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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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은
曺洋銀


파일:조선교사.jpg

출생
1950년 1월 18일 (74세)
전라남도 광주시 지산동
(現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본관
창녕 조씨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4cm, 67kg
종교
개신교
학력
한세대학교 신학석사(M.Div.)
직업
조직폭력배, 現 선교사[1]
가족
부인 김소영, 조수빈[2]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본격적인 활동
2.3. 출소와 자기 미화 시도
2.4. 무늬만 갱생
2.5. 무죄로 끝난 필리핀 교민 폭행사건
2.6. 선교사의 길
3. 미디어에서



1. 개요[편집]


한국의 전 조직폭력배이자 현재 개신교선교사.


2. 생애[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1. 어린 시절[편집]


고등학생 때는 아예 조직을 만들어서 광주 시내의 조폭 싸움에 개입했으며, 유튜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소년부 송치를 받았지만, 이미 나이가 차서 소년원에 간 건 아니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에는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함께 화신8인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서울상경했다.[3]


2.2. 본격적인 활동[편집]


1969년부터 서울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무교동의 조창조, 정학모, 오종철# 세력에 편입됐다. 1975년 그들의 지령을 받고[4] 사보이호텔에서 신상사를 습격했으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전쟁은 결국 무교동파 세력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언론에 알려지기로는 이때 칼부림을 해 김두한 시절의 낭만파 주먹의 계보를 끊고, 속칭 말하는 조폭시대를 연 장본인으로 사시미칼을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보이호텔 습격 당시에 회칼은 쓰이지 않았으며, 조양은을 비롯해서 관련자들도 꾸준히 칼을 썼다는것은 부인한다. 실제로 조양은은 도망다니다 체포 된 뒤 사보이호텔 사건으로는 1심에서 실형 1년, 2심에서 징역 10월에 집유 2년으로 풀려나왔는데, 칼을 써서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면 그런 형량은 불가능하다. 한편 조양은은 호남선배들이 자신과 맞붙힐려고 픽업해온 김태촌이 처음으로 칼부림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조폭의 무기사용은 해방 이후부터 흔했다. 소위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를 존중했으니, 무기를 안쓰고 일대일 주먹 싸움만 했다느니 하면서 낭만파 주먹이라는 하는 것은 모두 후대의 미화이다. 오히려 해방 직후부터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칼과 손도끼는 물론 총격전도 서슴지 않았으니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 조폭들의 무기사용이 줄어든 셈이다.[5]

이 사보이 호텔 사건은 참 잘못 알려진게 많은데 대표적으로 조양은에게 신상사가 패배하거나 칼에 맞아 은퇴했다는 설이다. 실제로는 조창조, 정학모, 오종철, 조양은 세력의 완패로 끝났다.[6] 이 일로 조양은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다녔다. 조양은의 자서전에 따르면 3년간 도망다니면서 보디가드를 50명씩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대구의 동성로파와 부산의 칠성파 등 경상도 선배들이 많이 도와줬다. 김태촌과 조양은측은 서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으나[7] 결국 1978년 화해하고 조창조가 신상사에게 사과하면서 함께 데려가서 사과를 시켰다고 한다.#

이후 기존 조직원들을 모아 1978년 정식으로 양은이파를 출범시켰다. 1980년대에는 OB파[8]와 양은이파, 범서방파(두목 김태촌)와 함께 언론에 알려지기로는 전국의 3대 조폭으로 불렸으며,[9] 그중 조양은은 양은이파를 이끌었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는데, 나이로는 김태촌이 조금 더 많지만 조양은이 더 빨리 상경해서 전국구 조폭이 되었으며, 특히 신상사파와의 항쟁으로 조양은이 세력도 커지고 적도 많아지면서 조폭계의 핫 아이콘이 되자 김태촌은 호남계 선배들의 힘을 업고 조양은을 치게 된다. 여기에 김태촌을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동재가 OB동재파로 성장하면서 1980년대를 주름잡게 되는 3대 조폭의 항쟁이 시작된다. 한참 후의 각자의 회고담도 웃긴데, 조양은은 자기가 주도해서 김태촌, 이동재와 만나서 자기가 큰 형, 이동재가 둘째, 김태촌이 막내가 되기로 하고 항쟁을 끝내자고 했으나 김태촌의 배신으로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태촌은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고 이동재는 한참 어린데[10] 무슨 큰형이 조양은이었냐면서 그때의 만남은 호남 조폭 선배가 불러서 얼굴 한 번 봤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에 광주로 갔다가 신군부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2인자 강영신 등 주요 조직원들이 한꺼번에 잡혀 모두 중형을 받으면서 세력이 급감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조양은은 공주교도소에서 고래회도 먹는 등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한 김대중의 아들과 통방했다고도 하며 재야 정치인들과도 인연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88올림픽 전 일주일간 귀휴를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 귀휴는 거물급이 아니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공주교도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11] 이감된 순천교도소에서 1990년 난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수감 생활은 그리 얌전하게 보내지는 않았던 듯 하다.# 순천교도소 사건 이후 조씨는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이때 독방생활은 혹독해서 조씨도 힘들었다고 한다.[12] 이후, 진주교도소, 청주교도소, 대구교도소를 돌아다녔다.

한편 조양은이 구속된 시기 양은이파는 순천시민파와 순천중앙파의 갈등에 끼어들어 시민파 두목 오철묵을 지원해 순천중앙파를 누르고 순천시민파와 동맹을 맺었다. 감옥에 있던 조양은을 대신해 휘하에 들어간 순천시민파 두목 오철묵(오상묵)과 조씨의 부두목인 백영두[13]가 조직을 관리했다. 이때에 80년대 성장한 OB파 이동재가 세력을 키워 양은이파를 흡수하기 위해 전쟁을 걸어왔다. 양은이파 조직원 2명이 칼에 맞아 불구가되자, 오철묵은 강창호와 최낙원 등을 시켜 이동재를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1988년 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던 이동재가 양은이파 작업조에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은퇴하였다. 이후 이동재는 미국으로 떠난다.# 한편 1989년에 조직을 배신한 골든벨스탠드바 주인 박정세[14]를 행동대장 심경숙, 조직원 김태형, 임시택 등을 시켜 내부숙청을 해 박정세를 마구 칼로 찔러 살해하려고 하였다.#,# 허나 이 같은 연달은 칼부림은 오철묵과 양은이-순천시민파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1990년 개시된 노태우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때 오철묵과 조직 주요 간부들이 대거 잡혀가 중형을 받으면서 세력이 급감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조양은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으며 95년 3월에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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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수감중이던 1994년에는 통역사였던 김소영씨와 옥중 연애를 하고 결국 1995년에 출소 직후 결혼을 한다.[15] 결혼식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했고 주례는 조용기 목사. 김용건, 김수미,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이명박, 김덕룡, 정호용, 김형오, 정재철, 유수호, 백남치, 박명근, 김호일, 신순범, 이철, 최재승, 성무용이 화환을 보냈다. 옥중중매를 서준 사람이 같은 조폭인 조일환[16]인데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주 가관이다. 조일환이 자신의 지인인 조양은의 현 장모에게 조양은의 정체를 "전두환에게 찍혀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민주화 투사"라고 속였고, 조양은의 장모가 거기에 낚였다고 한다. 김모씨는 조양은이 출소할 때까지 조폭인 줄 몰랐고 얼마 뒤에 조폭부하들이 인사하러 찾아왔을 때 알았다고...


2.3. 출소와 자기 미화 시도[편집]


출소 이후 자신의 조폭활동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출소 직후에는 자신이 조폭들의 칼부림을 없애는데 기여했으며 앞으로 조직간의 싸움 때 칼부림은 없애라고 당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5년 6월, 자서전 '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빛'을 내놓았다. 의외로 분량이 있어서 3권짜리인데 당연히 지금은 절판이지만 높은 가격에 중고가가 형성돼 있다.

1996년에는 조양은이 20대에 서울로 와서 개판 치던 사실을 미화한 영화 보스를 만들었다. 본인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연기는 국어책 읽는 수준에 영화 수준도 형편없지만 의외로 중박은 친 모양이다. 총 10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에는 조폭 두목이 자신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인지, TV에서 엄청나게 홍보를 했다. 조폭 인맥을 동원해서 김수미, 박근형등 알만한 배우들도 꽤 출연했다. 이 영화는 일반인들에게 조양은에 대한 팬클럽을 형성하게 하는 등 자신의 홍보효과는 톡톡히 누렸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미화하고 다른 건달들을 형편없이 묘사하면서 조폭계에서 많은 욕을 먹었다.[17] 1998년에는 노숙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기행을 펼쳤다.

한편 양은이파는 조양은의 이기적인 행동때문에 점점 자진 해체 상황에 돌입했는데, 특히 2001년 무기징역에서 감형되어 출소한 양은이파 실세인 강영신과 조양은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강씨는 아내 최양숙과 같이 쓴 자서전 푸른코끼리에서 조양은을 상당히 비난하며 그가 동생들을 챙겨주지 않아 조직내에서 신망을 잃었다고 적었다.

2003년에는 자신의 일대기를 모은 만화 '조양은의 회상'을 출판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이 미화되었다. 학창시절의 폭력 행위나 비행 행위를 우정으로 미화시킨다. 조양은 자신과 그의 아내인 김소영은 조양은이 개과천선했다고 말했다. 2004년도에는 아예 신학 학위를 받아 등 목사 일을 하고 청소년 상담 등 활동으로 자신이 회개했음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2.4. 무늬만 갱생[편집]


후술할 사건 사고들을 보면, 조양은이 회개했다는 소리는 완전히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18]. 그나마도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한 혐의 중 폭행같은 자잘한 의혹들은 다 뺐는데도 이 지경이다. 어찌나 지은 죄가 많은지 정리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1995년 4월 출소한지 고작 한달만에 조양은은 중국의 한 조폭을 통해 메스암페타민 약 10kg를 밀수입하려다 실패했고, 1996년 8월에는 증기탕(터키탕) 업소의 임대를 돕겠다고 1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로 출소 1년만에 다시 구속되었고 수사과정에서 앞에 언급한 마약과 천부교 교주 박모씨의 자녀에 대한 살인미수로 검찰이 사형을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살인미수는 인정되지 않고, 사기와 마약 폭처법만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영화로 반짝 명성을 얻었던 조양은은 이 사건으로 다시 완전히 추락한다.

2001년에는 200억원 규모의 해외원정 도박으로 다시 체포되어 다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다. # 게다가 2003년에는 음주운전이 적발되었다. #

2005년 10월 역삼동 유흥업소에서 사람을 재떨이로 폭행했고 기타 갈취 혐의로 2007년 4월 구속 기소되었다. 기소 후 2달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결국 2008년 2월 재떨이 폭행이 인정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또 감옥에서 1년 넘게 썩었다. 보석기간 중인 2007년 8월에는 사람을 패고도 정신 못 차렸는지 벤틀리를 임대하려다 사기도 당했다.

2010년에는 가짜 채권을 가지고 백억대 대출 사기를 일으켰다. 2011년에는 1억 원을 갈취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웃기는 사실은 자신의 피의사실을 공표했다고 경찰관을 고소했다는 것. 그나마 번 돈은 강원랜드에서 상당히 날려먹었다고 한다. 2011년 5월에는 트로트 가수를 협박한 혐의까지 나왔다. 이들 혐의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2011년 6월에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도 도주에 전념하는 게 아니라 마닐라에 머물며 교민들에게 외압을 행사하는 등 과시적 행동까지 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2013년경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 필리핀 교민 협박 고문 사건(후술)에 대한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후에 무죄로 종결되었다. 2013년경 당시의 조양은 영상.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조양은을 체포하기 위해 필리핀 경찰특공대, 유엔마약범죄수사국 등 버스 3대 인원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결국 도피중 필리핀 카지노에서 검거되었고, 2014년 12월 19일에는 사기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9년에 출소한 것으로 보아, 3년 6개월은 사기 혐의에 대한 형량 한정이고 다른 죄에 대한 형량도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담으로 반해체 상태였던 양은이파는 2012년에 재건시도가 있었다. 1989년 박정세를 내부숙청하는데 참여했고 2005년 출소한 김태형을 중심으로 강남에서 룸살롱 등을 운영하며 큰 돈을 벌고 그 자금을 바탕으로 조직 재건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찰에 대거 검거되면서 완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양은이파 재건 시도라기 보다는 그냥 김 씨 측의 독자행보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강영신이 그랬듯 김태형도 조양은과 사이가 안 좋아졌는데, 이미 감옥에서 수감 중 '보스의 전설은 없다'라는 초판본 자서전에서 조 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박정세 사건을 조양은이 지시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 자서전 초판본의 부제는 '조양은의 허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이가 상당히 틀어졌다고 볼 수 있다.[19]#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성립돼서 조 씨를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한다. 원래 김 씨는 박정세 사건 재판 당시 의리를 지켜 조양은을 무죄로 만들고 대신 15년형을 받았지만, 조 씨 측에 어떠한 지원도 못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결국 박정세 사건을 폭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경찰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조 씨 측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끄적인 것"이라고 한다.# 결국 김 씨를 달래기 위해 조양은이 2009년 김 씨를 조직의 후계자로 지정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고 한다. 사건 당시 룸살롱 종업원은 김회장이 양은이파 출신인 것은 알지만 조양은과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며 양은이파 재건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김 씨 측의 독자행보를 경찰이 양은이파 재건으로 엮은 것 같은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렇듯 조양은은 과거 양은이파 식구의 원로로 남아있긴 하지만 강원랜드에서 많은 돈을 날리고, 감옥에 있던 식구들을 챙겨주지 않아 신망을 잃어 옛날 자신의 동생들에게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2.5. 무죄로 끝난 필리핀 교민 폭행사건[편집]


한편 앞서 서술한대로 필리핀 도피 중 현지 교민 소 씨를 고문한 정황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사건 피해자는 조양은에게 지인 한 명을 소개해줬는데 그 지인이 200만 원을 빌리고 잠적하자 피해자를 권총으로 위협하고, 구타에 중요부위를 담뱃불로 지지는 등 3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조양은은 이 혐의로 사기죄 복역 중에 별도로 재판을 받았으며, 2015년 8월에 옥중에서 1심 재판을 받아 고문과 협박 혐의로 3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였다.


2015년 11월에 열린 폭행사건 항소심 2차 공판에서 "내 생사가 걸린 일이다, 세세히 따져달라"무죄를 호소했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렸다며 온갖 비난을 들었으나, 뜻밖에도 2016년 9월 항소심 고법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진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핵심 증인인 피해자가 공판에 나오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고 처벌불원서를 법정에 내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피해자는 이후 한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는데, 여기에 대해 조양은 측의 협박이나 금전적 회유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후 사회면 기사에서는 조양은이 더이상 언급되지 않아 기존 사기죄 복역을 마치고 2019년 출소 후 신앙생활에 집중하며 조용히 사는 것으로 추측되었지만 이후 변수가 발생한다. 2021년 2월, 필리핀 교민 폭행사건 공범으로 의심되어 수배중이던 이모 씨가 마침내 구속된 것.(#) 경찰 측에서는 사건 피해자가 세간의 의심대로 조양은의 회유로 조양은의 2심 재판에 나가지 않았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그러나 조양은 측에서는 이 씨가 검거된 것이 오히려 자신의 무죄를 밝힐 기회가 될 거라고 주장했다.

이후 동년 4월, 이모 씨에 대한 필리핀 교민 폭행사건의 첫 공판[20]열렸으나 이 씨는 혐의 전체를 부인하였다. 기사에 의하면 6월 21일 폭행 피해자를 포함한 증인신문이 열릴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이후 진행상황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조양은 본인은 일단 2심 무죄 판결을 손에 쥐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대법원 단계가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이미 7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이 사건에 대한 최종 결과가 그의 말년을 좌우하게 될 확률이 높다.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2.6. 선교사의 길[편집]


2019년 말 출소 후에는 '아이야세계선교회'를 설립했으며 지인 130여명을 전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신교 선교사가 되어 해외선교를 가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배우 이정길[21]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가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후 국내 유일의 전도 잡지 아름다운 사람에 출연해 단독으로 인터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한 짓이 한 짓이다 보니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올라온 댓글 중에는 조양은의 딸로 추정되는 댓글도 있다.

2022년 3월부터 개인 유튜브를 시작했다. 과거 조직생활 이야기 및 주먹세계 이야기, 그 외에는 기독교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터뷰 내용 중에 야마구치구미야쿠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서 조직 계보집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숭이신으로 우상화한 자기 등 여러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우호 교류차원이라 받긴 했지만 자기는 한국인이니 썩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삼합회와도 교류를 했는데 실제 삼합회는 없고, 북극성이라는 조직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조양은의 착각으로 보이며, 상하이의 흑사회 조직으로 보이는 북극성과 홍콩의 원류 삼합회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삼합회인 신의안, 14k, 화합도 등등 여러 조직은 지금도 홍콩과 마카오에 멀쩡히 남아있다.

2023년 6월 같은 종교 단체 신도인 억대 사기범의 도피를 도우라고 지인에게 지시한 죄로 또 입건됐다.#


3. 미디어에서[편집]


일단 앞서 소개한대로 본인이 책도 내고 영화도 찍는 등 이미지메이킹에 열심이었다. 게다가 전국구 조폭으로 악명높은 사람이다보니 드라마 같은 매체에도 종종 등장하는 편이고, 각종 기행이나 악행으로 뉴스나 잡지에서도 종종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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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화 보스를 내세워 한겨레신문사 씨네21 앞면에 나왔던 조양은이다. 나중에 씨네21 편집부가 그동안 표지 모델들에 대한 회고를 하면서 "영화가 그렇게 흥행 대박이었던 것도 아니고 조양은 측에서 압박을 준 것도 없었는데 우리가 눈에 뭐가 씌였는지 조양은을 표지에 박았다"고 했다.

2011년작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는 조태수라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회칼 하나로 전국을 평정했다는 설정 상 이 사람을 모티브로 삼은 듯 하다. 배우는 김뢰하. 중반부까지는 주인공과 대립하다가 장철환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을 계기로 주인공과 의기투합하여 연예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비록 시기상으로는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22] 조양은 역시 연예계에 뛰어들기도 했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장면도 있는 등 어느정도 잘 고증해놨다.[23] 배우 특유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배역과 잘 어울려서 그야말로 카리스마가 묻어난다.

김성모의 "조폭 아가씨"라는 만화에서 '제양은'으로 패러디된 바 있다. 링크

탑툰집주인 딸내미에서 나오는 박두한이 조양은과 꽤나 비슷하다.

2023년작 드라마 카지노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양상수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극중에서 별다른 활약 없이 퇴장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양상수를 언급하면서 나온 대사중에 "전설의 고든호텔"이라고 호칭하거나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부하들을 여럿 데리고 다니며 가오를 잡는 모습이 필리핀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사업을 벌이던 조양은의 모습과 유사하다.
[1] ‘조폭 큰형님’ 조양은, 선교사로 제3의 인생 참고.[2] 1998년생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 48세에 본 늦둥이다.[3] 어릴 때에 주먹질 좀 하고 다니다 깡패가 된 인물로서 그래도 인생은 잘 풀린 축이다. 대부분의 양아치들은 조폭이 되면 말 그대로 고기방패 신세나 감옥셔틀로 생을 마감한다.[4] 다만 조양은에 따르면, 윗선의 명령보다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행했다고 한다. 이는 오종철의 증언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5] 어쩌면 당연한게 자유당 시절에는 군대와 경찰조직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들이 대부분이라 치안이 상당히 불안했다. 이 때문에 군과 경찰이 조폭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기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이들을 적절히 이용해먹는 식으로 대처했는데 이런식으로 득세했던 이들이 바로 김두한이정재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폭력조직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고 경찰 병력을 크게 증강시키는 한편 중앙정보부와 국군기무사령부(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등이 잇다라 창설되면서 조폭들이 이전처럼 총질을 하고 도끼로 사람을 난자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전까지는 경찰력의 문제로 조폭들이 거리에서 삥을 뜯거나 행인들을 위협하는 일이 꽤 흔했었다.[6] 신상사는 90살이 다 된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2022년 현재, 지금도 살아있다.[7] 이때 서로 구치소에서 만난 조양은과 김태촌은 잠깐 화해를 했다고 하는데, 조양은이 오종철을 담근 김태촌을 결국 용서하기 어려워서 다시 서방파 식구를 찌르고 전쟁이 재발했다. 다만 조창조가 신상사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같은 조직이었던 정학모와 오종철의 갈등으로 학모 쪽 사람들의 '장난질'이 있었고, 그런 모종의 작용으로 인해 오종철이 김태촌에게 당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런 알력다툼탓인지 막상 조양은은 오종철의 복수를 하겠다고 했지만은, 시원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즉 조창조는 조양은이 나름의 전략적 판단을 했다고 봤다.[8] 정확히는 이동재가 이끌던 OB동재파. 처음 조직이 광주광역시 OB맥주 공장 일대에서 출발해서 경찰이 붙인 이름이 OB파. 사실 저런 양은이파, 범서방파 등 조직들의 이름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경찰이나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9] 그러나 조폭계 인사들은 소위 3대 패밀리는 언론이 키운 과장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했다. 출처 - 김태촌, 조양은은 주먹사회 패잔병 부분. 실제로 조씨는 80년에 바로 구속되어 15년 동안 감옥에 있어 조직 운영은 부하들이 대행체재로 운영을 했다.[10] 이동재는 1951년생이다.[11] 송악파 부두목인 강병한의 증언을 보면 대충 유추가 가능하다.[12] 사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면 대부분 독방을 배정해준다. 다만 이게 특혜차원이 아니라 유명 정치인이나 재벌 등이 일반 수용자들과 섞이면서 있을 수 있는 소요사태 등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일례로 징역형을 확정받아 수감생활을 했던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전직 대통령은 모두 독방을 배정 받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역시 모두 독방을 썼다. 이외에도 조양은 같은 전국구 조폭이 교도소에 올 경우에는 조폭들끼리 싸움이 붙을 것을 대비해 조폭 수감자들과 철저히 분리시킨다고.[13] 여담이지만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표 백창주의 아버지이다. 박유천 사건 때 또 화제가 되었다.#,#[14] 순천시민파의 부두목으로 보인다.[15]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지금도 늦은 편인데 당대로 친다면 매우 늦은 나이에 결혼한 셈. 다만 조양은의 경우 감옥생활을 오래했으니 뭐 어찌보면 늦은 결혼이 당연할지도.[16] 김두한의 후계자로 알려진 그 사람 맞다. 같은 본관 성씨라서 친동생같이 챙겼다고. 여담으로 조양은이 회칼을 잘 쓰는걸로 알려진 것과 같이 이 사람도 칼을 상당히 잘 다뤘다고 한다.[17] 특히 용팔이 김용남은 자신처럼 묘사한 인물이 조양은에게 망신당하는 것처럼 나오자 격분하여 조양은 측에게 소송과 항의를 했고, 제작사와 조양은 측에서 그 인물은 김용남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다.[18] 현실에서 진짜 회개했다고 드러난 조폭 출신 인물은 이성순, 이화룡, 안상민, 정일모(홍만길로 유명한 배우)등 극소수 밖에 없다.[19] 기사에 따르면 자서전의 주된 내용은 복종하고 충신처럼 따랐던 자신에 대해 별다른 보답이 없었던 조양은에 대한 불평이라고 한다. 또한 1996년 기사를 보면 당시 감옥에 있던 김 씨가 이미 화가 나서 조씨에 대해 폭로를 하려 했고, 조양은이 이를 달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700만원을 건네고 영화 보스의 수익금 중 거액을 약속했다고 한다.#[20] 공범 이모 씨의 기준으로 첫 공판. 조양은에 대해서는 여전히 대법원 공판 준비 단계이다.[21] 실제로 조양은과 배우 이정길 두 사람은 40년 전부터 인연이 닿았다고 하며, 조양은은 이정길을 전도하게 된다.[22] 극 중 조태수가 영화계에 투신하는 것은 80년대 초이지만 실제 조양은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 것은 95년에 출소한 이후이다.[23] 다만 조양은이 회칼 하나로 전국을 평정했다는 식의 묘사는 사실과 아주 다른 게 조양은은 애초에 전국을 평정했다기에는 일개 행동대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칼을 맞았다고 알려진 인물은 애초에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당장 위의 1번 문단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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