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 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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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ordano_Bruno.jpg

본명
필리포 브루노
Filippo Bruno
출생
1548년 1월 또는 2월
나폴리 왕국 놀라
사망
1600년 2월 17일 (향년 51~52세)
교황령 로마
국적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국]]
직업
철학자
사상
무한우주론

1. 개요
2. 생애
3. 그의 우주론
4. 사형
5. 사후
6. 과학의 순교자 논쟁
7. 여담



1. 개요[편집]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수많은 항성들은 각각의 지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탈리아도미니코회 수도자, 철학자. 《무한 우주와 세계에 관하여 (De l'infinito universo et mondi)》에서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고 자신의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아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고 화형을 당해 죽었다.

2. 생애[편집]


1548년 나폴리 왕국의 놀라(Nola)에서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법을 배웠으며 가톨릭의 도미니코회의 수사로 활동했으나, 후에 개신교인 칼뱅파로 개종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1576년에 나폴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전설을 말하거나 학문을 가르쳤다. 브루노는 라틴어·희랍어에 능통하였고 다방면에 박식하였으며 신플라톤주의마르실리오 피치노나 피코 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법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91년 베네치아 공화국(현재의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잡혀 8년 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몇몇 사소한 신학적 오류는 시인했지만, 자신의 기본 교의의 신학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은 브루노에게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브루노는 자신의 견해가 신과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양립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은 철회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브루노는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1600년 2월 8일.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선고받는 나보다 선고하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3. 그의 우주론[편집]


16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가 관찰보다 수학적 일관성을 중요시한 것을 비판했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안에 있는 "천구는 불멸하며, 지구, 달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브루노가 활동하던 시기의 코페르니쿠스 모형은 아직 논리적 결함이 많았고, 천동설이 더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동의하는 천문학자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요하네스 케플러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직 젊은 사람들이었다. 브루노는 천문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빠른 시기에 지구 중심설과 천동설을 배척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브루노의 주장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지구 자체가 회전하고, 따라서 지구상에서는 천체가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중심은 지구 또는 태양이다"라는 논리를 초월하여 3세기 플로티노스와 같은 사상, 즉 우주의 중심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당대 천동설지동설을 주창하던 양 측이 보편적으로 따르던 "우주는 유한하다"는 믿음에 반하는 생각이었다. 브루노는 태양 주위의 행성들, 즉 태양계와 같은 시스템은 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브루노는 하느님이 무한한 존재인 이상,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우주와 시간은 무한하며, 무한히 넓은 우주에 지구가 아닌 곳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오로지 지구만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당시의 그리스도교적 우주관을 뒤집는 것이었다.[1]

브루노는 천구에서 움직이지 않는 들이 바로 항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빛과 열을 발산하는 항성과 그 주위를 돌며 빛과 열을 받는 행성을 구분하였다. 브루노는 고대 원소설(물, 공기, 불, 흙)은 믿고 있었지만, 우주가 특별한 물질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지구상에서 보여지는 운동 법칙이 우주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주의 중심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오늘날의 빅뱅 우주론이 주장하는 것과 일치한다.[2]

오늘날 인류는 밤하늘의 별들은 실제로 태양과 같은 항성이며, 외계 행성이 실제로 존재하며, 태양계 밖 천체들도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지구와 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는 브루노의 주장 중 일부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다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항성과 항성 사이에 있는 무수한 거리는 에테르에 의해 충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마법과 점성술,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우주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별들의 의지에 의해 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애니미즘적 우주관은 브루노 우주론의 특징 중 하나이다.

4. 사형[편집]


신앙에 대해 정해진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가톨릭의 당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브루노의 생각은 이단으로 몰아졌다. 권위가 이어져 온 종교기구만이 확언할 수 있는 성경의 해석에 정반대되는 이러한 주장을 지속하는 건 교회의 권한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이는 곧 신에 대한 불경이었다.

로마에서 그는 8년 동안 잔혹한 심문을 당하며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의 추기경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주재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종교 재판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이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에 발견된 요약집이다. 그의 저서와 증언들에 근거해 적용된 죄목은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의신학의 문제에 대한 이단적 해석을 포함하며, 또한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기본적 주장과 관련이 있다. 루이지 피르포(Luigi Firpo)는 브루노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1. 그리스도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2. 삼위일체를 부인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4.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
5. 성체미사에 대한 다른 의견
6. 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7. 윤회와 인간 영혼이 짐승에게 들어간다고 믿음.
8. 마법을 연구하고 점을 침.
9.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부인함.

하지만 브루노는 베네치아의 자기변호에서처럼 자신은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충실히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의 다원성[3]에 대한 믿음'만큼은 결코 버리지 않았는데, 교황청으로부터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화형될 것이라는 협박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이론의 완전한 철회'를 요구한 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해 마침내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 선고가 내려졌을 때, 브루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에게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나 자신의 두려움보다 당신들의 두려움이 오히려 더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1600년 2월 17일, 예수회 사제들은 브루노의 턱을 쇠로 된 재갈로 채우고, 쇠꼬챙이로 혀를 꿰뚫었으며, 또 다른 꼬챙이로 입 천장을 관통시켰다. 그러고는 망토를 입은 집행관들이 이끄는 수레에 실린 채, 구경거리가 되어 로마 거리를 끌려다녔다. 한참 뒤, 예수회 사제들은 그를 발가벗기고는 거꾸로 매달아 불태워 죽였다.

5. 사후[편집]


브루노의 저작물은 모두 1603년에 금서목록에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작의 대부분은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출판되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는 철학자 피에르 벨과 마랭 메르센이 저작 속에서 브루노 철학을 거론했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우주론이 브루노 우주론의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사상가 존 톨런드는 브루노의 글을 영어로 번역해서 적극적인 보급 활동을 실시했다. 그 톨런드의 영향 때문인지, 프랑스의 익명 자유 사상가에 의해 지하 문서 "조르다노 브루노 부활 '이 적혀 광범위한 독자를 얻었다.

19세기부터 독일에서의 범신론 논쟁 속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은 브루노를 주인공으로 한 대화편 '브루노'를 저술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탈리아에서 브루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저서의 편찬 및 전기 고증 등 실증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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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당대의 유럽 지식인들은 브루노를 기리며 1899년에 그가 화형 당했던 로마 캄포데 피오레 광장에 동상을 건립했고[4] 거기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브루노, 그가 예견한 세기에, 화형의 불길이 타올랐던 여기 이 자리에[5]

그리고 그 날 교황 레오 13세는 89세의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몸소 단식기도를 바치면서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 잔재 청산을 호소하며 사회운동이 시작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루노에 대한 재판 과정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사형 선고는 부당"이라는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써 1979년 공식적으로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다. 브루노가 처형된 지 무려 379년 만이다.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6. 과학의 순교자 논쟁[편집]


몇몇 학자들은 1610년에 시작된 갈릴레오 사건과 아주 유사한 점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브루노를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한다. 패터슨은 부루노 전기에서 그의 태양중심우주관이 어떤 신비로운 계시를 통해 결론에 도달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의 작업들은 과학과 철학의 발전을 개시한 매우 본질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현대 지식 이론의 안내원 역할을 했다고 패터슨은 말한다.[6]

또한 또다른 전기 작가 알폰소 인게그노는 브루노가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한다. 브루노의 근거와 원칙들은 "사변적 과학과 자연 사물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고", "가장 쉽고 탁월하게 자연의 진리에 가장 근접한 철학을 달성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7]

몇몇 다른 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하며, 과학에 대한 브루노의 순교는 과장되거나 완전히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예이츠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브루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해 "황홀경에 빠진 것"이라고 말하며,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도표를 신성한 신비의 상형 문자로 해석하여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작업을 과학 발생 이전의 시기인 신비주의로 다시 되돌렸다."고 주장한다.[8]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다소 논란은 있지만, 그가 무한우주론을 주장한 것 또한 사실이며, 이는 기존 질서 이외의 사상을 주장하고 탄압받았다는 점에서 브루노의 사례는 여전히 자유 사상과 새로운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이정표로 간주된다.[9]

7. 여담[편집]


  •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 (2014년도판 리부트)의 제 1화 (Standing Up in the Milky Way, 은하수에 서서)에 소개되었다.

  • Avenged Sevenfold 의 7집 The Stage의 9번째 수록곡 Roman Sky의 모티브가 되었다.

  • 달의 크레이터들중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크레이터가 존재한다.# 1178년 중세 잉글랜드의 캔터베리에서 수도승 5명이 월면에 발생한 유성충돌을 목격했는데, 이 유성충돌로 인해 발생한 크레이터가 후대에 조르다노 브루노 크레이터로 명명되는 크레이터다.
[1] 조르다노 브루노를 다룬 글에서 마이클 화이트는 이렇게 지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체들이 신적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당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주장이자 가장 위험한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2] 우주가 팽창할 때 중심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3] 태양계 이외의 세계가 있다는 것.[4] 동상 건립이 허가된 데에는, 당시 이탈리아의 수상이었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교황 레오 13세 사이의 갈등 또한 한몫했다(출처: 『로마의 역사』(장 이브 보리오 지음, 박명숙 옮김) P500~501)[5] 한국어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는 낭설이 한국 웹사이트는 물론 심지어 본 문서에까지 적혀있었으나, 아예 잘못된 해석이다. 2007년에 출간된 모 책에서 나온 잘못된 정보가 퍼진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원어는 "A Bruno ilsecolo da lui divinato qui dove il rogo arse''[6] Some authors have characterized Bruno as a "martyr of science", suggesting parallels with the Galileo affair which began around 1610. "It should not be supposed," writes A. M. Paterson of Bruno and his "heliocentric solar system", that he "reached his conclusions via some mystical revelation....His work is an essential part of the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developments that he initiated." Paterson echoes Hegel in writing that Bruno "ushers in a modern theory of knowledge that understands all natural things in the universe to be known by the human mind through the mind's dialectical structure".[7] Ingegno writes that Bruno embraced the philosophy of Lucretius, "aimed at liberating man from the fear of death and the gods." Characters in Bruno's Cause, Principle and Unity desire "to improve speculative science and knowledge of natural things," and to achieve a philosophy "which brings about the perfection of the human intellect most easily and eminently, and most closely corresponds to the truth of nature."[8] Other scholars oppose such views, and claim Bruno's martyrdom to science to be exaggerated, or outright false. For Yates, while "nineteenth century liberals" were thrown "into ecstasies" over Bruno's Copernicanism, "Bruno pushes Copernicus' scientific work back into a prescientific stage, back into Hermeticism, interpreting the Copernican diagram as a hieroglyph of divine mysteries."[9] 『Giordano Bruno and Renaissance Science』 "For Bruno was claiming for the philosopher a principle of free thought and inquiry which implied an entirely new concept of authority: that of the individual intellect in its serious and continuing pursuit of an autonomous inquiry…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the issue involved and to evaluate justly the stand made by Bruno with his life without appreciating the question of free thought and liberty of expression. His insistence on placing this issue at the center of both his work and of his defense is why Bruno remains so much a figure of the modern world. If there is, as many have argued, an intrinsic link between science and liberty of inquiry, then Bruno was among those who guaranteed the future of the newly emerging sciences, as well as claiming in wider terms a general principle of free thought and ex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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