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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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종류
3.1. 을(乙)권 시리즈
3.2. 병(丙)권 시리즈
3.3. 정(丁)권 시리즈
3.4. 무(戊)권 시리즈
3.5. 신(新)권 시리즈
3.6. 미발행권
4. 환율과 가치
5. 한국은행권 원(1기)



1. 개요[편집]


파일:조선은행권 2.jpg

8.15 광복 이후 1차 대한민국 원 이전에 쓰인 한국통화. 원래 엔(円)계 통화였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환율 시세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2. 상세[편집]


1946년에 일본 본토에서 식민지 상실과 화폐개혁(1:1)으로 일본은행이 주도하는 금엔 블록을 해체했다. 그래서 GHQ가 일본은행의 본점에서 이사들을 데려와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의 본점과 지점에 있는 금엔 지폐(일본은행권, 대만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들을 모조리 소각했으며, 예금동결 조치를 취하면서 자연인들과 법인들이 보유한 금엔 지폐(일본은행권, 대만은행권, 만주중앙은행권)들을 무조건 강제입금시켰다.

반면 조선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에 의해 조선은행법 효력이 존속되어 미군 군표(일명 'A엔')와 함께 조선은행권이 계속 통용되었다. 이후 도안이 동일한 상태로 조선은행 원을 발행하게 된다.

북한에서는 1947년부터 북한 원으로 교환했지만, 남한에서는 조선은행이 미군정청의 지시로 도안을 고쳐 새로 찍었다. 1950년 봄에 한국은행을 개업하고 '한국은행권 원'이 발행된 이후에도 1953년까지 통용했다. 일본 도안에 새겨져 있었던 일명 '수노인'은 독립문으로 교체되었고 일본의 오동문양(키리몬:桐紋)은 무궁화로 교체되었다. 게다가 일본 제국의 인쇄국을 대신하여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했다.

"유엔"의 이름으로 새나라가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나이 어린 이 신생정부는 소꼽장난 같은 살림살이로 선후 없이 주먹구구로 그 명맥을 이끌어오고 보니 종이조각과 다를 게 없는 지폐가 마치 거미 똥구멍에서 실 나오듯 마구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1959년의 불연속성 ··· ⑪ 주화발행",

1959년 12월 29일 조간 1면, 《동아일보》, 그동안의 발권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며.[1]

...그래서인지 상당히 저퀄이다.


3. 종류[편집]



3.1. 을(乙)권 시리즈[편집]


해방 이후 처음 발행된 시리즈이다.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다.

을 십원과 을 백원은 기호가 1~2번으로, 이후에 나온 조선은행권과 구분한다.

앞면
뒷면
파일:을 일원.jpg
을(乙) 일원
(1945.10.20)
수노인
당초 무늬
파일:을십원.jpg
을(乙) 십원
(1945.12.10)
조선은행 본관
파일:을 백원.jpg
을(乙) 백원
(1945.09.01)
벚꽃가지
도안은 조선 엔 시절의 수노인이다. 이 중 을 백원권은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종전이 되자, 일본인들이 이 돈을 무단 인출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함께 근무하던 조선인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을 백원권 인쇄 원판을 몰래 탈취해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근택인쇄소에서 8월 하순부터 약 보름간 을 백원권을 제조, 30억원을 인출하여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은행권 발행잔량은 해방 직후 48억원에서 보름 뒤에는 80억원으로 늘어났고,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된다.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파일:통화발행고.png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의 통화발행고
세로 축: 원 / 가로 축: 연도 및 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군 진주 이후에도 군표 대신 종전대로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광복 이후 불법적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진주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지폐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사후 승인해 줌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인쇄한 불법 지폐를 유통시켰다.#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재정 적자를 조선은행권을 찍는 것으로 해결하라고 미군정 재무국장 찰스 고든 중령에게 권유했다. 이때부터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통화팽창이 주된 원인이 되어 물가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

조선총독부의 불법 화폐 남발과 미군정의 통화정책으로 1945년 9월 총 통화액은 130억 정도였다. 통화발행고 90억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음성 자금 40~45억을 합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남발한 화폐는 위폐로 의심받을 정도로 품질이 나빠 경제에 혼란이 생겼다.

그러자 미군정은 고작 천만원 정도의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것이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누명을 쓴 독립운동가는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한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또한 김철수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박낙종송언필,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도 누명을 썼다.

독립운동가를 검거한 경찰들이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총괄자 임영태는 친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조작 사건의 시초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부활한 친일파는 4.3 사건6.25 전쟁에서의 학살의 주범이 된다.

파일:노덕술최난수.jpg
정판사 사건 수사를 지휘한 친일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조병옥-장택상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경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되고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됨으로써 향후 반공 체제 형성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법적 한도를 넘어선 피의자에 대한 장기 구금 및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강압 수사 방식이라는 일제 경찰의 유산도 정판사 ‘위폐’ 사건을 거쳐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위폐 공판 소요 사건에서의 비무장 대중에게 총을 쏘는 과잉 진압 방식 역시도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116) 1946년 가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과잉 진압 및 이후 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은 위폐 제조 범죄로 인해 민심이 불안해지고, 매점매석, 낭비 풍토가 조장되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77) 이는 일제의 화폐 남발, 미군정의 일제 화폐 정책 승계, 각종 경제 실책 등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폐위조범, 즉 정판사 ‘위폐’ 사건 관계자 및 공산당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정 측이 이러한 공산당의 경제 교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5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백원짜리 신지폐, 즉 조선은행권 100원권 정(丁)권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으며,78) 7월 1일 신권을 발행하였다.(중략) 결국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를 통해 경제 혼란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 책임과 감수해야 할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지폐 수집하는 사람들이 자주 "조선공산당의 지폐 위조 사건!" 이러면서 정판사 사건 위폐라고 수집하는 것은 사실 조선총독부의 품질 나쁜 화폐이거나 조선총독부의 질 나쁜 화폐 때문에 당대에 엄청나게 발생했던 다른 위폐범죄의 위폐이다.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친일파를 미워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가장 악질 친일파인 노덕술, 이구범, 최난수 등의 편을 들어 해방의 날까지 일제에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투사의 명예를 짓밟는 부조리의 극치인 현장이다.

위조지폐로 많이 발행되었던 만큼 가짜가 많다. 따라서 을 십원과 백원은 잔존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거래 가격이 좀 비싸다. 특히 을 백원권은 진품 수량이 거의 없고, 가끔 경매에 출몰하는데 거의 천만원에 가까운 가격에 거래되곤 한다. 수집을 할거면 참조품이나 모조품으로 만족하자.

3.2. 병(丙)권 시리즈[편집]


을권 다음으로 발행된 시리즈이다. 기존의 일원은 계속 사용하고, 십원과 백원만 새로 발행하였다.

병 십원은 기호 3~4번으로, 병 백원은 기호 3~7번으로 이전, 이후의 조선은행권과 구분한다.

앞면
뒷면
파일:병 십원.jpg
병(丙) 십원
(1946.05.06)
수노인
조선은행 본관
파일:병 백원.jpg
병(丙) 백원
(1945.12.10)
벚꽃가지
디자인은 을권과 거의 흡사하고, 앞면 오동잎 문양의 옥색이 짙어졌다. 병 10원 또한 잔존량이 많지 않아 거래가격이 높다.
보면 알겠지만 을 십원과 병 십원은 판번호만 다르고 사실상 똑같은 지폐이다.

3.3. 정(丁)권 시리즈[편집]


병권과 마찬가지로 십원과 백원만 새로 발행했다.
정 백원은 기호 1A~9A로, 이전과 이후 조선은행권과 구분한다.

앞면
뒷면
파일:정 십원.jpg
정(丁) 십원
(1946.10.10)
수노인
조선은행 본관
파일:정 백원.jpg
정(丁) 백원
(1946.07.01)
무궁화
디자인에 대대적인 수정이 있었다. 우선 앞면의 일본어로 적혀있던, 일본은행권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태환 문구가 삭제되었다. 또한 정 백원의 경우 앞면에서 왼쪽에 있던 오동 문양이 중앙으로 옮겨졌고, 수노인상 위쪽 기호 위에 있는 꽃이 벚꽃에서 무궁화로 교체되었다. 뒷면 역시 상단 오동 문양 좌우에 있는 꽃이 무궁화로 교체되었다. 지폐 도안에서 일제 색깔을 지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기서 거기다. 정 백원부터는 앞면 하단 문구가 '대일본제국인쇄국제조' 에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제조' 로 바뀌었다.

3.4. 무(戊)권 시리즈[편집]


무 백원 한 권종만 발행되었다. 기호는 10A~48A로 구분한다.

앞면
뒷면
파일:무 백원.jpg
무(戊) 백원
(1947.06.03)
수노인상
무궁화
밝은 푸른색을 띄고 있다. 밑에 언급할 북한이 불법 유통시킨 미발행 천원권을 제외하면, 수노인이 도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지폐이다. 이젠 안녕 무 백원은 정 백원과 달리 뒷면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3.5. 신(新)권 시리즈[편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설립해야 했으나, 조선은행이 계속 화폐 발행을 담당하게 된다. 이후 1949년 일제강점기 조선 엔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지긋지긋하고 본의 아니게 혹사당했던 수노인 도안이 독립문으로 교체되었다. 오원권과 십원권이 발행되었고, 소액권으로는 오전, 십전, 오십전이 발행되었다.

앞면
뒷면
파일:조선은행 소액 오전.jpg
오전
(1949.11.15)
조선은행 휘장
당초 무늬
파일:조선은행 소액 십전.jpg
십전
(1949.11.15)
파일:조선은행 소액 오십전.jpg
오십전
(1949.11.15)
파일:조선은행 신 오원.jpg
신(新) 오원
(1949.09.15)
독립문
조선은행 본관
파일:조선은행 신 십원.jpg
신(新) 십원
(1949.09.01)
1949년에 인쇄돼 1년간 사용되다가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설립되고 대한민국 원이 발행되면서 발행 중지되었다. 그러나 1953년까지 유통되었다.

3.6. 미발행권[편집]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 한국은행을 접수하고 나니 나머지 금괴 0.2톤과 은괴 16톤, 그리고 한국은행이 아직 미발행한 지폐 105억원어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폐를 발행하던 조선서적인쇄공사에서도 직원들이 장비를 다 방치하고 피란을 떠났기에 인민군은 105억원의 미발행권은 물론 앞으로도 무한히 조선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2]

파일:미발행 천원.jpg
북한이 불법적으로 인쇄, 유통한 미발행 천원
이걸 그대로 꿀꺽한 김일성은 남한 정부의 경제를 마비시킬 작정으로 미친 듯이 미발행권을 뿌리고 그걸로도 부족해 조선서적인쇄공사의 설비를 이용해 미친듯이 조선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전시에 적군에 의해 아군의 화폐가 무참히 발권되는 상황이었으니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화폐 교체를 단행한다.

4. 환율과 가치[편집]






5. 한국은행권 원(1기)[편집]


파일:B01_202102081353235471_namekww.jpg
한국은행권 100원 (한국인쇄)
파일:external/www.realbanknotes.com/SouthKorea_p8_1000_Won_1950_f.jpg
한국은행권 1000원 (한국인쇄)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처음 만들어낸 시리즈이다. 당시 환율은 1달러=1800원. 하지만 2주만에 희대의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김일성이 남한 정부의 경제를 마비시킬 작정으로 판본(엄밀히는 조선은행권의 판본)을 득하여 위조지폐를 눈 뿌리듯 퍼부어댔고(북한군이 찍어낸 1000원권), 은행 본사마저 완전히 털려버리는 바람에 첫 시리즈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제1차 긴급 통화 조치가 발동되었다. 제1차 긴급 통화 조치 발동 직전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 통제 지역과 북한 통제 지역의 통화량 차이였다. 당시 발행 후 유통 개시를 기다리던 화폐는 대부분 서울에 위치한 한국은행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예적금으로 민간 금융기관들에 위탁된 금액도 대부분 서울의 민간 금융 기관의 본사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화폐 생산 설비도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있었다. 때문에 부산, 대구 등에 위치한 한국은행 지점들 및 민간 금융기관들이 보관하고 있던 화폐를 모두 끌어왔음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당장 쓸 화폐가 부족했다. 그리고 생산 설비도 모두 북한군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라 필요한 화폐를 생산할 방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이 점령한 지역에는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화폐가 넘쳐나는데 정작 한국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에는 대한민국 화폐가 부족해 한국 정부가 돈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거기다 북한이 점령지에 푼 화폐가 피난민들 및 북한 공작원들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오며 한국 정부 통제 하의 지역들의 경제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한국은행 총재였던 구용서 총재는 도쿄지점에 있는 김진형 부총재에게 연락해 보름 안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본 대장성을 통해 새 도안을 가진 100원권과 1000원권 지폐를 인쇄해오라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내린다. 김진형 부총재는 당장 당시 일본을 다스리고 있던 GHQ로 달려가 상황의 급박함을 읍소했고,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던 GHQ는 대장성에 최대한 빨리 새 도안을 만들어서 내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일본 대장성 인쇄청 소속 일본인 직원들과 일본으로 급파된 한국은행 직원들이 총동원돼 주말도 없이 일한 끝에 새 화폐 발행 작업을 겨우 열흘 만에 끝냈다. 7월 13일 1차 인쇄분이 대한민국에 도착했고 7월 22일 대구에서부터 일본에서 공수해 온 새로운 화폐의 유통을 시작했다. 그리고 8월 28일에는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긴급명령 제10호)'를 발동하여 특히 북한군이 대규모로 유통시키고 있던 조선은행권 100원 지폐의 효력 정지 및 퇴출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9월 15일부터 일본에서 인쇄해온 지폐들이 한국 정부 통제 하의 경상도와 제주도에서부터 기존 100원권을 대체하였고,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의 북상을 따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이 대체해나갔다. 그리고 이후 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화되자 모든 화폐를 한국은행권으로 대체 발행하며 한국은행에서 기획한 한국은행권이 조선은행권을 전량 대체했다.

공식적 첫 은행권 출범은 1950년 7월 22일 발행된 '이승만 한복 1000원권'과 '광화문 100원권'. 기존의 '조선은행 원'과 같이 사용이 가능한 통화였다. 당시 조폐공사의 기술력이 저조하여 천원권에 경우에는 지폐의 판 번호 1번부터 500번까지는 일본에서 인쇄했고 판 번호 501번 이후는 한국에서 인쇄했다. 그래서 일본인쇄권과 한국인쇄권은 품질이 다르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7월 20일까지 피난자금으로 조선은행권의 긴급인출(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하고, 1950년 9월 15일부터 1950년 9월 22일까지 한국은행권의 긴급교환(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했다.

파일:남색지오백원.jpg
한국은행권 500원 (한국인쇄)
파일:1dd6d65371.jpg
한국은행권 新 1000원 (한국인쇄)

1952년 완전히 서울을 되찾았을 때 긴급히 조선은행권을 이승만&파고다공원 1000원권/500원권(국내생산인 두번째 시리즈)과 교체해주며 무마하려 했으나 이미 통화시스템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리는 바람에 유명무실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2월 15일 긴급명령으로 화폐개혁을 시행하여 경제혼란을 수습하도록 지시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때 환율은 1달러=6000원. 대한민국 환과의 교환비율은 100원 = 1환이었다.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에 따르면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약 1만 배만큼 폭등했다.

이 시기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당대 생존인물을 화폐도안에 올린 사례다. 시절에는 한창 집권기였으니 당연히 올라갔다.

또한 해방 이후부터 환화로 바뀌기 전까지에 한해 '대한민국 원'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현행 대한민국 원과 구분하기 위해 이쪽을 1기, 현행권을 2기라고 하는 식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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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 전반적으로는 갓 발행된 대한민국 환 주화 시리즈의 품귀 현상, 그리고 1959년 당시 부동산 가격을 필두로 하여 한창 진행되던 인플레이션을 소재로, 눈속임만도 못한 수준 낮은 통화정책을 펴놓고는 무작정 국민에게 "정부를 믿으라"고 요구하던 화폐당국을 거미 똥구멍 운운하며 신랄하게 비꼬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2] 링크된 글 내용 중 오류들(예를들면 목포까지 갔다가 대전으로 돌아갔다든가)이 있고 기고자 개인의 주관도 섞여 있음을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