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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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寧夏
본관
풍양 조씨
생몰년도
1845년 6월 ~ 1884년 12월 5일 (향년 39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추존왕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이다. 본관은 풍양 조씨이며 호는 혜인, 자는 기삼이다.


2. 생애[편집]


1863년(철종 1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흥선대원군의 임명하에 규장각 대교가 되었고 조대비의 총애를 받아 1865년(고종 2년)에 대사성으로 특진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면에서 명성황후의 입장을 지지하여 흥선대원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고 대원군 세력을 견제하고 몰아내려는 역할을 하였으며 1874년 대원군이 실각되면서 고종의 어명으로 금위대장이 되었다. 이후 훈련대장과 공조판서를 지냈다.

1880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병조판서로 임명되면서 사대당의 실력자가 되었다. 1882년에는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전권대사가 되어서 미국, 영국, 독일과 조미, 조영, 조독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이들 3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미관계의 시작이기도 하였으며 한영, 한독관계도 이 때부터 시작되어졌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수호통상조약이 파기되어 잠시 단교되었다.

그 해 임오군란이 터지고 구식군대가 친민씨파 및 민씨 척신들을 모조리 참살하거나 지목하게 되자 자신 역시 명성황후의 입장을 지지하고 흥선대원군을 견제했던 주도자라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삼군부지사로 좌천되어져서 청에 흥선대원군의 납치를 요청하는데 기여하고 명성황후의 환궁에 기여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실각되고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지위를 회복하여 명성황후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로는 진주사 자격으로 청으로 건너가 무기를 수입하는데 기여하였으며 관세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한국명 : 목인덕)를 영입하여 그를 관직에 유도하였다. 1883년에는 예조판서에 재임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에 속하였던 대왕대비 조씨의 조카라는 이유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이 주도하는 개화파에 의해서 수구파의 척족으로 낙인되어 참살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결국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러 경우궁에 입궁하던 중 대기중이던 개화파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다. 남작 작위를 받은 조동윤은 아들이다.

조미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주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미관계의 시초를 마련하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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