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왕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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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1.1. 개요
1.2. 이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유
1.3. 사례
1.4. 후일담
2. 일본



1. 중국[편집]



1.1. 개요[편집]


尊王攘夷

춘추시대춘추오패패자들이나 방백들이 주변의 여러 나라를 휘어잡으면서 쓰던 명분이자 레퍼토리. 뜻은 을 떠받들어 오랑캐들을 물리친다는 당시 중국 기준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명분이라 춘추시대 이후로도 계속 우려먹혔다.[1]


1.2. 이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유[편집]


병권을 다 쥐고 왕을 제멋대로 흔들면서도 충신 행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춘추시대 특유의 역사적 상황에서 기반한다. 일단 춘추시대주나라유왕 이후 권위가 많이 떨어졌으나 여전히 중원의 제후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주나라의 힘이 약간이나마 남아있었고,[2] 진나라 등 주나라를 도와주는 제후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3] 그러나 이것은 다소 명분론적이고 피상적으로 보일 수 있어서 보충하자면,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경제력이 많이 발전하지 못했거나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가 발달하지 못한 국가에서 나오는 정치 형태다.[4] 그 봉건제 체제 내에서 나라들이 서로를 침탈했고, 그 과정에서 상실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주나라의 질서체계를 무시해가면서, 다른 나라를 병탄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던 것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중화사상이 있었는데, 북쪽 이민족은 북적, 남쪽 이민족은 남만, 서쪽 이민족은 서융, 동쪽 이민족은 동이라고 하였다.[5] 이들은 당시 중국에 위협이 되었다.[6] 그 이유는 서융의 경우 견융족이 주나라를 쳐서 호경에서 낙읍으로 동천하게 만들었고, 북적의 경우는 위(衛)나라를 멸망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왕을 받든다고 하면 명분 상으로 상당히 그럴듯하고 멋지게 보이는 주장이었다.


1.3. 사례[편집]


정환공유왕을 모시고 호경에서 낙읍으로 피신하면서, 견융족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 제환공관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나라 천자를 받들어 모시면서, 당시 이민족인 고죽국을 정벌하고, 위나라를 침략해 위의공을 죽이고 멸망에 이르게 한 북적의 일파인 적족 또한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7] 그리고 진문공은 당시 오랑캐로 분류되었던 초나라를 박살냈으며, 그 전에 주나라 천자인 양왕의 아우로서 당시 형을 몰아낸 아우인 희대를 토벌하였다.

이들 이후부터는 주나라의 권위가 점차 약해졌기 때문에 존왕양이 관련한 이렇다 할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1.4. 후일담[편집]


이 명분이 전근대 중국 기준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인 명분론이었기 때문에 혼란기에 군벌들이 자주 내세운 레퍼토리였고, 유교에서는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였다.[8]

후대에는 봉건제가 없어졌고,[9]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후로서가 아닌 지방관으로서 혹은 대신으로서 집행한다는 식으로 현실에 맞게 변화하였다.


2.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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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록 말로는 내세우지 않아도 행동으로 적극 실천한 사례가 바로 삼국지조조. 오환족을 직접 공격하여 답돈을 죽이고, 하후연을 시켜 강족을 토벌했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황제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즉, 황제의 명을 받들어 너희들을 손봐주겠다는 것.[2] 대표적으로 진나라와 곡옥의 내전에 개입한 것.[3] 애당초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을 보면 주나라와 같은 희성의 국가들도 많았다. 주요 국가를 기준으로 봐도 노나라, 연나라, 오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 진나라, 채나라가 주나라의 동성 제후국이었다.[4]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럽게르만족의 부족제를 기반으로 로마의 제도를 실정에 맞게 받아들여 봉건제를 실시한 바가 있다. 단 중국과는 다른 점이 혈연이 아닌 쌍무적 계약관계를 기반으로 하며, 그 외에도 세세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자세한 건 봉건제 문서를 참고하자.[5] 동이족을 꼭 한민족만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 입장에서 동쪽 이민족은 다 동이라 불렀다.[6] 남만의 경우는 주로 초나라를 일컫는다.[7] 다만 이것은 위의공이 을 너무 좋아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이 적지 않다.[8] 유교에서 중화사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중 평천하 덕목에 들며, 존왕사상은 충으로 포장되었다.[9] 단, 분봉하는 형식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실권은 없고, 경제적 이익만 주었다.