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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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문제점
2.3. 차별적인 사회구조의 호도
2.4. 소수자 권리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음
3. 여담
4. 외부 링크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아~억울하면 출세를 해라 출세를 해라

김용만, 회전의자 中

/ respectability politics

사회적 약자나 개인이 주류 사회의 잣대로 '존중받을 만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의미한다. 소수자 스스로가 그것을 갈구하는 것도 포함된다.

존경성 정치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노력하면 사회의 차별도 극복해 성공할 수 있다거나 혹은 차별 피해를 차별의 피해자나 피해자 정체성에게[1] '존중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결과라며 책임전가하는 것 등이 있다.

고정된 정체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와 혼동될 수 있다. 그러나 존경성 정치는 강자 정체성이 약자 정체성에게 자신의 정체성이 올바르다고 강조하거나 약자 정체성이 강자 정체성의 그런 수사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문제점[편집]



2.1. 피해자 비난[편집]


존경성 정치가 내재화된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나 폭력 피해자와 관련된 사건이 전반적인 그 피해자가 속한 집단 구성원이나 사회의 편견 때문에 발생한 경우 '피해자가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혹은 피해자가 문제적 행동을 보여서)라고 책임전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 흑인의 빈곤 및 차별 문제의 원인을 흑인들의 '천성'('게으름' 등)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노예제[2]와 같은 근본적인 원인은 “옛날 일이니까 더 이상 해당 사항이 없다”고 얼버무리는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일어났는데 차별 자체를 비난하지 않고 무슬림에 의한 테러 때문이라며 차별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나 피해자의 정체성을 탓하는 경우도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위에서 언급한 흑인이나 무슬림 같은 케이스도 이에 속하지만 학교로 치자면 집단괴롭힘이나 왕따를 당했는데 일부 교사가 시덥잖은 이유를 정당화하며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피해자 탓을 하는 것도 존경성 정치에 속한다. 왕따 가해자들과 왕따에 가담한 반 아이들이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 집단과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을 무시하고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2차 가해 행위인 셈.


2.2. 이중잣대[편집]


게이와 레즈비언이 자신들의 성적 성향을 밝히고 고용된 경우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과시하지' 말라는 미묘한 요구를 들을 수 있다. (중략) 게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게이 남성도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신 자신의 파트너를 공식적인 행사에 데려오거나 그를 자신의 파트너라고 소개하지 못한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pp.530-531.


존경성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이중잣대인데, 다수라면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내용도 소수자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일탈적 또는 비정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타쿠혼모노라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공사(公私) 개념이 없거나,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여기서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것이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존경성 정치에 기반한 이중잣대일 수 있다. 이는 "성소수자의 '사적인' 영역을 보호해 주자"는 취지의 법이었던 DADT와 유사한데, 뒤집어 보면 동성애가 사적 영역에서는 허용되더라도 군대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행위이므로 감춰야 하며 금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3]

즉, 아무리 '대중적인' 성적 지향이나 취미라도 도가 지나치면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것인데,[4] 소수자가 '단지 다수와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인' 경우에도 '일탈'로 본다면[5] 이는 일종의 차별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중잣대'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자체로 일탈이며, 존경받지 못할 일'이라는 존경성 정치의 일환이다.

그러나 이 '이중잣대'도 일관적이지 않은 것이, 그 '소수자성'도 권력 등이 결합되면 소수자성은 오히려 우월의 기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사투리'는 '표준어'에 대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대통령부터 당당하게 '강간 여행'[6], '갱제 부할', '학실히(확실히)' 를 외쳤으며, 경상도 사투리는 듬직하고 사나운 기호로 설정되고, 전라도 사투리는 뭔가 음습하고 껄렁껄렁한 기호로 설정되었다.[7] 기타 성소수자나 이주민의 경우에도 잘 생기거나 예쁜 경우, 또는 돈이 많거나 똑똑한 경우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매력이 된다. 즉 식별 가능성이 권력의 열세와 연결되는 경우, 이들의 차이는 바로 차별대우의 대상이 된다.


2.3. 차별적인 사회구조의 호도[편집]


이봐, 백인이 걸어갈 수 있는 데를 흑인이 가려면 날아가야 돼. (중략) 흑인 치과의사가 우리 옆집으로 이사오려면 뭐 해야 하는지 알아? 씨발, 이빨을 발명해야 될걸?[8]

-크리스 락,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상사: 엔지니어의 머리가 있으면 엔지니어가 돼야 해. 평생 계산직에 있으면 안 돼.

메리: 전 흑인 여성이에요. 불가능한 꿈을 꾸긴 싫어요.

상사: 하나 물어보지. 자네가 백인 남성이었어도 엔지니어를 꿈꿨을까?

메리: (잠깐 생각하다) 그럴 필요가 없죠. 벌써 됐을 테니까요.

-《히든 피겨스》中


존경성 정치의 가장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가 "사회는 관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을 없애고 싶으면 (주류)사회에 반항하기 보다는 재능을 살리거나 노력을 해서 성공하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차별을 없애기 힘들다.

실제로 개천 용이 등장하기에 사람들은 시스템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체계는 더 공고화된다. 기득권층은 옆자리에 얼굴마담 자리 하나를 마련해두고, 수많은 사람에게 말한다.

"당신들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

모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우리는 리더가(비록 부패했을지라도)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다. 때문에 소수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노력만 하면, 언젠가는 사회가 알아봐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누구도 사회체제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모두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는다.

그래서인지 인간 승리자인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나 개천 용이 된 사람 중에는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기존 기득권보다 더 보수적으로 구는 사람도 많다. 이른바 명예 백인, 명예 남성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생해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받은 대가가 정당하다고 여기고, 현재의 시스템을 신봉한다.[9]

그러나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약자들은 어떨까? 위 히든 피겨스의 경우, 백인 남성이라면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적당히 교육 받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고, 운이 좋으면 NASA에 취업할 수도 있다. 반면 평범한(캐서린 정도의 재능이 없거나, 있어도 그 사실을 몰랐을) 흑인 여성은 청소부나 웨이트리스 자리도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을 거다. 그 직업들이 하찮다는 게 아니다. 급여부터 모든 조건이 NASA 같진 않다는 말이다.

즉 흑인 치과의사가 (이빨을 발명하지 않아도) 백인 치과의사와 같은 동네에 사는게 이상하지 않고,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처럼 진작에 엔지니어가 됐어야 차별이 없는 것인데, 존경성 정치는 '흑인도 노력하면 치과의사가 될 수 있다!', '더욱 성공하면 백인 치과의사랑 같은 동네에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호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아래의 '소수자 권리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2.4. 소수자 권리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음[편집]


서민 계급 출신자는 모두 서민의 적으로 돌아서 그들을 압박한다.

-니콜라 샹포르(프랑스의 모럴리스트)


그리고 '억울해서 출세한' 이들이 있어도 소수자들의 '억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억울해서 출세한' 이들은 '출세해서' 더 이상 '억울하지 않고', "나도 출세했는데 너희들은 왜 출세를 못 하는가? '노오력'이 부족해서이다!"라는 식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주장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소수자라고 모두 이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그쪽 분야에서 리더가 됨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야망과 이기심도 겸비한 경우가 많은데, '억울해서 출세한' 자신이 출세한 결과로 얻은 열매를 다른 소수자와 나눈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선 진짜 '억울할' 수 있다. 둘째, 아무리 성공했어도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이 소수자에게 '성공'이란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데, 소수자가 자신의 성향을 '과시'하면 그나마 받고 있던 인간다운 대우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 이러한 점에서 세계적 기업 애플의 CEO인데도 불구하고 커밍아웃을 한 팀 쿡은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한다. 커밍아웃 동기가 “만약 애플 CEO가 게이라는 사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고 외로운 사람이 위안과 격려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생활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타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에서 소수자 중 성공한 이들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소수자의 하한선(문턱)'을 높이는 결과가 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 유대인을 들 수 있다. 미국 유대인들은 이주 당시 비교적 빈곤하고 차별받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열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지만, 그렇다고 미국 유대인들이 다 성공한 부자인 것도 아니다. 아직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식비가 부족해서 유대교 단체의 지원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상황에서 "미국 유대인들은 다 부자"라는 엉뚱한 편견이 퍼지고 가난한 서민 유대인은 돈이 많은데도 돈을 쓰지 않는 구두쇠로 매도당하는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 미국 이외의 사례를 들자면 네덜란드 극우파들이 모로코계 이민자들과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들을 비교하면서 모로코계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들은 상당수가 과거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이던 시절 식민 관료 혹은 그 혼혈 출신이고 오히려 일반적인 네덜란드인들보다 더 부유하고 교육받은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반이민 극우파들은 두 집단 평균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한 쪽은 네덜란드 사회에 잘 적응하는데 다른 편은 네덜란드 사회에 적응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스라엘 우파들은 자국의 아랍인 차별 문제를 팔레스타인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며 그 근거로 자국 내 극소수 체르케스인 혹은 무슬림 시오니즘 지지자들의 입장을 홍보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상황 하에서는 모범적 소수에 해당되는 체르케스인 공동체 역시 이스라엘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 내 이국적인 특이한 소수자 이웃으로 포장되는(즉 이스라엘 평균보다 더 높은 학력 수준 등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는 모순이 반복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2008년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에서 명명하는 법적 용어, ‘다문화가족’의 실질적 대상자인 국제결혼가정 중심의 ‘다문화’라는 ‘이름표 붙이기(labeling)’는, 한국사회에서 용인하는 소수자와 용인하지 않는 소수자를 구분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용인하는 소수자를 매개로 다수자 중심의 위계구조를 형성하며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 중에서 더 힘이 없는 약자-이를 테면, ‘집단화되지 못한 소수자’(전영평, 2007: 112)-를 방관하고 배제하는 구조를 만들어내었다.[10] 즉 '우리의 이웃'이 되어야 할 '우리 주변의 외국인'이 '우리'가 되지 못하고 주변화되어 '주변의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장애인을 소재로 한 인스피레이션 포르노가 있다.

결국 소수자의 '성공'은 결과적으로는 '성공'이 아니라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며, 이로 인해 차별적인 사회구조는 더욱 공고해진다.

물론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제대로 대우받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력은 이 영화(히든 피겨스)처럼 감동적이다. 하지만 사회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으려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주류의 인정을 받아야만 소수자가 인간다운 대우를 받는다면, 정말 사회가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11]


2.5. 분할통치[편집]


소수자, 약자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고 수평폭력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분할통치 전략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정신장애인 중 일부가 '자신들은 착한 정신장애인'이며 사고를 저지르는 정신장애인들은 '나쁜 정신장애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신장애인이 사고나 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차없이 제재를 가하거나 엄벌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한 예이다.

혹은 오타쿠 내부에서 능덕씹덕을 나눈다거나, 성녀-창녀 이분법에 빠진다거나, 남성 집단을 도태남, 인셀알파메일로 나누는 등 굉장히 다양하게 활용 가능하다.

대학 사회 등에서 '등록금 투쟁을 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공부해서 쟤네처럼 장학금을 타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논리를 펴는 것도 비슷한 사례에 해당한다.


3. 여담[편집]


  • 일부 우파 측에서는 버락 오바마정체성 정치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되었다고 비판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오바마는 반대로 존경성 정치에 기반한 정치를 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가령 오바마가 미국 흑인 사회 내 평균적으로 저조한 교육열을 지적하며 흑인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주변 흑인 또래 학우들이 "저 녀석은 재수없게 백인이나 아시아인을 따라한다"며 따돌리는 현상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해당 발언에 대해서는 관점마다 평가가 다르다.


4. 외부 링크[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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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뿐만 아니라 굉장히 넓은 범위를 포함할 수 있다. 찐따 같은 표현 역시 여기의 사례에 해당할 수 있다.[2] 노예노동 자체가 맞기 싫어서 대충 눈치보며 일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이로 인해 초창기 흑인 문화에 노예제 시절 유입된 패배주의가 완전히 개선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왔다.[3] 박경태, 「인권과 소수자 이야기: '우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책세상, 2007, p. 92. 이 책이 나올 당시에는 DADT가 시행 중이었기 때문에 원문의 시제는 현재형이었다.[4] 예를 들어 축구에 관심이 없는 승객에게 축구 이야기를 하는 택시 운전원이라든가, 공공장소에서 지나친 애정표현을 하는 커플이라든가.[5] 예: 이성 커플의 경우라면 대놓고 야외섹스를 하지 않는 이상 기껏해야 "아주 방을 잡아라"라고 눈총을 받을 뿐이지만, 동성 커플의 경우 평범한 이성커플처럼 행동하면 주변인들의 험악한 시선이나 혐오행위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또한 만일 자습 시간에 성경을 읽고 있었다면 웬만해선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문제삼더라도 '신앙심이 깊은 건 좋지만 성경책은 끝나고(교회에서) 읽으렴' 정도의 가벼운 훈계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소수 종교인 이슬람 경전 쿠란을 읽고 있었다? 테러 교본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6] 실제로 '관광'을 '강간'으로 발음해 신문에 언급된 적은 없다. 기록으로 나타나는 건 당시 발간된 유머집이 유일하다.[7] 김슬옹,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저놈을 매우 쳐라」, 다른우리, 225-226쪽[8] 록의 거주지는 미국 뉴저지 주 앨파인(Alpine)이라는 지역인데, 이곳에 사는 백인은 평범한 치과의사 정도의 중산층인 반면 흑인은 에디 머피, JAY-Z, Mary J. Blige, 그리고 2005년 제 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회를 볼 정도의 유명한 연예인인 자기밖에 없다고 농담을 한 바 있다.[9] 오후,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사우. 34쪽[10] -양영자. (2015). 한국 다문화교육에서의 ‘모델 마이너리티’ 경향 고찰. 다문화와 평화, 9(3), 44-75.[11] 오후,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