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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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후한 말의 인물. 초한쟁패 이후 약 400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국왕.한나라 말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다. 그 중에서 원소는 4개의 주에 기반을 두어 호시탐탐 천하를 노렸고, 그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허나 조조는 책략을 이용하고 계략을 세워 무력으로써 천하를 정복하였다.
신불해[1] 와 상앙[2] 이 선보인 치국의 도를 받아들이고, 한신[3] 과 백기[4] 의 기책(奇策)을 사용하였다. 서로 다른 재능이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각 사람이 갖고 있는 그릇에 맞게 이용했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계획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허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국가의 큰 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명석한 지략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히 비범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말할 수 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황실을 장악하고 유비의 촉한과 손권의 손오를 상대로 천하를 두고 자웅을 다투었다. 사실상 조위의 기반을 만든 군주이며 춘추전국시대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난세인 위진남북조시대의 시작을 알린 인물. 조조에 의해 기반이 만들어진 위나라가 멸망하고 이후 서진이 건국되어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하긴 했으나 사마염의 치세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짐과 동시에 300년 이상 이어지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며 사후 아들인 조비가 추증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에 오른 조비가 조조에게 무왕(武王)의 시호를 올렸으나, 황제가 되고서는 묘호와 존호를 더해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하였다. 조조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았고, 명목상으로나마 한나라의 신하로 죽었으나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된 아들인 조비에 의해 황제로 승격된 것이다.[5]
고대부터 능력은 뛰어났지만 자신이 신하로서 모시던 한 왕조를 완전히 끝낸 역사적 행보 때문에 망탁조의의 한 사람으로 묶여 역적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른바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6] 소설 《삼국지연의》에선 이러한 영웅이면서도 간신인 면모를 잘 살려 유비의 숙적으로 묘사했다.
2. 이름[편집]
조조(曹操)의 이름인 조(操)와 자인 맹덕(孟德)은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구절 '덕조(德操)'에서 따온 것이다. 다음은 해당 내용.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áo Cāo).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Cao Cao'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물론 당시 중국어는 현대 중국어와 발음이 많이 다르니 이게 원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발음이었을 상고한어로는 ŋtsˁu tsʰˤawʔ(응쭈 차웋)으로, 같은 음절의 반복은 아니다. 현대 발음으로는 성조의 차이가 있다.是故權利不能傾也(시고권리불능경야)
그러므로 권세와 이익이 넘어뜨릴 수 없으며,
群衆不能移也(군중불능이야)
타인들의 압력이 마음을 바꿀 수 없으며,
天下不能蕩也(천하불능탕야)
천하도 흔들 수 없다.
生乎由是(생호유시) 死乎由是(사호유시)
살더라도 이 배운 것을 따르고 죽더라도 배운 것을 따르니
夫是之謂德操(부시지위덕조)
이것을 덕행(德行)의 지조(志操)라고 이르는 것이다.
德操然後能定(덕조연후능정)
덕행의 지조 있은 뒤에는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고,
能定然後能應(능정연후능응)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뒤에는 능히 적응해야 하며,
能定能應(능정능응)
마음이 안정되고 적응이 되면,
夫是之謂成人(부시지위성인)
무릇 이것을 일러 성인(成人)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식 독음은 そうそう(소-소-)[7] , 베트남식으로는 Tao Thao(따오 타오)라고 읽는다. 상고한어와 마찬가지로 음절이 다르다.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 관계[편집]
- 양증조부 조절
- 형제자매
- 친척
- 처첩과 자녀들
- 처 정부인: 첫 번째 정실. 여성 편력이 화려한 그 조조가 유일하게 몇 번이나 재결합하자고 애걸복걸했음에도 재결합에 실패한 여성이다.
- 첩 진씨(秦氏)
- 1남 조현
- 2남 조준
- 첩 왕소의(王昭儀): 조간의 양모이다. 조조의 총애를 받았고 조비가 황제가 되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 첩 손희(孫姬)
- 1남 조상
- 2남 조표
- 3남 조근
- 첩 이희(李姬)
- 1남 조승
- 2남 조정
- 3남 조경
- 첩 주희(周姬)
- 1남 조균
- 첩 유희(劉姬)
- 1남 조극
- 첩 송희(宋姬)
- 1남 조휘
- 첩 조희(趙姬)
- 1남 조무
- 첩 진씨(陳氏): 조간의 친모이지만 조간이 어릴 때 죽었다.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이 탓인지 2차 매체에서의 조조는 유부녀 취향으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 아버지 만큼이나 유부녀에 심취한 아들 조비도 함께이다. 아마도 남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라는 측면이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다. 고대 중국의 상류층 가십거리인 세설신어에서 어릴 적 원소와 짜고 남의 집 신부를 납치 강간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난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면 이미 오래전부터 조조가 여자, 특히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 가능하다.[10] 그 전에 조조가 호색한이었다는 것은 당대부터 유명한 평가였다.[11]
다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와 적에게 약탈당한 아내도 많았으며, 결혼 연령도 현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워낙 난세이다 보니 온 나라에 과부가 넘쳐났고 크게는 호족들 간의 정략결혼, 작게는 국력을 위해 과부들이 수절하기보다는 개가해서 건강한 씨를 받아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개가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유명한 여류 문학가 채염은 여러 사유 때문에 여러 번 결혼했고 유비는 입촉한 후 과부를 취하였다.[12] 혹은 이러한 대국적인 이유가 없더라도 단순한 색욕 등의 이유로 유부녀를 취했을 수도 있다.[13] 애초에 조조의 부인들 중에서 유부녀 혹은 과부 출신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하진의 며느리인 윤씨와 진의록의 처 두씨 둘뿐이며, 혼외정사까지 포함해도 추씨 뿐이다. 조조의 부인이 15명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딱히 유부녀의 비중이 높다고 볼 수 없으며, 조조가 특별히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건 정사의 일부 사례와 다른 창작물들의 사례[14] 가 합쳐지고 곡해되어서[15] 생긴 이미지다.
5. 조조의 무덤[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 업적과 능력에 대한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업적과 능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vs 유비[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 vs 유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어록[편집]
寧敎我負天下人休敎天下人負我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16]
그대는 태평세월의 간적(奸賊)이요, 난세의 영웅(英雄)이라.
8. 기타[편집]
갑(, 모자)은 위나라 무제가 만든 것이다. 군중에서 복장의 간편함을 위해 만들었으며, 또한 오색의 갑()을 만들어 방면(方面)을 표시했다.
고금주 『여복』
위나라 무제는 마노석으로 만든 말 재갈과 거거(車渠)[18]
로 만든 술 사발을 만들었다.
고금주 『잡주』
봉(棒)은 최정웅(崔正熊,최표崔豹)의 주註에서 이르길: 거폭車輻이다. 한나라 때 집금오(執金吾)의 금오(金吾) 또한 봉이다. 구리로 만들고 황금으로 양 끝을 칠했기에 금오라 하였다. 어사대부, 사례교위 또한 그것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을 수레바퀴에 끼웠기에 거폭이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모양이 수레바퀴살과 비슷해서 거폭이라 했다고도 한다. 위나라의 조조가 낙양북부도위로 있을 때 문에 오색 봉을 걸어 호활(豪猾)들에게 위엄을 보였다.
중화고금주
위나라 무제는 일찍이 골짜기에서 검을 하나 얻었는데 금가루로 맹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무제는 늘 그것을 착용했다.
도검록
- 사물기원의 설명에 의하면 최초로 전하(殿下)로 불렸다고 한다. 전하라는 호칭은 원래 한나라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위왕으로 봉해진 조조를 두습이 전하로 호칭한 것이 전하라는 존칭의 시초라고. 전하 문서 참고.
- 조조가 끈질기게 등용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인물 두 명이 있다. 바로 관우와 태사자였다. 둘 다 무예로는 당대급 수준이었는데 관우는 일시적으로 부하로 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얼마 못 가 조조를 떠나버렸다. 태사자에게는 조조가 직접 당귀를 선물하며 등용을 시도했으나 태사자는 잠시 보류하고 있다가 조조가 서주대학살을 일으키자 실망해 조조를 거부했으며 나중에 손책의 휘하로 들어갔다.[19]
- 젊은 시절에 하후돈, 하후연 형제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놀고 먹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 객잔에서 가기를 겁탈하려는 취객을 막으려다 그 취객을 살해해버렸다. 이것 때문에 관군에게 잡힐 위기에 몰렸는데 그 가기가 조조의 검을 빼앗아서 하후연에게 쥐어준 뒤 조조를 도피시켰다. 이후 하후연은 체포당했고 조조는 집에 가서 돈을 많이 들고 관가로 찾아와서 하후연을 체포한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하후연을 데려왔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고 조조는 그 객잔을 다시 찾아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가기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이후 계속 같이 살았다.
- 조조의 성인 조씨는 원래 그의 성은 아니었고, 그의 아버지인 조숭이 환관 조등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얻은 성씨라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원래 성씨는 하후씨라 하며, 하후돈이나 하후연과는 친척 형제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조조의 원래 성씨가 하후씨인지 정말로 하후돈과 하후연이 친척 형제인지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조숭 항목 참조.
- 현대에 와서는 주로 일본 창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미남으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위서에 '키가 작지만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키가 작았을 것이다. 일본 미디어에서의 조조=직전신장 공식에 의해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한나라를 부정하기는커녕 협천자를 칭하며 한나라의 권위에 기대어 등골까지 쪽쪽 빼먹었지만 말이다.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의 조조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습과 거의 같다. 코에이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이 인물 개개인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만큼, 여러 인물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 코에이를 비롯한 일본에서 씌여진 2차 창작에서 조조와 오다 노부나가를 등치시키는 면이 상당히 강하다. 일본에서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쁠 것 없는 캐릭터 해석이었다. 중화권의 삼국지 컨텐츠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코에이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 삼국지 팬덤의 현실상 코에이 게임의 이미지 메이킹, 특히나 그 정점에 선 캐릭터인 조조의 이미지는 한국 삼국지 팬덤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고우영은 호색하고 음흉하기 이를 데 없는 조조를 가리켜 '좆조'라고 놀렸다.
- 근래에 이르러 사서에 기록된 조조의 만행들이 속속 알려짐에 따라 삼국지 독자들 사이에서 조조를 한 글자로 합쳐서 '쬬'라는 별명이 붙었고, 지금은 조조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별명 중 하나가 되었다.
- 원소, 원술, 채모, 허유 등이 조조의 친구들이다. 하지만 원소는 어른이 되고 난 이후 절교해서 불구대천이 되었으며, 허유는 너무 오만무례하게 구는 바람에 조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결국 꼬투리가 잡혀서 조조에 의해 처형당했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조/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