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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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군주
朝鮮王 | 조선왕

호칭
왕(王)
설립
기원전 323년
폐지
기원전 194년
초대
조선왕 1세
말대
우거왕
국가
고조선(단군조선 -> 위만조선)
계승
부자세습

1. 개요
2.1. 단군조선(기원전 4세기경)
2.2. 단군조선(기원전 3세기경)
4. 봉국 조선
4.1. 당의 봉국 조선
4.2. 고려의 봉국 조선



1. 개요[편집]


朝鮮王

'조선'을 다스린 의 호칭이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과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 '봉국 조선'이 있다.

2. 고조선[편집]


오늘날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이전 조선을 '옛 고()' 자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부르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는 고조선을 그냥 조선이라고 불렀으므로 호칭도 고조선왕이 아닌 조선왕이었다.

고조선은 초반에는 '단군' 또는 '조선후'[1]라는 후작 칭호로 불렀다. 원래 왕은 중국 주나라 천자의 칭호였고 고조선이나 연나라, 초나라 같은 주변국은 후작, 자작이었지만, 그러다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주나라가 약해져 너도나도 왕을 칭했고 단군조선의 임금 조선왕 1세도 연나라에 대항하는 동시에 천자와 동급임을 자처하며 칭왕하여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323년경으로 추정된다.

역대 고조선왕은 건국신화의 단군 이외에 부왕, 준왕, 위만, 우거왕까지 네 사람이 이름이 남아있고, 그 외의 조선왕은 정확한 계보가 남아있지 않고 단편적으로 언제쯤 조선왕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정도로만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대략적으로 활동한 시기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2.1. 단군조선(기원전 4세기경)[편집]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동)주 (희성)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원래 조선후(朝鮮侯)였지만 인접한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도 스스로 (王)을 칭해 조선왕이 되었다.

2.2. 단군조선(기원전 3세기경)[편집]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이후에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고,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

위략

(중국 기록 기준으로) 교만하고 포악했다고 하며, 즉 연나라에 강경하게 나선 듯 하지만 이를 구실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공격당해 많은 영토를 잃었다.

2.3. 위만조선[편집]



3. 조선왕조[편집]


조선 국왕은 동시대 중국 명나라, 청나라 기준으로 친왕급으로 간주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군왕급이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예법상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 황제에서 이품(이등)급을 낮추어 친왕과 동급으로 대했다. 즉 군왕보다는 높게 쳐주었던 것이다.[2]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2년 2월 기사에 명 건문제가 태종에게 면복을 주는데 칙서에

조선왕은 군왕의 벼슬이니 오장(五章)이나 칠장복(七章服)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라는 구절과 태종 9년 4월 기사에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라고 나온다. 그러므로 대우가 친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이 멀쩡할 때에는 백구지국(伯舅之國)이라고 해서[3] 구, 조선이라는 나라를 꽤 크게(?) 여겼다. 지금도 대체로 인구 분포가 그렇지만 한반도나 베트남 같은 경우 땅이 괜찮은 편이라[4] 땅이 비교적 좁아보일지라도 중국 기준으로 만주, 몽골, 티베트 등지의 여러 칸들보다는 훨씬 백성 수가 많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맬서스의 주장대로 인구가 경제력 측정 기준이었으니 경제력, 문화력 측면에서도 우위였다. 의외로 따지고 볼 때 명나라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지극히 드물었다.[6] 러시아와 인도는 청대에 들어 겨우 접했고 그나마도 중국의 직접 통치력이 약하다 보이는 몽골, 티베트 방면에서 접했다. 똑같이 친왕급 대우를 받은 베트남도 남부를 완전히 정복한 때는 조선 후기 시기에 해당하며, 그 이전에는 북부/중부 지역만을 지배했다.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는 천자의 대리인으로 온 사신들도 조선 국왕을 만나면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는 공손하게 읍하며 예우를 했고 초기 환관을 보내던 데서 후기로 올수록 사신 지위도 높아졌다. 황제의 스승이자 공부상서를 지낸 사람이 올 정도였다. 이 사람은 정2품으로 조선 관직상 판서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재상을 없애고 1품 직위는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직상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삼전도의 굴욕을 시전할 때 항복 절차가 끝나고 나서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혀라" 했고, 조공국들 중에 조선이 그나마 나라꼴을 갖춰서 주요국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사신으로는 만주인 고관을 보냈다. 그쪽에서 봐도 비교적 큰 나라인 조선 국왕에게 수천~수만에 불과한 몽고 추장 7~80명과 같은 왕 작위를 줬어도 대우는 현격히 달랐다.

한마디로 중원 질서가 제대로 돌아갔다는 전제 하 고려-조선의 위치는 종주국 바로 아래의 제1번국이었으며, 그 왕인 조선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팍스 아메리카나로 치면 영국이나 캐나다 정도 되는 위치. 물론 어디까지나 관료제상 등급이 그렇다는 얘기다.[7]

고려 국왕은 몽골 강점기에 원나라 조정에 직접 입조한 적이 있지만, 조선은 세자를 중국에 입조시킨 적은 있어도 국왕이 중국에 직접 입조한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에 조선 국왕이 만약 입조했을 시에 의전상으로 중국 조정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고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등은 대략적인 원칙만 있을뿐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다.

반면 국세가 기울어 임진왜란시기 선조 시절에 나라가 털리고 나선 경략(해당 지역 책임자)으로 온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조선 관직으론 병조참판)은 정 3품에 해당한다. 명나라 시절 남경 정부에 시랑하나 북경엔 좌우 시랑 청나라 시기엔 만한상서 2인 밑에 만인시랑 2명, 한인시랑 2명 등 총 4명이다. 또 듣보잡 연대장급 지휘관한테도 맞절하고 광해군은 아버지의 친구를 맞는 예로 인사할 지경이 되었다. 조선 막장테크인 고종 때는 황제도 아닌 북양대신 이홍장의 대리로 온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고종도 무시당했다.

그렇게 왕이라는 칭호에 진절머리가 난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면서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외국의 국왕들도 전부 대군주로 번역하게 했으며 몇년뒤에는 대군주라는 칭호도 폐지하고 칭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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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국 조선[편집]



4.1. 당의 봉국 조선[편집]


당이 봉한 보장왕의 생전 관작
작위
<white,#1F2023>조선왕(朝鮮王)
품계
<white,#1F2023>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8]
직위
<white,#1F2023>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
<white,#1F2023>요동주 도독(遼東州 都督)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보장왕당나라고종에 의해 명목상 조선왕 작위에 책봉됐었다.


4.2. 고려의 봉국 조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국 양헌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려의 경우 사후 시호가 왕으로 결정된 조선국 양헌왕이 조선왕 칭호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2:50:06에 나무위키 조선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중국계와 연원이 전혀 다른 조선측에서 자칭한 것은 아닐 것이며, 후라는 칭호는 당시 중국어에서는 일반적인 군주의 칭호였다. 그러다가 조선이 중국계 국가들과 교류와 적대가 잦아지자 중국식 군주의 칭호를 이해하고서 스스로 칭호를 업그레이드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2] 명나라는 또한 조선의 관료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기보다는 조선 국왕의 위치를 정해 관료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정해주는 방식을 폈다.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3품대우이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로 명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정강왕(광서성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의 예에 따라 대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정강왕은 왕작을 군왕에서 시작해 친왕으로 올라갔다고 적었다. 이 정강왕이 초대 정강왕인지 그 후대인지 아니면 친왕으로 있을 당시인지 군왕으로 있을 당시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3] 제후국 중 가장 제일 큰 나라를 말한다.[4] 인구 밀도로 보면 당시 조선이 훨씬 더 살기 괜찮았다. 1600년경 당시 조선의 인구밀도는 1㎢당 50, 동남아 평균은 5.8.[5] 상실이 아니다. 전국의 토지대장을 망실하고 인구이동이 심하게 일어나 제대로 세금을 매기지 못했고, 토지조사를 엄격하게 해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을 학정으로 생각한 조선정부가 일부러 생산량을 낮춰 잡았을 뿐 농업 개량이 지속되어 실제 농업생산량은 꾸준히 늘었다. 세수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6] 일본은 조선과 비슷한 정도였다가 에도시대에 접어든 이후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조선 세종조때 농업생산량이 약 2200만 석(물론 비교를 위한 일본식 기준이다)이었고, 선조 대까지 비슷하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으로 극심한 변동[5]을 겪은 이후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성장이 침체된 반면 일본은 임란 직전 1850만 석의 식량생산량을 찍고 내란이 평정된 에도시대에 들어 광대한 간토 평야를 개간하며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상공업 발달까지 이어져 이후 제국주의 시기에 열강에 끼어들 수 있는 발판을 닦았다.[7] 정확히는 황제와 황태자 다음의 3순위였으나, 황태자란 직위는 예비 황제인데다, 유사시 황제의 스페어 타이어와 같은 위치이기에 사실상 황제와 동급이나 다름없다.[8] 천비묘지명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