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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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20%> 초대
존 베시 || 제2대
존 위컴 || 제3대
로버트 W. 세네월드 || 제4대
윌리엄 J. 리브시 || 제5대
루이스 C. 메네트리 ||
|| 제6대
로버트 W. 리스카시 || 제7대
개리 E. 럭 || 제8대
존 H. 틸럴리 || 제9대
토머스 A. 슈워츠 || 제10대
리언 J. 러포트 ||
|| 제11대
버웰 B. 벨 3세 || 제12대
월터 L. 샤프 || 제13
제임스 서먼 || 제14대
커티스 스캐퍼로티 || 제15대
빈센트 브룩스 ||
|| 제16대
로버트 에이브럼스 || 제17대
폴 라카메라 || || || ||

※ 초대~현임 :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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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제8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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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20%> 제1대
로버트 아이첼버거 ||<width=20%> 제2대
월튼 워커 ||<width=20%> 제3대
매튜 리지웨이 ||<width=20%> 제4대
제임스 밴 플리트 ||<width=20%> 제5대
맥스웰 테일러 ||
|| 제6대
라이먼 렘니처 || 제7대
아이작 화이트 || 제8대
조지 데커 || 제9대
카터 매그루더 || 제10대
가이 멜로이 주니어 ||
|| 제11대
해밀턴 하우즈 || 제12대
드와이트 비치 || 제13대
찰스 보네스틸 || 제14대
존 마이켈리스 || 제15대
도널드 베넷 ||
|| 제16대
리처드 스틸웰 || 제17대
존 베시 || 제18대
존 위컴 || 제19대
로버트 세네월드 || 제20대
윌리엄 리브시 ||
|| 제21대
루이스 메네트리 || 제22대
로버트 리스카시 || 제23대
윌리엄 클라우치 || 제24대
리처드 티몬스 || 제25대
랜돌프 하우스 ||
|| 제26대
대니얼 페트로스키 || 제27대
대니얼 자니니 || 제28대
찰스 캠벨 || 제29대
데이비드 밸코트 || 제30대
조지프 필 2세 ||
|| 제31대
존 존슨 || 제32대
버나드 샴포 || 제33대
토머스 밴달 || 제34대
마이클 빌스 ||<bgcolor=#e0ffdb,#202210> 제35대
윌러드 벌러슨 ||



존 에이브람스 위컴 주니어
John Adams Wickham,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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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8년 6월 25일 (95세)
미국 뉴욕주 돕스페리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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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계급
대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군인이다. 한미연합군사령관(1979-1982)[1]육군참모총장(1983-1987)을 지냈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2. 생애[편집]


1928년 6월 25일뉴욕의 돕스페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에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 임관하였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회과학 교관을 맡기도 했다.

병과보병으로 처음에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베를린에 주둔한 제6보병연대에서도 근무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위탁교육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군내보수교육기관인 국방전쟁학교와 국방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제5기병연대 1전투단[2]에서 복무할 때 다시 한국에 왔다.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기도 했다. 베트남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장관급 장교로 진급한 뒤에 주독미군 소속의 제3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맡았다.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 부참모장으로 포로 석방 협상을 맡기도 했고 제101공수사단장과 합동참모본부 수석본부장[3] 등을 거친 뒤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1979년존 베시에 이어 주한미군의 최선임자인 한미연합군사령부 사령관이 되었다.

위컴의 한미연합군 사령관 재임 기간 동안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단 위컴 본인은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했고, 신군부의 쿠데타 저지를 위해 노력했다.[4] 12.12 군사반란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맹호부대와 전방 일부 사단을 빼서 진압하겠다는 것에는 반대를 표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존 위컴 입장에선 살짝 억울할 수도 있는게 당시 박정희가 암살당하면서 북한이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전방 병력을 빼내서 진압을 시도했다가 내전으로 격화되면 북한이 이틈을 노려 침공을 할 여지도 있었기에 억제력을 위해 주둔하는 장군으로써 일단은 본분을 한 것이다. 전두환을 견제하기 위해 수감 중이던 정승화 장군에게 생일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후 위컴은 서울의 봄이 실패하고 사실상 전두환이 집권할 일만 남자 실망하여, 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1980년 8월 8일 <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한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참고로 저 발언에 나오는 '나그네쥐'란, 정확히는 북미 지역과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에 서식하고 있는 나그네쥐, 즉 '레밍'을 말한다. 즉, 위컴은 한국인들이 단순히 쥐새끼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앞의 레밍들을 무조건 추종하여 물에 빠지는 레밍처럼 당시 전두환을 추종하는 한국인들을 레밍의 행태에 빗댄 것이다. 또 만약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음을 증명하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내부 안정이 우선이라며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발언했다.

원래 해당 기사는 위컴의 신분을 '고위급 미군장성'이라고만 소개해 익명으로 보도했지만, 그 인터뷰를 보고 빡친 전두환에 의해 '그 장성'이 위컴이라는게 밝혀져서 일이 커졌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이 8월 8일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고위관계자'를 위컴이라고 밝혀 익명성을 제거한 것 때문이었다. 서울발 기사는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이 기사가 한국 언론에 다시 보도되면서 기사 내용이 검열/왜곡되어 미국 정부가 전두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둔갑해 물의를 더하면서 전두환은 환호했다. 이에 위컴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 전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워싱턴과 서울에서 일고 있는 파장에 가장 당황했다.[5][6]

1983년에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으며, 1984년 12월 19일에는 주한 미군 시찰차 방문 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1987년에 퇴역한 후에는 애리조나 주 선시티의 시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여럿 방산 기업들의 회장 자리와 미 국방부 장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3. 기타[편집]


  • 회고록으로 12.12와 미국의 딜레마가 있으며, 1999년 중앙M&B(현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정발됐으나 세월이 흘러 절판된 상태라 굳이 보려면 국회도서관까지 가야 한다.


  • 1996년, 대한민국 육군 제20보병사단의 (5.18)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약간의 오해도 있어보이는게, 당시 부대 이동은 미군의 승인을 받을 사항은 아니었다. 전시작전은 미군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진압을 위해 내려가는 부대 이동은 단순 보고 사항이지 승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당시 진압 작전은 미군과 관계없는 일이었다.

  • 정복명찰을 절대 안 달고 다녔다고 한다. 미 육군과 공군은 규정상 부대 단위로 받는 약장(부대표창)들을 저 위치에 달고, 그 밑의 주머니 덮개에 명찰을 달아야 한다. 또한, 왼쪽 약기장 위의 CIB(Combat Infantry Badge)를 규정과 달리 만찬복에 다는 소형(miniature)을 달았는데, 칼라에 일부가 가려지는 걸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둘 다 복장 규정 위반이다.
[1]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는 11대였고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는 2대였다.[2] 영어로 battle group이며 5개 중대로 구성된다.[3] Director of the Joint Staff. 합동참모본부의 주요 본부장들(주로 2,3성 장군 및 제독들이 각 부처의 본부장. 간혹 준장급 장성들도 있다. 대개 국방부 민간 고위관료들이 보직하여 교차임무를 수행한다.)을 통솔하는 3성급 보직으로, 미군에서 이 보직에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대장 진급이 99% 확실하다는 뜻이다. 위컴 이후 주요 인물로는 노턴 슈워츠, 월터 샤프, 스탠리 매크리스털, 로이드 오스틴, 커티스 스캐퍼로티 등이 있는데, 위컴 이후로 이 보직을 거친 이들은 전원이 대장으로 진급했다.[4] 당시 미국 정부는 독재자 킬러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 지미 카터 행정부였다. 당연히 전두환의 쿠데타를 괘씸하게 여겼지만, 북한이라는 변수 때문에 1.주한미군 및 비밀리에 파견된 특수전부대 투입, 2.반 하나회 군인들에게 역쿠데타 지원, 3.전두환과 타협 이 3가지 노선 중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존 위컴은 1번과 2번 노선을 지지했지만 CIA 한국 지부 간부와 대사측은 군사작전을 하면 내정간섭이고 역쿠데타 지원을 하다가 실패하면 내정간섭 및 국제적 망신이 될 수 있다며 꺼렸다. 이렇게 미국이 고민하던 사이 전두환 군부측이 정적 및 군사정변때 체포한 이들의 권력을 박탈하는데 성공하자 미국측은 어쩔 수 없이 3번 노선으로 타협했다.[5] <알려지지 않은 역사(윌리엄 글라이스틴 저.)>. 중앙M&B. 1999. p228.[6]국무부는 위컴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당시 미국에도 꽤 알려졌는지 위컴의 해당 발언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존 앤더슨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위컴의 발언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카터 역시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라도 (중략)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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