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퓰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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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중년기
2.3. 장년기 : 황색언론을 주도하다
2.4. 말년기 : 신문왕의 몰락과 퓰리처상의 제정


1. 개요[편집]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년 4월 10일 ~ 1911년 10월 29일)는 미국의 기자, 신문사 경영인이다.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풀리체르 요제프(Pulitzer József)'이다. 헝가리인은 동양인처럼 성이 이름 앞에 온다.

2. 생애[편집]



2.1. 젊은 시절[편집]


1864년 미국(북군)에서는 남북전쟁에 참전할 외인부대원을 유럽에서 모집했었다. 일종의 용병이나 다름 없었는데, 당시 미국은 징병 없이 돈으로 병사를 모집했으며, 해외에서도 모집했다. 퓰리처는 이렇게 외인부대원이 되기 위해 미국에 오게 된다. 그는 헝가리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할 수 있었고, 독일어는 모국어만큼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연방국이었기 때문에 독일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이다.[1] 당시 미군에는 병사의 모어 별로 구성된 외인부대가 존재했는데, 퓰리처는 독일인 부대에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를 태운 배가 미국으로 입항하기 하루 전, 선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몰래 엿듣고 자신이 취업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외인부대원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으나 사실은 격오지로 가는 일당노동자 모임이었던 것. 퓰리처는 그 길로 대서양에 뛰어들어 항구까지 3시간동안 헤엄쳐서 도망쳤다. 다리에 쥐가 나서 죽을 뻔했는데 우연히 항구에 떠다니던 나무토막을 붙잡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에 가서 북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그의 입대원을 처리하던 인사계 상사가 그만 이름을 너무 휘갈겨써서 이름이 졸지에 '조지프 파울레체스'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이름을 짧게 줄이고 미국식으로 읽어 현재 우리가 아는 '조지프 퓰리처'라는 표기가 되었다.이때 받은 몸값이 200달러였다.

하지만 원래 군대체질이 아니었는지, 복무 내내 관심병사 노릇을 했고 하사관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선임하사가 점호중 모욕적인 언사를 구사하자 [2] 죽빵을 날려 중상을 입혔고, 상관폭행죄로 영창에 갇히고 총살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운좋게 부대가 개편되는 바람에 집행이 유예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제대하였다.

2.2. 중년기[편집]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8년,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하여 독일계 신문인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기자로 들어가 고생을 죽도록 한다. 이 당시 퓰리처는 각종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부자와 정치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취재, 폭로기사들을 통해 권력층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매우 열정적인 기자였다. 이렇게 기자로서의 능력과 두각을 나타내어 이듬해에는 미주리 주 의원으로 당선, 1873년에는 아예 자신이 몸담았던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경영자가 되었다.

1878년 퓰리처는 파산 직전의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를 인수하고 이를 '이브닝 포스트'랑 합병,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가 되었다. 퓰리처는 기자로서 다져진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언론사 경영자의 수완을 십분 발휘했고, 이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문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883년, 역시나 파산 직전이던 '뉴욕 월드' 지를 인수한다.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센세이셔널한 보도와 공격적 마케팅을 통해 몇 년 사이에 뉴욕 월드를 전미 발행부수 1위의 신문으로 만들어버린다.

당시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이 프랑스에서 제조되었지만 미국까지 운반하고 재조립할 비용이 없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를 미국에 옮겨 와 뉴욕항에 세운 것도 바로 '뉴욕 월드'지의 모금 캠페인 덕분이었다. 당시 퓰리처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

2.3. 장년기 : 황색언론을 주도하다[편집]


'뉴욕 월드'는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문이 되었지만 몇 년 후 강력한 도전자의 추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경영하는 '모닝 저널'이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허스트는 꽤나 비열한 방법을 썼는데 바로 재벌이었던 허스트 자신의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신문값 인하 경쟁을 주도해서 한때 1부당 1센트까지 내려버렸고,[3] 동시에 뉴욕 월드에 근무하는 민완 기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빼가기 시작했다. 이런 치킨게임에 의해 신문팔이로 생계를 연명하던 소년가장들이 고통받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 '뉴욕 월드' 일요판에서 연재하던 인기 만화, 아웃콜트(Outcault) 작가의 '호건의 골목길(Hogan's Alley)'에 등장하는 "황색 소년(the yellow kid)"을 놓고 벌인 싸움은 두 신문사 진흙탕 싸움의 결정적 순간으로 꼽힌다. 모닝 저널에서 Hogan's Alley의 작가 아웃콜트를 거금을 주고 스카우트하자 뉴욕 월드는 거기서 더 얹어서 다시 아웃콜트를 스카우트한다. 이에 맞서 모닝 저널은 거기에 더 얹어 아웃콜트를 스카우트하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스카우트 경쟁속에서 아웃콜트는 결국 모닝 저널을 선택했고, Hogan's Alley는 모닝 저널에서 새로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뉴욕 월드는 노란 아이의 특허신청을 해놔서 괜찮다며 다른 작가를 스카우트 해와 노란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만화를 연재시키기 시작했다. 옐로우 저널리즘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바로 이 신문 만화의 주인공, 노란 아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진흙탕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미국-스페인 전쟁을 조장하는 신문까지 발행했을 정도로 이들의 행보는 매우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부패한 정치권을 비판하던 퓰리처였으나, 정작 자신이 권력을 쥐니 그 부패했던 정치권을 답습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러한 황색언론 경쟁을 비판해오던 잡지 더 네이션 (The Nation)의 편집인이었던 에드윈 고드킨(Edwin L. Godkin, 1831~1902)은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 1898년 2월 24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언론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지난 주에 이 두 신문이 한 행동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사실을 전반적으로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지어내고, 심지어 이런 지어낸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엉터리로 없는 제목을 달고,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이 두 신문의 이슈가 사회 전체로 전파되고 있다. 단순히 더 많은 신문을 팔기 위해 인간이 이런 잘못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강준만, <황색 저널리즘’은 어떻게 탄생했나? _ 퓰리처와 허스트의 신문 전쟁>에서



2.4. 말년기 : 신문왕의 몰락과 퓰리처상의 제정[편집]


허스트의 물량공세로 인해 순식간에 1인자에서 내려온 퓰리처는 젊었을 적 중노동을 겪은데다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 등으로 1890년경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늘 두통과 신경증에 시달렸으며 특히 시력저하가 심각해 말년에는 끝내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1903년경부터는 일선에서 은퇴하다시피하여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말년에는 '뉴욕 월드' 시절 행보를 후회하며 "신은 '뉴욕 월드'를 위해서 나의 눈을 빼앗아간 것이 틀림없다." 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평생을 미국 저널리즘계의 풍운아로 살아왔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1911년 타계하기 전까지 언론계와 관련해 여러 활동을 펼쳤다. 언론인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필요하다며 컬럼비아 대학에 신문학과를 설립하기 위한 후원 활동을 펼쳤다. 사망 후에는 그의 유산을 바탕으로 5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하여 그 해 저널리즘에 기여한 미국 언론인에게 주는 상을 제정했다. 이것이 바로 퓰리처상. 퓰리처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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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트라아 제국 선포 전에는 오스트리아 대공이 헝가리 왕을 겸하는 합스부르크 제국 형태였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되며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지며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소속이면서도 오스트리아와 별개의 자치를 인정받게 된다.[2]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한다.[3] 물론 뉴욕월드라고 해서 땅파고 장사할리는 없었고, 그 만큼의 재원을 광고비로 충당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