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하무스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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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동티모르의 제2·5대 대통령. 2002년 외무장관, 2006년에는 총리직을 거친 뒤 2007년 대선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2022년 대선에 출마하여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 생애[편집]
1949년 12월 26일 딜리에서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티모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부터 당시 동티모르를 식민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비판하는 활동을 이어 갔는데, 그 과정에서 2차례에 걸쳐 동티모르 밖으로 추방되었다. 1975년 포르투갈에서 갓 독립한 동티모르에 인도네시아군이 침공하자 그 3일 전에 미국 뉴욕을 방문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동티모르인들을 위한 행동을 촉구하였으나, 그 길로 다시 한번 추방된 뒤 2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80년대에 걸쳐 헤이그와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국제법, 인권, 정치외교학을 공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뉴욕에 머무르며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의 유엔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동티모르 민족평의회(CNRM) 대표로서 인도네시아측에 동티모르 독립을 안건으로 한 국민투표 시행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였으며, 여러 평화적인 분쟁 해결 방법을 모색하여 결과적으로 1999년 국민투표를 통한 동티모르의 독립을 성사시켰다. 1996년에는 평화적 독립운동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그 해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12월 2일 24년 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동티모르의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 2002년부터 외무장관 직을 수행했으나 2006년 당시 동티모르 소요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받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의 재신임 결정에 반발하여 사임하였다. 마리 알카티리가 2006년 6월 25일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한 뒤에는 후임 총리로 지명되어 샤나나 구스망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2007년 5월 19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그 뒤 2007년 대선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 결선투표 끝에 프란시스쿠 구테흐스 후보를 꺾고 동티모르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1. 암살 시도 사건[편집]
대통령 임기 도중인 2008년 2월 11일 아침 반군에 의해 자택이 습격당하여 경호원 1명이 사망하였으며 하무스오르타 본인 역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사살된 반군 지도자 알프레도 레이나도 소령은 2006년 동티모르 소요 사태 때 이미 살인 등의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동년 8월 탈옥해 도주한 인물로, 2007년 11월에 이미 정부에 불만을 표하며 범행을 예고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티모르 주둔 호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송된 하무스오르타 대통령은 수술을 받은 뒤 안정을 찾아 3월 19일 퇴원하였다.
2.2. 2012년 이후[편집]
2012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19.43%의 득표를 얻으며 결선 투표에 진출한 프란시스쿠 구테흐스와 타우르 마탄 루아크에 이어 3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대통령 임기는 2012년 5월 20일에 종료되었으며 이후 10년간 국제적인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202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였으며, 1차 투표에서 46.5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22.13%의 득표를 기록해 2위에 오른 프란시스쿠 구테흐스[2] 와의 리턴 매치가 성사되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62.10%를 득표하여 37.90%에 그친 구테흐스를 크게 앞질렀으며, 결과적으로 10년만의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3. 기타[편집]
-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여러 편 존재한다.
- The Diplomat: 2000년 호주에서 제작된 영화로,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던 1998년과 2000년 사이의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 Alias Ruby Blade
- 자주 방한한 외국 각료급 인사 중 한 명이다.
- 국내 여러 대학교에 이따금 평화 관련 연설을 하러 방한한다. 특히 경운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행정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데 이어 교내의 건물을 '오르타 홀'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 외무장관 시절인 2004년 경북대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경북대 측에서 동티모르의 공용어인 테툼어의 표기 수단으로 한글을 제안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국민적으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이같은 소식은 '한글-떼뚬 연결 프로젝트' 등의 거창한 제목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정작 프로젝트를 검토해온 이종현 교수가 외교마찰 등을 우려하여 이를 제의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괜한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
4. 선거 이력[편집]
5. 관련 문서[편집]
6.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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