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전국시대 시기)

덤프버전 : r20210301





[ 펼치기 · 접기 ]
단군조선
초대 단군
계보 미상
제?대 조선후

조선후 ?세
계보 미상
초대 왕
제2대 왕
제3대 왕
조선왕 1세
조선왕 2세
조선왕 3세
계보 미상
제?대 왕
말대 왕
부왕
준왕
위만조선
초대
제2대
제3대
멸망
위만왕
□왕
우거왕

'기자'의 재위 및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고조선 ?대 단군
초대 왕

朝鮮王 | 조선왕
시호
미상
작위
후(侯)[1]
호칭
조선후(朝鮮侯) / 단군(檀君)

기(箕) / 한(韓)[2]

미상
생몰
? ~ ?
재위
기원전 320년 전후? ~ ?
활동
기원전 4세기?
1. 개요
2. 상세
3. 어환위략(문헌)
4.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중국의 전국시대 시기때 등장하는 고조선의 군주. 시호와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기록에서는 작위인 조선후로 기록되었다. 기자조선설을 따르면 기자의 후손으로 조선의 후작이고, 기자조선설을 부정하면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의 토착 지배자다.


2. 상세[편집]


생몰·재위년도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23년 천자국인 주나라가 약해지자 연의 37대 국군인 희퇴가 스스로 왕(王)을 칭하고 국경 근처의 조선을 치려 하였고, 비슷한 시기 왕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후도 연나라를 치려 하였으나 대부례가 간언하여 그만두었다.

이름이 전해져 오는 국왕 부(否)보다 앞선 세대의 고조선 군주로 실존인물은 분명하나 시호, 휘가 전해지지 않고 그냥 '제후국 조선의 후'라고만 기록되었다. 후대의 부왕이 그(조선후)의 직계 후손인지 아니면 (조선후의) 형제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왕명, 휘가 전해지지 않기에 후손인 조선왕[3]과 더불어 교과서, 백과사전에는 칭왕, 대명사(왕)로만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당시 고조선은 세를 크게 떨쳐서 랴오닝성 전역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아우르는 현대의 남북한을 합친것과 비슷한 수준의 상당히 넓은 국토를 지닐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후에 연나라가 세를 확장해나가자 기원전 3세기 때(사서에 따라 기원전 300년 혹은 250년경) 연 소왕의 명을 받은 진개(秦開)에 의해 랴오닝성 일대를 내주며 쇠약해졌다.

별개로 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 시대 당시에는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가 크다. 이 때문에 현대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중앙 집권화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중요한 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늘어났다.

분명 왕을 칭했으므로 죽을 때는 조선왕의 지위에 있었겠으나 구분상의 문제로 ‘조선후’로 부른다. 청주 한씨 족보와 속기자지[4] 등의 야사집에서 이 왕의 시호가 가덕왕(嘉德王)이라 하며 휘가 후(詡)라고 하나 근거는 전무하다.[5][6]


3. 어환위략(문헌)[편집]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 乃止。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기자의 후예 조선후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 《위략



4. 둘러보기(계보)[편집]


단군조선의 역대 단군
??대 조선후(전대)

??대 조선후

칭왕
조선왕(후대)

토착 고조선의 역대 국왕(國王)
칭왕

초대 조선왕

?대 조선왕(후대)

한반도의 국가 원수
조선후(전대)

조선왕

조선왕(후대)





[ 펼치기 · 접기 ]
단군조선
초대 단군
계보 미상
제?대 조선후

조선후 ?세
계보 미상
초대 왕
제2대 왕
제3대 왕
조선왕 1세
조선왕 2세
조선왕 3세
계보 미상
제?대 왕
말대 왕
부왕
준왕
위만조선
초대
제2대
제3대
멸망
위만왕
□왕
우거왕

'기자'의 재위 및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1] 칭왕.[2] 당시에 성씨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회의적이다. 한씨는 위만에게 패배한 준왕의 친척들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조선후가 한씨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씨는 기자조선설에 입각하여 추론한 것으로, 이마저도 오늘날 학계에서는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3] 만번한까지 밀린 고조선의 왕.[4] 1580년 편찬된 기자의 관한 자료집인 기자지를 증보한 것으로 1879년 편찬되었다. 역대 기자조선과 마한의 왕계보도가 기록되어 있으나, 신빙성은 0에 수렴한다.[5] 청주 한씨 족보에서는 가계도의 맨 처음에 황제를 당당하게 올려두었다. 황제의 아들이 소호, 소호의 아들이 교극, 교극의 아들이 제곡, 제곡의 아들이 설(契), 설의 13세손이 탕왕, 탕왕의 15세손이 기자, … 하는 식이다.[6] 18세기 후반 실학자들의 여러 기록에서 기자조선의 왕계보도가 언급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속기자지를 시작으로 여러 사서에서 기자조선의 숭조된 역대 왕계보도가 체계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당대에는 이러한 내용을 실제 역사로 수용하는 의견도 있어서, 대한제국 시기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 대동청사 등에서 기자조선의 역대 왕들과 치세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선후 문서의 r79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조선후 문서의 r79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