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호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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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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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동호(趙東祜)

유정(榴亭)
생몰
1892년 9월 24일 ~ 1954년 9월 11일
출생지
충청도 옥천군 청산현 현내면 백운리
본관
풍양 조씨
사망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이름의 혼동
3. 생애
3.1. 초년기
3.2. 독립운동
3.2.1. 중국
3.2.2. 국내
3.2.3. 조선건국동맹
3.3. 해방 후의 경력
4. 여운형과의 우애
5. 기타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이다. 풍양 조씨이고 호는 유정(榴亭). 충청도 청산현 현내면(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출신.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되었다.
공식 홈페이지로는 유정 조동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있다.

2. 이름의 혼동


조동우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에서 '복호(祜)'자를 글자로 사용하지 않고 고어(古語)로 취급하고 祐(우)를 사용했기 때문. 이에 더해 독립운동사 연구를 일본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근래까지 이름을 "조동우"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사실은 조동호가 맞다.[2]

3. 생애



3.1. 초년기


조동호는 1892년 9월 24일[3]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부친 조명하(趙明夏)와 모친 고령 박씨 박빈(朴彬)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풍양 조씨 회양공파로, 20대손 조운종(趙雲從: 1783년생)이 서울에서 청상면으로 낙향한 뒤 대대로 청상면에서 살았다. 그는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동리에서는 "그 집에 큰 장군감의 사내아기가 태어났나 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동호는 5살 때 서당에 나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그때부터 한시를 잘 지어 주위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신동이 나타났다"며 감탄해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살 때인 1907년에 큰형 조동석이 "너는 이런 한적한 시골에서만 있을 수는 없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중심지인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동대문 근처 창신동에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고, 1908년에 국립측량학교에 등록하여 1910년에 졸업했다.
이무렵, 그는 평생 지기가 된 여운형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였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이에 울분을 느끼고 여운형과 함께 나라 잃은 슬픔을 토로했다. 그러던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여운형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게 이런 소식만 듣고 멍청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여운형이 말했다.

우리가 결사적으로 나서야 할 터인데 규합할 동지와 무기가 없이니 무력 앞에 맨손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에 조동호가 권했다.

몽양 선생! 국내에서는 우리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려우니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운형은 이에 동의를 표하며 중국에서도 국제도시로 손꼽히는 상하이로 망명하기를 권했고, 조동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할 때를 노리던 조동호는 1914년 11월 여운형과 함께 보따리 장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조선을 빠져나와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5년 1월 하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 도착한 두 사람은 프랑스 조계 인근의 여관에 유숙했다.
그러나 당시 상하이에서는 한국인이 별로 없어서 활동의 제약이 크다고 본 두 사람은 신해혁명에 동참했던 한국인 독립지사 신규식 등이 거주하는 난징으로 가서 그들의 추천을 받고 난징의 진링 대학을 재학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난징으로 간 두 사람은 진링 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했다. 여운형은 당초엔 신학과에 입학하려 했지만 신학관가 없자 영문학과에 입학했고, 조동호는 중국어학과에 입학했다.

3.2. 독립운동



3.2.1. 중국


1917년 7월경 진링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돌업한 조동호와 여운형은 난징에서 취업하려 했지만 사정이 좋지 않자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받고 일자리가 많은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조동호는 구국일보사와 중화신보사의 평기자로 취직했다. 그는 이 신문들에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를 여러 편 기재했다. 그러던 1918년 1월 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를 역설하며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하자, 그는 이에 열광하여 약소국이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기사를 여러 편 기재했다.
한편, 조동호와 여운형은 1917년 가을에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홍명희, 신채호, 문일평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담했다. 그는 동제사의 이사로 발탁되었고, 얼마 후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중국인 인사들이 합세하면서 결성된 신아동제사에서 진링대학에서 갈고 닦았던 중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핵심 멤버로 떠올랐다.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찰스 클레인이 상하이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동호와 여운형은 중국대표인 왕정정과 육징상의 주선하에 클레인과 면담했다. 두 사람은 클레인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우리는 이런 좋은 기회에 날강도 같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파리강화회의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약소국의 평화유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반 평화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살려주십시오. 그 회의에 우리 대표를 참석하게 주선해 주십시오. 당신이라면 그 대회에의 참석이 가능할 것이니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2천만 민족의 최대 염원입니다. 당신의 협조가 이 민족 최대의 관심사이니 협조를 특별히 부탁합니다.

그러나 클레인은 "한국을 개인적으로는 돕고 싶지만, 나는 중국대표를 초청하는 사명이 있을 뿐 한국의 대표 참석은 소관 사항이 아니다."라며 회피했다. 이에 조동호와 여운형은 허락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 대표를 선출해 파리강화회의에 억지로라도 참석시키기로 결심하고 12월 초에 여운형의 집에서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당의 대표는 처음엔 손병희로 추대했지만, 그가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게 되자 상하이에 와 있던 김규식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상해청년당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모집해 100명 가량을 모았고, 독립공고서를 2통 작성을 하여 클레인을 통해 하나는 윌슨 대통령에게, 다른 하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독립청원서 초안은 조동호와 장덕수가 맡았고, 여운형이 이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피치 박사의 감수를 받은 뒤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할 대표로 김규식을 선출했다. 김규식이 파리로 떠난 뒤 이유필이 후임으로 선출되어 당을 정비했으며, 이사는 조동호, 여운형 등 4명이 맡았다.
얼마 후 국내에서 3.1 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신한청년당은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 김신부로 22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이때 조동호는 여기에 적극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과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당시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 중 유일한 대학 졸업자로[4],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체택하고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구성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조동호는 또 의정원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제작 방법 등을 정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그는 일제가 밀정이나 위장된 간첩을 투입시킬 위험이 있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특별위원을 선임해야 한다고 밝혔고, 이 주장은 그대로 인정되어 조완구, 김병조 등 10여 명의 특별위원이 선임되었다. 또한 1919년 6월 17일 안창호, 이광수 등과 함께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위원회를 결성해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세계인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창간했을 때, 그는 성경에서 그 글자체를 따서 한글 활자를 제조, 사용하게 했으며, 이후로는 독립신문의 편집인을 맡아 신문의 운영 전반을 이끌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논설을 몇 편 게재했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프랑스 당국이 여러차례 정간 조치를 내리는 데다 자금 지원이 부족해 여러 번 발행 중지되는 등 온갖 악재에 시달리다가 결국 1922년 11월 1일 189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1921년 5월, 여운형은 사법차장 오산을 비롯하여 황개민, 황흥의, 황종한 등 여러 중국 정부 인사들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조직했다. 이때 조동호는 이유필, 김규식, 여운홍과 함께 이 조직에 동참했다. 이들은 한중 친선 관계를 굳건히하고 한, 중간의 상호 독립을 위한 협조, 한국 청년의 중국 일대와 구미 유학을 위한 여권 주선 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조동호는 한중호조사의 교제과 간사로서 중국인 부주임 황경원과 함께 국제 업무를 분담 처리했다. 또한 자금조달을 위해 오락 대회를 열어 상당량의 금전을 모집했으며, 중국측 인사들과 제휴해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냈다.
이무렵, 조동호는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했다가 상해파의 주축인 이동휘와 결별한 뒤 상해파와 대적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연대하여 1921년 7월 김만겸(金萬謙), 여운형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를 조직했다. 이후 1922년 1월 21일에 우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한국의 경제, 농민, 노동자의 상태와 그들의 운동"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대표 중의 한 사람인 조동호 올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일제 침략을 분쇄하고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찾고 반만년의 역사를 회복하여 민족 번영의 그날을 맞기 위한 충정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동정과 지지 찬성을 얻고자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참하고 억울한 현실을 인식하시고 이해하셔서 속히 우리가 국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최대한 성원과 지지의 말씀을 부탁드리고자 함입니다. 대저 나라는 자유와 정의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곤궁하며 또한 핍박의 연속인가를 잘 이해하여 주셔서 속히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일에 성원이 있으시길 진정으로 엎드려 빌고, 두 손 모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1922년 10월, 조동호는 상하이 샤페이로(霞飛路) 바오캉리(寶康里)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여운형, 김구, 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했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내에 1만 명의 병력과 10만원의 자금을 모아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3년 4월 2일 한국노병회 1차 정기총회에 참석하고 노병회 교육부 부원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엔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었다.

3.2.2. 국내


1923년 무렵, 조동호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를 반복하기만 하는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꼈다. 그러던 중 장덕수가 주필을 맡은 동아일보로부터 채용 제의를 받은 그는 한동안 고민한 끝에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정태희, 여운홍 등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하고 신의주에 잠입했다. 그러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가 사복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서울역에 도착한 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연금되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사의 김성수, 송진우 등이 종로경찰서장에게 그를 풀어달라고 설득한 덕분에, 그는 별다른 고문을 받지 않고 10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조동호는 석방 후 고향을 찾아가서 가족과 10년만에 상봉한 뒤 서울로 상경해 1924년 1월부터 동아일보 기자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신사상연구회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공산주의만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확신했다. 신사상연구회는 나중에 명칭을 화요회(火曜會)로 바꾸고 윤덕병, 이준태, 원우관, 박일병, 홍명희, 김찬 등 주요 공산주의 성향 인사들을 끌여들었다. 이후 1925년 4월 17일 김재봉, 김찬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고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으며, 1925년 6월 조선공산당 대표로서 모스크바로 가서 1년간 코민테른 의원들과 협상한 끝에 1926년 4월 17일에 정식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국내로의 귀환길에 오르던 조동호는 1926년 11월 신의주에서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조선공산당원들이 모두 체포되자 국내로 복귀하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김찬, 김단야, 조봉암 등과 함께 중국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중국어만 쓰면서 신분을 숨기려 애썼다. 그러나 1928년 2월 초순, 그는 프랑스 조계 밖을 잠시 나섰다가 일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내로 송환되어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는 취재를 받던 중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취조 경찰 책상 위의 증거 서류뭉치를 집어들고 난로에 집어던져 태워버렸다. 이로 인해 그는 기존의 죄명인 치안유지법 위반죄에 더해 증거인멸죄까지 덧붙였고, 1928년 2월 21일 경성지법 검사국에서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2월에 출옥한 그는 서울에서 고문의 후유증을 치료했다.
그러던 중 1932년 5월 경 노정일이 운영하는 중앙일보 신문사가 급료가 밀리고 어려워져 자진휴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동호는 중앙일보사를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4촌 동생인 조동순의 매제이자 충남 논산의 지주인 윤희중과 그의 친구인 최선익을 찾아가서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해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1932년 10월 31일 중앙일보를 인수했다. 그는 사장 겸 주간에 최선익, 전무에 윤희중, 편집국장에 김동성, 경리부장에 유정의, 조동순 등을 선임했다. 그러다가 1933년 2월 여운형이 합세하자, 그는 여운형을 사장으로 선임하고 부사장에 최선익을 임명했다.
중앙일보는 곧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하고 민족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일련의 언론 활동을 개시했다. 조동호는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하거나 친일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특히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 시기엔 자치운동을 벌여 일제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던 박희도에 대해서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1934년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는 “교육계의 대불상사, 제자들을 유인하야 정조유린을 감행”이라는 제목으로 박희도의 ‘정조유린’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는 제자이자 친구의 부인인 윤신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키던 중 '정조를 유린'했으며,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언론에 폭로했다고 한다.
조선중앙일보는 3월 19일자 기사에 각계인사의 의견을 실었고, 3월 29일에는 전면에 박희도의 성적 문란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윤신실은 나중에 자신이 정조를 유린당한 적이 없다며 진술을 번복했고, 결국 박희도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고 신문 지상에서도 해당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하지만 박희도는 이 사건 때문에 중앙보육학교장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3년 11월 4일, 조동호는 정태희와 함께 청년들을 선별하여 독립운동가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다가 일제 경찰에게 적발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송치되었다. 그는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 5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2월 26일에 출옥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복귀해 편집고문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1936년 8월 13일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을 벌인 여파가 미치면서 친일 인사를 사장으로 교체하라는 압박을 받고 검열이 한층 강화되고 정간 조치를 수차례 당하는 등 온갖 악재에 시달리던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 5일에 폐간되었다.
그 후 조동호는 1936년 3월 의열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광(朴洸)의 차녀 박소동득(朴小東得)과 결혼한 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고 대륙광업사에서 근무했지만 일제 경찰의 사찰에 시달려야 했다.

3.2.3. 조선건국동맹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10일, 조동호는 여운형,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이상백, 이수목 등과 함께 종로 경운동 심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를 회피하기 위해 비밀결사조직 형태로 조직을 운영했으며, 3불 맹서(三不盟誓)를 결의했다.

불명, 즉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불거, 즉 거처를 말하지 않는다.

불문, 즉 문서를 남기지 않는다.

이후 조선건국동맹은 전국에 조직망을 은밀히 결성해 회사, 학교, 각종단체, 농촌, 공장의 종사자들을 끌여들었고, 1944년 10월경에 내무, 외무, 재무의 3개부와 그 산하의 소조직을 구성했다. 조동호는 이 일련의 활동을 진두지휘하며 3가지 대강을 제시했다.

첫쨰,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의 최후 발악 세력을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할 일

둘째, 반 추축 여러 나라와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 세력을 박멸할 일.

셋째,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노농 대중의 해방에 최대한 치중할 일.

조동호는 여운형과 협의하여 건국동맹의 간부들이 매주 토요일에 정기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주요 안건을 심의, 통과하게 했다. 임시로 잡아놓은 연락처는 서울 경운동 현우현의 가택이기도 한 삼광한 의원을 활용했다. 그는 이곳을 출입하는 자들은 누구나 이 한의원에 문병 또는 치료차 왕래하는 것으로 가장하게 했다.
조선건국동맹은 그 산하에 농민동맹도 조직했는데, 조동호가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44년 10월 5일에 용문산 기슭에서 절에 구경 온 사람들로 위장한 동지들을 은밀히 모아 농민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 조직의 목표를 명목상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권익투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호적부를 탈취하여 전락 소각 처분시켜 일제가 병적상 혼란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 구체적인 방법으로 각지의 재판소, 각 지방 관공서들을 기습 방화, 파괴하고 공무원들을 납치하는 등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려 했다.
1945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가 개최될 때, 조선건국동맹은 김희순을 옌안에 파견하여 회의에 건국동맹의 이름으로 전보를 보내게 했다. 또한 그해 4월 말에 조선의용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박승환을 대표로 선정하고 메시지를 휴대시켜 조선의용대로 파견했으며, 5월에는 함경북도 종성에 거주하는 최주봉을 서울로 오게 해 옌안 동북삼성 방면으로부터 동지들이 국경을 넘어 국내로 잠입할 때 숙소와 연락처를 정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최근우를 파견해 서로 연계해 협동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여운형과 조동호가 협의하여 결정된 것이었다.
한편, 조동호는 일제의 후방을 교란할 노농군의 편성을 계획하고 이석구, 이걸소 등 6인으로 하여금 비상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다. 그는 경기도, 황해도 및 삼척지구에 각기 책임자를 파견하여 유사시에 쓸 인물을 규합하게 했고, 그 외의 지구에도 노농군 조직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4일 이걸소, 이석구 등과 함께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부에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3.3. 해방 후의 경력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조동호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1차 조직을 결성했다. 이후 2차 조직과 3차 조직을 연이어 개편하면서 국내의 좌우익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러나 송진우 등 우파 인사들은 임시정부가 채 귀환하기도 전에 이러한 조직을 결성한 것은 해방 후의 신국가의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좌파의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판단하고 가입을 거부했고,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정과 소군정 모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해방 후 조선은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조동호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45년 8월 22일에 선전부장직을 사임하고 수원에 있는 누님댁으로 가서 요양했다. 그는 그해 9월 14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었을 때 가담하여 중앙위원 겸 내무부장 대리로 선출되었지만 실제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 활동 대신 민족 운동과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로 마음먹고 1945년 9월 17일 실업자동맹을 결성해 실업자들을 위한 일련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1946년 2월에 자신의 호를 딴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를 설립하여 정치인과 공무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6년 5월, 조동호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 직능대표자로 참석하여 이승만이 주장하는 단독정부론을 강하게 비판하며 한민족의 자주 독립국가 수립을 주장하려 했지만,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해 무위에 그쳤다. 그 후 1947년 4월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여기에 가담해 정치협의회 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47년 5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여기에 참석해 대책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당하자, 조동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아내 박소동득은 오랫동안 함께한 동지였던 여운형의 암살 소식을 접한 남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몽양 선생의 장례를 마치고 와서는 한 달 이상을 자리 보존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조동호는 여운형이 암살된 뒤 근로인민당이 와해되자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했다. 1948년 5월 10일 김성숙, 윤동명(尹東明) 등이 그를 방문해 제헌국회의원에 출마를 권고했으나 거절했으며, 수원읍장으로 있던 조카 조용구 역시 찾아와 당선 가능성이 있다며 재차 권유했지만 역시 거부했다. 이후 고향에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격노했다.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서 철이 안난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동족을 몰살하려 드는 것인가? 한심한 자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심산인가? 남북이 이제 원수가 됐으니 우리가 합치려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1954년 9월 11일, 조동호는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3세. 그의 유해는 고향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8월 30일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조동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4. 여운형과의 우애


그는 거의 평생 여운형과 함께 했다. 중국 유학가기 전에 이만규의 집에서 여운형,이만규와 함께 우애를 다짐하였고,[5] 조동호는 여운형과 함께난징의 금릉대학[6]에 진학하였고 신한청년당-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한중호조사-한국노병회-고려공산당-조선중앙일보-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였다. 여운형이 암살되자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하관식을 지켜보는 조동호(왼쪽에서 세번째)

5. 기타


3.1 운동 후에 독립신문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요새 매일 아침마다 집 앞의 전봇대에 태극기와 독립만세 4글자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두 길이나 높이 붙여서 그것을 올라가 떼느라고 고생이 막심한 순사가 혼자 말로 “제길할 놈들 만세나 부를 것이지. 이것은 왜 붙여 사람을 고생시키는 거야...” 둘러서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파출소에 잡혀가서는 하는 말이 “순사가 부르라고 하기에 불렀오.” 라고 했다더라.

- 독립신문 1919년 10월 11일 19호 <哭中笑(곡중소)>에서.

그 외 선생의 장남 조윤구 선생이 블로그 활동을 했던적이 있었다.# 현재는 작고하신 상태
[1] 파일:/pds/201002/23/75/f0020275_4b83ab9690875.jpg
초상화에서는 이렇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녔다. 또한 키도 6척(180cm)으로 장신이었다고 한다.
[2] 참고로, 아우 중에 조동우(趙東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3] 음력 8월 4일[4] 그와 함께 대학을 졸업한 여운형은 당시엔 창춘,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등지를 돌며 임시정부를 지원할 자금을 받아내고 있었다.[5] 이만규는 자신의 저서인 "몽양여운형선생투쟁사"에서 이 만남을 삼국지의 도원결의에 비유하기도 하였다.[6] 단 조동호는 영문과가 아닌 중문과에 진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