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해리슨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조지 해리슨의 정규 앨범에 대한 내용은 George Harrison(음반) 문서
George Harrison(음반)번 문단을
George Harrison(음반)#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조지 해리슨 관련 둘러보기

[ 펼치기 · 접기 ]




조지 해리슨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펼치기 · 접기 ]
이름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2004년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파일:George Harrison.png}}}||
본명
조지 해럴드[1] 해리슨
George Harold Harrison[2] MBE
출생
1943년 2월 25일[3]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4]
사망
2001년 11월 29일 (향년 58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작곡가, 배우, 프로듀서
소속
쿼리멘 (1958 - 1960)
비틀즈 (1960 - 1970)
플라스틱 오노 밴드 (1969 - 1971)
트래블링 윌버리스 (1988 - 1991)
무소속 (1991 - 2001)
서명
파일:조지 해리슨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신체
178cm, 71kg, B형[1]
부모
아버지 해럴드 해리슨
어머니 루이스 프렌치 해리슨
배우자
패티 보이드 (1966 - 1977, 이혼)
올리비아 트리니다드 아리아스 (1978 - 2001)
자녀
아들 다니 해리슨 (1978 - )[2]
거주지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주 헨리온템스[3]
학력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 (중퇴)[4]
종교
가톨릭무종교 (불가지론)힌두교 (크리슈나)[5]
활동 기간
1958년2001년
사용 악기
기타, 보컬, 시타르
장르
팝 음악, 록 음악, 포크, 가스펠, 싱어송라이터, 인도 전통 음악
로고
파일:조지 해리슨 로고.png 파일:조지 해리슨 로고2.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3. 생애
3.1. 출생부터 청년기까지
3.2. 비틀즈 시절
3.3. 솔로 활동
3.4. 말년
4. 음악적 성취
4.1. 기타리스트
4.2. 시타르
4.3. 송라이터
5. 사생활
6. 여담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2. 빌보드 핫 100 2위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7.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영국의 전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2. 위상[편집]


1960년대에 등장해 대중음악 역사를 바꾼 밴드 비틀즈의 리드 기타리스트였다.

같은 밴드에서 활동했던 존 레논, 폴 매카트니라는 두 거목과 함께 거론되는, 대중음악 역사상 손에 꼽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였다. 비틀즈 시절에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에 비해서 다소 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조지 해리슨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반열에 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5] 개성 있는 기타 연주 또한 높이 평가받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여타 비틀즈 멤버들의 연주 실력이 충실한 기본기에 더해 곡에 어울리는 라인을 얹는 밴드메이트로서의 면모로 평가받는 데 비해 조지 해리슨의 경우 테크니션으로서의 면모까지 더해져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슬라이드 기타 주법에서 독보적인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브라이언 존스와 함께 슬라이드 기타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6] 힌두교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철학적인 성찰을 보였고, 이로 인하여 팬들에게는 주로 '비틀즈의 정신(Spirit)'으로 불린다. 또한, 인도의 악기인 시타르를 록에 도입하여 연주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1960년대 말에 크게 유행이었던 록 장르인 사이키델릭 록에 영향을 주게 된다.


파일:through_the_beatles_years__george__1961_1969__by_bundles_of_fun-d8jgk43.jpg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1961년~1969년

솔로 시절에도 두각을 드러냈으며, 1988년 비틀즈 멤버들의 마지막 빌보드 1위곡인 Got My Mind Set on You[7]를 내며 나이 들어서도 엄청난 입지를 가진 아티스트로 음악계 최고 선배들 중 하나로 대우받았다.

2001년 58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3년 후인 2004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8년 후인 2009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솔로 커리어에서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린 곡은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 My Sweet Lord/Isn't It a Pity, Got My Mind Set on You 세 곡이다.


3. 생애[편집]



3.1. 출생부터 청년기까지[편집]


1943년 2월 25일[8]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6세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아버지 해럴드 해리슨은 버스 운전사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어렸을 때 가정문제 없이 순탄하게 자랐다. 1948년 조지는 존 레논과 같은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54년에는 리버풀 인스티튜트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인스티튜드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폴 매카트니를 만났고, 폴의 추천으로 1958년 존 레논이 이끌던 쿼리맨에 가입했다. 1959년 7월에는 쿼리멘 활동을 위해 리버풀 인스티튜드를 중퇴했다. 중퇴 후 부모님께 죄책감을 가진 조지는 취직을 위해 블래클래스 백화점에서 견습 전기공으로 취직했다. 1960년 1월 쿼리멘에 존의 친구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가입하면서 조지는 5월에 전기공을 그만두고 전업 뮤지션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이로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완성된다.

이후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밴드 이름이 바뀌었다. 스튜어트 서프클리프는 그 뒤 탈퇴한 뒤 사망하고, 피트 베스트는 링고 스타로 교체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비틀즈가 출범한다.


3.2. 비틀즈 시절[편집]


초기에는 레논-매카트니와 함께 몇 곡을 작곡했으나, 그 수는 적은 편이었다.[9] 조지 해리슨은 불세출의 명반 페퍼상사 전후로 갈리는 활동 후반기에도 점진적인 음악적 성장을 보인다. 페퍼상사에서 작곡한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곡 'Within You Without You',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걸작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등으로 듣보잡 논란을 완벽히 종결시켰다. Abbey Road에서도 'Here Comes the Sun'과 'Something' 같이 주옥같은 명곡들을 수록해 입지를 굳건히 했는데, 특히 'Something'은 존과 폴 못지않은, 앨범 최고의 곡으로 평가받는다![10] Let It Be에도 'I Me Mine', 'For You Blue' 등 조지 특유의 가녀린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이 돋보이는 곡들을 수록한다.[11]


파일:external/mediad.publicbroadcasting.net/George.jpg


파일:조지 해리슨 60년대 초반.jpg

비틀즈 초기 시절의 조지 해리슨
기타를 연주하는 조지

조지가 비틀즈 활동 중반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한 것은 비틀즈 멤버들 중 최연소자였다는 점도 있겠지만 자신보다 먼저 폴 매카트니와 친했다는 이유로 해리슨을 질투한 존 레논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는 존이 조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I’m Happy Just to Dance With You를 조지에게 주었으며[12], 조지가 Taxman을 작곡할 때 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존은 비록 자기 할 일이 많긴 하지만 조지를 많이 아꼈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마지못해 도와주었다고 언급하는 등 서로에게 많은 도움과 영감을 줬다.

당시 조지 해리슨의 작곡 실력이 레논-매카트니에 비해 뛰어나지 않았기에 폴 매카트니가 송라이팅은 레논-매카트니의 영역이고 조지는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암묵적으로 믿었다고 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얘기를 보통 존과 많이 나눴고 조지가 하는 얘기는 상대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 조지가 소외감을 느끼는 데 기여했다. 조지의 연주를 지적을 하며 자기가 지시한 대로 연주할 것을 요구한 것 역시 조지의 반감을 많이 샀다.[13][14] 그리고 비틀즈의 말기에 폴 매카트니가 주도하는 밴드의 방향성에 조지가 염증을 느끼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15]

1965년부터 조지 해리슨은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돌'이라는 지위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지는 종교에서 그 해답을 얻는다. 원래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성격이었던 조지는[16] 1965년 영화 Help! 촬영 도중 인도 문화와 철학에 매료되었고 얼마 뒤인 1966년 부인인 패티 보이드와 함께 힌두교의 한 분파인 크리슈나교로 개종하였다.[17] 이후, 자신뿐만 아니라 비틀즈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도 요기, 구루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훗날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마약을 끊기도 했다.

조지는 비틀즈 멤버들 중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비틀즈 6집 Rubber Soul의 트랙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 서양음악 최초로 시타르 연주를 도입했고[18], 같은 앨범에서 'Think For Yourself', 'If I Needed Someone'과 같이 사이키델릭하면서도 독창적인 곡들을 작곡하여 앨범 내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비틀즈 후기에 폴 매카트니와 크게 대립하여 비틀즈를 잠시 나가기도 했다. 물론 멤버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금방 돌아오긴 했다. 이 시절 조지는 이미 솔로 활동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비틀즈 음악과는 별개로 자신의 솔로 활동으로 음악적 자아를 펼치길 원했고 오히려 이러한 방식으로 비틀즈의 영역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각자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집에 놀러갔을 때 오노 요코가 "4인조 밴드 비틀즈..."라고 말을 하자 폴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그를 비틀즈의 멤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투로 "3인조 밴드"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난 후 폴과의 관계는 회복했다. 사이가 소원해진 쪽은 오히려 존 레논이었는데, 70년대 후반 저술한 전기 <I Me Mine>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존 레논을 누락시켜 버렸다.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고,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후에 조지는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으로 여겼다.[19]

비틀즈가 해체하기 전 조지는 솔로 앨범 두 장을 내게 되는데 한장은 영화 Wonderwall의 OST인 'Wonderwall Music'이고 또 한장은 'Electronic Sound'로 각각 1968년과 1969년에 발매되었다. 다만 Electronic Sound는 너무 실험적이라 그냥 묻혔다.[20]


3.3. 솔로 활동[편집]


폴과 존 사이에 존재했던 극도의 유대감 탓에 조지는 밴드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항에서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차를 이기지 못한 비틀즈는 해체한다. 밴드가 해체하게 되며 역설적으로 조지의 작곡 전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파일:external/en.smalltownromanceblog.com/MTS_Vedic-1056034-georgeharrison.jpg

1974년의 조지 해리슨

비틀즈 해체 이후에는 'All Things Must Pass' 등의 음반을 내면서 솔로로 활동했으며,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비틀즈 멤버중 가장 먼저 솔로곡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달성한 이도 조지 해리슨이었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앨범은 첫 앨범인 'All Things Must Pass'이며, 이 앨범은 무려 3LP나 되는 트리플 앨범이다(컴필레이션이 아닌, 뮤지션이 낸 최초의 정규 트리플 앨범이다. 물론 CD로는 더블 앨범). 조지의 대표 히트곡 역시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 앨범 수록곡 중 상당수는 '비틀즈 시절' 작곡한 곡이었다. 여기서 조지가 얼마나 쌓인게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조지 해리슨을 '비틀스 전설의 당당한 주역이었음을 죽을 때까지 증명해야 했던 희생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뒤이어 발표한 앨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상업적과 비평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리드 싱글 Give Me Love (Give Me Peace on Earth)는 폴 매카트니의 솔로 작품인 My Love를 제치고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달성한다. 뒤이어 발표한 후속작 Dark Horse 역시 이전까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북미에서 진행한 Dark Horse 투어가 여러 이유로[21] 대실패를 거두고, 혹평을 받으며 한동안 조지 해리슨은 슬럼프를 갖게 된다.

1981년 발표된 ‘Somewhere in England’에서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의 간섭을 크게 받아 음악적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조지 해리슨은 'Gone Troppo'을 대충 제작하고 프로모션을 일절 하지 않아 반쯤 '자발적'인 상업적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후 조지는 워너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다가 5년 뒤인 1987년, 조지 해리슨은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리더였던 제프 린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팝 성향이 짙어진 정규 앨범 'Cloud Nine'을 발표하며 다시 한번 화려하게 재기하고 제 2의 전성기를 맞는다. 비평적으로 All Things Must Pass 이후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첫 싱글 Got My Mind Set On You도 오랜만에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한다.

Cliud Nine 작업 이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 로이 오비슨, 제프 린 등과 함께 떠돌이 윌버리스(The Traveling Wilburys)라는 슈퍼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을 이어간다. 1992년에는 Dark Horse 투어 이후 처음으로 해외 투어 공연을 갖게 된다. 일본 순회로 구성된 투어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 성공했고,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후 발표된 유작 'Brainwashed'이며 다시 한번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얻는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총 3개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수록곡 Marwa Blues는 최고의 팝 연주곡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조지의 활동과 업적은 존과 폴의 업적에 비해 비교적 빛을 못 보았다. 해체 후 그는 힌두교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인도 음악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솔로 시절 작곡과 가사들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3.4. 말년[편집]


1997년 후두암을 발견하여 치료에 전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폐암으로의 전이를 발견해 폐암 치료를 병행하게 된다. 이후 암 치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병세가 호전되던 중, 1999년 12월 28일에 정신분열증 환자 '마이클 아브람'[22]의 가택침입 및 습격으로 칼에 가슴부위를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인 올리비아가 괴한을 램프로 기절시켜 조지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이 일로 조지는 40번 이상의 자상과 폐 일부가 잘려나가는 큰 부상을 입는다. 이후 치료를 받고 퇴원하지만 이 사건은 조지의 건강에 영향을 줬고, 암 증상을 다시금 악화시켜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270d973600e8646b867433211be090b.jpg

그의 마지막 사진.

"Love one another."

"서로 사랑하세요."[23]

[24]

조지 해리슨의 유언


폐암에서 전이된 뇌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2001년 봄에는 스위스에서 몇달 간 요양하며 지냈다. 그때는 누워있기만 할 정도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는데 링고 스타가 병문안을 가서 조지를 만나고 딸의 뇌종양 때문에 보스턴으로 이제 가봐야한다고 하자 조지가 한 말이 "내가 같이 가 줄까?" 였다고. 이는 링고가 들은 조지의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링고는 이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망 2주 전에는 뉴욕 맨해튼의 병원에서 보냈는데 이때 폴과 링고가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링고가 먼저 떠난 뒤 조지는 폴 매카트니에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틀즈 후기부터 협업과 갈등을 함께한 과거 동료의 고백 앞에 폴도 무너져내려 조지의 손을 꼭 잡은 채 엉엉 울었다고 한다.

2001년 11월 29일, 위의 말처럼 크리스마스 약 한 달 전에 폴이 소유한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휴식하던 중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인도식으로 화장해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조지 해리슨 추모 공연에서 Something을 연주하는 폴 매카트니에릭 클랩튼.
조지 해리슨의 오랜 친구였던 에릭 클랩튼은 그의 추모 공연인 Concert for George를 기획했다.#


4. 음악적 성취[편집]



4.1. 기타리스트[편집]






지미 헨드릭스, 피트 타운젠드, 에릭 클랩튼과 함께 1960년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며, 롤링 스톤즈브라이언 존스와 함께 슬라이드 기타 주법[25] 을 도입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그의 기타 연주 기법은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롤링 스톤은 그를 위대한 기타리스트 11위에 선정했다.[26] 대다수의 록 기타리스트들이 조지 해리슨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그는 영국의 록 음악을 상징하는 위대한 기타리스트로서 기억된다.[27]

물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라는 두 거대한 산에 가려져서 그렇지[28], 그가 없었다면 비틀즈의 음악적 성향도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존 레논은 나이도 조지보다 3살이나 많은데다가 특유의 유아독존적인 태도까지 겹쳐져, 폴 매카트니가 조지 해리슨을 존에게 소개시켜줬을 때 그대로 돌려 보내려고 했는데, 조지의 엄청난 기타 실력에 놀라서 그대로 밴드에 들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조지 해리슨은 레논-매카트니의 병풍이 아닌, 비틀즈의 작곡 시스템에 전반적으로 일조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인정받는 이유는 단순히 기타를 잘 칠 뿐만 아니라, 간단하고 기억하기 쉬운 기타 코드를 여럿 만들어 후대 록 음악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예컨데 지미 헨드릭스가 전반적인 록 기타 연주법을 도입하고, 리치 블랙모어헤비 메탈 기타 연주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면, 조지 해리슨은 단순하면서도 중독적인 코드들을 이용해 개별 곡에 알맞는 기타 연주법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리드 기타를 통해, 레논-매카트니 듀오가 작곡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부각할 줄 아는 기타리스트였다.[29]

또한 그가 작곡하고 연주한 Savoy Truffle에서의 기타 연주는 픽시즈의 독특한 기타 소리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64-65년 경 12현 기타 특유의 사운드를 활용하여 쟁글팝 사운드 확립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A Hard Day's Night, Twist and Shout 등 비틀즈의 팬이라면 익숙할 비틀즈 초기 음악의 흥겨운 기타 사운드는 거의 대다수가 조지의 작품이다. 흥겨운 기타 리프와는 별개로 보이는 것에 비해 난이도가 상당한 혹은 척 봐도 손가락 제대로 꼬일 것 같은 곡들이 많아서 비틀즈 전반기(1962~1966년) 곡들을 커버한 유튜브 영상들의 댓글을 보면 대부분 '조지의 연주는 신의 영역이다',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기타리스트가 아닐까' 같은 찬양 일색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흥겨운 리프만 전문이었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Till There Was You[30]나 And I Love Her 등의 곡에서 나타나는 어쿠스틱 기타를 통한 감성적인 연주에도 능했다.

다만 1965년 이후 라비 샹카르를 만나고, 힌두교시타르에 너무 푹 빠지면서 기타 연주패티 보이드에게 소홀해져 이후로는 기타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대신 그만큼 음악적 스펙트럼과 시타르 연주 실력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다. 조지 본인도 1968년경 기타 실력이 매우 떨어졌다는 점을 인정했다. Revolver 음반에 실린 Taxman에서는 조지가 자꾸 어려운 기타 솔로 파트를 틀려서 빡친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폴 매카트니에게 솔로 기타를 쳐보라고 했고, 단 2번만에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지 해리슨은 1965년 이후 스튜디오에 갈 때를 빼고는 사실상 단 한 번도 기타를 제대로 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기타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위대한 기타리스트 11위에 들어갈 정도로 괴물같은 실력을 가진 것.

시타르 연습을 그만두고 다시 기타를 잡은 비틀즈 후반기부터는 록 기타리스트로서 실력이 돌아온다. 특히나 뛰어난 곡 해석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심플하면서도 곡에 어울리는 기타 솔로나 리프를 제작하는 능력이 탁월해졌는데, Let It BeSomething 등의 곡에서 연주하는 기타 솔로가 그 예시이다. 뿐만 아니라, The EndOne After 909에서는 비틀즈 초기를 연상시키는 스킬풀한 속주 기타 솔로를 선보이기도 한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는 슬라이드 주법을 마스터하여, 후대의 슬라이드 주법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특히나 해체 후 발표한 솔로 앨범 All Things Must Pass에서는 대부분의 곡에서 슬라이드 주법을 활용했으며, My Sweet Lord, Isn't It a Pity 등의 곡에서 두드러진다. 존 레논의 Gimme Some Truth의 슬라이드 주법을 활용한 기술적인 기타 솔로도 조지의 작품이며, 기타 연주 방식을 두고 자신과 다툰 폴에게 멕이듯 How Do You Sleep?의 아웃테이크 버전에서 선보인 슬라이드 연주 역시 재발굴된 명연주로 평가받는다.

여담으로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세계 최초로 메탈을 연주한 기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의 곡 Helter Skelter가 최초의 메탈 송으로 간주되는데, 폴 매카트니와 함께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의 기타를 맡았기 때문이다.[31]


4.2. 시타르[편집]



파일:라비 샹카르 조지 해리슨.jpg

라비 샹카르에게 시타르를 배우고 있는 조지.
1965년경 인도 사상을 접하고는 힌두교 철학에 매료되어 명상 등 인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으며, 이후 힌두교로 개종까지 하게 되었다.[32] 평생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는 라비 샹카르와 만난 이후, 인도 전통 현악기인 시타르의 감미로운 소리를 듣고는 시타르에 푹 빠져 열심히 연습하던 기타도 내버려두고 시타르 연주에만 몰두하였다. Love You To, Within You Without You는 조지의 시타르 소리가 돋보이는 명곡들이다. 비틀즈 해체 이후 솔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져, 때로는 매일 인도 전통 음악을 들으면서 명상을 하거나 시타르 연습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라비 샹카르도 조지의 영향을 받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등 히피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시타르를 쓰지 않은 곡이더라도 인도 음악이나 시타르 연주법에 영향을 받은 곡들을 비틀즈 후반기에 작곡하게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Blue Jay Way 등이 있다.

그의 시타르 연주는 단순히 비틀즈의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동시대와 후대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당대 유명했던 장르인 사이키델릭 록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동양의 사운드와 록 음악을 결합한 것이 매우 신선한 시도로서 다가왔고, 이에 따라 라가 록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개척된다. 또한 이에 영향을 받은 여러 록밴드들이 다른 나라의 음악과 록 음악을 결합하는 등의 시도를 하게 된다.[33] 또한 곡 스타일 뿐만 아니라 시타르 그 자체도 록 음악에 여러번 쓰이게 되는데, 롤링 스톤즈의 전 리더였던 브라이언 존스Paint It Black이라는 곡에서 시타르를 연주하기도 했다.


4.3. 송라이터[편집]



희대의 괴수 레논-매카트니에 가려져서 그렇지, 조지 해리슨은 1960년대와 70년대를 상징하는 최정상급 송라이터이다.

당장 비틀즈의 후반기를 상징하는 두 명반인 The BeatlesAbbey Road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While My Guitar Gently WeepsSomething은 조지가 단독으로 작곡한 곡이다. 화이트 앨범의 경우, 비틀즈 내부에서는 Happiness Is a Warm Gun이 화이트 앨범 최고의 명곡이라는 의견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이나 상업적인 성공과 평론가들의 평은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압승으로 끝났다.[34] Something의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발라드 명곡 중 하나이며, 그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도 감동하여 커버 버전을 불렀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비틀즈 곡 중 스포티파이 스트리밍 횟수가 가장 높은 Here Comes the Sun 역시 조지 해리슨의 작품이다. 팬들에게서 명곡 인기투표를 할때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Something, Here Comes the Sun은 결코 10위권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으며, 때로는 3곡이 모두(!) 10위권 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비틀즈 최고의 명곡 100선에서도 Something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10위권 안에 들어갔을 정도로 평론가들에게서도 조지 해리슨의 송라이팅 실력은 매우 극찬을 받는다. 단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라는, 밥 딜런, 재거-리처즈, 플랜트-페이지 정도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음악사 사상 가장 뛰어난 작사/작곡 콤비에 밀려서 인지도가 떨어지게 된 것일 뿐이다.

타고난 천재 송라이터였던 존 레논, 폴 매카트니와 달리, 조지는 성장형 송라이터로 분류된다. 조지는 비틀즈 초창기 커리어인 Please Please Me부터 Beatles for Sale까지는 자작곡을 Don't Bother Me 단 한 곡 밖에 수록하지 못한다.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가 데뷔하기도 전부터 곡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스로 좋은 곡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멤버들의 반대로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 경도 앨범의 흥행이나 다른 곡들과의 조화를 이유로 조지의 곡을 앨범에 수록하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대해 마틴 경은 "나는 조지의 음악적 재능을 아꼈기에 더 엄하게 대했다"라며 어느 정도 인정하는 한편 조지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를 기점으로 시타르를 접하고, 레논-매카트니의 등 너머로 좋은 곡을 쓰는 방법을 배웠으며,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등을 사귀게 되면서 송라이터로서의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Help! 앨범에서는 오랜만에 자작곡을, 그것도 두 곡이나 수록한다. 다음 작인 Rubber Soul에서도 두 곡을, Revolver에는 세 곡이나 수록하게 된다. 특히나 Taxman은 비틀즈가 직설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곡이라는 점에서 고평가를 받는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는 폴 매카트니의 독재로 인해 곡을 단 1곡밖에 수록하지 못했지만[35], 대신 Magical Mystery Tour에서 자작곡을 1개 넣으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당시 작곡했던 곡인 Blue Jay Way로 잠깐 사이키델릭 록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인도 음악과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결합해 매우 독특한 결과가 나왔다. 이 시기 'It's All Too Much'라는 사이키델릭+하드 록 색채의 곡도 함께 작곡했으나 해당 앨범에는 수록되지 못하고 'Only A Northern Song'과 마찬가지로 2년 뒤인 Yellow Submarine 앨범에 가서야 빛을 본다. 이 역시 숨겨진 수작이라는 평가가 많으며 후배 밴드인 오아시스가 이 곡의 가사를 자신들의 곡에 인용한다.

The Beatles 이후부터는 조지가 비로소 꽃을 만개하고 명곡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평소 진중하고 무거운 곡을 썼던 분위기를 의식해 Savoy Truffle이라는 발랄하고 장난기스러운 곡을 써 이미지 전환을 꾀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Long, Long, Long과 같이 신을 찾아 해매는 심오한 곡을 쓰기도 하면서 그의 음악적인 성향은 더욱 다양해져갔다. Abbey Road에서 그는 SomethingHere Comes the Sun을 작곡해 전설적인 송라이터의 지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대성공을 거둔 작곡가였다. 해체 후 발표한 All Things Must Pass는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앨범 중에서도 최고작으로 꼽힌다. 그 다음 앨범인 Living in the Material World역시 수작으로 인정받는 앨범이며, 한동안의 암흑기 이후, 5년만의 복귀작이자 재기작인 Cloud Nine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대성공을 거둔다. 또한 솔로 아티스트로서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세 개나 배출해내는 등 후대의 수많은 송라이터들에게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음악가로서 남게 되었다.


5. 사생활[편집]


위에서 말했듯 인도 사상에 무척 심취해 있었는데, 이후에는 아예 힌두교로 개종하고 술을 끊었다. 담배도 끊으려 시도를 했지만 1997년에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끊었다고 한다. 여기서 담배의 중독성을 더욱 깨달을 수 있다. 조지는 말년에 담배 때문에 인후두염과 폐암에 걸렸고 결국 폐암으로 숨진다. 인도 사상의 영향으로 비틀즈 시절에도, 해체 이후에도 간간히 인도 음악을 작곡하고[36] 장례까지 힌두교 식으로 치를 정도니 말 다했다.

어린 시절부터 모터 스포츠의 열성팬이었고, 비틀즈 해체 후에는 더 적극적으로 경기를 관전하러 다녔으며, 레이싱을 모티브로 한 "Faster"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니키 라우다 등의 레이서와 친분이 있어서 직접 레이스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데이먼 힐과도 친분이 있어 F3에 참가할 때, 출전 자금이 부족했던 데이먼을 지원해줬는데, 훗날 그가 F1 월드 챔피언이 되었을 때, 지원금을 돌려주려고 하자 웃으며 거절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인배...



조지 해리슨 추모 공연에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를 연주하는 에릭 클랩튼.
에릭 클랩튼과는 절친한 친구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는 그가 연주해 주었으며, 조지 해리슨 추모 공연 때도 그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조지 해리슨의 연인이었던 패티 보이드를 사이에 놓고 벌인 삼각 관계로도 유명한데, 이는 후술.


파일:다니 해리슨.jpg

조지 해리슨의 아들 다니 해리슨.[37]

패티 보이드와 10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재혼한 올리비아 해리슨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아들의 이름은 다니(Dhani) 해리슨. 아들의 이름은 인도 음악의 6번째와 7번째 음계인 dha와 ni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러 모로 크리슈나교 신자였던 조지다운 작명. 수염을 안 기르면 안 기른 대로, 수염을 기르면 기른 대로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다. 아버지를 상당히 닮아서 출아법으로 낳았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돈다 외모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굉장히 비슷해서 마치 조지 해리슨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조지가 1973년에 설립했던 'The Material World Foundation'에서 2020년에 진행한 'The Inner Light' 챌린지에 참가한 다니의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중년의 조지가 그대로 튀어나온 수준. 영상 속 댓글들도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조지는 어린 대니를 보고 "넌 나보다 더 나같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38]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장 젊은 영국 20대 부자들 순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음악적인 감각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Here Comes the Sun' 속 숨겨진 기타 솔로가 처음 밝혀진 영상에서 다니가 리듬 일부가 인도 음악 스타일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옆에 있던 조지 마틴이 '참 너희 아버지 같구나'라고 하기도 했다. 올리비아 해리슨은 조지의 사후 그에 대한 시집을 출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이먼 앤 가펑클폴 사이먼과 친분이 깊었다. 제3세계의 문화에 대해서 애착을 가졌던 점이 유대관계를 가지게 만든 계기였다. 조지 해리슨은 인도의 문화에, 폴 사이먼은 중남미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말년에 캐나다인 코미디언 마이크 마이어스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조지는 죽기 전날 마이어스에게 "미니 미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럽을 돌아다니는 내내 미니 미 인형을 들고 다녔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마이어스가 나중에 그 편지를 받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그의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멕시코 출신 기타리스트 산타나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발표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피처링에 첼리스트 요요마가 참여했다.

2012년 조지 해리슨의 삶과 음악을 다룬 마틴 스콜세지의 다큐멘터리 영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가 개봉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지 해리슨 : 물질 세계에서의 삶"이란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5.1. 패티 보이드, 에릭 클랩튼과의 삼각관계[편집]


10대 후반부터 모델로 활동 중이던 패티 보이드는 비틀즈의 첫 영화 A Hard Day's Night에 캐스팅되면서 조지 해리슨을 처음 만났다. 참고로 이 당시 조지 해리슨은 21세, 패티 보이드는 20세였다.

패티에게 반한 해리슨이 먼저 대쉬를 했는데, 이때 조지가 그녀에게 구애하며 했던 말은 결혼해줄래요? 안된다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였다고. 저 얼굴로 이런 말을 내뱉으면 누가 안 넘어오겠냐만은...

허나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인 에릭 스웨인(Eric Swayne)이 있었기에 그를 거절했으나, 조지는 패티가 비틀즈의 팬이었던 점을 이용해 패티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고백했고, 패티는 결국 조지에게 마음을 열어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별을 선언한 다음, 조지 해리슨과 교제하게 된다.

연애 초창기에 둘은 공식 석상에서 키스를 나누는 등 나름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허나 얼마 안 가 조지는 대놓고 그루피를 비롯해 여러 여성들과 어울렸고, 투어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인도 사상에 심취한 이후에는 인도 사상에만 몰두하며 패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게다가 이 후에도 패티를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던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크리슈나교로 먼저 개종한 것도 패티였으며, 크리슈나교도 당시 마음 고생이 심했던 조지를 위해 패티가 소개해준 것이었는데 패티는 이렇게까지 조지가 종교에 심취해 주객전도를 당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패티와 싸울 때면 조지는 패티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며 그녀를 압박했고,[39] 패티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조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에릭 클랩튼과 친분을 쌓고 어울린다. 그런데 에릭이 정말로 패티에게 반해 버리고 조지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려던 의도밖에 없던 패티는 당황했다고 한다.

조지는 에릭과 패티의 관계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알고 난 후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패티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팬에서 멤버와 결혼에 골인한 링고 스타의 아내인 모린 콕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때 링고는 갖은 실패를 연달아 경험하며 우울증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모린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모린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지는 부부 침실에서 모린과 꽁냥거렸고 모린은 링고 앞에서 대놓고 조지가 선물한 목걸이를 매고 돌아다녔다. 마침내는 조지와 모린이 링고와 패티를 불러내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고백까지 한다. 조지와 모린의 관계를 알게된 링고는 모린과 이혼했고[40] 일련의 과정에서 매우 큰 충격과 상처를 받은 패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에릭 클랩튼에게 가게 된다.





패티 보이드에게 바치는 에릭 클랩튼의 연가 'Layla'와 'Wonderful Tonight'.
전자가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라면, 후자는 사랑을 쟁취한 이후 기쁨에 겨워하는 노래이다.


이 과정에서 에릭 클랩튼은 'Layla', 'Wonderful Tonight' 등의 곡을 내놓으며[41]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막상 패티와 결혼하고 나자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이 계속 바람을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했으며, 패티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밖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왔다. 결국 또 다시 상처를 받은 패티는 에릭과 이혼한다.

심지어 에릭은 나중에 자기 자서전에 "패티를 원했던 건 그저 조지 해리슨이 질투났기 때문이다. 조지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 훌륭한 차와 믿기지 않는 경력,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저 패티는 그 모든걸 갖고 있는 남자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패티를 탐냈다. 이는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예전의 나는 내것보다 훨씬 비싼 장난감을 갖고 있는 이복형의 장난감을 탐냈다. 이게 내가 패티에 대한 감정과 정확히 같았을 것."이라고 저술하며 진정한 상똥차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여담으로 에릭 클랩튼은 나이가 들고 나서 사죄의 의미로 곡 Layla의 소유권을 전부 패티 보이드에게 넘겨주었다. 1년에 최소 수천만원에 달하는 불로소득이 나온다고.

패티는 오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했으며, 그 이후로 쭉 독신으로 살다가 2015년에 로드 웨스턴이라는 사람과 황혼 결혼을 했다. 최근에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를 위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후 패티는 조지와도 화해했고,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이쯤되면 패티가 정말 대인배다 90년대 초에 조지와 패티가 함께 촬영한 사진이 있다.

서프라이즈 방송에서는 조지 해리슨과 패티 보이드, 에릭 클랩튼 삼각관계를 다뤘는데 방송에서 위의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고 패티를 오노 요코 수준으로 몰아가며 왜곡된 방송을 했지만[42]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은 패티 보이드에게는 매우 나쁜 남자들이었고 진실을 알고있는 그들의 팬들은 패티를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한때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Something이 패티를 붙잡으려고 한 노래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있었는데(패티 보이드도 2007년 자서전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생전 조지 본인이 직접 이를 부인했다.

조지 해리슨은 후에 올리비아 아리아스와 재혼,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재혼한 올리비아와는 큰 불화없이 괜찮은 관계를 유지한 듯 싶었으나 사실 이 때도 바람끼를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6. 여담[편집]


  • 상당한 독설가이자 솔직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받았던 최악의 상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방송인에게 왕실 훈장이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이 업계에 존 라이든, 키스 리처즈, 노엘 갤러거 등 워낙 말빨로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많은지라 그리 부각되진 않았지만 젋었을 땐 비틀즈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록스타들이 그랬듯 꽤나 막 나가는 성격이었고, 무대 설비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과 함께 공연 도중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참 후배인 밴드 오아시스에 대해 "30년 후면 잊혀질 밴드다. 데뷔한지 15년만에 해체하긴 했다 리암 갤러거는 모자란 놈이고 쓸모없다."는 식으로 혹평했다가[43] 리암 갤러거에게 "내가 아직 비틀즈와 조지 해리슨을 음악가로서는 좋아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당신은 사람으로서는 젖꼭지(nipple) 같은 인간이야."라는 디스를 당한 적이 있다.[44]

  • 1972년,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와 함께 타고 운전 중 부주의로 인해 자칫 사망할 수도 있었던 큰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인해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았고, 그 역시 머리를 크게 다쳐 출혈이 심했는데, 구급차로 이송되는 둘의 모습이 기자의 의해 촬영된 적도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그의 메르세데스는 폐차됐다.

  • 젊은 날에는 키스 리처즈와 상당히 닮았었다. 둘 다 기타리스트였다는 점을 보면 의미심장하다.[45] 그런데 키스 리처즈는 마약을 너무 많이 피워서 1970년대 초반에 폭삭 삭아버렸고 반대로 조지 해리슨은 덥수룩한 수염을 길러서 미중년이 되어 1970년대 중후반의 사진만 보더라도 전혀 안닮게 변해버렸다.


  • 1965년부터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링고 스타도 뒤따라 채식 대열에 합류했다. 폴 매카트니, 존 레논도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 전원이 채식을 한 셈이 된다.[46]

  • 종교적으로는 신념이 꽤나 강력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존 레논과는 다르게, 폴 매카트니와 마찬가지로 논쟁을 하는 것을 꺼렸다. 다만 UN의 인도주의적 행보를 지원하기도 했고 서구권의 힌두교 정당을 지지하는 등 아예 정치 활동을 안한 것은 아니다. 종합적으로 봤을때 그는 역시나 노동당의 지지율이 80%를 넘어가는 리버풀의 노동계급 출신 답게, 진보주의에 가까운 정치 성향을 가진 것 같다. Piggies는 그의 정치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는 곡으로 거대 자본가들과 기득권층을 돼지라고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동정을 뗐을 때 비틀즈 멤버들이 박수를 쳐줬다고 한다. 함부르크에서 같이 지냈을 때 첫 관계를 가졌는데, 이불 속이라서 아무도 못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들 깨어서 지켜보고 있었고, 관계를 끝냈을 때 멤버들이 박수를 쳐줬다. 조지는 후일 첫 경험을 망치지 않도록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준 멤버들이 고맙다고 소회했다(...).

  • 비틀즈 초창기 시절 어려운 기타 리프를 틀리면 폴 매카트니가 짜증을 내면서 완벽하게 기타 리프를 연주하며 훈계를 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은 놀랄 만큼 당돌했고, 은 놀랄 만큼 귀여웠고, 링고는 개구쟁이에 매력적이었고, 조지는 우리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대사 中

  • 상당히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멤버 모두가 잘생겼다고 평가받는 비틀즈 안에서도 비주얼 멤버로 뽑히는 멤버.[47] 사진으로도 훈훈한 외모를 지녔지만 특히 실물이 매우 잘생기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겼다고 하며 막내 이미지 때문인지 누나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 먹보였다. 조지가 등장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 영상물에서 그는 뭔가를 먹고 있다. 영국 왕실과 만났을 때도 "저희 점심 언제 먹어요?"라고 물은건 유명한 일화. 팬들은 링고 스타에게 보내는 과자 상자에 "이건 링고 스타 몫도 포함되어있으니 조지는 먹지 말아요"라고 했지만 링고가 이를 발견하기 전에 과자 상자는 조지에 의해 깨끗이 비워졌다고 한다. 먹는 것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마른 체형을 유지했다.

  • 팬들 사이에서는 조지가 노래를 부를 때의 목소리가 존 레논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말이 꽤 있다. 비틀즈 활동 중후반기부터 조지가 비음을 섞는 창법으로 변화하며 존과 차이점이 꽤 생기지만 초창기 시절에는 확실히 잘 듣지 않으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다.[48]

7. 디스코그래피[편집]



7.1. 앨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지 해리슨/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2. 싱글[편집]



7.2.1.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7.2.2. 빌보드 핫 100 2위[편집]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편집]




7.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편집]




8. 둘러보기[편집]



조지 해리슨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펼치기 · 접기 ]
이름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2004년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3:34:12에 나무위키 조지 해리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미들 네임은 종종 생략된다. 미들 네임이 해럴드였다는 증언은 있지만, 출생 신고에서는 누락되었기 때문.[2] 성, 이름, 미들네임이 모두 영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들이다.[3] 기록에 따라서는 2월 24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생전 빌보드지 인터뷰에 따르면 24일 밤에 태어났다고. 일단 공식 문서상 생일은 2월 25일이다.[4]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5] 그의 명곡을 꼽자면, 비틀즈 후기에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화이트 앨범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Abbey Road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은 앨범 내 최고 명곡으로 자주 꼽히며, 비틀즈 시절 작곡했으나 발표하지 못한 곡들을 모아 작업한 All Things Must Pass는 평단과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이후 솔로 커리어의 평가도 1970년대 중반 및 198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제외하면 매우 좋았다.[6]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리스트에 11위로 랭크되었다.[7] 이 노래는 역대급 레드오션인 1988년 빌보드 연말 차트 3위를 달성했다. 비틀즈 솔로 멤버들의 노래들 중에서도 최고 히트곡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8] 출생신고는 25일로 돼있지만 실제 태어난 시각은 24일 밤 11시 42분이다. 하지만 본인이나 팬들 모두 25일을 공식 생일로 친다.[9] 최초로 작곡한 곡은 2집 With The Beatles에 수록된 'Don't Bother Me'. 처음 만든 곡치고는 훌륭한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존과 폴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아류작이다. 훗날 조지 자신도 이 곡을 혹평한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일취월장, 청출어람.[10] 'Something'에 대한 프랭크 시내트라의 반응은, '가장 아름다운 레논-매카트니 발라드' 여기에 대한 폴의 반응이 "고마워요, 프랭크"로 일품이다. 존과 폴 역시 'Something'의 진가를 시원하게 인정한다. 링고도 뒤에서 나름 기뻐했다고.[11] 그런데 사실 조지 해리슨은 원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목소리였다. 당장 초기 곡인 'Don't Bother Me'나 'I'm Happy Just Dance with You'만 들어봐도 굵직한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67년 'Within You Without You'를 기점으로 비음을 가미한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다.[12] 당시 조지는 자신의 작곡 능력에 대해 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13] 밴드 음악의 특성 상, 각 멤버가 맡은 악기 파트는 개인 재량에 따라 스스로 구성하고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4] Get Back 세션 당시 조지가 일시적으로 밴드를 떠난 때에도, 조지의 기타 연주에 대한 폴의 지적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15] 다만 이것은 링고가 나중에 '폴이 일 중독 수준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 당시 비틀즈가 그나마 그렇게라도 돌아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 처럼 폴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면이 크다.[16] 1966년 발매한 7집 Revolver에서는 당시의 지나쳤던 세금 징수를 비아냥거리는 노래 'Taxman'을 작곡하기도 했다.[17] 조지는 허울좋은 천주교계였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종교적 강압은 딱히 없었다고.[18] 사실 이 곡의 작곡자는 존 레논이며, 새로운 방식의 사운드를 표현할 악기를 찾다가 당시 라비 샹카라는 시타르 연주가의 음반을 통해 처음 시타르를 접한 이후 시타르를 배우고 있던 조지 해리슨에게 연주를 권하면서 사운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비틀즈 앨범에서 나오는 시타연주에 비해 이 당시 해리슨의 연주가 비교적 설익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19] 훗날 Cloud Nine을 발표한 1987년, 조지는 존 레논의 영향을 축소 서술한 이유를 질문 받자, "제가 존 레논에게 미친 영향도 스스로 상당 부분 생략해서 서술했어요. 저는 상호 영향을 쌤쌤이 치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가까운 관계였기에 일일이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20]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전자음을 만들었는데 너무 실험에 치중한 앨범이라 묻혔다. 빌보드 200에서는 191위에 오르며 간신히 턱걸이를 하였고 UK 차트엔 오르지조차 못했다.[21] 조지 본인의 목관리 실패, 비틀즈 시절 히트곡 비증이 적은 셋리스트, 인도 음악을 과도하게 채운 구성 등이 이유로 꼽힌다.[22] 사건 직후 정신병원에 보내졌다가, 이미 조지 해리슨이 사망한 후인 2002년에 풀려났다. 정신병을 앓던 시절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한다며 조지의 유족들에게 사죄했다.#[23]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My Sweet Lord 때부터 이어진 그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24] 오아시스의 Turn Up The Sun에서 인용되었다.[25]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는 한 인터뷰에서 해리슨의 스타일을 Thin Guitar Sound 라고 정의했다.[26] 이는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데이비드 길모어, 퀸의 유명한 기타 리프들을 상당수 만든 브라이언 메이, 그리고 헤비 록 리프 그 자체를 상징하는 리치 블랙모어 등 수많은 거물보다 높은 순위이다.[27] 에릭 클랩튼 역시 조지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는데, 바로 The Beatles 앨범의 수록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 솔로 연주에 대한 일화를 통해서이다. 에릭은 조지에게 이렇다 할 사전 정보를 받지 못한 채 조지랑 놀다가 비틀즈가 작업 중인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조지에게 갑작스럽게 녹음 요청을 받았다. 에릭 본인은 이에 대해 "조지는 비틀즈의 기타리스트로써 지금까지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이게 웬 일이지?"라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클랩튼 본인도 "클랩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그라피티가 새겨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자인데, 그런 그의 생각에도 조지의 실력은 가벼이 생각하고 넘길 만한 무언가가 아니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8] 사실 록 밴드에서는 키스 리처즈피트 타운젠드, 지미 페이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타리스트가 보컬과 함께 메인이 되며 베이스와 드럼이 상대적으로 뒤로 밀려나는 경향이 강한데, 베이시스트가 기타리스트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오히려 기타리스트가 묻힌 비틀즈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폴은 존과 같이 리드 보컬을 했기 때문에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조지가 밀려날 수 밖에 없던 것. 비슷한 사례로는 베이시스트가 15년 넘게 밴드를 이끈 핑크 플로이드가 있는데, 이마저도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인 데이비드 길모어로저 워터스시드 바렛급으로 훌륭한 송라이터로 불린다.[29] 이러한 측면에서 링고 스타의 드러밍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본인의 연주실력을 부각하는 화려한 속주보다는 곡의 분위기에 적합한 정도의 연주를 채워넣는 식의 연주법이 링고 스타의 드러밍과 비슷하다는 것이다.[30] 이 곡의 경우 라이브에서는 그레치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했는데, 이건 또 이거대로 일렉트릭 기타 특유의 소리를 잔잔한 곡에 어울리게 연주해내서 호평받는다. 직접 들어보자. 팬들 중에는 이를 재즈 연주에 비견하는 이도 있을 정도.[31] 곡을 이끌어가는 리프 부분은 폴의 작품이고 덧붙인 리드 기타와 솔로 부분을 조지 해리슨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32] 힌두교를 믿기 이전에는 무종교인이었다. 어릴때에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가톨릭을 믿었지만, 커가면서 신앙심이 떨어지면서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와 같은 무종교인이 되었다.[33] 대표적으로 롤링 스톤스 최고의 명곡으로 불리는 Sympathy for the Devil은 브라질 전통 음악인 삼바와 서양의 록 음악을 결합한 곡이다.[34] 이를 반영해 컴필레이션 앨범인 1967-1970에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실렸다.[35] 이때 밀려난 곡이 훗날 Yellow Submarine 앨범에 실리는 'Only A Northern Song'이다.[36] Love You To, Within You Without You, The Inner Light,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Brainwashed 후반부의 챈트 등등.[37] 왼쪽 인물이다. 오른쪽이 조지 해리슨.[38] 위 연주 영상에서 쟁쟁한 뮤지션들 사이에 있는 젊은 조지 해리슨 같이 생긴 사람이 다니 해리슨이다.[39] 크리슈나교는 불임한 여성과의, 즉 아이를 갖기 위함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관계를 일절 금지하기 때문. 사실 이외에도 리버풀 출신 특유의 꼴마초 성향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40] 모린은 링고에게 자신은 링고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41] 'Layla'의 가사만 보면 에릭 클랩튼은 말 그대로 애걸복걸하고 있다. 결국 패티가 오랜 망설임 끝에 에릭의 구애를 받아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42] 여담이지만 왜곡은 서프라이즈 방송의 주특기이다. 그 이전에는 폴 매카트니의 사망설이 신빙성 있는 설인 것처럼 묘사했고 이후에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앙숙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방송했으며, 비단 비틀즈뿐만이 아니라 퀸과 닥터후 등도 왜곡된 내용들로 방송해서 덕후들의 분노섞인 욕을 먹었다. 오죽하면 서프라이즈 작가쪽에 소설가라도 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43] 한편 노엘 갤러거는 재주 있다고 호평했다.[44] 여담으로 리암 갤러거는 개인적으로 조지 해리슨을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 애초에 비틀즈 광팬으로 유명하니. 나중에 이 발언에 대해서 사과하긴 했다.[45] 참고로 이둘은 1943년으로 출생 연도도 같다![46] 다만 폴은 1975년 경부터 채식을 시작했고, 비틀즈 시절에는 좋아하는 음식이 로스트 비프였을 정도로 육식을 즐겼다. 존 또한 건강 상의 이유로 채식을 했지만 고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결국 1970년대 들어서는 허용 범위에서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으로 돌아섰다.[47] 존이 카리스마 있는 외모, 링고가 개구쟁이스러운 외모, 폴이 귀엽고 곱상하게 생긴 외모였다면 조지는 시원시원하고 굵은 정통적인 미남 외모의 소유자였다.[48] 대표적으로 Do You Want to Know a SecretCha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