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S. 패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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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George Smith Patton Jr.

출생
1885년 11월 11일
미합중국 캘리포니아 샌게이브리얼
사망
1945년 12월 21일 (향년 60세)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하이델베르크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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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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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7cm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09 ~ 1945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참전
멕시코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수훈십자장
은성 훈장
훈공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훈장 내역 정리 (영어)
서명
[ 정보 더 보기 ]
근무
제15기병연대
제8기병연대
제13기병연대
지휘
제304전차여단
제5기병연대
제2기갑사단
제2기갑여단
제1기갑군단
제2군단
제7군
제3군
제15군
종교
개신교(미국 성공회)[1]
배우자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어 패튼
(1886년 1월 12일 ~ 1953년 9월 30일)
자녀
장녀 베아트리체 스미스[2]
(1911년 3월 ~ ?)
차녀 루스 엘렌
(1915년 2월 ~ ?)
장남 조지 패튼 4세[3]
(1923년 12월 24일 ~ 2004년 6월 27일)
손주
손자 조지 패튼 5세
손자 로버트 H. 패튼
손녀 헬렌 패튼
손자 벤자민 패튼
외손자 존 워터스
외손자 조지 P. 워터스
친척
사위 존 K. 워터스
(1906년 12월 20일 ~ 1989년 1월 9일)


1. 개요
2. 일생
2.1. 출생과 성장
2.2. 멕시코 내전과 제1차 세계 대전 활약
2.3. 전간기의 행적
2.4. 제2차 세계 대전 활약
2.4.1. 아프리카 전선
2.4.2. 이탈리아 전선
2.4.3. 서부전선
2.5. 종전 이후의 행적
2.6. 사망
3. 평가
4. 여담
4.1. 괄괄한 성격
4.2. 의외의 소양
4.3. 기타
5. 관련 인물들
6. 어록
7. 미디어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 시칠리아 전선, 유럽 서부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장군. 전간기 미군의 기동전과 전차부대 운용 교리를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자 미군 최초의 전차 부대 지휘관이다. 그 공로로 30년간 냉전기 미군 주력 전차 자리를 차지했던 패튼 전차 시리즈의 작명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일생[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생도들 차렷! 당황하지 마라. 지진은 곧 끝난다."

사관생도 시절,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황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생도들 앞에 제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서 한 말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 리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다. 미국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버스, 로버트 에이첼버거, 윌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상급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오죽하면 별명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게 별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이다.

졸업하고 소위이던 시절인 1910년에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어 패튼(Beatrice Banning Ayer, 1886~1953)과 결혼했다. 전쟁에서 지랄맞은 명장, 개차반 장군이라는 멸칭으로 유명했으나 가정에선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었다. 때문에 패튼이 죽고나서 미망인 베아트리스는 패튼에 대한 영화 제작을 거절했는데, 보나마나 남편이 전쟁광으로 날뛰는 걸로 만드는 꼴을 볼 수 없다는게 이유였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랄맞았기 때문에 1915년 졸업생인 오마 브래들리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배인 이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졸업성적은 103명 중 46등이었으며 기병 병과로 임관했다.


2.2. 멕시코 내전과 제1차 세계 대전 활약[편집]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존 조지프 '블랙 잭' 퍼싱 장군. 패튼이 멕시코 내전에서 산적(Bandito) 두목(반란군 장군)의 시신을 본네트에 매단 채 복귀한 걸 보고.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1] 육군 준장의 부관으로 참전, 차량으로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판초 비야의 측근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일약 유명해졌다. 이 행적이 미군 역사상 최초의 차량을 통한 공격 기록이라, 패튼은 의도치 않게 미군 기동전 역사의 첫 장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된다. 전차는 초창기에 보병부대에 배속되어 진격을 돕는 용도 정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그가 배속되었던 사단의 여단장이 더글러스 맥아더.[2]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된다. 주로 사용한 전차는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르노 FT였다.

1차대전 참전 중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적의 기총소사가 강력해서 휘하 병사들은 물론이고 패튼까지 진격할 엄두를 못 냈다. 그때 패튼은 하늘 너머에서 자신의 전사한 선조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았고(...) 용기를 내어 "또 한 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며 돌격했다.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이때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도 계속 지휘를 했는데 이 전상으로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고, 또 전국에 이 에피소드가 보도되며 일약 유명세를 탄다.


2.3. 전간기의 행적[편집]


1919년 그는 임시 대령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차 대전 종전 후 그를 늘 높이 평가해주던 퍼싱 장군이 퇴역한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내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받았다. 불같은 성격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적 태도는 주변사람들과의 마찰을 항상 불러일으켰으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도 포기한 상태라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전쟁광이란 타고난 성격이 전간기의 군축 분위기와는 상극인지라 별 수 없었다. 거기에 여러차례 음주사고에 불륜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단 것에 광분하여 섭식장애 증세까지 보여 건강까지 망치며 상층부의 골치를 썩였다.

1922년 있었던 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당시, 해물 알러지로 고생중에도 경찰과 군인들을 지휘, 사람들을 구조했다.

게다가 사생활에 있어서도 취미승마요트 등 돈이 많이 드는 귀족 취향의 것들을 즐겼는데, 세계 대공황 시기에도 그 짓을 하고 다녔다. 그쯤 되자 상관이든 동료들이든 부하들이든 누구나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얼마나 승마를 좋아했느냐 하면, 복장 규정을 무시하고 전투복 하의 대신에 기병 병과을 타는 인원 이외엔 착용이 금지되어 있는 육군 기병용 승마 바지를 입고, 손에도 승마용 채찍을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기병 병과 출신이기 때문에 기병 피복을 입는 것이 아무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피복은 자신의 병과가 아니라 근무지와 직책 등에 따라 규정된다. 당연히 기병 병과라고 아무 때나 기병 피복을 입을 순 없다. 이는 항공 조종 병과 출신 장교가 자기 직책이 뭐든 비행복을 아무 때나 입을 수 있다는 주장과 동일한데, 조종 출신인 공군참모총장의 일상 근무 복장이 약정복 혹은 전투복인지 비행복인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3] 무엇보다, 패튼은 자기 부하들에게 전장에서도 장교 계급장을 가리지 못하게 하는 등 FM을 강요했으면서, 기병 피복 착용 뿐 아니라 자신의 방탄모에 4성 계급장도 규정과 어긋나게 멋대로 ㅗ자 모양으로 붙이고, 개리슨모 계급장도 직선이 아닌 사선으로 부착하는 등 내로남불이 심했다.[4]

1931년 일명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 당시 상당한 오점을 남겼다. 세계 대공황 시기 연금 지급을 요구하는 제대군인 시위대에 전차와 보병을 착검돌격을 시켜서 무려 사상자 100여명이 나온 것.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대선에서 참패했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예편 후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떠났다. 말년까지도 패튼은 이 사건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시 제대군인 시위대 중에는 1차대전 때 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패튼을 구해준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장병도 있었다. 패튼은 이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5]


2.4. 제2차 세계 대전 활약[편집]



2.4.1. 아프리카 전선[편집]


"(제리 놈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부하들에게 한 말.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갑사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한다. 시디 부지드,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최악의 졸장 로이드 프레덴달 밑에서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과 기타 연합국에게 조롱을 받게되자 열불이 뻗칠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자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악바리 근성이 넘쳐나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긴다. [6] 패튼은 프레덴달 밑에서 정신 못차리던 오합지졸들을 무자비하게 갈궈서 카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준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들을 다수 이뤄낸다. 그러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7] [8]

2.4.2. 이탈리아 전선[편집]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한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간으로 조공으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의 지휘부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든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힌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9]

하지만 후술하는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하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해임되어 한직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 때 연합군 첩보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보조하기 위한 기만 작전인 포티튜드 작전을 실행하면서 파 드 칼레와 가까운 도버에 가짜 사령부, 대량의 디코이 전차와 상륙정, 빈 상자 등을 배치하는 한편,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군급의 가짜 부대인 미 육군 제1집단군(First United States Army Group)을 만들어내고 그 지휘관 자리에 패튼을 임시로 임명하여 가짜 병력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패튼 본인의 입장에서 이런 행위는 처벌 목적의 시간 때우기일 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패튼을 최중요 인물로 바라보던 독일 정보부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라고 독일군이 결론내렸을 정도였다. 패튼의 존재감이 연합군의 철저한 기만 작전과 제대로 시너지를 일으켜서 D-Day 당시의 성과를 내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2.4.3. 서부전선[편집]


"그럼 우리가 저 다리(레마겐의 철교)를 폭파해버리기라도 해야겠군."

― 레마겐의 철교를 주워먹은 후, 라인 강 도하작전을 망친다고 영국군이 항의하자 한 말

이후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내 패주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진격하며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패튼이 보직해임되어 있는 동안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묶여서 소모만 가중되는 중이라 패튼을 복직시킨 것이다.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마냥 가는 곳마다 독일군을 격파하면서 질주했는데,[10] 보급부대가 못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린 것'이라고 취급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나가고 뒤따라오는 보병포병이 아까의 그 적군과 싸운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튼의 기갑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부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어나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아닌 마켓 가든 작전. 이를 두고 히스토리채널에서는 몽고메리가 떼를 써서 패튼의 보급을 가로쳤다고 표현한다. 이는 말로는 쉬워보이지만 실제 사용 조건은 까다로운 전술이다. 일단 상대가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아군 기갑전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선에 압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병과 마찬가지로 기갑전력이 충격력을 잃으면 적진 한가운데서 포위되게 되므로 충분한 보급과 휴식, 그리고 예비전력이 필요하다. 또한 우회한 적군을 보병과 포병이 무너뜨리지 못하면 보급로가 위협받는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사령관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시찰을 나가고,[11]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올라오는 정보 보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닥돌하는 닥돌 바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헛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시찰을 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와는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패튼이 어느 독일군 장교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그 독일놈 모가지를 뽑아서 몽고메리 X구멍에 쑤셔버릴 테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이런 시나리오가 자주 펼쳐졌다고 한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할 말을 잃는다.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동을 멈추었고 그 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의 독일군과 10~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다.[12][13]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이해서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한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동을 보였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다. 당시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격했던 독일 기갑대장 만토이펠과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일전에서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의 공세를 제대로 꺾어버리는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고 이후 아르덴 대공세의 여파로 서부전선 독일군이 약해지자 3월 23일에 당시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라인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이 당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반격 작전을 진행할 당시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항공 지원도 원활하지 않자, 패튼은 갑갑한 마음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도문을 작성한 후 다음날인 12월 23일,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고.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도 묘사된 실화이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인 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린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간에 라인 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못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 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다. 이건 라인 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샷도 찍었다.[14]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떨던 몽고메리는 멍때려야 했다.[15]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봐 노심초사했고...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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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진급 후의 사진. 철모에 달린 계급장을 보면 대장용 계급장을 새로 붙이지 않고 기존의 중장 계급장 위에 별 하나를 덧붙여 사진의 형태로 만들었다.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무뎌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낸 듯하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로 가기 위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맥아더의 측근과 접촉했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듣고 포기했으며, 결국 맥아더의 육사동기인 스틸웰이 임명된다.


2.5. 종전 이후의 행적[편집]


베를린을 돌아보니 우울한 기분이 들었소. 우리는 괜찮은 한 민족을 몰살하고 그들을 소련의 공산주의 야만인들로 대체하려 하고 있소. 이제 유럽은 전부 공산주의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오. 듣자하니 베를린을 점령하고 1주일 동안 소련놈들은 도망치는 여자들은 쏴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여자들은 모조리 겁탈했다고 하오. 만약 정부가 허락했다면 소련군 대신 내가 베를린을 점령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오.

1945년 7월 21일자 부인에게 보낸 편지


유럽에 남은 제대로 된 사람들은 독일인이 유일하다. 소련과 독일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독일을 택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31일자 일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독일을 파괴하여 소련이 집어 삼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945년 9월 2일자 일기


난 솔직히 이 무슨 전범재판이니 하는 것들에 반대하오. 이것은 우리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벌이는 일이오. 나는 또 독일군 포로들을 외국에 노예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오. 그 곳에서 그들은 혹사당하다가 굶어죽을 게 분명한데 말이오.

1945년 9월 14일자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민간정부회의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왔소. 만약 지금 우리가 독일인들에게 하고 있는 짓이 ‘자유’라면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할 것이오. 어떻게 미국인들이 이렇게 낮은 곳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오. 나는 이 모든 일이 유대인들 때문이라 확신하오.

부인에게 보내는 또다른 편지

패튼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을 매우 혐오하였으나 종전 이후 모든 힘을 잃고 무력해진 독일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배려로 미국 워싱턴 정계와 자주 대립했다. 또한 패튼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고, 반유대주의자였다.[16]

나치당미국 민주-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미국 워싱턴 정계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소련을 매우 싫어했다. 전직 나치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 나치 당원이었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한테 맡기란 말이냐?"고 항변했다.베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족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소련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프레드 아이어 주니어의 <Before the Colors Fade: Portrait of a Soldier George S. Patton, Jr>에 따르면, 1945년 9월, 패튼의 2번째 베를린 방문시에 소련 측에서 4개 연합국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하였다. 이때 패튼 옆에 앉아이 었던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행진하는 소련군의 신형 중전차들을 가리키면서 자랑했다.

친애하는 패튼 장군. 저 전차들이 보이십니까? 저 전차들에는 포탄을 무려 1마일(약 1.6 킬로미터) 바깥으로까지 쏠 수 있는 강력한 주포들이 장착되어 있소.

그러자 패튼은 매우 적대적으로 반응했다.

아 그렇습니까? 친애하는 주코프 원수, 내가 한가지 알려드리죠. 만약 저는 제 포수들 중 누구라도 당신네 소련 사람들이 우리 측에 700야드(약 640미터) 안까지 접근하기 전에 쏜다면 적전도주죄로 군법재판에 처넣어버릴 겁니다.

책에 인용된 팻 멀리-스미스의 회고에 따르면 주코프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고 하며, 1천쪽에 달하는 방대한 주코프 회고록에서도 패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원수, 원수의 그 배때지를 당신들이 자랑하는 사거리 밖에서 내가 쏘아서 뚫어버릴테니 주둥이 닥치시고 우리의 감시망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진주한 곳에서 소련군을 피해 항복해온 국방군 2개의 사단과 친위대 1개의 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훈장을 받은 독일 장교들이란 장교들은 불러다가 같이 밥까지 먹자, 빡친 소련군이 연락장교를 보내 항의했다.[17] 그러자 패튼은 그 연락장교의 항의에 빡돌아서 "니놈 빨갱이 새끼의 궁둥이를 내가 직접 차서 이 군영에서 쫓아내겠다!"고 난리를 쳤고 소련군 연락장교는 서둘러 패튼의 군영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도 소련군에게 으르렁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련군 병사들이 추는 춤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던 패튼은 소련군 장군 미하일 카투코프가 건배를 제안하자 "댁이나 어떤 러시아 개새끼들과도 술 마실 생각 없다."라고 빈정대고 하얗게 질린 통역가에게 그대로 번역하라고 지시한다. 통역을 들은 카투코프 장군이 노해서 "당신도 개새끼요."라고 맞받아치자 패튼은 씩 웃더니 그럼 개새끼 대 개새끼로 건배하자고 승낙한다.

그 외 앞서 소개한 독일 패잔병들 문제로 욕먹은 소련군이 아이젠하워에게 불평하자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에게 패튼을 좀 타일러서 독일 패잔병들을 해체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온 브래들리에게 패튼이 한 말이... "난 이 독일 나치놈들이 좋네! 그들은 진정한 전사란 말이야. 이놈들과 함께 아이젠하워한테 찡찡거리는 소련 놈들을 부숴버리겠어! 이제 우리의 적은 소련이란 말씀이야!"라고 말했고 브래들리는 도청을 당하고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사실 골수까지 기병 정신인 패튼이, 전격전을 상징하는 나치 독일군에 우호적인 게 그렇게 이해 못할 사안은 아니다. 결과지상주의로써 흑인들을 차별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패튼이란 사람은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보다도 오로지 기병적인 기동 중심의 군인 마인드인 사람이라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도 나치의 만행에 치를 떨어 단죄하려 했다기보다는 상부의 지시 때문에 군인답게 복명한 것에 가까우며 보너스 군대 사건처럼 그의 반공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것도 이런 대우에 한 몫 했다.

결국 이 문제를 두고 1945년 9월 28일 아이젠하워와의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10월 7일 미3군 사령관에서 해임당했다. 또한 아이젠하워하고는 완전히 돌아섰다.


2.6. 사망[편집]


라인 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만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12월 9일. 패튼은 1939년형 캐딜락을 타고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 운전자는 호러스 우드링(Woodring, Horace Lynn)이라는 일병이고 뒷좌석 왼쪽에는 호바트 게이 소장[18]이 탑승하고 뒷좌석 오른쪽에 패튼이 타고 있었다. 차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앞에서 트럭이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자 운전자는 급하게 핸들을 꺾어서 피하려고 했지만 트럭이 차를 들이받으면서 교통사고가 났다. 운전수와 동승자는 찰과상만 입었지만 패튼만 뒤로 튕겨나가[19]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다 한다.

사고 당시 패튼은 의식이 있어서 게이 소장에게 손을 만져보라 했고 감각이 없자 "이거 죽는 방법 치고 참 더럽군"(What a hell of a way to die)이라 했다. 곧바로 군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되어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병원에서 수면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색전증이다. 전쟁이 끝난지 고작 7달 만이었다.[20] 사망후 그의 유언대로 룩셈부르크에 있는 벌지 전투에서 전사한 제3군 미군 묘지에 묻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안한 것을 싫어하고 평안하지 않은 것, 즉 전쟁을 미친듯이 좋아했고 그 전쟁에서 미친듯이 싸워 승리했던 자의 최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워낙에 유별난 삶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죽음에 관해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게 주장되기도 했고 암살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8년작 Brass Target(한국판 제목: 암호명 S 비밀지령).[21]

패튼이 죽고 그의 유품을 치울 때 패튼이 애지중지하던 불테리어 수컷 윌리가 슬퍼하며 그의 유품 곁에 드러누워 먹지도 않고 오랫동안 있었는데 "사람에게는 욕먹어도 기르던 개에게는 자상했다."라는 말도 나왔다.

패튼의 운전기사 우드링과 트럭 운전사 로버트 톰슨(Robert L. Thompson) 모두 조사를 받고 부주의로 유죄 판결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


3. 평가[편집]


호평과 악평이 교차하지만, 어쨌든 그는 전차를 이끄는 지휘관들의 모범이 된 명장이고, 극도로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맹장이었다. 그래서 진정으로 미국스러운 장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막무가내로 나갔던 행보 덕분에 시대를 잘못 선택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차라리 19세기 프로이센기병 장군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고.

조지 패튼은 철저한 군인이었다. 병사들 뿐만 아니라 하위 장교들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장성들을 한계까지 밀어붙여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추축군을 제압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후에는 아르덴 공세마저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독일의 전략적인 군사 전개 능력을 완벽히 파괴해버리는 등, 군사적 능력은 굉장히 탁월했다. 그러나 푸른 눈의 쇼군이란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가졌던 명장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22]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후 독일 미 군정에서 나치 당원들에 대한 아무런 조사 없이 채용하거나 전쟁 당시 연합이었던 소련에 대한 호전적 발언을 아끼지 않고 도리어 친나치적인 행보를 보이는 큰 실책으로 해임당하는 등, 정치적 능력은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 정치적 무능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장 미군에서 해임당하였으며, 쓸쓸한 노년을 보낼 틈도 없이 1945년, 전쟁이 끝난 바로 그 해에 사망했다.

미 육군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개발된 M46M47, M48 전차에 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공로를 기렸다.[23] 워낙 유별난 지라 아돌프 히틀러조차 그가 참전하기 전에 성격 등을 알고 있었으며 "카우보이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 여담[편집]



4.1. 괄괄한 성격[편집]


그 더러운 성질머리의 소유자답게 부하들로부터는 매우 두터운 인망을 얻었는데, 2차 세계 대전 회고록을 보면 타 부대에서는 존경을, 직속 부하들에게는 미움받은 상관.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이지만 어쨌든 전쟁에서는 늘 승리를 거두게 한다"는 게 부하들의 총평.

그는 전투를 피하는[24]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내 부대에 너 같은 겁쟁이는 필요 없다! 꺼져 버려! 라고 하면서 폭언을 퍼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용감하게 싸워서 큰 전공을 올린 부하들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혈질이면서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계급이 아닌 군관으로써 굉장히 귀족적인 인물이었던 셈. 겁쟁이를 경멸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아낌없이 칭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부하들을 쉬지 않고 독려한 것도 그가 기갑부대를 현대판 기병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튼의 성향은 훗날 미디어에도 반영되어, 조지 C. 스콧 주연의 전기 영화인 <패튼> (국내명: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슈타이거 소령이 자신의 상관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을 평가하면서 "그는 전쟁 역사가이며, 현대에 환생한 기사입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한 야전병원에 직접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일일이 살펴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군 사령관이 직접 그렇게 했다. 군의관헌병이야 의전으로 죽어나겠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은 이 괴짜 사령관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미 3군은 똘똘 뭉쳐 독일군을 상대로 용명을 떨쳤다. 또한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았던,[25] 당시 미군에서 몇 안되는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던 장군이었다. 그것도 남부 상류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대에 인종평등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그냥 철저한 결과지상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26]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은 끝끝내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바로 패튼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부상병 구타 사건이었다.[27] 시칠리아 공격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3일, 제15임시병원을 방문하여 병문안을 위해 사병들의 침대를 일일이 돌던 패튼의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던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계속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측은감을 표시하던 패튼은 그 병사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문제의 부상병은 제1사단 소속으로, 전쟁 전에는 카펫 전문가로 일하던 인디애나 청년이었는데 패튼에게 전쟁공포증을 호소하며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패튼은 이걸 겁쟁이의 비겁한 변명으로 간주했고 격노하여 즉각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다음에 그를 천막에서 끌어내서 등을 걷어차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겁쟁이 새끼야, 네놈은 다시 전선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 사실 1차 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나 PTSD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다. 지휘관들은 그런 증세를 보이는 이들을 그저 겁쟁이로 취급할 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한 뒤로 군의관들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변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했으며,[28] 사방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장공포는 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개전전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아 비숙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던 영국군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당시의 영국군과 같은 처지임에도 상대적으로 참전 기간이 짧아 직접적으로 PTSD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다만 동맹국인 영국의 전훈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엔 영국군이 겁쟁이라서 저런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벌였을 정도.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시점이 되면 패튼 같은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금기시될 정도까지 인식이 바뀌긴 했다. 그리고 장군병사를 폭행하는 것은 당시 미국 군법에서도 군법회의에 즉각 회부되어야 할 중죄였다.
  •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8월 10일에 제93 임시병원을 방문한 패튼은 또 다시 (겉보기에는) 멀쩡한 병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병사에게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면서 겁쟁이는 쏴 죽여야 한다고 난동을 부렸으며, 거기다 군의관까지 호출해서 "저 놈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내가 직접 영창에 처넣어 주겠어!"라고 소리친 후 곧장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전쟁공포증 같은 것은 다 유대인 놈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까지 했다.[29]
이후 그 사실이 곧 연합군 총사령부로 전해지면서 아이젠하워 원수는 패튼의 행동에 분노하였으나, 신뢰하는 부하이자 아끼던 사관학교 선배인 패튼의 구명을 위해 모든 종군기자들에게 정보 관제를 신신당부하는 한편 패튼에게도 그 병사에게 직접 사과를 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패튼은 메시나 점령의 기쁨[30]을 제쳐 두고 문제의 병사들은 물론, 임시병원의 의료진 전원과 제1보병사단 전체에게 사과해야 했다. 당연히 제1보병사단 병사들에게 패튼은 철천지 원수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병의 신분으로서 상관에게 강력히 항의하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과를 조용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그저 실수라고 받아들이고 순순히 보도 자제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곧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 이번의 피해자는, 시칠리아 전투의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서 참호족을 얻어 입원 중인 병사였다. 그 역시 당장 겉보기에는 크게 아파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입원을 하고 있었기에 어김없이 패튼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이 병사도 장난이 아닌 게, 적지 않게 분노했는지 자신의 앞을 다시 지나가던 패튼을 향해 "저는 1주일 넘게 더럽고 썩어들어가는 망할 전투화를 신은 채로 흙탕물로 가득찬 씨발놈의 참호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장군님."이라며 그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쌍욕섞인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분명히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은 패튼이 먼저 사과했지만, 이미 그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져 공론화된 상황이었고 거기에다가 기자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이전에는 함구하고 있었던 다른 폭행 사건들까지 몽땅 폭로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전국에서 패튼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가 쓰여졌으며 아예 그를 퇴역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상술된 PTSD 관련 건은 당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라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지만, 참호족염은 패튼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참호족염으로 고생했거나 발가락을 잘라야 했던 전상자들도 많았던지라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에는 또 다시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하였지만, "이제 조지가 또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면 난 그를 자를 수밖에 없네. 나도 언제까지나 뒤치다꺼리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야."라며 부관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추가로 이 사건 때에는 군 경력상으로는 패튼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고, 아직 살아있었던 퍼싱 원수도 공개적으로 패튼을 비난하여 둘이 이후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었다.
  • 그 후에도 이탈리아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또 한 번 아이젠하워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작전 당시에 예정되었던 두 번째 야간 강하 작전이 해안의 대공포 사수와 해상의 지원 함대에게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팀킬이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원래 해당 공수작전에 따르면 2,300명이 강하할 예정이었는데, 이 팀킬로 전사한 사람만 400명, 중경상자까지 포함하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강하 작전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대공 사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패튼이 강하 작전에 참여할 82공수사단과 수송기 조종사들에 통보하기를 "만약 지상이나 함정이 포격을 하거든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며, 절대 귀관들을 격추시키려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책임 소재를 파악하고 귀관이 직접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귀관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투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미군의 삽질에는 아이젠하워의 책임도 큰지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사실 보직 해임 시기 아이젠하워는 그를 미국 본토로 전출시키려 했으나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 부대 하나 없는 장군으로 허송세월해야 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 진급하여 나중에는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진다.


4.2. 의외의 소양[편집]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근대 5종 경기 선수로 참가해 300m 자유형 수영에서는 37명 중 6위를, 에페 펜싱에서는 29명 중 3위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경마에서는 퍼포먼스는 완벽했으나 시간이 약간 뒤쳐져서 3위를, 4킬로미터 크로스컨트리 경주에서는 골을 45m 남겨두고 걸어들어올 정도로 체력이 소진돼 15명 중 3위를 차지했다. 권총 사격에서는 뛰어난 사격실력으로 소문났음에도 불구하고 32명중 20위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사격용 권총으로 .22 구경을 사용할 때 혼자서 군의 제식 구경인 .38 구경을 사용해서 발생한 문제였다는 주장이 있다. 사격을 할수록 먼젓번에 맞은 구멍에 겹쳐 맞으면서 사격지에 탄착 구멍이 확대되다보니, 나중에 쏜 탄이 벌어진 구멍을 흔적없이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패튼 본인의 주장이었고, 심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 발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판정했다. 전문가들은 아마도 심판의 판정이 옳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패튼의 주장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현대 사격 대회의 표적은 이 부분을 보완해서 운영되고 있다.

그 외에는 개인 취향답게 검술에도 꽤나 능통해서 세이버 검술서를 저술하였다. 검술 스타일이 본인의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베기나 흘리기 같은 기술을 버리고 오직 직선적인 찌르기만 존재한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도 거의 찌르기 위주로 만들어진 직도 세이버이다. 이미 올림픽 이후 유럽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 육군 기병학교의 검술 교관과 교류를 가졌고, 1913년에는 아예 육군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에 가서 검술을 배웠으며, 당연히 프랑스어도 매우 잘 했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가 미군 기병대의 제식 세이버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 세이버는 그래서 일명 '패튼 세이버'로도 불리며, 세계 최후의 대량생산된 기병도이다. 중세에 태어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인물.

시를 쓰기도 했는데, 특별히 문학적으로 뛰어나지는 않다. 자신의 전생들은 선사시대, 고대, 중세, 근대의 전장에서 싸우다 스러져간 전사였다는 내용이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나름 먹혔을 듯 하다.#


4.3. 기타[편집]


  • 패튼은 본인이 기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갑 병과의 전면적인 대두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던 인물이었다. 요즘이야 기갑이 현대전에서의 기병 역할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2차대전 초기만 하더라도 미 육군 기병대가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썰어버린 전적이 있는 등 기병대가 아직 활약할 수 있다고 믿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기병 출신 장교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이 기갑이라는 신종 병과를 기를 써가며 사사건건 훼방 놓고, 심지어는 아예 사장시킬 듯 달려들던 경우도 있었다.[31] 1차 대전 시절의 전차가 성능 문제로 크게 활약하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참호 역할만 했으면서도, 인적/물적 자원은 배로 먹었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이 기갑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고급 장교들은 기를 써가며 미 육군 기갑부대들을 살리려 했고, 패튼 또한 1차대전 당시 미 육군 최초의 기갑부대장으로서의 경험이 꽤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이런 이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강력하게 기갑 병과를 옹호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갑 병과를 지키지 않았으면 우리가 아는 2차대전기의 기계화된 미군은 보기 힘들었을 거다.
  • 상술된 각종 기행 때문에 꽤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상술한 승마 바지 및 승마 부츠, 별이 이상하게 배열된 철모[32]와 더불어 그가 차고 다녔던 권총도 유명한 요소다. 권총은 콜트 싱글 액션 아미 리볼버를 차고 다녔는데,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은장 도금에 상아 손잡이가 달린 물건이었다. 거기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상아 손잡이가 달린 스미스 & 웨슨 M27 리볼버도 같이 차고 다녔다. 그러니까 장군이 서부극에 나오는 무법자같이 전장에서 쌍권총을, 그것도 고급품으로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괜히 카우보이 장군이라는 별명이 나온 것이 아니다.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패튼의 동상에도 반영되어 있다.
파일:external/cdn5.viralscape.com/Donald-Trump-Looks-like-George-Patton.jpg
파일:ibjKXsn.png
  • 도널드 트럼프과 닮은 외모로도 화제가 되고 있다. 패튼은 생전에 '환생', '윤회'(reincarnation)에 대해 말하곤 했다는데 공교롭게도 패튼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1945년이고. 트럼프가 태어난 해는 1946년이기도 하다. 괄괄하고 공격적인 성격도 둘이 비슷하다. 트럼프 본인도 패튼 장군을 좋아하는걸로 보인다. 대선 출마 선언 때도 미군내에서 패튼이나 맥아더 같은 장군을 찾아서 IS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고(45분 경 참고) 힐러리 클린턴과의 대선 토론 때도 힐러리가 모술 내 IS 토벌 작전 계획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보고 IS 수뇌부들이 이라크군의 모술 공세 준비 기간 동안에 언론을 보고 대대적으로 탈출했다며 패튼 장군이 이 광경을 봤으면 무덤에서 통곡했겠다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 2차대전에서 같이 뒹군 후배들(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과 같이 탈모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모자 벗고 찍은 사진이 거의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모자 벗고 그린 초상화를 보면 머리가 많이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탈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던 듯하다. 상기한 대 소련 관련 돌출행동 때문에 조지 마셜이 그의 옷을 벗기려 할 때 아이젠하워가 각오하고 그를 지켜주어 유임되자 감동을 먹고 펑펑 울었는데, 울다가 철모가 바닥에 떨어져 벗겨진 머리가 드러났다. 그러자 울던 걸 멈추고 철모를 주워 고쳐쓴 뒤 다시 펑펑 울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이젠하워는 대놓고 폭소했고, 마셜도 소파 위에 누워서 빵 터졌다고 한다.

5. 관련 인물들[편집]


한국전쟁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던 낙동강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1.4 후퇴 직후까지 유엔군 주력을 지휘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20군단장으로서 그의 부하였다. 패튼만큼이나 저돌적 지휘 스타일로 유명했던 그가 옛 상관과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우연. 이후 패튼과 같이 그의 이름도 전차에 붙여졌다.

역시 한국전쟁에서 월튼 워커매튜 B.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을 역임한 제임스 밴 플리트도 1945년에 패튼 휘하에서 제3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 장악 이후 루르 포위전의 주력으로 활약하여 패튼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럼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패튼의 제3군 예하의 주력 기갑부대 중의 하나인 제4기갑사단 소속 제37전차대대장으로 맹활약했다. 에이브럼스는 그 이름이 후계 주력 전차로 붙어 2022년 현재 반세기 가까운 미군 주력 전차 대명사로 불리운다.

그와 붕어빵처럼 외모가 닮은 아들 조지 패튼 4세도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전차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는 11기갑수색연대장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소장으로 전역한다. 베트남에서 3년동안 싸울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온후하고 부하들을 잘 챙겨주는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었다.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막내 손자인 벤자민 패튼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기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첫째 사위인 존 K. 워터스 역시 군인이었는데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태평양 방면에 있는 미 육군의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베아트리체 스미스와의 사이에서 슬하 2남을 두었다.


6. 어록[편집]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이제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이것 한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30년 뒤,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면서 "응, 할애비는 루이지애나에서 삽으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지,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해주거라! "아가, 네 할애비는 위대한 3군, 그리고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맹하게 진군했단다"라고 말이다!

1944년에 유럽 침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미 제3군 장병들에게 한 연설인데, 초반에는 차분한 논조로 "제군과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이다" 같은 멘트를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해버렸다고 한다. 워낙 인상적이었는지 패튼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패튼이 스스로를 빌어먹을 개자식이라고 지칭한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냥 쏴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멍청한 짓일 뿐더러 잘못된 일이다. 그러기보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사실을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나라를 위해 죽지 마라, 적들이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라.[33]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좋은 계획이 다음 주에 실행할 수 있는 완벽한 계획보다 낫다.[34]


신께서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멍청한 놈도 스스로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 놈은 다른 머저리들이 제놈들의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듦으로써 이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지시하지 마라. 뭘 해야 할지만 지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창의력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병사의 눈은 예지로 빛나야 하며 완전히 전투에 열광케 하여 왕성한 기백과 공격정신으로 승리의 길로 전진토록 하라.


공격해오는 적 전차에 성난 늑대같이 달려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포와는 타협하지 말라, 아니 상의조차도 하지 말라.


공격하라, 공격하라, 피로가 극심할 때까지 공격하라. 피로가 극에 도달해서 쓰러졌을 때 바로 그때 다시 공격하라.


휘발유가 있는 한은 어디든지 간다.


내 부하들은 벨트라도 씹어먹을 수 있지만, 전차연료가 필요하단 말이다.


두려움은 1분간 참으면, 용기가 된다.


전쟁에 비하자면 인간이 이룩한 다른 것은 하찮은 것이다. 나는 전쟁이 좋아 견딜 수가 없다.


내게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지옥이다.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자로 살고 싶다.


나를 이끌든지 따르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내 길에서 비켜라.


상관에 대한 충의는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부하에 대한 충의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빈번히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35]


용기는 1분을 더 버티게 하는 두려움이다.


용기는 잠시 동안 공포를 억누르는 것이다.


전쟁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이다.


항구적인 평화는 쓸데없는 꿈이다.[36]


"내 부하들이 저 따위로 쫄보 새끼처럼 싸운다면 내가 직접 내 부하들을 조졌을 거요."[37]


"이거, 죽는 방법 치고 참 더럽군."[38]



7. 미디어[편집]


  • 특유의 독특한 인상 덕에 맥아더와 더불어 2차세계대전/디젤펑크 당시 미군 장군이나 미국을 모티브로 한 세력의 장교, 장성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다. 괄괄한 성격에 별단 철모 쓴 양반이라면 거의 대부분 이 사람 패러디.

  • 여러 번 영화화될 뻔 했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부인이 죽고나서도 자녀들이 여전히 반대했고 결국 20년이 넘게 지나서야 유족들 동의를 얻어 1970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명작《패튼 대전차군단》이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원작에서 얼 헤일 병장(Sgt. Earl Hale)에 관한 일화가 언급이 되는데, 중대원 한 명이 부상으로[39] 목에 구멍을 내 숨을 쉬기 때문에 넥타이를 매지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열식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못 하고 참가했는데, 패튼이 이걸 보고 욕을 퍼부은 모양. 그 병사는 당당히 앞섶을 풀었고, 패튼은 머쓱한 표정으로 지나갔다는 이야기. TV판에는 패튼이 바스토뉴에 고립되어 있던 101공수사단을 구출했다는 자막 해설과 조 토이와 윈터스가 "우리 101공수에겐 그딴 도움 전혀 필요없었다."고 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 마피아 2의 주인공 비토 스칼레타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펼친 후 1달 간의 휴가를 받고, 엠파이어 베이로 돌아와 친구인 조 바바로에게 패튼 장군에게 직접 훈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의 캠페인 모드에서 사자왕 리처드, 이순신과 함께 3대 미션 주인공으로 나온다.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독일 패망까지 주요 전투들을 패튼의 시점으로 재현했는데, 패튼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주요 전투들을 잘 살렸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하츠 오브 아이언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 남부연합의 꿈과 희망으로 등장한다. 그러다 HOI4에선 공격이 처음부터 7이 찍혀있는 탑신병자스러운 스탯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나머지 능력치도 안좋은게 아니다. 여러모로 미국 최고의 장군이다. The Road to 56 모드에서는 처음부터 대놓고 공격대장으로 쓰라는 듯이 스탯이 편성되어 있으나, 히든 특성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 달려 있기에 사실상 원수로 진급은 불가능하다. 군병원에서 부상병들을 해코지한 일로 일선에서 물러난데다 최종 계급도 대장이었기에 나온 고증인 듯.

  • 알파캣이 그린《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 등장한다. 괄괄한 성격으로 부하들을 몰아붙여 독일군을 분쇄하는 용장으로 묘사된다.

  • 일본의 웹 소설《별이 펄럭일 때》에도 등장한다. 작품 내에선 해전이 위주로 다뤄지기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는 않지만 첫 등장에서부터 승리 직후 포로가 된 겁쟁이 적장의 엉덩이를 직접 걷어차는 등 상당한 또라이 호전광 기질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묘사되는 건 아니고 순식간에 적 부대의 허리를 끊거나 몇겹으로 된 방어선을 뚫어내고 수십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돌파하는 등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작중 판타지 국가들의 시민의식 수준이 18 ~ 19세기 즈음이라 진정한 기사중의 기사라며 경외의 시선과 찬양을 받고 있다.


  • 삼국지연의장비와 싱크로율이 높다.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재, 급한 성미, 불같은 성격, 후임 갈구기 등. 용맹하고 잘싸운 부하에게는 잘해줬다는 면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장비는 관우의 죽음이 그의 급한 성미를 더 심하게 해버린 나머지 하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 그리고 연의 장비와 정사 장비랑 성격이 정반대이지만, 패튼은 인권의 중요성이 당연시되는 현대의 인물임에도 성격과 사상이 저랬다는 점.

  • 게임《War Robots》에 '제너럴 패튼'이라는 로봇이 나온다. 무장도 좋고 해서 고렙 고수들도 많이 사용하는 로봇.

  • 강철의 왈츠M48A2패튼[40] 아틀리 패튼의 모티브로 보인다.

  • 문명 5위대한 장군 산업 시대 이후 일러스트가 패튼을 모티브로 했다. 2차 대전 미군 군복에 은장 리볼버를 차고 승마용 채찍을 들고 지프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 여러모로 패튼과 판박이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도 등장한다.

  • 영화《퍼스트 어벤져》에서 직접 등장은 없지만 그의 명언 중 하나가 체스터 필립스 대령에 의해 언급된다. "패튼 장군은 전장은 무기로 하는거지만, 승리는 병사[41]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있게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병사...들이 있기 때문이지."라고 하며 스티브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다른 병사들은 나름 정예 병사들을 뽑은 것이지만 스티브는 약골 중에도 최약골이었기 때문.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고 더 강해질 것이니까. 아주 많이 말이야." 하면서 체념한 듯하는 모습이 개그 포인트. 물론 스티브는 대령이 이야기한 감투 정신과 함께 자신의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대령의 부하들 가운데에서 그야말로 최고로 거듭난다.

  • 영화《지.아이.조 2》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조 콜턴 장군이 드웨인 존슨이 연기한 로드블럭에게 조지 패튼의 유품인 M1911 권총을 건네며 "코브라 사령관을 찾아 끝장내."라고 한다. 로드블럭은 이를 받아 허공에 한 발 쏘며 영화는 끝이 난다.



  • 영화《아이리시맨》에서 프랭크 시런이 지미 호파와 통화를 하고 나서 "패튼 장군이랑 얘기한 것 같다."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 미국의 애니메이션《500일의 오딧세이》에서는 다하우 수용소 포로 학살 사건으로 주인공이 조사를 받게되자 대법원장 역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군부 내지 패튼이 조용히 묻기 위해 대리로 한 듯하다. 이때 주인공에게 "본인이 영웅 같냐?"고 묻자 당황한 주인공은 그렇다 대답하는데, 이때 패튼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직업군인으로 37년을 살았네. 맥시코, 양차 대전을 참전하고 자네처럼 부상도 입었지. 그러나 총성 속에 있던 기간은 한 300일 정도 되지. 그러나 자네는 500일을 있었어... 이제 누가 영웅인지 알겠나?" 그 후 주인공을 명예 제대시켜주고 등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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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형전차 M26 퍼싱의 네이밍 모델이 된 장군이다.[2] 정찰 중 총탄이 난무하는 언덕에서 맥아더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패튼과 맥아더 둘 다 배짱과 허세가 대단한 사람들이라 끝까지 그 언덕에서 대화를 마쳤다고 한다.[3] 일선 비행단에서 비행복을 입고 다니는 군인들은 상황 걸리면 언제든지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람들이다.[4] 당장 문서 상단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것.[5] 'General Patton'에 따르면 패튼은 자신을 구해준 고마움 때문에 전후에 이 사람의 경제적인 도움 요청을 여러번 도와줬는데 그런 그가 시위대를 대표해서 자신을 설득하러 온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쫓아냈다고 한다.[6] 원래는 제2기갑사단장 어네스트 하몬이 2군단을 지휘 하려 했으나 프레덴달에게 미운털을 박히기 싫어 거절했다.[7] 이 때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원들이 다들 앓고 있던 지병인 이질과 위장병이 부실한 식습관 및 사막의 기후로 인해 악화되어 독일에 가있었다. 군의관이 병가를 내라고 거듭거듭 말하다 못해서 열이 뻗쳐 강제로 병가를 보내버렸다. 원인은 부실한 위생관리에 있었다고 한다.[8] 롬멜은 건강 악화로 인해 3월 9일 본국으로 소환되어 명목상으로 두었지만 패튼이 대결한 사람은 사실상 아프리카 군집단 사령관 대리 아르님 이였다.[9]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몽고메리와 더불어 독일군을 상대로 전과를 거뒀기에 독일군 입장에서는 미군 사령관 중 제일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10] 이 문서에도 후에 언급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소련 장군 주코프가 우리 "IS-3 전차는 저 멀리서 적을 안전하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패튼이 "내 부하들이 그렇게 비겁하게 싸운다면, 전 그 부하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걸 보면 개같기로 유명한 패튼의 성질머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코프도 만만찮게 개같은 성질머리의 보유자여서 둘이 주먹다짐까지 갈 뻔했다.[11] 애용하던 전용 지휘 차량은 전선 근처를 돌아다니기에 일단은 방탄판 등을 덧붙였다. 한편 만약 무장이 없다면 꼭 자기가 직접 쏠 수 있는 자리에 기관총을 개조해서 달았다. 근데 조용히 적을 피해 다니긴 글렀던 것이 항상 큼지막하게 빨간/흰색 조합 장성판을 상시 붙이고 다녔기 때문이다.[12] 패튼이 기동전에만 능하고 공성전이나 시가전 등에는 젬병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공군과 미사일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지금도 민간인을 고려할 경우 무척 고단하고 긴 시간이 소모되는 게 시가전이다. 겨우 1개월 남짓 두터운 요새지구인 메츠에 고착되었다고 해서 요새공략전에 무능했다고 볼 순 없다. 당장 훌륭한 전술가로 평가받는 롬멜도 토브룩 공략에 여러 차례 실패를 겪었고, 몽고메리는 작전 준비에 몇 달을 잡아먹은 적이 여러 차례 있다.[13] 또한 군사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직관적으로도 지형지물과 엄폐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전투하려면 정말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되고 그만큼 골머리를 앓아야한다는 느낌이 올 것이다. 특히 이미 점령되어 적군이 주둔한 도시에다가 덩치도 큰 전차를 집어넣어 운용해야하니 정말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14] 이 상황은 1969년 영화 레마겐의 철교의 후반부에 잘 나와있다.[15] 몽고메리는 보병 출신이라 신속한 기동이라든지 기갑전술에 거의 무지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보였다시피 계속된 물자, 병력 지원으로 자신에게 확실히 유리한 상황일 때 돌격하는 면이 있었다. 반대로 패튼의 경우에는 정석적인 기갑지휘관으로서 신속한 기동과 돌파에 매우 뛰어난데다 성향 자체도 철저하게 틈을 본 뒤 그대로 돌격하는 전술을 선호했기에, 기존 본인의 병과와 성향까지 패튼이 유리한 조건이었던 셈.[16] 다만 반유대주의자여도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쌓인 시체들을 보고 구토를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열등하다는 당시기준만큼의 반유대주의자지, 나치처럼 다 죽이자는 막가파는 아닌듯하다.[17] 연합군과 소련군은 소련군에게서 도망쳐서 연합군에게 항복한 독일군들을 전부 소련에 넘기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18] 호바트 게이는 훗날 중장까지 올랐으며 한국전쟁 당시 제1기병사단장으로서 파병왔다.[19] 1945년에는 아직 차량에 안전벨트를 장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동차 유리도 거미줄 형태로 깨지는 유리가 아니고 깨지면 파편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일반 유리였다. 그 말은 패튼 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명도 똑같이 안전벨트 없이 탔다는 얘기다. 게다가 자동차 유리 역시 거미줄 유리가 아니고 일반 유리였던만큼 이 둘도 패튼처럼 치명상을 입거나 치명상이 아니라더라도 병원신세는 질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어야 했다.[20] 임종 직전까지 아내가 패튼을 병상에서 지켰는데, 패튼의 마지막 말은 아내에게 한 말로 "너무 어둡군, 아니, 너무 늦었군"(It's too dark, I mean it's too late)이었다고 전해진다.[21] 배우진들이 꽤나 호화진이다. 소피아 로렌, 존 카사베츠, 막스 폰 시도우, 조지 케네디가 패튼역을 맡았다.[22] 맥아더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당시 대통령 트루먼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무리하게 만주에서의 중국과 전면전 계획을 짜고, 아예 대통령이 맘에 안 든다고 야당 대표와 손 잡고 트루먼을 물먹이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이러한 문민통제를 따르지 않는 위험성 때문에 몰락했다. 반대로 말하면 일개 군인이 문민통제 끝판왕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야당과 손을 잡고 대통령마저 물먹일 수 있는 정치력을 가졌다는 소리기도 하다.[23] 기술적으로 M48의 발전형인 M60 전차에는 공식적으로 패튼이라는 이름이 붙은 적이 없다.[24] 후술되겠지만 이 당시에는 정신병리학의 발전이 아직 충분하지 못했던데다, 패튼 본인도 특유의 마초 기질 때문에 현대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PTSD 환자조차도 단순한 겁쟁이로 취급했다.[25] 다만 우선 흑인은 인종문제 때문에 비전투 병과만 받았고, 처음 흑인 부대를 배속받으면서는 이들이 잘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도 해당 부대를 방문해서, 나는 네놈들의 피부색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난 나치를 잘 박살낼 수 있는 놈들을 원한다 라고 연설했다. 당시 미군 내에서의 흑백분리가 없어진 것이 베트남전 당시였던 1960년대 후반인데다가, 사회적으로도 흑인들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저 정도의 생각을 가졌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26] 이 시기의 인물들 중에서. 인종차별적인 면모가 없었던 것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와 레오 듀로셔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무슨 성인군자라서 인종차별을 안했던 것이 아니다. 르메이가 흑인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그저 안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는데 일하겠다는 사람을 차버릴 이유는 없어서였고, 듀로셔 또한 단지 "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고 구단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니까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그딴 건 알 바 아니다"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좀 더 후대인 시대를 다루는 히든 피겨스와 같은 영화에서도, NASA에서 인종차별을 없앤 이유가 '결국은 업무 효율을 늘리기 위해서였다'라는 식으로 나온다.[27]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장인 이마무라 히토시와 졸장이자 임팔 작전을 승인한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카와베 마사카즈인데 이 사람들은 부하들을 굉장히 사랑했고 이마무라가 전쟁공포증을 앓고 있던 병사를 보더니(일단 겉보기에는 별 상처나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병사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도 자네처럼 그런 고통을 겪었던 일도 있었지."라며 그 병사를 위로해 주었다.[28] 황해 배우 전영록이 주연한 전쟁영화 독불장군에서 조선인민군들이 국군 간첩이 사로잡히자, 동조자로 몰린 마을 남자들을 팬티만 입은 벌거벗은 몸으로 끌고와서 총살하는 장면, 인민군 장교가 자신에게 저항하는 국군 간첩을 총살하는 장면을 보면 얼굴이 굳어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인 측은지심 등이 사라진 채, 아무런 감정없이 사람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강철구를 연기한 전영록도 전쟁에 대한 공포를 보이다가, 인민군 병사를 칼을 던져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장면과 인민군 간호장교를 위협하는 등 비인간화된 모습을 연기한다.[29] 당시 서양권에서 반유대주의는 어느정도 보편적인 사회부조리였다. 그리고 심리학자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유대인이었다.[30] 미국 본국은 대단히 기뻐했고 루스벨트가 직접 패튼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루스벨트의 고문인 해리 홉킨스는 패튼에게 에트나 후작 작위를 수여해야 한다고 농담하기까지 했다.[31]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전설이었던 세묜 부됸늬가 대표적이다.[32] 사실 중장 시절의 3성 부착물이 달린 철모 위에 별 한개만 더 붙인 채 그대로 쓰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33] 패튼이 연설을 한 번만 한 게 아니라서 바리에이션이 다양한데, 이 대목은 미 육군 제6사단을 상대로 할 때 한 말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단순하게 요약한 문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시대 일본군카미카제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도 같이 깔 수 있는 연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에는 웹툰 개장수(웹툰)에서 개장수(하이브)가 자기를 죽이라는 소년한테 충고하는 조언으로 하는 대화를 통해서도 알려졌다.[34] 손자병법의 병문졸속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35] 이 또한 동시대에 부하들의 목숨을 개차반으로 취급한 일본군과 대조된다.[36] 얼핏 봐서는 전쟁광이나 할 법한 말 같지만, 실제로 미래학이나 국제정치학 쪽에서 조금씩 연구되고 있는 이론이다. 기술 개발 등의 요인으로 인해 인간의 기대수명이 높아지면서, 세계 인구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자원의 양은 한정되어있다. 거기다가, 자원의 양이 충분하더라도 그 분배가 불균형하기에 이 균형을 맞추고 인구수를 조절하고자 일정 주기로 대규모의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항구적인 평화란 불가능하며, 일정 주기로 지속적으로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37] 2차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패튼에게 소련군의 신형 중전차를 보여주면서 "먼 거리에서도 안전하게 적을 죽일 수 있다"고 자랑하자 남긴 대답.[38] 상술한 교통사고로 치명상(두개골 파쇄, 목뼈 골절)을 입은 직후 의식을 잃기 직전의 어록이자 유언이다.[39] 감시하던 독일군 포로들 중 친위대 장교 한 명이 숨겨둔 칼로 목을 그었다고 한다.[40] 구 어흥튼 M46 패튼[41] 영어로는 사람 혹은 남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