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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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탁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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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벨 스타크스
John Levell Starks

출생
1965년 8월 10일 (58세)
오클라호마 주 털사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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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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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학교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신장
191cm (6' 3")[1]
체중
86kg (190 lbs)
드래프트
1988 NBA 드래프트 언드래프트
소속 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8~1989)
체다 래피즈 실버불리츠 (CBA) (1989~1990)
멤피스 로커스 (WBL) (1990)
뉴욕 닉스 (1990~1998)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9~2000)
시카고 불스 (2000)
유타 재즈 (2000~2002)
등번호
3번 - 닉스
9번 - 워리어스 / 불스 / 재즈

1. 개요
2. 커리어
2.1. 프로 이전
2.2. NBA
2.2.1. 커리어 초기
2.2.2. 뉴욕 닉스
2.2.3. 커리어 말기
3. 수상 내역
4. 플레이스타일
5. 은퇴 이후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NBA 선수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 마이클 조던 시대 가장 자주 나왔던 조던 전용 야라레메카기도 했다(…).


2. 커리어[편집]



2.1. 프로 이전[편집]


1965년 8월 10일에 오클라호마 주 털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는데, 그래서 스탁스는 편모 슬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자연히 그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 탓에 불량 소년으로 낙인찍혔고, 그 동안 그는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싸움에 끼어드는 등 불우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존, 나에게는 네가 유일한 희망이란다. 내 희망이 무너지면 나는 더 이상 살지 못할 거야."


라는 한 마디에 그 동안의 비행을 청산하고 학업에 전념하며 농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2]

대학 시절에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4번이나 학교를 옮겨다녔는데, 초반에는 로저 주립 커뮤니티 칼리지 등 2개의 단과 대학을 다니다가 3학년 때 털사 커뮤니티 칼리지를 거쳐 이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사실 스탁스가 이렇게 방황을 한 것은 본인의 비행 탓이었다. 위에 언급된 대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스탁스는 대학에서도 완전히 이를 청산하진 못했는데, 로저 주립을 다닐 당시는 다른 학생의 스테레오를 훔치다가 걸려서 강제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해야 했다.[3] 이 일로 그는 5일간 유치장에 갇혀야 했다. 그는 이후 노스 오클라호마 컬리지로 가서 경기당 11점을 올리며 자리를 잡지만 이번엔 기숙사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쫓겨난다. 이후 털사 컬리지로 가서 무사히 졸업하게 된다.


2.2. NBA[편집]



2.2.1. 커리어 초기[편집]


1988년 졸업 이후 드래프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운좋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한다. 그러나 하필 당시 워리어즈에는 같은 포지션에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이 해에 "올해의 신인" 상을 수상하는 거물 신인 미치 리치몬드가 버티고 있었고[4], 스탁스는 36경기동안 평균 8.8분 4.1점이란 초라한 성적을 내고 짤리고 만다. 이후 자유계약으로 하부 리그격인 CBA의 한 팀으로 이적해 활동, 이후 소규모 하부리그인 WBL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에 뉴욕 닉스의 스카우터에게 눈도장을 받고 입단하게 되었다.


2.2.2. 뉴욕 닉스[편집]


로스터에서도 꼴찌격이었던 스탁스였던만큼 당연히 거의 입지가 없었고, 스탁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짤리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반전이 일어나는데 당시에도 겁이 없던 스탁스는 시즌 초에 연습 도중 리그 최고의 센터이자 블러커 중 하나였던 패트릭 유잉에게 인유어페이스를 먹이려고 하다가 떡블럭(…)을 당하고 무릎부상까지 당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불행은 오히려 다행이 되었는데, 규정에 따르면 연습 도중 부상당한 선수를 당장 방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로스터에 남게되었는데, 그가 회복이 될 때쯤 닉스의 후보 슈팅가드였던 트렌트 터커가 부상당하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 덕분에 기회를 얻은 스탁스는 이후 경기당 19분 정도 출장하며 특유의 승부근성과 끈질긴 플레이로 인상을 심고, 그 다음 시즌에는 명장 팻 라일리의 지도 하에서 전경기를 후보가드로 출전, 전 시즌에 비해 거의 두배에 가까운 13.9점을 올리게 된다. 이 시즌에 닉스의 심장격인 '킹콩센터'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와 삼각편대를 결성해 1991/92 시즌에 디비전 1위로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진출했으나, 마이클 조던을 앞세운 시카고 불스에게 패했다. 여담이지만 작은 키에도 폭발적인 점프력을 자랑했던 스탁스답게 1992년 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1라운드 2위로 통과해 2라운드에서 탈락. 최종 4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마침내 그는 92-93시즌에 80경기 중 51경기를 주전으로 출장하며 평균 17.5득점을 기록, 팀의 주요 선수 중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된다. 또한 특유의 끈질긴 수비력을 인정받아 올-디펜스[5] 세컨팀에 뽑히게 된다.

93년 플옵에서 훗날 10년간 NBA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될 닉스와 페이서스는 서로 처음 맞붙었는데, 이 당시에는 60승을 거둔 1번 시드 닉스가 페이서스를 쉽게 잡을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뉴욕에서 열린 1, 2차전을 닉스가 승리한다. 그러나 페이서스는 3차전을 승리하며 반격하는데, 이때 밀러는 교묘한 트래쉬 토킹[6]할리우드 액션으로 스탁스의 멘탈을 흔들었다. 당시 스탁스는 처음으로 주전으로 올라섰다는 부담감도 있었던 데다가 이런 심리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혈질인 그의 성격상 점점 부글부글 끓었던 것. 결국 스탁스는 폭발해 밀러를 머리로 들이받고 퇴장당하는데[7],이때 팀의 리더인 패트릭 유잉과 파워포워드 찰스 오클리는 스탁스의 뒤통수까지 후려갈기며 죽일듯이 갈군다.[8] 다음날 스탁스의 모친은 유잉에게 전화를 걸어 "자네 내 아들에게 다시 한번 손 댔다간 가만 안 두겠네"라고 했는데, 이에 유잉은 "스탁스 부인, 그 녀석이 또 그러면 전 녀석을 또 후려갈길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어쨌든 이 덕분에 인디애나는 압도적 열세임에도 한 경기를 따낼 수 있었다.

반면 다음 라운드에서 벌어진 불스와의 숙명적인 대결에서 그는 플레이오프 역사에 남는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보였다. 그를 막던 B.J. 암스트롱이 패트릭 유잉의 스크린에 걸린 상태에서 그는 전광석화와 같이 베이스라인 돌파를 시도했는데, 불스 최고의 블러커인 호레이스 그랜트마이클 조던이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올라가 두 선수 위로 어마어마한 덩크를 했고,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닉스 팬들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93 시즌 후 조던이 은퇴하자 닉스는 1993-94 시즌에 거침없이 디비전 1위로 1994 NBA 파이널까지 진출했으며,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잡은 그는 이 해에 커리어 하이인 평균 19득점 5.9리바운드 1.6스틸을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파이널에서는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키츠를 상대로 5차전까지 3-2로 앞서나가 정말 우승을 목전에 두는데 성공하였지만, 6차전 종료 직전 스탁스가 던진 3점슛이 올라주원에게 블록당하면서 승부는 7차전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3점 슛에서 11번 전부 실패하는[9] 바람에 결국 패배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점은 6차전까지만 해도 닉스의 리더 패트릭 유잉이 공격에선 말그대로 바닥의 효율을 찍는 최악의 부진을 겪은 가운데 스탁스는 폭발적인 3점 슛으로 공격에 한해서는 팀내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이끌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것. 당시 닉스는 최고수준의 디펜스를 자랑했지만 오펜스에서는 유잉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커서 유잉이 틀어막혔을 때 의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는 스탁스 정도였고, 유잉이 하킴에게 말그대로 잡아먹히는 와중에 스탁스는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가는 X팩터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실제로 6차전까지의 성적만 놓고 봤을 때 유잉은 평균 19.2점을 35% 필드골 성공률로, 스탁스는 평균 19.3점을 42% 성공률로 넣어 양측의 활약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스탁스가 6차전까지 4할대의 3점 슈팅과 유잉보다 많은 자유투를 던진 것을 배제하고 필드골 성공률만 보았을 때 생기는 오류이다. 볼륨이야 똑같다 하더라도 유잉은 6차전까지 ts% 0.386를 기록할 정도로 공격 효율이 바닥을 뚫어버린 반면에[10], 스탁스는 같은 기간 ts% 0.559를 기록하며 샷 효율 측면에서 유잉을 말 그대로 압도했다. 당시 시리즈가 저득점 양상을 보인 것을 고려하면 그정도 효율로 6차전까지 평균 20점 언저리의 볼륨을 기록한 건 상당한 활약이었으며, 한마디로 7차전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기 전까지는 공격면에서 팀을 캐리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딱히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11] 그러나 7차전 필드골 2/18의 포스가 너무 강렬해 파이널 패배에 대한 책임을 사실상 혼자 뒤집어쓰게 되어버린 것이다. 6차전까지 평균 19.3점, 3P% 0.41, ts% 0.559를 기록하던 공격스탯이 7차전 딱 한경기가 더해진 것 만으로(...) 각각 17.7점, 0.32, 0.504로 내려앉았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12] 마지막까지 그를 기용한 팻 라일리 감독도 극성맞기로 유명한 뉴욕 언론에 폭격을 당했는데, '왜 마지막까지 스탁스를 기용했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라일리는 '춤은 나를 파티에 초대해준 사람과 함께 추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1994/95 시즌에 절치부심해서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도달했으나, 레지 밀러를 필두로 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7차전만에 패배하고 말았다.[13] 이후 팻 라일리가 1995~96시즌 전에 팀과의 마찰로 사임하고 마이애미 히트로 옮기면서, 팀은 새 감독을 선임하는데 다름 아닌 골든스테이트 시절 그를 "팀에 맞지 않는다"며 잘라버린 돈 넬슨이었다. 넬슨은 휴버트 데이비스를 스탁스 대신 주전 슈팅가드로 세우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그는 결국 시즌 중반에 해임되고, 스탁스는 96시즌 대부분을 주전으로 뛸 수 있게된다.

그러나 1996-97시즌에 그는 당시 그보다 더 큰 잠재력의 소유자이던 앨런 휴스턴[14]에게 주전 슈팅가드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러나 스탁스는 식스맨이 되어 출장시간과 롤이 다소 줄었음에도[15] 오히려 전 시즌(12.6점)보다 높은 13.8점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으로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한다. 97~98시즌에도 후보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던 스탁스는 꾸준히 기량이 내려가고 있었고, 폭발적인 운동능력에 의존하는 단신 슈팅가드란 특성상 나이에 따른 운동능력 저하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16]


닉스의 스탁스의 명과 암을 모두 담아낸 영상.


2.2.3. 커리어 말기[편집]


한편 골든스테이트에서는 기량은 출중했지만 감독 PJ 칼리시모의 목을 조르는 초대형 사고를 쳐 68경기[17] 징계를 당한 라트렐 스프리웰[18]을 처분하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스탁스는 1998/99 시즌 개막 전에 크리스 밀스, 테리 커밍스와 패키지로 라트렐 스프리웰과 맞바꾸어져 그가 데뷔했던 워리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닉스에서 황금기를 보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스탁스는 트래이드로 많은 충격을 받았으나 워리어스에서 두 시즌에 걸쳐 주전으로 뛰며 나름 괜찮은 활약을 한다.

그러나 1999-2000 시즌 중반에 스탁스는 토니 쿠코치 3각 트레이드의 부록이 되어 딴 팀도 아닌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스탁스 본인은 물론이고 동료들까지 그 스탁스가 불스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생각에 어색해했다.[19] 스탁스는 "이 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을 해야한다. 그들(불스)은 좋은 사람이며 좋은 선수들"이라고 립서비스를 했지만 리빌딩을 하며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던 불스와 34세 베테랑 단신 슈팅가드는 애초에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스탁스는 단 네 경기만을 불스 유니폼을 입고 뛰고 이들은 수많은 갈등 이후에 결국 안 좋은 모양새로 결별하고 만다.

이후 유타 재즈를 거쳐 2001/02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994)
파일:NBA 로고.svg 올-NBA 디펜시브 세컨드 팀 (1993)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식스맨 상 (1997)

4. 플레이스타일[편집]


'투박한 공격력과 리그 최강의 수비력'이란 뉴욕 닉스의 팀 컬러에 딱 맞는 선수였으며, 화려하지 않지만 닉스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수였다.

유잉 시대의 뉴욕 닉스는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리그 하위권의 공격력을 압도적인 수비력으로 틀어막던 팀이었다. 그리고 핸드체킹 규제 이전 시대이다보니 이는 활발한 로테이션보다도 거칠고 때로는 더티하게 상대의 공격을 어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닉스에는 운동능력이 뛰어나기보다는 힘이 세고 플레이가 거친 선수들(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 등)이 많았는데, 이들이 공격수를 괴롭혀주면서 골밑으로 밀고가면 패트릭 유잉이 최종방어선으로 막아내는 식이었고, 이 때문에 당시 닉스는 특히 돌파위주 선수들에게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스탁스는 딱히 힘이 센 것도 아니었고 슈팅가드 포지션에선 언더사이즈였지만 뛰어난 운동능력과 찰거머리같은 근성을 지닌 선수였다. 이 점은 닉스가 최전성기였던 조던을 막는데 필수적이었다. 물론 당시 조던은 누가 막는다고 막아지는 선수가 아니었고, 실제로 스탁스 이상으로 운동능력이 좋은데다 사이즈와 기술까지 갖춘 조던을 스탁스가 맨투맨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당연히 닉스도 조던을 막는 중임을 스탁스 혼자에게 맡기진 않았고, 스탁스는 뉴욕의 떡대들이 헬프를 들어오기 전까지 조던을 괴롭히고, 외곽에서 이들은 종종 조던을 수비 밀집 지역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스탁스는 조던을 정말 잘 괴롭혔다. 조던은 힘과 스피드를 겸비한 선수였지만 순간움직임이 역대급으로 빨랐기 때문에 비슷한 사이즈의 선수들보다 오히려 (그의 스피드를 따라갈 수 있는) 190초반대의 선수들(조 듀마스, 게리 페이튼 등)이 더 잘 막았는데, 스탁스는 빠른 발로 조던을 따라가고 당시만 해도 허용되었던 핸드체킹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조던을 매우 귀찮게 만들었다.[20] 그리고 당시 조던의 매치업 입장에선 그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닉스는 스탁스 외에 뛰어난 수비수들이 즐비했으며, 리그 내에서 가장 강력한 팀수비력을 자랑하는 팀이었기 때문.

스탁스는 2010년대 선수에 굳이 비교하자면 패트릭 베벌리 같은 싸움닭 타입의 수비수였다. 스틸이나 블럭을 많이 하진 못하지만 사이즈가 더 큰 선수들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괴롭히면서 상대의 공격성공률을 떨어뜨리는 타입. 2010년대 이후 뛰었다면 디펜스 퍼스트팀에도 뽑힐 정도로 수비력으로 주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는 공격위주 농구가 된 2010년대 이후보다 수비가 훨씬 부각되던 시기였고, 같은 가드 포지션에 조던, 페이튼, 존 스탁턴, 무키 블레이락같이 더 뛰어난 수비수들이 많아 디펜스 세컨팀 1회에 그쳤다.[21]

공격에서 스탁스는 스스로 득점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외곽에서 득점지원을 해주는 선수였다. 통산 34%의 3점슛 성공률과 76.9%의 자유투 성공률 때문에 간과되기 쉽지만 그는 상당히 뛰어난 외곽슈터였으며, NBA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200개 성공을 넘긴 선수였다.(다만 이는 단축라인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이용한 돌파능력와 속공가담율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streaky shooter로서, 한번 삘 받으면, 소위 긁히면 너무한다 싶은 슛까지도 몰아넣는 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러나 '긁히면'이 포인트로 그는 기복이 상당히 심한 선수였다. 자유투성공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슛거리가 당시로선 길고 외곽을 잘 넣는 선수였지만 슈팅터치 자체가 정교한 편은 아니었는데, 안 들어갈 때는 정말 뭐하나 싶을 정도로 안 들어갈 때도 있었다. 많은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스탁스의 삽질은 94년 파이널 7차전(야투 2/18, 3점슛 0/11)이겠지만 사실 그는 해당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도 1할대 야투율 경기가 세번, 정규시즌에는 여러번, 심지어 슛을 11개 던져 3점 하나 넣은 경기도 있었다.

문제는 언더사이즈 슈팅가드인데다 돌파력이 그렇게까지 위력적은 아니라 그가 자유투를 잘 얻어내는 편은 아니었고 리바운드도 딱히 잘하는 편도 아니었기에, 슛이 안 들어가면 스탁스 입장에선 팀에 공헌하는 바가 거의 없어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파이널 7차전에서 그의 삽질이 워낙 컸던 것이다. 그는 6차전까지의 평균으로 본다면 유잉과 동등한 볼륨을 유잉보다 훨씬 고효율로 기록하며 시리즈의 X팩터로서 팀에 공헌하였는데, 7차전에서 슛이 갑자기 끔찍하게 안 들어가면서 효용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는 경기 내 모든 스탯을 포함해 계산하는 Gamescore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맹활약하던 6차전에서 그는 게임스코어를 22.2까지 찍었다가 7차전에서 -3.4란 처참한 수치를 기록했다. 사실 이는 시리즈 초반에도 마찬가지로 1차전에선 -1.7, 2차전에선 갑자기 18.6을 기록했다. 반면 이때 파이널에서 부진했다고 욕을 엄청나게 먹는 패트릭 유잉의 경우 4차전에서 게임스코어 4.7을 기록한게 최저 수치였다. 이는 슛이 안들어가면 외곽수비 정도를 제외하곤 쓸데가 없는 스탁스와, 슛이 안들어가도 스탁스보다 훨씬 높은 수비 영향력과 안정적인 보드장악력으로 일정수준의 공헌도는 먹고 들어가는 유잉의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하다.[22][23]

즉, 스탁스는 외곽슛은 뛰어나지만 안정적이지 못했고, 운동능력에 비해 공격옵션이 다소 부족한 양날의 검, 제한된 공격옵션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안정적인 2옵션의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고, 야투율도 커리어 41.2%, 높을 때도 45%를 못 넘어서 당시 기준으로는 쓸만한 3점 슈터였음에도 효율좋은 스코어러라 보기는 어려웠다.

어찌보면 유잉 시대의 뉴욕 닉스가 그토록 강력했음에도 한계를 보인 것과 스탁스가 한계가 있었던 것이 일맥상통한다. 닉스는 전력상 우승을 차지하기 부족함이 없었던 팀이었지만, 부족한 공격력을 수비력으로 때운다는 특성상 유일하게 믿을만 한 공격옵션(유잉)이 부진한다면 이를 타개할 만한 활로가 딱히 없었다. 그나마 스탁스는 당시 닉스 라인업에서 의외성은 기대할 수 있어도 안정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선수였다. 팀에서 두번째로 높은 득점을 올려주던 선수임에도 태생적으로 기복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긁히는' 스탁스라면 저 옵션이 될 수 있었지만, 부진한 스탁스는 오히려 팀에 폐가 되곤 했고, 이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게 바로 94년 파이널 7차전이었다.

기복에 이어 두번째, 그리고 어쩌면 더 결정적인 그의 태생적 한계는 그가 언더사이즈였다는 점이다. 운동능력으로 사이즈 열세를 극복한다는 그의 특성상 당연히 노화해 운동능력이 떨어지면 기량이 급격히 하락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30줄에 접어든 그가 팀에서의 가치가 갑자기 하락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스탁스 자체가 기술이 정교한 선수라기보다는 기술은 투박하지만 운동능력과 근성으로 버티는 선수였는데, 그 운동능력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이 위력도 떨어진 것.


5. 은퇴 이후[편집]


2008년에 슬램볼 팀인 뮬러스의 감독을 지낸 바 있다.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기자가 마이클 조던을 수비할때 어떤 방법이 있었냐고 묻자 just pray(기도할뿐)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조던은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조던 전문 수비수(?) 스탁스가 생각나네요 라고 말하면서 씨익 웃어보인 바 있다. 전담 수비수로 팻 라일리가 붙였지만 언제나 털렸기 때문에.


6. 기타[편집]


만화 슬램덩크의 등장인물 정대만의 모티브라는 설이 있다. 정대만의 모티브로 꼽히는 여러 선수들중 굴곡진 역사를 겪고나서야 주전으로 도약했다는 배경스토리는 스탁스와 닮은 것이 확실하다.[24][25]

다만 농구선수로써 스탁스와 정대만은 "한번 터지면 폭발적으로 슛이 들어가는 슈팅가드"와 수비가 강하단 점에서 닮았을 뿐 세부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매우 다르다. 위에 언급된 대로 스탁스는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단신 슈팅가드였지만, 정대만은 슬램덩크 기준으로 장신 슈팅가드에다가[26] 운동능력은 비교적 평이한 편이었다. 또한 스탁스는 정대만처럼 전문 슈터는 아니었고[27], 정대만은 거의 패스를 받아 슛을 쏘는 캐치앤슈터였는데 스탁스는 드리블을 하다 슛을 던지는 비중이 많은 선수로 득점 스타일 자체도 달랐다. 또한 체력이 약한 정대만과 달리 스탁스는 악바리 근성으로 라일리 시스템의 엄청난 운동량에도 버틸수 있던 나름 강철체력이었다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스탁스에게는 결점이 있는데, 기질적으로 질긴 성격인 탓에 한번 흥분하면 팀 페이스 자체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올스타 선정 1회에 불과한 선수임에도 불량청소년에 하부리그에서 올스타까지 되는 드라마틱한 인생역경, 빅마켓 뉴욕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무엇보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주 매치업이었다는 점에서 실력 이상의 지명도를 누리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불스는 닉스와 89년부터 96년까지 무려 6번이나 붙는 등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가졌는데[28] 이 와중에 비록 조던에게 처참히 털렸지만 악바리같이 달려들던 스탁스는 팬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특히 NBA를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 제한적이었던 국내 팬들에겐 다른 스몰마켓 팀의 슈퍼스타들보다 훨씬 유명했는데, 그 탓인지 우리나라 월간지 루키에서도 조던 은퇴 이후 리그를 이끌어 갈 젊은 선수 3인방의 기사를 내보내며 거기에 무려 스탁스를 올려놓은적도 있었다. 심지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와 새크라멘토 킹스의 슈퍼스타였던 미치 리치몬드는 스탁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훌륭한 커리어를 보낸[29] 선수임에도 말이다.

그 외에도 리치몬드가 스탁스보다 더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지만 스탁스와 닉스가 당시 보여준 터프한 농구와 간절함이 당시 팬들의 마음을 사라잡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무조건 이쁜 연예인 순서로 인기가 많은 건 아닌 것 처럼 말이다. 또한 명장 라일리 감독의 지도 아래 부진하면 뉴욕의 빅 마켓 언론들이 간만히 있지 않을게 뻔한데 실력없는 선수를 계속 기용할리가 없는 상황에서 스탁스 본인의 노력과 불스를 상대로한 승리의 갈망과 처절함이 스탁스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 이다. 토론토에 농구팀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것은 루키 빈스 카터와 맥그레이디의 화려한 덩크에서 시작되었고, 리치몬드가 있던 비주류팀 킹스에 리치몬드가 워싱턴으로 이적 후 루키 제이슨 윌리암스와 웨버가 오자 화려한 패싱게임이 킹스를 결국 전국방송을 타는 팀으로 변했고, 뉴저지에 키드 합류 하자 속공과 앨리웁으로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만년 꼴찌팀 클리퍼스에 그리핀이 등장하자 마침내 사람들이 레이커스 말고도 클리퍼스 경기도 주목했다. 즉, 방송노출도 많았지만, 위 문단에서부터 언급되었듯이 드라마틱한 인생역경과 스탁스 본인의 캐릭터 등 주목받을 만한 요소가 많았던 것이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인터넷으로 전경기 시청이 가능한 시대에서도 실력에 비해 명성이 낮은 선수들은 지금도 계속 존재한다.

2017년 스탁스의 생일에 뉴욕 닉스 공식 페이스북에 생일 축하 알림이 올라왔으나 맨 먼저 달린 댓글이 "엿이나 먹어라 스탁스 94년의 대삽질을 잊지 않았다"인 것으로 보아 스탁스에 대한 뉴욕팬들의 심정은 아직도 복잡한 듯 하다.

NBA 최초로 단일 시즌 3점 슛 200개 성공을 달성한 선수이다(217개, 94-95 시즌). 잘 알려져 있듯 300개와 400개의 마일스톤은 먼 훗날 스테판 커리가 달성한다.


7. 관련 문서[편집]



[1] 한때는 6' 5"(196cm)까지 표기되었다. 당시는 드래프트 전에 측정한 정확한 신장이 공개되던 때가 아니라 스탁스의 정확한 신장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맨발 188cm 안팎일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NBA급에 못 미치는 유망주들은 신장을 뻥튀기할 때가 많아서 신장을 올라고 올리다가 결국 신발 신은 키보다도 5cm나 더 크게 표기된 것. 키가 애매하면 신장을 올리는게 보통인 NBA에서도 심한 키 뻥튀기로 악명이 높았다.[2] 사실 스탁스가 아동학대 방지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거나 불우아동들을 위해 기부한 것도 청소년기에 있었던 가슴 아픈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3]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다른 학생이 스탁스의 기숙사 방에 몰래 들어왔는데, 이때 대학이 피해보상을 오히려 피해자인 스탁스와 룸메이트에게 하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복수였던 것.[4] 루키임에도 1경기 평균 득점 22점을 기록했다.[5] NBA에서 가장 훌륭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선수 10명을 뽑는 것으로, 퍼스트팀에 가드2, 포워드2, 센터1, 세컨팀에 가드2, 포워드2, 센터1명을 선정한다.[6] 슛을 실패할때마다 "장난해? 장난하냐 존? 니가 그러고도 이 리그에서 주전 슈팅가드냐?"고 슬슬 긁었다고.[7] 사실 스탁스는 밀러가 워낙 약올리니까 머리로 살짝 들이받은 수준이었는데,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던 레지 밀러가 마치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커다란 액션을 하며 특유의 양손을 (어이없다는 듯) 번쩍 들어올리는 액션을 하며 심판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NBA는 이 정도 작은 컨택이나 신경전은 그냥 넘어갈 정도로 피지컬했는데, 헐리웃 액션의 대가 밀러에게 제대로 잘못 걸린 것.[8] 이때 밀러가 성질을 긁는 걸 보고 유잉은 "바보짓 하지마 존"이라고 경고했는데도 자기 성질 못이기고 중요한 경기에서 폭발하니 빡친 것. 이때 얼마나 두 덩치가 조그만 스탁스를 심하게 갈궜는지 해설자들도 "팀동료에게 이렇게 심하게 하는 건 처음 보네요"라고 언급했다.[9] 전체 필드골 18개 중 단 두개 넣었다.[10] 샷 성공률이 비교적 낮더라도 3점을 잘 넣거나 자유투를 많이 뜯어낸다면 ts%는 높게 나올 수 있다. 유잉은 3점을 유의미하게 시도하는 선수도 아니었고, 골밑 공격력이 좋기는 했지만 역대급 수비수인 올라주원이 감당하지 못 할 위력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유잉은 정규시즌에 자유투를 7개씩은 뜯어내던 선수였음에도 시리즈 평균 자유투 시도수가 3.0개 시도에 그치는데, 돌파 완성도가 떨어져 자삥이 많지 않은 스탁스가 시리즈 평균 5.6개를 시도한 걸 고려하면 이는 유잉치고는 정말 적은 시도수였다. 역대급 수비수인 하킴이 유잉을 얼마나 잘 막아냈는지 알 수 있는 부분.[11] 물론 유잉은 공격에선 매우 부진했지만 리바운드와 수비에서(12.4리바운드 4.3블럭) 하킴(9.1리바운드 3.9블럭) 못지 않은 활약을 해준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수비에선 유잉, 공격에선 스탁스가 수훈 선수였던 것. 문제는 차라리 유잉이 그저 수비형 센터였다면 수비에만 집중하며 샷을 아꼈을텐데, 당시 닉스는 공격옵션이 풍부하지 않은 팀이라 유잉은 본인이 막힌다고 해서 슛을 안 던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 그 결과는 상기하였듯이 시리즈 평균 18.9득점에 ts% 0.39라는 끔찍한 지표로 이어졌다.[12] 차라리 스탁스가 6차전까지 조금 덜 잘해서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기 전에 조기 마감되었다면 언론과 팬들의 화살이 극악의 공격부진을 면치 못 한 유잉에게 갔을 것이다. 에이스 대신 잘해주다가 마지막에 부진했다는 이유로 돌림당한 경우인 만큼 오늘날에는 이 건에 대해서 스탁스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13] 레지 밀러의 8.9초 안에 8득점이라는 전설은 아닌 레전드급 활약이 바로 이 시리즈 1차전에서 벌어졌다. 내한당시 레지밀러에관해 어떻게 막을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밀러가 연달아 3점 슛 두 개를 성공시킨 뒤 닉스는 자유투를 얻었는데, 거기서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쳐버린 선수가 바로 스탁스이다. 둘 다 성공시켰다면 경기의 행방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14] NBA 역사상 가장 깔끔한 슈팅폼과 가장 부드러운 릴리스, 그리고 1억불을 넘는 계약을 맺은 이후 큰 부상을 당해 우주먹튀(…)가 된 것으로 유명한 선수. 오죽하면 NBA가 2000년대 중반에 팀들이 단 한 명의 선수를 방출하면 그 선수에 대한 사치세를 면제해주는 "사면룰"을 신설했을때 이에 대한 별칭이 "앨런 휴스턴 룰"이었을 정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닉스는 휴스턴이 곧 은퇴할 것이라고 여겨 "앨런 휴스턴 룰"을 휴스턴이 아닌 제롬 제임스에게 썼다.[15] 아직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식스맨치고 꽤 많은 26.5분을 소화했다. 주전이던 전 시즌에 비해 4.3분 감소[16] 이런 운동능력 저하로 가장 피해를 보는게 수비와 필드골 성공률인데, 스탁스의 가장 큰 장점인 수비가 저하된다는 건 특히 치명적이었다.[17] 처음엔 1년 징계였으나 조정위에 항소한 결과 68경기로 줄었다.[18] 이 뿐만 아니라 팀동료들과 싸우고 무려 150km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 두 사람을 다치게 해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정말 버라이어티하게 사고를 치고 다녔다. 물론 이후 닉스에서 휴스턴과 콤비를 이루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19] http://lubbockonline.com/stories/022000/pro_022000131.shtml#.WAylck3mDIU[20] 실제로 조던이 95년 복귀할 당시 전문가들은 '짧아진 3점라인과 핸드체킹 룰 때문에 그를 막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물론 94년 당시의 핸드체킹룰 개정은 엔드라인에서 반대쪽의 자유투라인까지만 금지했기에 미드레인지에서 주로 득점이 나오던 NBA의 트렌드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진 못했고 (실제 경기에서는 핸드체킹에 익숙한 심판들이 하프코트 내에선 웬만해선 잡지 않았다) 04년에 전면금지되어서야 트렌드 자체가 바뀌게 되지만, 짧아진 3점라인은 꽤나 효과적으로 작용했었다.[21] 더 자세히 설명하면 리그 수준 차이가 아니라 트렌드 차이이다. 90년대에는 공수 밸런스가 더 중요한 시대였지만 2010년대 이후는 수비보다 공격의 비중이 더 늘어난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수비보다 공격에 들이는 비중이 늘어났고, 공격력이 부각되는 선수들이 많아진 대신 수비력이 부각된 선수들은 비교적 적어졌다.[22] 유잉은 시즌과 플레이오프 통틀어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단 한번, 인디애나와 3차전 뿐이었는데, 이때는 야투 10개를 던져 모두 실패하며 1점 4리바운드 1블럭 4파울이라는 끔찍한 부진에 시달렸다.[23] 비교를 위해 언급하면 마흔줄 가까이 되어 무릎 문제로 고생하며 기복이 심했던 워싱턴 시절 조던도 게임스코어 마이너스 수치는 벤치에서 출장하던 02-03시즌 초반의 -1.4, 01-02시즌의 -0.2까지 두 경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93-94시즌 전성기였던 스탁스는 정규시즌에만 -3.3, -1.8, -2 세경기, 플레이오프에서 위에 언급된 두 경기를 더 기록했다. 선수 클래스를 떠나서 당시 조던은 40이 다 되어 신체적으로 무너지는 경기가 없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당시 커리어 로우 6점과 51점 경기가 연속으로 나오기도 했다.), 팔팔한 28세 스탁스는 몸상태와 상관없이 타고난 기복만으로 폭망하는 경기들이 있었던 것이다.[24] 다만 이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정대만은 거만한 초엘리트가 부상 이후 몰락했다 재기한 거지만, 스탁스는 아무것도 없던 선수가 악바리처럼 노력해 성공한것이다. 엄연히 말하면 두 선수의 공통점은 "인생이 고달펐다" 이 정도다.[25] 차라리 인생역경으로 따지면 황태산과 더 닮았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철저히 무명인 선수가 나름의 강점을 갈고닦아 만만찮은 선수로 거듭난 점.[26] 일단 정대만은 184cm, 스탁스는 맨발 188cm로 고작 4cm 차이나는데 NBA에선 포인트가드 신장인 188cm가 슬램덩크에서는 파워포워드/센터를 볼 정도로 신장 차이가 나는 걸 생각하면 정대만의 신장은 NBA로 치면 딱 2-3번에 걸친 스윙맨 사이즈다. 게다가 파워포워드인 강백호나 황태산과도 무리없이 매치업이 가능할 정도니...[27] 스탁스의 삼점슛 성공률은 가장 높았을때가 36.9%로 전문 슈터로 보기엔 무리다. 생애 최고의 활약을 했던 94시즌 성공률은 고작 33.5%에 불과했다.[28] 조던이 없었던 94년을 빼고 전부 불스가 승리.[29] 무려 조던이 "슛만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한 선수이다. NBA의 베스트 5격인 올NBA퍼스트팀 바로 아래인 올NBA세컨팀에도 세 차례나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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