한 번쯤은 기회를 줘야지, 바로 이혼해버리면 그것도 보통 욕을 먹는 게 아니다.[12] 사실 나이 많은 남성의 경우 여성의 불륜에도 젊은 세대보다 관대한 경우도 적지 않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자가 불륜하다 걸리면 쉽게 이혼하는 젊은 세대와는 달리, 일단 이혼 자체를 도저히 하기 힘든 일로 받아들이는데다 마초이즘이 강하다보니 남자 체면에 자기가 불륜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기 힘들어하기 때문. 물론 자기는 바람 피우면서 부인이 바람 피우는 건 용서하지 못하는 족속들도 많지만.[13] 9살과 10살 때 처음 만나 약혼했으니.[14] 보르테가 이런 일을 당한 이유는 테무친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메르키트족에 시집가는 호엘룬, 다시 말해 테무친의 어머니를 납치혼했기에 메르키트족이 보복으로 이런 짓을 한거다. 아무튼 이렇게 2대에 걸쳐 납치혼에 얽혀 고생해서인지 훗날 테무친은 납치혼을 금지한다.[15] 아직도 테무친의 혈통인지 칠게르(보르테를 능욕한 메르키트 족 장수)의 혈통인지 불분명한 주치 역시도 공식적으론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주치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며 주치를 자기 아들로 인정하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차가타이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주치를 메르키트 혈통이네 뭐네 했는데 이에 대해서 확실하게 주치는 자기 아들이라고 강조하는게 아니라 그냥 주치의 혈통 문제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말년에 둘째아들 차카타이가 형 주치의 혈통에 딴지를 거는 등 칭기즈 칸 아들들의 사이가 개판이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6] 다만 또 이런 칭기즈 칸의 이런 모습은 보르테와의 혼인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것도 한 몫 했을 수 있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살아있던 때에 보르테와 약혼했는데 문제는 그렇게 보르테를 테무친과 약혼시킨 뒤 테무친을 남기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지나가던 타타르족 마을에 들렀다가 살해당했다.(후일 테무친은 타타르족을 멸망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보복하는데 사실 이런 잔혹한 보복은 복수이기도 했지만 접대의 관습과도 엮여서 그런 면도 있다.) 그 결과 부족은 친족 등이 다 떠나 테무친 포함 9명밖에 안 남을 정도로 쫄딱 망해버렸고 부족을 이끌기 위해서인지 당대 관습상 약혼하고 나면 몇년씩 장가갈 가문에서 일을 해줘야 했음에도 테무친은 부족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몇년 뒤에야 돌아와 구혼을 했는데, 부족은 망하고 사위로서 의무를 안 했으니 무례한 행위일 수 있음에도 장인인 데이 세첸이 테무친을 처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기에 아무런 트러블 없이 결혼했다. 보르테 본인 또한 당시 기준 노처녀가 되어가는 나이가 되어가도록(보르테가 결혼할 당시 18세였는데 당시에는 좀 늦은 결혼이었다. 당시로서는 20세만 되어도 노총각/노처녀였으니 정말 노처녀가 다되어가는 나이에 결혼한 셈. 물론 이는 칭기즈 칸(17세)도 마찬가지.)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채 테무친을 잊지 않고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메르키트족에게 보르테가 납치당했을 때 사실 구하러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당장에 테무친의 친모도 원래는 다른 집안에 시집가다가 예수게이에게 걸려서 강제로 납치당해 결혼했다. 하지만 원래 남편이 될 칠게두(칠게르의 형)는 구하러 가지 않았고 그 대신이라고 후일 테무친의 아내를 납치한 것. 아버지의 의형제인 옹 칸과 자신의 의형제인 자무카에게 도움을 구하면서까지 구하러 갔다.[17] 예수게이의 본처는 사실 소치겔이었는데 예수게이가 호엘룬을 납치해 결혼한 후 본처에서 밀려났다. 테무친이 예수게이의 장남이 된 것도 그것 때문으로 원래 예수게이에게는 이보다 앞서서 소치겔에게서 태어난 벡테르와 벨구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후일 테무친은 벡테르와 장자 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결국 벡테르를 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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