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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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 감페르의 역임 직책







스위스의 스포츠인


파일:Joan_Gamper_1910_years.jpg

이름
주안 감페르
Joan Gamper
본명
한스막스 감퍼헤시그
Hans-Max Gamper-Haessig[1]
출생
1877년 11월 22일
스위스 빈터투어
사망
1930년 7월 30일 (향년 52세)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적
[[스위스|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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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럭비선수
소속
선수
FC 엑셀시오르(1894~1896)
FC 취리히 (1896~1897)[2]
FC 빈터투어 (1897)
FC 바르셀로나 (1899~1903)[* 초대 창립자 겸 초대 선수, 초대 주장]
감독
FC 바르셀로나 (1908~1917)[* 초대 회장 겸 초대 감독.]
경영
FC 바르셀로나 (1908~1909 / 회장)
FC 바르셀로나 (1910~1913 / 임시 회장)
FC 바르셀로나 (1917~1919 / 임시 회장)
FC 바르셀로나 (1921~1923 / 임시 회장)
FC 바르셀로나 (1924~1925 / 임시 회장)

1. 개요
2. 일생
2.1. 선수 경력
2.1.1. 초기
2.1.2. 잠시 잊혀둔 스포츠
2.2. 감독 경력
2.2.1. 바르셀로나의 회장&감독 1기
2.3. 회장
2.3.1. 바르셀로나 2기
2.3.2. 바르셀로나 3, 4기
2.3.3. 바르셀로나 5기
3. 사망
4. 기타




1. 개요[편집]


FC 바르셀로나는 죽을 수 없다. 만약 지금 아무도 클럽의 회장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회장이 될 것이다.

FC Barcelona cannot die. If no one wants to take over the club's job now, of course I will.

1908년, 31살의 나이의 주안 감페르

스위스 국적의 前 축구 선수이며, FC 취리히의 초대 설립자 겸 선수였다 또한 스페인의 축구 클럽인 FC 바르셀로나초대 선수 및 초대 주장, 초대 감독이자 초대 회장이다. 그는 럭비, 테니스, 골프, 축구 등 많은 스포츠 종목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FC 바르셀로나에서 뛸 당시 51경기 120골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주안 감페르 트로피라는 대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FC 바르셀로나도 없었을 것이다.

2. 일생[편집]


주안 감페르는 스위스의 빈터 투어에서 5남매 중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8살때 그의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취리히로 이사를 갔다. 그의 어려운 형편에 빛이 되어준 것은 바로 스포츠였다.

그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 관심을 가졌다. 육상도 즐겼고 사이클경기에서 우승도 했다.

가장 좋아했던 스포츠는 축구였다.

2.1. 선수 경력[편집]



2.1.1. 초기[편집]


축구를 사랑했던 주안 감페르는 1894년 17살의 나이에 FC 엑셀시오르라는 스위스의 한 축구팀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19살의 나이에 FC 취리히를 공동 창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FC 취리히주장이 되었다.

파일:조안 감페르 1896.jpg
1896년FC 취리히에서 뛸 당시의 주안 감페르
1년 후,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의 팀인 FC 빈터투어로 이적하고 한 경기를 뛴 뒤, 자신이 좋아하던 다른 스포츠 종목인 럭비 팀에 들어가게 된다.

2.1.2. 잠시 잊혀둔 스포츠[편집]


1898년 10월, 그가 삼촌이 있는 카탈루냐로 이사를 한 뒤, 그는 잠시 Sarria 철도 회사에서 수석 회계사 및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그는 또한 두 개의 스위스 신문사에서 일했으며 Los Deportes 잡지출판을 도왔다.

2.1.3. FC 바르셀로나를 설립[편집]


파일:감페르와 친구들.jpg
바르셀로나 창립 기념 촬영
1년 후, 그는 자신의 축구 클럽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Los Deportes의 신문 광고를 통해 축구 클럽을 같이 설립할 사람을 찾았다.

파일:바르셀로나 창단 광고.jpg
그 당시의 신문에 있었던 광고다.
그렇게 36명의 개신교인 회원들과 함께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의 축구 클럽을 설립했다.

감페르는 클럽의 원동력이었지만 처음에는 이사회 멤버이자 클럽 주장으로만 선택했다. 그는 아직 22살이었고 그가 좋아하는 축구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는 FC 바르셀로나의 초대 선수로 활약하여 1899년부터 1903년까지 51경기 120골이라는 미친 활약을 하며 바르셀로나의 첫 주장이 되었다.

1900-01년, 그는 클럽의 첫번째 트로피를 가져다 준 카탈루냐 축구 선수권 대회[3]를 우승한 FC 바르셀로나의 일원이었다. 1903년, 그는 최초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뛰었다. 결과는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2-1로 패했다.

당시 스페인 헌법종교천주교만 허용했기 때문에 감페르를 포함한 많은 선수들이 클럽을 떠나야만 했다.

2.2. 감독 경력[편집]



2.2.1. 바르셀로나의 회장&감독 1기[편집]


그 당시의 FC 바르셀로나는 경기장도 빌려야만 했고 재정난에 휩싸여야만 했다.

클럽은 1905년, 카탈루냐컵 이후로 트로피를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그 결과 재정이 악화되었다.

클럽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감페르는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가톨릭인인 스위스인과 결혼을 하여 바르셀로나의 회장직을 맡을 수가 있었다.

그는 1908년에 회장 겸 감독으로 바르셀로나에 들어가게 된다.

파일:새 경기장.png
바르셀로나의 첫번째 경기장의 사진
1909년까지 여러 경기장을 빌리며 사용하다가, 지역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하고 1909년 3월 14일에 약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인 Carrer Indústria를 구매했다.

스위스인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당국에 맞서 싸우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계속 비난을 받았다.

2.3. 회장[편집]



2.3.1. 바르셀로나 2기[편집]


그는 더 많은 응원단을 모집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1912년에는 바르셀로나 최초이자 유일한 아시아인 파울리노 알칸타라를 영입하기도 했다.

2.3.2. 바르셀로나 3, 4기[편집]


1917년까지 회장 겸 감독이였던 그는 감독직을 포기하고 회장 역할에 의존하게 되면서, 잭 그린웰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팀이 지속적으로 우승을 하는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하자 팀 팬의 평균 경기장으로 오는 사람 숫자가 10,000명이 넘어갔고 재정에 여유가 생긴 FC 바르셀로나는 약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캄 데 레스코르츠 경기장을 짓게 된다.

2.3.3. 바르셀로나 5기[편집]


1925년 6월 14일, 카탈루냐보르본 왕조로부터 독립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카탈루냐 합창단을 위한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14,000명의 관중들은 스페인 국가가 나올 때면 야유를 하고 영국 국가가 나올 때는 박수를 쳤다. 그 당시의 회장이 감페르였기 때문에 스페인 당국은 강한 처벌을 내리게 된다.

1925년 6월 24일, 그 경기장은 6개월 동안 폐쇄되기로 결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감페르가 회장직에서 쫒겨나듯이 내려왔다.

3. 사망[편집]


1929년에 대공황으로 인해 모든 자산을 잃은 그는 우울증으로 인하여 1930년 7월 30일, 자신의 주거지에서 52세에 총으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이를 기리며 장례 행렬을 했고 현재 바르셀로나의 몽주크 묘지에 묻혀있다.

4. 기타[편집]


1966년, 그 당시의 FC 바르셀로나 회장이였던 Enric Llaudet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한 트로페우 주안 감페르를 만들었다. 이 대회는 바르셀로나의 프리 시즌에 반드시 치러진다. 자세한 내용은 트로페우 주안 감페르 문서 참조.

2016년, 취리히 중심부에 있는 작은 거리가 그에게 헌정되어 "Gamperstrasse"라고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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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인명에 있는 붙임표(-)는 무시한다. 단, 줄표의 앞뒤를 별개의 단어로 보아 띄어 쓰지는 않되, 연음 등은 고려하지 않고 표기한다.[2] FC 취리히의 공동 창립자이며, 최초의 FC 취리히주장이였다.[3] 1901년에 창단해, 1940년에 철회된 카탈루냐 컵 대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