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테리

최근 편집일시 :




존 테리의 역임 직책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데이비드 베컴
(2000~2006)

존 테리
(2006~2010)

리오 퍼디난드
(2010)

첼시 FC 역대 주장
마르셀 드사이
(2001~2004)

존 테리
(2004~2017)

게리 케이힐
(2017~2019)


존 테리의 수상 이력



존 테리의 기타 정보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파일:John Terry Villa Coach.jpg

이름
존 테리
John Terry
본명
존 조지 테리
John George Terry
출생
1980년 12월 7일 (43세) /
영국 그레이터런던 런던시 바킹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잉글랜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신체
187cm | 체중 90kg| 혈액형 O형[1]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2]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991~1995 / 유스)
첼시 FC (1995~1998 / 유스)
첼시 FC (1998~2017)
노팅엄 포레스트 (2000 / 임대)
아스톤 빌라 FC (2017~2018)
코치
아스톤 빌라 FC (2018~2021 / 수석 코치)
국가대표
78경기 6골 (잉글랜드 / 2003~201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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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6번 (잉글랜드)
26번 (첼시, 아스톤 빌라)[1]
별명
글래디에이터, 존병세, 첼시 레전드[2], 푸른피의 사나이, 푸른피의 전설, 푸른심장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5.1.2. 코치
5.2. 개인 수상
5.2.1. 선수
6. 테리에 대한 말, 말, 말
7. 사건 사고
7.1. 9.11 테러 모욕 사건
7.3. 불륜 스캔들
7.4. 그 외의 기행들
8.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아스톤 빌라 FC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 첼시 유스에서 배출한 전설적인 수비수로, 현역 생활 동안 노팅엄 포레스트 임대 시기만 제외하면 첼시에서 19년을 뛰었던 첼시의 레전드이다. UEFA 올해의 수비수 3회 수상에 UEFA 올해의 팀에 4차례, FIFA FIFPro 월드 XI에 5차례 선정[3]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선수이다. 2004년 마르셀 드사이의 이적 후 공석이 된 주장직을 무리뉴에 의해 역임하게 된 이후 2017년까지 첼시의 주장을 역임했다.

2. 선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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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클럽 경력[편집]



2.1.1. 웨스트햄의 유스, 첼시와 계약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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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에서 막 데뷔했을 시절 존 테리.

존 테리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관심을 뒀고 이스트버리 종합 중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역 선데이 리그 클럽인 Senrab에 입단해 축구 기술을 갈고 닦았다.[4] 테리는 1991년 11살의 나이에 웨스트 햄 유스팀에 입단했는데, 처음에는 센터백이 아닌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는 웨스트 햄 유스팀에서 4년간 활동하다가 1995년 첼시 유스팀으로 이적해 첼시의 유스팀과 리저브팀에서 활동했다. EPL에서는 첼시 유스로 인정되어 있다. 이무렵 첼시는 팀 내 센터백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키가 크고 수비적 능력이 우수한 테리의 포지션을 센터백으로 변경시켰다.

2.1.2. 첼시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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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테리는 16살에 첼시 구단과 프로 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테리는 1998년 10월 28일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겨놓고 출전했다. 이것이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이후 그는 올덤 애슬레틱과의 FA컵 3라운드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데뷔전을 치렀고 첼시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초기엔 그렇게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했고 첼시는 그에게 기량을 좀 더 가다듬고 출전 기회를 주기 위해 2000년 1월 노팅엄 포레스트로 임대 보냈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6경기를 소화했고 2000년 여름 첼시로 복귀했다. 그후 테리는 2000-01 시즌에 리그 22경기, 컵 대회 4경기에 출장해 총 26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주요 선수로 거듭났으며 올해의 첼시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2001-02 시즌엔 당시 첼시의 주장이었던 마르셀 드사이와 함께 첼시의 핵심 수비 요원으로 활약했다. 2001년 12월 5일에는 처음으로 첼시의 주장 완장을 차고 찰튼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첼시는 이 시즌에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5] 결승전에서 아스날에게 2:0으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1.2.1. '더 블루스'의 캡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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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 시즌, 테리는 계속해서 마르셸 드사이와 함께 첼시의 수비진을 이끌었다.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는 드사이가 부상으로 경기를 뛰지 못할 때면 항상 테리를 주장으로 삼았고 윌리엄 갈라스와 함께 또다른 수비 조합을 결성하게 했다. 테리는 갈라스와도 훌륭한 팀워크를 맺고 첼시를 리그 준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던 2004년 여름, 로만 아브라히모비치 구단주는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한 후 첼시의 황금시대를 이끌어낼 인물을 선임한다. 그는 바로 주제 무리뉴였다. 무리뉴는 첼시로 부임하자마자 테리를 공식적으로 주장으로 삼고 전폭적인 신임을 아끼지 않았다. 테리는 그의 신임에 힘입어 '로얄 블루스'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로 군림한다.

2004-05 시즌, 첼시는 무리뉴의 완벽에 가까운 지략과 탄탄한 선수진에 힘입어 EPL을 문자 그대로 씹어먹었다. 리그 25경기 무실점, 리그 최소 실점 (15실점)[6], 역대 최다 승리 (29승)[7][8], 역대 최다 승점 (95점) 등 유수한 기록들이 바로 이 시즌에 달성되었다. 테리 또한 이 시기에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챔피언스 리그 최고의 수비수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세계 베스트 11에서 수비수 부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테리는 2005-06 시즌에서도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절정에 달하는 폼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첼시가 승점 91점을 획득해 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2006-07 시즌에도 엉덩이쪽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여러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훌륭한 활약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러던 2006년 10월 14일 레딩 전에서 페트르 체흐가 끔찍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를 대신해 투입된 카를로 쿠디치니까지 부상으로 아웃되자, 테리는 그들을 대신해 골키퍼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골키퍼 역할을 잘 해내 팀이 1:0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첼시는 아쉽게도 맨유에게 밀려 리그 2위를 기록해 리그 3연패를 달성하진 못했다. 칼링컵 결승전 때는 아부 디아비에게 얼굴을 맞으면서 그대로 실신하였다. 다행이 안드리 셰브첸코가 말려들어간 테리의 혀를 잡아주어 기도가 막히지 않게 도와주었고[9] 의료진들도 급히 테리를 치료를 해주면서 테리는 그 이후에도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006-07 시즌이 끝난 뒤, 테리는 구단에 주급을 대폭 늘린 계약 조건으로 재계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기나긴 협상 끝에 7월 말에 13만 천 파운드에서 13만 5천 파운드 사이의 주급을 받는 조건 하에 제계약을 체결했다. 테리는 이로써 당시 EPL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주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맞이한 2007-08 시즌에서, 그는 시련에 직면했다. 2007년 12월 16일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에마누엘 에부에에게 발이 밟히는 바람에 발가락 뼈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테리가 여러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가뜩이나 이 시즌에 수비 불안으로 성적이 좋지 않던 첼시는 급격히 흔들렸다. [10]

그래도 당초 석달 동안 재활받아야 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빠른 속도로 회복하여 토트넘과의 리그컵 결승전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웨인 브리지의 대삽질로 연장전 끝에 준우승했다. 테리는 아브람 그랜트와 함께 첼시의 전열을 가다듬고 성적을 끌어올려 리그 준우승, 챔스 결승 진출을 이루며 유종의 미를 이루었다. 또한 무리뉴 시절 번번히 챔스 4강에서 고배를 마시던 첼시는 아브람 그랜트의 지휘하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까지 올라 마침내 고대하던 빅이어 획득을 눈앞에 뒀다. 그런데 리그 최종전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테리는 체흐와 충돌하여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벌어져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장이 불투명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결승전에 선발 출장하였다. 테리는 결승전 상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맨유의 공세를 호날두의 헤딩골을 제외하고 모조리 저지했다. 그후 승부차기에서 모든 것이 결판나게 되었다. 체흐가 호날두의 슛을 저지해내면서 승부는 첼시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다섯 번째 키커로 나선 존 테리가 골을 넣는다면, 첼시는 승부차기에서 5:3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어 빅이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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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의 캡틴은 그만 미끄러지며 공을 찼고 그의 슈팅은 골대를 맞히고 말았다. 그후 첼시는 아넬카의 실축으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2.1.2.2. 암흑기에도 빛난 주장[편집]

무리뉴를 떠나 보낸 후, 첼시는 암흑기에 빨려들어갔다. 아브람 그랜트,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가 연이어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무리뉴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선수들 및 로만과의 갈등 끝에 경질되고 말았다. 그래도 테리는 이 기간 동안에도 프랭크 램파드, 디디에 드록바와 함께 첼시의 든든한 핵심 멤버로서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던 2008-09 시즌 후반기에 거스 히딩크가 스콜라리를 대신해 부임한 후 첼시는 다시 잘 나가기 시작했고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진출해 결승전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원정 0:0, 홈에서 1:1 무승부를 거둬 원정 골득실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특히 홈에서의 4강 2차전은 지금까지 오브레보 심판의 판정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첼시 팬들은 현재까지도 이때를 두고두고 한스러워하고 있다.

2.1.2.3. 안첼로티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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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맨체스터 시티가 테리에게 거액의 비드를 제시했다. 그러나 테리는 안첼로티 감독의 설득을 받아들여 첼시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첼시는 안첼로티의 지휘하에 강력한 공격력과 탄탄한 수비력을 발휘해 리그를 씹어먹었고 테리는 주장으로서 첼시의 4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FA 컵 결승전에서도 포츠머스를 상대로 활약해 1:0 승리를 이끌어내며 개인 통산 4번째 FA 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테리는 2011년 12월 31일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했는데, 이 경기는 그가 프로에 데뷔한 이래 400번째로 치르는 경기였으며 첼시 역사상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이기도 했다. 또한 테리는 2011년에 전 세계에 1000개 이상의 패스를 한 선수들 중 3번째로 패스 성공률이 높은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패스 성공률은 91.%였는데, 이보다 높은 선수는 오직 차비 에르난데스(93%)와 레온 브리튼(93.3%)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이렇듯 잘한 것과는 달리, 첼시는 안첼로티의 두번째 시즌 때는 지난 시즌에 비해 위력이 떨어져 고전하다가 막판에 가까스로 순위를 올려 리그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진출했으나 맨유에게 패해 [11]준결승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에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성적이 불만족스럽고 리빌딩에 차질이 생겼다는 이유로 안첼로티를 경질했다.

2.1.2.4. 시련의 [편집]

안첼로티가 경질된 후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첼시의 수비 라인을 끌어올려 경기 내내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 전술을 시행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주력이 느려진 테리에게 보아스의 이 같은 전술은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테리는 2011-12 시즌에 크게 부진하고 말았고 첼시는 이로 인해 성적이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다가 보아스가 경질된 후 첼시의 레전드였던 로베르토 디 마테오가 부임한 후 전력을 가다듬은 첼시는 리그는 비록 로만 구단주 부임 이래 최악의 성적인 6위로 마감했지만 FA 컵 우승을 달성하고 뒤이어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기적적인 행보를 보이더니 마침내 우승을 달성했다. 다만 테리는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알렉시스 산체스의 무릎을 걷어차는 행위를 저지르다 퇴장당하는 바람에 결승전엔 출장하지 못했다. 2008년의 악몽을 씻어버리고 싶었을 그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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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진은 찍었다!

2012-13 시즌은 그에게 또다른 시련을 안겨줬다. 그를 굳건히 신뢰했던 디 마테오 감독은 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그 뒤를 이은흑마법사 베니테즈 감독은 그가 노쇠화했다고 판단하고 주전 자리를 게리 케이힐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다비드 루이즈[12]에게 넘겨줬다. 결국 테리는 이 시즌에 치른 경기들 중 상당수를 벤치에서 시작해야 했고 리그에서 겨우 14경기에 출전하는 등 예전에 비해 입지가 위태로워진 모습을 보였다. 이제 테리에게 남은 길은 계약 만료 때까지 백업으로 뛰다가 은퇴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것 밖엔 없는 듯 했다.

2.1.2.5. 무리뉴와의 재회[편집]

그러다가 2013년 여름, 무리뉴가 첼시로 복귀했다. 무리뉴는 테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를 다시 주전으로 기용했다.[13] 이에 테리는 회춘한 모습을 보이며 첼시의 수비진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 결과 첼시는 2013-14 시즌 리그 3위,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선전했다. 이후 2014년 5월 14일, 테리는 첼시와 1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2.1.2.5.1. 2014-1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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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의 주전이었다. 활약상을 보면 제 2의 전성기라 할 만 했지만 센터백 파트너인 게리 케이힐이 시즌 초반부터 많은 실수를 범해서 테리가 할 일이 더 많았다. 말년에 더 고생 구단의 정책 변화로 인해 30세 이상 선수들에게 1년씩 재계약하는 방식이 적용되면서 프랭크 램파드애슐리 콜 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많은 것 같다.

14-15 시즌 첼시의 통산 4번째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EPL 역대 2번째로 전경기 풀타임 출전 기록도 보유한 시즌.

첼시 수비의 테리 의존도는 매우 높다. 테리가 있는 경기와 없는 경기를 비교하면 테리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테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은 선수들간의 간격이 유지되면서 완벽한 수비가 되지만 테리가 없는 날은 선수들이 우왕좌왕하고 정신차리지 못하며 실점하기 일쑤다. 정작 더 큰 문제점은 첼시가 아직까지 현실적인 테리의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때 게리 케이힐이 테리의 대체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4-15 시즌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주마는 지금 당장 대체자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테리와는 다른 스타일의 수비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2.1.2.5.2. 2015-16 시즌[편집]

15-16 시즌 초반에 몇 경기 나오더니, 9월달 부터 무리뉴 감독은 전술상의 이유를 들어서 주마-케이힐 조합을 선택하면서 계속 벤치를 달구고 있다. 하지만 테리가 주전에서 빠지자마자 첼시는 자동문 수비를 보여주는데, 최악의 폼을 보여주는 이바노비치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테리의 부재[14]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다시 주전을 잡으면서 2경기 째 무실점을 이끌고 있다.

리그 11라운드 리버풀전에서 1:3으로 패배했을 때는 워스트 플레이어로 뽑히는 등 기량이 극심하게 떨어진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현지 해설의 평가로는 그냥 축구장에서 뛰고 있는 노인[15]... 위에 언급된 일로 태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폼이 저하된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두 가지 모두 전년도 우승팀 주전이라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태인 것은 확실하다.

2015년 11월 29일 토트넘전에서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했다. 테리 대신 케이힐이 출전하여 주마와 호흡을 맞췄는데 이 경기에서 주마는 평점 7.2점 케이힐은 평점 7점으로 각각의 활약상을 반영해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주마는 MOM으로 선정되기도 했다.[16] 주마-케이힐 조합의 안정감을 확인한 주제 무리뉴가 과연 부상에서 복귀할 테리에게 계속 선발 자리를 내어 줄 지 의문이다.

포르투전에서 선발 복귀, 흠 없는 수비를 하며 완승을 이끌었다. 주마 역시 경험 전수를 받은 듯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2015년 12월 18일 무리뉴는 첼시와 상호간의 합의로 계약을 해지했으며, 첼시 보드진인 에메날로는 첼시 선수들의 태업을 시인했다. 현재 존 테리는 자신의 개인 SNS에서 엄청난 욕을 먹는 중. 하지만 자신은 인스타에서 무리뉴에게 감사하는 메시지를 올리는 행동을 취하여 태업과는 멀어보인다[17]

리그 37라운드 선더랜드 원정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경고누적 퇴장을 당해 첼시 선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되나 싶었지만[18] 1년 재계약을 하면서 다음 시즌에도 첼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1.2.6. 2016-17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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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에 겪은 폼 저하와 팀 성적 부진 때문에 우려와 기대 속에서 새 시즌을 맞이 하였지만 큰 문제 없이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4R 스완지전 막판 부상 이후 리버풀, 아스날전에 모두 결장하였는데 첼시는 두 경기 모두 패배하였으며 특히 아스날전에서는 수비 문제가 대폭발하면서 존 테리가 아직 첼시의 수비진에 기여함이 큰 것을 입증했다. 게리 케이힐이바을과 함께 명실상부한 첼시의 구멍으로 자리잡았으며 다비드 루이스박스 투 박스 센터백답게 가출이 너무 잦다. 비록 그가 수비 커버 범위도 좁고 발도 느린데다가 현재 나이도 많아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만 그가 가진 리더십, 수비 조율 능력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티는 것이었다.[19] 이 현상이 퀴르트 주마가 온다고 하더라도 해소될지는 의문.[20]

곧 부상에서 복귀한다고 기사가 났다. 맨유전을 기준으로 3-4-3 시스템이 팀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있는데, 스위퍼 자리에는 루이스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테리를 스토퍼로 쓰기에는 커맨딩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 어려울 뿐 더러 스피드 면에서는 같이 느린 편에 속하는 케이힐보다도 떨어지기 때문에 콘테가 테리를 어떻게 기용할지 관심이 쏠리는 중이다.

11R 에버튼전에서 드디어 후반에 케이힐과 교체되어 복귀를 알렸다. 루이스 자리인 가운데에 있을 줄 알았지만 왼쪽 스토퍼 역할을 그대로 맡으며[21] 비록 늦은 후반이었지만 오버래핑해서 코스타에게 스루패스를 찌르는 등 자기 역할을 할 만큼은 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3백 전환 이후 그의 위상은 다시 백업으로 돌아갔다. 존 테리의 부상과 이바노비치의 부진으로 인해 만들어진 케이힐 - 루이스 - 아스필리쿠에타의 3백 라인이 7경기 동안 연승 및 1실점밖에 허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수비력을 보여주는 탓에 테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가출이 잦았던 루이스는 감독 안토니오 콘테의 케어로 가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수비의 벽이 되었고, 부진하던 케이힐도 폼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심지어 센터백은 뛰어본 적도 없던 아스필리쿠에타까지 잘해주고 있어서 이바노비치는 물론 존 테리마저 주전을 파고들 틈이 없다. SFR 스포츠에서 윌리엄 갈라스가 인터뷰어로 이 건에 대해 테리와 인터뷰를 했는데 테리는 이 인터뷰에서 "좋은 의미로 자신이 선발 라인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자신이 선발에 들어가지 않아도 성적이 상당히 좋으니 자신도 이를 따르겠다고 한 것.

이번 시즌을 끝으로 첼시를 떠난다고 한다. 링크 현역은퇴를 하는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동료들, 팬 가릴거 없이 모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발표 시기가 맨유 원정에서 2:0으로 무기력하게 패배한 이후였는데 이 은퇴발표가 팀에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파브레가스는 떠나는 테리에게 우승컵을 안겨주겠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팀은 FA 컵 4강 토트넘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즌 더블이라는 목표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사실, 냉정히 말해서 현재 존 테리의 폼은 좋지 않다. 본인 말대로 '자신이 선발 라인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 한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의 현재 폼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발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예 은퇴 자체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현재 루머로는 MLS로의 이적이나 은퇴가 유력하고 첼시시절 코치였었던 폴 클레멘트가 이끄는 스완지가 존 테리 영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리그 38라운드 선더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출전 하였고 26분에 동료들과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게리 케이힐과 교체되었다. 약 20년간의 첼시 선수 생활이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파일:존테리의 마지막.png

2.1.3. 아스톤 빌라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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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은 팀이 상당히 언밸런스한 모습을 보이며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는듯했다.

전반기 16경기 선발 출장하여 1골을 기록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점은 7.04로 준수한 수준.

그러나 리그 16R 셰필드 웬즈데이 FC와의 경기에서 중족골 부상으로 21분 만에 교체 아웃 당했고 경기 후 정밀 검사에서 10-12주가량의 부상을 진단받았다. 제임스 체스터와 함께 전 경기를 선발 출장하며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찰나라 본인과 팀 모두에게 아쉬운 상황. 한편 테리의 부상 이후 주장 완장은 체스터가 차고 경기에 나서고 있다.

후반기가 되자 팀은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아마 플레이오프를 통해 승격팀이 정해질 듯하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팀은 풀럼에게 패배해버려서 1부 리그 승격이 좌절되었고 존 테리는 아스턴 빌라를 떠나게 되었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는 뉴스가 있으나 은퇴설을 부인했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현역 은퇴 소식을 밝혔고, 아스톤 빌라 수석코치에 부임했다.

2.2. 국가대표[편집]


2003년 6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유로 2004부터 리오 퍼디난드와 주전 센터백을 담당하게 되었다.

2006년 5월 30일 헝가리와 월드컵을 앞두고 펼쳐진 친선 경기에서 테리는 자신의 국가대표 데뷔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 본선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 비록 잉글랜드는 8강에서 탈락했지만, 본인은 16강 에콰도르전에서 MOM으로 선정되는 등 대회 기간 동안 맹활약을 펼치면서 월드컵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한편, 독일 월드컵 종료 후 데이비드 베컴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주장 완장을 차고 치룬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하면서 자축했다.

하지만 주장 완장을 차고 유로 2008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 등 마냥 좋은 일들만 있지는 않았다. 거기에다 웨인 브리지의 전 여친과의 불륜도 드러나면서 남아공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주장 완장을 박탈 당하기까지 했으며, 파비오 카펠로와의 사이도 그리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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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문제만 아니면 우승한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본인이 부상 트러블을 일으킨 잉글랜드의 캡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승선,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였지만 웨인 루니 등과 함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고 팀은 16강에서 광탈했다. 세계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이자 국대 파트너인 리오 퍼디난드가 부상으로 빠진 게 컸던 듯. 잉글랜드보다 약팀만 있었던 조별예선은 어찌저찌 1실점으로 잘 막았으나,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메수트 외질, 토마스 뮐러, 미로슬라프 클로제 등에게 제대로 농락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 와중에서도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전술을 비난하고 주장인 스티븐 제라드와 한판 붙었다.(...) 데이비드 베컴의 중재로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많은 지탄을 받았다.

2012년 9월 24일, 유로 2012를 끝으로 결국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존 테리는 지능, 리더십, 태클, 클리어링, 가로채기, 빌드업, 공격 가담, 몸싸움, 제공권 등 커맨더형 센터백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기량을 월드클래스 수준으로 갖춘데다가 수비수로서는 당대 최강의 독보적인 득점력까지 갖췄던 완성된 센터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은 푸욜과 동급이라고 해도 무방한 게임 리딩 능력. 즉 수비지능이다. 최고의 커맨더형 수비수로 2000년대 중반부터 계속해서 입증되어 왔으며 2010년 이후에도 케이힐, 다비드 루이스, 퀴르 주마 등 여러 선수들과 조합을 맞출 때마다 뛰어난 수비 리딩 능력이 빛을 발한다. 테리가 없으면 우왕좌왕하거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잦지만 테리가 이끌어주면 전체적인 수비 라인이 안정된다. 이 밖에도 공격적인 태클, 뛰어난 위치 선정에도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경고누적으로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어지간해서 부상당하지 않는데다가 경기 내내 실수를 거의 범하지 않기에 감독 입장에서는 항상 믿음직한 인물이다.

커맨더 수비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센터백이지만 스타일만 보면 파이터형 수비수이기도 한데, 굉장히 터프한 수비 방식을 즐기는 편이다. 그게 맨유의 네마냐 비디치정도는 아니더라도[22] 보통 커맨더형 수비수라고 일컬어지는 페어 메르테자커리오 퍼디난드에 비해 도전적인 태클이나 공격 차단을 많이 시도하고 성공률도 매우 높다.[23] 이는 존 테리와 경기했던 선수들의 평가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단점이라면 거북이 스피드(...)가 있는데[24], 이 때문에 뒷 공간을 자주 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키가 작으면서 스피드가 빠르고 라인브레이킹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에게는 약한 경향이 있다. 또한 테리의 느린 스피드는 공격에도 지장을 주는데, 수비진을 올려 가둬놓고 패야 되는 상황인데 라인을 올리자니 스루패스로 뒷공간이 털리고, 내리자니 3선 미드필더진과 간격이 벌어져서 실점 빌미를 제공한다. 테리가 수비라인을 올린 전술을 사용한 보아스 감독시절 크게 고생한 이유.

통칭 걸레수비로 불리는 특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로 슈팅이나 키패스 등을 온 몸으로 막는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땅볼 슛을 다이빙 헤더(...)로 막으려는 시도도 했다. 물론, 이게 굉장히 위험한 수비방식이라 슈팅을 막으려다 발이 얼굴로 향해버려서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다. 이런 수비 형태는 대체로 골키퍼의 시야를 가리는 주범이 되는데, 테리의 경우 위치 선정이 굉장히 좋고 실수를 거의 범하지 않기에 실점의 빌미가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테리의 존재 하나가 체흐의 부담을 반 이상 덜어주었다고 봐도 무방.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결과는... 2017년 현재 비슷한 스타일의 수비를 하는 선수로 필 존스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필 존스는 의욕은 앞서지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 쓸데없는 파울을 내주는 경우가 많다.)


몸싸움 능력과 점프력, 헤더 능력이 상당히 좋아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득점력이 대단했다. 헤더 좀 한다는 네마냐 비디치의 득점 기록조차도 테리의 기록에 비하면 그저 애송이 수준. 다비드 루이스처럼 공격 본능이나 중거리 슈팅 능력이 있는 선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역대 EPL 수비수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게 된 것은 8할이 헤딩능력. 04/05 챔피언스리그에서만 무려 4골을 넣었고 12/13시즌 리그에서 단 14경기만 출장하고도 4골을 득점하였다. 첼시 소속으로 리그에서만 41골, 통산 67골을 넣었다.

또한 현대 축구에서 요구되는 후방 빌드업 능력이 훌륭했던 센터백이기도 하다. 일단 패스미스를 거의 범하지 않을 뿐더러, 시야도 넓은 데다 양발로[25] 중장거리 패스를 정확하게 뿌려줄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공을 걷어낼 때 단순히 걷어내기보다는 최대한 바로 팀원에게 롱패스처럼 이어지도록 지능적으로 클리어링을 해서 팀의 공격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현역 은퇴 여부를 두고 유럽 내 여러 클럽[26]들과 협상을 하다가 결국 선수로서는 은퇴를 하고 첼시 FC의 리저브 팀 감독을 맡는 듯 했으나 전 시즌 까지 선수로 뛰었던 아스톤 빌라 FC의 수석코치직에 선임됐다.

이후 수석코치로써 딘 스미스를 보좌하며 18-19 시즌을 잘 이끌며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마우리치오 사리가 갑작스럽게 나간 첼시의 사령탑에 잠깐 언급되긴 했으나, 실제 감독직을 맡아보지 않아 크게 가능성은 없었으며 같은 첼시 레전드인 프랭크 램파드가 첼시 감독직을 이어받으며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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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금 만나게 된 두 첼시 FC의 레전드 존 테리와 프랭크 램파드.

에디 하우 감독이 떠난 AFC 본머스의 감독 부임설이 돌고 있는 중이다. 현재 아스톤 빌라 측에서 크레이그 셰익스피어를 새 수석 코치로 선임하며 존 테리가 빌라를 떠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상태. 그러나 본머스가 제이슨 틴달을 신임 감독으로 내세우며 본머스 감독 부임설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제이슨 틴달이 20/21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 당하면서 다시금 AFC 본머스 감독 부임설이 돌고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1.1. 선수[편집]




5.1.2. 코치[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5.2.1. 선수[편집]


  • FIFA FIFPro 월드 XI: 2005, 2006, 2007, 2008, 2009
  • UEFA 올해의 수비수: 2004-05, 2007-08, 2008-09
  • UEFA 올해의 팀: 2005, 2007, 2008, 2009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 2015[27]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5년 1월
  • PFA 올해의 선수: 2005
  • PFA 올해의 팀: 2003-04, 2004-05, 2005-06, 2014-15
  • PFA 세기의 팀 (1997–2007): 2007[28]
  • 첼시 올해의 선수: 2001, 2006
  • 첼시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8
  • ESM 올해의 팀: 2004-05, 2008-09, 2009-10
  • 옹즈 드 옹즈: 2005, 2007, 2008, 2009
  • 앨런 허데이커 트로피: 2005, 2015
  • 영국 올해의 아버지 상: 2009

6. 테리에 대한 말, 말, 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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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에는 수많은 정상급 수비수들이 있었지만 그 중 최고는 존 테리라고 생각한다. 위치 선정과 특히 경기를 읽는 능력에 관해서 그보다 뛰어난 수비수를 본 적이 없다.

제이미 캐러거


그는 경기의 흐름을 잘 읽고, 신체적으로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롭다. 그를 상대하게 되면, 터프한 경기에 나선다는 걸 알고 나가야 한다.

웨인 루니


피치 위의 또다른 훌륭한 코치다. 그는 훌륭한 리더고, 그의 커리어는 훌륭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아르센 벵거


그가 주장으로서 일궈낸 모든 커리어는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그는 훌륭한 선수고 리더이며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선수이다.

엠마누엘 프티


센터백이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존 테리를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는 다른 동료들의 경기력도 끌어올릴 능력을 가졌다. 그에겐 클래스가 있다.

크리스 스몰링


그는 전술적으로 굉장히 똑똑하고, 상대방의 길목을 차단할 줄 알며, 공간을 내주지 않고, 신체적인 경합에서 절대 밀리지 않는다. 신체적으로 그는 육중한 편이지만 잠을 자는 습관이나 식습관을 바꿔가면서 자신에게 엄격함을 유지한다. 리더십 측면에서는 그가 훌륭한 선수가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전성기를 유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팀의 정말 위대한 리더이다.

마르셀 드사이


앞으로 센터백 포지션에서 누군가 잘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그를 존 테리의 후계자라고 부를 것이다. 아마 우리는 그보다 나은 센터백을 영영 못 볼지도 모르겠다.

제이미 캐러거


첼시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 그는 다른 누구보다 2배 더 열심히 한다. 마치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과 같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카를로 안첼로티


첼시에는 테리가 있다.어떤 선수든 테리와 플레이하면 그 선수는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한다. 이것이 첼시가 최고의 팀 중 하나인 이유다.

루드 굴리트


내 커리어에서 만나본 가장 위대한 주장이다. 그는 위닝 멘탈리티를 지닌 대단한 프로페셔널이다.

줄리아누 벨레티


내가 상대하기 어려워한 선수는 플레이 방식이 매우 터프한 선수들이었다. 테리와 말디니. 이 둘을 상대할 때에는 내 앞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호나우지뉴


내가 상대해 본 잉글랜드 선수 중 최고는 존 테리였다. 그는 가장 헌신적인 선수 중 한 명이다.

차비 에르난데스


단호한 수비수이자 타고난 리더인 그는 선수들의 패닉적인 행동을 진정시킬 수 있다. 그의 상징은 예측과 판단이다. 세트피스에서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안드리 셰브첸코


그는 세계 축구사에 두고두고 남을 최고의 센터백이다.

프랭크 램파드


첼시가 최근 몇년간 성공을 거둔 것은 모두 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안프랑코 졸라


바르샤의 푸욜과 굉장히 비슷하다.테리가 은퇴하면 그를 대체하기란 쉽지 않을것이다.

데쿠


존 테리와 카를레스 푸욜 이 둘을 상대하는것은 악몽이었다.

페르난도 토레스[29]


잉글랜드판 왈테르 사무엘, 골 앞에 버티고있는 벽 같은 존재다.

니콜라스 부르디소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을 꼽는다면 그의 이름이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이안 라이트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적어도 내가 만나본 수비수 중 최고는 토니 아담스였다. 두 명을 골라야 한다면 아담스와 테리를 꼽겠다.

앨런 시어러


7. 사건 사고[편집]


2017년 첼시를 떠날 것을 선언하면서, 존 테리의 프로 의식과 실력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으나, 동시에 그동안 그가 저질렀던 많은 논란들은, 팬들 사이에서 "과연 레전드로 인정 받을 만큼 훌륭한 선수인가?" 라는 논란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지며 회자되면서, 많은 축구팬들에게 실력은 있으나 인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애증의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국내 축구 팬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프로 축구 선수로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첼시의 레전드이나 인간으로서 존 테리는 썩 좋은 인물이 아니라는 평이 많다.[30]

[취재파일] '떠나는 전설' 존 테리의 요란했던 사생활(네이버)
[취재파일] '떠나는 전설' 존 테리의 요란했던 사생활(네이트)

7.1. 9.11 테러 모욕 사건[편집]


9.11 테러 다음날인 2001년 9월 12일, 존 테리는 당시 팀 동료인 프랭크 램파드, 에이두르 구드욘센, 조디 모리스와 함께 술에 취한 상태에서 히드로 공항에서 미국인 관광객을 조롱하였고, 이 일 때문에 2002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7.2. 인종차별[편집]


2006년 11월, 국가대표 동료 선수인 레들리 킹에게 "건방진 검은 원숭이" 라고 조롱하였고, 1만 파운드의 벌금을 받았다. 레들리 킹에게 인종차별 했다는 건 해외에서도 포럼에서나 볼 수 있는 루머다. 사건은 이렇다. 2006년 11월 첼시가 토트넘을 상대로 2-1로 패배하였다. 그 경기는 주심이었던 그레엄 폴이 다수의 첼시 선수에게 옐로 카드를 주고 드록바의 골을 취소하는 등, 판정 논란이 있었던 경기였다.

테리는 경기 후 바로 심판인 그레엄 폴에게 갔고 그레엄 폴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애슐리 콜은 그레엄 폴이 첼시 선수들이 기강이없다 좀 배워야 한다며 가르치길 원했다고 증언했으며 이어서 테리는 주심이 자신에게 경기장 그리고 드레싱 룸에서 한마디 했다고 증언했고 무리뉴는 그레엄 폴이 스타처럼 돋보이고 싶어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테리와 콜의 증언으로 그레엄 폴의 청렴성에 논란이 생겼고, 이들의 주장에 잉글랜드 FA는 그레엄 폴을 변호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테리는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고 그 대가로 1만 파운드의 벌금을 내게되었다.당시 주심 그레엄 폴이 밝힌 2006년 11월 첼시 토트넘전 이후 사건

2011년, 리오 퍼디난드의 동생인 안톤 퍼디난드에게 "검둥이"라고 하였고, 22만 파운드의 벌금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한 이로 인해 리오 퍼디난드와 함께 맨유에서 뛰었던 박지성이 훗날 QPR에서 첼시와의 경기 주장으로 출전했을때 첼시의 주장이었던 존 테리와 악수를 거부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31]

그러나 2011년의 이 사건은 여러 공방 끝에 결국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인종차별 혐의를 완전히 벗었다. 애초에 당시 스쿼드 주전 절반 이상이 흑인이었던 첼시의 주장이 인종차별을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기는 했다. 법정 당시 팀 동료였던 애슐리 콜에게 변호를 받기도. 그리고 당시 잉글랜드의 감독이었던 카펠로는 존 테리의 국가대표 주장직 박탈건을 맹비난하면서 감독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7.3. 불륜 스캔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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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0일. 그 동안 보도금지령에 묶여있던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선수 인생 최악의 상황에 마주치게 된다.

그 내용은 존 테리가 결혼하기 이전인 2006년부터 국가대표팀 동료이자 과거 같은 팀에서 활약했던 웨인 브리지의 애인 바넷사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 바넷사는 테리와 관계를 갖고 임신까지 했으며, 결국 낙태를 했다고 한다[32]. 게다가 이번 기사로 인해 과거 존 테리가 저질렀던 수많은 문제들이 다시 대두되었다. 이로 인해 테리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주장직은 리오 퍼디난드에게 넘어갔다. 이후 브리지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인 카펠로의 국대 승선 권유도 거절하였고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현지에 나온 기사 중엔 브리지가 국대 승선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테리로부터 사과 한 마디조차 없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맨시티 서포터이자 원래부터 존 테리를 싫어했던 노엘 갤러거[33] 이 일을 언급하면서 존 테리는 XX끼이며 맨시티 팬들이 존 테리를 더 욕해줬으면 좋겠다는 인터뷰를 하였다.

게다가 테리는 그 전 해인 2009년에 영국인이 뽑은 올해의 아버지상을 받았기 때문에(...) 배로 까였다.인디펜던트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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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는 이른바 불륜더비로 다시 태어났다. 2월 28일 첼시의 홈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벌어진 제1차 불륜 더비에서 맨시티는 전 팀원들이 분기탱천해 첼시를 4-2로 대파했다. 참고로 경기 시작 전 서로 악수할 때 과연 테리와 브리지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에 대해 전 세계 축구팬의 이목이 모였고 모두의 예상대로 브리지는 테리의 악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악수전에 심판 2명이 한번에 쳐다보는게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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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내내 브리지는 테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위해나 시비 없이 프로다운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였다. 오히려 테베즈가 펄펄 날뛰면서 테리에게 덤비려 했다.

형인 폴 테리 또한 팀 동료의 애인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이 쪽은 팀 동료 선수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참고). 뜨거운 형제들 자살한 축구선수는 데일 로버츠라는 5부 리그의 선수다. 이 선수는 선덜랜드의 젊은 윙어인 아담 존슨의 절친.[35] 이에 관련하여 아담 존슨은 자신의 이너웨어에 R.I.P. DALE이라는 글귀를 적고 탈의 세레모니를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동료 선수의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은 전설적인 행보 때문에 2015년 8월 첼시 팀닥터 섹스 스캔들에 당연히(...) 연루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팬들이 많다. 물론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기에 존 테리가 얽힌 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불륜 스캔들의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부인과는 관계 회복을 잘 한 듯 하다는 것.

7.4. 그 외의 기행들[편집]


장애인 전용 주차장에 고급 외제차를 주차시켜 놓은 장면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된통 욕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고는 2015년 9월 27일, 같은 짓을 반복했다. 초범이 아니었어??? 사실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위법이 아닐 수도 있다.

2010년 3월 16일에는 챔피언스 리그 16강 인테르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중 뺑소니 사건까지 일으켰다.

A매치 기간 중 팀을 이탈해서 술집에서 노상방뇨를 하며 추태를 부리거나, 25살때 17살 짜리 여자애한테 '니 끈팬티가 좋아'라는 문자를 보냈다거나 으악[36] 도박으로 거액을 잃은 사건 등이다.

8. 여담[편집]


노안이다. 탈모도 있다. 탈모 때문에 대표팀 시절에는 루니랑 서로 디스를 교환했다는 듯. 믿기 힘들지만, 앨런 스미스는 물론 스티븐 제라드와 동갑. 그래서 지금은 다른 팀의 프랭크 램파드첼시 FC 감독인 주제 무리뉴 감독 같은 사람들과 같이 서 있으면 상당히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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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나오는 챔스 결승에서의 실축도 흑역사. 맨유쪽에서 호날두가 실축을 했고 첼시쪽은 모두 성공해서 자신만 넣으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비로 인해 발이 미끄러지면서 날려먹었고 그대로 러시안 룰렛 돌입. 아넬카의 슈팅이 반 데 사르에게 막히면서 맨유가 우승을 한다. 첼시의 주장 존 테리! 이것은 뭐 대단한 선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빅이어를 들어올린 이후인 2015년까지도 이 실축을 생각하면 무척 괴롭다고 한다.[37]

2011-12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전에서 퇴장당하며 대단한 선택(…)을 다시 볼 수는 없게 되었고, 퇴장 당한 것도 대단한 선택이다. 첼시는 기적적으로 빅 이어를 들어올리게 된다.

2012-13 시즌에서도 부상으로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만 팀이 우승하면서 아쉬움을 달랬고, 조제 보싱와가 없어 프랭크 램파드와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2013-14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 때의 부상으로 인해 올해도 결승 불운이 계속되는 건가...했는데 2차전 때 복귀했다. 그런데 팀은 3-1로 패하며 또 결승 출전 실패.(...)

어릴때는 맨유빠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맨유빠. 알렉스 퍼거슨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프로 의식과 팬 서비스는 좋다는 평을 듣는다. 지금까지 주장으로서 첼시의 전성기를 이끌어왔으며, 어렸을 때부터 첼시에서만 있었던 원 클럽 맨이고 첼시 팬들에 대한 팬 서비스만큼은 흠 잡을 데 없기 때문에 첼시 팬들의 사랑도 독차지한다. 게다가 2013-14 시즌이 끝난 후에 휴가까지 반납하고 훈련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니, 인간으로서의 그는 비난받을 점이 많지만 그 외에 축구선수로만 봤을 때는 존경을 받을 만한 선수 중 하나이다.

그러나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선수이며,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평이 많다.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자신의 전술에 부합하지 않아 존 테리를 주전에서 제외했을 때 애슐리 콜 등 고참선수들과 작당해 태업하며 빌라스-보아스의 경질에 큰 힘을 보탰다는 얘기는 기정사실화되었다.[38][39] 거기다가 2015-16 시즌 태업 논란에서는 본인이 주도를 했어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인 상황이다. 했으면 당연히 문제고, 안 했어도 본인을 다시 주전으로 앉혀 준 무리뉴를 상대로 태업을 하는 선수단을 주장이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는 뜻밖에 안 된다.[40] 그렇지만 2015-16 시즌을 단순 태업으로 두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우선 전 시즌 우승에 대한 보상으로 긴 휴식시간에 의해 프리 시즌이 짧았던 점, 스쿼드의 부실한 보강, 부상, 스태프와 감독간의 관계 등 첼시에 여러 악재가 겹쳤던 시즌이었고, 무리뉴는 선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는데 그것이 팀에 썩은 사과 한 두개가 있다 식의 발언인지라 다수가 태업을 했을 가능성도 적고 그저 열심히 뛰려고 안한다던지, 훈련 태도가 나쁘다던지 등의 선수 한 두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1]

2009년에는 해체 위기에 놓여 있던 첼시 레이디스 FC[42]에 자기가 직접 투자해서 회장 자리에 앉았다.

지소연 선수가 지목해 슛포러브에 나왔다! 참여 후 유니폼을 제작진에게 주면서 자선경매에 부쳐 기부금으로 써 달라는 말을 하며 훈훈한 마음씨를 보여줬다. 불륜만 안 했어도... 여기로...

마음의 소리 901화에서 행인으로 출연했다.# 같이 나온 선수는 로랑 코시엘니뱅상 콤파니(...)


현역 시절 가장 상대하기 두려웠던 선수 한 명을 뽑아달라는 질문에 티에리 앙리라고 답하였다. 옆에 있던 제이미 캐러거는 아직도 앙리가 무섭다나 뭐라나[43] '그 누구도 이런 걱정을 안긴 상대는 없었다.' 면서 앙리의 엄청난 스피드와 놀라운 움직임을 칭찬했다. 그래서 아스날과의 경기 전날 밤에는 ‘내일 고생좀 하겠구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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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이다. 묘한 건 스포츠 계 스타들 중에는 골프처럼 O형이 많다는 것. 축구가 그렇다. 대표적인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나 웨인 루니는 당연히 O형일 터. 한때를 풍미했던 잉글랜드 출신 축구 스타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존 테리도 모두 O형이다. 스포츠 뉴스기사[2] 2006년 10월 14일, 레딩 FC과의 경기에서 주전 골키퍼인 페트르 체흐가 그 끔찍한 두개골 골절 중상을 입고 교체로 나온 쿠디치니까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임시로 골키퍼로 뛴 적이 있다.[3] 모두 다 잉글랜드 선수 기준 최다 수상이다.[4] 참고로 솔 캠벨, 저메인 데포, 바비 자모라, 레들리 킹, 그리고 제이로이드 사무엘 등 훗날 EPL에서 명성을 떨치게 될 이들도 어린 시절 이 Senrab이란 클럽에서 활동했다.[5] 이때 테리는 FA컵 준결승전에서 풀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이끌어냈다.[6] 2020년 현재까지도 EPL에서 깨지지 않은 역대급 기록이다.[7] 이 기록은 16-17시즌의 첼시가 30승을 기록하며 한 번 더 갈아엎었다.[8] 이 기록은 다시 17-18시즌의 맨시티가 32승을 거두며 깨지게 된다[9] 혹자들은 이것이 셰브첸코의 첼시 입단 후 최대 업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일화는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도 소개되었다.[10] 대표적으로 아스톤 빌라와의 홈경기에서 4-4로 비긴 경기가 있었다. 2003년 박싱데이 찰튼 원정 4:2 패배 이후 첫 4실점 경기였다.[11] 이 시즌에 맨유와 5번경기했는데 1번이기고 모두 패배했다. 커뮤니티실드에서 1:3으로 패배했고 리그에서 2:1로 이겼지만 챔스에서 0:1, 1:2로 또 졌다. 리그 우승의 마지막 기회였던 36라운드에서도 1:2로 패해 버렸다.[12] 베니테즈는 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를 기용하기 위해 기존에 라이트백 위치에서 뛰던 이바노비치를 센터백으로 썼고 이로 인해 루이즈가 미드필더에서 본격적으로 뛰게 되었다. --어쨌든 이 시즌 중후반기의 존 테리는 주전은 아니었다.[13] 프리시즌 기간에 가족과 저녁을 먹고 와인 한 잔 하려 했는데 무리뉴한테 전화가 와서 "JT, 난 너를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잘 알고 한 선수로서도 잘 알아. 밑바닥부터 시작하자. 너는 나의 핵심(main man)이고 너는 나의 캡틴이야. 내년에는 출전기회가 있을거야. 여름에 열심히 하자."라는 얘기를 듣고 동기부여가 되어 마시려던 와인을 안마셨다고 한다.[14] 디마테오 감독은 테리의 부재로인한 케이힐-루이스 조합으로 수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질당했다. 결국 베니테즈가 케이힐-이바노비치 조합으로 수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15] Old man이라고 트래버 프랜시스가 BT Sports에서 평가하였다.[16] 기재한 평점은 데일리 스포츠에서 발췌해 왔으며 모든 선수들의 평점 또한 데일리 스포츠에서 확인 할 수 있다.[17] 16-17 시즌 첼시vs맨유 경기에서 무리뉴와 굉장히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된 것을 보면 무리뉴와의 관계에는 전혀 문제 없는 것으로 보인다.[18] 경기 내에서 퇴장당한 경우라면 보통 두 경기 출전 불가 징계를 받는다. 그리고 첼시는 (일정 조정때문에 늦춰진) 30라운드 리버풀전과 38라운드 레스터 시티전, 두 경기가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인지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표정관리가 안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19] 사실 테리를 기용하는 이유는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그의 리더십, 수비 조율 능력이 8할이다. 데뷔 때부터 발이 느렸던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최고의 센터백으로 평가 받을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리더쉽과 수비 지능의 자신의 모든 단점을 상회하고도 남기 때문이다.[20] 주마도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수비 기술이 좋은 거지 위치 선정 같은 지능적 플레이에는 아직 미숙하다.[21] 루이스가 맡고 있는 중앙 스위퍼 자리를 맡기에는 테리의 수비범위는 너무 좁다.[22] 비디치가 수비하는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위험하게 수비한다. 덕분에 카드도 많이 받았다. 그나마 심판 파울콜이 관대한 EPL에서 뛰었기에 비디치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이 많은데, 세리에 A인테르로 가서 폭망한 것을 보면 그게 어느 정도 맞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23] 실제로 그의 첼시 커리어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나마 받은 것도 폼이 많이 떨어져있던 첼시 커리어 극후반기에 몰려 있을 정도이다. 물론 한 성깔 하는 캡틴이기에 챔스 4강에서 알렉시스 산체스한테 싸이코패스마냥 어이없이 니킥날리고 퇴장당한 적도 있다.[24] 참고로 테리는 한창 젊을때도 스피드가 느렸다. 함께 뛰던 카르발류가 준족이었으니 다행이지...[25] 센터백한테 양발 능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테리는 4백의 중앙수비수 중에서 주로 왼쪽 중앙 수비수로 출전한 선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왼쪽 풀백과 공을 주고받을 일이 잦아서 필연적으로 왼발 볼터치와 왼발 패스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준수한 왼발 능력 덕분에 빌드업 과정에서의 실수도 적었고 오른발로 공을 옮겨서 패스를 할 필요 없이 바로 왼발로 패스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빌드업 템포도 빨랐다.[26]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더비 카운티[27] 2군[28] 링크[29] 그런데 정작 이 발언을 한 페르난도 토레스는 첼시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킬러급으로 강력했다.[30] 비슷한 경우에 해당되는 선수로 라이언 긱스가 있다.[31] 당시 QPR안톤 퍼디난드가 속해 있었다.[32] 영국은 조건에 따라 임신 24주 이내에 낙태가 가능한 국가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 경제적 문제, 임산부의 육체적/정신적 건강문제가 있을 경우 낙태가 가능한데, 이 경우에 해당되는 건 없는 듯.[33] 09-10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맨시티가 존 테리를 영입한다는 설이 돌 때부터 반대하였다.[34] 사실 존테리가 앞인데 카메라 초점이 다른곳이라 존테리가 뒤처럼 보이는 것이다. [35] 그리고 2015년 3월 현재 아담 존슨은 15세 소녀와 성관계 혐의로 체포되었다(...).[36] 그 소녀는 뉴스 오브 더 월드에 그 문자를 팔아넘겼다. 근데 영국에서 만 16세 이상과의 성관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37] 출처.[38] 애슐리 콜이 2014년 겨울에 이를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 이때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태업한 선수단에게 선수 모두를 해고하는 것보다는 감독을 교체하는 게 품이 덜 들기 때문에 너네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며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다음 차례는 너네들이다'가 요지인 발언을 했다고 한다.[39] 다만 테리는 첼시의 주요 선수들의 권력이 감독 이상 아니냐는 루머는 늘 부정한다.[40] 2016-17 시즌에 무리뉴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주고 받은 것을 보면 무리뉴와의 관계에는 문제 없는 것으로 보인다.[41] 대부분은 오스카로 추정한다.[42] 지소연 선수가 있는 그 팀이다.[43] 캐러거는 앙리한테 탈탈 털렸던 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