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평가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조조

조조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1. 개요
3. 치세의 능신으로서
3.2. 인간적인 면
4. 시기별 평가
4.1. 당대의 평가
4.2. 후대의 평가
4.3. 연의의 평가
4.4. 현대의 평가


1. 개요[편집]


조조에 대한 평가를 모은 항목.


2. 업적과 능력에 대한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조/업적과 능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치세의 능신으로서[편집]


청년 시절 조조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선정을 베풀고,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관료로서도 상당한 수준의 선정을 베푼다.

  • 십상시 건석 처벌 :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내세우며 통금 시간 이후에 지나가려 하자 규정을 원칙대로 적용, 기어코 처벌했다. 조조의 뒷배경 때문에 무사하긴 했지만 십상시의 위세는 조조 본인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끝내 처벌을 감행한 것. 이로 인해 조조의 명성이 자자해진다.

  • 제남상 시절의 선정 : 제남상 시절 조조는 상당한 선정을 베풀었다.

  • 부정부패 척결 상소 : 황제에게 잇따라 상소를 올리며 부정부패를 척결할 것을 주청했다.


3.1. 반동탁 연합군 참여[편집]


조조는 동탁의 폭정에 대항하여 반동탁 연합군에 군대를 이끌고 가담한다.

이후 어영부영 하는 연합군에 대해 조조는 단독으로 동탁을 공격하여 전투를 치루게 된다. 비록 서영 등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반동탁 연합군이랍시고 집결은 했는데 미적지근하여 내분에 휩쌓였던 것을 고려하면 조조는 나름 필사적으로 동탁을 공격하고 몰아낼 생각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때 조조는 패전으로 군대의 대부분이 와해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오히려 후대에는 높게 평가되는 계기가 된다. 이에 대해 삼국전투기에서 형양전투편에서 언급한다.


3.2. 인간적인 면[편집]


굉장히 다면적인 면모가 보이는데, 아래의 시기별 평가들에도 종종 언급되기는 하나 인간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극과 극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자신을 버리고 적대 세력에 망명하여 끝까지 항쟁하다 사로잡히고도 목숨을 구걸하기보다 의연히 죽음을 택한 진궁과의 일화나 이민족에게 납치당했던 채염을 다시 데려온 일화, 관우와의 일화 같은 미담들이 있는 반면 두 차례에 걸쳐 서주를 아주 작정하고 쑥대밭으로 만든다거나 자기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쓸모없어진 인물을 죽여서 뒤끝을 보이는 등의 부정적인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다.


4. 시기별 평가[편집]



4.1. 당대의 평가[편집]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에서 범처럼 노려보매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천하를 격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하고 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진수


태조가 해내(海內)를 통어(統禦)한 이래 뭇 추악한 것들을 베어서 멸했는데, 행군, 용병할 때는 대체로 손자, 오자의 법을 가늠해 이에 의거하고, 사안에 따라 기책을 세워 적을 속여 승리하니 변화가 신과 같았다. 스스로 병서(兵書) 10만 여 자를 지어 제장들이 정벌할 때 모두 이 신서(新書)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에 임해 또한 손수 명령을 내리니 영에 따르는 자는 승리하고 위배하는 자는 패배했다. 진을 치고 적과 대적할 때는 편안하고 한가로워 마치 싸우려 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결정적인 계기에 결단해 승세를 탐할 때에는 그 기세가 용솟음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겼고 군이 요행으로 이기는 일은 없었다.

사람을 알아보고 잘 살펴 미혹하여 속이기 어려웠는데, 군사의 진영 사이에서 우금, 악진을 발탁하고 패망한 적들 중에서 장료, 서황을 취하니, 모두 좌명(佐命)하여 공을 세우고 명장으로 섰고 그 외 세미(細微)한 신분에서 발탁되어 목(牧)이나 태수에 오른 자는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다. 이로써 대업을 창조하고 문무를 아울러 베풀었는데, 군을 일으킨 지 30여 년 동안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낮에는 무책(武策)을 의논하고 밤에는 경전(經傳)을 생각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부(賦)를 짓고 새로운 시(詩)를 지으면 여기에 관현(管絃)을 입혀 모두 악장(樂章)을 이루었다. 재부와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 손수 활을 쏘아 나는 새를 맞추고 맹수를 사냥했으니 일찍이 남피(南皮)에서 꿩을 사냥해 하루에 63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궁실을 짓고 연장과 기구를 수리함에 이르러서는 법칙으로 삼지 않을 것이 없으니 모두 그 뜻을 다 펼쳤다.

고상한 성정으로 검소하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후궁들은 수놓은 비단을 입지 않고 시어(侍禦)하는 이들은 두 가지 이상으로 채색된 신을 신지 않았고, 휘장과 병풍이 헐어지면 기워서 쓰고 이부자리는 따뜻함을 취할 뿐 장식하는 일은 없었다. 성읍을 함락하여 곱고 아름다운 물건을 얻으면 이를 모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내리니, 공훈과 노고가 있는 자에게는 의당 상을 주며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공이 없으면서 시혜를 바라는 자에게는 한 오라기 털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진상한 물건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나누었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장례의 제도에서 수의의 수가 번잡하여 무익하고 풍속에서도 또한 이를 허물로 여긴다 하시고, 이에 미리 스스로 죽은 뒤에 입을 의복을 만드셨으니 네 상자에 불과했다.

왕침, 위서


태조는 그 사람됨이 경박하여 위엄과 무거움이 없고 음악을 좋아해 가무인을 옆에 두고 항상 밤낮으로 즐겼다. 생사(生絲)로 만든 가벼운 옷을 입고, 몸에는 작은 가죽주머니를 차고 수건이나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 두었으며, 때로는 갑모(帢帽, 약식 모자의 일종)[1]

를 쓰고 빈객을 만나기도 했다. 매번 다른 이와 담론할 때는 농담을 즐겨 말하며 숨기는 것이 없었고, 크게 기뻐하며 웃을 때는 머리가 탁자에 처박혀 술안주와 반찬으로 건책(巾幘, 두건 모양의 관모)이 더럽혀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경박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법을 집행함이 준엄하고 가혹해 제장들 중에 자신보다 뛰어난 계책을 내놓는 자가 있으면 법을 들어 주살하고, 예전에 알던 사람으로 오래된 원한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죽여서) 남겨두지 않았다. 형을 내려 죽일 때에는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면서도 끝내 살려주지 않았다. 당초 원충이 패상(沛相)이었을 때 태조를 법으로 다스리려 했었고 또한 패국(沛國)의 환소가 태조를 업신여겼던 일이 있다. (태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 진류의 변양이 자못 태조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자 태조가 변양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하니 원충, 환소가 함께 교주로 피난 갔다. 태조는 사자를 (교지)태수 사섭에게로 보내 그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환소가 자수하여 와서 뜰에서 절하며 사죄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무릎을 꿇는다한들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라 하며 끝내 죽였다.

(중략)

그 혹독하고, 잔인하고 요리조리 속임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조만전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허소[2]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일세의 재주가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소!

교현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와 오자를 닮았으나...선제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 같이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을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제갈량, 후출사표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했다. 또한 위-서진 시대의 역사가들은 자기 국가의 정통성을 위해서 조조를 좋은 지도자처럼 써줬다.

반면 조조에 반대하는 군웅이나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반대하는 촉, 오의 인물들은 당연히 조조를 적대시 하였다. 당장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만 해도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조가 저지른 학살 때문에 일반 민중에게 조조의 인상은 매우 나빴다. 그것은 도삭군 설화, 조조를 피해 유비를 따른 형주의 백성들, 삼국시대의 민담을 다룬 세설신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제갈량후출사표에서도 나오듯이 능력 자체는 당대인이라면 대체로 인정하되, 인성이 글러먹거나 중요할 때 하늘의 선택을 못받은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4.2. 후대의 평가[편집]


조조는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으로서 뛰어난 군주로다, 나 이세민은 많은 백성들과 제장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일컬어지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나 태종은 다른 군주와 비교한다면 뛰어나지만 무제(조조)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노라. 위 무제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나라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천하를 평정한 공은 이전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제위태조문


"나는 항상 위 무제의 행위가 매우 간사하며 그의 사람됨이 천박하다고 생각해 왔소. 이와 같은데, 어떻게 교화를 시행할 수 있겠소?"

정관정요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


이상의 발언은 모두 당 태종 이세민의 발언들이다. 당 태종은 공식적으로는 조조의 능력이 심지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또 다른 발언들을 보면 내심 자신보다는 못하다고 깔보고 있었던 듯 싶다.[3] 하지만 과시할 만도 한 게, 당 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탁월한 군재로 천하를 통일하여 당 제국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며 정관의 치를 이룩해 조조의 위업을 뛰어넘은 황제였다. 다시 말해, 최종 커리어로만 보면 당대의 패자 정도인 조조에 비해 우위에 있다.[4]

조조는 통일 과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창업 군주들보다는 저평가를 받았고, 그의 대표적인 실책들은 후대의 학자와 정치가들에게 두고두고 까였다. 이것은 조조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있는데 개인적인 앙금에 사로잡혀서 명망을 더럽히고 통일할 기회를 놓쳤다"라는 것이 후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동진 이후 촉한 정통론이 두각되기 시작하고 남조 시대를 거치면서 세설신어 같은 서적을 보면 당시 귀족층, 식자층의 인식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조금씩 나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식자층이나 귀족, 사대부들 입장에서도 반평생을 함께 일한 순욱이나 모개, 명사로 이름 높았던 최염 등을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죽이거나 숙청했기에 조조를 편하게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5] 그러나 위에 나온 당 태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 때까지는 식자층에선 그래도 영웅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6]

조조가 죽은 지 100년 뒤에 후조를 건국한 석륵은 조조와 사마의를 묶어 평가하길 "저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나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7] 라 하였는데 서진시대 조조에 대해 민중과 귀족의 평가가 상당히 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외에도 조조에게 멸망당한 군웅들의 통치를 받았던 지역에서 조조의 혹독한 정치에 반발하여 민담, 설화 등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도삭군 전설.

덧붙여 조조가 모금 교위와 발구 중랑장이라는 관직까지 만들어 도굴을 했다는 이야기가[8] 진림의 격서에 나오며, 이 역시도 당대에 비난받은 이유 중 하나. 문화재 도굴꾼을 국가 단위로 운영해서 부장품을 팔아치우는 일을 했다고 받아들이면 조조가 대충 어떤 일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수, 당을 거쳐 송나라 때쯤 가면 민담이나 설화, 이야기극 등에서 조조는 악인으로 부각된다. 후대의 중국에서는 조조=역적, 변절자, 악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식자층도 유교적 관점에서 조조와 그가 세운 위나라를 좋게 보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당대의 중국인들 가운데 조조를 긍정적으로 본 이들은 없었다. 성리학 성립 전이지만 사마광은 '위 무제는 잔혹한 데다 천하에 큰 공을 세웠으니 오래전부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한나라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 마음이 없어서였겠는가. 명분이 두려워 스스로 억제한 것이리라.'라고 평가를 내렸다. 또 민중은 조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극에서 조조가 패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조조를 연기했던 연극인이 관객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나오고 나서 부터는 조조는 완전히 "난세의 간웅"의 이미지가 굳어진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 역시 조조는 역적이라고 결론내렸다.[9]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열하일기 구외이문편엔 조조의 무덤이 어부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건륭제가 친히 조조의 목을 치고 유비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냥 전해지는 얘기를 박지원이 듣고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이런 얘기가 조선 사신단에게까지 들렸을 정도면 그 인식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대에 출간된 요재지이에선 죽은 뒤에 개가 되어 나타나거나, 1000여 년이 지나도록 지옥에서 (죄상에 걸맞은) 형벌을 못 정하는 통에 애꿎은 볼기짝만 계속 맞는다거나[10], 심지어는 홍수에 무덤이 박살 나서 유골이 산산조각이 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이는 비단 중국 본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조조에 대한 평가는 별반 다르지가 않아 조선시대에 나온 판소리극인 적벽가에서도 권력을 찬탈한 조조에 대한 백성들과 군사들의 성토가 가득하고, 조조잡기놀이마피아 게임 비슷한 민속놀이도 존재해 조조는 악인이라는 인식이 이미 이웃나라인 조선에도 뿌리깊이 박혀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도 비슷해서 조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 능력은 인정할지언정 그의 무자비함과 불충함을 들며 충의의 화신인 관우, 제갈량, 조운 등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11]

마오쩌뚱 당시에는 어느 정도 고평가가 이루어졌으나 시진핑 이후의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무너트린 놈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1세기 시진핑 집권 이후 조조의 악행이 중국 역사학계에 조명되면서 더 까이고 있는데, 이는 시진핑이 촉한 시기의 신하인 습정의 후손임에도 기인하는 부분이나 더 중요한 것은 현대 중국의 정체성인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중국 체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정책은 다름 아닌 하나의 중국 정책인데, 역사적으로 하나의 중국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정체성을 무너뜨렸던 계기가 된 조조를 절대 좋게 평가 하기가 어렵다.

4.3. 연의의 평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Cao_Cao_Portrait_ROTK.jpg}}}

城則鄴城水彰水 :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定有異人從此起 : 남다른 사람이 그곳을 따라 일어나니

雄謀韻事與文心 : 웅대한 지략으로 멋진 일을 하며 문장도 뛰어나고

君臣兄弟而父子 : 주군과 그 신하들은 마치 형제와 부자 같았구나

英雄未有俗胸中 : 영웅은 가슴 속에 속된 것이 없으니

出沒豈隨人眼底 : 그 출몰을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따르랴

功首罪魁非兩人 :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 따로 두 사람이 아니라

遺臭流芳本一身 : 악취나 향기나 본래 한 몸에서 다 나왔네

文章有神霸有氣 : 그의 문장은 신묘하고 패기가 있었으니

豈能苟爾化為群 :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인재들과 섞이랴

橫流築臺距太行 : 흐르는 물을 가로막고 동작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氣與理勢相低昂 : 기(氣)와 이(理) 형세 따라서 때때로 낮아지고 높아졌네

安有斯人不作逆 : 어찌 이런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小不為霸大不王 : 작게는 패자(覇者), 크게는 왕이 되지 않았으랴!

霸王降作兒女鳴 : 그러나 패왕도 죽게 되니 아녀자처럼 울며

無可奈何中不平 : 어쩔 도리 없이 마음속으로 불평했네

向帳明知非有益 : 제를 올려도 부질없음을 잘 알고

分香未可謂無情 : 향수를 나눠줬으니 무정하다고 말할 수 없네[12]

古人作事無鉅細. : 고인이 일을 할 때 크고 작음에 구애 없었고

寂寞豪華皆有意 : 적막하거나 호화롭거나 모두 의미 있었는데

書生輕議塚中人 : 서생들은 무덤 속 사람을 함부로 의논하지만

塚中笑爾書生氣 : 무덤 속 사람은 이런 서생을 비웃을 것이네

업중가(鄴中柯)


조조가 백사 일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줄 수 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의 서시평


사실상 삼국지 연의 초반부 주인공. 그리고 중반부의 최종보스이다. 유비가 흔히들 말하는 정의로운 주인공이라면, 조조는 다크 히어로에 해당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비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첫 등장부터 죽을 때 까지 계속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초반부에는 유비의 세력이 미비하다보니 군사적 활약에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유비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조조의 영웅담에 비중이 더 쏠리게 된다.[13][14] 그리고 원소를 꺾으며 조조 영웅담의 하이라이트를 찍게되고 그 후 제갈량의 등장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유비세력이 활약하며 기반을 다지게 되어 비중이 많이 옮겨간다. 그리하여 한창 영웅담을 뽐낼 때부터 사악한 모습을 보여주던 조조는 본격적으로 유비와 맞서는 빌런으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 하나다.

예를 들면 완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위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선한 모습과[15] 수춘에서 군량이 부족하자 군량 배급 담당자 왕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 간사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관우를 자신의 사람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안타깝게 송별하는 모습과 자신의 속을 읽은 양수를 죽이는 모습이 상반된다.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 데 비해, 연의는 실존한 악행이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이나 괜찮은 모습들을 추가했다.가령 손권과 유비조차 처음 만났을땐 방통의 모습이 추하다고 꺼리는데 조조만큼은 그를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 한다던지. 사실상 연의가 조조 이미지 재평가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심지어 모종강도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부분에 대한 평으로 입으로만 바른 소리를 하는 위선자들보단 조조가 더 낫다며, 악인이라도 대단한 악인이라는 식으로 평가할 정도다.

그 덕분에 연의 이전까지는 평면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나왔으나, 연의에서는 선과 악, 인정과 비정이 섞인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조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승화시켜주고 조조에 대한 평을 바뀌게 하였다. 그런데 연의에서의 조조는 보통의 밑도끝도 없는 악당이 아니라 자기사람과 백성들은 또 정말 잘 챙겨주는 모습도 많이 보여준다. 즉 연의의 조조는 인간성으로는 악인이지만, 지도자로서는 그래도 사리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물론 현실은 서주대학살, 공융, 순욱, 최염, 모개 숙청에 헌제 핍박이었지만...[16] 다시 말해 조조는 현대로 옮겨놓으면 자기 사람들에게 관대하지만, 자신의 적이나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숙청을 자행할 수 있는 제3세계 독재자 군주에 가깝다. 이와 관련있는 언급으로, "서울대 기숙사"라는 대학 기숙사 유머 모음집에서는 조조박정희로, 12.12 군사반란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전두환으로 비유한 에피소드가 있다.[17]


4.4. 현대의 평가[편집]


조조가 아직 세상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당시 인재를 구할 때 충성스럽지 않고 효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고선 왜 불효라는 죄명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가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감히 그에게 묻지 못할 것이다. 질문을 하면 조조가 우리를 죽일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장야신(#)


현대에 들어선 조조라는 옛 대권신의 위세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 악행들이 속속 발굴되며 인격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이 도덕성은 끝까지 조조의 평가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역적이고,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학살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조조曹操: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간웅 그리고 이는 단순한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 전략적으로도 실책이 되어서 결국 그가 중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20세기까지는 현대 중국을 중심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현대에는 이러한 조조 악당론에 대립하는 영웅성을 강조하는 조조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에서의 평가는 위에 적었듯이 대대로 간웅, 역적 등에 가까웠지만, 현대에 들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는 중국사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으면서 역사 속의 독재자나 체제 전복자들에 호감을 가졌던 마오쩌둥이 조조를 고평가했던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후 중국의 유명 사학자인 곽말약이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라고 평하며 복권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창작물에서 조조를 오다 노부나가와 겹쳐 보면서 시대를 앞서간 초인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도 강했고, 한국에서의 조조 재평가론은 이 두 흐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여러 부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겹쳐 보이는 점도 많기 때문에 조조를 마치 동양의 나폴레옹으로 보는 시각도 조조의 인기 상승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의 뛰어난 능력들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조조의 뛰어난 능력에 대해 열광하며 찬양하는 평가들이 연이어 나오게 된다. 때문에 조조에 대해 완벽초인. 위대한 군주이며 조조에 대항한 존재들에 대해 어딘가 모자라거나 조조의 대업을 방해한 방해꾼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84부작 삼국지처럼 연의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오기도 하지만 신삼국처럼 일세의 영걸임과 동시에 그렇다고 일방적인 미화가 아닌 비정하고 냉혹한 모습도 잘 조명된 균형잡힌 모습으로 나오는 작품도 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 조조, 창천항로처럼 조느님에 반대하는 놈들은 다 찌질이(...)로 묘사된 작품도 있다. 하여튼 현대 중국 작품에서 조조를 악당으로만 그리는 매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정사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재평가 초창기에 연의의 촉한정통론에 대한 반발로, 무능한 유비에 대비되는 유능한 조조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정사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면서 서주대학살, 원소군 포로 학살 등 조조의 악행들도 발견되면서 이전만한 인기는 없는 편이다.[18] 사실 조조 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본에서도, 덕후나 창작업계가 아닌 학계에서는 조조의 이런 문제를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다. 당장 일본 동양 사학계의 거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부터가 다음과 같이 조조를 비판했다.

조조의 정치 방침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 곧 위험한 파탄이 일어날 듯하다. 그러므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극도로 엄중한 법령의 실시가 불가결하게 된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사회 전체를 계엄령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그것은 일본의 전시 중 생활을 뒤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조병한 역 《중국통사》(2016), pp 226~227.

2차대전을 겪었던 세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로서 이 이상으로 치욕적이고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와 위나라의 대민 정책에 대한 이 대목에서 미야자키는 위나라의 귀족 정권화와 그에 관련된 조조의 정치적 의도를 마구 까고 있다. 그는 이민족들을 군대에 편입시켜 다른 이민족을 제압해 강제로 체제의 하류층에 포함시킨 정책과 당시 조조가 시행한 광범위한 민둔을 비롯한 둔전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이민족이나 빈민같은 사회 하류층,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 (그 자신이 2차 대전 당시 겪었을 일본의 전시 체제에 대한 소회도 담아서.) '계엄령'이라고 비유할 정도의 강력한 강압적 정책을 실행했고 그 바탕하에서 문벌 귀족제가 발달하게 된 것을 조조의 실책이라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미야자키는 귀족 계급의 번영 부분을 지적하며 후한말의 모순이 조조의 집권기에 해결되기는 커녕 조조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켰으며 지배 계급의 구성원조차 변동이 없었던 상황으로 보고 현재의 그가 흔히 받는 평가인 '정치적 의미의 혁명가'로도 보고 있지 않는듯 보인다.[19][20]

이는 조조의 숙적인 유비촉한이 시행한 정책적인 사안들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애당초 유비 스스로가 '조조가 이렇게 하면 나는 그 반대로 하여 명성을 얻는다'고 스스로 인정했듯, 그 자신이 조조의 '아치 에너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인물이며, 따라서 그 정책면에서도 상당히 반대되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 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21][22] 이렇게 농업에 관련된 제반 시설을 재정비하고 힘써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국가가 직접 장려하여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23] 또한 남중 정벌처럼, 해당 이민족들이나 해당 지역민의 마음을 회유하는 정책을 구사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보급해 줄 수 있는 안정적인 국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정치, 경제 체제의 구축을 이루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에게 원하는 권리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그로인해 자발적인 복종을 통한 정치, 경제, 군사적 참여를 이끌어내며 이를 통한 상호간 이익을 증진시켰다.[24]

요컨대 단순히 '무능한 유비', '유능한 조조' 프레임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단선적인 해석이며 요즘은 재평가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서 위나라 측에서도 유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촉나라 측에서도 조조가 기본적으로 혼란한 난세를 평정하여 개판 5분전인 상황을 살만한 정도까지 살려놓고 천하의 2/3을 평정했던 유능했던 인물인 것 정도는 서로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학살과 잔혹했던 숙청과정은 조조의 평생 주홍글씨로 남아 있으며 때문에 유능했다면 몰라도 그에 못지않게 과오가 너무 많은게 현실이다. 즉, 2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까인 것도 명확하게 까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웹상에서도 조조에 대한 평가는 예전보다 다소 박해졌다.[25]

사상사적인 관점에서는 조조의 공융 숙청을 원소의 삼년상과 더불어 후한시대에 왜곡되었던 유교도덕을 완전히 어그러뜨려 충과 효의 질서를 문란케 한 상징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https://blog.naver.com/neight_nesia/221060505383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의 게임사 코에이가 재해석한 차도남스러운 이미지가 크게 성공한 것과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내 인기 때문에 아마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삼국지 장수도 조조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 일본 내 삼국지 인기 장수 랭킹에서 조조는 높아봐야 3~4위이며 1위를 차지한 적은 없다. 오히려 제갈량이 1위다.
[1] 부자에 따르면 '한나라 말 여러 왕공(王公)들이 왕의 복장을 내버려두고 복건(幅巾)을 평상복(雅)으로 삼으니 이에 원소, 최균 같은 무리도 비록 장수이지만 모두 고운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위나라 태조는 천하가 흉황(凶荒)해 자재(資財)가 부족하다 하여 옛 피변(皮弁, 흰 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깔모양의 모자)을 본떠서 겸백(縑帛)을 재단해 모자로 썼는데, 간편함을 따르던 시세에 부합하였고 그 색깔로 귀천(貴賤)을 구별할 수 있어 지금까지 시행되었으나 가히 군용(軍容)이라 할 것이고 국용(國容)은 아니다.(군중에서나 사용될 복장이지 나라 안에서 두루 사용될 용모, 복식은 아니라는 말)'라고 했다.[2] 다만 조조는 오히려 치세에 간신들이 득세하고 영웅은 난세에 나는 법이니 말이 안된다고 이 말을 비웃기도 했다. 사실 이건 이동잡어의 기록이고, 후한서에는 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 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뜻은 "청평할 때의 간적, 난세에는 영웅"셀프디스?[3] 제위태조문을 자세히보면 이세민은 은근히 수많은 백성들과 제장들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 자신이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나서 짐짓 겸손하게 제문을 바치는 조조보단 못하다는 식으로 겸양하고 있다.[4] 하지만 당태종은 아버지를 압박하고 친형제들과 조카들을 살해하여, 조조도 하지 않았던 패륜을 저지른 군주이기에 또 다른 논란들이 존재하며, 그가 당나라 건국에 세운 공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으며 사초에 손을 대서 아버지와 형의 공을 없애버렸다는 의혹이 있다.[5] 특히 순욱에 대한 홀대는 조조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도 상당수가 비판할 정도인데 실제로 순욱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조가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며 이후로도 줄곧 조조의 밑에서 충실히 일하며 이룬 공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6] 사실 조조는 마냥 악당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조조를 깎아내린다고 평가받는 삼국지연의도 자세히 읽어보면 조조를 마냥 폭군으로만 묘사하지 않으며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음을 줄곧 언급한다.[7] 고아는 후한의 헌제와 조위의 어린 황제들을 뜻하며,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 및 황후들을 의미한다.[8] 훗날 남조 유송폭군 유자업은 조조를 본받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 본받은게 바로 도굴이었다(…).[9]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조조는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귀인황제의 황후를 황제가 직접 살려주라고 간청까지 했는데도 무시하고 죽여버렸다. 이 점 하나만 봐도 황제 신분인 건륭제로서는 역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10] 비슷한 예로 당나라의 쇠퇴를 불러온 안록산이 지금까지 계속 심리하며 벌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라를 망치고, 권력을 찬탈한 역적의 죄가 그만큼 무겁다는 뜻.[11] 특히 조운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삼국지 인물이다. 용맹하고 충성스럽고, 또한 사려깊음까지 갖춘 진정한 무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12]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과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종신 노동(…)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 다만 이를 두고 나관중이 무정하지 않다고 평가한 것은 제사 도구를 나누어 준 기록을 제사를 지내면서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준것으로 해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왕릉(무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제사를 지내는 일은 일종의 하위직 공무원이였다.[13] 삼국지의 나머지 한 축인 오나라 손가도 조조와 같은 시기부터 큰 영웅담을 배정받지만, 문제는 손견과 손책 모두 단명하다보니 한 개인에게 오랫동안 포커스가 맞춰지지는 않는다.[14] 실제로 첫등장 부터가 초기 메인빌런인 황건적을 토벌하는 것이며, 초반부 네임드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동탁-원술-여포-원소의 경우 모두 조조가 맞서는 적이다. 그나마 동탁은 여러 군웅들과 같이 대립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선에서 그치고 조조에게 패망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원술 여포 원소의 경우 그들의 패망이 조조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동탁에 대응하는 반동탁 18로 제후 부분도 사실상 조조가 주인공처럼 묘사된다. 조조는 동탁 암살에서 연합 모집, 그리고 낙양을 버린 동탁을 유일하게 추적하다 실패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비중이 할당되어있다. 물론 삼국지의 나머지 두 축인 촉과 오의 유비 손견에게도 충분한 포스를 부여하지만 동탁 토벌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받은건 조조로 사실상 그가 동탁 토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15] 하지만 조조까 성향이 짙은 모종강은 조조의 눈물이 인심을 얻기 위한 연기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작중 정작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만큼의 애도는 없었다(...).[16] 순유의 경우 연의에서는 자기 삼촌 순욱처럼 직언을 했다가 조조에게 찍히자 괴로워하다가 병에 걸려 죽지만 정사에서는 오히려 조조가 왕에 오르는 것에 찬성했다.[17] 직접 이름을 거론한 건 아니고 조정희, 사마두환 식으로 성과 이름을 섞었다.[18]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는 '그렇게나 유능한데 천 년 넘게 악당 취급받은 건 이유가 분명히 있어서 아닐까.'였다.[19] 실제로도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등, 오자양장으로 대표되는 일선 무인들이 하후씨, 조씨 라인에 밀려서 그 흔한 도독제군사 한번 못 맡고 평생을 전선에서 고생하다가 죽는걸 보면...[20] 참고로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외의 인물이 주전충인데, 조조는 한말의 적폐는 그대로 세습하면서 인간 말종짓을 한 인간이라면 주전충은 권력을 위해 인간 말종짓은 했어도 그 과정에서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적폐를 대놓고 때려엎었고 이게 생각보다 후대에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준건 사실이었으니 이 평가가 의외일 건 없다. 주전충이 환관이나 당 황족, 혹은 문벌귀족들에게는 무척 잔인했지만 서주 대학살 같은 미친짓으로 민심을 버리는 일은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식관리도 잘 못하고 자기도 며느리들과 간통하며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기는 했어도 왕언장이나 경상 같은 부하들을 진심으로 대했던 걸 보면 부하들을 조조처럼 장기말로 쓰다 버리는 수준의 인간은 아니었다.[21]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 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반대하고 나섰다.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 들일 것입니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 발전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은 익주를 빠르게 안정시켰으며,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것을 막아주었다. 덕분에 익주는 촉한 멸망 이후에도 백성들이 제갈량과 유비를 떠받들게 된다. 툭하면 민란과 반란에 시달렸던 조위, 손오와는 정반대이다. 물론 촉한도 남만 등 이민족의 반란을 여러차례 겪는등 당대에는 고생을 하긴 했지만 후대에는 평가가 나빠진 조위나 이렇다할 변동이 없는 동오와는 달리 오히려 좋아진 케이스니 결국은 전반적으로는 그나마 나은 정치를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22] 물론, 농업 발전과 민생 안정은 집권 세력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유비의 정책이 반드시 조조의 반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할 수 없다.[23] 유비 본인부터 직접 돗자리와 신발을 만들어 팔던 상인 경력이 있다.[24] 이를테면 제갈량의 5차 북벌 당시 둔전을 하면서도 한중의 해당 통로 쪽에 대규모 식량 창고를 준비해 놓고, 무공수를 통한 수로 활용을 통해 다 소수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오장원을 점거한 후 후방 백성 위무 및 현지에서의 식량 충원까지 노린 둔전 계획을 보면 제갈량은 곽회가 지적했듯이 해당 지역을 장악하면서 위와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이민족과 해당 지역 주민들을 위무하여 이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전략 레벨 '정책'을 실행했다. 옹양주의 한복판에 말뚝박고 백성들과 병사들이 섞여서 서로 친근히 지내고 위무하고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위를 엿먹이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제갈량 주둔 당시 병사들과 백성들이 사사로움 없이 섞여 함께 농사를 지었다고 하니 상황이 어쨌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는 후대의 강유가 농서의 이민족들과 연계한 정책과도 연결되는 사한이다. 강유의 이민족 정책에 대해선 그의 측근인 왕사의 행동 방식을 참고해도 좋다.[25] 심한 경우는 조조의 실리주의란 것도 눈 앞의 이득만 쫓다가 명분을 확보 못해서 사마씨에게 집안이 홀라당 넘어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경세서 중 하나인 손자병법에도 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다섯가지 가운데서 천도를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아무리 실리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명분을 갖지 못하면 결국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진정한 실리는 명분도 함께 따르는 것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조 문서의 r97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조조 문서의 r976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4:56:38에 나무위키 조조/평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