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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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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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병국
(曺秉局 / Cho Byung-Kuk)
생년월일
1981년 7월 1일 (42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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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울산광역시
가족
아내, 아들,
신체 조건
183cm, 78kg
포지션
센터백
학력
학성중 - 학성고 - 연세대[1]
소속 클럽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1~2004)
전남 드래곤즈 (2005)
성남 일화 천마 (2005~2010)
베갈타 센다이 (2011)
주빌로 이와타 (2012~2013)
상하이 선화 (2014)
촌부리 FC (2015)
인천 유나이티드 (2016)
경남 FC (2017~2018)
수원 FC (2018)
사우스코스트 유나이티드 (2019~2020)
지도자
사우스코스트 플레임 (2021~2022 / 유소년 코치)
인도네시아 대표팀 (2022~ / 코치)
국가대표
11경기 1골 (대한민국 / 2003~2004 )

1. 개요
2. 클럽 경력
2.1. 데뷔 이전
2.2. 국내 시절
2.3. 일본, 중국, 태국 생활
2.7. 사우스코스트
3. 지도자 경력
4. 국가대표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선수. 포지션은 센터백이며 홍명보 은퇴 후 대표팀을 이끌어갈 대형 수비수로 주목 받았으나 기대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K리그, J리그 등 아시아 리그에서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울산 출신인 조병국은 울산 학성중, 학성고를 거쳐 연세대에 진학해 활약했다.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있었다.

여담으로, 이 때 높은 점핑과 긴 체공시간으로 인하여 '에어조(Air Cho)'라는 별명을 얻었다.


2.2. 국내 시절[편집]


2002년에 조병국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했으며, 중간에 있었던 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2004년 막판에 부상을 당했었고, 이후 2005년 조병국+고종수김남일을 영입하며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그러나 부상을 또 당하면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고, 팀에서 입지가 좁아져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남을 떠났다.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많았지만, 성남 일화 천마에 합류한 이후 조병국은 다시 기량을 되찾아 핵심 수비수로 자리잡았다. 그는 2010년 5월 29일 제주전을 마지막으로 입대를 위하여 떠나기로 했지만, 어깨 쪽의 습관적인 부상으로 인해 병역면제되어 팀에 복귀했다.


2.3. 일본, 중국, 태국 생활[편집]


2010년 시즌을 마친 뒤 조병국은 베갈타 센다이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한 시즌간 28경기를 소화한 뒤 주빌로 이와타로 떠났으며, 2014년에는 상하이 선화에 합류하며 중국까지 갔다. 1년 후엔 태국 촌부리 FC에서도 활약했다.


2.4. 인천 유나이티드[편집]


2016년 1월 9일, 조병국이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는 기사가 떴다. 슬슬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 국내 복귀를 택한 듯. 15일 공식 입단이 발표되었다. 인천UTD,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조병국 영입 5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 전에서 2010시즌 이후 다시 K리그 클래식로 복귀하여 요니치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조국으로 각성하여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치며 시즌 초 흔들리던 인천의 수비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활약을 인정받아 김용환과 함께 K리그 클래식 15라운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팀 수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요니치가 흔들릴 때도 꾸준한 모습을 보였고, 수비라인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축구 인생의 막바지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팀을 잔류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젊은 선수들이 많은 인천에서 고참으로 팀을 집결시키는 역할도 하는 등 경기 외적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르엉쑤언쯔엉도 조병국의 도움을 언급한 바 있다.


2.5. 경남 FC[편집]


2017년 1월 2일, 경남 FC로 이적한다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경남에서 조병국은 배기종, 최재수 같은 베테랑들과 팀의 중심을 잘 잡아주면서 2018 시즌 경남의 리그 단독 선두를 이끌었다.


2.6. 수원 FC[편집]


2018년 6월 11일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은퇴 대신 수원 FC로 이적하였고, 과거 수원 삼성 시절 동료였던 김대의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이적 후 첫 경기였던 대전 시티즌전에서 활약하며 무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후 2018시즌 반년간 조유민과 함께 팀의 중앙 수비진을 든든히 지키며 활약한 뒤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2.7. 사우스코스트[편집]


2019년 호주 6부리그인 일리와라 프리미어리그 소속 사우스코스트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아들의 영어 교육은 물론 팀의 유소년 선수로 입단했다고 한다. #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호주 아마추어팀인 사우스코스트 플레임 U13팀 코치로 전향했다.

2021년 U13 단계 리그에서 4위를 기록해 성공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구단은 지난 9월 오는 2023시즌 각 연령별 팀 코치진을 발표하면서 U14 팀 코치로 승진했다.

2022년 10월, 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코치직을 사임한 제난 라돈치치의 후임으로 인도네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임 중인 신태용 감독을 보좌할 새로운 코치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곧바로 20세 이하 대표팀 코치로 전지훈련에 합류하였다. #


4. 국가대표 경력[편집]


조병국은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2001년 12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에 나설 엔트리에 처음 뽑히면서 대표팀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경기에 투입되진 못했다. 이후로 2002년 1월에 2002 CONCACAF 골드컵에 발탁되지 못하였고, 2월에 유럽 전지훈련 명단에 들었으나 계속 선발이든 교체로도 선택 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4월에 있었던 코스타리카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 이후로 명단에서 빠지면서 2002 FIFA 월드컵 출전이 불발 되었다.

히딩크 감독이 계약 만료로 대표팀을 떠난 이후로 코엘류호 체제에서 홍명보의 후계자로 적극 지지를 받았다. 홍명보의 은퇴 이후 김태영 - 조병국 - 최진철이라는 백스리가 가동됐을 정도. 2003년 콜롬비아전에 국가대표로 데뷔했지만, 2003년 4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종료 직전 조병국이 걷어낸 볼이 가만히 서 있던 일본 공격수 나가이에게 맞고 얼떨결에 골로 연결되고, 같은 해 7월 23일 일본 올림픽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도 자책골을 넣는 등 한일전에서 임팩트있는 실책들을 저지르며 욕도 많이 먹었고[2], 그 이후 자신감이 많이 하락했는지 국가대표팀에서 영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1년 10월 7일에 있었던 폴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막판에 치명적인 패스 실수를 범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않았다. 국가대표팀 총 기록은 11경기 1골.


5. 플레이 스타일[편집]


183cm로 센터백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신장임에도 위치 선정과 제공권 능력, 그리고 파워가 뛰어난 강점이다. 세트피스 공격에서도 뛰어나 과거 골 넣는 수비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수원에서 입은 허리 부상으로 인해 신체능력이 하락하기 전에는, 터키와의 A매치에서 키 191cm의 하칸 쉬퀴르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뛰어난 점프력과 과감성을 자랑했다.

이후 성남에서 2006 월드컵 주전으로 활약한 김영철 등과 함께 통곡의 벽을 이루며 성남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국가대표팀 명단에 종종 올랐지만 조용형, 이정수, 곽태휘, 김진규, 강민수 등을 이기지는 못했다.

인천으로 이적한 후의 그의 플레이를 보면 나이가 들면서 쌓인 노련함을 바탕으로 침착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상대 공격수들의 압박에도 쉽게 당황하지 않고 볼을 처리해내는 선수이다. 그리고 때때로 전방으로 전진하여 공격 가담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천이 쓰리백을 주축 전술로 사용하면서 이윤표와 조병국이 번갈아가며 올라가도 수비의 인원이 충분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수비력도 2015년도 요니치처럼 뛰어난 편. 그 요니치가 부진했어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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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1년 중퇴[2] 그 후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한일전에서 결승타를 맞은 임창용2020 도쿄 올림픽에서 야구 한일전 패배의 원흉이 된 고우석이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평생까임권을 취득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 이 둘이 상대했던 팀이 일본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평생까임권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2013년 6월 18일에 열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최종예선 이란과의 최종전에서 패배의 원흉이 된 김영권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나마 이란전이었기 때문에 평생까임권까지는 가지 않았고, 훗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독일전에서 선취골을 성공시켜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훌훌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