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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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노버 왕조 제2대 국왕
조지 2세
George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_II_by_Thomas_Hudson.jpg

출생
1683년 10월 30일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하노버 호렌하우젠 궁전
(現 독일 니더작센 주 하노버)
사망
1760년 10월 25일 (향년 77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장례식
1760년 11월 11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아일랜드 왕국 국왕
1727년 6월 11일 ~ 1760년 10월 25일
하노버 선제후
1727년 6월 11일 ~ 1760년 10월 25일
서명
파일:조지 2세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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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명
조지 어거스터스
(George Augustus)
독일명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Georg August)
배우자
안스바흐의 캐롤라인[1]
자녀
프레더릭[2], 앤, 아멜리아, 캐롤라인, 조지 윌리엄, 윌리엄, 메리, 루이자
아버지
조지 1세
어머니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형제
조피 도로테아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조지 1세의 아들로 영국과 하노버 공국의 군주였다.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2. 생애[편집]


4세가 될 때까지 프랑스어만 사용했다가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는 영어이탈리아어도 배웠다. 특히 영어는 외국어로서 배운 것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능숙하게는 했으며, 이 점에서는 아버지 조지 1세보다 훨씬 나았다.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아버지 조지 1세는 그녀를 감금했다.[1][2] 그리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조지 2세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대신 로버트 월폴 등과 어울렸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헨델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헨델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메시아를 부를 때 할렐루야 부분에서 기립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지 2세는 아버지 조지 1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조지 2세의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콩가루 집안 중 망하지 않은 사례.

1705년 호엔촐레른 왕가의 방계 출신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결혼했다. 캐롤라인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으로 아이작 뉴턴 등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으며 조지 2세에게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기 전 재혼을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2세는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3]

그의 재위 기간의 가장 큰 사건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담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식민제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4년간 벌어진 이 식민지 쟁탈전은 평화조약으로 원상 복구되었지만, 상호 식민지 점령 속에 영국의 우세로 끝났다. 이를 그의 이름을 따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 1744~1748)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중에는 데팅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참고로, 몸소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다.

그러나 이런 영국의 행보를 얌체 짓으로 생각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의 역전으로 버림받은 영국은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이로 말미암은 1756년 7년 전쟁이 벌어져 프랑스, 스페인과 식민지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4] 7년 전쟁 역시 프랑스가 영국령 마요르카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맏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프레더릭이 조지 2세에 반대하던 토리당과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프레더릭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대신 프레데릭의 아들인 조지 3세 왕위에 오른다.

조지 2세는 1760년 10월 25일에 사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온 직후 바닥에 쓰러진 것을 시종이 발견해서 침대에 옮겼으나 곧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대동맥 박리였다.


3. 가족 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1세
(George I)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헤센-다름슈타트의 앤 엘레노어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팔츠의 조피
(Sophia, Princess Palatine of the Rhine)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첼레의 공녀 조피 도로테아
(Princess Sophia Dorothea of Celle)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George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헤센-다름슈타트의 앤 엘레노어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엘레오노르 마리 드미에 돌브뢰즈
(Éléonore Marie Desmier d'Olbreuse)
올브뢰즈 영주 알렉상드르 드미에
(Alexandre Desmier, Seigneur of Olbreuse)
바방드레와 생마르크의 자케트 푸사르
(Jacquette Poussard du Bas-Vandré et de Saint-Marc)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Prince of Wales)
1707년 1월 31일
1751년 3월 31일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슬하 5남 4녀[5]
1녀
오라녀 공비 아나
(Anne, Princess of Orange)
1709년 11월 2일
1759년 1월 12일
오라녜 공 빌럼 4세
슬하 1남 2녀
2녀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Amelia)
1711년 6월 10일
1786년 10월 31일

3녀
캐롤라인 공주
(Princess Caroline)
1713년 6월 10일
1757년 12월 28일

2남
조지 윌리엄 왕자
(Prince George William)
1717년 11월 13일
1718년 2월 17일

3남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
(Prince William, Duke of Cumberland)
1721년 4월 26일
1765년 10월 31일

4녀
헤센카셀의 방백비 마리아
(Mary, Landgravine of Hesse-Kassel)
1723년 3월 5일
1772년 1월 14일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
슬하 4남
5녀
노르웨이덴마크의 왕비 루이세
(Louis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1724년 12월 18일
1751년 12월 19일
프레데리크 5세
슬하 2남 3녀[6]


4. 여담[편집]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에 나오는 영국 왕이 바로 이 조지 2세이다. 대항해시대 말기 카리브해의 해적 토벌에도 열정적이어서 우즈 로저스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하여 나소에 자리 잡은 해적 공화국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던 전적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마지막 영국 왕이기도 하다. 이후의 왕들은 런던 교외의 윈저 성에 묻혔다.

영국 외의 지역에서 출생한 마지막 영국 왕이다. 이후의 왕들은 모두 영국 내에서 태어났다.

조지 2세의 장남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유복녀, 즉 조지 2세의 손녀 캐롤라인 마틸다는 15세 때 덴마크크리스티안 7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왕의 주치의였던 독일인 요한 슈트루엔제와의 불륜설로 인해 이혼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이후 23살의 나이에 성홍열로 독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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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데 조지 1세의 경우에는 한술 더 떠서 애첩이 여러 명이었는데, 이를 두고 아내가 항의하자 폭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애첩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아내를 폭행하기까지 했다고.[2] 당시 유럽의 시대상으로는 귀부인이 애인을 두는 것은 쉬쉬해야 할 부끄러운 비밀이지만, 귀족 신사의 경우 거의 공식적으로 애첩을 두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장되어서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거나 애첩이 없으면 고자 취급을 받았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공공연한 비밀' 정도였지 엄청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 건 아니었다. 너무 심하게 난봉꾼 노릇을 하거나, 상식선에서 본처를 존중하지 않고 혼인이 파탄 상태에 이르면 본격적인 명예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조지 1세의 아내 취급은 당대 기준으로도 정상적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다.[3] 다만 애인들은 있었다.[4] 77세 생일을 5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5] 조지 3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왕자, 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 왕자, 덴마크의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6] 스웨덴의 왕비 소피아 막달레나, 크리스티안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