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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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括
(? ~ 기원전 262년)

1. 소개
2. 생애
3. 평가
3.1. 변명의 여지?
3.2. 반론
4. 대중매체에서


1. 소개[편집]


중국의 전국시대졸장으로, 삼국지의 마속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패장'의 대명사격으로 알려진 인물이다.[1]

진(秦)나라 소양왕에게도 큰소리 칠 정도로 강해진 조(趙)나라의 국력을[2] 한순간에 날려버렸다는 평까지 나올 정도로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다.


2. 생애[편집]


명장 조사의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익혔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도 병법에 더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괄은 이론에만 뛰어났을 뿐, 실전에서 대군을 지휘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 "우리 집안에 대를 이어 명장이 났다"고 조괄의 어머니가 기뻐하자, 조사는 아내에게 "전쟁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괄이는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며 아들이 장수가 될 그릇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조사가 죽은 뒤 진(秦)과 조(趙)가 큰 전쟁을 벌였는데, 진나라 대장 왕흘이 조나라 백전노장 염파를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되자, 진 승상 범수는 꾀를 내어 비밀리에 진나라 대장을 백기로 교체하는 한편 '염파야 껌이지만 조괄은 좀 짱인 듯'하고 헛소문을 냈다. 당시에 염파는 전략적 견벽거수[3]를 하고 있었고, 이 짓거리에 슬슬 조왕도 지쳐가다가 솔깃해진 조효성왕은 염파를 내치고 조괄을 장수로 기용한다.

이때 재상 인상여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에게 "조괄은 고작 그의 부친이 남긴 병법서만 읽었을 뿐 전장에서 임기응변할 줄 모르므로, 그를 장수로 삼는 것은 마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둔 채 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극구 만류했다.[4][5] 심지어 앞서 자기 아들이 어린 시절만 해도 칭찬과 기대를 아끼지 않던 조괄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조사는 거느리는 식객이 수십이고 나라 안팎에 수백의 벗을 두었을 만큼 인망이 두터웠으나 조괄은 그만한 인망이 없고, 왕이나 종실에서 내린 하사품을 조사는 부하들에게 베풀었으나 조괄은 독점하고 있으며, 출정 명령이 떨어지면 조사는 집안일에 일절 신경쓰지 않고 군무에 몰두한 반면 조괄은 군무에 아랑곳없이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청컨대 조괄을 장수로 내보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제발 자기 아들을 장수로 삼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뭔 사달을 내도 가족은 벌하지 않겠다는 조왕의 약조를 받고서야 물러났다. 당시의 법으로는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적(敗積)하면 그 일족도 친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괄의 어머니와 인상여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이렇게 낙하산으로 총대장이 된 조괄은 변변한 실전 경험도 없으면서 병법대로(?) 나서겠다며 염파가 기존에 세웠던 전략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덤볐으나, 명장 백기의 거짓 퇴각에 속아 두 갈래 길에서 격파당한 뒤 역으로 진나라 포위에 말려들었다. 40여 일간 포위된 채 아군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굶주리던 조나라 군대는 마지막 돌격에 나섰지만 결국 완패했다. 대장 조괄은 매복에 걸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사로잡힌 조의 병사가 무려 40만이었다. 진에서는 이 가운데 소년병 240여 명만 풀어주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생매장해버렸다. 이들을 전부 진나라로 끌고 가 관리할 여력은 없는데,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낼 경우 패배의 굴욕감에 불탄 이들이 뒤에 큰 후환거리가 될 거라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조나라에서는 젊은 남자의 씨가 말랐을 정도라고 하며, 국력이 크게 기울어 슬슬 막장테크를 타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왕은 아들을 등용하지 말아달라고 간했던 조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조괄의 남은 일족은 벌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그 덕에 가문의 대가 끊기지는 않았는지, <후한서> 마원전에 따르면 마원은 조사의 후손이었다고 하는데[6][7], 조괄의 직계인지 아니면 방계(형제의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

3. 평가[편집]


이 자에게서 유래한 성어가 지상담병(紙上談兵), 즉 "종이[8]위에서 병법을 논한다" 이다. 종종 조괄병법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

조사와 조괄이 병법을 논할 때도 조괄은 막힘없이 대답하였으나 조사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을 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괄이 조사보다 똑똑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조사는 모든 변수와 대응방법까지 생각하고 답을 말했고 조괄은 자신이 외운 대로만 답을 내놓은 거라 쉽게 대답한 것이었다. 즉 이론만 강하고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없다는 뜻이다.

<사기>에 인상여 曰, 조괄은 합변(合變)[9]이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 악명은 이어져 임진왜란 때 안중홍(원균의 사돈 집안 사람)이 원균을 평할 때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평을 내릴 정도로 졸장의 대표주자로 악명 높았다.[10] 조선 말기 순조 재위 초기에 유배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아들들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책망하면서 조괄이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독서에 관심이 없는 아들들을 조괄만도 못하다며 디스했다.


3.1. 변명의 여지?[편집]


두고두고 졸장의 대명사가 된 조괄이나, 사실 앞뒤 사정을 따져보면 조괄에게도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다. 특히 당시 조나라 왕이었던 효성왕의 실책도 어마어마해서, 마속과 같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졸장이라고 보기에는 좀 뭣하다.[11] 먼저, (기록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사기에 나온 당시 명장들의 일화로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마음을 먹었다면 장수는 그것을 바꾸기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조괄이 부임하기 전, 조나라군을 지휘하던 염파효성왕에게 경질 된 이후의 일화를 보자.

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

염파가 면직되어 장평 땅에서 돌아와 권세를 잃었을 때, 옛 손님이 모두 떠났다.

及復用為將,客又復至。

다시 쓰여 장수가 되자 손님이 또다시 이르렀다.

廉頗曰:

염파가 말했다.

「客退矣!」

「손님들은 꺼지시오!」

客曰:

손님이 말했다.

「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有何怨乎?」

「아아! 당신은 어찌 판단이 느리십니까? 무릇 천하는 시장에서 장사하듯이 사귀니, 당신이 권세가 있으면 내가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원망하십니까?

사기 염파인상여열전


전쟁영웅에 군부 실세였던 염파마저 효성왕에게 경질당하고 나서는 손님이 다 떠나갈 정도로 처절한 수모를 겪었다. 이걸 축구로 비유를 하자면, 알렉스 퍼거슨 급의 레전드 감독이 구단주한테 말 한 번 잘못 했더니 챔스 결승전 도중에 경질당한 막장스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왕인 효성왕이 단기결전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마당에 노장 염파마저 이런 수모를 겪는 판국이라, 어린 데다 경험은 일천하고 정치적 입지도 탄탄하지 못한 조괄이 지구전을 주장하기엔 힘든 상황이었다. 까딱 처신을 잘못하다가는 염파처럼 경질, 심하면 유배나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괄을 탈탈 털어버린 백기도 수많은 전공을 올리고 최고의 명장으로 대우받았지만, 왕의 명을 거역하자 온갖 고초를 겪더니 정말 사형당하기도 했다.

武安君言曰:

무안군이 말했다.

「秦不聽臣計,今如何矣!」

「진나라가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秦王聞之,怒,彊起武安君,武安君遂稱病甐。

진소양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무안군을 강제로 보내려고 했으나, 무안군은 병이 위독하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應侯請之,不起。

응후 범수가 간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於是免武安君為士伍,遷之陰密。

이에 무안군을 면직시켜 병졸로 만들고 음밀(陰密) 땅에 옮겨 살게 했다.

(중략...)

진소양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

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

진소양왕이 응후 범수 및 여러 신하와 의논하였다.

「白起之遷,其意尚怏怏不服,有餘言。」

「백기가 유배를 가면서 오히려 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秦王乃使使者賜之劍,自裁。

진소양왕이 사자를 보내 검을 주면서 자결하라고 하였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아르센 벵거알렉스 퍼거슨처럼 팀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여러 트로피를 딴 감독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명장들도 구단주의 목소리를 거부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물며 초짜 감독은 구단주의 목소리를 거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팀 전술에 크게 간섭하는 구단주가 있다면 팀이 잘 굴러갈래야 굴러갈 수가 없다. 조괄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게 경험 없는 초짜감독이 극성 구단주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팀을 말아먹은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정황을 감안한다면 경험이 일천하고 전공이 없어서 목소리를 크게 내기 어려운 조괄이 왕명을 거역하고 수비 전술을 채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지나치게 보일 수 있는 인상여의 비난과 조괄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깎아내리면서까지 기용하지 말라고 한사코 거부한 것도 정말 자기 아들이 못났다기보단 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모면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2] 또한 조사가 자기 아들이 장군감이 아니라고 평가한 것도 진짜로 아들이 장군이 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너무 크게 칭송받은 아들이 거만해지는것을 경계한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완곡표현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사실 병법 이론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보아, 실제 경험이 더 추가되었으면 제몫을 다하는 장수로 컸을 가능성도 있다. 일단 이론에 밝았다는거 자체만으로 어느 정도 잠재력이 충만한 것 아니겠는가?

고전 병서들을 오랫동안 숙독할 끈기와 지능을 누구나 타고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조괄의 재능이 다소 아깝게 여겨지는 측면도 있다. 서양사에도 조괄 비슷한 인물이 있었으니, 로마사의 이름난 명장 반열에 들어간 바실리오스 2세가 바로 그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당시 문화적 관점으로는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이상한 인간이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바람직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군사 운용에 관계된 서적 독파였다. 물론 바실리오스 2세도 조괄처럼 그저 병서 독서 경험과 로마군의 역량만 믿고 불가리아 제2제국한테 섣불리 도전하다가 쓰라린 참패를 맛보게 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나마 바실리오스 2세가 입은 피해는 분명 크긴 컸으되 조괄이 끼친 만큼은 아니었고, 자기가 군주이기도 했기에 그의 실패를 물을 자도 딱히 없었다는 거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후 그의 이런 실패를 문책하기 위해 민속놀이를 시작한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간 쌓은 이론적 역량을 실제적 경험으로 바꿔나가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명장으로 거듭났던 것인데, 조괄도 처음부터 최고지휘관이 되기보다는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다면 훗날은 어찌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조심스럽게 잘만 키우면 인재가 될 수도 있었을 이런 자를 냅다 최고지휘관 시켜서 소모해버린 효성왕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크게 느껴지는 사례.

또한 조괄의 졸렬한 지휘가 장평대전을 참패로 이끈 제일 큰 원인이긴 했으나, 여기에 대진운까지 너무 안좋았다는 것도 조괄을 변호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도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백기가 하필이면 첫 상대였으니...


3.2. 반론[편집]


그러나 제아무리 효성왕의 인선이 실책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승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지휘관인 조괄이었고 그가 이끈 장평대전의 패배는 너무나 참혹하였다. 더군다나 조의 군세가 진에게 아예 싸움도 안될 수준이라 패배가 뻔한 정도였으면 몰라도, 분명히 염파 밑에서는 그럭저럭 잘 싸우던 군대를 부임하자마자 그대로 사지로 몰아버린 것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전략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해도 전술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한 패장을 "명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옹호적이며 추측에 기댄 것이다.

경험이 일천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핑계로 보이는 것이, 조괄의 아버지인 조사는 마찬가지로 별 군공이 없는 처지에 대장으로 등용[13]되어 알여 전투에서 진나라 명장 호양을 대파하는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병법에 밝았다면 첫 출전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괄 아버지가 몸소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단기결전을 요구한 효성왕의 뜻에 조괄이 소신을 굽혔다고 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다. 속전속결을 원하는 왕이 선택한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괄은 왕의 바람을 이루기를 원하는 부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것도 주위의 결사반대를 무시하면서 기용했다가 패전으로 끝나자 연좌제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강력한 정황증거에 해당한다. 사실 조괄이 지구전을 선호했을 정도로 신중했다면, 추격전을 시작했을 때 신중하거나 소극적이었어야 정상인데 조괄은 너무 부주의했다. 왕은 속전으로 이기라고 요구했지 무리하게 추격해서 함정에 빠지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들이 우주방어로 적을 물리쳐도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서 섬멸하는 경우는 많다. 그렇기에 조괄이 염파와 똑같이 지구전을 우선시했어도 백기를 추격하다가 반격당해서 장평대전과 똑같은 결말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용 배경을 마속과 비교해도 이쪽이 훨씬 막장이다. 후발주자인 촉한은 원래부터 적은 상황이었고 설상가상 적은 숫자의 인재들이 상당수가 합류한지 얼마가지 않고 죽거나 또는 요절하거나 이탈했다[14]. 거기다 인재 보는 눈이 좋은 유비는 인원보충을 하기도 전에 이릉대전이 끝나자마자 붕어했다. 상황이 이랬기에 촉한의 인재부족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고, 이것이 마속이 가정 방면을 맡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면에 조나라는 인재가 부족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이목, 염파, 방난, 사마상 등 많은 명장들이 조나라 출신이었다. 장평대전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로가 발생했으니 그 과정에서 많은 인재들을 상실했을 것이다. 이릉대전에서 많은 인재가 죽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막대한 병력 손실과 인재 손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랬동안 버텨냈으니 조나라는 인재가 많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이목, 염파 같은 명장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똑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인 백기와 왕전이 진나라 소속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목,염파만으로 버티기는 어렵다. 조나라 같이 규모가 거대한 나라의 방위는 인재를 많이 필요로 한다. 소규모 군벌이면 모를까 대국의 방어전은 뛰어난 아랫사람들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5] 즉 실적이 있는 무관 중에서 속전파를 골라도 되는데도 굳이 검증되지 않은 조괄이 왕에게 선택받은 것은, 조괄이 당시 조나라에서 찾기 힘든 극성 속전파라는 증거이자 조효성왕이 상황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형편없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덤으로, 마속도 군재는 형편없지만 최소한 참모로서는 자질이 있고 상당한 덕장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기라도 한데, 조괄은 이런 장점은 고사하고 인망이 없다는 둥 축재에 연연한다는 둥의 악평(그의 어머니가 남긴!)만 기록에 남아 있다. 사석에서는 좋은 사람과 사석에서도 욕 먹는 사람의 차이랄까.

결론을 말하자면 조괄은 겁쟁이나 불충한 신하는 아니었고 그에게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역사에 졸장으로 기록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 대사로 언급된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대장군으로 기용하라고 천거하자, 유방이 조괄의 예를 들며 "한신이 병법은 잘 아는 듯 하지만, 실전에서 능력이 검증된 일은 없는데 괜찮겠는가?"라는 반응을 보인 것. 물론 한신은 조괄보다 훨씬 뛰어난 장군이었기에 훌륭하게 역할을 해낸다.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 애니판에서 잠깐 등장했다. 성우는 타카하시 히데노리. 자신만만하게 맨앞에서 나는 조군 총대장 조괄이다! 부장 따위에게 볼일은 없다, 비켜라! 라고 왕기에게 외치지만 오히려 일격에 몸이 두동강난 채로 끔살당한다. 왕기는 "2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당신이 망쳤습니다. (중략) 미련한 장군님."이라는 말로 조괄을 신랄하게 깠다.

킹 곤타가 그린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는 용맹하지만 닥돌만 하는 무분별한 장수로 나온다. 목소리와 위엄은 아버지 조사를 빼닮아서 평이 좋다. 그때문에 상당히 골때리는 단순한 전술에도 목소리를 통해 힘을 얻었지만, 결국 기세였을뿐이라 실전에서 개박살이 난다. 경력과 재능이 넘사벽인 대선배 염파에게 와서 잘난척하는데 그 모습을 본 염파는 처음으로 왕명을 거역하고 싶어졌다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조괄은 백기의 함정에 걸리는데 백기는 일부러 얼굴도 우스꽝스런 추남인 졸병 하나에게 명령하여 화살을 쏘도록 했다. 백기는 그 졸병에게 조괄을 쏴죽이면 금 100(약 300~330Kg)이라는 많은 재물 보상과 장교로 특별 진급을 포상으로 약속하지만, 죽이지 못하면 노역병으로 1년 동안 힘겨운 노역만 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조괄이 먼저 함정에 걸려 돌진하자 그 졸병은 성벽 뒤에 숨어서 숨을 고른 다음에 선봉으로 돌격한 조괄에게 먼저 화살 하나를 쏘아 맞춘다. 등 뒤에서 갑자기 화살에 맞은 조괄이 당황해자 그 졸병은 곧바로 머리에 결정타를 날려 죽인다. 조괄은 뭐가 어찌된지 모르는 얼굴로 멍때리는 얼굴로 죽었는데 그야말로 듣보잡 졸병에게 죽어서 창피를 당하라고 백기가 일부러 벌인 짓. 가쁜 숨쉬며 마음 놓는 그 졸병에게 백기는 잘했다면서 약속대로 상을 내린다고 말한다. 당연히 조괄이 죽자 조군이 어이없어하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이후 40만 대군 생매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더불어 백기는 조괄의 목을 베게하고 창대에 꽂아 조나라로 보낸다. 이 목을 전달받으며 대참패 소식에 그를 억지로 보내도록 한 조왕은 멘붕하여 기절한다. 아버지를 빼닮은 목소리와 용모로 힘을 불어넣기엔 충분했지만, 그게 전부인 한계가 뚜렷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그래도 나름 주요하게 나와서인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을 몰아내고 백기의 죽음이 알려진 뒤에는 장평에서 진에 항거한 생명 중 하나로 그려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진에 항거한 조의 장군이기도 했고. 완전히 답도 없는 낙하산이기보다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장수, 아버지 조사의 후광만으로 활약한 장수로 그려졌다.[16]

삼국지 12에서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그의 후손인 마등 세력이 업 땅의 재야로 나오고, 마속이 조나라 소속으로 나오는데, 아무래도 조괄을 빗댄 인물 배치인 듯하다.

대진제국 3편에서는 용맹하지만 이론에만 빠삭한 젊은 장군으로 등장. 여기서는 효성왕도 인상여와 조괄의 어머니가 경고하자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조괄을 완전히 믿진 않는 걸로 나온다. 조괄의 어머니의 충고를 들었을 때는 효성왕도 자신의 결정을 재고하기 직전까지 가는데, 옆에 붙어있던 진나라의 간자가 '조괄의 평소 행실이 불량한 건 자신을 시기하는 자를 속이기 위해 일부로 그러는 겁니다' 하고 둘러대자 아슬아슬하게 속아넘어갔다. 장평대전에서 진군의 작전상 후퇴에 자기가 이기는 걸로 착각하며 함정에 걸려드는 걸로 묘사된다. 여기서는 못난 점이 더 강조되는데, 중간에 도망중인 한나라 난민들이 함정에 들어가는 조괄 일행을 보고 진나라 군대의 거동이 패전하는 사람들 같지 않고 절도가 있었기 때문에 함정으로 보이니 속지 말라고 충고하는데 무시하고 추격을 강행하고 백기가 적장이었다면 자신도 곤란했겠지만 왕흘은 못난 인간이라 쉽다며 자만한다. 나중에 포위되어 자신이 속은 걸 깨달고 적장이 백기라는 걸 눈치채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자 자신의 공을 탐내다 나라를 망쳤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자결하려 하지만 다른 장수들이 말려 그러지 못한다. 결국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다 진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

[1] 마속과 조괄 모두 이론(병법)에는 능하다고 자부했지만, 실전에서는 허무할 정도로 대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2] 그렇다고 진나라와 조나라가 대등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상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나라는 장평대전 이전에도 진나라보다 못했다. 다만 이건 진나라가 너무 강했던 거고 장평대전 이후로도 연나라를 박살낸 일이나 다른 삼진인 위나라가 제의 손빈에게 패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고 한나라 역시 진나라에게 호구수준으로 털린 것을 볼 때, 이 당시의 조나라는 삼진 중 가장 강한 국가로 최소한 진나라에 쉽게 지지 않고 맞서 싸울 정도의 국력은 가진 나라였다.[3] 공격 대신 수비로 일관하는 우주방어 작전으로, 이러면 원정군인 적군은 쓸데없이 군량, 돈, 인력을 낭비만 하게 된다. 하지만 속전속결이 아니라 지루한 대치가 길게 이어지므로 방어측의 국력도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군주의 조바심과 의심을 내오기에도 딱 좋다.[4] 이 말에서 유래한 성어가 교주고슬(膠柱鼓瑟).[5] 거문고로 곡을 연주할 때는 거문고의 현을 받치고 있는 기러기발을 옮겨 곡에 맞게 악기를 조율해야 하는데, 이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놓으면 한 곡은 연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곡들은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즉, 융통성이 없이 어리석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병법을 잘 안다면서 정작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는 모르는 조괄에게 딱 들어맞는다.[6] 조사가 마복군(馬服君)이란 호를 받아 그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한다.[7] 애시당초 성을 바꾼 것으로 보아 서자나 방계일 가능성이 더 높다.[8] 참고로 이 시대의 紙는 필사용 하급 비단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이게 나중에 종이를 가리키게 된다.[9] 합하여 변화함이라는 뜻이다. 무릇 전술, 전략이란 상황과 이치에 맞게 변화하고 적용해야하는데, 그냥 글이 써진 대로만 하면 개발살 나기 일쑤이다. 마속이 가정에서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산에 진을 둔 것과 비슷한 것이다.[10] 그리고 직후 원균이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말아먹으면서 안중홍의 평가는 예언이 되었다.[11] 오히려 마속이야말로 아군이 승세를 탄 상황에서 전세가 뒤집힐 수 있는 전선의 구멍을 막으러 나가며 상관인 제갈량전략적 목표와 전술적 대비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줬고 부장으로 왕평, 지원군으로 고상을 붙여주는 등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몰아주었으나 본인이 명령마저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다 대패한 것이니 마속 쪽이 훨씬 심각하다. 둘다 처참히 실패하고 졸장의 대명사로 남았지만 실패한 이유는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로, 마속은 여지가 없지만 조괄은 바로 그 이유로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점. 심지어 마속은 이때 군사령관은 처음이었으나 참모로써는 관록이 있는 인물이었다.[12] 참고 [13] 심지어 기성 무인들인 염파나 악승도 승리를 점치기 어렵다 하는 상황에서 조사가 나서게 된 것이다.[14] 법정, 방통, 마초, 곽준, 맹달, 유봉, 황권 등.[15] 전쟁사의 뛰어난 총사령관들도 뛰어난 아랫사람들이 있어야 제대로 활약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16] 작중에서 조괄 휘하의 장수들도 모두 조사를 빼닮은 목소리와 위엄에 이끌렸고 병사들 역시 조괄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것으로 그려졌다. 적군인 백기와 사마근 역시 조괄의 군대를 지탱하는 것은 아버지 조사의 환영이라며 조괄의 능력이 아닌 조사의 그림자가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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