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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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삼국시대 위나라의 제4대 황제. 폐제(廢帝) 또는 고귀향공(高貴鄕公)으로 불린다. 예주 패국 초현 사람.
태조 무황제 조조의 증손자이자 고조 문황제 조비의 손자이며, 열조 명황제 조예의 이복동생 동해정왕 조림(曹霖)의 아들이다. 즉 조예의 조카. 형으로는 조계(曹啓)가 있었다.
조방이 폐위된 후 대장군 사마사의 추천을 받은 조조의 아들 팽성왕 조거(曹據)와 함께 황제 후보에 올랐으나, 역상속[2] 을 꺼린 곽태후(명원황후 곽씨)의 뜻으로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에 자리에 올라서는 당시에 벌써 조위의 전권을 독점한 사마사-사마소 형제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황권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며, 그럼에도 이미 권력은 사마씨의 수중으로 넘어가 마지막 수단으로 본인의 목숨을 건 친위 쿠데타로 사마씨의 수장인 사마소를 축출시키려다가 사마소의 심복인 가충의 명령으로 장수 성제에게 살해당했고 이후에는 시호도 못 받고 즉위 전 작위인 고귀향공으로써 역사에 기록되었다. 사실상 조위의 마지막 황제로 여겨진다.
2. 생애[편집]
2.1. 위나라의 황제로 옹립[편집]
244년 담현의 고귀향공에 봉해졌으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일찍 이루었다. 열조 명황제 조예 사후 황제 조방이 사마사에게 폐위된 후, 공경들과 상의한 사마사에 의해 옹립되었다.[3] 조모가 현무관에 도착하자 대신들은 상주하여 전전에서 머물기를 요청했지만 조모는 선제가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하며 피하고 서상에 머물려고 했다. 대신들은 또 법가로 그를 맞으려고 했지만 조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모가 낙양으로 들어가자 대신들은 서액문 남쪽에서 맞아 배례하였으며 조모가 수레에서 내려 인사에 답하려고 하자 옆에서 안내하는 자가 말했다.
"의례를 따르면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에 조모는 말했다. "나는 신하의 몸이요."
그리고 인사에 답했다. 지거문에 이르러서 조모는 수레에서 내렸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황태후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지, 어떻게 하는 바를 모르오."
그래서 조모는 그대로 태극동당까지 걸어가 곽태후(명원황후)를 만났다. 그날 조모는 태극전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즉위식에 참가한 백관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삼국지》<위서> 삼소제기
2.2. 허수아비 황제[편집]
조모는 명제 조예와 곽태후의 양자로 즉위했다. 즉위 후 황제가 사용하는 수레, 옷, 후궁의 비용을 줄이고, 또 상방과 어부에서 각종 사치스럽고 호화로워 실제적인 용도가 없는 물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254년 시중에게 부절을 갖게 하여 사방으로 분산 파견하여 풍속을 관찰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게 했으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직업을 잃은 사람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사마사에게 황금 월(鉞)을 주어 조정에 들어올 때 빨리 달리지 않고[4] 어떤 일을 상주할 때는 자기 관직만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5] 검을 찬 채 신을 신고 전상에 오를 수 있도록[6] 했다.
조모가 성장하자 슬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실권은 이미 사마씨 정권에게 넘어간 뒤라 사실상 후한의 헌제와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다.[7] 한번은 사마사가 종회에게 조모의 평을 은근히 묻자 종회는 "그의 재능은 진사왕과 같고 무용은 태조와 비슷합니다."라고 했다. 또 석포가 조모를 높이 추켜세워 "위무제의 환생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8]
《진서》 <경제기>에 따르면, 조모가 옥새를 불경스럽게 받아들고 발걸음을 높이 드니 사마사가 듣고는 이를 우려하였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에서 예의바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기록인데, 실제로 사마사가 조모에게 신하 주제에 훈계한 말을 봐도 실제로는 '대연회장의 모습이 예에 맞지만 더 노력하셔야 한다.' 운운이지, 조모가 무례하다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또 앞서 말했지만, 조모는 검소하여 즉위하자마자 선황제가 사용하던 사치품을 처분하는 모습을 모였는데 <경제기>에 따르면 조모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자 사마사가 황제로서 검소하라고 지적했다는 등 반대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정사 삼국지》와 <경제기>의 기록이 둘 다 맞다면 사마사는 황제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는 조모에게 괜시리 꼬투리를 잡아 지적한 셈이 된다.
결정적으로 《삼국지》 주 《위씨춘추》에선 조모의 능력을 듣고 사마사가 '사직의 복'이라고 해놨는데 정작 <경제기>에선 조모가 불경하게 옥새를 받았다고 우려했다는 또 반대되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진서》 <경제기>의 기록이 사마씨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기록되었음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마사가 조모의 예의와 위엄을 보고 그냥 꼭두각시로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걸 경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애당초 예에 따르면 항렬상 문제로 조거를 추천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사마사가 굳이 그를 추천한 것도 조거가 조모보다 다루기 쉽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조모는 사마씨가 전횡하는 현실을 그냥 두고 보려 하지는 않았다.[9] 사마사가 관구검의 난을 토벌하고, 야전에서 갑작스레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사마소를 허창을 지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도읍 낙양으로 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는 낙양 내에 있던 사마씨 친위 세력을 제거하여 사마소를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는 심복 종회의 말을 듣고는 허창에 주둔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하려는 무력 시위를 하자, 조모는 어쩔수 없이 사마사의 대장군 직위를 사마소가 이어받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2.3. 사마소와의 신경전[편집]
조모는 학문에 굉장히 관심을 가져 256년의 어느 날에는 태학(太學)을 시찰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주역》, 《상서》(尚書), 《예기》에 대해 하문했다. 이때 역학박사 순우준(淳于俊), 박사 유준(庾峻), 박사 마조(馬照)는 조모에게 연달아 발리고 데꿀멍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박사 유준과의 대화이다.
조모는 또 《상서》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질문했다.
“정현은 ‘계고(稽古)가 하늘과 같다는 것은 요가 하늘과 같음을 말한다.’라고 했고, 왕숙은 ‘요는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고 실행한다.’고 했다.[10]
이 두 해석은 다른데, 어떤 것이 옳은가?”박사 유준(庾峻)이 대답하여 말했다.
“전대의 학자들이 내린 해석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저에게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서》의 <홍범>(洪範)에서는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그 중 일치한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라고 했습니다. 가규(賈逵), 마융(馬融) 및 왕숙(王肅)은 모두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홍범>편의 견해로부터 보면, 왕숙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조모가 질문을 했다.
“공자는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크므로 요는 하늘을 법으로 삼았다고 했소.[11]
요의 위대함은 하늘의 위대함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아 그것에 의지한 것이며,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지고함과 차이가 있소. 지금 전적을 펼쳐 의미를 열어 성인의 덕을 밝히는데, 요의 성덕을 버리고 달리 미세한 점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어찌 작가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유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은 스승의 견해를 받아 따르고 있으므로 아직 상서의 대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설의 좋은 점을 선택하는 것도 폐하께서 결정하십시오.”
《위서》 <고귀향공>기 감로 원년(256년) 4월 10일 기사 중에서
당시 사마씨는 이전 조상 정권의 중추인 하안, 하후현이 주도하던 현학의 반대 급부로 사마소의 장인 왕숙의 이론을 밀어주고 있었는데 조모는 특유의 식견으로 명색이 박사라는 사람을 데꿀멍시키고 왕숙의 이론을 대놓고 공격했다. 이는 자신의 명민함을 보임과 동시에 사마씨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기 충분한 발언이다. 참고로 이때 조모의 나이 불과 16세, 과연 그 학문의 수준이 조위 황가의 최고 준걸이라 여겨졌던 진사왕 조식과 같다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게 아닌 것이다.
조모는 조식과 닮았다는 평가대로 시문학도 좋아했는데,[12]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시를 짓도록 명하기도 했다. 시중 화유(和逌)와 진건 등은 시를 짓는 제한된 시간을 초과하여 파면될 뻔 하기도 했다. 조모는 항상 중호군(中護軍) 사마망, 시중(市中) 왕침, 산기상시(散騎常侍) 배수(裴秀), 황문시랑(黃門侍郞) 종회 등과 동어전(東御殿)에서 모여 토론을 하고 문학론을 썼다. 4명을 총애해 배수를 유림장인(儒林丈人), 왕침을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칭하고, 사마망과 종회에게도 각기 이름을 짓도록 했다. 조모는 성격이 급했으므로 이들을 소집시킬 때에는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배수 등은 궁 안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즉각 올 수 있었지만 사마망은 외부에서 근무했으므로 특별히 추봉거(追鋒車)[13] 와 근위대 병졸 5명을 내려 모임이 있으면 거마를 타고 빨리 도착하도록 했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조모는 다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급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결국 이로 인해 화를 입었다.
《북당서초》(北堂書鈔) 117권에 조모가 지었다는 언시(言詩)가 전한다.
아마도 수춘삼반 때 지은 시인듯. 태평어람 351권에도 하나 전한다.혁혁하게 동쪽 벌하고, 아득하게 먼 원정, 배를 물에 띄워 만척이니, 주둔하여 지키는건 천개의 영채.
赫赫東伐, 悠悠远征, 泛舟萬艘,屯卫千營
창과 방패를 따라 휩쓸고, 기마부대는 나란히 안항[14]
하는구나干戈随風靡,武騎齊雁行
256년 4월 사마소에게 제왕의 상징인 곤룡포, 면류관, 붉은 신발을 하사하고, 8월에는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했으며 입궁할 때 이름을 아뢰지 않아도 되는 특권과 황금 도끼(鉞)를 내렸다. 258년 2월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 사마소를 5월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구석(九錫)의 예를 더했다. 이에 사마소는 9차례 사양했으며 결국 받지 않았다.
259년 정월 황룡 2마리가 영릉현(寧陵縣)의 우물 속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길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모는 용이란 군주의 덕을 상징하며 올라가 하늘에 안주하지도 않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밭에 안주하지 않으며 자주 우물 속에 숨어있는 것은 길조가 아니라[15] 고 생각하고는 <잠룡>(潛龍)이란 시를 지어 사마씨 정권의 국정 농단을 직접 풍자했다. 이에 사마소는 이 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잠룡>시의 자세한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아래에 있는 시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잠룡>시로 조모가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16]傷哉龍受困(상재룡인곤) : 슬프구나, 용이 곤경에 빠져
不能躍深淵(불능약심연) : 능히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구나
上不飛天漢(상불비천한) : 위로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下不見於田(하불견어전) : 아래로는 밭에서 일어서지 못하구나
蟠居於井底(반거어정저) : 우물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鰍鱔舞其前(추선무기전) :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그 앞에서 날뛰는구나
藏牙伏爪甲(장아복조갑) :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긴 모습이
嗟我亦同然(차아역동연) : 아, 내 신세와 어찌 그리 같단 말인가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는 자기를 미꾸라지와 뱀장어로 비판해서 불쾌해했고 이 일로 대놓고 조모를 조롱하며 도발한다.
이런 식으로 사마소와 조모는 물밑으로 굉장히 신경전을 벌였다. 위에서 언급한 태학 행차 사건도 그렇고 사마소는 입조불추, 알천불명, 검리상전, 곤룡포, 면류관, 진공 등 각종 소위 황제가 내리는 물건이나 특권을 거절하는데, 아무리 사마소의 권력이 황제나 다름없는 위상이었고 고평릉 사변 이후 위나라는 조씨의 나라가 아닌 사마씨의 나라가 되었는데도 역시 아직 찬탈 지망생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진공의 작위와 구석의 예를 받기엔 그 공로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진공의 작위라는건 단순히 공의 작위를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옛 진(晉)나라의 영역을 떼어서 분봉하여 독립된 공국을 세우고 이 공국이 황제의 주위를 제후로서 보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인데, 조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으로 제위를 찬탈하기 위한 첫걸음이나 다름없었어도 명분이 없으면 결국 주변 어그로나 끌다가 우후죽순 토벌 지망생들을 불러모으게 되는 것이다. 후대 북위의 이주씨가 이런 함정에 걸려 멸문지화를 입었는데, 사마소는 조모의 고단수 술수를 간파하여 이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존심을 누르고 훗날을 도모하고자 사마소에게 증조 할아버지 조조가 누렸던 지위를 줘서 사마소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 했던 조모나, 이것을 간파하고 받지 않은 사마소나 모두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조씨가 조위를 세울 때는 한나라 황실의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다는 이른바 '협천자' 논리로서 주변 군벌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한황실의 권위를 세우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그 명분으로 선양을 받는데 끝내 성공했었다.[17] 반면 사마씨는 오히려 위나라 황실의 친위 세력을 철저히 말살했으며, 그나마 공로가 큰 조정의 원로였던 사마의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는 그 권력을 물려만 받았지 큰 공로가 없었으므로 딱히 위 황실을 겁박해 제위를 찬탈할 다른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사마소는 한술 더 떠 아버지 사마의나 적극적인 찬탈자였던 형 사마사만큼의 공적도 세운 바가 없었다. 조조는 천하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한황실을 안정시켰다는 협천자 논리라도 있었지 사마소는 아버지와 형의 권력만 물러받았을 뿐이었고 이전에 동흥 전투에서 자신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원을 화내면서 죽일 정도로 한 게 없었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강유의 촉한 등이 계속 공격해와 옹주가 흔들리고, 제갈탄이 일으킨 수춘의 반 사마씨 반란은 오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무려 2년간이나 활개를 쳤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소가 섣불리 진공을 받기엔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가 행한 건 결국에는 현상 유지였다. 위나라 국내의 각종 반란[18] 진압이나 제갈량, 강유의 북벌 방어에 공을 세웠다지만 그걸로 조위를 국난에서 구했다거나 획기적인 국가 발전을 행했다고 볼 순 없었다. 조조는 어쨌든 동한 말기 막장이었던 사태를 수습하고, 환령(환제와 영제) 이래 동한의 암덩어리였던 환관과 외척 집단 일소를 완성하여 광무제가 육성해놓았던 사인층의 염원을 실현한 바 있었다.[19] 사마의, 사마사가 아무리 대단했다고 해도 결국은 조조가 깔아놓았던 레일을 고쳐놓았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사마소가 그 상황에서 과거 위공 조조의 위상에 걸맞는 자리에 있었다곤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이 반란을 일으킨 동기가 바로 사마씨의 전횡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걸로 전공을 받기엔 문제가 좀 많았다.
게다가 그걸 차치하더라도 사마의의 경우는 본인이 일선 사령관으로 몸소 뛰었다는 당대의 언터쳐블한 공로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위나라에 훨씬 공이 큰 아버지 사마의도 승상, 구석을 거부한 마당에 공이 그것보다는 떨어지는 사마소 자신이 타당한 이유 없이 그보다 높은 상국이 될 수는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 타당성 있다.
그러나 이는 진공의 작위와 구석을 거부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아예 구석을 거절하는 척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망가뜨려버리는 행위기도 했다. 실제로는 사마소 자신이 황제라고 봐야 할 정도로 조정을 농단하고 장악한 주제에 정작 (형식적이지만) 구석과 진공을 받아 위 황실을 보위하라는 명령은 계속 거부하는 행태가 되는 것이다. 처음이야 정중한 양보로 볼 수 있으되 이게 두 번 세 번 네 번 이어지게 되면 조모만 실권 없고 모양새 빠지는 황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조모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었던 건 이해할 만하다.
한편 사마소 입장에서도 조모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사마씨는 일단 조방 자체가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도 모르는 핏줄이었으므로 조방이 반항하자마자 바로 폐위해버리고 적당히 어리숙하고 말 잘듣는 황족을 올린 다음 선양의 명분을 얻을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방에게 선양을 받는다면 조방의 핏줄 문제로 정통성 논란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헌제가 반항을 시도해도 헌제가 영제의 진짜 아들로서 황제위에 올랐고 협천자를 중요한 프레임으로 써먹었기에 참아준 조조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20] 결과적으로 사마소가 조모를 시해한 사건으로 인해 '위나라 황실을 겁박하는 사마씨' 프레임은 더욱 강화되긴 했지만. 하여간 적당한 시기가 되고 사마씨에게 명분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이런 바지사장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게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조모는 그렇게 놔두기엔 무척이나 영민했고 조씨 황가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반항을 시도했다. 오히려 과거 조조가 받았던 특별대우를 조모 쪽에서 먼저 제의했을 때 사마소가 대단히 긴장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마소 입장에선 후일의 조환처럼 그냥 되는대로 말 잘듣는 황제였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가 않았으니 문제였던 것. 이러한 갈등은 조모와 사마소에게 끝내 최악의 결과를 낳고야 만다.
2.4. 사마소의 시군[21][편집]
260년 4월, 조모는 조서를 내려 이전에 내린 명령을 실시하도록 했다. 즉 사마소를 다시 상국으로 임명하며 진공으로 봉하고 구석의 예를 더했으나 《진서》 <문제기>에 따르면 사마소는 이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5월,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모는 갑자기 시중 왕침, 상서 왕경,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사마소의 마음은 행인들도 알고 있소.[22] 짐은 이대로 계속 폐위당할 치욕을 감당할 수 없소. 오늘이야말로 경들과 함께 사마소를 치러 나가겠소.'라며 말했다.
《한진춘추》의 말을 빌자면 '위나라의 권세가 날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그 분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참고 참았던 조모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애당초 구석을 내린다고 하면서 그 수여식에 참석할 사마소를 공격할 작정이었다고도 하는데 용종복야 이소와 황문종관 초백 등을 직접 이끌고 능운대를 내려가 군인들에게 무기를 지급한 뒤, 사마소의 수여식을 기회로 삼아 그를 맞이해 오는 사신을 파견하고 스스로 출병하여 토벌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수여식을 중지했고 다음날 마침내 왕경 등과 만나 사마소 토벌을 결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진서》 <문제기>에선 사마소가 또 다시 진공의 작위를 거부하자 이미 사마소의 3대가 조정을 장악해 왔으며 조모가 자기 명령이 먹히지 않고 사마소가 결국 자신을 폐할 거라는 생각에 마음속이 아주 불안하였으며 폐위되고 모욕당할 것을 염려하여 장차 친히 대전에 임해 백관을 불러 사마소를 파면하고 쫓아내려 하였다고 한다. 이래서 5월 무자일 밤에 용종복야 이소 등을 보내 능운대에서 병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조모는 직접 사마소를 참살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앞서 말한 3명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며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조모는 이들을 믿었기에 자기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지만[23] 한진춘추에 따르면 왕침과 왕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경은 춘추시대 노나라 소공(昭公)[24] 의 예를 들며 홀로 말렸다. 조모는 꿋꿋하게 왕경이 간했으나 듣지 않고 이내 가슴 속에서 판령을 꺼내 땅에 던지며 말하길,
"일은 결정되었소! 죽는다고 해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하물며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거늘."[25]
이라며 강행했고 궁궐로 들어가 양어머니 황태후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병권이 이미 사마씨에게 장악된 상황이라 변변한 군인들을 모을 수 없었고 조모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노복이나 환관들 뿐이었다. 한편 왕침과 왕업은 왕경에게 자기들과 함께 사마소에게 알리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왕경은 거절했다. 이에 둘은 사마소에게 일러바쳤고 계획은 누설되었으며 사마소는 그에 대한 방비를 했다.
한편 조모는 할 수 없이 그나마 모인 소수의 부하 수백 명을 데리고 친히 북을 울리며 사마소를 치러 출병했다. 도중에 둔기교위 사마주를 만나자 고함을 질러 물리치고 운룡문과 지거문을 나섰다. 그러나 동화문 앞에서 사마소가 보낸 가충이 지휘하는 정예 병력에 가로막히고 겁먹은 병졸들이 흩어지자 스스로 검을 빼들고 싸웠다. 진서 문제기에 따르면 조모는 수하들을 이끌고 상부(相府)를 공격하면서 반적이 있어 토벌하는 것이니 감히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일족을 주살하겠다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조모가 검을 휘두르자 장병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이 때 가충의 부하였던 성제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가충이 '사마공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뭘 망설이는가?'라며 다그치자 장병들은 그제서야 조모를 공격했다. 조모가 무엄하다고 고함을 지를 때 성제가 갑자기 조모를 향해 달려들어서 창으로 조모를 찌르더니 칼로 등을 꿰뚫었다. 결국 조모는 연(輦)에서 떨어져 죽었고 가마는 피바다가 되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그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하늘이 어두워졌고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가 이 소식(조모 시해)을 듣고 크게 놀라서 스스로 땅에 떨어지듯 넘어지며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2.4.1. 역사 왜곡[편집]
정사 삼국지에는 별도의 본기가 없이 조방, 조환과 묶여 "삼소제기(三少帝紀)"란 한 세트로 처리되어 있다. 이상한 점은 조모가 260년 4월에 사마소를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으로 봉하고 구석의 예를 더한지 1달 후인 5월 7일 갑자기 항년 20세로 사망했다고만 나오며[26] 조모 사후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곽태후가 내린 '조모가 미쳐서 나를 죽이려 했는데 사마대장군이 막아주었다.'라는 식의 조서가 첨부되어 있다. 사실 조모가 사마소를 참살하려는 시도부터 성제의 조모 시해까지의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사마소의 잘못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조모의 잘못만 날조, 과장한 전형적인 역사 왜곡이다. 그러나 태후의 조서 자체는 왜곡이 아니라 실제로 내린 게 맞는데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해보면 곽태후가 사마소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7일 고귀향공이 세상을 떠났고, 향년 20세였다.
황태후 곽씨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덕이 없어 가정의 불행을 만났다. 이전에 동해왕의 아들 조모를 옹립하여 명제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그가 글을 좋아하고 신하들의 주장을 헤아렸으므로 이 중임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인데, 성정이 거칠고 그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나는 여러 번 질책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마음속에 원망하는 생각을 담고, 악역무도한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 나를 비방하여 마침내 두 궁전(황제와 황태후의 궁전)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가 하는 말은 참고 들을 수 없었는데, 하늘과 땅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은밀히 조령을 보내 대장군에게 종묘를 받들 수 없으니 사직을 전복시킬까봐 두렵고, 죽어서 선제들을 뵐 면목이 없음을 말했다. 대장군은 그가 아직 나이 어리니 마음을 고쳐 착한 쪽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반항하고 나섰으며 행동은 더욱 지나쳤고, 일찍이 활을 들어 나의 궁정으로 쏴서 나의 머리에 꽂히기를 빌었지만, 화살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대장군에게 조모를 내쫓을 수밖에 없음을 수십 차례 말했다.
이 아들은 그 사이의 일을 상세히 듣고 자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을 꾀하였다. 나의 측근에 있는 자들을 매수하여 내가 복용하는 약에 몰래 틈을 타서 독약을 넣으려고 몇 차례나 계획했었다. 이 일이 드러나자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병사들을 직접 인솔하여 서궁(황태후 궁전)으로 쳐들어와 나를 죽이고, 밖으로 나가 대장군을 해치려고 했다. 그는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 상서 왕경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고 오늘 이 일을 시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계란을 쌓아 올리는 것보다도 더 큰 위험에 빠졌었다. 나는 나이 많은 미망인인데 어찌 또 남은 목숨을 안타까워 했겠는가?
단지 선제가 남긴 뜻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며, 사직이 곧 전복되려 하는 것만이 비통했을 뿐이다. 종묘 신령의 도움으로 왕침, 왕업이 즉시 대장군에게 달려가 보고하여 먼저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이 아이는 곧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운룡문을 뚫고 나와 전쟁용 북을 천둥같이 울리며 직접 칼을 뽑아들고 측근에 있는 자들과 함께 병사들이 진을 친 사이로 들어오다가 선봉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아이는 도리에 어긋난 반역행위를 하고, 또 자기 스스로 커다란 화(죽음) 속에 빠졌으니, 슬픈 나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옛날 한 창읍왕은 죄를 짓고 쫓겨나 평민이 되었으니,[27]
이 아이도 평민의 예식으로 매장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고, 조정의 내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 아이의 행위를 알도록 하라.또 상서 왕경은 흉악무도한 사람이니, 그와 그의 일족을 체포하여 모두 정위로 보내라."
진수도 사마씨 치하에서 진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겠지만, 조서의 내용을 본문으로 옮겨줘서 매끄럽게 사마씨의 폭거를 윤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도리어 조서 뒤에 매우 위화감 넘치는 기록을 남겨서 후세의 독자들이 진상을 짐작하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배송지의 주석에는 《한진춘추》 등에서 인용된 이 사건의 전황이 상술한 대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진서》 〈문제기〉에는 가충의 부추김을 받은 성제가 조모를 직접 시해하였다는 내용이 있어서 결론적으로 사마소를 제압하려다가 시해당했다는 게 맞다.
삼소제 중에서 진수가 그나마 좋게 평가해 준 건 조환 뿐이지만 단지 그뿐이다. 막상 내용을 보면 고귀향공기가 당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 가장 많다. 그것도 긍정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사마씨한테 대들지 않아서[28] 잘 먹고 잘 살았다가 칭찬인 건지도 의문.
조모의 죽음을 卒로 표기한 건 이상사태를 진수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는 해석이 있지만 반대로 卒이라고 표기한 건 조모가 이미 황제지위에서 박탈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했을 뿐 사마씨 눈치본 게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확실한 건 삼국지집해에서도 卒이라는 표기에 왈가왈부 말이 많은 거 보면 조모의 죽음을 卒이라고 쓴 건 비정상적인 표현이 맞는 거 같다. 그러니까 진수가 일부러 그랬다는 거. 참고로 진서는 조모의 죽음을 崩이라고 표기한다. 그 때는 사마씨가 유씨에게 똑같은 일을 당한 지 한참 지난 후라서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29]
왕조시대에서는 군주가 무도한 신하를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신하가 황제를 시해했으므로 사마소는 역적이다.[30]
2.5. 사후[편집]
시해 다음날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소,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상소를 올려[31] 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조모는 낙양 서북쪽 30리에 있는 낙수(落水)의 지류에 안장되었는데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깃발도 없었다. 이에 백성들은 울면서 "이 분은 전에 시해당한 천자이시다."라면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사마소는 조모를 직접 시해한 성쉬와 성제 형제를 처형했다. 사마소는 여기에서도 "나는 황태후를 보호하고 고귀향공에게 죽을 각오로 천자의 몸에 손 대지 말라고 했는데 성제 이 흉악무도한 역적이 제멋대로 천자를 시해한 것이다!"라고 변명을 했으나 애당초 가충의 발언이 있는데 이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32] 태부 사마부와 상서복사 진태는 조모의 시신을 무릎에 눕히고 곡을 했는데, 사마소가 진태에게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물으니 진태는 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사마소는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절충안을 물었으나, 진태는 타협을 거부했다.[33][34]
사마소에게 밀고한 왕침과 왕업은 열후에 임명되었으며 왕침은 나중에《위서》[35] 를 만들었고 왕업은 훗날 서진의 중호군이 되었다. 충신 왕경은 오히려 조모를 부추긴 죄로 체포되어[36]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왕경이 모친에게 사죄했으나, 모친은 오히려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서진이 들어서자 무제 사마염이 왕경의 손자를 발탁한 것은 아이러니.
이후 사마소는 조조의 손자이자 조우의 아들로 조모의 숙부뻘에 해당하는 조환을 옹립했다. 조모는 시호도 받지 못하고 폐제로 취급되었으며, 역사에서도 폐제 혹은 등극 전 작위인 고귀향공으로 불린다.
조모의 죽음은 사마씨에게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사마씨 정권이었는데 천자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참살당했다는 경악스러운 사태에 정권의 이미지나 도덕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망탁조의도 재위중인 황제를 백주대낮에 참살하지는 않았다.[37] 설령 황제를 죽이더라도 폐위하고 나서 정식 절차, 즉 황태후 혹은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라는 제대로 된 형태를 빌려서 죽이는 것과 폐위도 안 시키고 그냥 죽여버리는 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절차를 밟고 나면 더 이상 군신 간이 아니니 죄인을 처형하는 형태가 되지만, 절차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허울 뿐이라고 해도 조모는 천명을 받아 신하 사마소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간 세계 만물의 지배자인 것이다. 요즘 같아도 지도자가 마른 하늘에 암살당한다면 사회적 파란이 대단할 일인데,[38] 황제를 죽인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왕이나 황제는 하늘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아 백성들을 보살피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질서의 최고 집행자였다. 그런데 그런 천자가 제위에서 물러나거나 폭정으로 천명을 잃은 것도 아닌데 감히 천명을 거스르고, 천자를, 그것도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똑똑히 보고 있는 도성 한복판에서 시해한다는 것은 곧 하늘과 사회 질서 전체를 개무시하겠다고 대놓고 천명하는 사건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천자 시해를 저지른 대역죄인에게 우선적으로 칼날이 들이밀어지고 천자의 시해를 시작으로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가 사회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번져나갈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되면 유교적 천명으로부터 비롯된 질서에 의존해 명령을 내리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 결국 백성들에게도 훨씬 더 큰 피해가 야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경계받는 행위인 것이며, 실제로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 세운 서진은 이후 천자의 권위가 개차반으로 떨어지면서 나라가 불안정해져 그로 인해 붕괴되었다. 이게 무려 사마염이 오나라까지 멸망시켜 후한의 멸망 이래 수십년간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했는데도 이 정도다.
물론 조모 이전의 중국 역사에서도 재위 중에 자기 신하에게 시해당한 황제가 없지는 않았다. 이세황제는 자기를 옹립해준 환관 조고에게 시해당했고, 의제도 자기를 옹립해준 서초패왕 항적에게 시해당했다.[39] 조고와 항적 둘 다 망탁조의조차도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대역죄인으로 역사에 남아 비참하게 죽게 된다.[40] 그런 놈들이나 하는 짓을 사마소 일당이, 그것도 천하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질렀으니 중국 대륙에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알 만하다. 후대에 중국사 최악의 역적 중 하나로 취급받는 주전충이나 원세개도 각각 당애종과 광서제를 독살로 몰래 죽였지 냅다 쳐죽이진 않았으니 사마소의 시군은 가히 중국사를 살펴봐도 전무후무한 사례였던 것이다.
조모 사후 결코 위나라의 충신이라고 볼 수 없는 사마씨의 원로 사마부가 조모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쇼를 한 다음, 그 다음날엔 "조모는 사악한 자이며 평민의 예로 장사 지내도 시원치 않다."고 폄하하는 앞뒤 안맞는 모습을 보이거나 사마씨 정권이 곽태후를 협박해 썼을 조서에서는 "조모가 황태후를 해치는 미친 짓을 하고 반역하여 선봉대가 처단했다. 옛 한나라 창읍왕처럼 평민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하면서도 정작 성제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죽일 때는 황제를 시해한 흉악무도한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조모를 죽인 것을 황제 시해라고 단정하고 책임을 죄다 그에게 떠넘겨 죽이는 모순되는 장면도 보였다. 이는 당시 이 사태에서 사마씨 정권이 얼마나 당혹감과 혼란,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조모가 사마소에게 시해당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고, 그 전까지 사마씨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진태와 같은 이마저 사마씨에게 저항하게 만들었음에도, 사마씨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회피하고 거부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사마씨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 지는 불 보듯 뻔하다.
결국 단순히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는 명분으로만 사마씨가 새 나라를 세우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개국에 있어서 사마씨가 그나마 천하에 내세울 만한 위업으로 여겨질만 한 공이 절실해졌다. 그것이 바로 이후에 벌어진 촉한 정벌이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후한이 위나라에 선양한 것이 조씨의 찬역이라며 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었고 자신들이 진정한 정통임을 자부한 세력인만큼, 이데올로기 적 측면에서 조씨가 꺾지 못한 촉한을 실질적으로 사마씨가 정벌하여 진짜 천명을 받은 정통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것은 사마소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명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신하들이 반대할까봐 오로지 자기 뜻에 동의하는 종회와 함께 몰래 계획을 세우고 그걸 공표한 이후에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했으며 이에 이의를 가하는 자는 바로 죽여 본보기로 삼기까지 했으니, 당시 사마소가 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종회의 난 이후 촉한 정벌의 실질적인 최고 공로자인 등애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 알았음에도 역적으로 몰아 일족을 주살한 것도 그런 연유였을 것이다. 촉한 정벌의 공은 오로지 그걸 주도한 최고 권력자 사마소만의 공이어야만 했을 테니까.[41] 실제로 사마소는 촉한 정벌 도중 승전보가 들려오자 그동안 고사하던 진공을 받았고, 진공이 된 지 1년도 안 되어 촉한 정벌이 끝나자마자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진왕에 오르는 데 성공하면서 아들 사마염을 태자로 세웠고, 결국 아들의 대에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여담으로 중국에선《한진춘추》에 나오는 사마소가 조모 시해 후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한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기서 천하 사람이란 백성이 아니라 대귀족들이다. 사마씨도 귀족 세력이고 귀족들의 지지로 올라갔는데 황제를 살해한 일을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확신을 못하겠다."는 뜻이다. 이 해석이 정말로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대 중국인들이 사마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딱히 사마씨만 특이한 게 아니라 이게 전근대의 일반적인 사고관이다. 심지어 고대 아테네나 로마 공화국처럼 전제 군주제가 아닌 민주정, 공화정 체제에서조차도 아테네 시민권자, 원로원 계급 같은 기득권 층과의 합의 없이 정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매우 난망한 일이었다.[42] 다만 이 사마소의 반응에 대해 중국인들이 "대귀족, 귀족 세력의 눈치를 봤다."고 굳이 말하는 것은 한나라에서 위진남북조시대로 넘어가면서 기득권 계층의 성격이 변화한 것에서 기인한다. 한나라 말기까지 최고 권력층이 눈치를 보는 계층은 향거리선제로 중앙에 진출한 호족들과 그를 뒷받침하는 지방의 향촌 세력이었다. 이러던 것이 위나라가 들어서며 향거리선제가 폐지되고 구품관인법이 시행되자 기득권 계층은 지방의 호족 세력에서 중앙의 문벌귀족으로 변화했으며 사마씨는 주대중정을 설치하는 등 구품관인법을 통해 기득권층의 문벌귀족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 황권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 가문이었다. 즉, 사마소가 귀족들의 눈치를 본 것이라 해석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후대의 중국인들이 사마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조위정통론의 몰락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되는데 동진 시대에 이르자 무장 출신 권신이 발호하게 되자 찬탈로 건국한 조위정통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조위나 서진이나 전부 찬탈로 건국했고 조씨의 탈법성이나 사마씨의 탈법성이나 그놈이 그놈이었기에 조위정통론을 긍정하면 동진 역시도 찬탈로 망하는 게 당연시되었고 때문에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을 끄집어내어 찬탈에 의한 명분을 부정하고 조위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조씨나 사마씨나 선양이라는 형식을 빌린 만큼 선양을 강조하였다면 사마씨가 선양이라도 해주지 않는 이상 환온이 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저 선양 과정에서 조씨는 황후를 죽이고 사마씨는 황제를 죽이는 막장 행보를 보인 탓에 도저히 선양의 명분을 살릴 수가 없었다. 선양을 옹호했다가는 환온이 너들도 했는데 나는 왜 못하냐며 사마씨를 향해 온갖 겁박을 하여 강제로 선양하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2.6. 평가[편집]
비록 사마씨에 의해 꼭두각시로 전락하긴 했지만 와중에도 헌제처럼 사마씨와 사마소에게 저항하고, 나름대로 반격을 시도하거나 아예 목숨을 걸고 직접 황권을 되찾기 위해 칼을 빼드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일찍 이루었다거나 조식과 닮았다는 평을 받았고 박사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들이 데꿀멍하게 만드는 등 꽤 능력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에 고평릉 사변이라는 악재 없이 정상적으로 황위를 물려받았다면 정말 위나라를 재건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면에선 자신의 조상이 멸망시켰던 후한의 황제 헌제하고도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나름대로 능력이 있고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으며 언제든 정신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답이 없는 환경에서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을 꼭두각시로 만든 상대에게 저항하고 황권을 되찾으려고 한 것이 비슷하다.[43] 그나마 헌제는 주변인들은 죄다 죽었어도 본인만은 살아남았지만 조모는 본인까지 죽고 말았다.
중국에선 꼭두각시 황제가 자기 목숨을 버리고 거사를 일으켰다 죽었다는 점이 인상이 깊어서 구차하게 살 바엔 고귀하게 죽음을 택한 영웅이라며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다고 조모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발악을 했다고 하긴 힘들다. 물론 조모가 목숨을 걸 정도의 큰 각오로 일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조모 자신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조모는 "사마소가 자신을 죽이면 사마소 자신에게도 (명분 때문에) 큰 손해가 된다."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모의 성격이 급하다는 기록 때문에 다소 성급하게 일을 저질렀다가 실패했다고 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좀 애매하다. 물론 성공 가능성이 없는데도 다소 무모하게 저지른 것은 맞지만, 사실 조모 입장에선 대책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기회가 올 가능성도 별로 보이진 않았다. 조모가 뭔가 좀 해보려고 했던 시기에 이미 조위의 친위세력은 개박살이 났으며 황권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앞으로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든 안 하든 사마씨가 나라를 조금씩 침식해가고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망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였고, 그렇기에 앉아서 기다릴 바에는 스스로의 말처럼 뭐라도 해서 나라를 복원하든 상대방에게 큰 타격이라도 입히겠다는 계산은 매우 옳았다.[44] 딱 한 세대만 일찍 태어나서 조방이랑 순서만 바뀌었어도 고평릉 사변 때나 강유 침공 때[45]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참 시기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46]
그래서인지 영조는 헌제와 다르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운 조모가 더 뛰어난 황제라며 높게 평가했고 조조가 참외를 먹다가 참외를 제대로 안가져왔다며 하인을 함부로 일화가 적힌 청성잡기에서도 조모는 왕의 자질을 갖췄으나 불운하게도 역도를 만나 억울하게 죽었다며 고평가를 했다.
3. 여담[편집]
훗날 동진의 2대 황제 사마소(司馬紹)[47] 가 승상 왕도와 국사를 논하다 "사마씨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소?"라고 물었다. 이에 왕도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학살한 이야기, 사마의가 조상을 토벌할 때 남녀노소 모두 멸족한 이야기, 그리고 사마소가 조모를 죽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에 명제는 "만약 경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게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라며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책상에 묻고 탄식했다. 즉, 사마소의 조모 시해는 후손조차 부끄럽게 여길 천하의 역적 짓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동진의 사마씨들은 명제의 그 말대로 유송의 유유가 찬탈을 할 때 모조리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남북조 이후의 중국 역사에서는 새 왕조가 개창할 때 이전 왕조의 왕족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는 송 태조 조광윤의 후주 황족이었던 시씨 일가 우대로 잠시 끊어지게 되나, 다시 청나라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돠면서 그 악업의 고리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동 시대에 오나라의 3대 황제 손휴는 같은 황족 출신으로 손침, 손준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더욱 더 막장 행각을 펼쳤고 손휴는 손량을 폐위한 손침과 그 일파들이 두려워 계속 상을 주었으나 속으로는 손침과 그 일파들을 쳐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당도해 손침이 역모를 꾀한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12월 8일 손휴는 좌장군 장포, 정봉 등과 모의해 손침을 척살하고 그 일족을 멸했다. 패악질을 해대던 손준과 손침이 황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하여 황실 족보에서 삭제하고 손씨 성을 없애고 고(故)씨로 바꾸고 고준, 고침으로 부르게 했다.
고려 희종도 비슷한 일을 벌였지만 역시나 실패하고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하고 유배만 보냈다.[48]
고려 우왕도 조모와 비슷한 방법으로 권신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성계는 사마소와는 다른 방법으로 우왕을 처리했는데 일단 우왕이 자기 집을 습격할 때 집을 비워서 우왕을 허탕치게 한 다음에 우왕을 폐위부터 한다. 그리고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까지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우왕·창왕 부자를 처형했고 공양왕으로부터 왕좌를 찬탈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고려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이성계조차도 차마 재위중인 왕을 시해하지는 못하고 일단 폐위한 다음에 죽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뒤처리 과정은 사마씨보다도 더욱 악랄하고 잔인한데, 사마씨는 그래도 촉한을 멸하고 조위에게서 나라를 빼앗은 다음에는 유씨나 조씨를 학살하는 짓은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예우해줬으나, 전주 이씨는 왕씨로부터 나라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왕씨를 대량학살하여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이성계의 인성질이 아니라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제대로 선양을 받지 못하여 생긴 정통성의 문제였다. 자세한 건 왕씨 몰살 참조.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사마소 이상으로 잔인한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49]
조모의 황후는 폐후 변씨로 무선황후의 일족이다.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훗날 당현종 때 활동한 화가 조패(曹霸)[50] 가 조모의 후손이다. 당나라 때 기록과 북송 때 기록으로 교차검증되는 사실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거의 비슷하지만 즉위할 때 사마사에게 절을 했다. 또 일부러 사마소와 가충이 조모를 도발한 것으로 나온다.
세계 역사에서도 군주나 최고 권력자가 살해당하는 경우는 숱하게 있어왔지만 조모처럼 재위중인 군주가 대놓고 죽임을 당한 케이스는 손에 꼽을 수준인데 문제는 이렇게 대놓고 백주대낮에 혹은 명분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 군주나 최고 권력자를 죽여버린 사람들의 말로가 아주 비참했다는 것. 조모와 비슷한 시해 케이스로는 자기가 옹립한 이세황제를 신나게 이용해먹고 자기 부하들을 궁궐로 쳐들어가게 해서 이세황제를 시해한 조고, 자기가 옹립한 초의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부하들을 보내 죽인 서초패왕 항적, 고려의 18대 왕이었던 의종을 직접 자기 손으로 허리와 목을 부서뜨려 죽인 이의민[51] , 일본 센고쿠 시대의 효웅이자 천하통일을 앞두고 있던 패자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습격해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52] , 고대 로마의 역대급 독재자로서 황제는 아니었으나 사실상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놓고 패거리를 이끌고 도륙내버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전한 말기의 실권자였으며 자신을 막을 자가 없자 황제를 대놓고 죽여버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 이라크 왕국에서 백주에 파이살 2세를 죽여버린 압둘 카림 카셈 등의 사례가 있다. 이 다섯의 공통점은 말로가 하나같이 당대의 역적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최후까지 비참하고 허망했다는 것. 특히 왕망은 자기 자신이 대놓고 백주대로에서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무참히 토막내지고 혀까지 잘려죽어서 본인 역시 대놓고 살해당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가충은 저들처럼 제명에 못죽진 않고 천수를 누렸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이 황제를 대놓고 조진 만고의 역적으로 기록될까 죽는 순간까지 걱정하며 조카에게조차 디스를 당했다. 이 시해 사례들에서 하나같이 결말이 안 좋았던 건 최고 권력자가 명백히 살아있음에도 무턱대고 죽인 것도 있지만 그 과정까지의 빌드업 즉 명분을 제대로 만들지도 않은 채로 덮어놓고 죽이는 바람에 본인 자신도 전혀 명분이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여기서 왕망이 대놓고 살해당한 게 제외되는 건 본인 자신이 명분도 없이 왕을 죽이고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만든 것과 집권기에 토탈 패키지 수준의 엄청난 삽질과 최악의 통치로 인해[53] 스스로 살해당하고도 남을 명분을 만들어버린 탓이다.
4. 미디어 믹스[편집]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상징색은 파란색이다.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명색이 황제였던만큼 삼국지 시리즈에도 꾸준히 등장하지만 대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일러스트는 삼국지 9부터 칼을 들고 있고 있다.
삼국지 6 파워업키트 전술시뮬레이션 사마씨편 수춘포위전에서 제갈탄을 토벌하는 총대장으로 등장한다.병력이 절대 열세라 사마소가 원군으로 도착할 때까지 적군이 없는 측면 성문으로 우회하여 성문을 부수면서 원군이 오면 정무청 점거를 목표로 하면 오나라 원군이 오기 전에 깰 수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69/지력 56/정치력 76으로 내정이나 해야 하는 수준이다. 분투,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긴 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7/무력 43/지력 59/정치력 72/매력 76 으로 그냥그런 문관쪽이지만 특기라고 준 게 치안, 간첩 딱 2개로 능력치를 전혀 살릴 수 없는 특기를 줬다. 거기다가 무력이 전작에 비해 20이 넘게 대폭 하락했다.
삼국지 11 열전에는 분명 "조식의 지혜와 조조의 무예를 겸비했다"고 나왔는데 능력치는 어째 신통치가 않다.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61/지력 59/정치력 75/매력 80. 특기는 노발이다. 친애 무장은 증조 할아버지인 조조다. 전작과 달리 무력이 18 상승했다.
삼국지 12에서는 PK에서 추가되었다. 일러스트는 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스스로 칼을 뽑고 있다.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61/지력 59/정치력 75, 전법은 기군신속이다. 특기는 명사, 병심, 변설, 신속.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특기는 문화 3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문화이며 전법은 창병속공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4, 무력 61, 지력 59, 정치 75, 매력 76이며 개성은 문화, 격분, 주의는 패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3, 진형은 어린, 봉시, 전법은 대갈, 업화, 고무, 친애무장은 배수, 사마망, 왕경, 왕침, 조식, 조조, 종회, 혐오무장은 사마소다.
4.2. 영걸전 시리즈[편집]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문앙전에서 적으로 등장. 외형은 헌제 스킨에서 색상만 금색으로 바꾼 것이다. 은근히 특성이 좋다.
4.3.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진삼국무쌍6에서는 오리지널 보이스와 모델링이 존재하지만 NPC로만 등장하고 플레이어블은 아니다. 때문에 플레이어블 무장도 아니고 클론 무장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케이스. 면류관을 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완전 고유 룩은 아니고 5편의 헌제를 적당히 바꿔서 쓴 듯하다. 또한 헌제와 함께 모델링이 있음에도 엠파이어스에선 전혀 쓸 수 없는 무장 중 하나. 성우는 사마의와 같은 타키시타 츠요시.짐은 앉아서 죽음을 맞지 않겠노라. 사마소를 치고, 위를 되찾겠다!
이 나라가 세워진지 불과 사십 년… 짐의 대에 멸망할 것 같으냐! - 진삼국무쌍6, 황제봉기전
후속작인 진삼국무쌍7에선 제갈탄의 반란을 사주한다던지 하는 음모를 꾸미거나 진심과 충심을 보이려는 사마소에게 열폭하며 죽이려는 찌질이처럼 묘사되고, 최후에는 얼이 빠져서 엉금엉금 기어가려다 가충에게 살해당한다. 특히 역사상으로 자신의 재능을 칭송한 종회에게 게임에선 "무능한 바보놈"이라는 뉘앙스로 까인다. 전체적으로 사마소를 띄워주기 위해 상당한 너프를 당했다는 평가. 사실 조모는 절대 무능하지도 않았고 충심 운운하는 것도 웃긴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씨일족인 조상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삼족을 멸족 시킨 아버지 그리고 황제까지 폐위시킨 형 그리고 뒤에서 더러운 계책을 꾸미는 가충을 전혀 말리지도 않고 고평릉 사변에도 참가 하는등 사마의나 사마사와 전혀 다를바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조모가 사마소를 믿을만한 이유 자체가 없다고 봐야 옳다. IF 루트에서는 음모를 꾸미지는 않지만 반란을 일으킨 종회에게 붙잡혔다가 반란이 진압된 후 사마사에 의해 폐위당하는데 폐위만 되었을 뿐, 죽지는 않은게 다행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차라리 사마씨에게 죽는것 보다 더 비참한 최후 일지도 모른다.성우는 전작과 달리 육손과 같은 노지마 켄지.사마씨의 전횡,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 짐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징벌하고자 한다! 위의 열사들이여! 짐과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닥쳐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위를 넘기라니, 짐은 절대 못 한다! - 진삼국무쌍7, 황제봉기전
그 후, 최후반기 인물임에도 진삼국무쌍 BLAST에 등장. 클론 무장들이 넘쳐나는 진나라 스토리를 보강하기 위해 추가된 듯 한데, 사실 황제봉기 시나리오를 빼면 조모가 나설 곳은 딱히 없는지라 참전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조모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시나리오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역시 아직은 모를 일. 일러스트를 보면 조조가 쓰는 장검을 쥐고 있는데 이는 조모의 재능이 조조의 환생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듯 하다. 아니면, 최후에 직접 검을 들고 사마소를 토벌하러 나서서 쥐어줬거나. 다만 인게임 모션은 쌍인검으로 그 조조의 아들이자 조모의 할아버지인 조비 모션을 들고 왔다.(...)
4.4. 삼국전투기[편집]
그라함 에이커로 패러디되었다. 처음 등장한 낙가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서는 능력은 있었지만 주제파악은 잘 못 했던 비운의 황제로 서술되어 있다.
낙가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조방을 폐출시킨 사마사가 태후의 추천을 받아들여 추대한 후임 황제로 언급되었다. 조모 본인은 처녀자리인 자신으로서는 감성적인 운명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54]
수춘2 전투 편에서는 사마사가 죽었을 당시 부하에게 사마사의 군을 끌고 오게 하고 사마소에게는 허창 수비를 명했지만 사마소가 무시하고 군을 끌고 낙양에 입성하면서 파워게임에서 제압당했다. 이후 제갈탄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조모도 사마소와 함께 수춘으로 출진했다.[55]
이후 조모는 항성에서 대기했으며, 오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수춘을 포위한 진건과 왕기가 역으로 위기에 빠지자 조모 본인은 자신이 병법을 좀 읽었다며 왕기에게 포위를 풀고 북산으로 올라가 진영을 짜라고 권했지만 왕기는 전장에서는 군령을 받지 않는 법이라며 가볍게 무시했다.
전투외편 6편에서는 제갈탄 난 진압 이후 공로자들에게 관직을 수여하였다. 가충은 정위에, 종회는 사예교위에 임명했으며[56] 사마소에게도 상국의 직위를 부여하려 했지만 사마소가 9번이나 거절하면서 무산됐다. 작중에서는 이를 두고 원래 사이가 좋지 않던 둘의 감정 싸움이 극에 달했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전투외편 7편에서 기어이 사마소를 치기로 결정하고[57] 심복들을 불러모아 사마소를 토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왕경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반대했지만 조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조모의 계획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왕업과 왕침이 사마소에게 돌아섰고, 그 사실을 왕경에게 전해들은 조모는 이렇게 된 이상 바로 쳐들어가겠다고 말하며 직접 수하를 이끌고 사마소의 처소로 향했다. 썩어도 일국의 황제였기에 감히 일개 신하나 병졸들이 막을 수가 없었지만 가충의 명을 받은 성제가 조모를 직접 시해하며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친위 쿠데타 하기 전에 그라함의 유언를 패러디하고 친위 쿠데타 때에는 당연히 미스터 무사도의 가면을 쓰고 사마소를 치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다만 작중에서 태부 사마부는 조모 시해 사건에서 상술한 모순적인 모습은 등장하지 않고, 진정한 위의 충신으로 그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