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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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추존 황제
고황제 조등
태황제 조숭
태조 무황제 조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o_Cao_scth.jpg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왕(武王) → 무황제(武皇帝)

조(曹)

조(操)[1]

맹덕(孟德)[2]
부황
태제(太帝) 조숭(曹嵩)
생몰 기간
155년 ~ 220년 1월 23일
재임 기간
사공
196년 11월 ~ 208년 6월
승상
208년 6월 ~ 220년 1월
재위 기간
위공
213년 5월 ~ 216년 4월
위왕
216년 4월 ~ 220년 1월

1. 개요
2. 이름
4. 업적과 능력
4.1. 군사 관련
4.1.1. 상대한 세력
4.1.2. 위무주손자
4.1.3. 북방 민족 정벌
4.1.4. 친정 중시
4.1.5. 친족 중시
4.1.6. 과감성
4.2. 제도 관련
4.2.1. 둔전제
4.2.2. 호조법
4.2.3. 구현령
4.2.4. 원호법
4.3. 인재 관련
4.4. 신체 관련
4.4.1. 무예
4.4.2. 건강
4.4.3. 외양
4.5. 예술 관련 - 예술가적 면모
4.5.1. 요리
4.5.2. 패션
4.5.3. 음악
4.5.4. 문학
4.5.5. 서예
4.6. 종교 관련
4.6.1. 유교
4.6.2. 도교
5. 가족 관계
6. 조조의 무덤
7. 평가
7.1. 당대의 평가
7.2. 후대의 평가
7.3. 연의의 평가
7.4. 현대의 평가
8. 미디어 믹스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영 교 아 부 천 하 인 휴 교 천 하 인 부 아)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3]

[4]

조조.


고 일 세 지 웅 야 이 금 안 재 재)

실로 일세의 영웅이었건만 지금은 어디 있는가?

소동파의 적벽부 中


난세의 간웅.

후한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태조. 사실상 조위의 초대 황제이자 위진시대의 토대를 닦은 인물.

시호는 무제(武帝). 사후 아들인 조비가 추증하였다. 처음 위왕에 오른 조비가 조조에게 무왕(武王)의 시호를 올렸으나,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되고서는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조조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았고, 명목상으로나마 한나라의 신하로서 죽었다.

조조의 성인 조씨는 원래 그의 성은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조숭환관 조등의 의붓 아들로 들어가면서 얻은 성씨라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원래 성씨는 하후씨라 하며, 하후돈이나 하후연과는 친척 형제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2. 이름[편집]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ao Cao).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Cao Cao'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일본식 독음은 そうそう(소-소-)[5]로 특이하게도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이름이 같은 음절 두 번 반복으로 읽힌다. 단 중국어 발음으로는 성조의 차이는 있다.

베트남식으로는 Tao Thao(따오 타오)라고 읽어 같은 음절 반복은 아니다.


3. 생애[편집]


조조(삼국지)/생애 참조.


4. 업적과 능력[편집]


코에이는 조조가 정치, 행정, 전쟁 모두에 탁월했으며 시가문학에도 통달한 만능의 영웅호걸이라 소개했다. 실제 조조는 다재다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다.


4.1. 군사 관련[편집]


파일:external/www.ssk-group.net/sousou.jpg
관도에 있는 조조의 기마상

조조의 업적들 가운데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은,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후한 말 이후의 시대를 묶어 흔히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데,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진의 전신인 만큼 삼국을 대표해 쓰는 것일 뿐.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북조 국가들이나 5대 왕조들이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위 역시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사 전체를 볼 때 최고의 군사 군주로 꼽히는 것은 한고제, 광무제, 당태종, 송태조 / 송태종, 홍무제 / 영락제,강희제 마오쩌둥 등 당대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군주들이다. 이들은 당대에 거의 자력으로 전 국토를 통일하거나 실질적으로 완벽한 통일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조조는 이들과 비슷한 류의 군사 창업 군주이나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평가가 다소 깎이는 편이다.

4.1.1. 상대한 세력[편집]


거병 초기부터 왕위에 오른 말년까지 중원을 누비며 싸운 인물인지라 상대한 적들 역시 많다.

  • 동탁 : 거병 초창기에 대적한 적이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하자 혼자 추격했다가 복병에 무너지면서 더는 충돌이 없었지만 동탁 사후 정권을 잡은 이각곽사로부터 달아난 헌제를 협천자하는 과정에서 이각과 곽사를 몰아냈다.

  • 도겸 : 원술과 연계하여 조조를 공격했으나 조조는 원소와 함께 이를 연주에서 격퇴했다. 이후 도겸의 부하가 조숭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며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지만 여포에게 근거지인 연주를 공격당하자 퇴각. 도겸이 사망하며 공손찬 측의 지원군으로 와 있던 유비가 서주목을 승계한다. 이후 서주는 유비, 여포, 조조 등 여러 군벌들의 지배를 거쳐가다 최종적으로는 조조의 손에 떨어진다.

  • 원술 : 원소와 연합하던 시절 조조의 숙적이었다. 원술은 남양에서 북쪽의 공손찬과 연합하며 원소를 견제했고,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털려 양주까지 밀려난다. 양주에서 재기에 성공하지만 재차 여포와 연합한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지며 공중분해된다. 조조 입장에서는 1라운드 보스.

  • 여포 :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잡을 때 처음에는 장막의 사주를 받아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이때가 조조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나 다름없다. 동탁 토벌에 집안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몇년 동안 황건적들과 싸우다가 겨우 연주에 자리를 잡은건데 그걸 홀라당 여포에게 털린 것이다.[6] 이후 여포를 쫓아내고 연주의 기반을 완전히 굳혔는데,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차지하자 공격을 시도해 죽인 중간보스.

  • 장수 : 관동에서 지지고 볶던 조조가 사예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마주쳤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지원과 가후의 활약이 더해져 수 차례 조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며 선전했다. 그러나 체급차는 극복할 수 없었는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 원소 : 최종보스. 서로의 숙적이었던 원술과 공손찬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대립하는 입장이 된다. 원소의 세력은 강대하여 한때 조조 본인조차 원소에게 투항할 마음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원소가 먼저 공세를 취했으나 조조가 이를 관도에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런데 이 전투 직후 원소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걸은 끝에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대사건이 터졌고, 원가는 후계자 다툼으로 세력이 분열되어 그 틈을 노린 조조에게 멸망당했다. 이후 조조의 세력은 가장 커다란 중원의 최강자가 된다. 원소를 이기는 것이 게임으로 치면 1주차 정엔딩이라면 이후 본격적인 천하 통일을 노리는 건 2주차 진엔딩을 도전하는 플레이라 볼 수 있다

  • 유표 : 원래 원소, 조조와 함께 원술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원술이 패망하자 적이 되었다. 장수를 방패삼아 조조와 대리전을 벌였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에는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유표 사후 그의 세력은 조조에게 흡수됐다.

  • 마초 : 관서의 군웅들 중 한명으로 장안 이서 지역을 완전히 자기 아래로 복속시키려는 조조와 충돌하여 결국 장기전의 유리함을 살린 조조가 승리하여 마초를 비롯한 관중 군웅들의 세력을 뿌리뽑았다.

  • 장로 : 익주 진출의 교두보로 한중의 토착 세력인 장로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 손권 : 히든 보스. 자신의 천하 통일 야망을 저지시킨 장본인 중 한명인 애송이. 형주를 너무나도 쉽게 점령하자 그 기세를 몰아 손권을 위협한 건 좋았으나 너무 싸움을 서두른 나머지 애송이 군주가 앞세운 주유유비의 활약에 대패하며 물러났다. 이후 서로 몇 차례 대치하며 적당히 강화를 맺기도 한다.

  • 유비 : 라이벌이자 진 최종보스.[7][8] 기반과 세력 격차, 상대 전적에 있어 늘 조조에게 밀렸지만 끝까지 조조에 맞서는 걸 포기하지 않으며 대항해 결국 조조의 천하 통일을 저지시키며, 둘의 마지막 격돌인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를 패퇴시켰으며, [9] 하지만 유비도 천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서로의 천하 통일을 마지막까지 막은 격.


4.1.2. 위무주손자[편집]


조조의 군사적 식견은 높은 수준이었다.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10]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격조를 높였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달아놓은 주석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경향도 있다.


4.1.3. 북방 민족 정벌[편집]


조조는 북방 원정으로 원가에 붙은 오환족을 캐박살내어 그 세를 크게 꺾어버리고 흉노족을 복속시켜 후환을 제거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의 비중으로 인하여 흔히 조조의 북방 정벌이 원씨 정복에 부수된 잔당 사냥 쯤으로 치부되지만, 역사가들은 조조의 북방 토벌이 후한 말 북방 민족의 세를 크게 꺾어논 업적이라고 평하면서 조조의 오환 토벌로 오호십육국 시대를 100여년 더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한다 한다. 그럼 육호십육국? 또 건안 16년(216년)에는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5부 흉노로 분할 통치하면서 흉노를 사실상 중국에 복속시키고 노예화하였다. 흉노는 한인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을 막을 요충지였던 하북 지역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조조는 이민족을 철저하게 때려잡았지만, 동시에 원소를 따른 하북 세력과 백성 대다수를 몰락시키거나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하북 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었다. 조조가 이후 하북의 업군을 자신의 세력의 수도로 두었지만 조비 시대에 다시 낙양으로 돌아감으로서 이런 행보는 무색해졌다. 물론 이민족도 같이 깨부수었기에 조조 생전, 삼국 시대 이후 서진 초기까지는 문제가 되진 않았다.

4.1.4. 친정 중시[편집]


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특이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親征)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한중 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되게 된다.

이는 조조가 한 황실을 등에 업는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이는 조조 스스로도 군권만은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천명한 것에서 드러난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업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따라서 노년의 나이에도 친정을 하고,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자 하였다.

사실 이는 통일 왕조 군주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당 태종, 송 태조, 홍무제, 영락제, 숭덕제 등등 병법에 자신있는 군주들 (개국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더더욱)은 본인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조뿐만 아니라 유비, 손씨 가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모습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조조는 중국사 통일 군주들과 달리 자신에 반대하는 군웅인 유비와 손권을 끝내 제압하지 못하여 천하를 석권하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4.1.5. 친족 중시[편집]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역시 많은 왕조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라 조조만의 특징으로 보긴 어렵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은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11]도 많았지만, 다소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은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12]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잡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1.6. 과감성[편집]


장단점이 있는 것은 과감성이다.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도 대전, 오환 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다. 역시 과감하게 나섰던 적벽 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에는 그전의 조심성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만해져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는 필사적으로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고 조심하면서 과감하게 싸웠던 조조가 손유 동맹과 싸울때는 괜시리 손권에게 허세를 떨지 않나,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때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자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13]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해서 유파를 벙찌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사실 조조는 일생동안 분발하기도 했지만 묘한 뽀록도 많이 따라왔기에 인생 말년쯤 되면 이상한 착각에 빠져서 해이해졌을 만도 하다.[14]


4.2. 제도 관련[편집]


파일:external/www.k2.dion.ne.jp/9182918082Q.jpg
하남성 허창시 '위무제광장'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조조의 내정 정치의 방향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법가 사상가인 신불해상앙에 비견된었던 평가처럼 사회 전체를 '극도로 긴장되고 일사불란한 계엄령 상태' 로 두었고, 위촉오 삼국의 군주들 중 가장 효율적으로 내정 제도를 굴렸지만, 제도를 시행하며 나올 수 있는 폐단은 본인의 임기응변으로 대응했고, 제도의 폐단을 막는 제도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식.

그런 조조의 정치는 효율적이었지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도 위태로운 것이었고, 조조는 그 위태로움의 경계선을 상시 걸어가며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를 때웠다. 그러나 조조 본인이 사망하고, 군대건 세금 문제건 인재 선발이건 모든 부분에서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군주 개개인만의 능력이나 임기응변만으로는 한계가 있던 위나라 말기 ~ 서진 정권 하에서는 조조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들의 폐단이 쌓이고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어쨌거나 조조 본인의 생전엔 효율적인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후대에서 제대로 시정하지 못한 책임까지 조조에게 묻는 것은 무리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조조 시기엔 툭하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빼앗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 물론 조조가 납득이 가는 이유나 효율성 없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동탁이나 이각, 곽사 처럼 권력을 즐길 줄만 알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폭군들보다는 훨씬 나은 평가를 받는다.

4.2.1. 둔전제[편집]



조조의 정치 능력의 진수는 임기응변과 현실성, 유연성, 그리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에 있다. 동시에 일반 민중들의 피해에는 무심한 경향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란으로 황폐해진 땅의 생산량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둔전의 확대 과정에서 강제이주와 엄벌같은 강압적인 방식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거나 도주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또한 둔전민은 일반 농민에 비해 천대받았다.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세율은 수확의 50%, 관의 소를 빌릴 경우에는 60%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기반은 마련해주는 대신 먹고 사는 정도만 보장해주는 제도였기에 유랑민이라면 모를까, 전란에서 비껴나있는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더 손해인 제도였다. 일부 빠들은 부패만 없으면 이게 더 낫다는 헛소리를 하지만, 한나라의 기존 세제 쪽이 부패가 없으면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덜하다. 단순하게 따져서 부패로 수확의 30% 정도를 추가로 빼앗기더라도 둔전제보다는 기존 세제가 백성들 손에 남는 것이 더 많다. 게다가 둔전제가 특별히 부패를 저지르기 어려운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조조 대에는 이런 것이 미미했으나 위나라 말기 조방 대에 접어들어서는 조상 일파가 사유화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로 이외의 수탈이 늘어나기에 이른다. 진대에 이르면 부세가 이미 농민 소득의 절반 가량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토지에서 거둔 농산물의 25%만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출처필요.] 한나라 시절에 부세가 1/15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후한대까지 2년이었던 군 복무 기간이 위의 경우 평생으로 늘어나는데, 인간 이외의 노동력을 생각할 수 없던 고대에 각 집의 노동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높은 세금을 거뒀다는 것은 위, 진이 얼마나 백성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15]

둔전제는 단기적으로 조조의 세력을 급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위나라의 전략적 우위를 지탱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조의 전략적 우위가 확고해진 것은 하북을 평정한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도대전 당시에는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는 기록도 확고히 존재한다. 단지 기록에 자세히 남지 않았을 뿐, 원소를 비롯한 많은 군웅들 또한 둔전제 못지 않은 나름의 내정 정책을 펼쳐서 경제력 향상을 꾀했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제적 체질 강화같은 것은 일부 빠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둔전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둔전은 고작 40년만에 폐지된다. 심지어 조조 생전에도 백성들이 둔전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폐단이 극심했다. 천년동안 중국의 토지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빠들의 헛소리다. 북위/수/당의 균전제, 조용조가 둔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으며, 당 말기에는 양세법이라는 초대형 세제 개혁이 있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지나친 과대 평가다. 고려에서 운영한 둔전은 전형적인 군사 둔전으로, 이는 조조 이전 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둔전제의 영향력은 오호십육국 시대 일부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끝난다. 이는 전란기에나 먹힐만한 임시방편적인 제도의 한계이다.

4.2.2. 호조법[편집]



조조는 200년 전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 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 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을 부양하는 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이 역시 제도는 정비해도 그 제도 자체를 관리하는 것은 조조 개인의 역량에 의존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4.2.3. 구현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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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친목/인맥빨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구현령은 실제로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 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가 인재 등용에 특별히 파격을 보인 것도 아니다. 유비와 손권도 인재 등용에 있어서 조조처럼 파격적 인사를 보인 적이 분명히 있었다. 유비의 경우, 한중왕 즉위 당시 한중의 수비를 당시엔 상대적으로 무명이던 위연을 발탁해 맡겼으며, 손권의 경우,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여몽을 발탁해 지용겸비의 무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으며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한 인물이 지인을 추천하여 등용시키는 다단계 피라미드 비제도적 등용 체계였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16]


4.2.4. 원호법[편집]


조조는 관도 대전 그리고 적벽 대전과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싸움에서 죽은 장병들에게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조조는 그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주었다. 나아가 각 고을에는 학교와 선생을 두어서 죽은 장병들의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장병들을 위해 묘당을 지어 제사가 이어지게 도왔다. 이렇듯 조조는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는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4.3. 인재 관련[편집]


능력이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진림 : 진림은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일단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대답하자, 조조는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며 설득한다. [17]
  • 위충 : 장막이 연주를 침공하자 위충은 도망가버려서 그를 신뢰하고 있던 조조는 분노한다. 그러나 위충을 다시 사로잡았을 때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라며 다시 기용했다.
  • 장수, 가후 : 이들에 의해 친족들이 죽었음에도 등용했다.[18]
  • 유웅명 : 마초에게서 조조에게 도망왔다. 그러나 다시 조조를 버리고 장로에게 도망갔다. 장로가 격파되자 유웅명은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관직에 복직시켰다.
  • 필심 : 필심은 연주 시절 조조에게 등용되었다. 장막, 여포가 연주에서 모반을 일으켰을 때 필심의 가족을 인질로 잡자 조조는 필심을 장막에게 보내준다. 필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조가 장막, 여포를 격파하고 다시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조조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라며 필심을 다시 등용했다.

덤으로 비록 끝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관우와의 에피소드 역시 유명하다. 적토마 선물이나 오관육참 에피소드는 연의의 창작이긴 하나, 정사에서도 관우가 공을 세우자 한수정후라는 높은 직위를 내리는 등 이런저런 성의를 보였다.[19]

반면에 자기 휘하에서 오래 일하더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는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양수 : 연의에서는 그 유명한 계륵 에피소드 이후 처형시킨다. 정사에서는 몇 달 뒤에 죽이지만. 어쨌든 양수가 나름 재능은 있었지만 조조에게 밉보여서 죽은 건 동일하다.[20]
  • 공융
  • 최염 : 최염이 감옥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하고 자결시켰다.
  • 최씨 : 최염의 조카딸. 문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식의 아내인데도 죽였다(!).
  • 예형 :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에게 보냈다.
  • 허유 :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허유도 죽였다.
  • 누규
  • 주불의
  • 순욱 :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 모개 : 최염의 동료였던 모개 또한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료들의 변호로 관직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후 모개는 병을 얻어 죽게 된다.
  • □희 :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총애하는 희(姬, 첩)가 있어 조조가 낮잠 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조조가 베개를 베고 누우며 조금 이따가 자신을 깨우라고 말했다. 희(姬)는 조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조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 변양
  • 환엽
  • 원충

조조의 대인배적인 모습은 오직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당장 조조에게 밉보여 버림받거나 살해당한 인물들 가운데는 능력만큼은 일류였던 인물, 그 중에서도 능력은 물론이며 인품마저 훌륭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고 순욱처럼 자신의 공업에 큰 공로를 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조조는 기본적인 그릇은 컸지만,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미물처럼 취급하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용 가치가 없다는 말은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이런 조조에 대해 장야신[21]인재를 구할때 충성스럽거나 효도하지 않아도 된다더니불효죄로 사람을 죽였나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더불어 조조가 살아돌아온다해도 이 질문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조조가 질문하는 사람을 죽여버릴까봐 두려우니까.

태조는 성격이 엄했으므로, 연속(掾屬)들은 공무에 관한 일로 왕왕 곤장을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죽어도 치욕은 받지않을 것을 맹서하였기 때문에 시종 벌을 받지 않았다.

위서 하기전


위서 하기전을 보면 위나라 조야의 분위기가 대단히 억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연속이란 말단 관료, 소속된 관료를 뜻하는데 말단 관료를 처벌한 일이 대수롭지 않을수도 있지만 위나라에서는 조조가 구현령을 발표한 이후로 속관도 조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하기, 최림, 최염 등 명문 호족들도 처음에는 속관으로 시작했다. 연속이 비록 직급은 낮지만 명문 일족의 사대부도 임명되는데, 조조는 그들을 몽둥이로 다스렸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순욱의 간언을 듣고 헌제를 맞이한 조조였지만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리란 믿음이 흔들리자 원소와 뒷거래에 나서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또 위풍은 조조가 죽기 1년 전에 반역을 도모했는데 이 반역 사건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게 굉장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위나라 고관의 자제들이 위풍과 함께 반역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왕찬, 장수, 송충, 유이의 자식들이 위풍과 뜻을 같이 했으며 결국 적발되어 어떤 집안은 대가 끊기고 어떤 집안은 친척이 대를 잇는다. 조조가 왕이 되고도, 죽기 1년 전까지도 위나라를 엎으려는 시도가 귀족 자제들 사이에 있었을 정도로 조조와 신하들의 연결 고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몇몇 동양의 위정자들은 조조의 통치력을 고평가했지만, 옛 사대부들이나 민중들이 조조를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위진정통론 시각으로 편찬된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최염이 조조에게 살해당한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라고 했을 정도다.

4.4. 신체 관련[편집]



4.4.1. 무예[편집]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맨손으로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그가 남피에서 사냥을 했을때 혼자서 꿩을 예순세 마리나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조가 직접 칼을 썼다는 기록도 몇 개 존재한다. 그가 젊었을 적 십상시 장양의 집에서 칼을 부렸는데 칼솜씨가 상당했던지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주의 단양병[22]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가 몸소 수십 명을 베어가며 위기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아래에서 나오듯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크게 아팠던 적이 없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도 기어이 살아돌아왔으니 수준급의 무예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4.4.2. 건강[편집]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잔병치레를 한 기록이 없다. 후술할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평생동안 지병인 편두통에 고생하기도 하는 등 마냥 건강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23][24] 조조의 꼼꼼하고 사려깊은 성격과 그가 관리해야 했던 넓은 영지와 복잡한 시대상 등을 보면, 골치가 안아플 수 없었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 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밑에 가족 관계에 나와있지만 한 자식들부터 60대에 얻은 늦둥이까지 포함해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던 걸 보면 건강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4.4.3. 외양[편집]


태평어람에 인용된『위씨춘추』에 이르길 :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

후대의 이야기책에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기록이 종종 있기 때문에[25]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창업 군주를 묘사할 때 외양을 실제보다 높게 기술해주는 편인데, 조조의 경우 그런 묘사가 없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외교 절차에서 저런 장난을 친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당대에 외모의 가치가 크게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실제론 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26]


4.5. 예술 관련 - 예술가적 면모[편집]


조조의 예술가적 면모는 역대 군주들 중에선 실로 돌연변이에 가까운 케이스다. 물론 유구한 중국사, 나아가 유교 문화권에서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을 갖춘 군주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혼군, 암군, 폭군이 되어 나라를 말아 먹었다.(…)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예술가적 기질과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여겨야 할 국정 운영의 속성에 맞춰 원리 원칙에 입각한 예측 가능한 정책을 우직히 밀고 가야 하는 군주적 자질은 현실적으로 상극에 가깝다는 것이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그 양극을 모두 가지고 조화시킨 희귀한 사례이다.

물론 사회적 풍조에 따라 그 유용성은 크게 다르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후기로 갈수록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지 못했었던 군주들이 워낙 많았기에, 동양권에서 '군주의 예술 행위'에 대해서 얼마나 경계심을 가졌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고려 시대에만 해도 노국 공주의 사망으로 인한 상심이 너무 커져 암군이 되어버린 공민왕 같은 인물도 있거니와 조선 중기에 시, 문장을 중시한 훈구파와 연산군이라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폭군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으며 태동한 사림은 조선 전기 지배 계급보다 군주의 예술을 비하, 제한하려 들었다.(교조적인 성리학 + 연산군의 폭정이 함께 작용했다.) 심지어는 시를 쓰는 것까지도 멸시하고 없애려 들었고 이에 따라 군주가 조금이라도 예술을 즐기려 들면 크게 반발하며 억제하려고 했다. 조선 성종은 시 좀 썼다가 수십건의 상소가 쏟아져서 진절머리를 내고 결국 포기했다. 조선 전기에만 해도 왕이 연회때 같이 노래하고 춤췄다는 기록도 있는 것에 비하면 사회적 기준이 크게 바뀐 것. 모든 유자들이 받드는 성인 공자도 악기 연주와 노래를 즐겼고, 제자들에게 권장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군주들의 예술 행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함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가 어디 한둘이어야지.(...)[27]

물론 조조도 폭군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를 망치긴커녕 창업 군주에 준하는 치적[28]을 쌓았는데, 실제 조조만큼 예술가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동시에 정치와 행정, 전쟁 같은 군주로서의 능력까지 뛰어난 인물은 거의 없다.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나 결국 나라를 망친 송휘종, 근래 들어 부정적인 시각이 커졌지만 어쨌든 명군의 범주에 들어가는 군주이자, 예술가로도 한 가락 한다고 자부한 건륭제와 같은 경우가 조금 존재할 뿐이다.[29] 중국사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조조만큼 군주로서의 능력과 예술가의 자질을 높은 수준으로 겸비한 인물을 굳이 찾아 본다면 선덕제 정도밖에 없다.

다만 예술가로서 조조의 자질은 과대평가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분명 뛰어난 자질을 갖췄다는 것은 맞지만 천재라 불릴 정도는 아니라는 것. 동북아 유교 문화권에서 예술가의 재능을 평가하는 기준은 시서화악(詩書畵樂)이다. 즉 시문, 서예, 회화, 음악 이렇게 4가지 항목에서 평가받으며,[30] 감식안과 비평 능력, 그리고 수집벽이 뒤따른다. 이런 예술가의 이미지는 고대로부터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서 예술 전반에 걸쳐 방대한 조예를 지니고 있어야 완전한 예술가로 대접받을 수 있는데, 조조는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고 서예에 있어서도 명필로 평가받지만 그림과 음악에 있어서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군주로서의 역량은 조조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천재로 평가받는 남당의 후주 이욱 같은 경우는 시서화악 모두에 능한 만능 예술인이었다. 또 군주로선 암군이었지만 예술가로선 역시 천재라는 소리 듣는 송 휘종도 음악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이였다. 조조의 예술적 역량은 분명 우수하지만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략적으로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그림은 송 휘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났던 선덕제와 비교하면 적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탁월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끔은 안 좋은 쪽으로, 광기에 가까운 형태로 폭발시켜서인지, 서주 대학살이라던가 관도 대전 전 후 7~8만에 달하는 원소군 포로를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매장하는 등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 못 할 잔혹한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중국계 일본인인 역사 문학가 진순신은 저작 <소설 제갈공명>에서 이러한 조조의 부정적인 의미의 예술가적 감수성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작중에서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인해 부모를 잃고 남은 가솔들과 함께 피난길을 떠나는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에게 "왜 조조는 죄없는 백성을 죽이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제갈현은 "조조가 시인이라서 그렇다"라고 답한다. 이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빌려 상식적으론 도무지 이해 못할 조조의 잔혹한 폭거의 이면에 깔린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제갈량의 행보를 추동하는 심리적 동인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물론 제갈량이 진짜 서주 대학살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고 혈육을 잃은 건 더더욱 아니지만, 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제갈량이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출세길이 훤히 열린 조조에게로 출사하지 않고 그 당시에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던 유비에게 임관해서 평생을 유비의 총신으로 초지일관했는지 납득이 가게끔 개연성을 부여한 훌륭한 문학적 묘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적벽 대전 이후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이전의 과감하고 냉철한 모습과는 달리 왠지 뭔가 나사 풀린 모습을 자주 노출하게 되는데, 이 문제 역시 조조의 예술가적 감수성이 노쇠화와 맞물려 안 좋은 방향으로 발휘된 경우로 보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말년의 조조는 우리가 아는 그 조건달, 조먼닭이 아니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침공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놓으라는 유파의 요청을 가볍게 즈려밟고 남형주를 버리다시피 뒤로 한채 즉각 철수해 결과적으로 유비의 웅비를 뒷받침할 기반을 마련해 준다. 또한 한중을 점령하고 나서는[31] 한중은 익주의 목구멍이나 다름 없으니 지금 이 기세를 몰아 그대로 쇄도하면 능히 유비를 깨부술 수 있다는 유엽사마의의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곧바로 철군(득롱망촉)해서 결과적으로 익주를 점령한지 얼마 안 된 불안정한 시기에 익양 대치 등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유비의 숨통을 터줬다. 그리고 한중 공방전 때는 한중을 구원하기 위해 목적지를 목전에 둔 장안까지 멀쩡히 잘 친정나왔다가 어째서인지 그대로 장안에 눌러앉아(...) 하후연과 장합 등이 유비군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반 년 이상 수수방관하다 총사령관 하후연이 전사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나서야 뒤늦게 부랴부랴 구원에 돌입했고, 결국 한중을 빼앗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중왕 즉위라는 유비의 최전성기를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번성 공방전 에서는 관우의 북진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하며 멘붕에 빠져 갈피를 못잡고 하북으로 천도를 하네마네 우왕좌왕하다가 사마의와 장제의 진언을 듣고 비로소 정신을 바로잡고(...) 올바른 대응을 펼칠 수 있었다. 사실 이 부분도 좀 어폐가 있는 게, 아무리 손권과 이면적 합의가 있었다지만 관우 하나 잡겠다고 멀리 합비의 장료까지 동원함으로써 회남 방면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건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우금이 이끄는 정예 7군이 수몰돼 전멸했고 또 관우의 기세가 대단히 강성해 내부에서 반란까지 들끓었다곤 하나 관우의 군세는 조위의 전력에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다.[32] 이미 유비의 익주 정벌 과정에서 2차례나 많은 병력과 핵심 제장들을 다 차출당했고, 또 손권과의 익양 대치의 결과로 남형주의 반을 할양해 고작 형주의 1/4을 바탕으로 둔 게 관우의 전력이다. 5만이 넘어가면 흔히 10만으로 칭하는 당시 상례상 관우가 이끄는 병력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조위의 전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3~4만에 불과했다.[33]

물론 이것을 예술가적 기질로 인한 과잉 반응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관우는 당대 최고급 장수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고, 조조군은 한중 공방전과 양번 공방전의 연이은 대패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또한 번성 공방전의 결과로 처절히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위의 인사 유엽으로부터 "촉한은 약소국으로 뛰어난 상장은 관우 뿐"이란 평가를 받은 걸 보면 관우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당대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관우는 사서에 남겨진 기록상으론 패배가 많아 그 막대한 명성에 비해 커리어가 초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듣곤 한다. 그러나 사서상 커리어로는 촉한의 상장 중 최고 수준에, 똑같이 만인지적의 반열에 오른 장비를 제치고 피아를 가리지 않고 유비군 최고의 상장으로 평가받는 걸 보면 관우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각을 능히 짐작케 한다.[34]

사실 말년에 뭔가 이전과 많이 다른 어설픈 인물로 급변모했다는 인상을 주는 건 난세의 간웅으로서 조조와 인물상이 상당 부분 겹치는, 한때의 절친이자 필생의 라이벌인 원소에게도 보여지는 일면이다. 원소 역시 평생을 과감하고 냉철한 간웅으로 철두철미 일관하다 말년 관도대전 무렵부터 뭔가 급격히 성급하고 허술한 모습을 노출하더니 관도 대전에서 참패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하면서 원가의 패망을 불러왔다.[35]

원소와 조조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명문가의 천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조금의 여유도 누릴 여지가 없는 치열한 삶을 사는 통에 이를 인지하고 어떻게 개선해보려는 노력조차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하락세와 함께 죽음이 찾아왔다면, 후자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삶 속에서 건강관리도 열심히 했고, 무엇보다도 예술 활동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기에 최대한 하락세를 늦추며 그럭저럭 연착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조의 예술가적 면모는 신의 한 수 인 셈이다. 실제로 똑같은 간웅으로서 잘 나가다가 급격히 하락세가 찾아 온 원소는 왠지 성급하고 초조해져 무리수를 두다 폭망했다면, 조조는 왠지 소심하고 소극적으로 변했지만 안해도 될 짓을 해 화를 자초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똑같이 급하락세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태와 결과가 정반대인 것은 감정적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예술가적 면모가 만들어낸 차이일지도.

물론 이렇게 나이가 들고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겁을 먹는 케이스도 생물학적 한계상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마다 차이는 있는 법이라서, 적어도 조조보다 예술적인 면에선 잘 부각되지 않고 문학에 있어서도 실용적인 독서를 하는 정도였던 또 다른 라이벌 유비[36]와 비교하면 이런 기질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유비와 조조는 거의 동년배였고 유비의 이릉대전이라는 결과물 자체가 조조보다 더 나쁜 쪽으로 부각돼서 그렇지, 유비 말년의 행동 패턴은 조조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다. 환갑이 다 되어 진행한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의 전술, 전략적 행보는 여전히 예리했으며 후한이 멸망하자 이를 이용,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재빨리 제위에 오르는 행위 자체도 명분을 중시했던 유비 자신의 일관되게 보여온 행동 패턴의 또 다른 증명이었다. 또 이릉 대전의 목표는 평생을 함께한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회복이라는 이해 가능한 일관된 전략적, 명분적 목표가 있었으며 육손이라는 기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후계자의 입지도 믿을만한 신하에게 맡겨 분명히 세웠던 점에서 사실상의 장자 조비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조식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조조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비슷하게 말년에 엄청난 문제를 겪은 손권의 경우야 그 본인의 문제도 있긴 했지만 무분별한 숙청을 통한 나라의 황권을 재정립한다는 시도를 완전히 실패해서 말아먹은 케이스에 가까우니 논외로 치고....(...)

상술했듯 예술가 기질과 군주 노릇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하자면 예술은 군주에게 있어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가령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혹은 정치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예술을 통해 접근하게 된다면 경계심을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고, 또 쉽게 호감을 사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와 예술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가령 바그너 음악을 대중 동원 같은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치 히틀러나 문학을 현실의 갈등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의 일종으로서 사회 변혁의 첨병으로 여긴 사회주의 리얼리즘 같은 문예 사조를 생각해보자. 문예 사상가 발테 벤야민은 이런한 관련성을 두고 "파시즘은 정치를 예술화하고 사회주의는 예술을 정치화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런 극단적인 예까지 갈 것 없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령 일제 강점기[37]나 군사 독재 정권 시절 같은 중요 역사적 정치적 분기점에 있어서 시대를 달리해 참여 문학이냐 순수 문학이냐 하는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논쟁이 반복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정치와 예술의 밀접한 관련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현대 미학적 관점을 통해 고대 사람인 조조의 리더십과 통치술을 조명하는 건 어폐가 있겠지만 적벽 대전을 앞둔 조조가 단가행을 읊자 모두 감동하여 "승상 킹왕짱!"을 연호했다는 일화에서 보여지듯 교양을 중히 여기는 전근대 시대의 지배계층에게 있어서 조조의 예술가적 기질은 분명 상당한 호감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고 이는 조조의 패권 가도를 뒷받침할 인재풀 확보라는 측면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38][39][40]

4.5.1. 요리[편집]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 갈비만 남은 닭이 아니다 일화는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 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 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돼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 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귀한 식재료였던 전복 요리를 즐기는 것을 넘어 환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확히는 전복을 말린 '건화'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물론, 건화는 조조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사실, 먹은 것만으로 나열하기 시작하면 대륙의 기상 중국인답게 한국인 관점으로는 온갖 해괴한 것들이 다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4.5.2. 패션[편집]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창업 군주임에도 인물이 준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붉은 옷으로 유명하다. 즉 당대의 패셔니스타.


4.5.3. 음악[편집]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


4.5.4. 문학[편집]


조조는 문학에도 매우 뛰어났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른다.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일인자로 손에 꼽혔다. 조조가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시인으로만 평가해도 위인이라 하는데 실제로 그러하였다.

조조 시절의 문학을 건안 문학이라 한다. 특징으로는 지금까지 있었던 문학들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이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자신도 오언시[41]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등이 있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당시의 위정자였던 조조였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한편,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작품으로 조조의 시에서 영웅호걸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패기가 넘치면서도 깊은 사색과 문학적 감수성이 들어있는 해로행 같은 작품을 보면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5.5. 서예[편집]


파일:external/pic.pimg.tw/1382856219-3806400083.jpg
곤설의 탁본

서예에도 재능이 있는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직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서체가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곤(袞)자는 본래 흐를 곤(滾)으로 써야 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42] 더불어 곤(滾)과 곤(袞)은 통가자[43]로, 살짝 다른 글씨를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설(雪)자와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님 곤룡포(衮龍袍)도 말하고 싶었던 중의적 표현?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이다.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4.6. 종교 관련[편집]



4.6.1. 유교[편집]


유교(유가)를 배척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교는 중국 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 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조조는 유교 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측면도 있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건 유교를 따른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니, 조조의 평가가 더 더러워진 일화 중의 하나다(...).


4.6.2. 도교[편집]


조조는 도가에 상당히 심취해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물지에는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조조의 취향은 후로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노장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5. 가족 관계[편집]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이 탓인지 2차 매체에서의 조조는 유부녀 취향으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 예시(...) 아버지만큼이나 유부녀에 심취한 아들 조비도 함께이다.

다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적 측에 약탈당한 아내도 많았으며, 결혼 연령도 현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워낙 난세다보니 온 나라에 과부가 넘쳐났고(...) 크게는 호족들 간의 정략결혼, 작게는 국력을 위해서 과부들이 수절하기보다는 개가해서 건강한 씨를 받아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개가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유명한 여류 문학가 채염은 여러 사유 때문에 여러번 결혼을 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대 조조 정도의 위치나, 조조가 맞이한 과부들에게 정략적 이유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의 취향 외에 굳이 과부를 취할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일단 그가 노렸으나 얻지 못한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 문소황후 : 세설신어에 따르면 문소황후 견씨는 지혜롭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본래 원희의 처가 되어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문소황후를 즉시 데리고 오도록 명령했지만 주위에서 아들인 조비가 이미 데리고 갔다고 대답하였다. 이를 들은 조조는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건 다 조비를 위한 일이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아들놈이 훗날 문소황후를 죽게 만든걸 생각하면 조조가 취하는 것이 나았을 수도
  • 이교 : 삼국지연의 한정.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이 주유를 격동시켜 주전론을 펴기 위해 동작대부를 조작하긴 했지만 실제로 조조도 이교를 노리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조조가 단가행을 읊는 편인데 조조가 자기 스스로 대교와 소교를 동작대로 데려가겠다고 선포까지 한다.
  • 추씨 : 장수를 토벌할 때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려서 조앙전위, 조안민이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여성이 많다보니 자식이 꽤 많은데 다음과 같다.

  • 부인 : 정씨(丁氏) : 처녀 상태로 조조에게 시집을 왔던 정씨는 조앙이 죽었을 때 그와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후 조조가 정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유부녀와 바람났다가 아들을 사지로 내몰은 남편을 정씨는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훗날, 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은 평생에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정말? 유일하게 후회스러웠던 일이 정씨의 일이라며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 말한다. 조조는 정씨가 잘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조조의 위세가 무서운 사람들은 누구도 정씨와 재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성편력이 화려한 그 조조가 유일하게 몇 번이나 재결합하자고 애걸복걸했음에도 재결합에 실패한 여성.
  • 부인 : 무선황후 : 조비의 모친이자 훗날 왕후가 되는 변씨는 가기 출신이다. 정씨가 떠난 후 그녀가 두 번째 정실이 된다.
  • 첩 : 유씨(劉氏)
  • 첩 : 환씨(環氏)
  • 첩 : 두씨 : 여포를 토벌할 때 관우가 여포의 수하인 진의록의 처 두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미인인지라 조조 자신이 취했다(…). 조조 : 미녀 > 관우 [44]
  • 첩 : 진씨(秦氏)
  • 첩 : 윤씨(尹氏) : 조비 등과 형제처럼 자라난 하안의 어머니 윤씨는 하진의 며느리인데 조조의 첩이 되었다.
    • 1남 : 조구
  • 첩 : 왕씨(王氏)
  • 첩 : 손희(孫姬)
    • 1남 : 조상
    • 2남 : 조표
    • 3남 : 조근
  • 첩 : 이희(李姬)
    • 1남 : 조승
    • 2남 : 조정
    • 3남 : 조경
  • 첩 : 주희(周姬)
  • 첩 : 유희(劉姬)
    • 1남 : 조극
  • 첩 : 송희(宋姬)
    • 1남 : 조휘
  • 첩 : 조희(趙姬)
    • 1남 : 조무
  • 첩 : 진씨(陳氏)
    • 1남 : 조간 : 조조가 환갑을 넘어서 본 막내로(조조가 60대 중후반에 사망했으니 죽기 몇 년 전에 얻은 늦둥이다.) 조비와는 30살이나 차이나서 조비를 보면 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 조비가 "난 할아버지가 아니라 형이다."라고 고쳐줬다고 한다(…). 조비가 자기 형제들 중 잘 대해준 거의 몇 없는 사례.
  • 윤부인


6. 조조의 무덤[편집]


조조 무덤 참조.


7. 평가[편집]


조조曹操: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간웅
종종 조조를 '동양의 카이사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도 둘은 비슷한 면모들이 있다. 두 명 모두 문무겸비의 영웅이었고, 유부녀를 좋아했다는 점이 닮았다. [45] 군사적, 정치적 업적을 세운 영웅이 문학적 재능도 보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와 같은 걸출한 저서를 남겼고, 조조도 당대의 유수 시인으로 손꼽히며 손자병법의 주석 작업, 악부의 진흥 등에 큰 업적을 보였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 악행들이 속속 발굴되며 인격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이 도덕성은 끝까지 조조의 평가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역적이고,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학살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7.1. 당대의 평가[편집]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 진수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 허소 [46]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일세의 재주가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은 군(君, 그대)에게 달려 있소! - 교현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했다. 또한 위-서진 시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 조조를 좋은 지도자처럼 써줬다.

반면 조조에 반대하는 군웅이나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반대하는 촉, 오의 인물들은 당연히 조조를 적대시 하였다. 당장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만 해도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7.2. 후대의 평가[편집]


조조는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으로서 뛰어난 군주로다, 나 이세민은 많은 백성들과 제장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일컬어지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나 태종은 다른 군주와 비교한다면 뛰어나지만 무제(조조)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노라. 위 무제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나라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천하를 평정한 공은 이전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 제위태조문


"나는 항상 위 무제의 행위가 매우 간사하며 그의 사람됨이 천박하다고 생각해 왔소. 이와 같은데, 어떻게 교화를 시행할 수 있겠소?" - 정관정요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


이상의 발언은 모두 당태종 이세민의 발언들이다. 당 태종은 공식적으로는 조조의 능력이 심지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또 다른 발언들을 보면 내심 자신보다는 못하다고 깔보고 있었던듯 싶다.[47] 하지만 과시할 만도 한 게, 당 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여 당 제국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며 조조의 위업을 압도한 제국의 황제였다.[48]

조조는 통일 과업을 완수하였으며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창업 군주들보다는 저평가를 받았고, 그의 대표적인 실책들은 후대의 학자와 정치가들에게 두고두고 까였다.[49] 이것은 조조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있는데 개인적인 앙금에 사로 잡혀서 명망을 더럽히고 통일할 기회를 놓쳤다"라는 것이 후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동진 이후 촉한 정통론이 두각되기 시작하고 남조 시대를 거치면서 세설신어 같은 서적을 보면 당시 귀족층, 식자층의 인식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조금씩 나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식자층이나 귀족, 사대부들 입장에서도 반평생을 함께 일한 순욱이나 모개, 명사로 이름 높았던 최염 등을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죽이거나 숙청했기에 조조를 편하게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50] 그러나 위에 나온 당 태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 때까지는 식자층에선 그래도 영웅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51]

그러나 민중들 입장에선 조조는 오래전부터 간악한 인물이나 악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귀족주의들은 몰라도 일반 민중입장에서 조조는 서주대학살등 학살 때문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성들에게 결코 좋은 이미지가 생길수가 없는 인간이었다.[52] 노예 출신으로 후조를 세운 석륵은 조조와 사마의를 묶어 평가하길 "저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 외에도 조조에게 멸망당한 군웅들의 통치를 받았던 지역에서 조조의 혹독한 정치에 반발하여 민담, 설화 등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도삭군 전설.

덧붙여 조조가 모금 교위와 발구 중랑장이라는 관직까지 만들어 도굴을 했다는 이야기가[53] 진림의 격서에 나오며, 이 역시도 당대에 비난받은 이유 중 하나. 문화재 도굴꾼을 국가 단위로 운영해서 부장품을 팔아치우는 일을 했다고 받아들이면 조조가 대충 어떤 일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송나라 때 쯤 가면 민담이나 설화, 이야기극 등에서 조조는 악인으로 부각된다. 이후로 후대의 중국에서는 조조=역적, 변절자, 악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식자층도 성리학적 관점에서 조조와 그가 세운 위나라를 좋게 보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당대의 중국인들 가운데 조조를 긍정적으로 본 이들은 없었다. 성리학 성립 전이지만 사마광은 '위 무제는 잔혹한 데다 천하에 큰 공을 세웠으니 오래전부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한나라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 마음이 없어서였겠는가. 명분이 두려워 스스로 억제한 것이리라.'라고 평가를 내렸다. 또 민중은 조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극에서 조조가 패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조조를 연기했던 연극인이 관객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나오고 나서 부터는 조조는 완전히 "난세의 간웅"의 이미지가 굳어진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 역시 조조는 역적이라고 결론내렸다.[54] 박지원열하일기 구외이문편엔 조조의 무덤이 어부들에게 발견되었을때 건륭제가 친히 조조의 목을 치고 유비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전해지는 얘기를 박지원이 듣고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이런 얘기가 조선 사신단에게까지 들렸을 정도면 그 인식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대에 출간된 요재지이에선 죽은 뒤에 개가 되어 나타나거나, 1000여 년이 지나도록 지옥에서 (죄상에 걸맞은) 형벌을 못 정하는 통에 애꿎은 볼기짝만 계속 맞으며, 심지어는 홍수에 무덤이 박살 나서 유골이 산산조각이 나는 이야기가 있는 등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7.3. 연의의 평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Cao_Cao_Portrait_ROTK.jpg

城則鄴城水彰水 :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定有異人從此起 : 남다른 사람이 그곳을 따라 일어나니

雄謀韻事與文心 : 웅대한 지략으로 멋진 일을 하며 문장도 뛰어나고

君臣兄弟而父子 : 주군과 그 신하들은 마치 형제와 부자 같았구나

英雄未有俗胸中 : 영웅은 가슴 속에 속된 것이 없으니

出沒豈隨人眼底 : 그 출몰을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따르랴

功首罪魁非兩人 :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 따로 두 사람이 아니라

遺臭流芳本一身 : 악취나 향기나 본래 한 몸에서 다 나왔네

文章有神霸有氣 : 그의 문장은 신묘하고 패기가 있었으니

豈能苟爾化為群 :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인재들과 섞이랴

橫流築臺距太行 : 흐르는 물을 가로막고 동작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氣與理勢相低昂 : 기(氣)와 이(理) 형세 따라서 때때로 낮아지고 높아졌네

安有斯人不作逆 : 어찌 이런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小不為霸大不王 : 작게는 패자(覇者), 크게는 왕이 되지 않았으랴!

霸王降作兒女鳴 : 그러나 패왕도 죽게 되니 아녀자처럼 울며

無可奈何中不平 : 어쩔 도리 없이 마음속으로 불평했네

向帳明知非有益 : 제를 올려도 부질없음을 잘 알고

分香未可謂無情 : 향수를 나눠줬으니 무정하다고 말할 수 없네[55]

古人作事無鉅細. : 고인이 일을 할 때 크고 작음에 구애 없었고

寂寞豪華皆有意 : 적막하거나 호화롭거나 모두 의미 있었는데

書生輕議塚中人 : 서생들은 무덤 속 사람을 함부로 의논하지만

塚中笑爾書生氣 : 무덤 속 사람은 이런 서생을 비웃을 것이네

- 업중가(嶪中柯)



사실상 삼국지 연의 초반부 주인공. 그리고 중반부의 최종보스이다. 물론 유비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첫 등장부터 죽을 때 까지 계속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초반부에는 유비의 세력이 미비하다보니 군사적 활약에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유비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조조의 영웅담에 비중이 더 쏠리게 된다.[56] 그리고 원소를 꺾으며 조조 영웅담의 하이라이트를 찍게되고 그 후 제갈량의 등장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유비세력이 활약하며 기반을 다지게 되어 비중이 많이 옮겨간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 하나다.

예를 들면 완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위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선한 모습과[57][58] 수춘에서 군량이 부족하자 군량 배급 담당자 왕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 간사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관우를 자신의 사람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안타깝게 송별하는 모습과 자신의 속을 읽은 양수를 죽이는 모습이 상반된다.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 데 비해, 연의는 실존한 악행이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을 추가했다. 사실상 연의가 조조 이미지 재평가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심지어 모종강도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부분에 대한 평으로 입으로만 바른 소리를 하는 위선자들보단 조조가 더 낫다며, 악인이라도 대단한 악인이라는 식으로 평가할 정도다.

그 덕분에 연의 이전까지는 평면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나왔으나, 연의에서는 선과 악, 인정과 비정이 섞인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조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승화시켜주고 조조에 대한 평을 바뀌게 하였다. 그런데 연의에서의 조조는 보통의 밑도끝도 없는 악당이 아니라 자기사람과 백성들은 또 정말 잘 챙겨주는 모습도 많이 보여준다. 즉 인간성으로는 악인이지만, 군주로서는 명군인 것.물론 현실은 공융, 순욱, 순유였지만

7.4. 현대의 평가[편집]


현대에 들어선 조조라는 옛 대권신의 위세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중국을 중심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현대에는 이러한 조조 악당론에 대립하는 영웅성을 강조하는 조조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에서의 평가는 위에 적었듯이 대대로 간웅, 역적 등에 가까웠지만, 현대에 들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곽말약이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라고 평하며 복권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곽말약 이 사람이 마오쩌둥 빠돌이라는 논란이 있는 편이라 어쩌면 마오쩌둥의 입맛에 맞춘 조조 찬양일 수도 있다.

84부작 삼국지처럼 연의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오기도 하지만 신삼국처럼 일세의 영걸임과 동시에 그렇다고 일방적인 미화가 아닌 비정하고 냉혹한 모습도 잘 조명된 균형잡힌 모습으로 나오는 작품도 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 조조처럼 조느님에 반대하는 놈들은 다 찌질이(...)로 묘사된 작품도 있다. 하여튼 현대 중국 작품에서 조조를 악당으로만 그리는 매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사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재평가 초창기에 연의의 촉한 정통론에 대한 반발로, 무능한 유비에 대비되는 유능한 조조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에도 통용되기 어려운 악행들도 재평가 받으면서 이전만한 인기는 없는 편이다. 사실 정사 갖다가 재평가 한다 했는데, 유비는 연의에서 인덕 쪽으로 버프를 받았어도 능력을 보면 엄청난 너프를 먹었다. 즉, 연의 유비를 정사 조조에 비교해놓고는 정사가 옳다며 조조가 유비보다 유능하다 했으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당장 일본 동양 사학계의 거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부터가 다음과 같이 조조를 비판한다.

조조의 정치 방침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 곧 위험한 파탄이 일어날 듯하다. 그러므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극도로 엄중한 법령의 실시가 불가결하게 된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사회 전체를 계엄령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그것은 일본의 전시 중 생활을 뒤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조병한 역 《중국통사》(2016), pp 226~227.

 
조조와 위나라의 대민 정책에 대한 이 대목에서 미야자키는 위나라의 귀족 정권화와 그에 관련된 조조의 정치적 의도를 신랄하게 까고 있다. 그는 이민족들을 군대에 편입시켜 다른 이민족을 제압해 강제로 체제의 하류층에 포함시킨 정책과 당시 조조가 시행한 광범위한 민둔을 비롯한 둔전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이민족이나 빈민같은 사회 하류층,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 (그 자신이 2차 대전 당시 겪었을 일본의 전시 체제에 대한 소회도 담아서.) '계엄령'이라고 비유할 정도의 강력한 강압적 정책을 실행했고 그 바탕하에서 문벌 귀족제가 발달하게 된 것을 조조의 실책이라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미야자키는 귀족 계급의 번영 부분을 지적하며 후한 말에도 이어진 체제가 지속되었고 조조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켰으며 지배 계급의 구성원조차 변동이 없었던 상황으로 보고 현재의 그가 흔히 받는 평가인 '정치적 의미의 혁명가'로 보고 있지 않는듯 보인다. 실제로도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등, 오자양장으로 대표되는 일선 무인들이 하후씨, 조씨 라인에 밀려서 그 흔한 도독제군사 한번 못 맡고[59] 평생을 전선에서 고생하다가 죽는걸 보면... 애당초 장합한테 최종적으로 준 정서거기 장군이 뭐하는 직책이냐 대체 특히 관우에 발려 말년을 망친 우금이나 말년에 제갈량이라는 폭탄을 맞은 장합의 경우는 더 안습해진다.[60]

이는 조조의 숙적인 유비의 촉한이 시행한 정책적인 사안들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애당초 유비 스스로가 '조조가 이렇게 하면 나는 그 반대로 하여 명성을 얻는다'고 스스로 인정했듯, 그 자신이 조조의 '아치 에너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인물이며, 따라서 그 정책면에서도 상당히 반대되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 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61] 이렇게 농업에 관련된 제반 시설을 재정비하고 힘써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국가가 직접 장려하여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한 남중 정벌처럼, 해당 이민족들이나 해당 지역민의 마음을 회유하는 정책을 구사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보급해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인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정치, 경제 체제의 구축을 이루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에게 원하는 권리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그로인해 자발적인 복종을 통한 정치, 경제, 군사적 참여를 이끌어내며 이를 통한 상호간 이익을 증진시켰다.[62]

요컨데 단순히 '무능한 유비', '유능한 조조' 프레임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단선적인 해석이며 요즘은 재평가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서 위나라 측에서도 유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촉나라 측에서도 조조가 기본적으로 혼란한 난세를 평정하여 개판 오분전인 상황을 살만한 정도까지 살려놓고 천하의 2/3을 평정했던 유능했던 인물인 것 정도는 서로 인정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좋을 여담이지만 리우 올림픽에서 중국 양궁 선수들이 한국 양궁 선수에게 밀리니까 옛날에 중국에 있던 활 잘쏘는 사람은 어디갔냐는 드립이 나왔는데 이에 조조한테 죽었어라는 리플이 달렸다(...).

8. 미디어 믹스[편집]



맨 위에도 나와있듯 발음이 같은 죠죠와 엮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대에 와서는 주로 일본 창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미남으로 나오기도 한다.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천자를 끼고 원소가 죽은 이후 그의 세력을 흡수한 시점에서 최종 보스가 되기 때문에(…) 조조가 주인공인 작품은 전반부와 중반부에 온 힘을 쏟는다던가 픽션으로 후반부를 꾸미게 된다.

배우를 봐도 이런 이미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이전의 조조는 위의 동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로의 위엄과 냉혹함을 강조한 이미지로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이미지가 다양화되고 있다.

파일:/mtasp/gamemeca/2012/2012030112094000002_img20.jpg
왼쪽은 코에이 삼국지 12의 조조, 오른쪽은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노부나가. 복사 붙여넣기

위에서 보듯이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의 조조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습과 거의 같다. 코에이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이 인물 개개인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만큼, 여러 인물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 코에이를 비롯한 일본에서 씌여진 2차 창작에서 조조와 오다 노부나가를 등치시키는 면이 상당히 강하다.

일본에서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쁠 것 없는 '캐릭터' 해석이었다. 중화권의 삼국지 컨텐츠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코에이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국내 삼국지 팬덤의 현실상, 코에이 게임의 이미지 메이킹, 특히나 그 정점에 선 캐릭터인 조조의 이미지는 국내 삼국지 팬덤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의 이미지도 점점 노부나가와는 차이가 생기게 되어 점점 인간적인 모습이 추가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9. 둘러보기[편집]


후한의 사공
71대 장희

72대 조조

위 건국

후한의 승상
신규 책봉

1대 조조

2대 조비

후한의 위왕
신규 책봉

조조

조비







서원팔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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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경}}}]]







[1] 아명은 아만(阿瞞)인데, 만(瞞)과 조(操)는 비슷하게 조작하다(날조를 뜻하는 조작(造作)이 아니라 조종한다는 의미의 조작(操作)), 속이다라는 뜻이 있다. 이름대로 조조는 간사한 간웅(奸雄)의 이미지로 잘 알려졌으며, 실제로도 교묘하고 복잡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이름은 길리(吉利). 리(利)라는 글자도 교묘한 느낌을 풍기기는 마찬가지다.[2] 이름의 조(操)와 자의 덕(德)자는 순자가 쓴 글의 권학편에서 언급되는 덕조(德操)에서 따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담으로 본인의 일등공신이었던 순욱이 순자의 자손.[3] 정사에선 '천하'대신 '다른 사람'이었는데 연의에서 약간 각색된 것이다. 참고로 홍길동전의 판본 중에는 "천하가 나를 저버릴 지언정, 내가 천하를 저버리지 않겠다."라는 대사가 있다.[4] 이에 대한 카운터로, "세상이 널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라는 격언이 있다.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이 한 명언.[5]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さう. 아마 옛날에는 '사우사우'로 읽었을 것이나 후대에 철자는 남은 채 '소-소-'로 발음이 바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좀 더 간단한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교체되면서 そうそう로 쓰게 되었다.[6] 순욱과 정욱의 공이 정말 큰데 이들이 성 몇개라도 지켜내지 못했다면 조조는 그냥 유랑하며 떠도는 세력이 될 뻔했다.[7] 물론 원소가 페이크 최종보스라는 의미는 아니다.[8] 손권도 물론 강대하기 하지만, 유비가 반동탁 연합으로 시작된 조조와의 인연이면서, 더 오랫동안 조조와 싸웠기에 유비가 진 최종보스가 맞다.[9] 한중 공방전 승리 후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자 정말 한 고조가 항우를 무찌른게 재현되는거 아니냐며 천하가 들썩였을 정도다. 실제로 얼마 뒤 관우가 번성을 침공하자 이전과는 다르게 위나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제갈량이나 강유 등이 북벌을 할 때 호응하는 세력이 꽤 있었다.[10] 위나라의 무제가 주석을 단 손자병법. 조조의 저서인 맹덕신서가 이 위무주손자와 동일하다는 견해도 있다.[11] 대표적인 예가 조인과 조진. 그러고보니 둘 다 연의의 피해자..[12] 하후연의 전사는 조조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조조는 한중에서 유비를 막는 하후연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후연이 전사하기 최소 반년 전 장안에 도착하고도 하후연을 구할 움직임을 안 보이고 미적지근하게 있었다.[13] 육(六)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14] 원소만 해도 정확히 말하면 몸을 혹사한 끝에 원소 자신이 병사하자 남은 세력들을 이간계를 통해서 갈라서 원씨 세력을 쓰러뜨린 것이고, 손권의 전임인 손책 역시 이 원씨 세력과 싸우는 도중 뒤치기하려던 것을 조조 입장에서는 뽀록에 가깝게 물리쳤고, 유표의 경우 자연사한 것을 틈타 유종을 쉽게 낚는 등 자만할 만한 뽀록이 많았다.[출처필요.] 둔전제 폐지는 위말 조환대에 있었던 일이다.[15] 둔전제 문서에는 둔전민들을 농업에만 전념케 해야 한다는 건의의 기록이 있다. 둔전민에게 적어도 군역은 지워지지 않은 듯하며, 따라서 둔전제와 직접적 연관은 없다.[16] 이들은 각각 순욱의 아들 순의, 종요의 아들 종회, 신비의 아들 신창, 왕랑의 아들 왕숙과 손녀 왕원희 등이다.[17] 근데 이건 애초에 조조 성격 상 패드립을 당해도 멘탈에 지장이 없었던 영향도 큰듯..[18] 단 장수의 경우엔 그를 비롯해 친족들의 말로가 좋진 못했다. 그래도 일단 이 부분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추측만 가능할 뿐이고, 적어도 합류 당시엔 깔끔하게 맞아줬다.[19] 그밖에도 관우가 자신의 주공이자 대형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바로 유비를 찾아 조조 휘하를 떠났는데 이에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할 것을 조조에게 진언하나 이에 조조가 자신의 주공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며 관우를 쫓지 말라고 직접 명을 내린다. 관우의 충의와 함께 조조의 영웅호걸적인 도량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20] 양수가 조식파의 주요 인물이라 후계자 문제로 거슬렸다고 한다.[21] 장야신의 저서중 하나가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이니 조조를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라 할수 있다.[22] 서주 단양군의 병사들로 용맹하고 잘 먹었으며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유비가 도겸을 지원했을 때, 단양병 일부를 도겸이 유비의 군대로 편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23] 때문에 연의에서는 길평에게 독살당할 뻔했다.[24]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두뇌가 쉴새없이 가동되기 때문에 이따금씩 자신의 비상한 두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25] 약 161cm 정도라고 알려져있다.[26]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평가 기준은 당나라 때 등장한 표현이다. 신체, 언행, 글씨, 판단력 모두를 총괄하는 기준이므로 외모 중시하고는 상관없다. 신(身)이라는 게 단순히 핸섬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굴 형태는 못 생겨도 품격이 나타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27] 어쨌거나 조선 사림의 편집증적인 금욕주의는 이상한 부분이 있다지만 그들도 나름대로의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연산군이나 송 휘종처럼 뛰어난 예술인들이 국정을 워낙 크게 말아먹은 것이 '임금이 예술에 심취하면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말의 증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시를 쓰거나 그림을 좀 그리려고 하면 "연산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며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다소 완화되어 조선 후기 지배 계급도 예술을 즐기긴 했지만 분야를 엄격히 등급화했고, 지배 계급이 즐겨도 되는 예술은 한정되어 있었다.[28] 여러 개인적 실책과 정책적 실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조와 조위의 치세에 후한 말 환제-영제 대부터 발발한 대혼란상과 무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잡고 중앙권력의 통치력을 회복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29] 하지만 실제 건륭제의 예술적 자질은 별로 좋지 않았다. 건륭제는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한데, 남의 그림에다가 각종 도장을 찍고 주제에 시를 적어놓는 등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을 지경.[30] 서구 기독교 문화권의 경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같은 천재 예술가들은 조각가이자 건축 설계자이자 화가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31] 하후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한중도 수비측 장로군이 실수로 야밤에 길을 잃은 하후돈과 허저의 군대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방어선이 뚫린, 얼마간의 요행수를 타고 점령한 것으로 조조는 초반에 한중의 험로에 막혀 공격이 지지부진하고 또 보급 문제도 겹치자 철군까지 생각했다. 이후 하후연을 제거하고 한중을 확보한 유비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고 철저하게 방어선을 굳혀 조조군을 몰아냈다.[32] 당시 조조군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조조군은 번성의 조인만총, 7군을 이끄는 우금과 방덕, 나중에 원군으로 합류한 서황 같은 네임드 외에도 방덕의 부장 동형과 동초 형제, 양양을 지키는 여상, 서황군의 증원군으로서 합류한 은서와 주개 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도 상세히 기록돼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관우군에 어지간히 인물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인재난에 시달렸다고 하는 후기 촉한의 강유의 북벌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장익이나 요화 등 같은 기존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유은이나 왕사 등 같은 나름대로 준수한 인물들이 강유를 보좌했던 걸로 확인되는 걸 보면 당시 관우가 얼마나 열악한 여건에서 형주를 건사하고 또 북진을 추진했는지를 짐작케 한다.[33] 무엇보다 관우를 보좌하는 네임드 부장이나 참모는 정말 사서상에 찾기가 어렵다. 연의에서야 나름 준장으로 묘사되는 아들 관평은 실제론 참전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고 조루 역시 비슷한 처지이며 주창은 가공 인물에 마량이적은 익주에서 유비를 보좌하고 있었고 요화왕보는 관우 휘하에서 일한 건 맞는데 번성 공방전에는 참전하지 않고 형주에 남았다. 사서 곳곳에 꽤 자세히 언급돼 있어 삼국 시대에 상당히 비중있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걸 짐작케 하는 게 번성 공방전인데, 당시 관우군에 속하는 장수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관우 본인과 함께 처형당했다고 스쳐지나가듯 언급되는 아들 관평, 도독 조루 뿐이다.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관우는 번성을 직접 공격하고 양양은 휘하의 상장을 시켜 공격하게 했는데 이 상장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34] 이는 역으로 생각해 보면 비록 불리한 여건이지만 관우 수준의 명장이라면 이 정도 미약한 전력을 갖고도 얼마든지 조위와 동오를 상대로 형주를 사수할 수 있다고 그 위상과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관우라는 존재가 유비군에서 얼마나 비중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인선인 셈. 조조와 손권의 뒷거래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만 말이다.[35] 이런 것을 보면 후대 사람들이야 영웅이니 간웅이니 하는 말을 쉽게 하지만 원소나 조조의 말년을 보면 영웅이나 간웅이라 불리는 이도 결국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완벽하지 못한 한 사람인데, 막중한 책임을 떠안으면서 능력을 일관되게 유지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신체적 압박감을 견뎌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웅을 논하기는 쉽지만 정말로 영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36] 유비도 물론 예술 관련으로 좋아하는게 있었다. 선주전에 따르면 개, 말, 아름다운 의복,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좋아했다는 말의 경우 태평어람적로같은 좋은 말을 고르는 재주가 있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음악의 경우 조조 수준으로 열중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만큼 그냥 듣거나 가끔 연주하는 수준으로 즐겼던 수준으로 보인다. 재밌게도 성호 이익 같은 후세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경우 (琴)을 상당히 잘 탔다고 하고(그래서 삼국지 드라마에서 제갈량이 나오면 그가 금(琴)을 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융중에서 양보음을 부르며 농사일에 열중하는 등 음악과 관련이 있어서, 후학자들이 공명은 충분히 유교적 이상의 예술 형태인 예악(禮樂)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음악'을 즐겼다는 면에서는 주군이나 신하나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37]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문인 중 한명인 회월 박영희는 원래 카프 소속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심취했다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고 순수 문학으로 전향한다.[38] 일례로 예인(藝人)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김종필의 운치있는 휘호 정치와 예술에 일가견있는 면모는 비록 김종필이라는 인물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오가 갈렸다고는 하나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일단 그를 끌어들일 만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주어 DJP 연합의 성립 같은 것으로도 작용했고 정치권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가꾸었으며, 외신에서도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루어져 국가 간의 외교에도 기여했다. 또 빌 클린턴의 색소폰 연주가 그의 주가와 명성을 크게 신장시킨 것도 유명한 일화다.[39] 김대중이 이들로부터 느낀 바가 있었으니 부드러운 이미지였다. 투사(鬪士)의 이미지가 강했던 DJ는 대선을 앞두고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속칭 알부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우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면 DJ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여성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으며 보좌진들은 그가 꽃을 가꾸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진들을 최대한 많이 내보냈다. 무엇보다도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져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고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그맨들에게서 화술을 배우고 성우들을 초빙해서 사투리를 교정하는 등. 당시 예술인들 중 상당수가 DJ 지지를 선언한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DJ가 문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40] 이는 비단 인간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에도 통용되는데, 소프트 파워는 국가의 국제적 위상과 간접적인 영향력을 제고해준다. 예를 들면, 한류의 영향력으로 인한 한국 제품의 판매 증가,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가 그것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자금을 군사력의 증강에 투입하거나 다시 경제력을 확장시키는데 투자할 수 있다. 또 국제 사회에서 해당 국가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가꾸어주고 어느 특정 사안에서 '타국 입장'에 민감한 사안만 아니라면 '타국의 동의'를 얻는 것이 보다 쉬워진다. 이렇게 개선된 국가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국제 사회의 다수로부터 지지받으며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41] 五言詩, 한 행에 다섯 글자가 있는 한시. 대부분의 한시는 오언시 또는 칠언시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42] 관련 민담에 의하면 실수로 삼수변을 쓰지 않은 것을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좋아 자연스러웠어[43]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44] 호사가들이 관우가 조조를 떠난 이유 중에선 두씨를 조조가 차지해서 그런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애시당초 그랬다면 관우가 조조에게 받은 은혜는 꼭 갚고 떠나겠다고 하진 않았겠고, 여자 안 줬다며 떠난 관우는 충의의 상징이 아닌 쪼잔한 놈의 상징이 됐으리라.[45] 다만 카이사르는 북중국만 평정한 조조와는 달리 당시 로마의 영토를 모두 통합하는 등, 두 인물은 차이점도 많다.[46] 다만 조조는 오히려 치세에 간신들이 득세하고 영웅은 난세에 나는 법이니 말이 안된다고 이 말을 비웃기도 했다. 사실 이건 이동잡어의 기록이고, 후한서에는 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 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뜻은 "청평할 때의 간적, 난세에는 영웅"셀프디스?[47] 제위태조문을 자세히보면 이세민은 은근히 수많은 백성들과 제장들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 자신이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나서 짐짓 겸손하게 제문을 바치는 조조보단 못하다는 식으로 겸양하고 있다.[48] 하지만 당태종은 자신이 찬사하면서도 내심으로 비꼬던 조조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압박하고 친형제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른 군주이기에 또 다른 논란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당 제국의 족보는 이후 측천무후의 제위로 나타나면서 점입가경으로 흐른다.[49] 게다가 조위를 무너뜨리고 조조의 조씨 일가를 몰살시키고 정권을 장악 새로운 국가를 창시한 서진도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가가 더욱 박하게 되었다.[50] 특히 순욱에 대한 홀대는 조조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도 상당수가 비판할 정도인데 실제로 순욱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조가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며 이후로도 줄곧 조조의 밑에서 충실히 일하며 이룬 공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51] 사실 조조는 마냥 악당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조조를 깎아내린다고 평가받는 삼국지 연의도 자세히 읽어보면 조조를 마냥 폭군으로만 묘사하지 않으며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음을 줄곧 언급한다.[52] 백성을 마구잡이로 죽인 사람을 백성들이 당연히 좋게 평가할리는 없다.[53] 훗날 남조 유송폭군 유자업은 조조를 본받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 본받은게 바로 도굴이었다(…). [54]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조조가 죽인 이들 중에서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귀비황제의 황후가 있고 둘 다" 황제"인 헌제가 직접 간청하면서까지 살리려고 했는데도 무시하고 죽여버렸다. 이 점 하나만 봐도 당대가 아닌 그 후대라 해도 황제 신분인 건륭제로서는 역적으로 보일수밖에 없다.[55]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과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단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종신 노동(…)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56] 삼국지의 나머지 한 축인 오나라 손가도 조조와 같은 시기부터 큰 영웅담을 배정받지만, 문제는 손견과 손책 모두 단명하다보니 한 개인에게 오랫동안 포커스가 맞춰지지는 않는다.[57] 하지만 조조까 성향이 짙은 모종강은 조조의 눈물이 인심을 얻기 위한 연기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58] 정작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맏아들 조앙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만큼의 애도는 없었다는(...)[59] 항장인데다가 중앙 권력이 별로 없다던 촉한의 강유조차 독자적인 수만 군세를 운용할 수 있었으며 대장군, 녹상서사를 맡은것을 보면 대조적이다.[60] 어떻게 보면 4차 북벌때 장합이 맞은 '진짜' 폭탄은 제갈량이라기 보단 명문 출신 총사령관인 '사마의'일수도 있다, 4차 북벌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서 장합이 반대하는데도 그를 추격대로 보냈으니...[61]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 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반대하고 나섰다.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 들일것입니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 발전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62] 이를테면 제갈량의 5차 북벌 당시 둔전을 하면서도 한중의 해당 통로쪽에 대규모 식량 창고를 준비해 놓고, 무공수를 통한 수로 활용을 통해 다 소수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오장원을 점거한 후 후방 백성 위무 및 현지에서의 식량 충원까지 노린 둔전 계획을 보면 제갈량은 곽회가 지적했듯이 해당 지역을 장악하면서 위와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이민족과 해당 지역 주민들을 위무하여 이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전략 레벨이 아닌 군정 레벨 '정책'을 실행했다. 옹양주의 한복판에 말뚝박고 백성들과 병사들이 섞여서 서로 친근히 지내고 위무하고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위를 엿먹이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제갈량 사후에도 이 지역에선 1년간의 주둔만으로도 아직도 그를 그리워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상황이 어쨌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는 후대의 강유가 농서의 이민족들과 연계한 정책과도 연결되는 사한이다. 강유의 이민족 정책에 대해선 그의 측근인 왕사의 행동 방식을 참고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