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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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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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
趙泰耉

출생
1660년(현종 1)
사망
1723년(경종 3)
시호
문정(文貞)
본관
양주 조씨

덕수(德叟)

소헌(素軒), 하곡(霞谷)
붕당
소론 (완론)
부모
부친 - 조사석
모친 - 안동 권씨 권후(權垕)의 딸
형제자매
3남 1녀 중 차남
형 - 조태로(趙泰老, 1658 ~ 1717)
남동생 - 조태기(趙泰耆)
남매 - 윤재(尹宰)의 처
부인
연안 이씨 - 이유상(李有相)의 딸
자녀
5남 2녀
장남 - 조언빈(趙彥彬)
차남 - 조헌빈(趙獻彬)
3남 - 조현빈(趙顯彬)
4남 - 조건빈(趙健彬)
5남 - 조만빈(趙晚彬)
장녀 - 박사검(朴師儉)의 처
차녀 - 김동혁(金東赫)의 처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조사석이다.[1] 어머니는 권후(權垕)의 딸이다.

양주 조씨는 사촌인 조태채만 제외하면 모두 소론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사촌인 조태억은 조태구와 함께 소론 5대신중 한 명이다. 그러나 조태채는 노론 4대신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1683년(숙종 9)에 생원이 되고 1686년 별시문과에 종제 태채와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아버지는 조사석[2]으로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김만중[3]에 의해 장씨의 어머니에 청탁으로 장씨에 의해 정승에 올랐다고 논박을 받고 결국 사퇴했다. 조사석의 영향으로 그도 자연히 소론이 되었다.

조태구는 젊어서부터 자못 문예가 있었고 단아하고 또 권세가의 자제임에도 검소하였기에 이미 명망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후로는 홍문록에 피록되고 이어 삼사와 승정원의 승지 등 청화요직을 두루 거쳐 숙종 중반에는 이조판서에 이른다.

숙종 중반에 희빈 장씨 소생의 세자의 거취를 두고 반세자파 노론과 친세자파 소론으로 나뉠때 당연히 친소론파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이후 숙종 말년 재차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병신처분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소론의 지원을 받던 왕세자가 조선 제20대 경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조정은 노론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성균관 장의[4] 윤지술이 또 다른 노론 거물 이이명의 묘지문의 편파성을 비판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신사년[5]의 숙종의 처분은 숙종의 큰 공업임에도 왕의 눈치를 보고 이이명이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논박하는 일이 일어난다. 아니 왕에게 자기 어머니를 사사한 일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대놓고 개드립을 쳤으니 잘못하면 바로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왕의 어머니 건드리면 아주 그냥 좆되는 거야 그러나 본래 성품이 유했던 경종은 이를 책망하고 정배[6]를 내리자 노론 전체가 반발하여 결국 윤지술의 정배 명령은 철회되었다.[7]

그러나 윤지술의 상소를 기점으로 경종은 소론 등용에 팔을 걷어 부친다. 우선 영의정 김창집을 불러 당시 결원중이던 정승을 뽑기 위한 복상[8]을 명했다. 이에 김창집이 복상단자를 올렸으나 경종은 가복(加卜)[9]을 명했다. 이에 좌참찬 정호로 복임하자 재차 가복을 명하였고, 김창집이 임금의 심중을 헤아리고는 조태구를 가망하였다. 이렇게 조태구는 우의정이 된 뒤 경종의 손발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당시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영의정 김창집은 청사신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왕은 자녀가 없고 동생으로 연잉군(영조)이 있다고 상주하자 조태구가 이를 자못 준열히 논박하였는데 김창집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였다. 이후 최석항, 이광좌, 조태억, 오명항 등 소론계 인사들이 탁용되면서 소론의 기세가 점차 오르자, 노론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노론 정언 이정소를 시켜 왕세자 책봉 논의를 발의하는데, 경종이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매우 위험하고 또한 무엄한 상소였으나[10] 경종은 이내 시임대신과 원임대신 그리고 6조의 판서와 삼사의 장관을 패초하였으나 소론 인사는 한명도 참석하지 않는다. 이때 노론사대신, 즉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 이이명, 판중추 조태채를 비롯 노론 인사가 한밤중에 청대하여 경종에게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를 책봉하라고 요구하였다.[11] 그런데 건저(왕세자를 세우는 일)는 차기 임금을 세우는 막중대사이기에 한밤중에 신하들이 강요하여 세울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런 대사는 3정승 성원이 되어 상주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소론 우의정 조태구는 부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왕이 승낙하자 노론은 당시 대비[12]의 수결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다고 말하자[13] 경종은 왕대비전에 올라 대비의 수결을 받고 마침내 연잉군은 왕세제가 되었다.(선의왕후 어씨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런데 어씨는 노론인데 남편 따라 소론으로 전향) 소론은 한밤 중의 쿠데타에 경악하였고 소론 중진 유봉휘가 이를 탄핵하자 노론 전체가 "저군(儲君)을 논박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라며 벌때같이 일어나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요구했다. 경종은 처음에 이를 윤허하였으나 우의정 조태구가 유봉휘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리자 노론은 조태구까지 탄핵하고 나섰다. 그러나 경종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기세등등한 노론은 급기야 3개월 후 왕세제 대리청정 카드를 꺼낸다. 수법도 세제 책봉과 같이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상소하였다. 대리청정은 왕이 노쇠할 경우 부득이 세자가 정무를 수행하는 일인지라 왕이 명령을 내려도 신하들은 울머짜며 반대해야 하는 것인데[14],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었고 나이도 30대 중반인 임금에게 대리청정을 요구함은 사실상 동생에게 권력을 넘기고 경종은 정치일선에서 후퇴하라는 의미이므로, 본래 감히 신하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수락했고 소론이 반발하자 다시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대리청정을 명하는 일이 발생하고 노론 4대신은 결국 이에 찬성하는 연명차자를 올리자 우의정 조태구가 급히 청대하고 울며 간하였다. 이에 대리의 일은 재차 번복되었고 노론은 여러차례의 태도 변화로 완전히 명분을 잃는다. 그럼에도 노론의 입으로 전락한 삼사는 조태구를 멀리 극변으로 귀양보내는 것을 비롯 일부 소론마저 격렬이 탄핵하자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을 소두로 상소하여 노론사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는 가히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고 상소를 받아본 경종은 기다렸다는듯 승정원의 승지를 모두 파직하고 삼사 전체를 문외출송하였다.

이후 6조의 판서들을 모두 파직하고 군권을 쥔 훈련대장 이홍술도 성밖으로 내친다. 자연히 빈자리는 소론으로. 마침내 노론 4대신까지 파직되어 뿔뿔이 귀양길에 오르고 조태구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환국을 이끌어낸 김일경 등이 삼사를 장악하고 이조참판겸 수어사를 겸하였는데, 마침 대제학의 자리가 비었고 전임 대제학 강현은 김일경을 수망으로 추천하였다. 그런데 영의정 조태구는 인망이 낮고 거칠고 패려궂은 김일경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당시 또 다른 소론 중진 이광좌를 추천하였다. 이광좌가 대제학이 되자 마침내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급소와 조태구를 중심으로 한 준소로 쪼개진다.[15] 이후 목호룡이 노론 4대신[16]과 그 자제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 후 조태구는 몸소 위관이 되어 이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비록 김일경과 크게 사이가 틀어졌어도 조태구는 김일경을 건백하여 병조판서에 올리고 이어 비국당상까지 밀어주었다. 어차피 세제가 즉위하는 날이면 죽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떼어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종제 조태채를 비롯 노론사대신이 사사되고 노론인사 70명이 살해되는 대옥사가 일어나고 왕세제는 역적에 수괴로 몰렸다.(신임옥사) 그러나 경종이 세제를 온몸으로 비호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7] 조태구는 경종 3년(1723)에 졸하였으나 영조가 즉위한 후 관작이 추탈되고 처자는 노비가 되고 손자들은 고문을 받고 죽었다. 차라리 일찍 죽었음이 조태구로서는 다행이다. 1년만 더 살았더라면 김일경과 목호룡처럼 노론들의 보복으로 끔살당했으니 말이다.


3. 사후[편집]


조태구는 김일경의 급소를 제어하며 대립했는데 만약 이러한 대립이 없었다면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김일경과 함께 오랫동안 국적(國賊), 난적(難敵)의 대명사가 되었다가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1908년에 이르러서야 이완용의 건의를 받아 순종황제가 겨우 복권해주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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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사석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와는 6촌간으로 그 유명한 희빈 장씨를 후원한 인물로 유명하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온다.[2] 조사석 자체가 소론으로 좌의정까지 이르는 거물 정치인[3] 노론 중진으로 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작은아버지였다.[4] 성균관 학생회장쯤 된다.[5] 장희빈이 사사되던 해[6] 유배 중 가장 가벼운 형벌.[7] 경종실록은 노론의 이런 행태를 무지 비난하였다. 훗날 윤지술은 신축환국으로 노론이 패하자 참수되었다.[8] 정승을 뽑을 때에는 시임대신이 후보자 3명의 명단을 올리면 왕이 이를 낙점하는데, 통상 왕의 의중이 반영된 인물들이 후보자가 된다.[9] 후보자 중 마음에 들지 않지 않는 이가 있으면 추가로 후보자를 올리라는 의미로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10] 경종이 태어날 때 숙종이 경종을 원자로 삼자 인현왕후 춘추 한창이라 반대하던 노론의 모습을 보자.[11] 어차피 후사 보기 글렀으니 동생 후계자로 삼으라는 뜻이므로 임금에겐 매우 모욕적인 행위였다. 영조도 나중의 천의소감을 편찬함을 두고 노론이 자신들의 입장을 미화하고 소론을 역당이라 까내리자 격노하여 "노론이라고 흉역이 없는 줄 아는가?"라고 괜히 말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추대해준 세력도 노론이지만, 섣불리 행동하다가 죽을 위험에 빠질 뻔하게 상황을 조성한 세력도 노론이기 때문이다.[12] 숙종비 인원왕후 김씨로 원래 소론이었으나 연잉군을 총애해 노론 편에 섰다. 이때 노론과 합의한 상태.[13] 왕이 성인이면 수결 따위는 필요없다.[14] 선조나 영조는 신하들의 충성경쟁을 유발하기 위한 통치기법으로 사용되었다.[15] 조태구나 이광좌를 완소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당시 동궁 소속이던 조현명이나 송인명, 박문수, 서명균등 일부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며 조태구등도 김일경의 폐세제를 내심 방조하는 형편이었다[16]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조태구의 사촌)[17]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종은 세제가 준 땡감과 게장을 먹고 다음날 급사하였다. 그 유명한 경종 독살설이 여기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