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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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기
赵南起[1]


파일:attachment/generaljo.png

본관
풍양 조씨[2]
출생
1927년 4월 20일[3]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 태성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4]
사망
2018년 6월 17일 (향년 91세)
중국 베이징시
국적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복무
인민해방군 육군
기간
1945년 ~ 1995년
임관
-
최종계급
상장[5]
최종보직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mg.zwbk.org/20130806170842821_7366.jpg

인민해방군 군복이 바뀐 후에 새로운 인민해방군 육군 예복을 입은 모습.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본관은 풍양(豊壤).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사실상 최고위 계급인 상장까지 진급했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는 가장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또한 조남기는 외국 군대에서 가장 출세한 한국계 인사로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해방전에는 구 일본 육군홍사익 중장, 국민혁명군김홍일 중장, 미군김영옥 육군대령소련군김일성 육군대위도 있고 있지만 대장급까지 오른 사람은 조남기 상장이 유일하다. 중국에도 원수와 대장 직함이 존재하긴 하지만 1955년 이후 아무도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장이 최고위 계급이 되었다. 국가주석은 통수권을 지니지만 군사 계급을 받지는 않는다. 북한처럼 대원수를 뿌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덧붙여, 중국에서 비 한족(漢族) 출신으로 최초로 상장에 진급한 인물은 몽골족 울란후(Ulanhu; 1906년 ~ 1988년)로, 1955년에 상장 계급이 수여됐다. 흥미롭게도 그는 1983년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자리에도 올랐는데, 이로서 소수민족으로는 가장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 된다.[6]

1919년 충청북도 청주군 지역의 3.1 운동을 주도해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조동식은 조남기의 조부이다.

2. 생애[편집]


1927년 4월 20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現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에서 아버지 조용구(趙龍九, 1893. 4. 11 ~ 1961. 11. 3)[7]와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 朴氏) 박이현(朴利顯, 1891 ~ 1944. 1. 23)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내면 태성리는 인근의 산단리와 함께 풍양 조씨 집성촌으로, 조남기 역시 풍양 조씨이다.

1940년에 만주국 길림성 영길현(永吉縣)[8]으로 이주했으며 1945년 8월 18일 소련군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해 치안 공백이 나타나자, 조남기는 주변의 청년들을 모아 자위대[9]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지린시에서 길림조선인해방동맹에 가입해 연락 임무를 수행하고 군인들에게 양식을 제공했다. 그러던 중 중국공산당과 접촉하였고 1945년 12월부터 동북군정대학(東北軍政大學) 길림분교(吉林分校)에 입학해 반장을 맡았고, 길림성 민운공작대(民運工作隊) 대원이 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공산당 간부와 군인의 구분이 상당히 가라로 진행됐기 때문에, 1947년 2월에야 정식으로 입당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작전처 장교로 펑더화이의 통역을 맡았고, 러시아어 통역을 맡고있던 마오안잉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이 귀국을 권유했으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한국에 왔을 때 직접 "김일성 중심의 수직적인 북한군 체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 라고 밝혔다. 다만 김일성 자신도 평양에서 만주로 이민갔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조선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조남기와 비슷한 처지이긴 했던지라 친분은 유지되었던 듯 하며, 이후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었을 때도 넌지시 "북한으로 귀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덥썩 북한에 귀화했다면 역시…

1955년에 소교로 진급했고, 1958년에 중교, 1962년에 상교로 진급했다. 1962년부터 중국군에서 계급이 폐지되면서 보직으로만 근무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근무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도리어 실각당한 펑더화이와도 인연이 있었던 조남기는, 대부분의 비 린뱌오파 장교들 처럼 보직에서 잘리고 사상재교육소로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겪다가 1973년에 복직한다.

1988년 중국군이 계급을 부활시키자 상장 계급을 받는다. 이미 상장급 보직이었던 총후근부지휘관인 후근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군수사령부가 합동참모본부와 동격인 셈이다. 1992년에 이임하면서 중국인민해방군군사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원장을 지냈다.

1995년에 군에서 전역했고 1998년에 제9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에 상당하는 직책이다. 2003년에 은퇴하였고, 2000년과 2004년, 2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2018년 6월 17일, 베이징시에서 타계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향년 91세. 장례식에는 시진핑 국가주석,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3. 여담[편집]


조남기의 대한민국 방문 당시 민주당 장성민 의원이 주장하길, 노무현 대통령과 조 부의장이 만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조선족들이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도록 중국 정부에 말해달라고 부탁했다라는 주장을 했으며 다민족국가중국에서 그런 방침은 민족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에 조남기 부주석은 상당히 언짢아했다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나아가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중국이 동북공정에 착수하는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설사 위 에피소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울 뿐더러, 실제 있었던 일이라도 동북공정이 원인되었다는 게 좀 억지스러운 게,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이전에 중국 정부는 티베트위구르와 같이 현 중국 영토 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저것과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장성민은 이후 보수 성향 종편 TV조선에서 '시사탱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5.18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방송을 하는 등 여러 논란의 중심이 되는 사람으로, 당시 잔류민주당계와 열린우리당이 원수지간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꺼낸 말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외국 동포에 대한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조남기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정권의 고위층에 올라간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국에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 민족 전체를 위해, 반대편 입장에서 말한다면 한국을 위해 일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에서 출세한 여러 한국계 미국인 정ㆍ관계 고위층 인사(빅터 차나 성 킴 등)들도 당연히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움직이므로, 이들이 미국 정부에서 한국의 이익을 위해 힘써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생각이다. 그래도 조남기 본인은 한국에서 남동생이 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동포애(?)가 작용해서 한국과 교류에 신경을 쓴 축이었다고 하며, 한국 기업들에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월탄리에는 '램스토리'라는 양고기 식당이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근처에 있는데, 이곳 사장이 조남기 장군의 조카이다. 음식점 안에 가면 조 장군의 사진들이 여럿 장식되어 있다. 사장님께 조남기 장군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 2023년 7월 14일 현재 같은 자리에 'SUNSET510'이라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램스토리'와 같은 사장인지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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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체: 趙南起. (한어병음: Zhào nán qǐ; 자오난치)[2] 회양공파(淮陽公派)-한산군파(漢山郡派)-학생공파(學生公派) 26세 남(南) 항렬.[3] 양력 5월 31일.[4] #. 인근의 산단리와 함께 풍양 조씨 집성촌이다.[5] 계급장은 3성이지만 대우는 대장(General)이다.[6] 영어 위키백과[7] 이명 조복구(趙復九).[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융지현(永吉縣).[9]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Defense Force'의 번역어로 자위대를 썼고, 민병대에선 흔히 쓰이던 표현이었다. 대한독립자위대란 단체도 있었다. 근데 민병대 호칭을 준군사조직인 일본 자위대가 사용하면서 일본의 군사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제한된 것. 북한에서도 조만식이 자위대를 1945년에 창설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