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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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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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MAlogoblack1.jpg
올해의 노래
싸이
<강남스타일>
(2013년)

조용필
<Bounce>
(2014년)


소유X정기고
<썸(Feat. 릴보이 Of 긱스)>
(2015년)


파일:KBS 로고.svg 가요대상 대상[1]

조경수
이은하
행복이란
아리송해

(1979년)

조용필
윤시내
창밖의 여자
열애
(1980년)

조용필
이정희
미워 미워 미워
그대여

(1981년)
조용필
윤시내
창밖의 여자
열애

(1980년)

조용필
이정희
미워 미워 미워
그대여
(1981년)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년)
조용필
이정희
미워 미워 미워
그대여

(1981년)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년)

조용필
윤시내
나는 너 좋아
공부합시다

(1983년)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년)

조용필
윤시내
나는 너 좋아
공부합시다
(1983년)

김수철
이은하
못다 핀 꽃 한 송이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

(1984년)
김수철
이은하
못다 핀 꽃 한 송이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

(1984년)

조용필
정수라
그대여
도시의 거리
(1985년)

전영록
정수라
내 사랑 울보
난 너에게

(1986년)


파일:MBC 로고.svg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수상

혜은이
제3 한강교
(1979년)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조용필
고추잠자리
(1981년)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조용필
고추잠자리
(1981년)


이용
잊혀진 계절
(1982년)
이용
잊혀진 계절
(1982년)

조용필
나는 너 좋아
(1983년)


조용필
친구여
(1984년)
조용필
나는 너 좋아
(1983년)

조용필
친구여
(1984년)


조용필
그대여
(1985년)
조용필
친구여
(1984년)

조용필
그대여
(1985년)


조용필
허공
(1986년)
조용필
그대여
(1985년)

조용필
허공
(1986년)


전영록
하얀 밤에
(1987년)[2]

파일:골든디스크 시상식_로고.png
음반 대상
-

조용필
<허공>
(1986년)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1987년)

파일: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노래상
싸이
<강남스타일>
(2012년)

조용필
<Bounce>
(2013년)


태양
<눈, 코, 입>
(201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3년
이름
조용필
분야
가수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2003년
이름
조용필
분야
가수
보관문화훈장(3등급)




파일:한국갤럽 CI.svg
올해를 빛낸 가수 1위
싸이
(2012년)


조용필
(2013년)


아이유
(2014년)
※ 매해마다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올해를 빛낸 가수 1위'를 선정.[1]











조용필
趙容弼 | Cho Yong-pil


출생
1950년 3월 21일 (74세)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임천 조씨 (林川 趙氏)[1]
신체
165cm, 56kg, O형
가족
3남 4녀 중 3남(여섯째)
배우자
박지숙 (1984년 결혼, 1988년 이혼)
안진현 (1994년 결혼, 2003년 사별 )
학력
송산초등학교 (졸업)
송산중학교 (전학)[2]
경동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종교
불교
소속사
YPC
데뷔
1969년 미8군 무대 '화이브 핑거스'
장르
트로트,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뉴웨이브, 신스팝, 얼터너티브 록, 전자음악, Funk, 하드 록, R&B, 퓨전 재즈, 사이키델릭 록, 펑크 록, 오페라, 민요, EDM
별명
가왕[3],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취미
골프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3. 주요 영상
4. 경력
4.2. 대표곡
4.4. 출연 광고
5. 평가
5.1. 창법/예술력
6. 여담
6.1. MBC의 작명가(?)
6.3. 결혼
6.4. 기부
6.5. 영웅적 면모
6.6.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
6.7. 가왕의 눈물
7. 기록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가왕()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대중가요 역사의 거장이다. 한국 전통가요인 트로트부터 태생되어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온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이다. 데뷔 55년 동안 꾸준하게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나이가 70세가 넘은 현재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2. 위상[편집]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4]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5]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6],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7]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8]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그의 위치를 미국에 비유한다면 프랭크 시나트라, 영국에 비유한다면 폴 매카트니, 일본에 비유한다면 호소노 하루오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셋 모두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대중문화 산업의 최고 거물로 평가받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 장면을 두고 이승철의 위엄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같은 가수 입장에서 대선배이자 거장인 조용필을 선배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형이라 부를 만한 사람마저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철은 조용필이 술 한잔 하거나 피곤할 때, 운전 기사 역할도 많이 해 드렸다고 한다. 조용필 또한 이승철을 상당히 좋게 평가하는데, 90년대 쯤 "조용필의 뒤를 이어서 누가 공연계의 제왕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라고 답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9]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했다.[10]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11]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12]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13]

여러분, 기도하는~[14]

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15]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16]

3. 주요 영상[편집]



<아하! 그렇지> 1990년 추억속의 재회 콘서트


<추억속의 재회> 1990년 추억속의 재회 콘서트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1부 영상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2부 영상


1997년 열린 "97 자유 콘서트" 中 마지막날 피날레, 조용필 공연 40분 영상


2008년 열린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 콘서트 中


2013년 슈퍼소닉 출연 영상


4. 경력[편집]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17]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18]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19],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20]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1212826495.jpg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21]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 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조용필은 이 일로 10.26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대중가요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끝까지 풀리지 않았던 가수는 신중현과 조용필 단 두 명 뿐이었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4.1. 음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용필/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규 앨범만 무려 19개,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가 넘어간다.


4.2. 대표곡[편집]


대표곡은 "강원도 아리랑", "걷고 싶다",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님이여"[22],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찾겠다 꾀꼬리", "물망초", "미워 미워 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Bounce", "비련", "빛"[23], "상처"[24] , "서울 서울 서울", "선구자", "슬픈 미소", "슬픈 베아트리체", "어제, 오늘, 그리고", "여와 남", "여행을 떠나요"[25],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26], "일편단심 민들레야"[27] ,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속의 재회", "친구여"[28], "Q",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꿈의 아리랑", "한강", "한오백년", "허공", "Hello"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션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멘트 없이 본인 노래들로만 앙코르까지 꽉꽉 채워 불러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타 가수들의 콘사트처럼 다른 가수를 게스트로 초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션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4.3. 콘서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용필/콘서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4. 출연 광고[편집]




5. 평가[편집]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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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 레전드 100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조용필 씨의 영향이 대중음악계 곳곳에 남아있고요.

평론가 이무원[29]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이 롤모델로 추앙했던 인물 중 하나.[30] 과거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마왕으로 불리던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진행자 김혜수를 비롯해서 관객들이 뜨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선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흑역사가 된 서세원쇼에서 N.EX.T가 나왔을 때 조용필과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이때 신해철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일어서며 예의를 갖췄다. 그 외 이승철이나 이은미조차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한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란 소리는 아니고[31]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다.

파일:attachment/조용필/yongpil_and_taiji.jpg
조용필과 서태지.jpg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가 되었다.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더불어,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32]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 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당장에 패티김이나 이미자가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김 씨, 이미자 씨" 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기준으로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시절이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방송국으로 찾아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이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시절에도 위상이 엄청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하였다.[33]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2003, 2005년, 2018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매진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 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34]

또한 19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 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이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이 있다.

2018년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35]


5.1. 창법/예술력[편집]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작곡한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36]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37]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20여 곡[38]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39] 원래 데뷔 초기[40]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41]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 또한 많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음, 중음,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음반에서는 주로 더블링[42]으로 녹음하기 때문에 보컬이 보다 두껍게 들리는 편이다. 라이브에서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가늘지만 커다란 성량으로 이를 어느정도 커버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43]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44]

활동 초기에는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미8군 시절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보컬이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45]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길게 끄는 느낌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딱딱 끊는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뿐만 아니라 그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46]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47]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48]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49],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50]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여담으로 90년대에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도 나와 후배인 이문세신해철과도 재미있는 입담을 나누고 경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까불거리던 이경규에게도 웃어주고 이경규가 조용필 노래를 엉터리 중국어로 불러주며 홍콩에 중국어 앨범으로 도전해본다고 뻥치자 이문세가 "이경규 씨, 그만해, 나 머리에거 김날 거 같아."라고 하자 웃으면서 "누가 아니래. 나도 공감이야. 아주 스팀다리미로 써도 되겠어."라고 맞장구쳐줬다.

6. 여담[편집]


  •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51]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52] 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년 10월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

  •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미8군 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는 초기 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락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엄연히 말해서 지금도 본인의 락 밴드인 위대한 탄생보컬리스트 겸 세컨 기타리스트(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리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53]




  •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想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54]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
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는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55]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想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21.8만 장이다. 그런데 '想いで迷子'는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년,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즉 '想いで迷子'가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想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愛の共犯者(사랑의 공범자)', '紅い落葉(붉은 낙엽)', '悲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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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활동 당시 1987년 KBS 가요대상에서 마츠다 세이코와 인터뷰하는 조용필

  •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56],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타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57]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 로 등재되었으며, (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였다.[58]

  •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 라고 부탁을 했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조용필의 '친구여' 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59]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크게 기뻐하고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며 눈물을 쏟는다.#

  •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60]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61]

  •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년 5월 12일 50주년 콘서트때 하루종일 비가 왔다(...).

  •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62]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했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에 달한다.#

  •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63]

  •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64]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65],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66],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67]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 2013년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날짜순 정렬
날짜
곡명
방송사/방송명
비고
1981.02.10.
촛불
KBS 가요톱10
(모든 방송사 통틀어) 순위제 신설 이후 초대 1위
1981.02.17.
KBS 가요톱10
-
1981.02.24.
KBS 가요톱10
-
1981.03.10.
KBS 가요톱10
-
1981.03.17.
KBS 가요톱10
-
1981.03.24.
KBS 가요톱10
-
1981.03.31.
KBS 가요톱10
7주 1위
1981.10.13.
미워 미워 미워
KBS 가요톱10
-
1981.10.20.
KBS 가요톱10
-
1981.10.27.
KBS 가요톱10
-
1981.11.03.
KBS 가요톱10
-
1981.12.22.
KBS 가요톱10
-
1982.01.05.
KBS 가요톱10
6주 1위
1982.08.18.
못 찾겠다 꾀꼬리
KBS 가요톱10
-
1982.08.25.
KBS 가요톱10
-
1982.09.01.
KBS 가요톱10
-
1982.09.08.
KBS 가요톱10
-
1982.09.15.
KBS 가요톱10
-
1982.09.22.
KBS 가요톱10
-
1982.09.29.
KBS 가요톱10
-
1982.10.06.
KBS 가요톱10
-
1982.10.27.
KBS 가요톱10
-
1982.11.03.
KBS 가요톱10
10주 1위
1983.01.12.
비련
KBS 가요톱10
-
1983.01.19.
KBS 가요톱10
-
1983.01.26.
KBS 가요톱10
-
1983.02.02.
KBS 가요톱10
-
1983.02.16.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3.08.28.
나는 너 좋아
KBS 가요톱10
-
1983.09.11.
KBS 가요톱10
-
1983.09.18.
KBS 가요톱10
-
1983.09.25.
KBS 가요톱10
-
1983.10.02.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4.02.12.
친구여
KBS 가요톱10
-
1984.02.19.
KBS 가요톱10
-
1984.02.26.
KBS 가요톱10
-
1984.03.04.
KBS 가요톱10
-
1984.03.11.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4.08.05.
정의 마음
KBS 가요톱10
-
1984.08.12.
KBS 가요톱10
-
1984.08.19.
KBS 가요톱10
-
1984.08.26.
KBS 가요톱10
-
1984.09.02.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4.11.04.
눈물의 파티
KBS 가요톱10
-
1984.11.11.
KBS 가요톱10
-
1984.11.18.
KBS 가요톱10
3주 1위
1985.06.19.
어제 오늘 그리고
KBS 가요톱10
-
1985.06.26.
KBS 가요톱10
-
1985.07.10.
KBS 가요톱10
-
1985.07.17.
KBS 가요톱10
-
1985.07.24.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5.10.23.
그대여
KBS 가요톱10
-
1985.10.30.
KBS 가요톱10
-
1985.11.13.
KBS 가요톱10
-
1985.11.20.
KBS 가요톱10
-
1985.11.27.
KBS 가요톱10
-
1985.12.04.
KBS 가요톱10
-
1985.12.11.
KBS 가요톱10
7주 1위
1986.03.19.
허공
KBS 가요톱10
-
1986.03.26.
KBS 가요톱10
-
1986.04.02.
KBS 가요톱10
-
1986.04.09.
KBS 가요톱10
-
1986.04.16.
KBS 가요톱10
5주 1위
1986.11.05.
바람이 전하는 말
KBS 가요톱10
-
1986.11.12.
KBS 가요톱10
-
1986.11.19.
KBS 가요톱10
3주 1위
1988.01.20.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KBS 가요톱10
-
1988.10.05.
서울 서울 서울
KBS 가요톱10
-
1989.05.21.
Q
KBS 가요톱10
-
1990.08.24.
추억 속의 재회
MBC 쇼 네트워크
-
1990.09.07.
MBC 쇼 네트워크
-
1990.09.14.
MBC 쇼 네트워크
-
1990.09.21.
MBC 쇼 네트워크
-
1990.09.28.
MBC 쇼 네트워크
-
1990.10.05.
MBC 쇼 네트워크
6주 1위
2013.05.03.
Bounce
KBS 뮤직뱅크
23년 만에 가요프로 순위제 1위
2013.05.04.
MBC 쇼 음악중심
-
2013.05.10.
KBS 뮤직뱅크
2주 1위

  • 조용필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지상파 3사 기준[68] 음악방송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해 다음과 같이 무려 78회로 모든 가수들중 가장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Hello도 케이블 채널 MBC뮤직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 했다. 1981년 mbc 밤의 힛트쇼 라는 순위 프로가 있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1위를 했으나 몇 주간 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특이하게도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실제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조용필은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아예 2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 체육관이였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였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갈 정도로 절친이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 曰, '그 친구 키가 중학교 때 키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외 구봉서와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이다.

파일:attachment/dkstjdrlwhdydvlf.jpg

  • 꽤나 동안이다. 19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 상 2살 연하다.[69] 사실 젊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웠지만[70] 이후 나이를 먹었음에도 얼굴이 거의 안 바뀌며 동안이 된 케이스.


  •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71]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

  • 1953년생으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보다도 3살 연상이다. 동안이다보니 태진아보다 아우가 아니냐, 태진아보고 형님이라고 불릴만 하겠다는 일설도 있으나 실제 연년상으로는 조용필이 태진아보다 3살 연상이고 태진아가 조용필 선배라고 부른다. 1952년생인 배우 이덕화, 이계인보다도 2살 연상이다.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조용필과 함께 방송 출연이 뜸하기로 유명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와 동갑이다.

  • 엑소, 방탄소년단, BIGBANG의 음악은 물론 공연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있고, 외국 뮤지션으로 시아, 앨런 워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72] 운전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AFKN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고 하는데, 외국의 최신 팝음악을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 기존 곡을 O.S.T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잘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사용을 허락한 영화들은 전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택시운전사 '단발머리', 신과 함께 인과 연 '돌고 도는 인생') 게다가 18집 수록곡 '태양의 눈'을 이미지 송으로 사용했던 실미도는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뒷 사정은 31곡에 대한 저작권이 본인에게 없었던 문제도 있는데, 나중에 음반사에 넘어간 권리를 본인이 다시 찾을 수 있어서였다.

  • 다만 최초로 허락을 받고 O.S.T로 사용된 곡은 단발머리가 아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디오 스타)이다. 사실 천만 대박을 못 쳤을 뿐이지 나름 중박 흥행은 하고 관객 인지도도 높은 영화다. 당장 그 예능 '라디오 스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73] 게다가 주연배우인 박중훈안성기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이 곡은 허락 당시 본인에게 저작권이 없었던 31곡이 아니었으며, 동창인 안성기와의 우정 역시 영화 삽입에 한몫했다.#


  • 계몽사의 '학습만화세계사'에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카스트 제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수드라 계급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할아버지가 리그베다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른다. 손자는 그 노래를 듣고 '가수 용피르가 부른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본인이 이끄는 밴드 인원들의 실수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 2009년 11월 11일 방송에서 조용필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윤종신이 조용필이 본인의 밴드 일원들에게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자, 봄여름가을겨울이승철이 바로 긍정을 했다.# 또한, 한밤의 TV연예 2010년 03월 21일 방송에서 조용필 특집으로 출연한 유영석이 한 일화로 조용필에게 "라이브에서 틀릴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해 조용필은 "그게 무슨 프로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에 비틀즈 등의 팝 그룹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74],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이 존재한다.

  • 한때 "기도하는"으로 시작하는 비련에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당시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조용필의 팬이라는 14살 지체장애아에게 노래를 들려달라는 의사의 의뢰를 받자 일정이란 일정은 전부 캔슬하고 그 지체장애아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비련을 불러줬다는 일화인데, 이때 노래를 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펑펑 울으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이에 감명한 부모가 사례비를 주며 감사를 표하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라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최동규란 매니저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며, 오히려 병원에 찾아가 앨범을 주거나 팬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는 등의 실존 일화가 와전되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소속사 역시, 뒤늦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한다.#

  • 20집은 19집이 발매된 이후 콘서트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곡이 6~7개 나온 상태라고 한다. 19집과 달리 자작곡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된데다 코로나19로 인해 베이퍼웨어가 되었다.## 이후 2022년 4월 경부터 올해 안에 내는 것을 목표로 20집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상황이다. # # 정규 20집은 오는 2023년 말 발매 예정이며 그에 앞서 4월 26일 선공개 싱글 '로드 투 20 - 프렐류드 2'(Road to 20- Prelude 2)를 발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가족오락관의 MC로 유명한 허참[75]이 생전에 간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3명 중 1명이었다.[76]

  • 릴 웨인이 Original Silence라는 곡에서 조용필의 물망초를 샘플링해가기도 했다.


6.1. MBC의 작명가(?)[편집]


2010년~2011년 사이에 나왔던 MBC의 음악 프로그램 두 개가 모두 조용필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위대한 탄생으로, 당연히 어원은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에서 따온 것. 위탄은 시즌 3까지 방영하며 나름 인기를 얻었고, 방송 내에서 참가자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선곡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내에서 조용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딱히 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바로 나는 가수다이다. 2004년 MBC 특집으로 방영된 '나는 조용필이다' 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00이다' 의 원조가 바로 조용필인 셈이다. 나가수의 경우 위에서 서술된 대로 직접 출연까지 했으며, 이 자리에서 두 프로그램의 작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본인 왈, 이래도 되는건가 생각했다고(...) 사족으로, 나가수 출연 여부에 대해 윤종신이 직접 물었는데 본인은 처음부터 이러한 음악경연에 대해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연자로 출연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6.2. 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용필/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 결혼[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6882637.1.jpg
지금은 사망한 부인 안진현과 함께 찍은 사진

1984년 3선 국회의원이었던 박찬의 딸 박지숙 씨와 결혼했지만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77] 이혼 사유는 성격차이로, 결혼 이후에도 음악활동에 몰두했던 조용필과 달리 박지숙 씨는 조용필이 결혼 후에는 가정에 더 충실해주길 바랬다고 한다. 이혼 당시 박 씨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양도하고, 이혼은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며 원만하게 이혼했다. 조용필의 노래 <Q>를 들어보면, 이혼 당시 조용필의 복잡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10년 뒤인 1994년 안진현 씨와 재혼했다. 안 씨는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인물로, 무려 엘 고어 미국 부통령과도 친분이 있을만큼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결혼식은 청와대에서 치뤘는데, 조용필은 이 당시 매우 긴장했었다고 회고했다.[78] 두 사람은 1993년, 조용필이 애틀랜타에 공연을 갔을 때 친누나의 소개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안 씨는 결혼 이후 가수로서 조용필의 삶을 조용히 내조하였으며 조용필은 이런 아내에 대한 사랑이 매우 극진했다. 여러차례 콘서트나 인터뷰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었고, 이로 인해 연예계에서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알려졌었다. 안진현은 매년 조용필의 연말 콘서트에 참석해 남편을 지켜봤고, 조용필은 공연이 끝나면 연초까지 아내가 있는 미국에서 시간을 보냈다.[79]

그러던 2003년 1월 5일, 안진현 씨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인은 5년여동안 앓아오던 심장병으로, 말년에는 건강이 나빠져 그의 콘서트에 참석하는 걸 사양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하지만 사망 당일에는 아침까지도 조용필이 끓여준 미역국을 다 먹고 정상적으로 활동할 정도로 괜찮았다고 하는데, 그 날 오후 3시경 갑자기 몸이 안 좋다고 해 병원으로 데려간 뒤 얼마 안가 숨을 거뒀다고 한다.

조용필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와의 갑작스러운 사별에 크게 충격을 받고 오열했다. 미국에서 장례식을 치뤘는데, 장례식이 끝난 뒤 근처 한인 노래방에 들러 몇 시간동안 노래를 부르며 애통함을 달랬다고 한다. 화장한 유골함을 한국으로 이송해 다시 한번 장례를 치뤘는데 이 때 god, 김경호, 박진영, 강타, 장나라 등 후배 가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80] 안 씨는 유골은 선친이 모셔진 납골묘에 안치되어 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조용필은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으며, 몇 년동안 우울증을 앓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후배 가수 김경호가 말하길, 이 시기 조용필에 집에 가보면 항상 검은색 커튼이 쳐져있었고 낮에도 커튼을 걷지 않으며 암흑 속에 살고 있었다고.#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내와 사별 후 3년동안 제대로 음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3년 18집 이후 10년동안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도 아내와의 사별 이후 정신적인 충격이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珍)'이 바로 아내를 그리며 제작한 노래다.[81]

두 번의 결혼생활동안 자녀는 없었다. 첫 번째 결혼의 경우 부부 사이의 불화도 있었고 결혼 기간이 4년 밖에 안 되어 아이를 못 가졌으며, 두 번째 결혼의 경우 두 사람 모두 만혼이어서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조용필은 매 기일마다 아내의 묘를 찾고 있으며, 종종 페이스북에 소식이 올라오곤 한다.

여담이지만 안 씨가 사망하고 1년 9개월 뒤인 2004년 10월, 뜬금 허경영에게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소송 내용이 뭐냐하면 안진현에게 생전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며 조용필을 상대로 50만 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건 것. 당연히 증인이나 물증이 없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6.4. 기부[편집]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30401142245_283876_500_184.jpg

그가 운영 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 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6.5. 영웅적 면모[편집]


조용필은 지역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은 음악이 하고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법 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등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슈퍼 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다.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 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 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원 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나 감을 잃지 않고 EDM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젊은 뮤지션과 아이돌과 경쟁하는 가수. 이 모든 것은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시킨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켰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 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6.6.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편집]


Hello 티저를 보는 순간 그 감각에 놀랐다.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시도로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조용필의 음악으로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고, 후배들에게도 이정표가 돼주셨다. 그런 면에서 존경하고, 부럽고, 배우고 싶다.-이승철


2013년 45주년을 맞아 조용필이 19집을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전체에 바운스 열풍을 일으켰다. TV 가요프로에 출연 하지 않고도 1위를 했다. 결국 연말 결산에서 조용필의 'Bounce'가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는데, 그 뒤로 싸이의 젠틀맨, 크레용팝의 빠빠빠, EXO의 으르렁, 아이유의 분홍신이었으므로 정말 가요계가 쟁쟁했던 한 해 였다. 심지어 싸이의 젠틀맨으로 말하자면 강남스타일의 후광으로 발매 이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노래였다.[82] 이런 엄청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음악평론가 강헌은 "19집의 음악성 자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기보다, 최고의 슈퍼 스타지만 또 한번 이런 시도를 했다는거 자체가 '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쓰러지겠다'라는 조용필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자세를 가진 것이었다. 비록 19집이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본인은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고 쓰러지겠다는 그런 승부사적 기질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본인이 음악적으로 지향하는 가야할 길을 갔기에 뮤지션으로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시대에 잘 나가다가, 한 두 번 정도 앨범이 히트를 못치면 그 이후에는 엄청난 음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그 이후엔 두려워서 앨범 발표를 못하게 되는데 조용필은 언제나 그렇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비록 중간중간에 대히트까지는 못 친 앨범들도 있지만 본인의 음악적 진보를 위해서 거침없이 도전했기에 결과론적으론 발전하게 되었고 차후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도가 수십 년 이어져 오면서 19집은 또 한번 어떤 기존의 틀을 다시 한번 완전히 깼고, 10대, 20대에게까지 신선함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조차도 열광하게 만들었다.조용필은 19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그런 자세로 준비했다."라고 했는데 으레 가수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난 이렇게 전략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라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10대, 20대는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들어는 봤지만 그 가수가 어떤 노래를 하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이다. 19집을 발표하게 되면 조용필은 베테랑 가수지만 그들에게는 신인으로서 다가가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런 점을 긍정적인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곡을 하나 낼 뿐인데 자신이 내면 틀을 깨는 게 되고 반전의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하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나 판단하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Bounce'는 초창기 1980년대보다 더 의의가 있는 우리 가요사의 정말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곡이다. 예를 들어 1집 당시, LP를 한장 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아빠, 엄마는 '창밖의 여자'를, 아들, 딸은 '단발머리'를 듣는다 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라 하였는데, 'Bounce'는 단 한 곡으로 세대를 통합했으니 말이다. 2013년에 빌보드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6.7. 가왕의 눈물[편집]




199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중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데 여러 설이 있다. 당시에 공연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해서라는 말도 있고, 앵콜을 10번 가까이 받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저 곡 이전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부를 때도 약간 울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018년 대구 콘서트 중 오로지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가왕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가왕과 팬들의 눈물바다가 된 50주년 투어 [Thanks to you]의 명장면 중 하나다. 팬클럽 단관석쪽으로 나와서 관객들과 소통하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다. 1절에서부터 약간 그런 낌새를 보였는데 2절을 통으로 날렸다. 수십 년 한결같이 본인에게 열광해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과 한편으로는 그 젊었던 소년소녀들이 이제 늙은 중장년층이 되었다는데서 오는 서글픔 등 만감이 교차하여 흘렀던 눈물이 아닐까 싶다.


7. 기록[편집]


음악차트 및 음악 시상식

  •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총 12회)[83]
  • 역대 음악방송 통산 1위 횟수 2위(총 78회)[84]
  •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 : 조용필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결과다. LP, 테이프, CD, 음원에서 모두 차트 1위 곡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아쉽게도 2000년대에는 콘서트에 집중해서 정규앨범은 2003년의 'Over The Rainbow' 음반 단 한 장만 발표했으므로 이렇다 할 차트 기록이 없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곡당 1위 횟수 제한의 계기 제공(1983년) : KBS 가요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의 기록을 세우면서 나타나게 된 제도다.
  • KBS 라디오 24주 1위-고추 잠자리 : 6개월 동안 1위 기록
  • 인기순위 동시 최다곡 진입(20위안 TV-4곡, 연예지-6곡)
  • 라디오 트롯부문/비트롯 부문 1위 동시 차지 : '타인', '마도요'
  • TV가이드 1985년 12월 가요 순위에 1, 2, 3위 -최다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6회(1980년, 1981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 KBS '가요대상'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4회(1981년, 1982년, 1983년, 1985년)
  •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1980년)
  • 가수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MBC(2000년)
  • 제 1회 골든디스크상 대상(대상과 본상, 인기상을 모두 석권)-(1986년)

콘서트

  • 국내 최대 인파 동원한 야외 Concert-해운대 10만명 이상(1993년)
  • 가수 최초 월드컵 경기장 투어[85]-2005년(30여만 명 동원)
  • 세계최초 7.2서라운드 콘서트-(2007년 12월)
  •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1980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공산국가 중국 베이징 공연(냉전시대, 국교 전 1988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Opera hall Concert'(1999년)
  • 한국가수최초 평양(북한) 류경체육관 단독공연(2005년 8월 23일)
  • 국내가수 공연 최초 첨단영상 프로젝트 PIGI영상 사용
  • 국내최초 모노, 스테레오, 서라운드 형식공연-예술의 전당(1999년)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최고치 기록갱신-유료판매율 1위(87%)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20년간 가장 높은 예매율(104%) 기록(2008년)
  • 한국인 최초 범 아시아 콘서트-팩스뮤직카-(1984년~2004년간 11회)
  • 국내가수 최초 (조용필) 콘서트 신탁 탄생(2008년)
  •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콘서트 기록-스태프 5천 200여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 스크린 등 잠실 주경기장 공연 횟수도 8회로 압도적(2003년 35주년 콘서트, 2005년 필앤피스 콘서트, 2008년 40주년 콘서트, 2009년 평화기원희망콘서트[86],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 2회[87],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2023 조용필&위대한 탄생 콘서트
  • 대한민국 유료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관객을 동원한 공연-2010년 LOVE IN LOVE[88]#

수상 및 설문조사 기록

  • 한국 20세기 최고가수로 선정 및 수상-(설문조사 1위, 1999년)
  • 광복60년 영향력 있었던 인물 1위(연예인 부문)-한국일보 &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 MBC 선정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상 '가수부문' 수상(1998년)
  •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조선일보 & 한국갤럽 조사(1998년)
  • 네티즌 설문, 통일 후 북한에서도 통할 가수 1위(2000년)
  • 탄자니아로부터 문화훈장 수훈 (2001년)[89]
  •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수훈(2003년)
  • 대한민국 역사 움직인 100인에 선정(문화 부문)(2007년)
  • 한국 브랜드가치 설문조사 가수부문 1위(2003년)
  • 과소 평가된 아티스트-여론조사 1위(2003년)
  • 대한민국 100대 명반 두 장 선정-조용필 1집(29위)/조용필 7집(76위)
  • M.net 레전드100 가수 종합 평가 1위-(2013년)
  • 대중음악 평론가 39인이 뽑은 우리시대 최고의 가수 1위 선정 (2023년)

앨범 및 싱글

  • 국내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기네스 인정, 1991년)
  •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만장 돌파(1994년, 1999년 현재 국내외 2천만 장 판매)
  • 최초 단일앨범 100만 장 돌파-"추억의 미아"(1986년)

음악 및 음향

  • 한국 최초 M7(Major Seven) 코드 사용-3집 고추잠자리(1981년)
  • 한국 최초 Digital 녹음-6집(1984년)

일본 관련

  • 일본 NHK 홍백가합전 한국가수 최초 및 연속참가(1987~1990년)
  • 일본 NHK홀 외국가수 최초 Concert(1983년)
  • 한국인 최초 일본에서 골든디스크상 수상(2회-1984년, 1988년)

기타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친구여(5집)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뮤직비디오 제작-허공(8집)#
  • 대중가수 최초 학문연구회 발족-조용필學(Choyongpilogy)(1999년)
  • 1인 1기업 최초의 가수-필기획, YPC 설립
  •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국내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자생적인 팬클럽)
  • 국내 방송 CF-최초 개런티 1억원 돌파(1987년)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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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천 조씨 26세손 용(容)○ 항렬이다.[2] 중학교 2학년 때 전학.[3] 다만, 후술되어있듯이 본인은 가왕이란 표현이 민망하다고 겸손을 표하기도 했다.[4] 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시내 5대 공립고교 중 하나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가 5대 공립고교다.[5] 하지만, 고등학교 중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경동고등학교 동창회 등에서 졸업생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중퇴건 졸업이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졸업생으로 인정하는 듯 하다. 졸업식날 가출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는걸 보면 졸업은 한 듯 하다.[6]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본래는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정확히는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7] 지금은 폐교된 경동중학교 출신이고, 경동고등학교는 중퇴가 맞다. 경동고 야구부가 1980년대 부활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8] 과거부터 국내 음악계에선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션으로 국내에선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여겨졌다. 참고로 이문세, 이승환, 싸이 등도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매진에는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은 그런 주경기장 콘서트를 일곱 번이나 매진시킬 정도의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잠실 주경기장: 2010 Love In Love 이틀 10만 명, 1993 해운대 콘서트 단일 10만 명이 있다.[9] 다른 기성 가수들이 현재 아이돌들에 대해 음악도 아닌 이상한 것을 한다며 혹평하는 반면 조용필은 "세대가 다르고 추구하는 음악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평가를 내릴 입장은 아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후배들이 자신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후에도 누가 제대로 잘 불렀냐는 질문에는 "각자가 곡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고 창법도 다르기에 누가 더 잘 불렀다고 판단내릴 순 없다. 자신만의 해석과 창법으로 잘 살려 불렀다고 본다."라고 할 정도다.[10] 아이돌들이 장악한 현재에도 이 노래는 젊은 세대들이 부를 정도다.[11] 물론 자신은 겸허함을 담아 한 말이지만 사실 일반인에게는 가왕 같은 수식어보다 오히려 조용필이라는 이름 자체가 더 큰 무게를 갖는다.[12] 사실 오빠부대라는 용어 자체는 1960년대에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당시 처음 생겨난 용어며 국내가수로는 70년대 남진/나훈아 시대부터 있긴 있었다. 그 오빠부대가 짜임새 있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조용필쯤부터다.[13] 조용필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실화 하나를 공개한다. 부산의 한 여고에 어느 교사가 수업 중, 조용필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매면 영락없는 하우스보이지"라고 했더니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그 발언 취소하라"고 들고 일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해당 교사가 지도하는 수업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을 정도다.[14] <비련>의 도입부다.[15] 음원사이트에서 라이브 공연 버전을 들어보면 관중들의 저 반응이 그대로 나온다. 대표적인 예시로 43초부터 볼 수 있다.[16] 이종환이 라디오에서 지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벚꽃마냥 부산에서 대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17] 아버지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사냥을 다니기도 했는데, 조용필은 피 묻은 동물 사체를 보는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음악 반대 이유 외에도 부자의 성향이 무척 안 맞았던 듯하다. 맏형이 가장 부친의 성격과 닮아서 사냥을 자주 같이 했고, 모든 형제 중 가장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부친의 사업도 그가 물려받았다고 한다.[18] "연안부두"를 부른 밴드 "김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19] 대한민국 1세대 재즈 뮤지션으로 유명한 재즈 드러머다.[20] 이 당시에는 최이철이 나가고 '울고 싶어라'로 유명한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게 된다.[21] 참고로 이 때 대마초는 관련 규제 법안이 없는 상태였다.# 10월 유신 선포 이후에야 직접적인 지시로 최고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게 됐는데 대마초 파동은 바로 그 시기에 터졌으며 문화 정화가 명분이라지만 이미 약식기소되어 사건이 종결된 신중현도 다시 잡아가는 등 대중 문화를 때려잡은 문화 탄압이나 다름없었다.[22] 1961년에 바비 블루 블랜드(Bobby blue bland)가 부른 Lead Me on을 번안한 노래이다.[23] 드라마 영웅시대 OST[24] 처음에는 덜 알려졌지만 주부 가요 프로그램에서 불려져서 나중에 히트친 노래이다.[25] 요즘 사람들은 이승기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조용필의 곡이다.[26] 박정현이 이 노래를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적이 있다.[27] 임영웅이 이 노래를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불렀다.[28] 한때 운동권에서 불려지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교과서에 실린 대중가요다. 이 외에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오백년, 여행을 떠나요가 교과서에 실렸다.[29] 출처.[30] 신해철이 무한궤도로 데뷔한 대학가요제에서 조용필이 당시 심사위원이었기에 사제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운드 퀄리티를 향한 집요한 자세, 게다가 셀프 프로듀싱까지 총괄하는 조용필에게서 음악 감독의 모범을 보았다고.[31] 단, 이승철이나 당대 가수들이 조용필이 자기 밴드 멤버들을 불러 무섭게 혼내는 건 몇번 봤다고 했고, 후배들에게 직접 뭐라 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되게 무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1980년대 당시는 음악방송 PD들이 권위와 권력이 엄청 커서 방송국에서 20대 가수들이 담배를 피우면(당시는 건물복도나 대기실 등 실내흡연이 가능했다.) 말단 PD조차 다가 와서 뺨을 때리던 시기였는데, 조용필만 예외라 조용필은 간부급 PD와도 맞담배를 하며 방송을 의논했다고 한다. 조용필이 방송국에 오면 국장급이 와서 '조가수 왔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32] 언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수는 없다.[33] 조PD는 신해철 차례 때 보이지도 않는 뒤에서 랩을 했다.[34] 잠실 주경기장 즉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69,950석에 더해 가변석 5216석이다. 상암동의 월드컵 경기장(66,704석)보다 더 크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35] 모든 출연자가 합창한 친구여까지 합치면 5곡이 자신의 노래이다. 다만 2차 공연 땐 2곡만 불렀다. 몸이 안 좋기도 했을 뿐더러 다른 출연자들 공연도 많아 여건상 2곡만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순서는 솔로 공연 중에선 마지막 무대였다.[36] 물론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완벽하게 연주가 가능한 곡을 만들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멜로디 라인을 만드는 것을 작곡이라고 하고 그 멜로디에 맞춰서 세션들이 어떻게 연주할 지 만들어내는 것을 편곡이라고 하는데, 편곡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곡을 받는 장면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볼 수 있다.[37] 대중 가요는 결국 듣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 레전드 보컬리스트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결국 그의 목소리에 감동하고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38] 심지어 50주년 마지막 공연인 서울 앵콜에서는 30곡을 불렀다.[39] 조용필 콘서트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콘서트 때 멘션이 굉장히 짧고 공연시간을 모두 노래로 채워서 한다. 잡다한 것들은 빼고 순수하게 공연에만 집중하겠다는 프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40] 미군부대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하다가 베이스 담당이자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되어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41] 실제로 로드 스튜어트의 평소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하이톤이라는 점을 캐치해, 금관 악기를 하나 주문하고 성대의 떨림판과 비교해가면서 허스키한 보이스를 연마했다고 자신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피를 토한 것은 언론의 과장된 부풀리기였다고 부정했고, 대신 성대가 피로를 느끼면 소금물을 마셔가면서 붓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다시 연습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대 자체의 내구력을 연마해 온 셈. 실제로 이런 발성은 서편제에서 말하는 '수리성' 단련 방식과 상당히 비슷하다.[42] 한 선율을 부를 때 오버더빙을 하는 방법이다.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음색으로 노래를 한 번 더 부르기 때문에 청자가 들을 시에 소리가 좀 더 풍성하게 들린다.[43] 이 곡이라든가 아니면 이 곡에서처럼후렴구에서 잠시 등장하는 스캣 부분에서 들을 수 있다.[44]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통 가수 스스로가 코러스를 만들기 보다는 주로 외부 객원 보컬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팝 계에서 코러스를 잘 넣기로 유명한 가수로는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알 지아로 등이 있다.[45] '기도하는'으로 유명한 초기 조용필의 대표곡 '비련'의 후렴구를 들어보면 풍부한 성량을 터트리듯이 노래하는 당시 조용필의 창법을 들을 수 있다.[46] 실제로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내부장기 손상으로 이건 얄짤없는 사망 루트(...)고, 그 다음은 폐를 포함한 호흡기 손상인데 이것도 노래에 치명적이다. 마지막으로 득음이라고 칭하는 판소리쪽인데, 이쪽에서 피가 난다는 건 이렇게 피가 난다는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현대 가요쪽 창법과 판소리 창법은 상당히 달라서, 이런 식으로 피를 보면 성대가 변형되기 때문에 평상시 목소리가 쇳소리가 난다. 목을 험하게 굴려서가 아니라, 자기 노력으로 목소리를 이정도로 바꾼 가수는 현대 가수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수준. 나무위키에 적힌 인물 중에선 야마가타 유키오 정도가 있는데 이쪽도 다소 애매하다. 애초에 판소리도 세부적인 창법으로 들어가면 다양하다.[47] 이상 각주는 모두 대표적으로 한곡들만 기재하였음.[48] 버벌진트는 처음 제의 받았을 때 몰래카메라나, 혹은 벌써 만우절이 왔나 싶었다고. 그러나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리이머에게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하겠다고 말해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조용필은 본인이 랩 파트를 소화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웬만한 래퍼들의 랩을 들어보고 버벌진트를 선택했다고.[49] 의외의 친분으로 빅뱅의 태양이 있는데 태양이 RISE 앨범을 준비하면서 신곡 '버리고'를 직접 조용필에게 찾아가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같이 백 번도 넘게 들었다고 한다.[50] 인터뷰에서 어떤 음악을 즐기시냐는 질문에 빌보드 차트에 있는 음악을 주로 듣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물론 옛날 노래도 많이 듣는다고 덧붙였다.[51] 내용에 로맨스가 들어가긴 하는데, 실상은 조용필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음악 영화이다.[52] 상대역은 유지인이고, 위대한 탄생 멤버들도 출연했다. 훗날 조용필은 이때의 경험이 너무나 쑥스러워서 두 번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53] 상대역은 조용필 본인이다.[54] 이 곡의 작사가와 작곡가는 めだかの兄妹로 유명한 아라키 토요히사(荒木豊久)와 미키 타카시(三木たかし, 본명 渡邊匡)다. 이 곡 외에도 조용필이 일본에서 발표한 곡들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55] 1980년대 당시는 오늘날처럼 온라인 예약이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간 최고 순위는 그저 그렇지만 꾸준히 팔려서 연간에 드는 경우도 흔했다. 엔카 음반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추이를 보이는 음반들이 꽤 된다.[56] 1979년 일본국유철도의 DISCOVER JAPAN 캠페인의 BGM으로 쓴 노래로 유명하다.[57] 올리비아 허시의 두 번째 남편으로 유명하고, 재일교포설도 있던 가수다. 'カルチェラタンの雪(카르체라탕의 눈)'을 불렀는데, 조용필이 음반으로 발매한 적이 있다.[58] 그리고, 욘사마겨울연가로 센세이션하게 유명해지고 K-POP이 일본을 강타하면서 이제는 후배들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59] 2화 초반의 장면에서 '조용팔'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리고, 친구여 이후에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도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노래도 한 시대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했던 대히트곡이었다.[60] 지금은 작고한 중견가수였던 고 박상규 역시 경험했던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한적한 곳에서 식사중 그 지역 불량배가 와서는 너 혼자 쳐먹냐는 식으로 반말짓거리로 시비를 걸어서 그냥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는데 그래도 시비를 계속걸자 홧김에 주먹을 날렸더니 마치 고목나무가 쓰러지듯 넘어졌다고 한다. 후일 후배들이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대단하다'고 하니 박상규 왈, "그 친구가 약하니까 단방에 간거지 뭐." 라고 했다. 지금이야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연예인이란 직업은 그야말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만연했었다. 만에 하나 자녀들이 장래희망을 연예인이라고 했다가는 '미쳤냐!?' 아니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이 일갈할 때 쓴 표현이 나올정도로 험악한 반응을 각오해야 했다. 연예인을 일컫는 멸칭이 '딴따라'였고 오죽하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주일이 '딴따라가 무슨 정치를 한다고'란 세간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61] 바로 위에서 설명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62] 하루에 5만명씩 총 1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63]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되지만 당시엔 가요 음반마다 널리 알려진 가곡이나 동요들이 1곡씩은 꼭 들어 있었다. 조용필의 경우에도 겨울나무가 있었던 적이 있고, 변진섭의 1집에도 과수원 길이 수록되어있었다.[64] 한국 스탠더드 팝 최고의 디바로 불린 가수로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 조용필 이후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한 가수로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지만 2012년 2월 15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6월부터 은퇴 공연을 갖는다. 대표곡만 해도 600곡 이상이 되는 가수.[65] 당시 KBS는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는데, 3년 연속 대상을 타던 1983년에는 본인도 헛웃음을 지으면서 "접니다...조용필"이라고 발표했다.[66] 이때 이용의 가수왕 수상이 말이 많았다. MBC에서는 팬들의 우편에 의한 투표로 비밀집계로 가수왕을 뽑았는데, 성난 조용필의 팬들이 투표 공개를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MBC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조용필은 너무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작을 했다는 것을 MBC가 인정했던 셈이다.[67] 영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소록도에 방문 공연을 했었다. 조용필은 약속된대로 그 연주에 맞춰 본인의 잔잔한 대표곡 2곡만을 불렀는데, 노인들이 너무 아쉬워하자 곧 다시 공연을 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68] 참고로 KBS는 1981년 2월 '가요톱10'으로부터 순위제가 시작되었고, MBC는 1989년 10월 말 '쇼 네트워크'로부터, SBS는 대충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69] 다만 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실제로는 동갑이다. 출생 기록 처리가 전산화되기 전에는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안성기가 1950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안성기의 실제 나이가 1950년생 또는 빠른 1951년생일 가능성이 있다.[70] 조용필 1집의 커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30살이었다.[71] 10집의 'I Love 수지'의 모티브다.[72] http://archive.is/JonOT[73] 물론 원전은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맞지만 이걸 다시 대중의 기억 밖으로 끄집어 낸 단초는 여기 서술된 동명의 한국 영화이다.[74] 멘토 52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의하면 그러하다.[75] 2022년 2월 1일 사망하였다.[76] 나머지는 강진, 이홍렬이었다.[77] 여담이지만 결혼식은 봉선사에서 치뤘다.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던 곳으로 유명한 장소다.[78] 원래 엘 고어의 부인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불참했고 사촌동생을 대신 보냈다. 백악관 측에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통보했었다고.[79] 2002년 연말 콘서트 당시에는 건강이 나빠져 오지 못했고, 대신 축하난을 보냈다.[80] 이 때 김경호가 장례기간동안 빈소를 지키며 궃은 일을 다 도맡아했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조용필과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81] 아내와 사별한 뒤 처음으로 가진 공연이었던 35주년 콘서트에서, 이 곡을 부를 때쯤 마침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거리기도 했다.[82] 물론 성공한 노래지만 실제로 2013년 최고의 흥행을 거둔 노래라고 하기엔 성적이 아쉬운 편이다. 실제로 멜론과 가온에서의 연간차트에서의 성적은 아쉬운 편이다.[83] 2위는 총 11회 수상의 김건모며 3위는 총 10회 수상의 조성모다. 이마저도 조용필이 더 이상 가요 대상을 수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결과다. 심지어 조용필이 사회를 보다가 대상을 발표하는데 하필 수상자도 본인이라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접니다"라고 발표한 적도 있다.[84] 1위는 83회를 수상한 방탄소년단이다. 물론 당시 지상파 음악방송 순위제가 가요톱10 한 곳 뿐이고 그나마도 1위 횟수에 제한을 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이 한 편이다.[85] 월드컵 경기장을 꽉 차게 만드는 공연을 하려면 최소 2~3만명 정도는 불러모으는 티켓 파워를 가져야 하는데, 서울을 제외하면, 인천, 수원 등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 아니고서야 이만큼의 관중을 불러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나 지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조용필만이 가능한 공연이다.[86] 다만 이 공연은 국제평화마라톤대회의 축하 행사로서 무료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단독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가왕의 위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87]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유료 콘서트로 2010년 5월 28~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유료 관객의 기록을 쓴 공연이다.[88] 하루에 5만명씩 2010년 5월 28일~29일 양일간 총 10만 명을 동원하였다. 특히나 이 공연의 수익금을 500여 명의 소아암 어린이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다.[89]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탄자니아를 알린 것이 바로 그 계기다. 킬리만자로 산은 실제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