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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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5.31. ~ 1950.5.30.'''

[ 임기 개시 당시 정당별 의석 ]
연립 여당

55석


29석

야당

12석


6석


2석


11석

무소속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8em"
85석
재적
200석


[ 임기 종료 당시 교섭단체별 의석 ]
여당

71석

야당

63석


29석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8em"
13석
교섭단체 미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 font-size: .8em"
12석


재적

188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파일:n69z77N.jpg
파일:jokcheong.jpg
조선민족청년단
공식명칭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1]
약칭
족청(族靑)
창당일
1946년 10월 9일
해산일
1949년 1월 20일
총재
이범석
단장
이준식
이념
제3의 위치
의석 수
6석 / 200석
당 색

하늘색 (#4F7FD4)

1. 개요
2. 주요 인물
3. 강령: 단지삼칙(團旨三則)
4. 역대 선거 결과
5. 관련 정치 단체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46년에 창단된 민족주의 성향 및 단지삼칙 강령에 창설된 청년단체며, 이범석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약칭으로 '족청'이라 한다.
사건 순서
대한청년단의 창단 과정
1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 창단
서북청년회
청년조선총동맹[2]
조선민족청년단
2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6명의 당선자를 냈으며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명칭도 '대한민족청년단'으로 변경했다. 1949년 1월에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이후 대한청년단 내 족청계는 자유당 창당의 핵심세력이 되었으나, 그 수장인 이범석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자유당에서 배제되었다.


2. 주요 인물[편집]


최고의결기관으로 전국위원회를 두었고 전국위원회에서 선임된 이사들로 구성된 중앙이사회가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그 밑에 각 단위의 지방위원회와 지방단부가 조직되었으며, 각 단에 총무부, 조직부, 선전부, 훈련부, 연구위원회, 훈련소를 두었다. 광복군 시절부터 이범석과 함께 활동해온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수원에 설치된 중앙훈련소의 소장도 이범석이 맡았으며 부소장도 송면수, 이준식, 안춘생 등 모두 광복군 출신들이 맡았다.

단장
이범석
부단장
이준식, 김형원
조직부장
노태준
선전부장
송면수(宋冕秀)
훈련부장
안춘생(安椿生)

후에 이범석이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이범석은 총재가 되고, 이준식이 단장이 되었다.

참고자료

3. 강령: 단지삼칙(團旨三則)[편집]


① 우리는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
② 우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할 것을 기한다.
③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며 원대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着手卑近)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을 기한다.


4. 역대 선거 결과[편집]



5. 관련 정치 단체[편집]


  • 청구회
  • 신정회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1948년 8월에 대한민족청년단으로 개칭[2]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후신으로 비밀결사인 백의사의 대외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