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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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72101594_1.jpg}}}
일반적인 조총의 모습
파일:069조총.png}}}
강화전쟁박물관 소장 조선군 조총[1]
파일:vietnamese-matchlock-musket.jpg}}}
18세기 베트남 남부에서 제작된 교지총[2]

1. 개요
2. 이름의 유래
3. 종류
3.1. 안준현식(순발식)
3.2. 지발식(완발식)
4. 사용법
5. 성능
5.1. 위력
5.2. 활과의 비교
5.2.1. 열등한 점
5.2.2. 우월한 점
5.2.3. 조선에서
6. 역사
6.1. 중국에서
6.2. 일본에서
6.3. 조선에서
6.3.1. 임진왜란
6.3.2. 임진왜란 이후
7. 논란
7.2. "삼단 철포 혁명"
8. 무대뽀, "무텟포(無鉄砲)"
9. 대중 매체에서
9.1. 한국 사극
9.2. 외국 사극
9.3. 게임
10. 기타



1. 개요[편집]


조총()은 16세기~19세기 동아시아에서 사용한 전장식 화승총이다. 근세 시기 포르투갈의 상인들을 통하여 전해졌으며 순서대로 일본[3], 중국,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 넓게 퍼졌다. 근세 동아시아 전장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된 무기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 서양의 전열보병과 충돌하기도 한다.

2. 이름의 유래[편집]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은 하늘을 나는 (새 조(鳥))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붙인 이름이다. 뒤이은 청나라 시대 이후로는 총을 창(鎗)으로만 바꿔서 조창(鳥鎗)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1591년에 일본 사신이 처음 바친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 조총으로 조선에 소개하여 이 이름이 쓰이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종자도총(種子島銃)' 또는 '철포(鐵砲)'라고 불렀으며, 무모한 행동을 뜻하는 '無鉄砲'[4]가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3. 종류[편집]



3.1. 안준현식(순발식)[편집]



순발식 조총의 격발 장치 구조



현대 일본에서 전통 방식으로 조총을 사격하는 모습

Snap/Snapping matchlock. 순발식은 한국, 중국 남방, 일본, 베트남, 남아시아 등지에서 주로 쓰였던 격발 방식이다. 총기 매커니즘으로써의 순발식이야 유럽에서 개발한 뒤 세계 각지에서 쓰였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서 언급하는 동아시아 '순발식 화승총'들의 공통 기원은 포르투갈의 지배 하에 있던 믈라카말레이인들과 고아인도인들이 포르투갈군이 사용하던 아퀘버스를 독자적으로 개량한 '이스팅가(Istinggar)' 총이다.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남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말레이 군도의 국가들은 발전한 화약 기술과 초보적인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3세기 건국한 마자파힛 제국같은 경우 건국 과정에서 쿠빌라이 칸의 몽골 제국군을 섬멸하고 건국한 국가였고, 몽골을 통해 접한 화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인도네시아의 해상 패권을 쥐었으며, 제국의 중심지인 자바 섬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거대한 화기 생산 시설을 건설하였다. 마자파힛이 몰락한 이후로도 주변 지역으로 화기 기술자들이 이탈하면서, 수마트라 등으로도 화기가 전파되었다.

16세기부터 아시아로 진출해 각지에서 교역 거점들을 마련한 포르투갈인들이 서양의 총기 기술을 들여오고 현지인 기술자들에게 화기 생산을 의뢰하면서, 포르투갈 세력권 각지의 화기 기술이 결합되었다. 고아의 인도인 기술자들은 좁고 흔들림이 많은 선상에서 사용이 편리하도록 아퀘버스의 무게와 구경을 줄였고, 거추장스러운 개머리판도 없애 권총 손잡이만한 부분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믈라카의 말레이인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쓰던 방아쇠압이 낮은 순발식 격발 기구를 장착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팅가 총이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곧 선상전투에 적합한 이 총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주력 무기로 채택하고 동북아시아로 북상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와 당시 센고쿠 시대였던 일본으로도 총이 전파되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도 도입되어 조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조총은 국가별로 각자의 분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각 국가별 발전상은 다음과 같다.

  • 조선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침공하면서 전파되었다. 패색이 짙었던 전쟁 초기에 조총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던 조선은, 노획한 일본군의 조총을 분해해보고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1593년부터 조총을 생산했다. 전후에도 조총은 조선군의 표준무기로 서서히 자리매김해나갔고, 천보총과 대조총 등 다양한 종류의 바리에이션이 생산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과 같이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방수 기능을 도입하거나 찬혈과 같은 천공법을 적용해 성능을 높이면서도 가격을 낮추었다. 명청전쟁과 이후 시대에 많은 수의 조총을 청나라로 수출하기도 했다.

  • 중국
당대 세계 각지의 온갖 화승총들을 도입했던 만큼 순발식 총들도 운용했다. 보통은 이들을 그냥 조총이라고 뭉뚱그렸지만 명나라 화기기술자 조사정은 이를 세부적으로 소서양총과 일본총으로 구분했다. 소서양총은 마카오에 온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직접 접한 선상용 이스팅가를 의미하며, 일본총은 말 그대로 왜구를 통해 접한 일본 조총을 의미한다. 둘은 거의 유사했지만, 조사정은 소서양총이 구조상 좀 더 간단하다며 비교적 더 높은 평가를 내렸다. 반면 일본총은 소서양총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잡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중국에서는 순발식보다는 후술할 루미 계열 지발식 총이 더 널리 보급된다.

  • 일본
타네가시마 섬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조총을 도입했고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를 거치며 발전시켰다. 조입이란 장구류를 개발해 사격 절차를 간소화하고 구경과 장약량에 따라 세 개로 급을 구분했으며 이외에도 오오즈츠를 비롯한 대형총을 만들어 야전에서의 화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일본식 조총은 동북아시아 순발식 화승총계의 표준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군비증강에 힘쓰던 조선에서도 많이 수입해갔다.

  • 남아시아
개발지인 남아시아에서도 인도의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동남아시아의 시암, 베트남, 수마트라 국가들, 미얀마 등 여러 국가들에서 사용했다.

  • 인도네시아 군도
이스팅가도 인도네시아 군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섬 지방에서 계속 사용하였다. 마자파힛의 잔여 세력이 남아있는 발리 섬이 화기 생산 중심지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섬 지역의 전투 방식에서 화기는 보조 수단이었다.

베트남산 총은 성능이 매우 좋고 형태에서 일부 차이가 있어, 중국에서는 조총이 아닌 교지총[5]이라는 별도 이름으로 부르며 수입해갔다. 교지총은 손잡이 부분이 개머리판 마냥 길었던 게 특징인데, 다른 총들에 비해 명중률과 화력이 매우 강력해 갑주를 한번에 여러개씩 뚫거나 한 발로 두 명을 사살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명나라도 베트남과 접한 광서성 지역의 국경분쟁에서 교지총의 위력을 경험했고, 하술할 루미총 보다도 좋은 '천하 제일'이라 높게 평가하며 지역에서 주둔한 랑병[6] 중심으로 보급해 운용했다. 명나라가 순발식 총을 지발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했던 것을 감안하면 교지총은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고평가된 셈. 그래서 후에 남명을 비롯한 명나라 부흥군과 청나라도 사용했다. 서양인들이 교지총에 내린 평가도 중국인들의 평과 별반 다르지 않아, 위력적인 총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화교들을 중심으로 화기를 생산했다. 베트남 만큼은 아니어도 양질의 총을 잘 만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문 제작을 의뢰했던 적이 있다.

격발 방식에 대해 설명하자면, 순발식은 현대 싱글 액션의 조상으로써 매커니즘이 동일하다. 용두가 화약접시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게 기본 상태이기 때문에, 발사를 위해서는 우선 용두를 뒤로 젖혀 코킹해야 한다. 용두에는 용수철이 걸려 있어 원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작용하고 있지만, 방아쇠와 연결된 용두 멈치가 이를 막는다. 그리고 사수가 목표물을 포착해 방아쇠를 누르면 용두 멈치가 풀리면서 용수철이 원상태로 돌아가고, 용두는 화약접시로 처박혀 점화약에 불을 붙인다. 참고로 화승의 경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대마아마의 속대를 꼬아서 만들었지만, 일본은 편백나무의 속껍질을 벗겨내어 썼다.

장점은 명중률이 높고 반응 속도가 빠르다는 것. 방아쇠압이 낮기 때문에 일단 장전만 해놓으면 조준에만 집중하면서 별다른 움직임 없이 손가락 하나 가볍게 까닥하는 것만으로 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이나 사냥감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높은 반응속도를 살려 사살할 수도 있었다. 비록 용수철이 퉁기는 진동이 발생하긴 하지만, 이 순발식 화승총의 용수철은 부싯돌을 철판에 강하게 때려 불꽃을 내야 하는 플린트락 방식과는 달리 불 붙은 화승을 화문에 갖다 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그래서 총에 익숙해진다면 진동도 충분히 제어 가능했다.

반면 단점도 만만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불 관리였다. 용수철 탄성으로 용두가 화문에 고속으로 들이받는 과정에서 화승이 화약접시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용두에서 빠져 날아가거나, 심지어는 불이 꺼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낮은 방아쇠압 때문에 잘못 건들면 오발도 종종 일어났다는 것이다. 위험하기도 했지만 집단운용에 있어 이는 명백한 단점이었는데, 심리적으로 위축된 병사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적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멋대로 발포라도 하면 방진의 사격 제어가 엉망이 된다. 이는 이어진 돌격에 방진이 깨질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실제로 조선군이 병자호란 때 이런 문제로 패전한 사례가 있다. 이로 인해 순발식 화승총은 일제사격이 중요한 대규모 보병전이 벌어졌던 유럽에서는 지발식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고, 명중률과 반응 속도를 살려 사냥용으로 잠깐만 쓰이고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명나라도 후술할 지발식 루미총과 서양총이 도입된 이후 유사한 평가를 내려, 동남아시아와 일본제 총의 기계장치가 운용하기 복잡하고 조작이 불편하다며 깠다.[7] 다만 순발식 화승총은 사라졌지만 순발식 메커니즘 자체는 살아남아 수발식 머스켓 시대 이후로는 표준으로 자리잡았[8]고, 뇌관과 탄피가 개발되고 리볼버의 시대를 지나 현대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3.2. 지발식(완발식)[편집]



파일:main-image.jpeg.jpg

근세 티베트군의 루미총[9]
총신 밑으로 길다랗게 달린 건 삼각대이다


Sear lock matchlock. 지발식은 서양과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중동, 중앙아시아, 중국과 티베트 등지에서 쓰였던 유형의 격발 매커니즘이다. 오스만 제국군이 이 방식 소총을 대거 이용해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찰디란 전투에서 아작내면서, 이에 자극받은 동방 국가들로도 전파되었다. 이 터키 계열 지발식 총들은 선상전투에 대한 고려 없이 주로 육로를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개머리판이 생략되지 않았다. 물론 이와 별도로 유럽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들여온 서양식 지발총들도 있었다. 유럽과 오스만을 제외한 주요 사용지역들은 다음과 같다.

당장 오스만에게 박살난 사파비조의 경우 오스만의 화기를 받아들이는 한편 조지아, 아르메니아, 영국 출신 기술자들을 초빙해 화기부대를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를 향해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카불의 군주였던 바부르도 찰디란에서 오스만 총병대가 보인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도 오스만 인들을 초빙해 총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 오스만식 화기부대를 통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아프간계 로디 왕조군을 쳐부수고 칭제하여 무굴 제국을 건국, 북인도의 패자로 등극한다.

  •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로는 트란스옥시아나로 파병 나간 오스만 예니체리 군단을 통해 소개되었고, 사파비조와의 전쟁도 거치며 지발식 화승총이 보급된다. 그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의 제자일도 원래는 이 유형의 파생형이다. 1800년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파슈툰족이 이 총으로 영국군을 몰살하며 유명해졌다. 당장 19세기 소설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존 왓슨 박사를 의병제대시킨 놈으로 등장할 정도.

  • 중국
오스만식 총은 하서회랑 너머 손을 뻗친 명나라와 하미 위구르인들과의 전쟁을 거쳐며 중국으로도 소개되었다. 명나라는 이 양식을 순발식인 조총과는 별도로 루미총(로마[10] 총, 한자로는 魯密총이라고 표기.)이라고 부르며 순발식 총들과 병용했다. 개머리판이 있어 조준이 쉽고, 지발식 구조라 사수가 발사를 정밀히 조작 가능하다는 점이 특히 고평가받았다. 다만 무거워서 무릎을 꿇고 사격해야 했다고.
이와 별도로 오스만 총 계열이 아닌 서양제 지발식 화승총들도 해로를 따라 명나라에 들어와 대서양총[11]이란 이름으로 도입되었는데, 조사정의 말에 따르면 좋은 총이긴 했지만 루미총에는 미치지 못했다. 조작하기 편한 건 루미와 같고 가벼운데다 사정거리가 길긴 했지만, 루미와 달리 개머리판이 없어 위력이 약했고 다루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루미총은 이후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질 중국 조총의 표준형이 된다. 후에 조사정은 루미의 총열과 총몸을 바탕으로 하되 개머리판을 병사들에게 익숙한 일본총에 유사하게 바꾸고, 대서양총처럼 서서도 쏠 수 있도록 경량화하는 방식으로 개량한 삼장총을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그는 격발 장치를 개머리판 안으로 집어넣어, 방아쇠를 누르면 자동적으로 화약접시가 열리도록 하는 기능도 추가하였다. 이로 인해 발사과정도 더욱 간편해졌다.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바닷길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화기 기술을 전수받은 사례다. 당시 아체의 무다 술탄은 포르투갈 제국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큰형님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스만 황제 셀림 2세는 이에 호응해 함대에 일부 병력과 수백 정의 오스만식 아퀘버스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 그리고 군사 고문단을 포함시켜 파견해주었다. 이때 수입된 오스만식 화포와 화승총 제작 기술은 아체를 비롯한 인니 지역 술탄국들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외에도 순발식인 이스팅가나 유럽제 총들도 혼용되었다.

지발식의 격발 방법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술했듯 순발식에서는 용수철이 용두를 앞으로 밀어놓고 있어 용두가 화문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게 기본 상태다. 그래서 발사를 위해서는 용두를 뒤로 코킹해야 된다. 반면, 지발식은 용수철이 용두를 화문의 반대 방향으로 밀어놓고 있다. 그래서 딱히 장전할 필요는 없고, 방아쇠를 당기면 방아쇠가 당겨지는 정도에 따라 용두가 서서히 다가와 화문에 닿는 구조다. 방아쇠를 놓으면 용두가 화문에서 떨어져 원 상태로 돌아간다.

이 방식의 장점은 사수가 방아쇠를 조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코킹이 풀려 오발사고로 이어지는 순발식과 달리 이 방식은 방아쇠압이 높기 때문에 오발사고가 거의 없었다. 또한 화승이 화문에 닿기 전에 용두에서 튕겨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덧붙여 길다란 개머리판덕분에 반동 제어도 안정적이었고, 이는 더 많은 화약을 넣어 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량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때문에 서양의 지발식 화승총과 루미총은 대형화되어 강한 화력을 자랑했다.[12] 결과적으로 지발식은 보병의 집단 운용에 아주 적합했으며, 유럽의 대부분의 군대가 지발식으로 무장했다. 순발식과 병용했던 명나라도 성능에 있어서는 루미총이 순발식보다 더 좋다고 평가했다. 루미 > 대서양총 > 일본총 순으로 생각했다고.

단점은 방아쇠압이 높아서 반응 속도가 느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데 힘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진동을 발생시켜 명중률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야전을 중시한 서양과 중동, 중국에서는 집단운용에 유리하다는 명확한 장점 덕분에 이를 그리 큰 단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이 루미총을 단순히 개량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거치식 대형총인 총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방식은 화승총 시기에는 지배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지만, 오직 화승총에만 적합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후에 수발식이 일반화되면서부터는 순발식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다.


4. 사용법[편집]




1. 세총(洗銃): 조총의 총신 내부를 깨끗이 닦아낸다.

2. 화약(火藥): 총신에 화약을 넣는다.

3. 삭장(槊杖): 나무 꽂을대인 삭장으로 화약을 잘 다진다.

4. 연자(鉛子): 납탄을 넣는다.

5. 삭장(槊杖): 삭장으로 탄환을 밀어넣는다.

6. 하지(下紙): 종이를 총구에 넣는다.

7. 송지(送紙): 발사시 가스가 새지 않도록 삭장으로 종이를 밀어넣는다.

8. 개화문(開火門) : 방아쇠 위에 있는 점화약을 담는 화문을 연다.

9. 선약(線藥): 선약, 즉 점화약을 화문에 넣는다. 드라마 추노에서 생략된 과정이 바로 이 선약 과정이다.

10. 요화문(搖火門): 화문을 살짝 흔들어서 화문 속의 선약이 총열 안으로 약간 흘러 들어가게 한다. 이때 선약이 제대로 흐르지 않으면 제대로 발사가 되지 않는다.

11. 폐화문(閉火門): 화문을 닫는다.

12. 안화승(安火繩): 화문에 불을 붙여주는 금속 부분인 용두에 불이 붙은 심지인 화승을 제대로 끼운다.

13. 개화문(開火門): 명령에 따라서 점화약이 담긴 화문의 덮개를 연다.

14. 거발(擧發): 적을 겨냥하여 발사한다.


일반적인 이미지는 심지에 불을 붙여 다 타들어가면 발사되는 무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불이 붙은 화승을 공이인 용두(龍頭)에 끼운 후, 방아쇠를 당겨 용두의 화승이 화약 접시(火皿)에 담긴 점화용 화약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것이 다시 추진용 화약에 불을 붙여 총알이 발사되는 방식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느린 화승이 타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조준을 유지하고 있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불씨를 화문에 직접 대어서 발화하는 것은 화승총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소형 화기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선약과 요화문, 폐화문 과정을 화약 과정 이전에 하는 경우도 꽤 자주 보이는데, 특히 종이탄피를 사용하는 경우 이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3번과 5번에 해당하는 삭장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으며, 빠른 사격을 위해서서는 송지와 하지 과정조차 총알을 총구에 뱉고, 바닥에 총을 몇 번 내리치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다만 이 개념은 화승총의 후계인 수발총 한정으로,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보급된 개념이다.

(일본의 조총 발사 과정 동영상이다. 22초경부터 대조총 장전 모습이 나온다.)

파일:子母鳥銃.png

다만 불랑기포의 구조를 도입한 자모총(子母銃)같은 경우 불랑기포처럼 후장식으로 장전 / 발사하면 된다. 위 그림은 명나라의 병서 <병록>(兵錄)에 실린 자모총이다.


5. 성능[편집]



5.1. 위력[편집]


파일:external/oktoshi2004.blog.so-net.ne.jp/3339866.jpg

대조총을 발사하다 실수한 모습.# 크기와 들어가는 화약의 양만큼 반동도 강해 일어난 일이다. 대조총은 말이 총이지 실제로는 핸드 캐논 수준이다.

열넷째는 조총(鳥銃)을 주조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장기는 오직 조총 한 가지뿐입니다. 가장 만전을 기할 수 있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하니 전구(戰具) 중에 웅맹한 것으로서 적을 물리치는 묘용이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십오(什伍)로 하여금 모두 나아오게 하여 천만 개를 일제히 발사하도록 하면 연기가 적의 보루에 가득 차고 소리는 적의 담을 흔들 것이며 범하는 자는 즉시 부딪치고 부딪친 것은 곧 부서져 버립니다. 지혜는 교묘함을 믿지 않고 용맹은 힘을 믿지 않고 강함은 무리를 믿지 않고 악은 사나움을 믿지 않는 것이니 실로 만 번 승리할 기구요 한 사람을 대적할 것이 아니므로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고 우리가 의지할 것도 이것입니다.

-

-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25일(기미) 장단 생원 최욱의 상소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

-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또 기계(器械)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면,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는 본디 조총(鳥銃)에 대적하기 어렵거니와, 야전(野戰)에서 그러할 뿐만이 아니라 적의 보루를 쳐부술 때에도 궁시로는 하기 어려운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에서 이르신 바와 같습니다. 오직 화기(火器)를 많이 갖춘 뒤에야 견고한 보루를 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

- 선조 26년 계사(1593) 윤 11월 28일(무신)


“우리 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ㆍ간척(干戚)ㆍ창검(鎗劍)ㆍ총포(銃砲) 중 어떤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開闢)한 후에 곧 궁시(弓矢)가 있었으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호시(弧矢)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음습(陰濕)할 때 조화를 운용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명중시키는 것이 2, 3백 보(步)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 가까워진 후에야 비로소 편전(片箭)을 쏘게 되는데, 재빠르고 굳세고 멀리 쏘아야만 가장 군중(軍中)의 정교한 기술로 여겼으나 모두 조총(鳥銃)에 뒤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포의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옷을 뚫고 뼈를 꿰뚫어 사람이 확실하게 죽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총포가 나오면서 명장(名將)이 없었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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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 8년 무진(1808) 8월 1일(갑오)

일반 조총 기준으로 유효 사거리가 약 50m, 최대 사거리는 500m ~ 700m. 살상력을 기대할수 있는 거리는 200m. 하지만 조총은 동아시아에서 100년 ~ 200여년에 걸친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므로, 사거리와 위력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는 점을 알아두자. 가령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살상거리가 40m ~ 50m, 유효 타격거리가 70m ~ 80m 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승자총통에 비하면 2배 ~ 3배 이상 긴 사거리였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자체적인 신형 조총을 만들면서 살상 거리와 비거리가 본 항목에 기재된 성능, 혹은 그 이상으로 점점 늘어난다.

내부에 강선이 없는데다 탄자 형태가 동그란 구형이어서, 공기 역학적으로 좋은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어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건 활이 미친듯이 발전한 동아시아에서 단점이라고 하는 정도지, 장궁병을 집단 운용해서 화망을 만들어 적을 사살하던 유럽에서는 오히려 엄청난 장점이었다. 활은 능숙하게 다루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지만 총은 장전할 줄만 알면 쏠 수 있는 덕분에 활에 비해 숙달되는 기간이 매우 짧아 빠른 병력 양성이 가능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높은 운동 에너지를 가지므로 살상력과 갑옷 관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점이 있다. 조총은 쏘면 갑옷 자체를 뭉개버리면서 상대를 죽이는데 반해, 활로 갑옷 뚫으려면 110파운드 급 장궁을 사용하던 영국 정도는 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 갑옷이 14세기, 15세기의 판금 갑옷이라면, 100파운드 대의 장력을 가진 장궁도 뚫을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위력은 화기답게 매우 강하여 석궁 계열보다 강력했다. 특히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덕분에 2000J이 넘는 운동 에너지를 이용하여, 납탄으로도 50미터 가까운 거리에서도 갑옷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13]

다만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위력이 아니라, 기존에 갑주를 관통하는데 사용되었던 화약 무기들이 마침내 개인 화기로서 운용이 가능해졌다는 데 있다. 서양에서 화승총이 전래되기 이전에도 동아시아에는 충분히 갑주를 관통할만한 개인화기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불편한 중화기 형태이거나 집단으로 운용하여 파편 충격을 주는 형식의 원시적인 소형 화기 밖에 없었다. 조총의 위력은 단순히 화력이 강력한 점이 아니라, 중거리 보병끼리의 교전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널리 보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일본 전국 시대 시기의 활로 일본 갑주인 당세구족을 입은 적병을 쏘면 관통력 부족으로 적을 일격에 죽이기 쉽지 않았다. 창이나 일본도를 사용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골절만 일으킬 뿐, 갑옷을 입은 무사를 무력화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14] 비단 일본 활만 문제가 아니라 국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정사에서 우리 활로도 갑옷을 뚫을 수 없어 투구끈을 쏘아맞혀 간신히 죽였다고 기록된 아기발도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게 전국 시대로부터 무려 200년 전의 일이었다. 임란 이후 1605년 북방에서 발발한 건퇴전투의 경우를 봐도 여진족이 중국 갑옷을 입고 오자 궁시로 뚫지 못해 총통밖에 답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조총의 경우 50m 거리에서 바로 관통이 가능하니, 가히 위력에 있어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총을 든 일개 병사가 비싼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 장수들 대부분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관통력 뿐만이 아니라 화살의 속도 또한 활이 가진 약점이었는데, 편전에는 무력화 되었으나 주력 전투용 화살인 장전을 여진족이 날아 오는것을 보고 피해버리는것도 모자라 칼로 받아 쳐 버리는 무협지스러운 사례도 실록에 나와있다. '#' 조총의 전래되기전까지 조정에서는 보다 효과적인 편전을 생산해 배급하는것으로 대응했으나, 곧이어 승자총통과 같은 화기인 핸드캐논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고 조총의 전래 이후엔 편전마저 도태시킬 정도로 중용했다.[15] 이는 화기인 조총의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탄자의 속도는 화살이 비교할바가 아니었다. 조준한 뒤 격발하게 되면 격발한 바로 그 순간 조준한 표적에 명중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총의 도입은 아무래도 개발 주체인 서구권이 조금 더 유연했던건 사실이었다. 동양도 갑주를 입은 상대에 대한 활의 저지력이 불분명했기에 조총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서양에서는 더 나아가 판갑의 발전으로 활이 아예 무력화되어 도태 단계였고, 그나마 타격을 줄수있는 투사병기는 심지 꽂고 쏘는 핸드캐논이나 무식한 장력의 활을 달아 장전이 오래 걸리는 쇠뇌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갑옷의 발달로 관통을 기대해 저지력을 발휘할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2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상 그런 무장을 한 기병 상대로는 영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총이 다른 개인용 투사병기의 유예를 줄 이유가 애당초 없었기에, 의문의 여지없이 주력병기의 위치를 장악할수 있었다.


5.2. 활과의 비교[편집]



5.2.1. 열등한 점[편집]


상이 이르기를,

“조총(鳥銃)만 한 병기가 없는데, 그대는 활과 화살을 좋은 병기라고 여기는가?” 하니,

유만증이 아뢰기를,

“조총이란 것은 일단 실수할 경우에는 신속히 탄약을 장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내에 사용하는 것으로는 활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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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4년 무신(1728) 3월 23일(계유) 맑음

  • 탄약을 장전하여 발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는 단점이 있었다. 장전 후 발사에는 빨라야 분당 2발, 비 숙련자의 경우 장전에만 2분까지도 걸린고 조총의 느린 연사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3단 사격같은 전술을 활용했지만 그마저도 조총의 장전시간이 워낙 길어서 시간을 조금 단축시켜 줄뿐 완전히 보완은 불가능했고 여전히 오랜 장전이 걸렸다. 반면 활은 숙련자의 경우 엄호 사격 시 분당 8발까지 발사할 수 있다. [16] 이 때문에 조총은 부동자세에서 사격은 좋았지만 직접 마주보고 하는 전투에는 꽤나 불리했다.
  •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구조라 날씨에 따라 사용 여부가 좌우된다.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불면 우산이라도 쓰지 않는 한 사용이 불가능했다. 여기에 착안해서 일본의 경우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기도 했다. 그래봤자 효과는 별로여서 금방 사장되었다. 우산 자체도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 바람이라도 불면 우산으로는 화승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17]
거기다가 당시 조잡한 기계기술의 한계로 인해서 습도가 높은 날씨에서는 고장나기 일수였다.
  • 명중률과 화약 낭비 같은 요소로 인하여, 집단 운용시 적과의 거리가 50미터 내외가 된 후에야 사격을 시작해야했다.[18] 궁수들이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 분당 3발 ~ 10발 정도의 치명타를 쏘아대는 동안, 조총은 지근거리에서의 집단 운용이 필수적인 관계로 서양처럼 전열보병마냥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접근해야한다는 상황이 나온다. 즉 유효사거리가 짧다. 17세기의 조총들은 다른 동아시아의 병종을 보조하기에는 적합치 못했고, 서양처럼 화승총을 위한 보병 중심의 부대 편성을 해야 쓸만했던 것이다.
  • 사격 통제가 어렵다. 특히 조선이 도입한 순발식 화승총은 실수로 오발될 가능성이 높아 매복해있던 부대에서 실수로 오발하여 매복을 들키거나,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이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멋대로 발포하여 막상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는 재장전도 못하고 적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조선군이 청군을 상대한 사르후 전투 ~ 병자호란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다.
  • 조총과 달리 활은 곡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궁수는 전면을 창수 혹은 도검수에게 보호받으면서 안전하게 후방에서 사격할 수 있었다. 또한 공성전의 경우에도 수비병이 성벽 뒤에 숨으면 총은 별반 활약하기 어려웠지만, 활의 경우는 수비 측이건 공격 측이건 곡사를 통해 제몫을 할 수 있었다.
  • 조총은 당시 기술의 한계로 폭발할때 구름같은 연기를 만들어내는 흑색화약을 썼기 때문에 앞에 있는 병사들이 조총을 한번 발사하고 나면 현대 연막탄 수준의 연기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서 다시 조총을 장전하거나 조준하기에도 어려웠다.

이렇게 조총을 비롯해 1500년대부터 1600년대의 화약무기 및 화승총은 처참한 명중률과 오랜 장전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무조건 보병대와 섞는 전술을 구사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상 전투중 1600년대 스페인군은 이를 보완하고 화승총병의 안전과 장전시간을 확보시키기 위해 테르시오라는 전술[19]을 발안하였고 이 전술은 당시 유럽의 최대전력인 중갑기병 대특화전술로 각광받으며 너도나도 이 전술을 도입하였다. 게다가 옆나라 일본 경우 전국시대 당시 오다 노부나가다케다 카츠요리가 격돌한 나가시노 전투 당시에서도 조총병을 중심으로 한 보병이 주력인 노부나가와 조총의 카운터격[20]인 기병대가 주력인 다케다 가문의 싸움이었는데 조총병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보병과 기병의 접근을 막거나 방해하는 바리케이드를 친 뒤 조총병을 중심으로 운영하여 이겼다.[21]


5.2.2. 우월한 점[편집]


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친림하여 시재(試才)할 때에 편전(片箭)이 조총만 못한 것이 수배나 되었으니, 옛사람이 ‘조총은 활보다 5배나 낫다.’고 한 말이 믿을 만하다. 이제 사복시(司僕寺)에 남은 말 30필이 있으니 순차적으로 도감 포수(都監砲手)에게 나누어 주라. 외방의 포수 및 살수와 무사 중에서 그들이 포를 쏘기를 자원할 경우 모두 3병(柄)을 한 차례 시방(試放)하고 서계(書啓)하도록 훈련 도감에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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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28년 을미(1595) 10월 8일(정미)


무기 가운데는 조총이 가장 정교한데, 습기가 차면 느슨해지는 궁노(弓弩)와는 달라서 불만 붙이면 반드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전적으로 조총을 쏘는 법을 익혀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게 된다면 어떤 적인들 꺾지 못하며 어떤 도적인들 막지 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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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1년 을사(1725) 4월 17일(갑신)


  • 전투 지속능력에 있어서 피로도가 조총이 활보다 덜하다. 일단 활의 장점으로 꼽히는 강력한 연사력은 일반 활에서나 가능하지, 100 파운드를 넘는 전투용 활을 당기는 일은 숙련자도 버거웠다[22]. 무게는 둘째치고 지속적으로 시위를 당기면 손가락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지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 깍지 같은 보호장구가 필수였지만 급박한 전투상황에서는 깍지가 깨지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인력에 의존하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23] 하지만 조총은 특성상 장전에 체력을 필요치 않고, 조준할 근력만 있으면 되기에 꾸준한 화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실록에도 힘이 강한 자는 활을 주고, 약한 자는 총을 주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39년인 1763년 3월 6일 일본에간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조선의 전투용 대형 활인 육량궁을 장사라 자부하는 일본인이 당겼으나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힘 뿐만 아니라 요령도 있어야 했고 조선 통신사 일행은 왜인들에게 자신들의 용력을 자랑하기 위해 자주 무관들을 데리고가 시연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 육량궁은 활의 장력이 얼마나 강한지 부상자가 속출할 정도였으며, 육량궁을 쏠때 반동 때문에 달려나가면서 쏴야 된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어깨와 팔목을 다치는 자가 많아 육량궁을 폐하자는 소리까지 나올정도 였는데, 전투용 활이 얼마나 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는 부분으로, 현대인이 생각하는것 처럼 쉬이 간과할수가 없는 부분이었다.[24]

  • 실전에서의 유효사거리는 조총이 오히려 더 길다. 조총은 사거리가 짧고, 활은 길다는 것 자체가 오해이다. 화약이 폭발하는 에너지로 발사되는 투사체와 장력으로 발사되는 투사체 중 어느 쪽이 멀리 날아갈지는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수군 전술교범인 수조규식(水操規式)에도 조총은 적의 100보(120m) 전방, 활은 적의 90보(108m) 전방에서 사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조 19년 을묘(1795) 2월 9일(신유)자의 실록을 보면, 장용영은 1백보에서 조총을 쏘고 50보에서 사수가 활을 쏘게 되어있었다. # 당대 조선군의 교리부터가 조총을 쏜 뒤 활을 쏜다고 되어있는데 조총이 활보다 사정거리가 짧다는 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상주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조선군의 궁시 사거리보다 밖에서 조총을 사격해 조선군이 피해를 입었고, 조선군이 활로서 반격했지만 일본군에 닿지 않기도 했다. 인터넷에 조총이 활보다 사거리가 짧다는 오해가 퍼진 것은 활의 최대 사정거리와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를 비교하는 뻘짓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반론: 조총의 명중률과 연사 속도를 고려하면 120m 전방에서 쏘는 것은 견제 사격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물론 당대 조선 조총수들의 뛰어난 명중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나 수발식 머스킷[25]을 쓰던 전열보병들도 120m 거리에서 쏘지는 않았고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사격 통제가 되지 않아 너무 멀리서부터 쏜 것이 원인이 되었던 만큼 교리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재반론: 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피해를 입은 이유는 사격통제가 되지않아 화약이 다 떨어져서지 총이 안맞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초전에 청나라 군은 뛰쳐나간 조선군이 멋대로 쏜 조총에 피해를 입었다.
교리적 측면에서는, 조선군의 교리 자체가 화망 형성 위주인 전열 보병과 달리 조준 사격을 중시하는 차이가 있으며 조선군이 주로 상대해야할 적은 전열 보병과 달리 기병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한다. 후기의 조총병들의 숙련도는 서양의 전열 보병에 비해서 높은 편이라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장거리 사격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명중률이 못써먹을 수준은 아닌게 숙련된 사수가 사격하면 보병 상대로는 91m에서 75%의 명중률을 182m에서도 37% 이상의 명중률을 보여주었고 기병 상대로는 더 높은 명중률을 기록했다. 182m에서도 37%의 명중률을 보인다면 120m에서는 더 높은 명중률을 보일것이고 그 대상이 기병이면 명중률은 더 올라갈 것이므로 견제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장전 속도가 느리다는 문제가 있으나 그 문제는 조선도 인식하고 있었기에 5열 ~ 10열이 교대로 사격하여 사격간의 시간 간격을 최소화 하였다. 또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여겼기에 조총수가 재장전할 시간을 확보하고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살수와 사수를 배치하여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였다. 또한 앞에서 사격 통제가 되지 않아서 박살난 사례를 제시하였으나 적절한 사격 통제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기병을 상대로도 조총수들이 적절하게 대응하는게 가능하다는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 조총수들은 적절한 사격 통제로 후금 기병의 돌격을 한동안 저지하는데 성공했었다.[26] 간혹 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에서의 활의 사격 거리는 초시에서 목전으로 240보에 달했으며 유엽전으로 150보에 달했다는 점을 들어 활이 더 긴 것이 맞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장 목전 자체가 멀리보내기 시합용인 비전투용 화살이었고 전투용 화살인 편전은 130보, 철전은 80보로 훨씬 짧은 거리에서 시험이 이루어졌다. 또한 무과시험 사거리를 전투에서의 실 사거리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오류이다. 앞에서 상기한 거리들은 사람보다 더 큰 표적을 맞추는 거리거나 최대 비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설정된 거리이다. 그리고 실제 전장은 활터처럼 표적과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는 환경이 아니다. 활터에서는 예전부터 계속 쏘던 감이 있으니 그 거리에서 잘 맞는 각도로 화살을 쏘면 되지만 전쟁터에서 적과의 거리는 가변적이며,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기 어렵기에 사격각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밖에도 활의 성능을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실전에선 여진족이 날아가는 화살을 보고 피한다거나 갑옷으로 튕겨내 버리고 무력화 되지도 않는 등 냉병기로서의 활의 한계는 분명했다. 또한 오랫동안 수련한 일부의 명궁들을 제외하고, 오히려 미숙련 궁수들의 명중률 저조가 심각했다는 점, 조준 자체가 어려운 활의 특성을 생각해 봤을때 실전에서 활이 조총보다 더 나은 명중률을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조준기가 없는 전근대시대 활에게 장거리에서의 명중률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여진다. 군사전문가이자 히스토리 채널의 자문을 맡은 Kennedy Hickman에 따르면 백년전쟁 당시 영국 궁수의 경우 75~80야드 밖의 사람에 대해 명중률을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 폭발력으로 운동 에너지가 발생하는 총기와 장력으로 운동 에너지가 발생하는 활은 초기 형태인 걸 떠나서 위력에서부터 이미 넘사벽 차이가 난다. 유효 사거리 내에서의 조총의 위력은 대략 2000J인데 이는 현대 제식탄환인 5.56mm의 1900J을 뛰어넘는다. 쉽게 말하면 조총은 유효 사거리에서 활보다 더 확정적인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총알은 현대의 총알과 달리 공기 역학적인 특성 등을 고려해서 만든게 아니라 단순히 에너지만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27] 활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조선군은 선조 38년에 소수의 여진족 기병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는데 이때 얻은 전훈의 하나가 화살로는 여진 기병의 갑옷을 관통하기 어려우며 총통의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결함을 깡그리 무시하고서라도 조총을 쓸 가치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파괴력으로 이것은 조총의 장점과 단점 중 그 크기가 가장 크다. 화살은 맞으면 박히지만 조총탄은 맞으면 관통되어 계속 날아간다. 이것부터가 무서운 강점이다. 그래서 화살의 경우는 삼국지오나라 장수 주태처럼 맷집이 뛰어난 장수는 몇 발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조총탄은 얄짤없이 골로 간다. 하후돈여포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서 애꾸눈이 되었는데 그게 조총탄이었으면 하후돈은 그 때 100% 두개골이 부서져서 전사했을 것이다. 물론 조총은 그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기였다.[28][29]

  • 조선의 활인 흑각궁도 습기면에서는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 물소 뿔을 어교[30]로 붙여 이은 활이라서, 습윤한 기후에는 어교가 풀어져서 활이 망가질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임진왜란 중에도 조총의 위력이 급감하는 장마철은 오히려 활을 주력으로 하는 조선군 측에게 더욱 불리한 계절로 인식되었다.[31] 최영의 요동 정벌 당시 이성계의 '4불가론' 중 하나가 여름철이라 활이 불리하다는 논지였음을 기억하자.[32]

  • 오랜 기간의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궁사 양성과 달리 조총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훈련시켜 전장에 내보낼 수 있다. 즉 물량도 조총병이 궁병보다 더 나온다.[33]

  • 17세기까지는 활도 쓰기에 따라서 조총에 비교할 수 있었으나, 18세기부터는 훨씬 진보한 조총이 발명되면서 전략적인 훈련 비용이나 전술적인 중거리 전투력에 있어서도 조총에 비교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 잘 부각되지 않는 점이지만 조총을 발사할 때 나는 격발음은 적군의 사기를 꺾는다. 화약 무기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물론이고 어느정도 화약에 익숙해진 후라도 화약이 내는 굉음은 기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5.2.3. 조선에서[편집]


군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장기는 궁전(弓箭)이 최고인데, 편전(片箭)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妙法)은 조총(鳥銃)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단 조총을 사용하면서 편전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새것만 좋아하고 옛것은 염증을 낸 나머지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과거를 보일 때마다 특별히 편전에 대한 시험도 보여 따로 상을 주기도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편전을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 인조 6년 무진(1628) 9월 29일(병술)


적을 방어하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장기(長技)는 원거리에서는 궁시(弓矢)이고 근거리에서는 도창(刀鎗)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종조에는 각 고을에서 월과(月課)로 군기(軍器), 궁시, 도창 (원문 빠짐) 임진란 후에는 단지 조총(鳥銃)만을 숭상하여 평상시 월과에서 도창을 완전히 폐지해 버리고 또 (원문 빠짐) 그 과목을 회감(會減)하였으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 그런데 조총이 개설된 후로는 (원문빠짐) 포수(砲手)라 호칭하고 모두 편안히 앉아만 있으면서 편전을 익히게 하지 않으니 또한 매우 타당치 않은 일입니다. 역시 해조로 하여금 조종조의 옛 규례에 따라 각별히 편전을 장려하여 급한 상황에 대비하는 계책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인조 4년 병인(1626) 4월 8일(경진)


  • 사실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명제 자체가 의심스럽다. 승자총통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화약 무기를 통한 화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개인용 소화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34]

  • 조정이나 일선에서 거론했던 궁시 만능 이론과 조총 회의론은 무기 자체의 성능보다도, 구시대적인 군기를 강조하는 정신론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요즘 군인들은 총이나 쏘니까 군기가 빠져가지고 말이야"라는 식의 보수적인 군인관에서 나온 주장으로 보는 것이다. 이게 영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아닌게, 조선은 궁술을 군인 기본 능력으로 보아서 활을 못 쏘면 진급도 안 될 정도였고, 궁술을 군인들의 군기 / 훈련도를 가늠하는 제식 척도로서 챙겼기에, 이런 주장을 반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총 개조가 진행된 이후, 오히려 후기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음을 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궁술은 선비들의 교양 과목 중 하나였으며 싸우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수양으로 활용하는 전통 무예였다. 그러므로 조총의 전술적인 중요성을 둘째 치고 궁술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당시 사상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위에 사료를 볼때도 일반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문과가 아니더라도 엄밀히 과거를 보고 기본적으로 선비가 돼야 하는 무관들이 궁술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자세를 한탄하는 모습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적인 중신들이나 무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선진적인 총기 도입 <<<<<< 병사들의 정신 무장"이라는 사고 방식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주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따져봐야하는 것은 어째서 활을 버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활이 총보다 장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총이 빨라봤자 분당 2발, 화살은 분당 8발이나 가능한데, 장전하는 사이에 칼맞아 죽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 화살의 사정거리를 근거로 들어 궁시의 잔류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론도 있으나 실상 훈련용으로나 쓰인 목전 혹은 숙련된 자들이나 쓸 수 있었던 편전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더 우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조선이 조총과 활을 운용한 교리를 살펴보면 조총을 다 쏜 뒤에 적이 더 "가까이" 왔을 때 활을 쏘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조선인 부터가 이미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앞섰다고 판단하진 않았다. 게다가 갑옷, 방패, 바리케이드 등을 고려하면 활의 실질적 사거리는 더 축소된다. 이보다 근본적으로 활이 계속 조선에 잔류한 이유는 조총이 계속해서 화승을 쓰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중 적이 언제 어떻게 기습할지 모르는데 화승은 그 특성상 계속해서 유지할 수도 없었고 기습중에 (기습을 방어할 때나 혹은 기습으로 공격을 가할때나) 갑작스레 불을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한창 회전이 이뤄지는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역시 화승의 특성상 언제 불이 꺼져버리거나 격발 불량이 일어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며 이를 보조하기 위해 언제 어느때나 사용할 수 있었던 활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기병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비록 조선도 나중엔 총기병을 육성하긴 했으나 화승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기병이 조총을 다루는 건 힘든 일이었다.

  • 18세기 이후에는 조총이 활보다 유용한 무기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조총이란 말 자체가 동아시아의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고, 사용기간이나 기술 발전에 따라서 전기형 ~ 후기형으로 나뉜 점도 있으니, 활 VS 조총이라는 주제 자체가 이런 무기의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비교인 것이다. 애초에 조선군에서도 자체 개발한 조총이 활보다 유리한 성능을 가지게 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진왜란까지는 활과 조총이 비등했으나, 이후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역할이 변경되었으며 실제로 관련 논의에서도 어디까지나 '활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유지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가 주로 논의되었다는 점도 결코 간과하면 안 된다. 사실 조선군도 조총의 대형화 혹은 장총신 버전인 천보총을 만드는 등 결코 조총을 천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바탕으로 보면 '조선은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말도 당대의 일부 시각이었을 뿐이지 결코 대세는 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35]

  • 조선 중ㆍ후기의 주력 장거리 무기가 활이었다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 조선의 주요 군사 기관이었던 훈련 도감과 어영청 역시 조총 부대에서 유래되었으며 광해군이 명나라로 파견한 15,000명의 조선군 다수 역시 조총 부대였다.[36] 임진왜란 때 조총은 조선과 명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일기나 인조 실록을 보면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조총을 구입해오라는 지령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힘과 숙련도가 어느 정도 필요했던 궁수나 근접병에 비해 비교적 훈련이 쉬웠던 포수는 조선의 주력 부대였던 속오군에게 딱 걸맞는 무기였다.[37]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확연히 보이는데 1600년대 속오군의 병종 비율의 무려 76퍼센트가 조총병이었다.


6. 역사[편집]



6.1. 중국에서[편집]


본래 중국에는 원나라 때부터 화총(火銃)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이 화총은 서양의 핸드 캐논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현대의 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13세기 몽골의 침략 이후 서양에 화약이 전래되었고, 우리가 흔히 총이라 부르는 경량화를 거치고 방아쇠가 달린 무기는 15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유럽에서 출현한다.

이후 1548년 명나라 군대에 잡힌 왜구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에 화승총이 소개되면서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화승총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보다 늦은 1597년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화승총을 같이 선물로 보낸다. 명나라에서는 왜구를 통해서 들어온 총을 조취총(鳥嘴銃) 혹은 조총(鳥銃),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 들어온 총을 노밀총(魯密銃)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도 명나라가 화승총 같은 개인화기들을 제식무기로 도입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은 남방에서 왜구들과 싸울 당시 사용했던 화기들이 자주 불발되거나 심지어 폭발하는 이유로 화약무기에 크게 의존하지는 않았고, 대신 북방의 기주에서 새로 군 편제를 짤 때 1개 조 20명 중 4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도록 하였다.

여담으로 중국이 불랑기포[38]를 처음 접한 것은 1523년 나포된 두 척의 포르투갈 선박에 의해서이며, 1529년부터는 중국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명나라가 서구인 선교사들에게 직접 생산과 제작 관리를 요청한 것은 주로 대포였고, 마테오 리치 같은 선교사들 역시 명나라의 수요에 맞추어 대포 제작 관리에 집중했지 개인 화기 제작 관련한 기록은 잘 남기지 않았다.

참고로 중국어로는 총을 창(槍)이라고 부르는데[39] 총의 원조가 불화살을 화약으로 추진해 발사하는 송나라 시대의 화창(火槍)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중국어로 창은 총을 뜻하며 개창(開槍)이 발포를 뜻한다. 송나라 초기 화창이 금나라원나라에서 삼안총 등으로 발전했고,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 원정에 화기를 동원하면서 유럽에도 총기 등 화약무기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화승총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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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조총병

이자성을 비롯한 명나라 섬서성의 농민 반란군들과 탈영병들은 초반에는 무장이 빈약하였지만 1640년대에 이르러서는 총포를 대량으로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상당수는 탈영병들이 들고 온(...) 것이었지만[40]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도 있었다. 자체 제작한 화기의 품질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명나라 관료들이 '우리가 보유한 화기는 저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구나'라고 한탄한 사례가 기록에 남아있다. 이자성이 1642년 좌량옥이 이끄는 명나라 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화포의 우세 때문이었다고 평한다.

명나라때는 화포의 활발한 개량과 도입이 이루어졌는데, 조사정이 1603년 작성한 조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등의 명나라 화약 병기 서적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이나 포르투갈의 화승총은 물론이고, 차륜식 머스킷 또한 운용하였다. 특기할 점은 명나라의 화약 무기 서적 중 하나인 하여빈의 <병록(兵錄)>에는 후장식 조총인 자모총과 착탈식 총검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총의 개량과 개발은 왕조가 교체된 후 이어지지 못했다. 사실 애초에 명나라의 신박한 화약무기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것들은 사실 서양에서 영향 받은거고, 원조인 서양에서도 실전성 없다고 외면 받은거라 자연히 명나라에서도 거의 안쓰였다.

이자성의 난 당시 요동 지역을 침공한 후금의 경우 1629년 영평을 점령하면서 유럽인들로부터 훈련받은 총포공들을 찾아내고 1631년부터는 자체적으로 대포를 주조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청나라는 초반에 만주족몽골족 기병팔기군이 주력이었다가 요동을 손에 넣은 후 한족들을 받아 들이면서 팔기한군이라고 해군화포 담당 병과를 신설했다. 특히 모문룡이 처형당한 이후 홍이포불랑기포와 조총을 다루는 그의 부하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 청나라도 조총 및 홍이포를 손에 넣고 병자호란남한산성에 대규모 총/포격을 퍼붓는다. 특히 산봉우리 위에서 성벽 아래로 조총과 홍이포를 대규모로 퍼부어 성벽 일부를 부수고 다수 조선군을 저격해 전사시켜 버렸으며 이는 인조가 결국 항복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41] 입관 이후 강희제부터는 한족 용병인 녹영을 두었는데 이 녹영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런 조총병의 활약은 마지막 유목 제국이었던 준가르를 지도상에서 지워지게 만들었다. 물론 준가르 정복의 주연은 기병팔기군이었다. 문제는 건륭제 사후 팔기군은 오랜 평화에 젖어버려 군마를 팔아 치우고 몰래 장사를 하는 등 전투력 저하 행위를 했고 그 자체가 특권층화되어 무력 집단으로서 기능을 잃었다는 거. 그래서 나중에 군마 부족으로 기병이어야 할 팔기군 대부분이 몽골팔기만 남고 나머진 보병으로 전락했고 그 땜빵은 총포를 운용하는 녹영이 해야만 했다.

일본이 에도 시대 이후 무장 억제책으로 총기발전이 없었듯 중국도 만주족들의 통치 이후 총기발전은 없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권력 유지에 핵심이었던 청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한족들의 무기인 화기연구는 답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화약무기는 한족들의 전유물 비슷한 취급이었다 심지어 19세기 초반까지 팔기군이 유지되어 창병과 궁병이 편제에 남아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아편전쟁 당시에는 수석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청이 자랑하는 몽골팔기와 구식 조총을 쓰는 녹영 등이 모두 일방적으로 갈려나갔다. 물론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로 일본도 에도 시대가 열리며 민란을 우려해 조총을 대거 몰수하면서 총기발전이 없었다.[42] 결국 일본과 중국이 조용하던 시기 오히려 영조 때 박영준이 천보총을 발명하고 기병을 조총으로 무장시키는 총기병이 등장하며 네덜란드 출신 박연 등을 통해 서양 화포에 대해서도 익히는 등 되려 1700년대 화약무기는 조선이 발전시켰다. 애초 오랜 평화에 젖게 된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은 남방으론 일본, 북방으로는 청나라와 접했으며 둘 다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를 쑥대밭을 만든 적이 있어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애초 천보총의 발명 목적 역시 북방 오랑캐들인 몽골족과 만주족의 팔기군 기병과 남방의 일본 조총부대를 모두 제압할 무기가 필요해서였다.[43]

이후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팔기군과 노궁수(...)들이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에 썰려버리자 충격을 받고는 서양식 무기 도입을 재추진해[44] 양무운동을 통해 세워진 군수공장들에서 퍼커션 캡 라이플과 게베어 1871을 생산하는 것으로 조총을 대체하고, 1894년부터는 독일게베어 1888을 주력으로 채용하여 한양식[45] 소총이란 이름으로 라이센스 생산한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중화민국의 혼란으로 군벌 할거 시대가 열리자 국제 무기상들이 팔아치운 온갖 무기들이 중국 내로 들어오면서 민간에서도 조총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 이때쯤이면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은 독일제 무기가 주력무기가 되었으며 군벌들도 서양 각국으로부터 무기를 사와서 각기 무장하기 바빴다. 그러다가 결국 장제스가 북벌로 군벌들을 모두 정리했다. 당연히 민간에서도 조총은 도태되어 쓸모없는 무기로 전락해 버려졌고 국부군 및 중화민국 경찰은 마적 등을 방지하고자 민간에서 무기를 압수하면서 조총은 박물관에 쳐박혀 버렸다.


6.2. 일본에서[편집]



1543년 9월 23일 일본 타네가시마 섬에 표류한 중국 상선에 승선했던 포르투갈 상인한테 타네가시마 영주가 시가 2억 엔 정도의 은을 지불하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한 것이 조총(鉄砲 철포)의 기원이다. 타네가시마 영주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대장장이에게 이것을 복제하도록 명령했고 그 대장장이가 노력 끝에 화승총을 복제해내는데 성공하면서 철포가 일본에 퍼지게 되었다. 다른 설로는 그 일본인 대장장이가 복제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자 자기 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바치면서까지 제작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카사 충효비가 바로 그 딸들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도 있지만 일단은 앞의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어찌됐든 이로 인해 이 거래가 진행된 섬인 종자도(타네가시마)는 그대로 철포를 일컫는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철포를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다. 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철포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였다. 사무라이의 전통과 동떨어진 무기인데다가[46] 조총의 작동 방식의 한계 때문에 이것이 실전에서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국시대였던 만큼 철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도입하는 다이묘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 중 오다 노부나가는 적극적으로 철포를 받아들여 전술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센고쿠 다이묘였다. 가장 강성한 다이묘 중 한명이었던 노부나가는 대규모의 철포 부대를 운용할 수 있었는데 철포의 특성상 이러한 대규모 부대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 철포를 일본 전국에 퍼뜨린 공을 세운 인물은 일반적인 무사가 아니라 승병인 쓰다 산초(津田算長)였고, 쓰다를 중심으로 한 승병 겸 용병집단인 네고로슈(根来衆)는 노부나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575년 전국시대 일본의 판세를 바꿔 놓은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가 활약하며 승리를 거두면서 조총은 일본 군대의 주요 전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다만 이 전쟁에서 노부나가 부대가 "삼단 철포" 전술을 운용했다는 과거의 통설은 후술된 바와 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국 시대 철포 부대의 일반적인 전술은 방패수가 철포 아시가루들 앞에서 적의 활이나 철포탄을 방어해주고 그 뒤에서 철포 아시가루들이 엄호받으며 발사하는 식이었다. 좀 더 조직적인 유격 부대는 방패수는 물론 탄약을 장전해주는 부사수까지 있었다.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중세 시절에 갑옷을 무력화하는 용도로 쓰이던 화약 무기가 마침내 동아시아의 강력한 활이나 석궁에 버금가는 편의성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또한 조총이 아시아에 도입된 이후 다양한 개량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의 대조총, 한국의 천보총 등이 있다. 대조총이 무지막지하게 굵다면 천보총은 총열이 무지막지하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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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토막파와 좌막파가 충돌할 당시의 대조총의 모습이다. 아예 서양식 포대에 얹어버렸다. 여담으로 앉아서도 쏘는 듯하다. (맨 위의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손으로 들고 쏠 때는 온몸으로 껴안고 쏘고 나서 검도에서 기검체일치 지키는 것 마냥 기합까지 지른다.

다만 에도 시대가 열린 이후 일본에서 조총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전쟁은 끝났고, 섬나라이니만큼 주변국의 위협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위층들인 사무라이들 입장에서는 별 훈련을 받지 않은 빈자들도 한방에 무사를 죽일 수 있는 총이 영 고깝게 보였다. 안 그래도 농민들을 심하게 착취하는데 이들이 총으로 무장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무사들 입장에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칼을 무사정신의 정수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총은 전국시대의 지위를 잃어갔다.

물론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각지의 총술이 무술 유파화하기도 했고 막부 직속 군대의 경우 지속적으로 화기를 납품받아 다수가 소총으로 무장했다. 도호쿠의 미개척지에 사는 사냥꾼(마타기)들도 썼고. 또 일부 장인들은 서양 플린트락을 모방한 총들을 시험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47] 하지만 위와 같은 일본의 지위 및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국가적인 차원의 신형 소총 개발 및 소총을 이용한 실전적인 전쟁 전술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총술 또한 예식적인 무술로 변화한다. 오히려 이후로는 가상적국으로 둘러쌓인 조선에서 조총 전술이 더 발전한다. 《병학통》이 그 예.

이후 조총은 19세기 중반 일본이 개항한 이후 도입된 퍼커션 캡 라이플과 샤스포 소총에 자리를 내준다. 민간에 사냥용으로 풀린 것들 또한 20세기 초 30년식 소총이 제식화되고 무라타 소총이 민간에 불하되면서 일부 장인들이 제작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자취를 감췄다.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 모습으로, 중간에 대조총(大筒 おおつつ)을 안고 발사하는 모습과 지지대에 올려 쏘는 모습이 보인다.


6.3. 조선에서[편집]



6.3.1. 임진왜란[편집]




대중매체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보고 '처음 보는' 무기의 위력과 폭음에 조선이 크게 놀랐다는 묘사가 많은데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 조정은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48]

비변사가 아뢰기를,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의 원대로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명종실록 10년 5월 21일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징비록[49]


평의지 등이 공작 한 쌍과 조총 수삼 정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 섬으로 놓아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선조수정실록 22년 7월 1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를 시연한 기록이 있는데 시연 당일날 대신들이 이미 조총의 장단점을 알고 그에 대해 거론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이전부터 이미 중국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조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과 파괴력의 대포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조총과 비슷한 무기인 승자총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임란 초반 조선군의 붕괴에는 조총이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원거리 개인무기의 대명사였던 활은 그래도 나무방패 정도면 거의 확실한 방호가 가능하고 갑옷 정도로도 그럭저럭 버텨볼 수 있지만, 화약으로 추진되는 조총은 갑옷은 물론이고 나무방패조차 뚫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안그래도 훈련도가 낮은 지방군 병사들의 전투의욕을 감퇴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비숙련 지방군이 곡사화기인 활을 쏘는 것과 숙련된 왜군 선발대가 직사화기인 조총을 발사하는 것은 명중률과 살상률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낳을수밖에 없었고[50], 지휘관 입장에서도 당초 활에 의한 피해 정도를 예상했다가 전투가 진행되고 상정했던 규모를 월등히 상회하는 피해가 누적된다면 병사들의 동요는 차치하고라도 작전계획 자체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조총의 폭음이나 섬광도 전의를 꺾는 데 한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조총의 존재를 접하고 분석한 건 일본과 교류가 있던 소수, 그리고 그들 및 외교 채널을 통해 정보와 실물을 입수한 정부에 한정되는 것이지, 임진왜란 때의 징집병 및 의병들은 조총에 대한 정보는 커녕 일본에 대한 지식도 희박한 상태인 것이 정상이다. 게다가 어찌어찌 전쟁 중에 조총의 존재에 대해 전해들은 이후라고 해도 충격효과는 단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총의 일제 사격이 가져오는 쇼크 효과는 생각보다 크고, 훈련도가 낮고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총소리나 일제 사격에 놀라서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심지어 30년 전쟁 당시에 신교도 측 부대가 일제 사격을 한 후 자기들이 쏜 총소리에 놀라서 스스로 붕괴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시험 사격을 한 후 군기시에 보관된 조총을 일반 병사들이 접했을 가능성도 작은데다가, 훈련을 충분히 받지 않은 병사들이 전장의 혼란과 공포에 전염되어서 놀라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최근 들어 화력덕후 조선이 왜 조총 따위에게 그렇게 쪽을 못 썼냐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당시 조선군의 주력전선은 여진족과 맞부딪치는 북방 전선이었지 남방이 아니었고, 만성적인 청동난과 화약난에 시달리던 조선이 아무리 화력덕후라 해도 후방에서까지 총통을 펑펑 찍어내서 쏴제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51] 임란 1년 전인 1591년에서야 병조에서 철환 쏠 줄 아는게 화포장 몇명밖에 없으니 출번하는 병사들 훈련 좀 시켜야겠는데요? 하는 소리가 나왔는데#, 도성에서 복무하는 번상병들을 이제서야 화포 훈련시킨다고 하고 있으니 지방 읍병들이야 뻔한 일이다. 이일이 상주 가서 전투 직전까지 하고 있던 게 습진, 즉 진법 훈련이었을 정도니 이 병사들이 총통에 익숙할지는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다.

반대로 일본군의 주력무기는 창이고 조총은 전체 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데 그 위력이 부풀려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전국 시대 전투 양상을 그대로 임진왜란에 대입해 벌어지는 오류로, 조선에서의 전투 양상은 일본에서의 내전과는 전혀 달랐다. 조선 측의 기록을 봐도 관심은 온통 조총에 쏠려있지 일본군의 장창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우선 대부분 성을 포위해 위력을 과시하고 항복을 받아내던 일본 내에서의 공성전 양상과 달리 조선에서는 초전인 부산진 전투에서부터 항복 그딴거 없이 너죽고 나죽는 진짜배기 공성전이 터졌기 때문에 어딜 가든 철포대가 대대적인 사격을 가해야 했다. 또 일본과 달리 조선군과 명군 모두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보병전에 특화된 일본식 장창병대는 큰 역할을 하기 힘들었고,[52] 조선군 보병은 초반 몇 번의 결전이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 대부분 수성전이나 고지전, 유격전 위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에, 반대로 전세가 역전되었을 때에는 일본군 역시 성에 틀어박혀 농성했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죽어라 철포를 쏴댈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일본 장창병은 명군의 원앙진에게 썰렸다(...)

당시 조선은 당시 조총에 장점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단점 역시 명확했기에 당장 양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군기시에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총은 사용법이 쉽긴 했지만 장전과 조준이 활에 비해 몇 배로 느렸고 사거리나 명중률에서 낫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전 조선군의 주력은 여진족을 상대하는 북방군이었고, 그것도 농민병을 대거 징집하기보다는 갑사로 대표되는 전문 군인 집단 중심의 체제였다. 자연히 마상에서도 이동 표적을 상대로 쉽게 운용할 수 있고 지형적인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활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조총의 대량 운용 능력은 그다지 크게 각광받지 못했다. 뒤에도 서술하겠지만 조선군에는 구한말까지 극소수지만 궁병이 남아 있었다. 실록에 나온 대화를 보면 한쪽은 양산이 빠르고 쉽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같은 조건이면 활이 유리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은 효율적으로 조총을 운용한 일본군의 전술에 그 위력을 실감하고 양산에 들어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이전의 여진족 토벌이나 왜변과 달리 그야말로 총력전 수준의 혈전이었고 자연히 징집된 농민병들을 빠르게 무장시킬 수단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군의 높은 조총 보급률은 속오군으로 대표되는 동원 체제의 정비와도 크게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은 조선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에 조선군은 바로 조총 개발 연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593년 9월 충무공 이순신의 수군이 처음 조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조총을 모방한 정철총통(正鐵銃筒)으로 수군에 빠르게 보급되었고 육군에도 제작법을 전파하여 전군에서 생산하였다. 이순신은 이외에도 화약무기를 중요시해서 승자총통을 개인화기로 대거 확보해 수병들에게 훈련시키기도 하고 천자포, 지자포 등 국산 화포도 포술 훈련을 시켰으며[53] 이순신 부대에 보급된 물건은 이름하야 정철총통이었으며 그 우월한 성능 덕에 이순신 부대의 해전에 적극 활용되었다. 또한 지상군 역시 김충선항왜들이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해주면서 조총은 육군과 수군 모두 조선군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나, 정철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야 온갖 연구 끝에 조총을 만들어내니, 왜놈의 총통보다오 낫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와서 진중에서 시험사격을 하고서는 잘 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 안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마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게 하였습니다.

난중일기 1593년 9월 15일자 다음 장[54]



(승자총통과 조총의 비교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 때문에 장전 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55]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할 수 없었고, 기본적으로 곡사화기인 탓에 명중률과 사거리 모두 패배했다.


6.3.2. 임진왜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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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조총병)[56]

조총 다루는 것이 쏘는 것보다 훨씬 배우기 쉽다는 이점 때문에 이미 인조 대부터 사수 중에서 실력이 떨어지거나 힘이 약한 군인들을 조총수로 전환하는 풍조가 지속되어 나중에 가면 보병에 비해 재력이 좋아[57] 상대적으로 활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기병[58] 정도만 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17세기에 들어서 보병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숙종충청도 군적부를 보면 개인 무기가 명시된 1,300여 명의 속오군 보병 중 76.5%가 조총수였다. 심지어 그 기병조차도 궁기병 비율이 급감하고 충격력을 위해 편곤 등을 쓰거나 아예 총기병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나 병자호란 연간에 궁기병이 전혀 충격력을 보유하지 못한 뼈아픈 교훈 때문에라도 기병의 충격력 향상을 위해 마상편곤 및 창술 등을 단련시켰다.

다만 서양국가들이나 일본군의 살상용 검술 위주의 전술과는 다르게 수성전을 주로 해 원거리 보병의 비율이 압도적이였던[59] 조선군의 특성상 창병 비율이 매우 낮고, 기병에 대응할 수단이 다소 부실하였다. 결국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양간에 원시적으로 무장한 여진족들에게 조총과 화포로 무장하고도 털리게 되었고 병자호란 연간에도 쌍령 전투 등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이 대게 기병청나라 팔기군에게 썰려나가게 되었다.

특히 나선정벌 당시 기록이나 조선시대의 병술서 진법언해에서도 볼 수 있듯 조선군의 조총병 운용은 차후 나폴레옹 전쟁기 유럽의 경보병/라이플맨의 운용처럼 다소 산개된 전열을 짜서 개별 조준사격을 시행하는 방식이었기에 전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이에따라 전열보병 전술에 따라 일제사격 및 속사로 야전에서 기병돌격을 저지하거나, 방진으로 기병을 저지하기에 불리하였고, 그에따라 18세기 말까지 쌍수도를 같이 패용하여 보병의 개별 전투력을 강화하거나 근접 보병의 비율을 늘리는 쪽으로 개선방향이 잡혔다.

심지어 조선에서 사용된 총 자체도 기병을 상대로는 문제가 있었으니 조선에 흘러들어온 총은 해양세력이었던 마자파힛 제국포르투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선상에서 쓰기 편하도록 개머리판이 단축된 총기였다. 가뜩이나 길이도 보병용에 비해 짧은데, 그렇다고해서 나폴레옹 전쟁기의 유럽 경보병이나 전열보병의 긴 총검을 부착하자니 개머리판이 없어 무게 밸런스가 깨져버린다. 이러한 선상총은 원래 명나라를 통해 보급되었다. 명나라의 원군이 남병들은 남방식 선상 화승총으로 많이 무장했기에 명나라 총과 총포술을 받아들인 덕분에 포르투갈식 선상총을 쓰게 되었는데 문제는 근접전이었다. 환도를 패용하고는 다녔으나 막상 주적이 새로 떠오르는 기마민족 여진족으로 바뀌면서 환도를 빼들기도 전에 여진 기병들이 목을 썰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이는 사르후 전투정묘호란의 패배로 이어진다.[60]

결국 이러한 단점에 다른 악재가 겹쳐 병자호란으로 가서는 쌍령 전투 당시 훨씬 다수의 조총병을 보유했던 조선군이 창기병으로 충격력이 엄청난 청나라팔기군 기마대에 모조리 털려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팔기군 중 말 타고 싸우는데 이골이 난 몽골계 차하르할하 부족들, 튀르크나이만족으로 구성된 팔기몽골의 경우 장창박도를 이용해 조선군을 썰어버렸다. 이 약점은 18세기 말까지 쌍수도를 소지하게 한다든가 근접 보병의 비율을 늘리자든가의 식으로 개선 방안이 계속해서 논의되었을 정도로 조선군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청군은 병자호란 때 고위 지휘관 일부가 저격당했던 경험 때문에, 효종나선정벌 당시 조선에게 조선의 조총수를 파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파견된 조선군 조총수들은 러시아군에 맞서 두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둔다.

오랜 평화로 인해 그 이상의 발전된 무기를 만들 필요도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인식이 있고 그 증거로 나선정벌 이후 박연에 의해 플린트락 기술이 들어왔지만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조선의 화기 전술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북방의 청나라와 남방의 일본이라는 양대 가상적국의 존재 때문에 조선은 전술 연구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삼수병 편제에서도 활을 쏘는 사수와 냉병기를 쓰는 살수17세기 중후반으로 가면 거의 도태되어 사라졌고 조총과 환도로 무장한 포수가 주력을 차지했다. 조선도 1700년대로 가면 조총을 쓰는 화승총병이 주력이었으며 곧 병사들에게는 갑주가 서서히 사라지고 군의 경량화가 추진되는 계기가 된다. 이는 화승총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한족 용병대인 녹영이 주전력이 된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역시 팔기군에서 녹영으로 주력이 바뀌며 서서히 군이 경량화되었다.[61] 단지 아편전쟁이나 청불전쟁 등에서는 이미 도태된 무기들인 불랑기포나 캘버린을 주력 화포로 써서 패배했다. 이들 무기들은 당장 원산지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 무기가 뒤쳐져 쇠퇴하던 참이었다.

한편 활은 기병이 사용했지만 기병도 곧 편곤이나 장창 등을 들여와 충격력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총기병 도입이 시도되기도 했다. 영조시기에 천보총을 개발하는 등 사거리를 늘려보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존재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18세기 초에 이르면 동아시아의 화기 전술은 조선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중국의 경우 만주족 기병 중심으로 건국된 청나라는 피지배 민족인 한족들을 손쉽게 무장시킬 수 있는 총을 좋게 보지 않았고 곧 화기연구를 금지했다. 결국 지배층 만주족은 계속 만주-몽골 기병들이 주력인 팔기에 만족했으며 팔기가 전력이 떨어지자 한족들의 조총수 부대인 녹영에 의지해야 했다.

물론 명나라 때부터도 이미 유럽 화기들을 접하며 원조임에도 유럽보다 화약무기가 뒤쳐졌단 걸 인정하고 유럽산 화기들을 명 조정에서 받아들이며 왜구나 서양 세력 그리고 동남아시아 해적들을 상대하던 남병에 보급한다. 그 산물이 바로 포르투갈 대포인 불랑기포와 선상 화승총인 명나라 조총이었다. 이로써 '명나라 시절까지는 유럽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고 잠재력도 넘쳤던 중국의 화기와 전술은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라는건 명나라 화기를 소중화 사대주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다. 단지 청나라한테만 책임을 씌울 필요가 없고 냉정히 말해 이미 명나라 때 부터 유럽한테 화기 기술이 뒤쳐졌다. 애초 그랬으니까 불랑기포나 조총 같은 걸 받아들인 거다. 포르투갈불랑기포네덜란드산 캘버린포인 홍이포는 기존 명나라 화포를 밀어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으며 방아쇠와 격발기구를 갖춘 당대의 신무기인 매치락 역시 전파된 후 '나는 새도 맞추는 총'이라는 뜻의 조총 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제식병기로 채택됐다. 또 명나라가 만들었다며 인터넷에 떠도는 신박한 무기들은 실제로는 유럽의 것을 복제, 모방한 것이며[62] 본국인 유럽에서도 '실전성이 없다.'며 잘 안 쓰인 화기라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명은 마카오 조차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을 접하며 이들이 내놓은 화약무기들에 매료되어 마카오를 통해 이것저것 받아들이고 기존 화창이나 삼안총 대신 조총을 남병의 화기로 대체했으며 임진왜란 연간에도 남병들이 파병되어 잘 써먹었다. 그리고 북방에서 몽골족을 상대할 때도 유럽산 화기를 썼다. 단지 모문룡의 죽음 후 한참 뒤에 그의 선단이 대규모로 후금에 투항하며 이게 나중에 만주족들의 손에 들어갔을 뿐이다. 후금에 명 장수들이 화약무기와 해군을 들고 투항한 건 모문룡이 죽기 전부터 있던 일이었는데 모문룡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이게 대놓고 일어났을 뿐이다.


조선시대 조총의 종류
출처 - 금수 블로그
조총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기병이 사용하는 카빈/권총 포지션의 마상총, 일반 조총보다 짧은 단조총, 일본에서도 사용되던 대조총[63] 등이 있었다. 위 그림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총통/저격소총 개념의 천보총 또한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군은 운요호 사건 때까지 조총을 운용하다 퍼커션 캡 라이플을 시작으로 서양식 소총들을 대거 도입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주력 소총으로 미제 레밍턴 롤링블럭[64] 러시아제 베르단, 독일제 게베어 1871이 있다.

조선에서는 민간에서도 적지 않은 조총이 풀려있었다. 청나라 사람이 백두산과 영고탑에서 본 조선인들이 조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65] 조선과 청의 국경 근처에서는 이전부터 산삼 등을 노리고 월경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숙종 시기에는 조선인들이 조총으로 청의 관리를 쏴서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청에서 사람을 보내서 경고하는 일도 있었다.[66]

심지어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 및 동학교도들도 죽창을 휘둘렀다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조총을 주로 사용했다. 우금치 전투에서는 단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에게 화력에서 밀렸을 뿐이다. 우금치 전투의 주력은 엄연히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이었고 일본군은 소수였다. 일본군이 지휘권을 갖고 있었을 뿐이며 일본군 대부분은 참모진이라서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를 관찰했다. 당시 관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의 기관총과 크루프 야포, 스나이더 소총 등 서양에서 도입한 무기들을 바탕으로 무장했다. 관군이 도입한 무기들은 서양무기에 관심이 많던 고종이 도입한 것들이었으며 이 때 서양식 머스킷과 기관총, 야포 등도 역시 빠른 속도로 조선군에 보급되었다. 그 결과 중세시대 화승총이 주력이던 농민군은 최첨단 무기를 쓰는 관군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67]


7. 논란[편집]



7.1. 아퀘버스인가 머스킷인가[편집]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조총이 머스킷이니 아퀘버스니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쉽게 단정하기가 힘든 것이, 일본 내에서도 16세기 초 유럽의 화승총 같이 비교적 작은 것부터 더 무겁고 구경도 큰 머스킷 이상으로 큰 것까지 다양한 구경의 소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아퀘버스든 머스킷이든 간에, 화승총 혹은 전장식 총기라는 더 큰 분류에서 보면 기술적인 차이점은 크게 없다. 간단히 말해서, 서양에선 아퀘버스가 나오면서 그에 대한 카운터로 갑옷이 더 두꺼워졌고, 그걸 다시 카운터 치기위해 대구경 아퀘버스 개념으로 머스킷이 등장하며, 아케버스는 비장갑 병력을 대상으로 활용되게 된 덕택에 화승총 체급을 구분해서 쓰다보니 나온 분류일 뿐이며, 많은 경우 두 용어를 혼용할 정도로 그리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애초에 16세기 중반엔 오히려 머스킷을 더블 아케버스라고 부를정도로 아퀘버스=총이었으며 17세기 중반 즈음 갑옷을 늘려봤자 총 구경이 늘어나면 장사없다는게 알려지며 두 총기가 하나로 통합되던 시절[68]에도 아퀘버스란 표현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한참이 지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머스킷&퓨질=총으로 정착하게 되며, 구경이 작은 다른 전장식 소총[69]이나 경우에 따라선 리볼버식이나 후장식 개조품을 포함한 전장식 스타일의 일부 초기 후장식 소총까지 퉁치는 표현으로 쓰였다. 심지어 아퀘버스와 머스킷이 공존하던 시절에도 나라마다 구분이 다른 바람에 스페인이나 프랑스, 독일에선 구경과 단각 받침대의 유무를 기준으로 받침대를 쓰는 구경 큰 총은 머스킷, 받침대 안쓰는 구경 작은 총은 아퀘버스라고 부르는 바람에, 용병들이 임금을 더 받으려고 소구경총도 받쳐서 사격을 하거나, 반대로 고용주가 임금을 깎으려고 머스킷을 아퀘버스와 보행용 지팡이라고 우기는 사례까지 있었다.

그런데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선 브리건딘/두정갑 정도만 관통할 수 있는 화력이면 충분하다 보니 대구경 아퀘버스 자체가 그리 필요가 없었고 총기가 도입되었다고 갑옷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주력 보병화기를 유럽에서처럼 아퀘버스와 머스킷으로 구분하며 운용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단어로 따져도 일본에선 철포, 조선에선 조총으로 불렀고 총기 유입경로가 다양해서 아퀘버스와 머스킷을 접할 수 있었던 명나라에서 조차조총으로 퉁쳤다. 그나마 명나라 화기 전문가나 돼서야 일본총/소서양총/대서양총/루미총을 따졌는데 지발식/순발식의 차이와 유입 경로를 기준으로 구분했을 뿐, 크기와 구경을 엄격하게 따져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70] 루미총은 하서회랑을 통해 접하던 오스만 제국티무르 제국튀르크인들이 쓰던 총으로 루미는 로마를 뜻하는 말인데 당시 튀르크인들이 오스만 제국 수도인 이스탄불을 로마라고 일컬어 붙힌 이름이다. 그리고 서양총은 포르투갈인들과 스페인인들이 전래한 물건들로 마카오를 통해 받아들였으며 대 왜구 최전선인 남병 및 수군에 배치되었다. 애초 포르투갈과 스페인도 선상용 총으로 개발된거라 수군이 사용하기 편리했다.

게다가 조선군의 조총 같은 경우에는 아퀘버스 계통에서 유래했는데도 점점 커져서 결국 18세기아퀘버스와 머스킷의 중간급 화력을 지닌 무기가 되었으며 명나라의 지발식 조총은 분명 머스킷 계통에서 유래했는데 화력을 줄이는 대신 아퀘버스급으로 경량화되었으니, 조총엔 굳이 유럽의 아퀘버스-머스킷 공존기에 나온 변칙적인 분류방법을 적용할 필요도 없고, 거의 한 종류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사용했기에 따로 분류해야할 대상도 없다. 그저 조총/철포=총일 뿐이었다.

사실상 아퀘버스와 머스킷의 구분이 후대에 유물들을 통계와 계통등을 기준으로 나누면서 정립되었고, 현재의 정의에 따라서도 천보총과, 명나라산 지발식 조총 등, 갑자기 아퀘버스에서 머스킷이 튀어나온다던가, 머스킷에서 아퀘버스가 튀어나오는 사례도 존재하므로 동아시아 조총을 한가지 분류로 재단하는건 딱히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기술으로 보건 언어로 보건 구분하는 의미도 딱히 없다. 심지어 임진왜란시기에 유럽에선 이미 아퀘버스와 머스킷의 구분이 사라지며 과도기형 머스킷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차라리 머스킷 - 아퀘버스 시대의 중기형 화승총들이 라이플로 발전해가는 단계의 기계적인 구분을 보고 평가하는게 생산적인 비평이다.[71]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국가와 유럽 국가간의 화력등을 비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동아시아 조총 중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아퀘버스 계통이 맞다! 반면 루미총을 위시한 명나라의 조총은 머스킷 계통이다!

유관상 쉽게 드러나는 구분은 개머리판이다. 아퀘버스라는 단어 자체가 굽은 총이라는 뜻이고, 이는 막대기가 달린 핸드캐논과 구분하기 위해 붙은 아퀘버스의 특징이었는데, 차후 등장하는 머스킷은 반동 조절을 위해 총 뒤에 개머리판이 붙게 된다. 단, 이런 개량점은 후기형 아퀘버스에도 적용되다보니, 경우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단각대와 함께 정황증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확실하게 구분이 나눠지는 총의 위력, 즉 구경이 기준이 된다.[72]

먼저 임진왜란과 동시기의 유럽의 경우, 16세기 중후반 아퀘버스와 머스킷이 점점 통합되며 과도기형 아퀘버스인 Caliver가 등장하게 되는데, Caliver의 구경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대략 14.7mm(.58")~17.5mm(.69")선, 무게로는 18g~30g이었다. 이는 18세기 플린트락 머스킷 구경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가장 큰 총알을 쓴걸로 유명한 영국의 브라운베스를 제외하면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미국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국가가 사용하는 구경이었다. 반면 16세기 말엽 임진왜란 시기의 조총은 평균적으로 4몬메~5몬메(15g~18.75g)의 탄환을 사용하였는데, 위에 언급된 과도기형 아퀘버스 탄환 중 가벼운 축에 속한다.[73]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이나 명나라로 유입된 순발식 조총들은 순발식 단락에도 나와있듯 마자파힛 제국포르투갈/ 스페인 등 해양세력들이 선상에서 쓰기좋도록 경량화한 아퀘버스였기 때문이다.[74]

조선은 초기 일본에서 조총을 도입하여, 탄환의 무게가 평균적으로 19그램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는데 이 역시 과도기형 아퀘버스의 구경 범주에 들어간다. 현대의 지정사수소총 겸 거치화기에 가까운 천보총은 머스킷급의 화력이나, 이 역시 표준보병무장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조선은 조총의 구경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18세기 즈음에 이르러선 아퀘버스와 머스킷의 중간급, 즉 당시 유럽 표준 머스킷급까지 늘어난다.

명은 아예 아퀘버스와 머스킷 둘 다 교역을 통해 도입한 바가 있다. 하서회랑을 통해 위구르인들이 오스만 제국이나 북인도, 페르시아 등에서 들여온 오스만 제국계 루미총은 대놓고 거치대와 개머리판이 달린 머스킷이었고 마카오인도 남부의 포르투갈필리핀 제도의 스페인, 대만 섬네덜란드, 그리고 마자파힛 제국 등의 해양세력과 교역을 통해 얻은 소서양총/대서양총과 일본산 조총인 일본총은 대체로 아퀘버스였다.[75] 명나라는 머스킷인 루미총을 더 선호했으나 대구경이 그닥 쓸모가 없었다고 판단하였기에 경량화하고 개머리판을 생략하는 방향으로 개량하여 최종적으론 머스킷과 아퀘버스의 중간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명의 서양총과 루미총은 임진왜란에 파병 나온 후 남병이 잘 써먹고 임란 이후에는 일본총도 관심을 갖고 들여오기 시작했다.


7.2. "삼단 철포 혁명"[편집]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 부대를 유력하게 활용하며 전장의 승기를 잡은 기록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셋으로 나눈 후 그 중 한 부대가 조준하고 발사하는 동안 다른 부대는 장전을 하여 전체적인 공격 중단 시간을 크게 줄임으로써 적 부대를 격파하였다는 것이 널리 퍼진 주장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삼단 철포 혁명으로 나가시노 전투를 이겼다는 것은 허구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더해 노부나가는 실제로는 이런 3열 교대식 사격 전술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전투 문서 참조.

게다가 삼단 철포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혁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조총 이전에 재장전이라는게 필요한 무기가 없는 게 아니다보니 궁병도 유사한 방법으로 이미 운용하고 있었는데, 중국 송나라 때의 병서에 보면 쇠뇌로 3열 교대식 진을 치고 연달아 쏘는 형태의 진형이 등장했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교대 사격 전술은 나가시노 전투 훨씬 이전에도 사용된 바 있다. 1525년 프랑스군스페인군이 맞붙은 파비아 전투에서 스페인 소총수들이 이런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는 오스만 제국예니체리 소총수들이 9열로 서서 교대 사격하여 헝가리 기사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조총보다 점화 체제가 뒤떨어진 승자총통을 주력 개인 화기로 사용한 조선에서도 승자총통 창제자인 김지가 승자총통수를 3열로 배치해 교대 사격하는 전술을 생각해냈다.

또한 조총 자체가 근본적으로 유럽에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교대 사격의 개념 또한 유럽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유럽에서의 교대 사격과는 양상이 다르고 유럽에서의 전투 양식으로 그대로 들여오려면 교관이 와서 훈련이라도 시키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장전 시간이 길다는 문제 때문에 여러 명이 한 조를 이루고 교대로 사격한다"는 정도의 개념은 몇 마디의 말로도 쉽게 전해지는 만큼, 총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군에서의 사용법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8. 무대뽀, "무텟포(無鉄砲)"[편집]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나 그런 사람'이란 뜻의 일본어다.# 한자 없을 무+철포(조총).

한국어에서 무대뽀라는 단어는 1997년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란 영화에서 '무대뽀 정신'을 강조하던 송강호의 인상깊은 연기 덕분에 유명세를 탔다. 물론 이 때 처음 쓰인 건 아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은 일본어의 잔재로 "일본 말 잔재를 없애자"는 순화운동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되는 단어였다.

MBC TV 일일연속극 「어머니」 대사 중 「무뎃뽀」 「삐까삐까」란 일본 말이 버젓이 방영되고 있으니 방송작가나 PD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무뎃뽀」란 일본인들이 한문으로 「無鐵砲」라 쓰고 「방향을 안보다」의 명사로 쓰는 말이다. 구태여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鐵砲」는 일어의 「小銃」을 말함이니 총없이 무턱대고 「돈키호테」와 같이 싸우러 나가는 어리석은 행동을 말한다. 일어를 외국어로 알고 쓴다면 무엇을 탓하랴마는 자칫 우리 말인줄 알고 쓰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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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일어 잔재를 씻자' 中 (동아일보, 1982년 9월 2일자)

그러나 무텟포의 어원은 철포가 없다는 뜻[76]의 무철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無手法 또는 無点法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테지 참고. 하지만 현대 일본인들도 대부분 한자를 조총에 해당하는 텟포를 쓴 '無鉄砲'가 완전히 정착된 상태다.

9. 대중 매체에서[편집]



9.1. 한국 사극[편집]


제작비 부족과 고증 무시 때문에 소품용 조총의 퀄리티가 저질스러운 심지총 수준인 물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요즘엔 고증을 신경쓴 작품들도 등장하는 추세지만 제작 노하우를 전혀 공유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준다. 실제로 추노에서 준수한 고증을 했지만 후속작인 조선총잡이에서는 허접한 소품이 등장한 사례가 있다.

일반적인 편견(심지에 불 붙여 다 타면 발사) 때문에 과거 임진왜란을 다룬 대부분의 사극에서 조총에 다들 심지를 끼우고 있었으나 시청자들의 오류 지적이 심해서인지 그런 모습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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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보기[77]

'추노'에서는 기존의 드라마들을 능가할 정도로 정확하게 나와 호평을 받았다. 다만 여기서는 화승에 연결되는 화문에 화약을 넣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하지만 작품 감상과 몰입이 방해 될 정도로 고증을 지나치게 무시해 온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 정도 고증이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창작물인 드라마이니 만큼 고증과 작품성 및 영상미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잡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면에서 추노의 조총 묘사는 좋은 평을 들었다.

과거 베스트셀러였던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안토니오 꼬레아30년 전쟁에 임해 전쟁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타네가시마[78]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리는데, 머스킷보다 구조상으로나 위력으로나 그다지 우월하지도 않은 일본 조총을 역수입할 이유가 전무하다. 대표적인 고증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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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방영된 '조선 총잡이'에서 또다시 심지총이 등장했다. 자칭 '총잡이 액션'이라면서, 추노에서 제대로 고증한데 비해 수년전 사라졌어야 할 심각한 고증오류가 다시 등장한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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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아예 용두가 사라져 버린, 정말 옛날 사극에나 볼 법한 소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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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회상씬에서는 매우 부족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 발전된 소품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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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방영된 왕의 얼굴에서는 영화 명량의 소품을 이용해 비교적 고증이 된 조총이 등장하여, 조선 총잡이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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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제작된 징비록(드라마)에서도 고증이 잘 된 조총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15화에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화승이 점화 화약에 불을 붙이는, 앞뒤가 바뀐 모습을 보여주는 미스를 선보였다. 화약 접시를 개폐하는 화문도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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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해에 나온 화정에서 또다시 심지총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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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르후 전투 장면에서는 제대로된 격발 방식의 조총을 구현해냈다...고 하지만 생김새를 보면 장식용 플린트락 머스킷에 부싯돌 대신 심지만 끼운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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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에서는 징비록에서 사용했던 소품을 재활용하였다. 재장전하는 장면에서 화약이 흰색으로 나오거나, 화승 심지가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발사되는 장면이 나오는 오류를 범하고 위력도 명량에서와 같이 상당히 큰 것처럼 나온다. 그래도 흑색화약이 연소되면서 발생하는 연기를 CG로 재연하였고, 총성도 화승총에 근접하게 나오는 등 징비록보다 더욱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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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명량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고증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바, 자세한건 명량/고증 문서에서 '전술 관련' 목차 참고.



남한산성(영화)에서 최고의 고증으로 조총을 묘사했다.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 끌여들여서 교대 사격으로 예봉을 꺾는 모습과, 지나치게 먼 거리에서 사격하여 운용 실패로 순식간에 패주하는 장면이 동시에 등장하여, 조총의 장단점을 조총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가 가능하도록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기 조선군 특유의 삼수병의 운용방식까지 고증되었으니 거의 완벽한 셈이다. 다만 어째서인지 활을 쏘는 사수는 등장하지 않았는데, 상기한 인조 실록에서 보이듯 조총 도래 이후 사실상 활이 퇴출되다 시피했다는 기록을 차용했을 수도 있다.

영화 검객에서는 구루타이를 따르는 병사들이 소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한 무리의 조선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전멸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9.2. 외국 사극[편집]


일본 사극에서 전국시대를 다룰 경우 자주 등장한다. 고증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2~3개 조로 나누어 사격과 재장전을 교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사수는 사격만 하고 부사수가 총을 건내받아 재장전해주는 방식으로 계속 사격하는 모습 등도 등장한다. 공영방송인 NHK에서 몇년마다 한번씩 전국시대 사극이 계속 제작되는 만큼 소품이 잘 구비되어 있다.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본토결전을 앞두고 병기고를 시찰하는 내각 인사들 앞에 결전병기 중 하나로 전시되어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2012년 영화 노보우의 성에서는 기마철포대도 등장한다. 기수가 직접 쏘는 총기병은 당연히 아니고, 기마 무사들이 각자 뒤에 철포병을 하나씩 태우고 이동하는 식으로 급조된 편성.



9.3. 게임[편집]


황당하게도 야쿠자 액션 게임 용과 같이 2에서 사용 가능한 총기로 등장한다. 센고쿠파 본부(마개조 오사카 성)에서 등장하는 조총병들이 들고 나오는 일반 조총("화승총")과 투기장에서 코마키 소타로 할배를 쓰러뜨리면 입수 가능한 유니크 버전인 "코마키 가문 비전 화승총(古牧家伝統火縄銃)" 두 가지가 등장한다.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선 드레빈 샵에서 구입 가능한 무기로 등장하는데 가격도 비싸거니와 리로드 타임이 무지 길고, 총알도 드레빈 샵에서만 구입 가능하다. 하지만 야외에서 사용시 일정 확률로 카미카제가 발동, 맞은 적은 대량의 아이템을 뿌리고 사망한다. 하지만 노킬 노얼럿 플레이시엔 의미가 없으니 결국 취미&칭호 습득용 무기. 하지만 이 카미카제는 시체에도 적용된다. 즉 이벤트로 어쩔수 없이 죽어서 널부러진 시체를 쏴주면 대량의 탄약과 레이션을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주변에 적이 있는지 확인은 필수. 해볼려면 ACT.1의 B&B 부대에 학살당하는 민병들 시점이 적당.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어설트 라이플류로[79] 등장. 설계도는 EXTRA OPS 121번 혹은 122번을 클리어시 랜덤 확률로 등장. 성능은 랜덤 확률로 카미가제 발생 이후 적을 풀톤 회수. 그런데 MSG4에서 보여줬던 카미카제보다는 뭔가 좀 시원찮다. 그리고 적이 끌려올라갈 때 모습이 안습. 만약 이총을 공격용으로 사용하려면 포기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한 발 쏠때마다 재장전에 이동도 못한다. 단, 조총 특유의 리로드 모션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써도 좋다.

혹시 FPS 게임에서 조총을 쏴 보고 싶다면 배틀필드 1942전국시대 모드를 설치하여 플레이 해볼 것. 참고로 최대 휴행 탄수는 7발이며(진지 내의 무기 상자 찾아가면 충전 가능하다), 한발 쏘고 장전할 때 마다 매우 훌륭한 리로드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RTS 게임 중에서는 HQ Team의 임진록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게임 자체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지라 일본 진영에서 조총병이 등장하는데, 사거리는 조선 진영의 궁수에 못미치지만 데미지는 원거리 공격형 보병 유닛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다만 RTS의 한계상 길고 아름다운 장전은 나오지 못하고 결국 반자동 소총급이 되어버린 문제는 있지만, 활에 비해 사거리가 짧지만 파괴력이 높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는 성공한 편...이려나? 참고로 어째서인지 일본 진영에 조총병이 있고, 명나라 진영에 화승총병이라는 유닛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 조선만 활이다. 그러나 구버전인 임진록1 때는 화승총병은 조선 유닛이었고, 조총은 활이나 화승총보다 사거리와 위력이 더 뛰어났다. 다만 지대공 능력이 활에 비해 많이 약했고, 이 상성은 조선의 반격까지 이어졌다.

또다른 국산 RTS 충무공전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충무공전2에서는 일본의 조총수(총병)이 조선의 기마 유닛과 함께 게임의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유닛이다. 초반부터 거의 중반 유닛에 필적하는 데미지로 조선군 유닛들을 섬멸하는 성능을 보여준다. 마이크로 컨트롤식 RTS치고는 조총의 미칠듯한 장전 속도도 매우 잘 반영되어 있는데, 얼마나 느리냐면 업그레이드를 하기 이전에는 조선군 궁수가 2발 ~ 3발쯤 쏠 때도 재장전을 하고 있다. 재장전 중에서는 무빙샷도 안 돼서 총신을 청소하다가 활이나 칼에 난자당해서 죽는다. 장전 속도 업그레이드를 하면 궁수가 1.5발 ~ 2발 쏠 때 한발 쏘는 정도로 변하지만 그래도 느리다.

토탈 워 시리즈의 작품 중 하나인 토탈 워: 쇼군2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난반[80]과의 무역을 통해 얻는 방법과, 철포 국산화(Gunpowder Mastery) 기예를 습득함에 따라 얻는 경우가 있다. 철포 계열 유닛들은 전국 시대 유닛들 중에서는 사거리 내 화력만은 최강이지만 문제는 그놈의 사거리와 앞의 아군을 넘겨 쏠 수 없다는 점, 결정적으로 그 길고 아름다운 장전 속도. 제대로 운용하면 파괴력으로 기병이고 보병이고 다 썰어먹을 수 있지만 운용에 미숙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사용하기 힘들다. 우리가 아는 조총의 위상과는 달리, 쓰기에 따라 확 달라지는 병과. 그래도 무지 강력하다. 자세한 정보는 여기서 확인하자.

코에이의 전국 시대와 관련된 게임에서는 당연히 무조건 나온다. 다만, 이쪽은 조총이 아닌 철포로 언급되는데다가 철포가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는 태합입지전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조총의 시작은 신장의 야망11 천하창세부터 나온다. 다만 폭설이나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으며, 우철포로 양산이 가능한 군주의 규모는 패자부터이다. 더군다나 접근전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방어 수단이 없는데다가, 방어력은 검병이나 창병에 비하면 엄청나게 허접해서 근접용 부대가 몸빵 정도는 해야 된다. 남만 문화가 많이 올라간 상태에서 수성전으로 몰리면 화살탑이 조총탑으로 강화되면서 점령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공격 측은 사기가 많이 올라가지만 그 만큼 점령도 어렵다. 문으로 통하는 입구가 하나인데 조총탑이 2개 이상이면 어지간한 군대는 뚫어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독자 가문 고유기인 삼단구 / 원당 / 원규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신장의 야망12 혁신부터 등장하며, 이 독자 고유기는 타 가문에도 공유되지 않는 가문 전용 최종 병기다. 이는 이후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계승이 되며, 철포를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 가문이 대부분 우위를 점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최종 테크인 왕정 시대에 대학에서 연금술을 업그레이드하면 궁사양성소에서 생산할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조총이 아니라 핸드 캐논이다. 실제로 영문판에서는 'Hand Cannoneer'라고 나오지만 한글판에서 오역하여 조총수가 된 것. 오히려 스페인 특수 유닛인 정복자(콘키스타도르)가 조총수에 더 가깝다.


10. 기타[편집]



대한민국에서 '옛날 총' 하면 가장 먼저 '조총'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 시대 역사에서 임진왜란이 하나의 분기점으로 나뉠 정도로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대중들 사이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무력화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니[81]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총과 친숙해 지는 것이다.

2차 대전 말기 일본에서는 본토 결전용 병기라는 명목으로 학교 책걸상을 분해한 다음 다른 재료들과 함께 대충 만든 조총이 등장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알루미늄에 화약을 넣고 위에 성냥을 꽂은 수류탄과 활, 죽창, 대공 투석기를 만들어 지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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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시기 등장한 일본의 6연발 조총. 페리 제독의 철갑선과 함께 일본에 알려진 발전된 총기 형태들을 조총으로 대충 이리저리 맞추어본 것이다. 서양의 머스킷이 그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저런짓을 한 반면에 동아시아의 경우엔 유럽의 발전된 총기 형태에 놀라서 조총으로 따라 만들어 본 것이라 그 둘을 비교하기엔 좀 그렇다. 일단 저런 방식으로 된 조총의 사용법은 총신 6개를 모두 장전한 뒤, 손으로 총신을 돌려가며 한발씩 쏘는것이다. 페퍼박스 리볼버 초기형과 동일한 구조.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오뢰신기'라는 5연발 조총과 3연발 조총을 개발했으나, 어느 것이든 나중에 다 하나하나 수동으로 장전해야 한다는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이런 조총들은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거기다 무겁고 다루기도 불편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 3연발 조총은 서북 지역에서 조금 쓰였는데, 지역 특유의 거친 강풍 속에서 조금이라도 맞출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BB-GUN 메이커인 KTW[82]에서 타네가시마(タネガシマ)[83]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가격은 11만엔(대략 110만원)이며, 실총의 까다로운 장전방법을 간소화 해서 볼트액션 소총처럼 작동한다.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에서는 플라즈마 조총등장한다는 드립이 있다.[84]

그리고 가면라이더 가이무에서는 진짜 조총이 모티브인 화승대등 DJ 총이 나왔다. 그 다다음 해 작품인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도 조총이 모티브인 간 건 핸드간 건 캐처가 나왔다.

2015년에는 한 역사동호회가 박물관의 복제 허가를 얻어서 실제 사격이 가능한 조총을 복원했는데 이 때문에 논란이 벌어졌었다. 복제를 허가한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복제 허가는 화승총의 외형만 복제하라고 한 것이지 총기를 만들라고 한게 아니었다'라고 설명하였다. 동호회 측에서도 위험성을 알고 정식으로 총포 소지 허가를 신청했지만, 경찰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함부로 허가를 내 줄수 없다고. 현행법상 유물을 복제한 뒤 이 복제품을 관리 규제할 법령이 아예 없다.#

조선시대에 쓰인 권총도 있다. 권총/역사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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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물관 측 설명에 따르면 일본제 수입품으로 추측된다고 한다.[2] 격발장치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3] 명나라는 가정 27년(1548년)에 포루투갈 총을 입수했고 모방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품에 대한 기록은 1598년에 나오는데 일본 종자도총은 1543년에 종자도로 전래되어 10년도 안 돼 3천정이 대량생산 되었으므로 조총의 유입은 일본이 먼저이다.[4] 무텟포. 일제강점기 때 한국으로 넘어와 은어가 된 '무대뽀'.[5] '교지'는 명나라 지배기의 베트남을 말한다. 후에 프랑스도 이 단어를 받아들여 베트남 남부를 코친차이나란 이름으로 지배했다.[6] 직역하면 늑대 부대. 광시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용병 상비군이다. 명이 북로남왜에게 시달릴 당시 왜구를 막는 데 투입하였다. 냉병기 위주로 무장했지만 매우 용맹하여, 일본 검병들과의 전투에서 전혀 꿀리지 않았다. 왜구의 준동 이후로도 동서남북 주요 전선으로 투입하여 명나라의 히든카드로 활약했는데, 척계광을 비롯한 군사개혁가들이 창설한 신식부대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7] 격발 방식과는 관련이 없지만, 추가적으로 이들 일본 및 동남아 총들이 개머리판이 없어 신병들이 익숙하게 조준하려면 루미보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것도 주된 비판점이었다.[8] 용두가 철판을 때려 불꽃을 내야 했기 때문. 후술할 지발식 구조로는 이게 불가능하다. 다만 화승이 없으니 불 관리 문제는 없어졌다는 이점이 있었다. 오발 문제는 여전했지만 이는 강도 높은 제식 훈련과 차라리 적에게 죽는게 나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처벌을 가해 줄였다.[9] 동북아시아에서는 노밀총이라 불렀다.[10] 이탈리아 로마 시가 아니라 오스만이 멸망시키고 계승한 동로마 제국을 의미. 룸 술탄국, 잘랄 웃 딘 루미의 그 룸이다.[11] 전술한 소서양총에 대비되어 대서양총이란 이름으로 도입한 것.[12] 하지만 이 때문에 서양의 화승식 머스켓들은 지나치게 무거워져, 머스켓 사수들은 총을 받칠 거치대를 추가로 가지고 다녀야 했다. 러시아의 상비군인 스트렐치들은 버디슈를 거치대로 쓰기도 했다. 위에 티베트군 소총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중앙아시아에서는 접히는 삼각대를 부착해 쓰기도 했다. 이는 30년 전쟁 도중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무게를 줄여 양 손만으로도 조준 가능한 신형 머스켓을 개발하면서 사라진다.[13] 다만 조선에서의 경우에는 다른 국가에 비해 활에다가 화약 뭉치를 붙여서 발사해 화살이 박히는 순간 폭발하게 하거나, 화살에 독을 발라 놓는 등 화살 자체의 살상력을 높이는 노력을 조선 초부터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랫동안 활과 총이 병용 가능했다.[14] 당장 삼포왜란 당시 장전과 편전을 10여발 맞고 버티던 적병이나 화살 수십발을 버티고 버티다 겨우 죽는 왜장에 대한 보고가 실록에 등장한다. '5번째 줄', '10번째 줄'[15] 아래에 기술된 인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아예 조총의 도래 이후 편전이 잊혀진 무기가 되었다는 언급까지 있다.[16]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조총을 대단치 않게 여긴 원인 중 하나다. 조총의 느린 연사 속도는 다수를 운용하며 3단 사격같은 전술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는 보완되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오래 걸리는 장전 시간으로 그것 만으로도 완전히 보완되지는 못했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은 다수의 총병을 상비군으로 운영할 여력이 없었고 이후에 조총의 위력에 매료되어 포수를 육성했을 때에도 밀집화망이 아니라 개인의 조준사격을 중시했다. 실제로 전투에서도 러시아가 극동에 진출했을 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고 파병된 조선군 포병들이 유럽에서 보편적이던 화망 형성이 아닌 단일 사격을 했다는 것을 러시아 측에서 기록한 바가 있다.[17] 날씨가 궃은 날은 활이든 조총이든 가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총수가 화약을 총구에 넣는게 힘들정도로 바람이 심한 날이라면 활을 쏘는 사수입장에선 바람의 방향이 맞바람이 되는 순간 활을 쏘면 자기 발밑에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조총수가 화약이 비에 흠뻑 젖어 조총이 몽둥이만도 못하다고 한탄할 수준이면 사수 입장에서도 몇발 쏘니 활아교가 풀려서 활이 분해되어 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각오해야한다. 날씨가 안좋을때 근접무기비율이 높은 군대가 과감하게 돌진하여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를 이기는 경우는 제법 있지만,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끼리는 활이든 총이든 서로 악천후하에 전투자체를 꺼리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투사무기의 종류에 따라 날씨로 큰 이득을 보는 경우가 은근 찾기 힘들다.[18] 살상 거리 자체는 이것보다 길었지만 50미터를 벗어나면 탄도가 일정치 않아 명중률이 뚝 떨어졌다.[19] 화승총병의 안전과 장전시간을 확보시키기 위해 파이크 창병과 조합시킨 전술로 화승총병 사격 후 화승총 병들이 파이크 창병 뒤로 물러나고 파이크 창병은 화승총병을 중심으로 고슴도치 대형으로 기마대의 접근을 막거나 보병에게는 압도적인 사거리를 이점삼아 찌르기로 화승총병이 장전하는 동안 접근을 저지시키는 전술이였다.[20] 나가시노 전투 이전까지는 삼단사격 방식이 없었기에 조총은 한번 쏘면 오래 걸리는 장전때문에 기병에게 매우 취약하였다.[21] 이 전투서 일본군의 유명한 사격조-사격대기조-장전조로 나눠 3교대로 쉴새없이 사격하는 삼단사격을 개발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보병과 기병은 조총병을 치기 위해서는 바리케이드를 부셔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조총병의 장전시간을 충분히 마련이 가능하였다.[22] 일례로 전쟁기념관에 조선시대의 전투용 활의 복원품이 직접 만져보고 당겨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성인 남성의 힘으로도 여러 번 당기기 힘들 정도로 장력이 강했다. 단순히 당기기만 해도 팔이 금방 피로해지고 부들부들 떨리는데, 당긴 상태에서 가만히 유지하며 조준까지 하다 보면 숙련자가 아닌 이상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나버린다.[23] 속도 뿐만 아니라 활의 특성상 사거리와 관통력 까지 떨어지게 된다. 팔과 손가락에 힘이 빠져 부들부들 떨리게 되면 정확도까지 급락한다.[24] 지난번에는 더러 육량전을 시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사군관들이 궁시(弓矢)를 가지고 갔는데, 저들이 그 장대함을 보고, 인가를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만두기를 간곡히 청하였다. 그런데 개중에 한 건장한 왜인이 허세로 용력을 과시하며 대궁 당기기를 청하였는데 들으니, 이는 그들 중에서 장사라고 일컫는 자라고 하였다. 조 비장이 시험 삼아 쉬운 듯이 가볍게 한 번 당겨보이고는 그 왜인으로 하여금 당기가 하였더니, 그 왜인은 이를 악물고 팔뚝을 뽐내어 힘을 다해 당기었으나 오히려 활 시위를 벌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활을 팽개치고 달아나면서 혀를 빼물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휘저었다 한다. 아무리 용력이 있더라도 이미 쏘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당길 수 있었겠는가! - 조엄, 해차일기 영조 39년. 출처[25] 화승식인 조총보다 지발 가능성이 낮았으며 일반적으로 총신이 더 긴 머스킷이 명중률이 우월하다. 아예 불발이 될 확률은 수발식이 더 높았으나 수발식은 부싯돌로 직접 불꽃을 터뜨리는 방식이라 화승에 관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연사 속도는 수발식이 우위.[26] '16세기 ~ 17세기 鳥銃의 도입과 조선의 軍事的 변화' 참고.[27] 2차 대전기에는 3,000J의 에너지를 가진 소총탄도 위력이 약한 축이었고 강한건 4,000J까지도 갔었다.[28] 후한 말기는 조총은 고사하고, 화약조차도 없던 시대다.[29] 물론 하후돈이 눈에 화살을 맞고 살아있다는 것은 정통으로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화살이 눈에 정통으로 박히면 눈알을 뚫고 뇌를 관통해 죽었을 것이다. 활이 그렇게 만만한 병기는 아니다. 도탄되었다 가정할 시에 화살의 살상력은 크게 떨어지지만 총탄의 살상력은 화살만큼 떨어지지는 않는다. 화살이 아닌 도탄된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면 위의 설명대로 하후돈은 죽었을 것이다.[30] 민어 부레로 만든 것으로, 소의 힘줄 등에서 뽑은 아교보다 접착력과 탄력성이 뛰어났다.[31] 종특인 활을 쓰기 불리한데 그렇다고 근접전으로 붙자니 왜군 종특이 단병 접전이라...[32] 승정원일기의 영조 1년 김시성(金始聲)의 상소에도 총이 활과 비교해 가지는 장점으로 습기가 찬 날에도 불만 붙이면 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33] 이는 개인용 화기가 냉병기에 비교해 갖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궁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에는 1년이 걸리지만. 조총은 3일만 연습하면 실전 투입이 가능했다는 사료가 있다. 특히 어지간한 장정도 당기기 힘들어하는 활 시위에 비해 조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도 사용이 가능해 범용성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못했다.[34] 다만 화약 무기 다음으로는 활이었다. 지형상 성에서 싸우든 산과 숲에 의지해 싸우는 방식을 많이 취했는데 (적어도 방어전에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칼보다는 활이 낫고 포는 성에서는 모를까 산이나 숲에서는 무리였다.[35] 일례로 병자호란 당시에 청군은 조선군 조총의 긴 장전시간을 노려 기병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는 전술을 사용했다. 물론 조선도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활을 든 병사들로 하여금 조총수들을 보조하게 했지만, 그래도 많은 청군의 정예 기병의 충격력을 감당할 만큼 충분한 화력은 나오지 않았다. 당장 호란 당시 조선군의 70%가 조총수였지만 이를 보조할 궁병이나 장창병이 모자랐다.[36] 원래 1/3 살수(창병) 1/3 사수(궁수) 1/3포수(조총수)였지만 5,000명의 포수가 더해지면서 포수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15,000명 중 8000명 이상이 조총수였던 셈이다.[37] 속오군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전시에 징집되는 농민들이었는데 현재 예비군과 비슷하다. 하지만 훈련도도 형편없고 농사가 끝난 뒤 주기적으로 훈련하는 부대였지만 돈이나 곡물을 바쳐 훈련을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숙련도는 낮았다.[38] 불랑기는 프랑크인, 이방인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 파랑기가 기원이다. 아랍 상인들의 영향으로 중국에 온 동남아 출신 통역들이 이들을 파랑기라고 칭한 것이 음사된 것[39] 홍콩 경찰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실탄을 발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총기를 창이라고 언급했다.[40] 당시 탈영병들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에서 감숙성, 섬서성의 군인들에게 둔전을 경작해서 자급자족할 것을 지시했는데, 감숙 섬서 지방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망치고 중앙 정부는 나몰라라 장교들은 봉급을 착복하는 상황이 되자,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굶어죽기 싫어서 대거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자성도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탈영한 케이스로 추정된다.[41] 사실 결정적인 항복 원인은 강화도 함락으로 왕족들이 죄다 잡혔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조선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청군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고 심지어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대포병 사격하여 청군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더군더나 근왕병이 산성 주변에서 깔짝 거려서 시간이 부족한 청군은 더욱 조바심을 냈다. 이들 근왕병 조총수들이 청나라의 귀족 지휘관 여럿을 전사시키기도 했다.[42] 단 일본은 다이묘들이 개별적으로 총기를 사서 무장하는 정도는 막부 측이 문제삼지 않았기에 슬금슬금 들여와 나중에 자체 양산을 하거나 여러 차례 여러 방법으로 들여와 군대를 구성하는 일도 많았다. 물론 그래봐야 조직적인 군대 양성이 이뤄진 게 아니라 다를 건 없었지만 말이다.[43] 다른 한편으론 역관들을 부지런히 청나라에 파견해 몽골어만주어 습득을 꾀하고 국제정세도 파악해오는 등의 노력도 병행했다.[44] 이 때면 청이 쓰는 홍이포 따위는 도태된 지 오래였다. 당장 불랑기포 원산지 포르투갈이나 홍이포 즉 캘버린의 원산지 네덜란드도 영국, 프랑스 등과의 무기 차이가 커져서 전쟁에서 패배해 식민지를 대거 뺏기던 시절이었으며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역시 쇠퇴하면서 이탈리아-투르크 전쟁과 미서전쟁으로 영토가 쪼그라들던 시기다. 이들 모두 보유하던 무기가 도태되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게 상대가 더이상 될 수 없었다.[45] 이 소총을 생산했던 후베이성 우한시의 한양 병공창에서 딴 제식명이다. 우한(武漢)은 우창+한커우를 합쳐 만든 도시인데 한커우의 옛 이름이 한양이었다.[46] 단순히 구시대적 사고관때문에 거부한게 아니라, 서양의 기사들이 그랬듯이 보다 어려운 근접전을 담당해야 하는 입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관심을 줄 이유가 없다.[47] 다만 이는 조선처럼 일본에 좋은 부싯돌 산지가 없다는 점, 그리고 사철을 이용한 일본의 낮은 야금 기술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48] 일선 병사들은 조총의 존재를 몰랐을 수 있지만 각종 화약무기를 잘 사용하던 조선이 폭음에 놀랐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49] 1590년 3월의 일이다.[50] 상주 전투에서도 훈련도가 낮았던 조선군의 궁시는 왜군에게 제대로 맞지도 않았을 정도였다.[51] 약 40년 전 을묘왜변때의 사정을 보면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절간의 종이라도 떼어다가 녹여서 쓰자는 조정 신료들과 그건 절대 안된다는 명종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총통 좀 보내달라는 요청이 계속된다. 심지어 임진왜란 30년 전 1563년에는 조정에서 중남부의 방비상황을 점검해보고는 "총통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할 정도로 보유상황도 관리상황도 영 좋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은 최근에 부각된 화력덕후 이미지와는 별개로 그 화포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제반여건, 즉 화포를 제조하기 위한 각종 금속이나 화포 운용을 위한 화약 재료(염초, 유황 등) 등은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임진왜란 당시 청어잡이와 둔전, 물길 통행세를 통해 자신의 휘하 수군과 백성들의 자급자족을 성공시킨 충무공 이순신도 화포의 제작과 운영에 소모되는 재료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천자총통 대신 그 아래 체급의 현자총통, 지차총통을 주력으로 삼았다. #[52] 일본 장창병대는 기본적으로 농민 징집병이라 적을 찌르는게 아니라 봉술마냥 죽어라 내려쳐댔다고 알려져있다. 흔히 생각하는 장창 대기병방진 같은 건 엄두도 못냈고 기병의 운용이 미약했던 일본에서는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53] 특히 조총을 잘 아는 이순신은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함선이 들어가지 말도록 지시하고 사거리와 파괴력이 더 우월한 화포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했다. 일본군 입장에선 조총을 격발하려 폼을 잡을 때 머리위로 포탄이 날아오니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54] 날짜가 적혀 있지 않고 9월 15일 자 다음에 나온다.[55] 단 동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 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56]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그림으로 나선 정벌 당시 조총병을 묘사한 것이다. 중앙군 포수라 보면 된다.[57] 말을 구하고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든다.[58] 생활에 여유가 있는 한량 계급의 비중이 높았다.[59] 위의 군적부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군 보병의 70% ~ 80% 가까이가 조총이나 활을 사용하는 사수였고 근접전을 담당하는 보병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접어들어 팽배수를 비롯한 근접 보병들의 비중이 적어지면서 심해지게 된다.[60] 물론 정묘호란은 이괄의 난으로 하필 조총 및 화포에 능통하고 실전검술을 익힌 이괄의 평안도 정예부대가 다 썰려나간 탓도 컸다.[61] 다만 조선에 비해서는 여전히 냉병기 병종 비율이 높았다. 1차 아편전쟁 당시 청군의 총병 비율은 약 3분의 1 정도였다.[62] 당시 유럽에서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발달한 정밀기계기술 덕분에 총의 성능을 올리기 위한 온갖 마개조와 실험작들이 난무하고 있었다[63] 다만 일본에서 사용하던 대조총보다는 구경이 작았던 것 같다.[64] 이에는 슬픈 역사가 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의 주력소총이 레밍턴 롤링블럭이었기 때문. 즉 조선군은 과거 자신의 전우들을 수없이 죽인 총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65]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10월 10일 정유 1번째 기사.[66]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12월 1일 정해 1번째 기사.[67] 물론 이 덕분에 진압에 나선 관군 지휘관들은 일본의 힘을 빌어 같은 민족에게 총질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는 소회를 많이 남겼다. 일본군쪽에서 개인적 기록을 보면 관군의 지나친 학살에 치를 떠는 한편 죽을줄 뻔히 알면서 공격해 오는 농민군의 용기에 경외감을 느낀 장교들도 존재했다.[68] 머스킷은 경량화하던 끝에 머스킷은 단각대도 폐지되고 아퀘버스와 비슷한 크기, 무게, 구경이 되었고, 후기형 아퀘버스에 조금씩 나타나던 개머리판은 머스킷의 개머리판을 닮게되었다. 보는 시야에 따라선 이를 머스킷이 몰락하고 그 이름만 아퀘버스에게 넘겨준 결과(Chahryar Adle)라고 해석하거나, 아퀘버스가 사라지고 머스킷이 경량화 된 결과(Bert S. Hall)라고 해석한다.[69] 스네펀스식, 휠 락, 수석식, 뇌관식, 스냅 락 등 포함[70] 심지어 상술된 소서양총/대서양총은 아퀘버스냐 머스킷이냐를 구분한게 아니라 지발식이냐 순발식이냐에 따라 구분이 매겨졌다.[71] 냉병기에 대응해 생각해보면 일본도가 시미터냐 세이버냐와 같은 논쟁과 같은 소리다. 당연히 일본도는 시미터도 세이버도 아닌 일본도인것처럼 조총도 동아시아 화승총 중 조총을 가리키는 분류일 뿐이다.[72] 당시의 탄환은 둥그런 단일재질 납탄인 라운드볼 형식이 표준적이었기에 구경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로 탄의 무게인 그레인/라운드 퍼 파운드도 잣대로 쓸 수 있다.[73] 표준적인 머스킷의 화력과 거의 일치하는 쥬몬메쓰쓰, 그보다 훨씬 큰 오오즈츠도 있었지만 "사무라이쓰쓰"라는 별칭대로 사무라이가 쓰던 것이라 표준 보병용 무장과는 거리가 멀고, 오오즈츠는 핸드캐논 급의 크기와 화력이라 아예 논외다.[74] 순발식 단락에도 나와있듯 그 근원이 해양세력이었던 포르투갈이 선상전 용도로 보유한 아퀘버스를 경량화한것에 있기도 하고, 계통상 포르투갈 유래 조총은 아퀘버스다.[75] 명나라의 소서양총/대서양총 구분은 작동방식이 순발식(포르투갈/인도산)인지, 지발식(스페인/필리핀산)인지에 따라 구분되었다.[76] 이쪽은 센고쿠시기에 다케다 카츠요리가 조총병 사단도 없이 무모하게 오다-도쿠가와 동맹과 전투하다가 졌다는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77] PC에서만 볼 수 있다.[78] 작중에서는 일본산 머스킷으로 등장.[79] 이 조총이 돌격소총으로 나왔단 소리다.[80] 남만.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서양 세력을 지칭한다.[81] 물론 조선군이 단지 조총 하나 때문에 밀린 것은 아니다. 오랜 평화기를 보낸 조선군과 달리 일본군은 150년 가까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상당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고 여기에 제승방략이 가진 근본적 한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런 것이다.[82] 동산모형과 업무협약을 맺은 회사이다.[83] 일본에서 조총을 최초로 만든 지역이라 일본에서는 조총을 타네가시마라고 부른다.[84] 카라스마 소장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블레이드 특유의 온두루어 때문에 플라즈마 조총이라고 말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