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형(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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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世衡

파일:대도 조세형.jpg

본명
조세형
별명
대도 (大盜)
출생
1944년[1][2](79세)
전라북도 전주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장
175cm
직업
건달[3]도둑종교인, 강연업 → 도둑
종교
개신교
범죄 유형
특수절도죄

1. 개요
2. 생애
2.1. 1998년 이전
2.2. 1998년 이후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참고/관련 자료



1. 개요[편집]




1970 ~ 80년대에 대한민국을 주름잡으며 활동했던 유명한 절도범. 총 전과 16범으로, 별명은 대도(大盜) 였다.


2. 생애[편집]



2.1. 1998년 이전[편집]


1944년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태어난 그는 고아 출신으로 15살 때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을 시작하여 1982년 이전까지 11차례나 붙잡혀 감옥살이를 한 전력이 있었다. 한때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 고려병원 이사장 조운해[4], 장영자를 비롯하여 국회의원, 부유층 등 유명인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만 골라서 털었으며 그가 훔친 물건 중 장영자가 소유한 막대한 가격의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5]

조세형은 자신에게 도둑질을 당한 몇몇 집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쉬쉬했다는 발언을 했으며 사과박스 등의 뇌물같이 불법으로 얻은 돈 때문에 그랬다는 소문이[6] 퍼지기도 했다.

훔친 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자신만의 절도 원칙을 분명히 한 도둑으로 유명하다. 그가 2차 공판에서 밝힌 5원칙은 다음과 같은데 첫 번째와 세 번째[7]는 지켜지지 않았다.

1. 나라 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외국인의 집은 털지 않는다.

1. 다른 절도범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판·검사집은 들어갔다가도 그냥 나온다.

1. 연장사용금지.

1. 가난한 사람의 돈은 훔치지 않는다.

1. 훔친 돈의 30∼40%는 헐벗은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위의 5원칙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영업시간 준수(...)'라는 원칙도 있었는데 조세형은 밤에는 전혀 밖에 나가지 않는 소위 '낮티[8]'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사이의 시간대가 그의 영업시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세형의 첫번째 부인은 이것 때문에 남편이 도둑일 것이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못했고 그를 보석 도매업자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재벌들이 사는 집들은 난관이 있다. 바로 높은 담. 조세형은 이 높은 담을 넘을 수 있는 재능이 있었는데 서전트 점프 높이가 무려 80cm로[9] 거의 월드 클래스 수준으로 점프력이 높았다. 1938년생의 평균 신장이 164.4cm인데 그는 10cm 더 큰 175cm다.

그가 담 넘을 때 필요한 건 딱 두 가지였다.

1. 담벼락 돌출된 부분에다 한쪽 발을 딛고, 2. 몸을 공중으로 붕 뛰어서 담장에 손끝을 걸치면 게임 끝.

또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 자택에서 권총 3정과 실탄 2백여 발을 훔쳐나와 장충동 파출소에 몰래 갖다 놓은 일(...)도 있었다.

당시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주로 부유층을 털었던 조세형을 영웅, 의적 등으로 미화하는 풍조가 퍼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82년 11월에 체포된 조세형은 1983년 4월에 자신이 갇힌 법원 구치감에서 탈출하여 5박 6일간 피신했다. 특히 탈주 나흘째는 그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의는 파란 죄수복 바지에 위에는 난닝구 차림에 퍼진 명성과는 다르게 추레한 모습으로 살았다. 이때까지 자기가 대도로 유명해지는 걸 몰랐지만 부잣집만 턴다는 사실이나 자신만의 원칙 등이 민중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돼 버렸다. 신문에는 자기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나왔고 그를 '도학의 대가', '도학박사'라고 지칭하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신문을 찾으러 몰렸다 하면 대도의 인기였고 술에 꽐라가 된 취객이 신문사에 전화해서 "아이, 그 조세혀엉... 그사람 조은 사람가타요... 안 자폈으면 조켔어요..."하면서 끊는 일도 있었다. 이 정도로 여론이 대단했다.[10] 그는 한 2층 집 담을 훌쩍 넘으면서 그 주택에 칩입해 멀끔하고 사이즈가 딱 맞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면서 "누굴 털어볼까?" 생각하다가 대도의 품격에 걸맞게 털 타겟을 정했으니 바로 범삼성가의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의 집이다.

탈주 엿새째 장충동에서 동네 고등학생 이 군(18)이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길을 걷다가 본 한 남자가 전날 신문에서 본 조세형임을 알아채고 뒤돌아 쫓아가서 얼굴을 다시 확인했더니 들키지 않으려고 볼에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만들어서 그 표정으로 계속 돌아다녔다고 한다. 감추려는 걸 보니까 확실해진 이 군은 바로 파출소에 달려가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즉시 순경 둘이 출동하고 수색 도중 조세형을 목격하면서 "야! 너 조세형이지?!"라고 말하자 조세형이 "그래."라고 응수한 뒤 도주하며 곧바로 경찰과 조세형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순경이 조세형을 쫓으며 "야! 조세형! 너 거기 안서! 야 이 자식아!", "조세형 잡아!" 라고 고함을 쩌렁쩌렁하게 질렀으며 이를 들은 주민 2백여명이 나와 버리는 바람에 골목이 막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조세형은 건물을 넘어다니며 도주하다가 어느 가정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는데 경찰관이 소리쳤다. "저 집이다! 저 집 안에 있다!" 알아낸 방법은 온 동네 주민들이 다 나와서 구경하는데 인질로 잡힌 사람들 집만 안 나왔다는 것이다. 그 집에 도착한 후 초인종을 누르는데 답이 없었다. 몇 번 다시 눌러 보니 그 집 아주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왔다. 경찰관이 "조세형 여기 안 왔습니까?" 라고 물으니 아주머니가 "아무도 안 왔는데요?" 라고 말하며 몰래 손짓으로 안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눈치 챈 경찰관이 "알겠습니다. 가볼게요" 라고 말하며 권총을 꺼내고 발소리가 안 나게끔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갔다. 경찰관이 집 안으로 들이닥치자 조세형은 욕실 안에서 문을 닫은 채 그 집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경찰관이 욕실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조세형은 도로 문을 닫았으며 경찰관이 다시 문을 열려고 하니 조세형은 문고리를 붙잡고 버텼다. 경찰관이 "조세형! 너 이제 끝났어! 빨리 문 열어! 문 안 열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조세형은 대치 끝에 욕실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경찰관의 권총에 피격당한 채 검거되었다.

검거 과정에서 처음에는 가스총을 맞았지만 그 다음에는 실탄을 맞았다. 그것도 머리에. 병원에 실려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병원 안에 수백 명 넘는 기자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응급수술 후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그 날 바로 구속됐다. 추격하고 검거한 파출소 순경 2명은 바로 1계급 특진했고 조세형을 잡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신고한 주민 이 군은 현상금 600만원 + 격려금 600만원 = 1200만원 포상금(지금으로 치면 약 4천 3백만 원)과 더불어 전두환 前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수여하고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줬다. 특히 신고자인 이씨는 1994년 10월 21일 MBC <그사람 그후>에 따르면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 소속 경찰관으로 근무했다고 전해졌다.(당시 사진)

이후 그는 법원에서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고[11] 흉악범 수용으로 이름난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 내내 무릎을 꿇고 수갑을 찬 채 엄정 독거수용을 당했다. 조세형 본인은 자신이 부유층을 골라서 털어서 괘씸죄로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세간에서도 조세형이 출소할 시 부유층이 입막음조로 중형을 내리도록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12] 하지만 상습 범죄자였고 워낙 도둑질한 돈이 많았던 만큼 그리 불합리한 판결인 것은 아니다. 범죄 횟수가 11번이니까 그 범죄 하나하나에 일일이 징역을 매겨서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한민국의 형법 체계는 영미법계가 아닌 대륙법계를 수용하고 있어 형기를 단순 합산하는 병과주의가 아니라 가장 중한 죄에 정한 형을 가중해서 처벌하는 가중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흡수주의와 병과주의로 보충하기에 위의 주장은 오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수감 중이던 1990년에 그는 개신교에 귀의했고 형기가 끝나 가던 1998년 4월에 보호감호 7년이 적용되어[13] 청송보호감호소로 옮겨지게 되자 조씨는 '보호감호 재심 처분'에 들고 일어났으나[14] 1심에서 법원이 재범의 우려가 있는 데다 수감 기간 동안 기술을 익히지 않았다는 점을[15] 들어 조씨가 패소했지만 이후 항소심에서 "종교적 귀의는 진실되며, 15년의 수감 생활을 통해 쇠약해진 몸에 이미 50대에 이르러 재범 가능성은 작다"며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주었고 1998년 11월 26일에 마침내 출소했다.


2.2. 1998년 이후[편집]


출소 후에는 에스원에서 그에게 많은 수당을 주며 자문위원으로 모셨고 경찰행정학이 개설된 대학을 비롯해 각급 학교와 청소년단체에서 선도강사로 초빙되고 교회들은 그에게 신앙간증을 요청했다. 게다가 옥중에서 뒷바라지를 한 여성과 결혼도 했다.[16]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되었다. 나중에 늘빛선교회라는 선교단체를 설립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고 일본의 노숙자들을 구원하겠다며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그것도 더불어 지상파 방송 3사에서 섭외해 달라는 연락이 자자했다. 그래서인지 SBS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1998년 12월 6일자에 출연했고 동월 10일 및 22일에 KBS2 <추적 60분>과 MBC <PD수첩>에서도 관련 내용을 다뤘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의적에다 훌륭한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꼽혔던 그는 2000년 11월에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주택 3곳을 털다가 현지 경찰에게 총을 맞고 잡혔다. 초기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신분을 안 드러내려고 했으나 정체가 드러나자 "일본의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러 왔다."며 궁색하게 변명했고 결국 법원에서 주거침입/절도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그는 모범적 수형생활과 한국 지인들의 탄원으로 2004년 3월에 출소 후 귀국해 은거했다. 그런데 2005년 3월 2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모 치과의사 집에 침입해 165만 원 어치의 손목시계를 훔쳐서 걸려 3년을 또 복역했고[17] 2010년 5월 4인조 금은방 강도들이 훔친 귀금속 1억 원어치를 팔고 수수료 1천만 원을 챙기는 등 장물아비 노릇하다 걸렸다. 검거 당시 전기 다리미를 휘두르면서 저항했다고 한다. 결국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위에 나온 장물 알선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2011년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출소했으나 교도소 앞 10m를 걷던 시점에서 대기 중이었던 경찰에게 연행됐다. 그 이유는 2년 전 부천 강도 사건 범인 민모 씨 등 2명이 조세형을 용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조사에서 그는 10년 전 강도 사건 당시 일본 경찰에게 총을 맞아 다친 오른팔을 근거로 "나는 도둑이며, 강도짓은 안 한다"며 결백을 증명한 한편 수십 년간 해 온 도둑 경력을 늘어놨다. 이후 12월 22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2년 전 범행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2년부터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와 계약을 맺어 자서전을 내려고 했으나 75세인 2013년 4월 3일에도 강남의 고급 빌라를 털다가 빠루로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지만 바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만년필로 저항하다 바로 잡혔다. 그 결과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출소 직후인 2015년 10월에 또 구속됐다. 이는 9월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한 고급빌라에서 까르띠에, 쇼파드 등 명품 브랜드를 포함한 시계 5점과 반지 8점 등 총 5억 67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이며 2016년 3월 3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급기야 목사 출신 범죄자의 일례로 거론되며 개신교의 목사 배출 제도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까지 제시될 정도였다. #

이에 대해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표창원(전 경찰대학 교수. 이후 20대 국회의원 역임)은 후술할 시사저널 칼럼에서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재범을 유발시켰다고 분석하여 캐나다와 영국의 사례와 같이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재범률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기출소 후 그는 81세인 2019년 6월 1일 오후 9시 서울 광진구에 있는 다세대 주택 1층 방범창을 뜯고 침입하여 현금이 든 저금통을 훔쳐 달아났으나 범행 6일 뒤에 폐쇄회로 CCTV를 분석한 경찰은 그를 동대문구의 그의 자택에서 검거하였다. 비록 그가 훔친 금액은 몇만 원밖에 안 되지만 광진경찰서는 그의 범행이 상습적이라 9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2019년 8월 22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에 그는 항소했으나# 항소심에서도 1심의 실형이 그대로 선고되었다.#



2022년 2월 22일에 출소 예정이었으나 2021년 12월에 출소 후 2022년 1월부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의 고급 전원주택에서 총 3번에 걸쳐 금품 3천 3백만원어치를 훔치다가 동년 2월 17일 용인동부경찰서에 구속되었고 9월 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동년 12월 7일에 2심에서 피해자와 합의하여 1년 6개월로 감형받았고 2023년 2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실형이 확정되었다. 구속된 날짜를 고려할 때 2023년 8월에 출소했을 것이다.

3. 여담[편집]


  •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버릇은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시에도 해당된다.

  • 대도라고 불렸지만 좀도둑 노인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해도 손색이 아니다. 본인도 잡혀올 때마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보면 더더욱. 게다가 젊은 시절의 도둑질 원칙마저 깨 버렸으니 스스로가 더 젊은 시절의 모습과 멀어지는 걸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도둑질 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 어린 시절 김춘삼 밑에서 말단거지로 있었다고 한다. 소설 왕초나 드라마 왕초의 내용이 100% 거짓이라고 폭로한 것도 조세형 본인이었다.

  • 김성모의 대털에 따르면 한국 최고의 대도라고는 불리나 시대상을 감안해 봤을 때 후대의 김강용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9년 MBC 드라마 <80년대 10대사건 시리즈 범죄> 3탄에서 다룬 바 있는데 배우 이동신이 연기했다.
  • 1993년 5월 23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김종구가 연기했다.
  • 1995년 10월 14일자 KBS2 <그때 그 사건>에서 재연극 형식으로 다룬 바 있는데 극본은 김미경, 연출은 나상엽 PD이며 배우 강태기가 연기했다.
  • 1996년작 영화 <투캅스 2>에서 한성식 배우가 연기한 역할이 조세형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작중에서도 본명 언급 없이 대도라는 별명으로만 불리고 체포될 뻔하다가 도망치는 장면도 있는데 제법 날랜 모습을 보여주며 부유층, 고위층(작중에서는 무려 검찰총장)의 집을 터는 점, 집안 곳곳에 물건을 숨겨 둔 방법이나 물방울 다이아도 나오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황지우 시인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라는 시에서도 조세형이 언급되는데 이 시는 1983년에 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수록됐으며 2014년 수능특강 국어 B형에 나왔다. 또 천재교육과 미래엔 고등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 2021년 6월 3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의 13화에서 해당 사건을 다뤘다. 상술된 이혼한 아내도 출연했다.
  • 2023년 11월 10일, E채널 용감한 형사들 3의 12화에서 해당 사건을 다뤘다.

5. 참고/관련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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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민등록상 1938년생이지만 그는 실제로는 1944년생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는 82세로 나왔다! (2021년 기준)[2] 과거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녀가 죽는 일과 이후에 태어난 동생이 형&언니의 호적을 그대로 물려받는 일이 잦았다.[3] 그의 스승이 김춘삼이었다. 훗날 조세형은 김춘삼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왜곡되었는가에 대해 폭로한 바 있다.[4] 이병철 회장의 첫째 사위다.[5] 당시 다이아몬드는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6] 굳이 검은 돈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이 널리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도 하다.[7] 사실 연장 없이 문단속이 철저한 부잣집을 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말한 연장이 범죄계에서 흉기를 뜻하는 은어일 수도 있다. 물론 아래에서도 나오듯 경찰에게 이것저것 휘둘렀으니 어차피 안 지킨 건 맞다.[8] 도둑 세계의 은어로 대낮에 활동하는 도둑을 말한다.[9] 2020년대의 대한민국 농구, 배구선수들의 평균보다 높다(농구대통령이라고 불린 허재의 점프 높이가 70cm고 배구황제인 김연경의 점프높이가 60cm다.)(!). 서전트 점프의 기록이 높은 편인 역도선수들의 평균이 80cm다.[10] 당시는 독재정권 치하였고 청와대,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 안기부에 이래라 저래라 해서 보도지침을 만들고 조작된 기사도 많았으며 정치적 기사에는 엄청 민감했다. 또 아무리 엄청난 일이 벌어져도 9시가 '땡'하고 정각이 되면 늘 '전'두환 대통령이 제일 먼저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조세형 같은 경우는 형식적으로 절도범과 관련된 정치와는 관련 없는 기사이기 때문에 위에서는 거의 간섭을 안 했다고 했다. 결국 이 점을 이용해서 대도의 기사로 권력층을 돌려 깐 셈.[11] 판결을 내린 판사가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석수다.[12] 이 때문에 조세형 검거에 결정적 공을 세웠던 이 군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오죽하면 이군이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했을 정도였고 언론에서도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13] 1989년에 사회보호법이 개정되면서 7년으로 고정되었다.[14] 그의 변호는 엄상익 변호사가 무료 변론 형식으로 맡았다.[15] 이는 15년간 엄정독거를 당한 점을 고려하지 않아 재야/인권단체에서 비판이 일었다.[16] 현재는 이혼했고 조세형은 재혼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처는 결국 불교로 개종하고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본래는 중소기업 CEO였다고 한다.[17] 20세기처럼 40cm 드라이버로 창문 따기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21세기는 20세기와 달라졌다는 것이다. 창문 열자마자 보안장치가 울리고 경비업체랑 경찰들이 바로 출동했다. 더군다나 그 보안장치는 본인이 자문했던 보안회사에서 만든 보안장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