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다울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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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존 다울런드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류트 연주자, 가수였다. 아들 또한 류트 연주자, 작곡가였고 부친을 계승하여 영국 궁중 류트 연주자로 활동했다. 다울런드는 20세기에 재조명되어 주요 류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2. 생애[편집]
다울런드의 생애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지만 1580년에 파리 궁중 대사로 파견된 헨리 코브햄 경의 시종으로 파리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1588년에는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음악 학사를 취득했다. 1594년에는 영국 궁중 류트 음악가 취직에 실패했고, 1597년까지 독일, 이탈리아 지역을 여행했다. 1598년에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궁정 류트 연주자가 되어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음악 매니아였으며 궁정 음악가들에게 높은 봉급을 보장했으나, 다울랜드는 영국 궁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작곡한 음악을 자꾸만 런던에서 출판했다. 음악을 받아보질 못해 분노한 왕은 1606년에 다울랜드를 해고했다. 다울런드는 오랫동안 영국 궁중 음악가로 취업하길 갈망했고, 유럽 대륙에서 최고의 유명세를 떨친 작곡가 중 한 명이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울랜드는 이를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다울랜드는 제임스 1세 치세인 1612에 들어서야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고, 죽을 때까지 영국 궁중 음악가로 활동했다. 1626년 2월 20일에 묘지에 묻혔다.[1]
3. 작곡[편집]
다울런드는 가창 음악이 제일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 이름을 떨친 악기 음악 작곡가였고, 대중 음악과 고전 음악이 구분되지 않았을 때 인기를 끈 작곡가였다. 다울런드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슬프고 비련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데, 당시에는 비련한 감정은 성숙하고 속깊은, 수준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다울런드의 작품은 크게 가창곡과 류트 독주곡으로 나뉘며, 둘의 숫자는 비슷하다. [2] 대표작으로 <라크리메, 또는 일곱 개의 눈물(Lachrimae)>, <Come Again> 등이 있다.
4. 여담[편집]
대표작인 '눈물의 파반'은 당대의 히트곡으로서, 작곡가 자신도 여러 버전으로 편곡했고(류트 반주 성악곡인 '흘러라 내 눈물'(Flow, my tears),[3] 상술된 비올라 다 감바 합주곡인 '일곱 개의 눈물'), 선배 음악가인 윌리엄 버드,# 동년배인 얀 피터르존 스벨링크,# 요아힘 판 덴 호페(Joachim van den Hove. 1567경-1620)#나 스벨링크의 제자인 멜키오르 쉴트(Melchior Schildt. 1592-1667)#, 하인리히 샤이데만(Heinrich Scheidemann. 1595-1663),# 이들과 동시대인인 야코프 판 에이크(Jacob van Eyck. 1590경-1657)# 등도 편곡을 남겼다.
심지어 21세기에 나온 일렉트로닉 뮤직 편곡도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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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John Dowland: English musician",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1] John Dowland - Music - Oxford Bibliographies John Dowland - Composer Biography, Facts and Music Compositions[2] John Dowland's Art Of Melancholy : NPR[3] 필립 K. 딕의 소설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의 제목이 이 곡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