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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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별칭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시대
일제강점기
성격
독립운동단체
설립일시
1924년 4월
설립자
정화암,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등

1. 개요
2. 설립목적
3. 기능과 역할



1. 개요[편집]


1920년대 중국 베이징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2. 설립목적[편집]


정화암,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체계화시킬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3. 기능과 역할[편집]


1923년 9월 일본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한 보복심리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무정부주의자 신채호는 베이징 순치문(順治門)내의 석등암(石燈庵)에서 역사편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유림[1]은 청두대학(成都大學)에 재학 중이어서 연맹창립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뒤에 합류하였다.

이회영·정화암 등 10여 명이 연맹을 조직, 활동하자 일본관헌은 이들을 체포하려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은 굳건한 자세로 연맹을 구심점으로 운영해 나갔고 독립운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기 위해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창간, 보급하였다.

순간지로 발행되어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 진영내에 일고 있던 파벌주의적 경향성에 지양을 요구하면서,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른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의 총력을 결집하도록 호소하였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표방하는 공산주의의 볼셰비키공산혁명 이론을 비판하였다.

『정의공보』는 9호까지 발행되었으나 자금난으로 휴간되었다. 그 뒤 1928년 5월 『탈환(奪還)』으로 제호를 바꾸어 속간하였으나, 역시 자금난으로 휴간된 뒤 더 이상 속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단체 역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이을규·이정규·백정기·정화암 등은 상하이로 떠나 갔고, 유자명과 이회영만 베이징에 남아 국내와 연락을 취하였다.

그 뒤 이을규 형제가 국내로 압송되고, 이회영이 1932년에 죽은 뒤 정화암이 중일전쟁태평양전쟁 기간 중 연맹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계속 이끌어 갔다.

1932년 훙커우 공원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윤봉길이 먼저 거사을 일으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33년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를 계획하였으나 이 또한 3월 백정기 등이 잡힘으로써 좌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뒤 연맹이 충칭으로 이동한 뒤로는 유림이 중심적으로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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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