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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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mero

이드 소프트웨어 공동창업자
본명
알폰소 존 로메로
(Alfonso John Romero)
출생
1967년 10월 28일(56세)
미국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디자이너, 게임 개발자, 프로그래머
주요 참여 작품
커맨더 킨 시리즈
울펜슈타인 3D
둠 시리즈
퀘이크
다이카타나
배우자
켈리 미첼(1987~1989)
앨리자베스 맥콜(1990~1998)
랄루카 플레우카(2004~2011)
브랜다 로메로(2012~현재)
자녀
슬하 3명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
2. 상세
2.3. 그 후 현재까지
3. 평가
4. 기타
5.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존 로메로/1.jpg
파일:attachment/존 로메로/romero2.jpg
리즈 시절
최근 모습지상렬?!

John Romero. 게임개발자. 존 카맥과 함께 초기 이드 소프트웨어를 이끈 두 명의 '천재 존' 중 한 명.
공식 홈페이지
트위터


2. 상세[편집]



2.1. 이드 소프트웨어 시절[편집]


존 로메로는 전설적인 개발사인 오리진 시스템즈에서 프로그래머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오리진 시스템은 분위기가 뒤숭숭했던지라 오래 머무르진 못했다. 오리진 시스템즈를 나온 이후 존 로메로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Ideas from the Deep이라는 소규모 게임 회사를 설립한다. 참고로 이 회사는 IFD로 개명하여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로메로는 얼마 못가서 다시 회사에서 퇴사했고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옮겨다니다 컴퓨터 잡지인 소프트디스크 사에 입사하여 부록 게임을 만드는 1인 제작자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1월, 로메로는 어포지 사(현재의 3D 렐름즈)의 CEO인 스콧 밀러의 사업 제안을 받고 소프트디스크 사에서 로메로와 같이 근무하던 기획자 톰 홀, 프로그래머 존 카맥, 그래픽 디자이너 에이드리언 카맥 등과 함께 이드 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

이드 소프트웨어 내에서 존 로메로는 주로 레벨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을 담당했고[1] 기획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톰 홀(Tom Hall)이 주로 맡았다. 톰 홀은 개발 중 개발 방향에 대한 견해차로 퇴사했다가 후에 이드에서 해고당한 로메로와 다시 뭉쳐 이온 스톰을 설립했고 이온 스톰에서 아나크로녹스를 제작했다.

둠과 퀘이크에 짙게 드러나는 고어한 분위기에 로메로가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일 동료들의 회상에 따르면 고어한 분위기는 대체로 그래픽 디자인을 맡았던 에이드리언 카맥의 영향이라고 한다.[2] 반면 로메로는 그보다는 중세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다이카타나에서도 크게 드러났다.

울펜슈타인과 초기 둠 시리즈의 성공 이후 존 로메로는 이드의 얼굴마담으로 나서서 행사나 언론 인터뷰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둠 개발시에 자신이 맡은 역할을 부풀려서 얘기한 일로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엄청난 게임광인 로메로가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둠 멀티플레이에 빠져서 본업인 게임 개발을 등한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둠 발매 20주년 기념으로 가디언 지에 실린 톰 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이 있던 시기의 이드 소프트웨어는 주 7일, 하루 14-16시간 근무가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 중독에 가까운 이들이 로메로를 어떻게 봤을지는 뻔하다. 근데 이건 다른 직원들이 문제 아닌가

이러한 불만이 직접적으로 터져나온 것은 퀘이크 1 제작에 들어가면서부터다. 퀘이크에서 로메로는 둠 시절처럼 프로그래밍에 넓게 참여하지는 않았고, 레벨 디자인에 집중했다. 도입부 레벨, 에피소드 1, 3의 첫 레벨과 최종 보스 레벨, 그리고 에피소드 2의 여섯 개 맵[3] 등 총 10개의 맵이 그의 작품이다.

퀘이크는 존 로메로가 1991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의욕적으로 추진한 야심작이었다. 로메로는 둠의 폭력성과 직관적인 액션은 계승하되, 보다 중세풍의 고딕 호러 액션 RPG 게임을 계획했다. 로메로의 원 기획에서 퀘이크는 총기류가 아닌 검, 망치 등 다양한 무기로 이루어진 근접 전투를 중점으로 뒀으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많은 NPC들과 다양한 퍼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프로젝트를 주도해야 할 그 로메로는 대외 활동과 둠 멀티플레이에 빠져서 태업을 일삼았다. 당시 팀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로메로를 찾아가서 퀘이크에 대한 최소한의 기획안이라도 보여달라고 부탁을 해야 마지못해 자신의 생각을 A4 두 장에 대충 휘갈겨서 적어줬다고 한다. 결국 퀘이크의 기획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고 팀원들은 각 파트별로 별별 삽질을 해가며 겨우겨우 개발을 이어나가야 했다.[4] 설상가상으로 존 카맥이 '풀 3D 그래픽으로 돌아가는 게임을 만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만들기 시작한 퀘이크 엔진 또한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완성이 계속 늦춰지면서 결국 퀘이크의 개발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로메로는 오히려 게임쇼에 나와서 언론들에게 아직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았던 퀘이크라는 작품에 대해 떠벌려댔고 사람들이 퀘이크라는 작품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편, 마침내 엔진 개발을 완료한 존 카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제작한 엔진에 맞게 퀘이크의 개발 방향을 기존의 복잡한 RPG에서 직관적인 둠 스타일로 180도 선회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로메로는 언론에서 자신이 말한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게임을 만들자는 카맥의 주장에 당황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로메로에 대한 불만이 폭주한 이드 소프트웨어의 팀원들은 카맥에 동의[5]하며 이를 반대한 존 로메로를 퀘이크 개발에서 제외시켰다. 결정적으로 존 카맥이 퀘이크 엔진을 완성시킨 것과 달리 로메로는 온전히 완성시킨 결과물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퀘이크 발매 2주 후, 존 로메로는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해고당했다. 해고사유는 태업.


2.2. 이온 스톰 시절[편집]


존 로메로는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해고되었으나, 자신이 개발에 참여했던 둠이나 퀘이크가 이미 엄청난 대박 게임으로서 자리잡았고 이드 소프트웨어 시절 회사의 대표적인 얼굴마담으로 활약했기에 많은 투자자들과 유통사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존 로메로는 1996년 11월, 죽마고우인 톰 홀 등과 함께 이온 스톰(Ion Storm)을 차렸다. 로메로는 이온 스톰을 창립하면서 '디자인은 곧 법(Design is Law)'이란 슬로건을 내걸었고, 인터뷰를 통해 그래픽에만 신경을 쓴다며 이드 소프트웨어를 무지 씹기도 했다(...). 이에 이드 소프트웨어는 "존 로메로는 자기 스스로 나간 게 아니라 짤린 것이다."라며 응수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존 로메로/info.png
사진은 댈러스에 위치한 체이스 타워. 최상층 라운지를 임대해 스튜디오를 차렸다. 당시 이온 스톰을 방문한 기자들은 온 빌딩을 대리석으로 도배하고 천장엔 돔구장에서나 볼법한 기계식 개폐기구까지 설치가 되어 있는 스튜디오의 호화찬란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온 스톰은 포브스에서 '가장 근무하기 좋은 회사'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연예인처럼 화려한 셀럽을 동경하고 있었던 로메로는 제작비를 제외하고도 돈을 펑펑 써댔다.

그가 만드는 다이카타나(Daikatana)는 여러 유명 PC 잡지에 헤드기사로 실릴 정도로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개발 초기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 광고를 하였는데, E3 1997에서 선보인 "John Romero's about to make you his bitch"라는 문구가 적힌 도발적인 광고가 유명하다. 직역하면 "존 로메로가 널 그의 암캐로 삼으려 한다!" 또한 해당 광고 하단에는 'Suck It Down'이라는 표현까지 있었다. 굳이 풀어서 해석하자면, '다이카타나가 너무 대단해서 로메로의 성기를 빨개될 것'이란 이야기(...). 로메로는 후일 이 광고를 자신의 가장 큰 실수로 뽑았고, 게이머들에게 사과하였다.

다이카타나의 당초 발매예정일은 1997년 크리스마스였으나 게임 개발은 결코 그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온 스톰 댈러스 지부는 개발사로서 균형을 갖추지 못한 곳이었다. 존 로메로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창립할 때처럼 은둔 고수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개발팀을 운영할 생각이었으나 소프트디스크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이드의 제작진들과는 달리 이온 스톰의 개발진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 많았다. 그 예로 이온 스톰의 레벨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으면 그 전의 경력과는 관계없이 그냥 그림 몇 장, 또는 자작 판타지 소설 하나만 들고가면 그 자리에서 OK인 적이 많았다고 전해진다.[6] 더군다나 로메로는 퀘이크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다가 회사에서 쫓겨난 과거 때문이었는지 디렉터, 프로듀서, 아티스트, 레벨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많은 분야에 참여했고, 이는 그나마 각 분야에 배정받은 이들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로메로는 게임의 개발기간을 비현실적으로 짧게 예상하는 등 프로젝트의 관리자로서도 형편없었다.

그렇게 1997년 연말에 발매한다고 했던 게임은 2년 반에 가까운 발매 연기를 겪으며 2000년 5월에야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다이카타나는 이온 스톰 설립 당시 쏟아졌던 커다란 기대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버그와 후달리는 그래픽 등 총제적 난국을 맞아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대판 참패하였다. 로메로는 모두가 망했다고 간주하는 이 게임을 두고 "다이카타나는 사실 20만장 정도가 팔렸으며, 본전은 뽑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온 스톰에서 존 로메로 본인의 실적은 처참했으나 그래도 그가 올린 커다란 성과가 하나 있다. 그것은 워렌 스펙터로 하여금 데이어스 엑스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 이온 스톰은 둠과 퀘이크의 실적 덕분에 엄청난 금액의 투자를 받았고, 로메로는 워렌 스펙터에게 "무제한적으로 지원해줄테니까 우리 회사로 들어올래?"라는 제안을 했다(후일 워렌 스펙터는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온 스톰에서 워렌 스펙터는 자신이 구상한 게임을 현실과의 타협 없이 구현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인 데이어스 엑스는 게임 역사상 손꼽힐만한 명작이 되었다.


2.3. 그 후 현재까지[편집]


다이카타나가 실패하고 아나크로녹스도 상업적으로 재미를 못 보자 에이도스는 로메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원을 정리해고하고 2001년 7월 17일에 이온 스톰 댈러스 스튜디오를 폐쇄했다.

해고 직후인 2001년 7월, 로메로는 오랜 단짝 톰 홀, 여자 친구 스티비 케이스와 함께 모바일 게임 회사 멍키스톤 게임즈(Monkeystone Games)를 차렸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스티비 케이스와는 2003년 결별했으며 같은 해 창립자 전원이 회사를 떠났다.

로메로는 미드웨이 게임즈에 합류해 조쉬 소여와 함께 건틀릿 시리즈 신작 세븐 소로우(Gauntlet: Seven Sorrows)를 제작했다. 둘은 2005년 중순에 회사를 떠났으며 그해 연말 출시한 게임은 미지근한 평가를 받았다.

2005년 샌 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슬립게이트 아이언웍스(Slipgate Ironworks)를 차리고 MMO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2007년까지는 게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으나 2007년은 고사하고 영원히 공개하지 못했다. 로메로는 2010년 11월에 회사를 떠났다.

2010년, 페이스북 게임 레이븐우드 페어(Ravenwood Fair)의 감수를 맡았다. 게임은 1,000만 명 이상의 유저를 모으는 성공을 거뒀고 그해 말, 로메로는 위저드리 시리즈를 개발한 베테랑 게임 개발자 브렌다 브래스와이트(Brenda Brathwaite)와 함께 소셜 게임 회사 룻 드랍(Loot Drop)을 차렸다. 두 달 후에는 그의 단짝 톰 홀도 합류했다. 그러나 룻 드랍은 큰 성과 없이 2015년 말 폐업했다.

2012년 10월, 브렌다 브래스와이트와 결혼했다.

2013년 9월, 아내와 함께 UC 산타크루즈 대학교의 게임 디자인 교수로 초빙되었다.

2015년 11월, 아내와 함께 아일랜드 골웨이에 로메로 게임즈(Romero Games)를 설립하고 위험한 데이브의 고해상도 리메이크를 출시했다.

2016년 1월, 오리지널 둠 레벨 테크 곤 배드(Tech Gone Bad)를 배포했다. 샌디 피터슨이 제작한 기존 E1M8을 대체하는 맵으로 21년 만의 복귀에 클래식 둠 팬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존 로메로는 앞으로 제작할 FPS 게임의 사전 준비 운동 삼아 만들었다고 밝혔다.

2016년 4월, 이드 소프트웨어 전 동료 에이드리언 카맥과 함께 나이트 워크 게임즈(Night Work Games)를 설립하고 새로운 FPS 게임을 예고했다. 4월 말, 블랙룸(Blackroom)을 발표하며 32일간 70만 달러 모금을 목표로 킥스타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보여줄 게 기껏 컨셉 아트 몇 장 뿐이라 모금이 부진했고, 13만 달러를 모금한 5일째 접어드는 날 킥스타터를 취소했다. 로메로는 더 많은 준비를 거쳐 다시 진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018년 12월 10일, 오리지널 둠 25주년을 맞아 신규 에피소드 시질(Sigil)을 공개했다.트레일러 실물 패키지[7] 생산 차질로 몇 차례의 출시연기 끝에 2019년 5월 31일 배포했다. 출시 후 다소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2020년 12월, 로메로 게임즈를 통해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를 무대로 하는 X-COM 스타일의 전략 게임, 엠파이어 오브 신(Empire of Sin)을 출시했다.

2022년 3월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무려 28년만에 둠 2: 헬 온 어스의 유료 DLC One Humanity를 공개했다. 수익금은 전원 적십자와 UN 중앙 비상 대응 기금에 기부한다.

2023년 12월 10일 오리지널 둠 30주년을 맞아 시질 2(Sigil 2) 에피소드를 공개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2일 GMT PM 6:00 부로 사전 예약을 시작했다. 존 로메로 트위터 공지

3. 평가[편집]


존 로메로가 이드 소프트웨어 초기작에 커다란 역할을 했음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 비중이 언론에 비춰진 것만큼 컸는가 하는 점에는 이견이 있다. 이드 소프트웨어 CEO였던 토드 홀렌쉐드는 2004년 인터뷰에서 '둠의 기본 게임 디자인은 존 카맥이 제시했고, 몬스터는 에이드리언 카맥이 만들었다', '존 로메로의 기여도는 당시보다 현 시점에 더 부풀려졌다', '기술은 존 카맥, 디자인은 존 로메로라는 이분법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8]

그러나 로메로가 레벨 디자이너로서 매우 훌륭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둠과 둠 2에서의 그의 작업물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해당 게임의 최고 레벨들로 꼽히며 특히 둠 에피소드 1은 고전 FPS 게임의 가장 훌륭한 레벨 디자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퀘이크에서 만든 레벨들은 둠에서만큼 독보적이지 않지만 역시 수준급. 이 또한 로메로의 능력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아메리칸 맥기나 팀 윌리츠 같은 다른 디자이너의 포텐이 폭발한 것이 한몫했다.

E3 1997에서의 악명 높은 다이카타나 마케팅은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악의 실수로 본인도 인정했고 이전까지 게이머 친화적이었던 이미지를 완전히 망쳐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본 게임이 엉망진창으로 나온 건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격. 이 마케팅은 다이카타나 이후로도 로메로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막상 다이카타나를 진짜로 플레이한 이는 많지 않지만 지금도 해외 게임 사이트에서는 로메로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면 해당 문구가 당연하다는 듯이 덧글로 따라 나온다.

존 로메로가 이드 소프트웨어를 떠나면서 회사가 내놓은 게임의 스타일이 고착화되고 점차 하향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예전 팬들은 로메로와 이드 소프트웨어가 재결합하기를 바라는 이도 많다. 새롭고 야심찬 게임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 로메로가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디자인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이드 소프트웨어가 둠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게임들을 내놓았을 것임은 자명하다는 것. 하지만 그 '새로움과 야심찬' 디자인과 결과물이 다이카타나 같은 게임이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로메로는 후일 다크사이더스가 자신이 기획하던 퀘이크의 본 모습이었다고 술회했으나, 퀘이크와 다이카타나의 개발 역정을 고려하면 그의 디자인대로 순조롭게 게임이 나올 수 있었을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허나 이는 너무 박한 평가이다.
위 주장의 근거인 존 카맥 조차 2022년 렉스 클립스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자신이 로메로를 내쳤었던 행동에 대해 후회하면서 젊었을 적의 자신은 로메로의 태업에 너무 화가 나 있었고, 또한 그때 자신은 기업을 운영하는 방법을 잘 몰랐었다고 술회했다. 인터뷰에서 카맥은 로메로는 최고의 레벨을 디자인 했으며 아트, 사운드 모든 분야에 박식했고 자신이 만난 프로그래머중 가장 멋진 사람이자 최고의 프로그래머였다고 극찬했다. 카맥은 로메로가 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야기 했으며 퀘이크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말 했지만 동시에 자신(카맥)만큼의 집중을 보여주지 못했고,락스타 처럼 행동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럼에도 이후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 로메로는 인상적인 활약을 했고 카맥 또한 모바일 게임 관련 일로 로메로를 여러차례 만나기도 했다.


4. 기타[편집]


FPS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게임 방식 중 하나인 데스매치를 정립한 사람이다. 둠 개발 당시 존 카맥이 둠에 네트워크 대전 기능을 넣었고, 로메로와 카맥이 처음으로 게임 속에서 상대방의 캐릭터를 보며 서로 대결을 벌이는 것을 시연하여 팀원들에게 이 기능을 알렸다. FPS 역사상 최초의 1킬을 달성하였다 이후 이드의 개발진들 모두는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서로 죽이는 전례없는 게임 방식에 모두들 흥분하며 이 대결에 몰두하였고, 존 로메로가 이 광경을 보고 죽음의 경기라는 의미로 데스매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존 로메로는 게임 실력이 매우 뛰어나 어릴적부터 오락실의 하이스코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도배했으며, 둠 발매 후에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아무도 그를 둠 데스매치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울펜슈타인 3D와 둠, 그리고 퀘이크에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데모, 게임구동 후 한동안 아무 조작도 안 하면 자동으로 시작되는 녹화된 영상은 로메로의 플레이다.

존 로메로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들은 다 잊어버렸을법한 오래 전 일을 방금 전처럼 기억해낸다고. GameSauce 인터넷 매거진과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이는 사교적인 성격과 자주 회고하는 습관 덕분인 듯 하다.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이 자연스럽게 채득된 경우. IGN과의 둠 20주년 기념 인터뷰에 따르면 존 로메로 자신이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덕분에 20년이 지났는데도 둠을 개발하던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하면서 당시의 모습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Media 2.0에서 출판한 '둠: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데이비드 커시너)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존 카맥이 자기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과 말이 통할 것임은 물론이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특히, 로메로는 프로그래밍 뿐만 아니라 미술과 기획분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단, 이 책은 흥미를 위해 디자인의 천재 존 로메로와 기술의 천재 존 카맥이란 두 축을 전제로 해서 쓰여져,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뒷얘기들이 가득하므로 이드의 팬이라면 한번 읽어볼만한 책.

2017년 1월 31일, 존 로메로의 아들인 '도노반 로메로'가 자신의 첫 게임, "Gunman Taco Truck"을 Steam을 통해 출시했다. 특이사항으로는 출시 당시 도노반의 나이가 12세였다는 것.

2017년 한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Q&A 세션에서 존 로메로는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금은 Lua를 가장 좋아하며, 가르치기 쉽고 게임을 만드는 데도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한 존 로메로는 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집에 가서 당장해라. 필요한 건 인터넷에서 공짜로 다 구할 수 있다. 같이 아주 간단한 게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라."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5.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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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로메로가 디자인한 의 에피소드 1(셰어웨어 버전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것이기도 하다)은 게임의 백미로 꼽힌다. 또한 존 카맥 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도 뛰어난 프로그래머였던 만큼, 둠과 퀘이크의 에디터를 프로그래밍하였다.[2] 에이드리언 카맥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한 위험한 데이브 2, 3에 잘 나타나있다.[3] 에피소드 2는 그의 관심분야인 중세 테마로 만들어졌다.[4] 로메로의 이러한 모습은 게임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신입 혹은 지망생이나 할법한 아마추어적인 태도인 동시에 게임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는 기획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5] 이드에서 의견차는 번번이 카맥의 그 유명한 "Him or me?" 질문으로 귀결되곤 했는데 의역하면 '차라리 내가 이드를 그만둘까?'라는 말이었다. 이 질문으로 여러 명이 이드를 퇴사하였다.[6] 이온 스톰 이후에 설립한 멍키 스톤 게임즈에도 당시 로메로의 애인이었던 스티비 케이스(Stevie Case, 퀘이크 데스매치에서 로메로를 이긴 여성 게이머)가 게임의 최고 매니저(COO)로 있기도 했다. 게이머로서 COO가 된 전무후무한 기록. 물론 회사는 망했으며 로메로는 후일 멍키 스톤에는 제대로 된 경영 전략이 없었다고 술회했다.[7]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 2주 간 Beast Box Edition 및 Standard Edition 패키지를 각각 $166.00, $39.99에 예약 판매했다.[8] GamePro (아카이브 링크, 검은 배경에 검은 글씨라 텍스트를 선택해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