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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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페라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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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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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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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
16대


조반니 페라리의 수상 이력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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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반니 페라리
Giovanni Ferrari
출생
1907년 12월 6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1]
사망
1982년 12월 2일 (향년 74세)
이탈리아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신체
172cmㅣ체중 75kg
직업
축구선수(공격수[2]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23~1925)
FBC 인터나폴리 (1925~1926)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26~1930)
유벤투스 FC (1930~1935)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35~1940)
볼로냐 FC 1909 (1940~1941)
유벤투스 FC (1941~1942)
감독
유벤투스 FC (1941~1942 / 선수 겸 감독)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42~1943)
브레시아 칼초 (1945)
뇌샤텔 크사막스 FCS (1947~1948)
AC 프라토 (1948~1950)
칼초 파도바 (1951)
이탈리아 대표팀 (1958~1959)
이탈리아 대표팀 (1960~1962)
국가대표
44경기 14골 (이탈리아 / 1930~1938)

1. 개요
2. 평가
3. 생애
3.1. 초기 선수생활
3.5. 감독 생활
3.5.2. 전후 시절
3.5.3. 국가대표 감독 그리고 그 이후
4. 플레이 스타일
5. 수상
5.1. 대회 기록
5.2. 감독
5.3. 개인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전 축구인.


2. 평가[편집]


주세페 메아차에 가려졌지만 그보다 더 성공적인 팀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바로 조반니 페라리이다. 하지만 그는 역대급 공격수라면 갖고 있는 그 흔한 득점왕 기록조차 없어서 메아차 등 당대 최고의 공격수들보다는 살짝 떨어지는 이미지이다. 다만 공격수로 한정짓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멀티 플레이어적 능력이 있어 이런 선수들이 주목받는 현대 축구였다면 평가가 더 좋을 수 있는 선수.

페라리의 팀 커리어는 실로 대단한데 그는 주세페 푸리노[3]와 더불어 세리에 A 출범 후 유이한 8회 우승 기록을 가진 선수이다.[4] 푸리노와 다르게[5] 페라리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역대의 모든 축구 선수를 통틀어서 단 20명밖에 없는 월드컵 2회 우승 기록 보유자 중 한 명이다. 게다가 페라리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각각 월드컵에 출전한 2명의 축구인 중 한명이다.[6] 이보다 팀 커리어에서 동급 또는 더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전체 축구사를 통틀어 펠레지투, 지우마르 정도[7]의 남미 선수밖에 없고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8]


3. 생애[편집]



3.1. 초기 선수생활[편집]


알레산드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페라리는 축구에 대한 실력과 열정으로 곧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고향 알레산드리아에서 유명해졌다. 16살에 친구 주세페 라페티, 에도아르도 아벨레, 친치오 스칼리오티와 함께 고향팀 알레산드리아에 들어간 페라리는 2년간 기회를 잘 못 잡게 되자 인터나폴리로 잠시 이적했고 거기에서 그는 15경기에 출전하여 16골을 때려넣고 왔다.[9] 하지만 여기에서 페라리는 신체적으로는 발전을, 정신적으로는 자신감을 얻어왔고 알레산드리아에서 2경기 1골 정도를 넣는 골퍼레이드를 선보였다. 특히 1928년에는 22골을 넣었는데 알레산드리아는 3위를 기록하였고, 이 활약으로 그는 유벤투스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3.2. 유벤투스 FC암브로지아나 인테르[편집]


유벤투스는 당시 한참 이탈리아의 맹주로 떠오르기 위해 몸집을 불리고 있던 팀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라이문도 오르시루이스 몬티, 이탈리아에서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등을 데려와 팀을 강화시켰으며 여기에 조반니 페라리까지 22,000리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페라리를 데려오자마자 유벤투스는 전설적인 5연패의 기록을 써나갔고 페라리는 팀의 엔진으로서, 그러면서 아웃사이드 포워드들-특히 오르시를 보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유벤투스 회장이었던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벤투스는 긴축정책을 펴나갔고 페라리는 그 대상이 되었다. 결국 암브로지아 -인테르로 팀을 옮긴 페라리는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하게 되었다. 득점력은 유벤투스 시절보다 떨어졌지만 국가대표 듀오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여기에서 페라리는 2번의 우승을 추가하였다. 하지만 193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페라리는 클럽 출전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잉글랜드아스날이 페라리에게 이적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페라리가 거절하기도 했다. 1939-40 시즌 즈음엔 8회 출전에 그치며 아예 리저브 팀으로 떨어질 정도로 기량이 하락하였다.


3.3. 볼로냐[편집]


1940년에 인테르에서 볼로냐로 옮긴 페라리는 한 시즌을 볼로냐에서 보내면서 8번째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유벤투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영광의 선수 생활을 접었다.


3.4. 국가대표팀[편집]


세리에 A에서 좋은 라이벌이었던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페라리는 이탈리아에서 전설적인 인사이드-포워드 듀오를 구축했고 이는 유럽 최강팀으로 발돋움하는 힘이 되었다. 페라리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나섰고 8강전이었던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는 활약을 했다.[10] 그리고 다음 월드컵에서도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메아차와 함께 지능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이탈리아의 2연패를 이끌었고 같은 해 12월 4일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3.5. 감독 생활[편집]



3.5.1. 유벤투스 FC암브로지아나 인테르[편집]


6년 만에 돌아온 유벤투스. 페라리는 팀의 개편을 천명하면서 펠리체 보렐 등 일부 선수들을 보냈지만, 감독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루이스 몬티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유벤투스에서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한 것이 페라리의 감독 생활 중 얻은 유일한 메이저 트로피이다.

이듬해에는 암브로지아나 인테르의 감독을 지냈는데, 리그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내며 포차니 회장이 사임하는 내홍을 겪기도 했다. 그럭저럭 상위권에는 머물렀지만 마지막 베네치아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이 열의를 갖고 뛰지 않았고, 페라리는 자기 팀 선수인 우발도 파살라카를 헌신이 부족하다며 경기에서 퇴장시켜버렸다. 연방 통제위원회는 이 행동이 베네치아에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페라리에게 벌금을 부과하였다.


3.5.2. 전후 시절[편집]


1944년, 2차 대전으로 인한 리그의 중단 과정에서 페라리는 파비아의 감독 제의를 수락했다. 1944-45 롬바르도 베네피코 토너먼트에서 파비아를 3위로 이끌었으며. 브레시아에서도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47-48 시즌에는 나티오날리가 A로 무대를 옮겨 뉴샤텔을 이끌었으며, 곧 세리에 C의 프라토로 돌아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업적으로 세리에 A에 다시 복귀하여 파도바의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물러나고 말았다.

그 이후에는 알레산드리아나 인테르 밀란에서 유스팀의 감독으로 시간을 보냈다.


3.5.3. 국가대표 감독 그리고 그 이후[편집]


이런 식으로 감독 생활에서 큰 성과는 없지만 1962년 월드컵에서 파올로 마차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을 지휘했었던 경력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수비적인 전술을 지향했던 파올로 마차와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으며 선수 마리오 코르소와 다툼을 벌이는 등 칠레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분위기는 결코 좋지 못했다. 본선에선 그 유명한 산티아고의 난투극까지 일어나며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 월드컵 이후 감독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후에 페라리는 칠레에서의 졸전은 내 잘못이 아니며, 인터뷰를 할 당시에도 그 때의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마차와는 싸운 적이 없으며. 마차가 당시 상황에서 최종 결정을 했었다는 인터뷰를 남겼다.[11]

그 이후에는 기술 연구소에서 있었으며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82년 월드컵에서의 퍼레이드였다. 그 이후 심장 혈관의 이상으로 산 카를로의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창의적인 플레이메이커. 다재다능하고 강한 하드워커의 기질이 있었고 관대한 팀 플레이어였다. 기술적인 재능과 함께 시야, 전술 지능도 좋았고, 패스 능력도 있으면서 강력하고 정확한 슈팅으로 한 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처음 유벤투스에 이적했을 때 그는 공격적인 역할을 가졌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에선 스키아비오피올라가 스트라이커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포초 감독은 당시 다른 유럽 팀들처럼 메아차와 짝을 이루도록 그를 이끌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아는 선수였는데, 1931년 상대 선수가 그를 때리는 데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유벤투스 수뇌부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에토레 베라(Ettore Berra)는 그의 시대에서 공격수의 모델로 페라리를 꼽기도 했다.

페라리는 그의 시대에서 최고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득 외에도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발전에 관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등 팀을 위해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가르쳐준 사람이다. 이 역할은 시야의 기술적 관점과, 선수가 가진 창의성에 의해 구현된다고 말해진다. 페라리 이전의 레프트 하프백은 보통 평범한 선수들이었다. (중략) 그로 인해 그런 시각이 축구계에 작별을 고했다. 그 이전엔 누구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해 전 프랑스 축구선수이자 기자인 뤼시엥 강블랭(Lucien Gamblin)은 페라리를 L'Auto로 부르면서 아마도 지난 10년간 최고의 이탈리아 축구선수라 평했다. (중략) 발론체리의 성공적인 계승자이며 주목할 만한 전술가이자 기술자로, 그들의 시합을 절도 있고, 냉담하게 유지한다. (중략) 결론적으로 누구도 그만큼 최고의 컨디션에서 공격을 시작하고 전개해 나가는지 잘 알지 못하고, 만약 그의 득점이 힘과 같이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정확할 것이다.

에토레 베라(Calcio Illosturato 중에서)


큰 상자와 단단한 다리의 표준인데, 이탈리아의 미드필더들에게 가장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페라리는 발론치에리만큼 발라드의 우아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운동선수로서의 배경과 헌신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한다. 그(페라리)는 골 감각은 떨어지지만, 수비적 도움은 훨씬 활발하다. 전형적인 셔틀 미드필더로, 그가 도착하면 팀의 균형이 보장된다.

잔니 브레라(알레산드리안 학교 선배 발론치에리와 페라리를 비교하면서)


튼튼하고 실용적이며 직선의 움직임을 갖는 미드필더의 피스톨. 그러면서 골도 넣을 수 있는 선수.

안젤로 로벨리


또한, 페라리의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안토니오 기렐리(Antonio Ghirelli)에 의해 주목받았다. 감독으로서는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했으며, 엔초 베아르초트는 그를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훈련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코베르차노(Coverciano)의 기술 센터에서 오랜 시간 강사로 일했다. 베아르초트는 피노 피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감히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냉정한 기술의 선수로 그는 다른 선수들을 따라서 게임을 이끌었다. 모두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그의 눈은 리듬의 불가사의한 감각으로 장애물과 전술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안토니오 기렐리


페라리는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다. 나는 코치로서 첫 코스를 기억한다. 그는 테크닉을 설명하고 가혹하게 시험 받았다.

엔초 베아르초트



5. 수상[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감독[편집]




5.3. 개인[편집]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년 헌액


6. 둘러보기[편집]





[1]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 주에 있는 도시이다.[2] 인사이드 포워드, 레프트 하프백, 아웃사이드 레프트[3]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유벤투스에서 뛰었던 수비형 미드필더[4] 비르지니오 로세타도 8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로세타의 우승 기록 중 3회는 세리에 A 출범 전의 기록이다. 참고로 세리에 A 최다 우승 기록 보유자는 10회의 잔루이지 부폰이다.[5] 푸리노는 월드컵 출전이 1970년 월드컵 단 한 번에 출전도 단 한 번 그것도 교체로 들어갔다. 총 A매치 출전 횟수는 단 3회에 불과하다[6] 나머지 한 명은 파올로 말디니아버지체사레 말디니이다.[7] 다 펠레의 팀 동료. 즉, 산토스 FC소속의 선수들이었다.[8] 유럽 축구계에서 흔히 커리어의 최고봉으로 칭해지는 프란츠 베켄바워지네딘 지단 등도 우승 횟수에서는 페라리에 크게 밀린다. 게다가 월드컵 우승 횟수로는 각각 한번이다.[9]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남부 이탈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의 격차가 더 컸다. 북부 리그 우승팀 유벤투스가 남부리그 우승팀 알바-로마를 결승전에서 2차전 합계 12:1로 누를 정도였다[10] 하지만 동점골 장면에서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에게 이탈리아 측이 파울을 범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1] 나중에 기자 주세페 시뇨리는 칠레에서의 방식은 다 틀렸고, 침묵을 해서는 안되었다며 이 인터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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