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케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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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 1904년 ~ 2005년)은 미국외교관이다.

미국이 소련에 대해 봉쇄정책을 시행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긴 전문(Long Telegram)"을 보낸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사실상 냉전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04년위스콘신 주의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1925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케넌은 로스쿨에 지원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판단하고, 대신 1924년 7월 1일에 새로 설립된 미국 국무부 산하의 United States Foreign Service[1]에 지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워싱턴에 있는 Foreign Service 학교에서 7개월간 공부한 후에 외교관이 된다. 처음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부(副)영사로 근무하게 된다.[2]

케넌은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며 여러 언어를 익히다가, 소련에서 근무하던 시기인 1946년 2월 22일"긴 전문(Long Telegram)"이라고 불리는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다. 이 보고서를 받은 미국 정부는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조지 케넌의 전문은 1946년 3월에 있었던 윈스턴 처칠의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보다 앞선 것이었다.

케넌은 1947년 미국의 유력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소련 대외 노선의 근원"(Sources of Soviet Conduct)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대소련 봉쇄 노선을 공개 주창했다. 주장의 파장을 고려해 본명이 아닌 "미스터 엑스"(Mr. X)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는데,[3] 오래지 않아 그의 글이었음이 드러났다.

3. 기타[편집]


  • 101세까지 상당히 장수(長壽)했다. 덕분에 냉전의 종식뿐만 아니라, 9.11 테러까지 경험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 냉전의 시작과 미국 정부의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지 케넌이지만, 1991년 12월에 소련이 붕괴한 후인 탈냉전 시기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추진된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확장과 동진(東進) 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존 미어샤이머 같은 현실주의 학자는 미국의 자유주의 외교를 비판할 때 이러한 조지 케넌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4][5]

나토를 확장하는 것은 냉전 이후 미국이 취한 정책 중 가장 치명적으로 잘못된 정책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러시아를 자극하여 그들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외교를 하도록 만들 것이다.

(Expanding NATO would be the most fateful error of American policy in the post-Cold War era. Such a decision may be expected to impel Russian foreign policy in directions decidedly not to our liking.)

조지 프로스트 케넌


  • 봉쇄 정책의 원조격 인물이라는 점에서 초강경 반공투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의외의 융통성도 갖춘 인물이었다. 한 보기로 맨해튼 계획의 주요 책임자로서 미국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50년대 초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했을 때도, 그를 공개 옹호하였다. 이후 오펜하이머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자, 케넌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로서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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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After receiving his bachelor's degree in History in 1925, Kennan considered applying to law school, but decided it was too expensive and instead opted to apply to the newly-formed United States Foreign Service. He passed the qualifying examination and after seven months of study at the Foreign Service School in Washington, he gained his first job as a vice consul in Geneva, Switzerland. #[3] 그래서 "엑스 논문"(X Article)이라고도 불렸다.[4]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같은 경우에는 그의 저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에서 '과거 스탈린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모호한 태도 또한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에 상당한 걸림돌이다. 나치 시절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한 독일과 달리 러시아는 겉으로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범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들을 여전히 숭배한다.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굽어보는 웅장한 무덤에 모셔져 있고, 스탈린의 유골은 크렘린 궁의 벽에 안치돼 있다. 만약 히틀러의 유해를 이런식으로 안장했다면 독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러시아의 이런 모호한 태도는 역사 교과서에서 레닌과 스탈린 정권을 분명하게 비난하지 않은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이 문제에 관한 푸틴의 애매한 발언과 옛 소련의 영광을 향한 그의 향수는 추악한 소련의 과거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의 이런 태도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 부담을 주는 한편, 러시아의 민주화에도 걸림돌이 된다.' ...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러시아보다 먼저 서방에 접근한다면, 러시아가 서방을 향해 문호를 열고 유럽의 밝은 미래에 기여할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단절되고 러시아에 정치상 종속될 경우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는 헛된 꿈에 사로집힐 가능성이 있다.' ...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다면 러시아가 EU와 NATO, 양쪽 모두에 가입할 수도 있다.' 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전략적 비전, 아산정책연구원, 2016, 황성돈 옮김, 164페이지~188페이지)[5] 조지 케넌과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모두 반공-반소 성향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소련 붕괴 이후 조지 케넌은 NATO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반면,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최종적으로 (소련 시절의 어두운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민주화된) 러시아까지 EU와 NATO에 가입시켜 친서방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