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아 윌러드 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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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iah Willard Gibbs. (1839-1903)

1. 개요
2. 생애
3. 상세



1. 개요[편집]


미국물리학자, 화학자.


2. 생애[편집]


상류층 출신이며, 그것도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조상들 중 조나단 딕킨슨 [1] 목사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설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새뮤얼 윌러드는 임시 하버드 대학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자 예일 대학교 신학 및 언어학 교수인 조사이어 윌러드 깁스 1세 [2] 였다 [3] [4].


3. 상세[편집]


루트비히 볼츠만과 더불어 열역학통계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과학자로, 열역학의 함수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하여 학문적으로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애초에 통계역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사람이 고안했다고도 한다. 앙상블이라는 개념 그 자체 [5], 깁스 자유에너지, 깁스-듀헴 방정식, 깁스 삼각형 등으로 유명하다. 또, 올리버 헤비사이드와는 독자적으로 벡터 미적분학을 정립하고 전자기학에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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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계 [2] 아들에게 그대로 같은 이름을 물려주었으며, 따라서 이쪽은 조사이어 윌러드 깁스 2세가 된다. [3] 요즈음은 테뉴어는 둘째치더라도 교수들의 봉급이 제자리걸음에다가 대학의 기업화 현상으로 인해 교수들이 업무과다에 시달리는 데다가 점점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기에 믿기기 힘들겠지만, 정말로 고학력자들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금전적으로도 상류층에 속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학력자가 상류층이었던게 아니고 돈 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고등학교 가고 대학가고 박사받고 고학력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대다. 옛날에도 대학교수는 명예로운 직업이지 돈 잘 버는 직업은 절대 아니었다. 돈 있는 집안이라야 오랜 시간 수입없이 공부만 해서 교수되겠다는 자손을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깁스 집안도 단순히 지식인 가문이 아니라 상당히 부유한 가문이었다. 1903년 깁스가 사망했을 때 남긴 재산은 당시 돈으로 10만 달러, 오늘날 화폐가치로 300만 달러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재산은 교수 월급 받아 모은 것이 아니다. 깁스가 예일대에서 교수된 지 10년후에 연봉이 2000 달러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깁스의 유산은 10년차 교수 연봉 50년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애초에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단 소리. [4] 조상들 중 유독 목사가 많이 눈에 띌 텐데, 계몽주의와 그 여파로 인한 성직과 세속 학업의 분열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옛날에는 성직자가 곧 지식인이었다.[5] 단, 바른틀 앙상블의 경우 원래는 볼츠만이 처음 언급하였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듬고 집대성한 것은 깁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